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연(金炳淵)이 삿갓을 쓰고 방랑시인이 된 내력
조선 순조11년(1811년) 신미년에 홍경래(1780-1812)는
서북인(西北人)을 관직에 등용하지 않는 조정의 정책에 대한 반감과 탐관오리들의 행악에 분개가 폭발하여 평안도 용강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홍경래는 교묘한 수단으로 동지들을 규합하였고,
민심의 불평 불만을 잘 선동해서 조직한
그의 반란군은
순식간에 가산, 박천, 곽산, 태천, 정주등지를
파죽지세로 휩쓸어 버리고 군사적 요새지인 선천으로 쳐들어갔다.
이 싸움에서 가산 군수 정시(鄭蓍)는 일개 문관의
신분이었지만 최후까지 싸워서 비장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한편 김병연의 조부 김익순(金益淳)은 관직이
높은 선천 방어사였다.
그는 군비가 부족하고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음을
낙심하다가,날씨가 추워서 술을 마시고 취하여 자고 있던 중에 습격한 반란군에게 잡혀서 항복을 하게 된다.
김익순에게는 물론 그 가문에도 큰 치욕이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고 하지만
국법의 심판은 냉혹하여서,이듬해 2월에 반란이 평정되자 김익순은 3월 9일에 사형을 당하였다.
그 난리 때 형 병하(炳夏)는 여덟 살,
병연은 여섯 살, 아우 병호(炳湖)는 젖먹이였다.
마침 김익순이 데리고 있던 종복(從僕)에
김성수(金聖秀)라는 좋은 사람이 있었는데
황해도 곡산에 있는 자기 집으로 병하,병연 형제를 피신시키고 글공부도 시켜 주었다.
그 뒤에 조정의 벌은 김익순 한 사람에게만 한하고,
두려워하던 멸족(滅族)에는 이르지 않고 폐족에
그쳤으므로 병하, 병연 형제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김병연의 가족은 서울을 떠나 여주,
가평으로 이사하는 등
폐족의 고단한 삶을 살다가 부친이 화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홀어머니 함평 이씨가 형제를 데리고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삼옥리로 이주하였다.
김병연이 스무 살이 되던 1826년(순조 32년),
영월 읍내의 동헌 뜰에서 백일장 대회 시제(詩題)인
'논정가산 충절사 탄김익순 죄통우천'
(論鄭嘉山 忠節死 嘆金益淳 罪通于天)을 받아 본 그는 시상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정의감에 불타는 그의 젊은 피는
충절의 죽음에 대한 동정과 찬양을 아끼지 않았고,
김익순의 불충의 죄에 대하여는
망군(忘君), 망친(忘親)의 벌로 만 번 죽어도
마땅하다고 추상같은 탄핵을 하였다.
김병연이 이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날,
어머니가 그 동안 숨겨왔던 집안의 내력을 들려 주었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명문거족이었다.
너는 안동 김씨의후손이다.
안동 김씨 중에서도 장동(壯洞)에 사는 사람들은
특히 세도가 당당했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그들을 장동 김씨라고 불렀는데
너는 바로 장동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네가 오늘 만고의 역적으로 몰아 세워 욕을 퍼부은,
익자(益字) 순자(淳字)를 쓰셨던 선천 방어사는 네 할아버지였다.
너의 할아버지는 사형을 당하셨고
너희들에게 이런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느라고
제사 때 신주를 모시기는커녕 지방과
축문에 관직이 없었던 것처럼 처사(處士)로 써서 너희들을 속여 왔다...
병연은 너무나 기막힌 사실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반란군의 괴수 홍경래에게 비겁하게 항복한
김익순이 나의 할아버지라니...
그는 고민 끝에 자신이 조부를 다시 죽인 천륜을 어긴 죄인이라고 스스로 단죄하고,
뛰어난 학식에도 불구하고 신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삿갓을 쓰고 방랑의 길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집문당 발행 <방랑시인 김삿갓 시집> 참조
대대로 임금을 섬겨온 김익순은 듣거라.
정공(鄭公)은 경대부에 불과했으나
농서의 장군 이능처럼 항복하지 않아
충신 열사들 가운데 공과 이름이 서열 중에 으뜸이다.
시인도 이에 대하여 비분강개하노니
칼을 어루만지며 이가을날 강가에서 슬픈노래부른다.
선천은 예로부터 대장이 맡아보던 고을이라
가산 땅에 비하면 먼저 충의로써 지킬 땅이로되
청명한 조정에 모두 한 임금의 신하로서
죽을 때는 어찌 두 마음을 품는단 말인가.
태평세월이던 신미년에
관서 지방에 비바람 몰아치니 이 무슨 변고인가.
주(周)나라를 받드는 데는 노중련 같은 충신이 없었고
한(漢)나라를 보좌하는 데는 제갈량 같은 자 많았노라.
우리 조정에도 또한 정충신(鄭忠臣)이 있어서
맨손으로 병란 막아 절개 지키고 죽었도다.
늙은 관리로서 구국의 기치를 든 가산 군수의 명성은
맑은 가을 하늘에 빛나는 태양 같았노라.
혼은 남쪽 밭이랑으로 돌아가 악비와 벗하고
뼈는 서산에 묻혔어도 백이의 곁이라.
서쪽에서는 매우 슬픈 소식이 들려오니
묻노니 너는 누구의 녹을 먹는 신하이더냐?
가문은 으뜸가는 장동(壯洞) 김씨요
이름은 장안에서도 떨치는 순(淳)자 항렬이구나.
너희 가문이 이처럼 성은을 두터이 입었으니
백만 대군 앞이라도 의를 저버려선 안되리라.
청천강 맑은 물에 병마를 씻고
철옹산 나무로 만든 활을 메고서는
임금의 어전에 나아가 무릎 꿇듯이
서쪽의 흉악한 도적에게 무릎 꿇었구나.
너의 혼은 죽어서 저승에도 못 갈 것이니
지하에도 선왕들께서 계시기 때문이라.
이제 임금의 은혜를 저버리고 육친을 버렸으니
한 번 죽음은 가볍고 만 번 죽어야 마땅하리.
춘추필법을 너는 아느냐?
너의 일은 역사에 기록하여 천추만대에 전하리라.
▲김병연(金炳淵) 방랑시인 김삿갓의 초상화
▲방랑시인 김삿갓의 묘
▲방랑시인 김삿갓의 묘
김삿갓 계곡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에 있는 김삿갓계곡
지날 때마다 나무로 참 정교하게 조각해 놓았다고 느꼈던
삿갓할아버지가 입구에 서서 반갑게 맞아 주었다.
오른편엔 명국환이 부른
'방랑시인 김삿갓' 노래비가 있다.
죽장에 삿갓쓰고 방랑 삼천리 흰구름 뜬 고개넘어 가는객이 누구냐 열두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술한잔에 시한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바윗틈을 돌아나와 옥동천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김삿갓 계곡. 여름철이면 피서객으로 붐비는 곳이다.
미국쑥부쟁이 길가 너른 밭에 한가득 안개꽃처럼 잔잔하게 피어 구름같다.
옛날 이 마을에서 태어난 아기 장수가 힘자랑을 하기 위해 집채만한 이 바위를 들어서 작은 바위 위에다 올려놓았다 해서 '든돌'이라 하고 마을을 '든돌마을'이라 부른다.
삿갓으로 하늘을 가리고 평생을 떠돌아다닌 방랑시인 김삿갓! 그의 일가가 살던 집터와 묘소가 이곳에서 발견된 것은 1992년이다.
김삿갓(1807~1863)의 본명인 김병연이 다섯살 때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고, 당시 선천 부사였던 그의 조부 김익순은 홍경래군에게 항복하였고
이듬해 난이 평정된 후 김익순은 처형당하고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영월군 와석리 깊은 산중에 숨어살게 되었다.
김병연이 20세 되던 해인 1827년 영월 동헌에서 열린 백일장에서 할아버지의 행적을 모르고 있던 그는 김익순의 죄상을 비난하는 글을 지어 장원급제를 하게된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로부터 숨겨왔던 집안내력을 듣게 되었고 역적의 자손이라는 것과 조부를 비판하는 시를 지어 상을 탄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하늘이 부끄러워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했던 그는 아내와 아이와 어머니를 가슴아픈 눈물로 뒤로하고 방랑의 길을 떠났으니...
삿갓으로 하늘을 가린 채 세상을 비웃고 인간사를 꼬집으며 정처없이 방랑하던 그는 57세 때 전남 화순땅에서 객사하여 차남이 이곳 와석리 노루목에 모셨다 한다.
漂浪一生嘆 (표랑일생탄)
새도 집이 있고 짐승도 집이 있어 모두 거처가 있건만 거처도 없는 내 평생을 회고해보니 이내 마음 한 없이 서글프구나 짚신신고 죽장 짚고 가는 초라한 나의 인생여정 천리길 머나 먼데
김삿갓이 여러 고을을 방랑하던 중 한 서당에 도착하게 되어 물이나 한모금 얻어마실까 하였는데 훈장이 김삿갓의 용모를 보고 대꾸도 안하자 그 즉석에서 지은 한시를 보면 얼마나 한문을 자유로이 다루었는지 짐작이 간다.
書堂乃早知 서당내조지 學童諸未十 학동제미십 房中皆尊物 방중개존물 訓長來不謁 훈장내불알
서당에 당도했으나 (내가 온것을) 일찍 알아차리지 못하였구나. 배우는 아이들이 모두 열이 채 안되고, 방 안에 있는 물건들은 모두 존귀하구나. 훈장이 나와서 (나를) 내다보지도 아니하는구나.
각박한 인심을 풍자하며 파격적인 한시를 쓴 그는 서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을 것 같다.
二十樹下三十客 四十家中五十食 人間豈有七十事 不如歸家三十食.
스무(二十) 나무 아래 서러운(←설흔) 나그네, 망할(←마흔)놈의 집에서 쉰(五十) 밥을 먹는구나, 인간 세상에 어찌 이런(←일흔) 일이 있는가. 차라리 집에 돌아가 설은(←서른) 밥을 먹으리.
김삿갓 묘소로 들어가는 계곡 길가
구절초 꽃밭에 구절초가 피기 시작하여
자신들의 계절이 왔음을 알리고 있다.
계곡이 크지는 않지만 절벽처럼 높이 솟은 바위산과
맑은 물로 마음을 잡았다.
我向靑山去 (내 청산을 향해 가거늘) 綠水爾何來 (녹수야 너는 어디서 오느냐)
동그란 강돌을 주워다 정성스럽게
쌓은 탑들이 여기 저기 보인다.
파격시(破格詩)
하늘은 멀어서 가도 잡을 수 없고 꽃은 시들어 나비는 오지 않네.
국화는 찬 모래밭에 피어나고 나뭇가지 그림자가 반이나 연못에 드리웠네.
강가 정자에 가난한 선비가 지나가다가 크게 취해 소나무 아래 엎드렸네.
달이 기우니 산그림자 바뀌고 시장을 통해 이익을 챙겨 오네.
뜻으로 보면 자연을 누비던 자신이 술에 취해 있는 것을 읊은 것이지만, 글자를 우리말 음으로 읽으면 돈이 없어 세상에 버려질 수밖에 없는 '가난'의 참상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竹詩 죽시
이대로 저대로 되어가는 대로 바람 치는 대로 물결 치는 대로,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이대로 살아가며
옳은 것 옳다 그른 것 그르다 저대로 부치세. 손님 접대는 가세(家勢)대로 하고 시정(市井) 매매는 시세대로 하세, 모든 일이 내 마음대로 하는 것만 못하니
그러면 그렇지 그런세상 그렇게 지나가네.
영월 시내에서 단양방면으로 약 20km쯤
깊은 계곡속으로 달려가면 김삿갓 계곡이 나온다.
너무나 맑고 청정한 계곡이라
묻혀서 살고싶은 충동을 금할 수가 없다.
난고 김삿갓(김병연)의 일생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어린시절 집안의 내력을 모르고 자라온 김병연이
홍경래의 난 때 항복한 조부 김익순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꾸짖는 글로 장원급제를 하지만
어머니로 부터 집안의 내력을 듣고는
하늘을 보기 민망한 죄인이되어
삿갓으로 하늘을 가리고 방랑생활을 하며
한잔술에 시한수로~~ 떠나가는 김삿갓의
외로운 한평생을 살게 되었다.]
그 시대를 꼬집는 시와
해학적인 시를 많이 남겼다.
과연 시대가 만들어낸 詩仙 이다.
어쩌면 타고난 역마살로 항상 방랑하고픈
우리네생활을 대변해 주는 듯 하기도 하다.
삿갓을 보면 쓰고 무작정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나만 그런가~~~~ㅋㅋㅋ
계곡 주변에는 김삿갓 시비가 많이 있다.
난고 김삿갓의 묘소
김삿갓 문학관 전경
김삿갓 문학관에 전시되어 있는 난고의 유품들이다. 그 유명한 삿갓
조금은 외설한 詩이지만 김삿갓다운 풍자를 담고 있다.
김삿갓(김병연)이 홍경래의 난 때 항복한 조부 김익순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꾸짖는 글로 장원급제를 했다는 답안 문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