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다시 원형을 꿈꾸는 은밀한 자아/문화 유적에 관한 몇 가지 생각

[박은숙]

다시 원형을 꿈꾸는 은밀한 자아
문화 유적에 관한 몇 가지 생각
	안병기(smreoquf2) 기자

비록 오라는 곳은 없지만 갈 곳은 많은 나그네가 바로 나라는 사람이다. 지난 주 경남 남해에서 2박 3일, 전남 여수와 거문도에서 2박 3일 꽤 긴 여행을 다녀왔다. 건대 사회교육원에서 풍수지리를 강의하는 김대환 선생과의 동행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남해와 여수의 곳곳을 누비는 호사를 누리게 해줬다.

여행지에서 마주치는 감정은 환멸이다. 환(幻)은 일어나는 감정이고 멸(滅)은 스러지는 감정이다. 환(幻)이 맨 처음 겪는 황홀한 감정이라면 멸(滅)은 맨 끝에서 겪게 되는 쓰디쓴 감정이다.

우리는 처음 여행을 간 곳에서 환(幻)을 맛보게 된다. 무하유(無何有)라, 세상 천지 어느 곳에 이보다 나은 풍경이 있을까 감탄하게 된다. 그러나 그때의 환(幻)을 맛보고 싶어 다시 찾아갔을 때 우리가 맛보게 되는 것은 원형이 크게 상실된 풍경을 바라보며 느끼는 쓰디쓴 멸(滅)이다.

개발과 보존이라는 상충된 과제 속에서 보존의 논리가 절박한 현실적 요구인 개발 충동을 누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요즘처럼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세상에서는 더욱 그렇다. 문제는 건드리지 않아도 좋은 곳까지 마구잡이로 손대버린다는 점이다.

특히 우리나라 문화재 담당자들의 손은 친절한 것인지 몰지각한 것인지 분간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는 '친절한 금자씨'가 너무 많은 게 탈이라고나 할까.

▲ 부여 궁남지 옆에 서있는 서동요비.

ⓒ 안병기

작년 8월, 7~8년만에 부여 지방을 다시 찾았다. 부여는 여전히 구태의연하기 짝이 없었다. 백마강을 오가는 유람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백마강 달밤>이란 노래도 여전히 잃어버린 옛날을 애달퍼하고 있었으며, 부소산의 석양은 쉬 늙을 줄 모르는  뽕짝의 청승에 맞장구를 쳐주기라도 하듯 애절하기만 했다.

부여는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궁남지 옆에 대규모 방죽을 파고나서 그 속에 연꽃을 가득 심었다는 것이 가장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이었다. "배보다 배꼽이 크다"는 말을 실감케해주는 풍경이었다. 정작 유적지인 궁남지는 곁방살이 신세로 전락한 듯 초라해 보일 정도였으니까.

궁남지 옆 서동요비가 서있는 자리 역시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어떻게 그곳이 서동과 선화공주가 일으켰던 얼레리하고 꼴레리했던 설화를 천년 동안이나 퍼뜨린 역사적 장소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몇년 전만 하더라도 산다화와 다북쑥과 잡초등이 어울려 나그네의 원초적 상상력을 자극하곤 했던 곳이었는데 말이다.

▲ 남해 가천마을 암수바위.

ⓒ 안병기

서동요비를 바라보면서 난 자동연상으로 남해 가천마을 암수바위를 떠올리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가천마을에 다녀온 것이 14,5 개월 정도 지난 것 같다. 그러나 얼마 전 다른 사람이 올린 사진으로 본 암수바위는 너무 말끔한 나머지 마치 최근에 새로 만든 유적지처럼 변해 있었다.

나는 유적이란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 주변의 자연적 요소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가천마을의 안개와 저녁 노을, 비, 바람마저도 유적을 이루는 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가천마을이 지닌 관광자원은 암수바위 혹은 다랭이 논 등 눈에 보이는 것에 한정지을 것이 아니다. 어쩌면 역사적 상상력이나 신화적 상상력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는 암미륵, 숫미륵이라고도 불리는 암수바위 앞에서 아들 하나 점지해주길 빌고 비는 가천마을 늙은 할망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으며, 다랭이 논 앞에선 석축을 쌓기 위해 어린 아이, 어른, 아낙 할 것 없이 돌을 나르던 울역의 풍경을 떠올릴 수가 있다. 역사 자료의 부족을 메꿔주는 건 인간에게 주어진 풍부한 상상력이다. 남해의 상징인 가천마을이 점점 제 고즈넉한 정서를 잃어가고 있는 듯이 보여져 안타깝기 그지없다.

나는 때때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아름다운 폐허'를 용납하지 못하는가를 생각하곤 한다. 허물어진 성을 다시 쌓는 것만이, 잡초 하나도 용납하지 못하는 청결함만이 문화유적을 사랑하는 길인지 의문을 품곤 한다. 허물어진 성터에서 역사의 상처를 아로새기고 무성한 잡초 속에서 삶의 덧없음을 느끼게 해선 안되는가. 삶의 덧없음을 통해서 왜 인간이 역사적 삶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되는지, 왜 불멸의 삶을 꿈꾸며 살아야 하는지를 곱씹어 보게 해서는 안되는 것인가.

'아름다운 폐허'는 영영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허물어진 성터는, 아직 손대지 않은 유적은  역사의 '향기'가 그대로 살아 있어 바라보는 이에게 깊은 맛을 던져준다. 자연적 요소를 배려한 자연스런 유적 관리가 그렇게도 어려운 일일까. 제대로 복원하지 못할 바엔 차라리 그대로 놔두는 게 원형을 보존하는 길인지도 모른다.

▲ 보물 209호 대전 동춘당 사당 지붕에 돋아난 와송(瓦松).

ⓒ 안병기

해마다 동춘당 문화제가 열리는 4월 말이면 보물 209호 동춘당 주변은 인파로 북적거린다. 올해는 동춘당 송준길 선생 탄생 400주년을 맞아 더욱 성대하게 치러졌다. 문화제가 열리기 전 동춘당 지붕이나 사당 지붕 위에선 수북하게 돋아난 잡초를 뽑느라 인부들이 부산하게 움직인다.

문제는 곱게 돋아나서 지붕에 고풍스런 맛을 느끼게 해주고 사진발을 잘 받게 해주는 와송마저 사그리 뽑아버린다는 데 있다. 와송은 놔두고  뽑으면 안되냐고 물으면 시에서 용역을 완수하지 못했다고 돈을 받지 못하므로 그럴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내가 들은 바로는 새 기와를 이고나서 8년이란 세월이 지나야 비로소 와송이 돋기 시작하는 걸로 알고 있다. 와송은 8년을 기다린 지붕이 꾸는 꿈의 결정체인 셈이다. 와송이야말로 저 지붕의 은밀한 자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인간의 자아만 은밀하다고 우김질할 수 있는가. 어쩌면 지붕 뿐 아니라 문화유적은 저마다 존엄한 자아를 숨기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문화 유적의 그 은밀한 자아가  아무런 이유없이 손상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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