오피니언전문가칼럼
[민태기의 사이언스토리] 1초에 100경 번 연산하는 수퍼컴퓨터… 그 시작은 여성 ‘컴퓨터’였다
조선일보
민태기 에스앤에이치연구소장·공학박사
입력 2024.02.26. 03:00업데이트 2024.02.26. 06:10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4/02/26/WWDVHOWRENHN3MQEKPB76EUQK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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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전자 컴퓨터 에니악, 여성 ‘컴퓨터’들이 진공관 오류 수정하며 완성
진공관 트랜지스터로 대체되고 수퍼컴퓨터 등장… 신약 개발 등에 필수
계산 과학 이끈 여성들, 당대 평가 인색했지만 엔비디아 칩에 이름 남아
세계 최초 전자식 범용 컴퓨터인 애니악을 작동시키고 있는 여성 ‘컴퓨터(계산하는 사람)’들. /미국 국립 문서 보관소
2023년 노벨물리학상은 아토초(attosecond) 영역에서 빛 펄스를 만든 과학자들에게 돌아갔다. 아토초는 0.000000000000000001초, 즉 100경(京)분의 1초를 말한다. 원자 안에서 전자의 움직임이나 DNA 복제, 신경 신호 전달이 이 순간에 일어난다. 그런데 이 짧은 아토초의 순간에 최신 수퍼컴퓨터는 1회 이상의 계산을 수행한다. 1초에 무려 100경 회가 넘는 연산을 하는 셈인데, 이렇게 엄청난 속도로 컴퓨터가 발전한 배경에는 손으로 하던 계산을 과학기술로 대체하던 역사가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여성이 있었다.
영화 ‘히든 피겨스’는 여성 수학자들이 우주선의 궤적을 예측하기 위해 복잡한 계산을 하는 것을 보여준다. 계산(compute)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들을 컴퓨터라고 불렀는데, 오랫동안 컴퓨터는 여성의 직업이었다. 여성들이 육체노동으로 받는 임금이 남성보다 적은 이유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여성들의 계산 실력이 훨씬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1759년 핼리 혜성의 귀환 날짜를 정확히 계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컴퓨터 니콜-레인 르포테(Nicole-Reine Lepaute) 역시 여성이었고, 20세기 초 미국 하버드대학 천문대 컴퓨터였던 헨리에타 레빗(Henrietta Swan Leavitt)은 별까지 거리를 계산하는 방법으로 빅뱅 이론의 토대를 만들었다.
그래픽=박상훈
여성 컴퓨터들은 계산만 잘한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 컴퓨터라고 불리는 계산기를 작동시키는 프로그램 코딩도 이들 손에서 이루어졌다. 최초의 기계식 컴퓨터는 19세기 영국 수학자 찰스 배비지가 제작했지만, 이를 동작시키는 프로그램은 에이다 러브레이스(Ada Lovelace)가 만들었다. 시인 바이런의 딸인 그녀는 인류 최초의 프로그래머였다. 나중에 전자식 컴퓨터가 등장하자 코딩의 기초가 되는 컴파일러(번역 프로그램)를 만든 것은 여성 수학자 그레이스 호퍼(Grace Hopper)였다. 예일대 박사로 대학 교수였던 그녀는 2차 대전이 일어나자 36살의 나이로 해군에 자원입대해서 코딩의 초기 역사를 개척했다. 그녀가 만든 용어 중에는 ‘버그’가 있다. 계산기 오작동을 조사하다가 기계에 끼인 벌레(bug)를 발견하고 붙인 이름인데, 이후 프로그램 오류를 수정하는 작업을 디버깅이라 부르게 된다.
2차 대전때는 탄도 계산 수요가 급증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 연구소의 경우는 미군의 요청으로 무려 200명의 여성 컴퓨터가 고용되었지만 계산은 늘어가기만 했다. 1943년 이 연구소는 이들의 계산 능력에 상응하는 기계를 개발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첫 전자식 범용 컴퓨터 에니악(ENIAC)이다. 1만8000개의 진공관으로 작동하는 이 장치를 작동시킨 것은 여성 컴퓨터들이었다. 하드웨어는 남성들이 만들었지만 30톤이 넘는 이 육중한 기계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여성 컴퓨터가 진공관을 디버깅하며 만든 프로그램으로 1946년 에니악이 완성되었다. 이때 성능을 표현하기 위해 등장한 단어가 킬로걸스(kilo-girls), 즉 천 명의 여성 컴퓨터가 계산하는 속도라는 뜻이다.
에니악의 등장 이후 진공관이 트랜지스터로 대체되어 계산기 성능이 급속히 상승하자 더 이상 킬로걸스로 표현하기가 힘들어진다. 특히 1965년 최초의 수퍼컴퓨터 CDC6600이 가동하면서 더 이상 인간의 계산 속도와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해졌다. 이때 등장한 용어가 플롭스(FLOPS, FLoating point Operations Per Second), 즉 1초에 몇 번의 연산을 수행하는지로 바뀌었다. 에니악은 1초에 500번 계산할 수 있었지만, CDC6600은 3메가(mega)플롭스, 즉 1초에 3백만 번이나 계산했다. 이후 크레이(Cray)라는 걸출한 수퍼컴퓨터 제작사가 나오면서 계산 속도는 1초에 10억 번 이상 연산을 수행하는 기가(giga)플롭스를 넘어서는 시대가 열렸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빠른 수퍼컴퓨터는 크레이가 만든 프런티어로 빠르기는 1.2 엑사(exa)플롭스이다. 엑사는 10억의 10억 배, 즉 100경을 뜻하니, 이 컴퓨터는 에니악에 비해 2400조 배 빠르고, 최초의 수퍼컴퓨터 CDC6600보다도 4000억 배가 빠르다. 이렇게 빨라진 수퍼컴퓨터는 수많은 연립방정식을 풀어 경제개발모델을 성공시켰고,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도 가능하게 했으며, 핵실험을 대체했고, 항공우주 비행체와 엔진을 시뮬레이션하기도 했다. 현재는 단백질 합성과 신약 개발, 기상 예측 등에 필수 도구가 되어 우리 일상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지난 2월 11일은 세계 여성 과학인의 날이다. 과학 분야에서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개선하기 위해 2015년 유엔이 지정한 날이다. 계산 과학을 이끈 여성 컴퓨터들 역시 당대의 평가는 인색했지만, 오늘날 여러 곳에서 그들을 기리고 있다. 르포테는 소행성 7720과 달 분화구 이름으로 남아 있고, 레빗의 이름도 소행성 5383과 달 분화구에 새겨졌다. 미국 국방성은 에이다의 이름을 붙인 프로그램 언어를 개발했고, 그레이스 호퍼는 해군 제독의 위치에 올랐다. 수퍼컴퓨터 제작사 크레이는 호퍼의 이름을 딴 수퍼컴퓨터를 만들었고 엔비디아 역시 고성능 칩에 그녀의 이름을 붙였다. 에니악을 가동한 여성 컴퓨터들은 1997년 국제 여성 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2008년에는 컴퓨터 역사박물관 특별상을 받았고, CNN은 2011년 이들의 이야기를 특집으로 다루었다.
임병육
2024.02.26 07:28:24
헌액되다라는 이상한 한자어를 누군가 만들어서 그 제자들이 줄기차게 유지하는것 같은데 다른 말로 바꾸는게 맞을것 같다. 명예의 전당에 오르다 가 더 자연스러워 보이는데 굳이 잘 쓰지도 않는 한자를 조합해서 헌액이라고 하니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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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샘
2024.02.26 08:50:31
컴퓨터 발전에 여성들이 이렇게 많이 개입되어 있었다니 처음 보는 신선한 기사입니다. 플롭스는 부동소수점 연산단위입니다. 컴퓨터에선 지수처리까지 소수점이 떠다니는 형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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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현
2024.02.26 06:05:43
무슨 플롭스, 무슨 플롭스 난해하게 적지말고 '1을 기준으로 현재 얼마인지'로 적었더라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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