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희곡집 '第十八共和國'을 낸 후, 이제 거의 십년만에 두 번째 희곡집을 내게 되었
다. 그간 많은 극을 썼다. 그러나 막상 희곡집을 내게되어 그 동안에 공연된 작품들을 다시
읽어보니 선뜻 만족할 만한 것이 없다. 여기에 수록된 여덟편의 작품도 내 스스로 자신이
있어 내놓은 것은 아니다. 그간 비교적 많이 공연되었고, 말이 오간것을 고르다 보니 자연
여덟편이 되었다. 연극의 발판이 제대로 마련되지 못한 상황에서 희곡을 쓴다는 사실이 맹
랑한 일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러나 모든 역경을 뚫고 고질적인 독선과 싸워가며, 이
땅에 연극을 정착시키기 위해 애쓰는 젊은 연극인들은 나에게 무한한 용기를 주었었다. 이
렇다할 경제적인 도움도 주지 못하는 희작에, 내가 전념할 수 있었던 것도 이들 젊은 연극
인들을 통해 연극계의 장래에 어떤 희망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수록된 작품
은 아벨만의 재판을 제외하고서는 희극(喜劇) 이다. 희극을 차선의 연극형태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풍토라, 꾸준히 희극을 발표하는 동안 오해도 많이 샀고, 비난도 받았다. 그러나 나
로서는 희극을 쓰는 이유가 뚜렷하다. 뿐만이 아니라, 관객석을 메운 관객들의 즐거운 반응
을 대할 때마다 나는 한국에 있어서의 희극의 중요성을 새삼 절감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는 비극(悲劇) 과는 달리, 희극이란 특히 연기자의 능력 여하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는 사실
도 체험하였다. 결국 연극이란 한 작품의 내용이나 그 질보다는 이를 소화하고 표현하는 연
기자와 연출가에 의해 형성된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들의 노고를 무엇보다도 앞세우
고 싶다. 이 보잘 것 없는 책을 내는데 도움을 준 진흥원과 선뜻 출판을 맡아 준 범한서적
주식회사의 김윤선 사장께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1976년 10월 저자
[페이지] F03
목차
머릿말--- 3
일요일의 불청객--- 7
광인들의 시찰--- 43
아벨만의 재판--- 77
유랑극단--- 113
30일간의 야유회--- 155
요지경--- 201
도깨비의 재판--- 233
만복장--- 273
낙수--- 304
[페이지] F04
일요일의 불청객
[페이지] 009
인물
설명역 (상무, 동회직들 겸역. 후에 사나이 역도 겸함)
이주몽 (삼칠. 보험회사의 과장)
사경자 (그의 처)
오충돌 (주몽의 후배)
김말숙 (싸롱 근무)
박교수
노인
(옛 잊었던 기억을 더듬게 해주는 조용하고 고운 음악이 깔리며 막이 오른다. 무대 좌측 한
구석에 파란 조명이 던져지며 다섯 등장 인물들의 모습을 잡는다. 조명이 이들의 상반신만
잡아 흡사 환영 속에 나타나는 인물과도 같다. 이들은 한덩어리가 되어 몸을 좌우상하로 움
직이며 마치 잔잔한 물결에 흘러가듯이 짧고 사뿐한 옆 걸음으로 움직인다. 이중 설명역을
맡은 인물이 서서히 앞으로 나와 관객에게 인사를 한다.)
[설명역] 우리는 환상의 세계에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환상세계에서 아무 형태도 없이 떠돌
아다니던 우리를 이렇게 형태를 갖춘 인간으로 만든 것은 극작가이며 우리를 불러 이 무대
에서 움직에게 만든 사람은 연출가입니다. 비록 환상세계에서 온 우리지만 무대에 선 이상
여러분들과 똑같은 현실의 인간으로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역이 주어졌습
니다. 일단 연극이 끝나면 우리는 다시 환상세계로 돌아가 인간의 형태를 풀어헤치고 마치
공기처럼 허공을 떠다니게 됩니다. 최소한 이 무대에 서는 한 우리는 여러분과 다름없는 현
실적인 인간으로서 행동을 합니다. 저는 이 연극에서 설명역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때에 따
라서는 몇 가지 역도 겸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럼 각자의 맡은 역할을 살펴보기로 하겠습
니다.
(설명역이 인물들을 향해 손뼉을 친다. 그들을 비치던 조명이 꺼지며 이주몽이 무대 좌측
전면에 있는 책상에 마주 앉는다. 테이블에는 주간지와 신문이 흩어져 있다. 조명이 이주몽
을 비친다.)
[주몽] 제 이름은 이주몽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저 이주몽의 나이는 설흔 일곱. 동서보
험회사의 조사 과장이 저의 직함입니다. 불과 삼십칠년밖에 살지 못했지만 이젠 인생이 피
곤하게 느껴집니다. 개인 회사에서 일을 하는지라 출세의 길에도 한계가 온 것 같고 또 대
인관계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봉급에 알맞은 일을 하고 따라서 시키지 않는 일을
할 필요도 없으며 남의 말도 안하기로 했습니다. 사람 만나는 일도 귀찮습니다. 그저 혼자
서 이렇게 신문이나 주간지를 보거나 TV를 보면서 지내고 싶습니다. 가끔 눈을 감고 자잘구
레한 현실을 떠나 공상의 날개
[페이지] 010
를 타고 무한한 세계로 비상하기도 합니다. 내가 세계적인 축구 선수가 돼서 외국의 금발미
인들의 싸인 공세에, 비명을 지르는 모습도 생각합니다. 권투 선수가 돼서 헤비급 흑인선수
를 때려눕히는 꿈도 꿉니다. 최고의 미인과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하는 공상도
합니다. 내가 일하는 이 회사의 사장은 벌써 꿈속에서 몇 번이고 해보았습니다. 신중히 생
각하고, 생각한 것을 섣불리 실천하지 않고, 결단성 있는 행동을 하지 않는 한 우리는 무사
합니다. 남을 욕할 필요도 없고 칭찬할 필요도 없습니다. 남이 ane지 않는데 정보를 제공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나 같은 사람들이 이사회에서는 오히려 잘 살지 않습니까?
출세는 빠르지 않지만 무사하다는 말입니다.
[설명역] 이주몽씨?
[주몽] 네?
[설명역] 오늘은 7월말 어떤 토요일 오후. 정확히 말하면 토요일 오후 두시군요. 이 회사의
토요일 근무는 한시에 끝납니다. 왜 아직 퇴근을 안하죠?
[주몽] 아, 토요일은 늘 그렇습니다. 오후 한시가 되면 버스가 굉장히 혼잡합니다. 최소한
퇴근길에는 버스 좌석에 앉아 가고 싶어서요. 한시간 동안 이 주간지를 보면서 기다리는 겁
니다.
(설명역이 나머지 인물들을 향해 손뼉을 친다. 오충돌은 주몽 옆에 서고 사경자와 김말숙은
설명역을 사이에 두고 화석처럼 선다.)
[충돌] 저는 오충돌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제가 받은 이름 오충돌이 말하듯 저는 가끔
이 일, 저 일 또는 이 사람 저 사람과 충돌을 하는 역입니다. 저도 이 동서보험회사의 계장
직을 맡고 있습니다. 이 주몽씨는 저의 대학 선배로 되어 있습니다. 저희들이 나온 대학은
시시합니다. 그러나 그 시시한 대학에서 이 보험회사에 온 것은 우리 둘 뿐이니 본래 머리
는 괜찮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분을 형님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저와는
달리 우리의 주몽이 형님은 퍽 침착합니다. 침착의 한계를 넘어 사람 만나는 것까지 귀찮게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를테면--- (주몽에게) 형님.
[주몽] 음?
[충돌] 누가 찾아왔는데.
[주몽] 나를?
[충돌] 형님 고향에서 왔대요, 이윤식 이라고 하는 분인데 나이는 한 오십쯤 될까?
[주몽] 뭣하러 왔을까? 그래 내가 있다고 그랬어?
[충돌] 아뇨. 들어가 봐야겠다고 했어요. 형님이 없으면 집이라도 좀 알고 싶다는군요.
[주몽] 우리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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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돌] 누군데요?
[주몽] 응, 내 당숙되는 분이야.
[충돌] 형님이 어렸을 때 집에서 길렀다고 하더군요.
[주몽] --- 미안하지만 나 없다고 해줘.
[충돌] 있는데?
[주몽] 사정이 있어서 그래.
[충돌] 그럼 집은요?
[주몽] 음! 엊그제 이사를 가서 회사에서도 모른다고 해.
[충돌] --- 그럽시다. (관객에게) 보셨지요? 사람 만나는 것도 귀찮은 모양이죠? 하기야 친
척도 사람이니까 귀찮을 테죠. (다시 주몽에게) 형님 좀 기다려! 나 굉장히 중요한 얘기가
있어요. 화장실에 갔다 올께.
[주몽] 중요한 일? 넌 중요한 일이 있으면 꼭 화장실에 가더라. 나에게는 중요한 일이란건
없어. 그저 그런 것이 있을 뿐이야.
(충돌이 나간다. 경자와 말숙이 동시에 앞으로 나와 동시에 말문을 연다.)
[경자, 말숙] 저는---
[설명역] 가만 두 사람이 한꺼번에 얘기는 할 수 없어요. 역시 (경자를 가리키며) 이쪽이
--- 먼저.
[말숙] 그럴 줄 알았어요. 그래서 저는 이런 역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어요.
[경자] 먼저 해요. 제가 맡은 역도 그저 그러니.
[말숙] 괜찮을까요?
(설명역이 머리를 끄덕인다.)
[말숙] (관객에게) 제 이름을 김말숙이라고 한대요. 김말숙, 그저 이름만 들으면--- 제가
맡은 역이 그저 그렇다는걸 알 수 있죠. 싸롱 「봉봉」의 여급이래요. 나이는 열아홉에서
스물댓 사이 일겁니다. 우리의 나이는 고무줄 같아서 죽 늘어날 수도 있고 바싹 줄어들 수
도 있습니다. 제가 보통 여자들처럼 그렇게 시집을 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건강이 지속되는 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야 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남자들에게 친
절하면서도 유혹을 할 때는 따끔하게 하고, 헤어질 때는 야무지게 짤라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잘 알면서도 저는 남자에게 우연히 동정을 합니다. 그래서는 안되는데, 글세---
진정한 동정이 아니고 허영에 들뜬 동정이기는 했지만 매스콤 때문에 흥분해서요. 그럼.
(관객에게 인사를 하고 들어간다.)
[경자] (관객에게) 저는 김말숙하고는 신분이 다른 여자입니다. 저 이주몽의 아내역을 맡았
습니다. 이름은 사경자라고 한대요. (무대 상부 그의 집 거실을 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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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며) 저것이 우리집 거실입니다.
(거실에 조명이 던져진다. 의자가 셋, TV가 1대, 전화통, 티이 테이블이 보인다. 뒷문에 창
문이 있다. 이 거실이 구태여 사실적인 무대일 필요는 없다. 경자가 상상적인 벽을 의식치
않고 그대로 거실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경자] 십년 전에 결혼을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애는 아직 없습니다. 대학을 갓
나와 회사에 들어갈 때는 저의 남편은 바쁘고 정력적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일 어린
나이에 과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요새는 집에 들어와 파자마를 입고 주간지를 보거
나 TV를 보는 것이 고작입니다. 제가 옆에 있어도 제대로 말을 걸지 않습니다. 가끔 대화를
해봤자 사무적인 얘기뿐입니다. 누구의 생일에 보낼 선물을 뮐 사는가 또는 연탄값 얘기,
동회에 가서 인감도장을 떼 오라는 얘기--- 그저 이런 겁니다. 때로는 잠자리에 혼자 누웠
다 여기에 나와 보면 남편은 의자에 앉아서 혼자 자고 있습니다. 요즘 남편들은 빨리 늙는
모양입니다. 남의 집 찾아가기도 귀찮고 남이 집에 찾아오는 것도 귀찮은 것이 저 사람입니
다. 심지어는 내가 옆에 있는 것도 어색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부간이 별로 싫어
진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십년 동안 싸움을 한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저는 부득이
스스로를 바쁘게 하고 정신을 집중시키는 수단으로 도자기 만드는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이
손이 여자의 손으로 예쁜 편이 아니지만 도자기 만드는데는 안성맞춤인 모양입니다.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저는 작업장에 들어가 있겠습니다.
(경자가 인사를 하자 거실을 밝히는 조명이 사라진다. 이어 충돌이 들어와 주몽의 쪽으로
간다.)
[충돌] (조심스럽게 주위를 돌아보고) 형님.
[주몽] 응?
[충돌] 우리 회사의 분위기가 요새 말이 아닙니다.
[주몽] 그래?
[충돌] 형님도 잘 알텐데--- .
[주몽] 난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설명역] (관객에게) 두 사람간에 비밀 얘기가 있는 모양입니다. 어떤 상사를 규탄하는 모
양인데--- 분명 영업담당 이사로 있는 윤이사 얘기일 것입니다. 자, 제가 윤이사 역을 해
보겠습니다. 저 이주몽은 사고를 낸 적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적극적인 태도는 절대 뵈
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안심은 되는 인물이죠. 남의 일에 관심이 없으니까
요. 그렇다고 해서 이주몽씨가 자기의 윗사람과의 관계를 고려치 않고 있다는 말은 아닙니
다. 저 사람은 상사들과 접촉하는 수단으로 꿈, 사람이면 누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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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는 꿈을 접촉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 꿈을 즐기는 성격이기도 하지만
남의 꿈을 해명하는데 남달리 성의를 보이고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일등가는 꿈 해몽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끔 사장도 이주몽씨에게 자기가 꾼 꿈을 묻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저도 꿈 얘기를 갖고 저 친구와 말문을 열어봐야 겠습니다. 또한 저 친구에게 관심이 있다
는 표시도 되니까요.
[설명역] 이과장.
[주몽] 네? (일어나며) 윤이사님, 아직 퇴근을 안하셨나요?
[설명역] 이 과장은 웬일이요?
[주몽] 네--- 약속이 있어서요.
[설명역] 마침 잘 만났군, 그렇잖아도 아침에 나올 때는 이과장한테 물어 볼랴고 했는데---
일이 바빠서---
[주몽] 꿈 말입니까?
[설명역] 그래--- 나도 그렇고--- 내 여편네도 그렇고---
[주몽] 말씀하세요.
[설명역] 응--- 우연한 일치인데--- 나도 마누라가 바람을 피우는 꿈을 꾸었고--- 마누라도
내가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는 꿈을 꿨다는 거야. (주몽에게) 그게 무슨 뜻이지?
[주몽] 상무님께서 그 꿈이 불쾌는 하시겠지만--- 그런 경우는 반대로 해석하는 겁니다.
[설명역] 여편네가 바람을 피우는데도?
[주몽] 그렇습니다.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사람들의 인기와 존경을 받고--- .
[설명역] 그래? 음, 오히려 나에 대한 모략이 많던데---
[주몽] 그럴 리가 있습니까? 윤이사님을 누가 감히---
[설명역] 그럼 내 마누라의 꿈은--- ? 내가 젊은 여자하고 바람을 피웠다는데?
[주몽] 남편이 나이가 젊고 건강하면 그건 문제가 됩니다. 실제 그런 근심이 있기 때문에
여자의 꿈에도 반영되겠죠. 그러나 남편이 이미 노경에 들어 있으면 오히려 부부간의 사이
가 좋다는 말이 됩니다.
[설명역] 그럼--- 내가 노경에 들어 있나?
[충돌] 그걸 어떻게 압니까? 정력이 왕성한가는--- 부인밖에 모르니까요. 남자란 보기와 다
르지 않습니까? 특히 부부간의--- 그런 일은--- .
[설명역] (화를 내서) 음--- 고맙네!
(설명역이 나가 버린다)
[충돌] 왜 화를 내지?
[주몽] 주책없이! 네 일도 아닌데 왜 뛰어들어? 충돌이 자네는 남의 일에 쓸데없이 뛰어드
는 버릇이 있어.
[충돌] 그저 사실을 얘기했다 뿐인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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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주몽이형 나도 꿈을 꿨는데--- 거울을 보니까 이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이 대머리가 됐던
데요. 무슨 꿈이죠?
[주몽] 흠--- 그것 봐라 꿈속에서 대머리가 되면 사업이나 하는 일에 액이 오는 거야.
[충돌] 액이라니?
[주몽] 재수가 없단 말야. 이제처럼.
[충돌] 그런데--- 형님은 꿈을 믿어요?
[주몽] 믿고 안믿고가 아니고--- 대개에 경우 들어맞지.
[충돌] 형님은 오늘 아침 무슨 꿈을 꾸었죠?
[주몽] 다 잊어 먹었어.
[충돌] 그걸 개꿈이라 한다면서요?
[주몽] 건강한 징조지. 자 오후 두시다. 나갈까?
(주몽이 일어나서 주간지를 정리한다.)
[충돌] 그거 다 읽었어요?
[주몽] 주간지?
[충돌] 네, 하나만 주세요.
(주몽이 주간지 한부를 준다.)
[주몽] 자기 돈을 주고 사는 버릇을 길러요.
[충돌] 주몽이 형! 이제 왔던 윤이사 말입니다. 우리 회사의 분위기를 망쳐놓고 있어요.
[주몽] 신경을 쓰지마. 자네나 나나 봉급이나 받으면 돼.
[충돌] 그래도 회사를 좀먹는 사람이 있는데 그냥 둘 수 있어요?
[주몽] 난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충돌] 잘 알고 있으면서! 우리--- 중견간부들은 결정을 내렸어요.
[주몽] 무슨 결정?
[충돌] 내쫓는 거죠.
[주몽] 왜?
[충돌] 그걸 몰라서 물어요? 회삿돈을 횡령하고 있다는건 공공연한 비밀이에요. 형님도 잘
알고 있지 않소? 그래서--- 선후배 관계도 있고 해서--- 날더러 형님을 설득하라는 거에요.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며) 자, 여기 연판장이 있어요.
[주몽] 난 사양하겠네.
[충돌] 아니 윤이사의 비행은 형님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
[주몽] 흥미가 없어 사장이 알아서 하겠지. 난 몰라. 자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한 것도 난
모르는 걸로 해 두겠네. 자넨 나한테 윤이사를 쫓아내자는 말을 한 적이 없어. 알았지 자,
나가 봅세.
[충돌] 무간섭주의입니까?
[주몽] 무간섭주의--- 글쎄 뭐라고 불러도 좋아. 자 집에나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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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돌] 집이요? 아니 세시에 박교수님의 환갑잔치가 있는데--- 난 형님하고 그 모임에 갈랴
구--- .
[주몽] 그렇지 박교수님의 환갑이 오늘 세시지 ---
[충돌] 박교수님은 특히 형님을 사랑했죠?
[주몽] 사람들이 많이 모이겠군.
[충돌] 그럴거예요.
[주몽] --- 나--- 집에 급한 일이 있어서 말야--- 자네 혹시 누가 묻거든--- 내 집안일 때
문에--- 못 간다고 ---
[충돌] 그래도--- ?
[주몽] 바쁜 일이 있다니까.
(두 사람은 걸어서 무대 전면 중앙에 놓여있는 등 받침이 없는 두 개의 보조의자에 앉는다.
버스 좌석이다. 버스의 시동이 걸리며 차가 움직인다. 이어 도시의 시끄러운 소음이 들린
다. 두 사람의 몸이 차가 움직일 때마다 흔들린다. 차가 급정거하자 두 사람의 몸이 앞으로
쏟아진다.)
[충돌] 야 운전수! 야 차장!
[주몽] 그만둬.
[충돌] 너 우리가 짐짝이냐? 운전수 면허증 좀 봐. 이건 살인차야. 운전을 배울야면 똑똑히
배워 망할 자식! 뭐야? 왜 반말이냐구? 야! 너 주민등록증 좀 보자.
(충돌은 주몽을 헤치고 나갈려고 한다. 주몽이 간신히 끌어 앉힌다. 김말숙이 두 팔에 잔뜩
물건을 안고 나타나 주몽이 옆에 선다.)
[주몽] 이상하지? 오후 두신데 이렇게 만원이야. (차가 움직인다.)
[충돌] 그렇지. 세시부터 서울 운동장에서 야구가 있지.
[주몽] 아, 그걸 몰랐군--- 무슨 놈의 야구 시합이 그렇게 많지? 학생들 공부는 언제 하노.
[충돌] 그래도 오늘 게임은 멋있을 꺼야. 형님은 어느 쪽을 응원해?
[주몽] 뭐--- 그저---
[말숙] (뒤를 향해) 왜 이래요! 아니! 멀쩡하게 생긴 남자가 무슨 짓이에요. 내가 당신 부
인이요? 만지고 싶거든 남자답게 정정당당하게 만져요. 슬금슬금 그러지 말고.
(차가 급정차 한다. 말숙이 비틀거리다가 양팔에 들고 있던 물건을 주몽의 어깨며 무릎에
떨어뜨린다. 주몽이 받아쥔다.)
[말숙] 아이 미안해요.
[주몽] --- 뭐--- 괜찮습니다.
[충돌] (일어나며) 저놈을 그저--- 형님 나 내려야 해.
(충돌이 앞으로 해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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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 저--- 박교수님이나 다른 친구들이 물으면---
[충돌] 알았어요. 알았어요.
(충돌이 내린다. 주몽이 충돌의 자리로 옮기고 말숙이 그의 자리에 앉는다. 말숙이 주몽으
로부터 짐을 받는다.)
[말숙] 고마워요, 휴! 이 버스는 항상 만원이에요.
[주몽] 뭐--- 꼭 그렇지는 않지요.
[말숙] 아저씨는 어데까지 가세요?
[주몽] --- 종점까지요.
[말숙] 저도 종점까지 가요.
(주몽이 주간지를 펼쳐 들고 읽는다. 말숙이 주간지를 들여다본다.)
[말숙] 엄마나! 모리자가 결혼을 하네.
[주몽] --- 모리자--- 좋아하세요?
[말숙] 연기가 괜찮지요. 김창길 하고는 정식 이혼을 한 모양이죠? 스물 두 살인데--- 벌써
세번째에요. 글쎄 쉰 네살 난 남자하고도 동거 생활을 했대요.
[주몽] --- 흥--- 소문이란--- .
[말숙] 하기야 사랑엔 국경도 없고 나이의 차이도 없다니까요.
(차가 움직임에 따라 두 사람의 어깨가 닿는다.)
[말숙] 글쎄요--- 전 아저씨를 어디서 본 것 같아요.
[주몽] 저를요?
[말숙] 네. 직장이 어디죠?
[주몽] --- 그저 회사지요. 아가씨는?
[말숙] --- 봉봉이라는---
[주몽] --- 봉봉--- , 회현동에 있는 싸롱이요?
[말숙] 네 어떻게--- ? 그래요. 거기서 뵌 것 같애요. 그렇죠?
[주몽] --- 한번 갔었지요. 회사 사람들하고---
[말숙] 엄마나, 우연이에요. 세상이 넓다지만--- 김말숙이라고 해요.
[주몽] --- 김말숙
[말숙] 선생님은요?
[주몽] 음--- 이주몽.
[말숙] 댁은 어딘데요? 종점에서 가까워요? 저의 집은--- 저의 집도 아니지만--- 종점에서
우측으로 뚫린 길이 있죠? 그리로 쭉 가면 목욕탕이 있어요.
[주몽] 황금탕.
[말숙] 맞아요. 그 황금탕을 끼고 돌면 새로 생긴 다방이 있어요. 그 다방 왼쪽으로 돌면
비탈길이 나와요. 그 비탈길로 한 오분 걸으면--- 배추밭이 있어요. 그 배추밭, 가만--- 오
른 쪽인가? 오른쪽 거기 노란 기와집이 있어요. 그 집 맨 끝방을 빌려쓰고 있어요.
[주몽] 조용한 곳이군요.
[말숙] 선생님 댁은요?
[주몽] 배추밭 저쪽에 언덕이 있지요? 거기--- 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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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하나 밖에 없어요. 그겁니다.
[말숙] 언덕위의 하얀집이네요.
[주몽] 네?--- 음--- .
(암전)
(이주몽의 거실)
(사경자가 외출 준비를 하고 맥주 안주가 담긴 접시를 들고 나온다. 테이블에는 맥주 깡통
도 몇 개 보인다. 경자가 전화를 건다.)
[경자] 윤옥이냐? 나 야나--- (팔목시계를 보며) 지금이 네시반이니까 다섯시까지 갈께. 그
래, 이천에서 연락왔니? 응 내 나갈게.
(수화기를 놓고 앉는다. 파자마 바람의 주몽이 신문지를 들고 나온다.)
[주몽] 변소가 고장이야. 나가기 전에 좀 보고가.
[경자] 줄이 끊어져서 그래요.
(주몽이 맥주 깡통을 따며 TV와 마주 앉는다.)
[주몽] (TV를 가리키며) 어떻게 됐지? 죽였나?
[경자] 죽여요?
[주몽] 아 남편이 자기 아내를 죽였냐 말이야.
[경자] 남편이 아내를? 끔찍해. 몰라요, 안봤어요.
[주몽] 요새 TV가 왜 이렇게 시시하지.
[경자] 안보면 될게 아뇨?
[주몽] 글쎄--- .
[경자] 저 연속극에 나오는 모리자가 예쁘죠?
[주몽] 누구? 모리자?
[경자] 미인이에요. 모리자의 식모로 나오는 애도 예쁘고요. 당신 모리자가 나오는 연속극
은 빼놓지 않고 보죠?
[경자] 그래도 계집애가 취직이 됐으니. 하나밖에 없는 처제인데 당신 무슨 선물을 사서 주
면 어때요?
[주몽] 당신이 잘 알아서 해봐요. 그건 그렇고--- 복자가 은행에 취직했지?
[경자] 네, 그러니까 당신의 신원보증서가 필요하죠.
[주몽] 그 보증서가 어떤 효력을 갖는지 알아? 혹시 복자가 실수를 하면 내가 책임을 져야
해.
[경자] 그러니까 형부한테 부탁하는게 아뇨?
[주몽] 어떨까? 자기 대학의 교수한테 부탁해 보지. 역시 그런 보증을 서면 혹시--- 금전상
의 책임을 지게 될지도 모르니--- 가까운 사이에 피차 어색하고--- 복자는 애도 상냥하니까
교수들한테 귀여움도 받을거야.
[경자] 교수는 꿔다놓은 보릿자루인가요?
[주몽] 내 보증도 박교수가 서줬는데.
[경자] 그런 고마운 분의 환갑잔치도 잊었어요?
(잠시 침묵이 흐른다.)
[경자] 화요일 점심약속을 잊지 마세요. 오빠가 생전 처음 해보는 돌잔친데.
[주몽] 자신이 없는데.
[경자] 왜요? 잠깐 들려서 점심을 들면 될텐데---
[주몽] 음 회사에 외국손님이 와 같이 식사를 할지도 모르거든.
[경자] 당신은 조사과장인데---
[주몽] 나하고 안면이 있는 분이야.
[경자] 많지도 않은 친척인데---
[주몽] --- 당신 늦지 않아?
[경자] 네 나가봐야겠어요--- 꿈 같아요. 십년 전에 취미로 시작했는데--- 인제 연구소를
차리게 됐으니---
[주몽] 수고가 많았어.
[경자] 사경자 도자기 연구소. 우습죠?
[페이지] 019
월요일이면 문을 열어요. 저 때문에 어머니가 집을 팔고 조그만 아파트로 옮겼어요. 사 백
만원이 적은 돈은 아니죠. 그걸 몽땅 연구소 만드는데 쓰라고 주시니--- . 어제 신문을 봤
죠? 크게 보도해 줬어요. 인젠 도자기를 굽고 만지는 일이 없으면 못살 것 같아요.
[주몽] 그럴테지. 경자는 도자기하고 결혼을 했으니까.
[경자] 제가 뭣 때문에 도자기하고 결혼을 했을까요?
[주몽] 음---
(어색한 사이)
[경자] 그럼 저는 좀 나갔다 오겠어요. 일찍 돌아오겠어요.
[주몽] 응.
(문밖에서 초인동이 울린다. 경자가 밖으로 나간다. 이어 설명역인 동회직원이 들어온다.)
[경자] 동회서 오셨대요.
[설명역] 실례합니다. 동에서 왔습니다. 주인 어른이시죠?
[주몽] 네. 여보 당신 나가야 하잖소?
[경자] 네 그럼--- 말씀하세요.
(경자가 나간다.)
[주몽] 무슨 일로?
[설명역] 협조를 구할랴고요. 아시다시피 이 근처는 새로 개발된 지역이라, 아직--- 모든
조건이 좋잖습니다. 특히 길이 말이 아니죠. 비만 오면 쑥밭이 됩니다. 그래서--- 새마을
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우리도 자진해서 길을 닦는 것이 어떤가 해서요. 내일
은 일요일이고 해서, 한 세대에서 한 분씩 아침 여섯 시에 동회 앞 에 모여주십사 해서---
.
[주몽] --- 네.
[설명역] 선생님처럼 사회적 지위도 있는 분이 솔선수범하시면--- .
[주몽] 취지는 잘 알겠습니다. 근데--- 저의 안사람이 이제 시골로 떠나서--- 내일 저녁에
야 돌아오는데--- . 저의 집엔 일하는 애도 없고--- 어떡허죠?
[설명역] --- 사정이 그렇다면야--- 잘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기회에--- 실례했습니다.
(설명역이 나간다. 주몽이 맥주를 마신다. 잠시 후 수화기를 든다. 다이알도 돌리지 않는
다.)
[주몽] 시장 바꿔. 시장 말이야. 나다! 시장이야?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일주일
동안 일을 하고 주말을 즐길 수 있는 특권이 있어 왜 못살게 구는 거야? 내가 내는 세금은
다 어따 쓰는 거야? 한달에 이만 이천원씩, 내 보너스 때는 삼만원 내고, 미안하다고? 이제
왔던 놈들 당장 파면시켜.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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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하겠다고! 일을 할려거든 똑똑히 해!
(수화기를 놓고 기지개를 한다. 이어 비스듬히 누워 눈을 감는다. 조용한 음악이 흘러나온
다. 아름다운 여인상을 그려보는 것이다. 그의 꿈은 오충돌의 출현으로 깨져버린다. 충돌의
얼굴에는 반창고가 붙어 있다.)
[충돌] 나 참!
[주몽] 무슨 일이야. 얼굴은 왜 또?
[충돌] 재수가 없을래니까! 이 길가에서 어떤 부부가 싸움을 하고 있잖아요? 근데 남편이라
는 친구가 자기 마누라를 두들겨 패는 거야. 그런 법에 어딧어? 그래서 내가 싸움을 말렸
지. 그랬더니 이 녀석이 무슨 참견이냐고 대들지 않아?
[주몽] 그래서 남편이 자네 얼굴을 --- ?
[충돌] 그게 아냐. 그놈의 마누라가 나한테 달려들더니 얼굴을 할키지 않겠어?
[주몽] 흠, 그래서?
[충돌] 일대 이의 싸움이 붙었지.
[주몽] 그래서?
[충돌] 사람들이 순경을 불러오더군요. 할 수 있어요? 파출소까지 갔지요 뭐.
[주몽] 왜?
[충돌] 순경이 가자는 걸요. 이래뵈도 법은 잘 알거든요.
[주몽] 꼴 좋다.
[충돌] 나도 결혼은 했지만 부부라는게 뭔지 모르겠어요.
[주몽] 왜?
[충돌] 그렇게 악을 쓰며 싸우더니 둘이 딱 붙어가지고서 나를 공박하는 거에요. 결국 파출
소에서 풀려 나오기는 했지만--- 하기야 우리도 부부싸움을 해서 경험은 있지만--- .
[주몽] 무슨 경험--- ?
[충돌] 부부싸움이란 뭐 닭싸움 같은게 아닙니까? 한 두 시간 지나면 안개가 가시듯---
[주몽] 글쎄 난 모르겠다. 자랑은 아니지만 난 아직 부부싸움이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다.
[충돌] 그래요?--- 애가 없어서 그런가?
[주몽] 애 있고 없고가 부부싸움 하고 무슨 관계가 있어?
[충돌] 그래두--- 부부싸움은 있는 편이 나았지요. 여러모로 자극을 주니까. 서로 무관심한
사람들끼리 싸우는 걸 봤어요? 싸움이 없다고 해서 친하다던가 사랑한다고는 할 수 없거든
요. 안 그래요? 친하고 사랑하면서도 싸움을 안한다면--- 그건 좀 생각할 문제에요. 무엇이
잘못돼 있어요. 형님하고 나하고도 가끔 싸움을 하지 않아요.
[주몽] 내가 너하고 싸움을? 난 너한테 설교를 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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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이야. 그 얼굴 꼴 좋다. 성격도! 자넨 언제 철이 드나? 좌충우돌! 남의 일에 왜 쓸데없이
뛰어들어?
[충돌] 뛰어들다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주몽] 그러다가는 그 잘난 계장직도 날라간다. 좀 침착해. 세상은 그런게 아냐 생각을 해
봐. 사람에게는 좀--- 신비한데가 있어야 해. 자기를 들어내지마. 생각은 많이 하되, 그걸
실천에 옮길 필요가 없구, 결단이니 뭐니 하는 성급한 결정은 말아야 해.
[충돌] 그럼, 사람이 신비해지나요? 아니 눈앞에서 당장 일이 벌어지는데 구경만 하고 있어
요?
[주몽] 자, 맥주나 들어. 그래 박교수님 만났어.
[충돌] 네, 사람들이 많더군요.
[주몽] 내 얘기했니?
[충돌] 집안에 바쁜 일이 있어서 못나오신다고 했어요. 근데--- (주위를 돌아보며) 뭣이 바
빠요?
[주몽] 음--- 뛰어다녀야 바쁜가? 우리 처가--- .
[충돌] 아주머니요?
[주몽] 그래. 내 처가 월요일에 연구소를 열어.
[충돌] 아, 도자기--- ?
[주몽] 그러니 준비할 것이 많지?
[충돌] 형님은 행복해요.
[주몽] 내 자네한테 좋은 도자기를 하나 선사하지.
[충돌] 고맙습니다. 회사에 나가서 선전을 좀 해야겠어요.
[주몽] --- 그럴 필요는 없지. 부장, 상무, 사장, 사장의 친척한테 도자기를 선물하다 보면
결국 우린 밑지는 장사야. 그 도자기가 내 것도 아닌데. 세상만사는 말없이 끌고 나가야
해.
[충돌] 그래도 이건 형님의 자랑뿐만이 아니라 우리회사 전체의 자랑이거든요.
[주몽] 이 사람아, 그게 탈이야. 공은 공이고 사는 사야.
[충돌] 천만에 이왕에 회사에 몸을 담았으면, 회사 일이나 집안 일이나 마찬가지에요.
[주몽] 그게 자네의 결점이야. 그런 생각을 청산하지 못하는 한, 자넨 만년 계장으로 끝날
거야. 난 부모의 혜택을 받은 적이 없어. 그리구 고학을 했어. 그러면서도 공부는 잘했어.
[충돌] 그거야 물론--- 나도 알고 있어요.
[주몽] 어떤 놈이 날 도왔어?
[충돌] 글쎄--- 그건 알지만--- 마치 내가 국가에서 하라는 일은 다 했지만, 국가에서 나를
구체적으로 도와준 일이 뭔가 하고 따지는 것과 마찬가지요. 국가와 국민간의 사이가 장사
꾼의 거래는 아니거든요.
[주몽] 우리 회사가 국가니? 그래서 너는 좌충우돌하는군.
[충돌] 내가 형님을 좋아하는 건--- 대학시대에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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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노력했고--- 옛날에--- 가장 출세가 빨랐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머리도 좋고요. 그러나
형님은 너무나 냉정해요.
[주몽] 그래서?
[충돌] 할 말을 해야할 때 왜 안 합니까? 신상무 축출운동의 경우도 그렇고요.
[주몽] 해서 뭣해?
[충돌] 왜요?
[주몽] 그게 그런데. 할말을 해봤자 결과는 뻔해. 미움을 받거나 오해를 받을 뿐이야.
[충돌] 난 형님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매일 안방에서 파자마 바람으로 잡지나 보고, TV나
보면 그만입니까? 모두 귀찮습니까? 친척이 찾아와도 회사의 일이 엉망으로 되어가도 아무
생각이 없어요? 그것이 또 머리가 나쁘고 무능한 사람이면 몰라요. 형님은 앞뒤의 사리를
잘 알면서도 그러니 탈이란 말이예요. 아주머니하고 여기 앉아 있을때도 마찬가지예요. 그
저께 밤이죠? 아무 말도 않고 TV만 보고 있더군요. 저도 답답했어요. 아 셋이서 앉아서 말
한마디 없이--- .
[주몽] 장관 바꿔! 나야 장관이야? 요새 젊은것들을 도대체 어떻게 교육하는 거야! 사회봉
사니 사회참여니 하는 소리를 좀 작작해! 미안하다구?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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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주말에는 남의 집에 찾아가지 않도록 법을 만들어. 주말에 푹 쉬고 싶은데 왜들 찾아
다녀. 버릇이 없어. 특별법을 만들어. 뭐라구? 국회에서 그런 법이 통과되기 힘들다고? 걱
정마, 내가 국회의장한테 지시할 테니까. 됐어. 울긴 왜? 울면 다 해결되나? 미안한 줄 알
면, 당장 내 지시를 지켜!
(수화기를 놓고 맥주를 마신다. 이어 눈을 감고 아름다운 꿈을 청한다. 고요한 음악이 들려
오는 가운데 무대가 어두워지며 창 밖으로 달빛이 들어온다. 밤이다. 맥주 깡통을 쥐고 다
리를 티 테이블에 올려놓은 채 TV를 보고 있는 주몽. 무대 전면 한쪽에 놓여있는 테이블에
(전경, 회사의 테이블이다) 조명이 던져지며 도자기 하나를 앞에 놓고 생각에 골몰하고 있
는 사경자의 모습이 나타난다. 꿈과 현실속에서 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부부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경자] --- 어머니 저 경자에요. 네? 집이 아니에요 지금 사무실에 있어요. 네 준비할 것이
많아서요? 저녁이요? 네--- 먹었어요. 어머니--- 갑자기 어머니 생각이 나서 전화를 걸었어
요. 이것저것 고마워요. 네? 그이는 집에 있어요. 괜찮아요. 그 양반은 오히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니까요. 네 곧 들어가겠어요. 어머니 열심히 일하겠어요. 어머니가 안
계시면 저 못살 것 같아요. 고마워요. 걱정 마세요. 준비는 다 됐어요. 네 곧 돌아가겠어
요.
(경자는 수화기를 들고 도자기를 만져본다. 이어 다시 수화기를 든다. 다이알을 돌린다. 주
몽이 있는 거실의 전화벨이 울린다. 주몽이 일어선다. 그러나 머뭇거리다가, 다시 주저앉는
다. 그대로 TV를 본다. 전화벨이 잠시 울린다. 경자가 수화기를 놓고 한숨을 쉰다.)
(암전)
(교회 종소리와 더불어 무대가 밝아진다. 다음날 일요일 아침이다. 사경자가 들어와 흩어진
주간지며 신문을 치우고 있다. T셔츠에 바지를 입은 주몽이 기지개를 하며 나온다. 창문을
통해 화창한 밖을 본다.)
[경자] 여보.
[주몽] 응?
[경자]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주몽] 일요일.
[경자] 흠, 당신이 과장 발령 받은 날이에요.
[주몽] --- 그렇군.
[경자] 당신 과장이 된 지도 벌써 7년이에요.
[주몽] 응.
[경자] 그때는 가장 빨리 승진했다고 모두 부러워했는데--- .
[주몽] 그래서?
[경자] 회사도 너무 해요. 7년씩이나 과장으로 썩혀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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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 작년에 부장으로 승진한 그 친구는 파면됐어. 서둘 필요는 없어.
[경자] 그래두--- .
[주몽] 승진할 자리두 없어. 부장 일곱 명중에서 사장의 친척이 아닌 사람은 한 명 뿐이야.
상무자리도 마찬가지고. 김상무는 사장의 동생, 이상무는 사장의 매부, 윤상무는 사장의 이
복동생--- .
[경자] 자기네끼리 잘들 해먹는군요--- 그때는 회사의 일거리를 집에까지 들고와 밤샘을 해
가면서 일을 했는데--- .
[주몽] --- 대신 경자가 출세를 하는게 아냐? 사경자 소장, 흥.
[경자] 비꼬지 마세요--- . 월요일 개소식에는 사람들이 많이 올 것 같아요.
[주몽] 그거 잘됐군.
[경자] 여보, 우리 집을 옮기면 어때요?
[주몽] 집을 옮겨? 반년밖에 안 살았는데--- ?
[경자] 거리가 좀 멀고요--- 거기다 외딴 집이 돼서--- 이웃이 있는 동리에 가면 좋겠어요.
담 넘어 얘기도 할 수 있고--- .
[주몽] 난 사람 냄새가 질색이야.
[경자] 그래 사람 냄새가 싫어 여기 왔는데, 여기선 무슨 냄새가 나요? 배추밭에 뿌리는 거
름 냄새가 좋아요?
[주몽] 사람 냄새보다 낫지. 몇 시에 떠나지?
[경자] 걱정 마세요. 혼자 있게 해드릴께요. 버스를 타고 가야죠.
[주몽] 여기서 이천까지 얼마나 걸리지?
[경자] 한번쯤 같이 가보면 안되나요?
[주몽] 그 도자기는 꼭 이천에 가서 궈야하나? 하기야, 난 도자기에 대해선 백지이니까. 가
나 마나지.
(삽을 들고 작업차림을 한 충돌이 들어온다.)
[충돌] 아, 덥다.
[경자] 아니 무슨 일이에요, 삽을 들고--- ?
[충돌] 새마을 운동을 하고 왔지.
[경자] 훈장을 타겠네요.
[충돌] 하기야 길은 좀 닦아야 해요. 다 우리들 일이니까. 나 참!
[주몽] 왜?
[충돌] 날더러 작업대장을 하라는 거야.
[경자] 축하합니다.
[충돌] 내 계원이 두 명인데--- 작업대장 밑에 몇 명이 있는 줄 아세요? 백 명이야. 하,
하.
[경자] 얼굴을 다쳤네요.
[충돌] 이거요? 훈장이죠. 아주머니 코피 있어요?
[주몽] 코피나 한잔 주시오.
(경자가 밖으로 나간다.)
[페이지] 025
[충돌] 야, 날씨 하나 좋다. 이거 집에 돌아가면 큰 일인데.
[주몽] 왜?
[충돌] 애들이 못살게 구니, 창경원 가자. 풀장에 가자--- 마구 졸라대니. 일요일엔 꼭 비
가와야 해. 그런 면에선 형은 행복해. 애가 없으니.
[주몽] 고맙다.
[충돌] 참, 형님. 나 누굴 만난지 알아? 어제 버스간에서 만난 여자 있지? 이렇게 짐을 잔
뜩 들고 ---
[주몽] 아, 그래.
[충돌] 요 앞에서 만났어. 인사를 하지 않아? 요 근방에서 산다는 거야. 그 여자 뭣하는 여
자지?
[주몽] 뻔하지 뭐.
[충돌]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날더러 형님하고 같은 회사에 있는가 묻지 않아?
[주몽] 그래서?
[충돌] 그렇다고 했지.
[주몽] 회사이름도 알려줬지?
[충돌] 그럼요. 묻길래--- .
[주몽] 술집 여자한테 그런걸 알려줄 필요가 어딨어?
[충돌] 묻는데 대답을 안할 수도 없고--- 또 얼굴도 쓸만하게 생겼고--- .
[주몽] 차라리 그 여자의 집까지 따라가지 그래.
[충돌] 이 삽을 들고?
[주몽] 충돌이 자네야 모든 사람에게 관심이 있잖나.
(경자가 코피잔을 들고 들어온다.)
[충돌] 미안합니다--- 노동을 하고 마시는 코피는 이렇게 좋을 수가 없어. 형님도 다음 일
요일에 나오세요. 자, 드시죠. 아주머니도.
[경자] 참, 어제 동회직원이 왔었죠? 길을 고친다고 나오라는 말을 안합데까?
[주몽] --- 아니.
[경자] 그럼 왜 왔어요?
[주몽] 앞으로 협조를 부탁한다고 하더군. 당신 가봐야하지 않소?
[경자] 네, 가야죠.
[충돌] 아주머니 축하합니다. 바쁘시겠어요.
[경자] 많이 선전해 주세요.
[충돌] 형님은 선전을 하지 말라고 하던데.
[경자] 네?
(전화벨이 울린다.)
[경자] 여보세요? 네 여기 계세요. (충돌에게) 집에서 전화에요.
[충돌] 저요? 여기 온 줄은 어떻게 알았을까? 나야. 뭐? 사장이면 사장이지 일요일에 나오
라는 법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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딨오? 뭣이? 그래? 곧 갈게. (수화기를 놓고) 사장이 나오래.
[주몽] 이건 횡포군.
[충돌] 나 참--- 형님, 내가 과장이 됐대.
[주몽] 과장이?
[충돌] 섭외과장.
[주몽] --- 축하해.
[충돌] 가봐야겠는데, 그럼--- . 내가 과장---
(충돌이 나간다.)
[경자] 잘 됐네요.
[주몽] 일을 해낼까?
[경자] 출세가 빠른데요.
[주몽] 흠 그래도 나보다 일년 늦었어--- 당신 안가는 거야?
[경자] 떠나겠어요. 점심은 부엌 선반에---
[주몽] 내 걱정은 마.
[경자]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돌아올게요.
(경자가 나간다. 주몽은 머뭇거리다가 TV를 켜고 의자에 앉는다. 이어 주간지를 펴든다. 잠
시 사이. 전화벨이 울린다.)
[주몽] 네, 아 윤상무님 어쩐 일입니까? 꿈이요? 무슨 꿈을 꾸셨는데요? 자꾸 쫓겨다녔어
요? 무서운 사람이 윤상무님을 잡을려고요? 아 그런 꿈은 자주 있는 겁니다. 뛸랴고 하는데
도 발이 떨어지지 않죠. 윤상무님을 쫓던 사람은--- 그게--- 뭐라고 할까요--- 신상무님의
욕망, 욕정, 또는 자유에 대한 갈망을 상징한다고 봐야죠 네? 욕망, 욕정, 네? 욕정 말입니
다. 아니 저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닙니다. 네?--- 연판장이요? 윤상무님을 모함하는 움
직임이 있어요? 거 나쁜 놈들인데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윤상무님이 회사의 공금을 횡
령한다니 전 짐작이 안가는데요? 연판장이요? 전 모르겠는데요. 윤상무님이 그럴 리가 있습
니까? 저는 전혀--- 네 알겠습니다. 네네, 안녕히 계세요. (수화기를 놓고 앉는다. 주간지
를 들었다가 다시 내던지고 다시 수화기를 든다.)
[주몽] 장관 바꿔! 나야! 장관이야? 내일부터 전화 통화료를 열 배로 올려. 쓸데없는 전화
를 하는 놈들이 많아. 아냐, 천 배로 올려! 차후에 일어날지 모를 사태에 대해서는 내가 정
치적 책임을 질테니까. 미안하다구? 울긴 왜 울어!
(수화기를 내던지듯 논다. 이어 크게 한숨을 쉬고 눈을 감는다. 초인종 소리가 난다.)
[주몽] 나 이런! (문쪽으로 가서) 누구요? 네? 우리 예수 믿어요. 예수를 믿는다니까!
(주몽이 돌아온다. 다시 초인종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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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 나 이런! 누구요? 네? 아, 우리 불교 믿어요. 불교!
(다시 돌아온다. 잠시 후 초인종.)
(일어나며) 도대체 장관은 뭣 하는 거야!
(주몽이 문 쪽으로 가자 말숙이 들어온다. 초미니스커트에 빨간 꽃 한 송이를 들고 있다)
[말숙] 안녕하세요?
[주몽] 네? 아---
[말숙] 기억나시죠? 말숙이에요!
[주몽] --- 네.
[말숙] 이 꽃 받으세요.
(주몽 얼떨김에 꽃을 받는다.)
[말숙] 실례가 안될까요?
[주몽] 글쎄--- 이왕 왔으니--- 앉으세요.
[말숙] 경치가 좋은데요. (의자에 앉으며) 일요일이고 해서요--- 산보 좀 걸어볼랴고요. 언
덕 위에 하얀 집 생각이 나더군요. 아까--- 사모님이 외출하셨죠?
[주몽] --- 네.
[말숙] 저도 눈치는 있어요. 오해를 받기 싫어서--- 사모님이 안 계시는 틈에--- 애들은 없
어요?
[주몽] --- 아직.
[말숙] 단출한 살림이군요.
[주몽] --- 이름이--- ?
[말숙] 말숙이라니까요.
[주몽] 아--- 그렇지.
[말숙] 진짜 이름은 산남 이지만 이젠 말숙이로 통해요.
[주몽] --- 혹시 여기 들어오는 걸 누가 보지 않았습니까?
[말숙] 아뇨. 선생님은 구식이군요.
[주몽] 그런게 아니라--- 친구들은 없어요? 일요일인데--- 애인도 있을 테고--- 이런 미인
이 애인이 없을리 없겠는데---
[말숙] 그런건 없어요. 사귀면 다 애인인 걸요 뭐. 하기야 전 요새 젊은 남자들이 싫어요.
어리고--- 젖비린내가 나요. 오히려 선생님처럼 나이가 좀 지긋한 분들이 좋아요. 인생경험
이 많은 분들이 여자를 더 사랑해요. 그렇잖아요?
[주몽] --- 음--- 음 (잠시 침묵이 흐른다. 말숙이 고개를 들고 미끈한 다리를 쭉 뻗는다.
주몽이 그 흰 다리를 본다.)
[주몽] --- 음, ---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죠?
[말숙] 저요? 선생님하고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요.
[주몽]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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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숙] 선생님.
[주몽] 네.
[말숙] 선생님 연세를 물어봐도 괜찮아요?
[주몽] 글쎄--- 몇 살로 뵈오?
[말숙] 한--- 사십?
[주몽] 비슷합니다.
[말숙] 아니에요. 그보다 많죠?
[주몽] 네. 고향은 어딥니까?
[말숙] 맞춰보세요.
[주몽] 서울.
[말숙] 아뇨.
[주몽] 그럼?
[말숙] 서울이요. (말숙이 유쾌한 듯 깔깔 웃는다.)
[주몽] 언제부터 쌀롱에 나가죠?
[말숙] 한--- 이년 됐어요.
[주몽] 부모님은?
[말숙] 아이 선생님도, 그런걸 꼬치꼬치 묻네요. 저하고 결혼할 것도 아닌데.
[주몽] 음--- 실은--- 좀 할 일이 있는데--- 회사의 일도 있고---
[말숙] 저도 그래요, 선생님 저의 싸롱에 좀 놀러 오세요. 그럼 제가 여기에 올 필요가 없
거든요.
[주몽] 틈을 봐서 --- .
[말숙] 안오시면 일요일에 또 찾아 올래요.
[주몽] 그건---
[말숙] (유쾌하게 웃으며) 선생님은 너무나 신중하셔. 그럼 가보겠어요. (말숙이 손을 내민
다. 잠시 머뭇거리다 주몽이 그 손을 잡는다.) 손이 큰데요 손이 큰 남자는 마음도 크다죠?
기다리겠어요? 안녕! (말숙이 손을 흔들며 나간다.)
[주몽] 나 참! (말숙이 다시 들어온다)
[말숙] 미안해요. 저 주간지 다 읽었으면 좀 빌려 줄 수 없어요?
[주몽] --- 네, 가져가세요. (주몽이 주간지 뭉치를 들어 말숙에게 준다.)
[말숙] 대방동에서 일어난 그--- 납치사건 아시죠?
[주몽] 네.
[말숙] 그 기사도 여기 있어요?
[주몽] --- 있을 겁니다.
[말숙] 난 납치된 그 여자가 불쌍해 죽겠어요. 안 그래요?
[주몽] --- 네.
[말숙] 보고 돌려 드리겠어요.
[주몽] 아니 괜찮습니다. 다 읽거든 쓰레기통에 버리세요.
[말숙] 고맙습니다. 안녕! (말숙이 또 한번 손을 흔들며 나간다.)
[주몽] 나 참!
[페이지] 029
(주몽이 홧김에 전화통을 쥔다. 그러나 한숨을 쉬며 다시 논다. 비스듬히 앉아 TV를 본다.
그의 공상을 상징하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유유히 담배를 피워 문다. 그는 행복하다. 문이
불쑥 열리며 주몽과 비슷한 복장을 한 설명역인 「사나이」가 개머리판 없는 카아빈 총을
들고 들어온다.)
[주몽] 네? (주몽이 벌떡 일어난다.)
[사나이] 쉿---
[주몽] 누--- 누구요?
[사나이] 조용히. 아무도 없지? 거기 앉아! (주몽이 공포속에 주저앉는다.)
[사나이] 죽고 싶냐, 살고 싶냐?
[주몽] 하필 우리집에---
[사나이]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죽고싶어, 살고싶어?
[주몽] 그거야 뭐---
[사나이] 죽고 싶어?
[주몽] (놀라서) 아뇨!
[사나이] 태도를 분명히 해. 우물쭈물 하는 놈은 질색이야. 살고 싶으면 나 하라는 대로
해.
[주몽] --- 보다시피 우리집에 뭐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 TV도 좋고 뭣이든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갖고 가세요.
[사나이] 이건 내가 무슨 좀 도둑인줄 아니? 내가 물건이나 훔칠 사람 같아?
[주몽] 그럼--- ?
[사나이] 두고보면 알 거야. 경찰이 날 잡을랴고 해.
[주몽] 그럼 빨리 피하시오.
[사나이] 피하긴--- 이렇게 안전지대에 들어섰는데.
[주몽] 안전지대라니?
[사나이] 경찰이 들어오면 넌 죽어. 인정이 많은 경찰이, 널 죽이면서까지 날 잡겠나?
[주몽] 그럼 나를 인질로--- ?
[사나이] 그런 셈이지.
[주몽] 경찰이 압니까?
[사나이] 경찰이 뭘 알아? 말을 분명히 해 우물쭈물 하지 말고. 넌 우물쭈물해서 탈이야.
분명히 얘기해봐.
[주몽] 내 말은--- 경찰이 당신이 여기 들어온 것을 아는가 하는 말입니다.
[사나이] 그걸 말이라고 해? 이 집을 포위하고 있어!
[주몽]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오?
[사나이] 여기서 줄곧 사는 거지. 일년이건 이년이건 환갑이 될 때까지. 그렇지 않아? 사람
은 너처럼 혼자서는 못사는 법이야. 그러니 둘이서 살아야지. (들고 있던 카아빈 총을 내민
다.)
[주몽] 네?
[사나이] 받아!
[주몽] 지금 농담을 할 때가 아닙니다.
[사나이] 왜이래? 너 내가 농담하는 걸 봤니? 자,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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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이 일어나 손을 내민다. 사나이가 총을 넘겨주며 재빨리 안에서 단도를 끄내 주몽의
옆구리에 댄다.)
쓸데없는 생각마! 자 창가로 가, (사나이는 주몽을 앞세우고 창가로 간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지? 총을 밖으로 내밀어. 쓸데없는 짓을 하면 이 칼이 옆구리에 꽂힌다. 됐어. 소리 질
러, 가까이 오는 놈은 쏘아 죽인다고 해. 빨리!
[주몽] (낮으막한 소리로) 가까이 오는 놈은 쏘아 죽인다.
[사나이] 크게! 저쪽까지 들리게!
[주몽] (큰소리로) 가까이 오는 놈은 쏘아 죽인다.
[사나이] 됐어! (재빨리 총을 뺏으며) 인제 네가 범인이야.
[주몽] 내가요?
[사나이] 그렇게 됐오.
[주몽] 믿을만한 사람이 없을걸.
[사나이] 믿게 만들면 되는 거야. 역사도 뜯어고치면 믿게 마련인데. 네까짓 벌레같은 놈이
야 마음대로 바꾸어 버릴 수 있지.
[주몽] 내가 벌레요?
[사나이] 벌레지.
[주몽] 이것 봐요. 난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넓은 땅에서 하필 당신이 왜 우리집에 뛰어
들었는지?
[사나이] 우연이지.
[주몽] 내 설교를 한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자수하세요. (사나이
주몽의 뺨을 갈긴다.)
[사나이] 임마 너 같은 악당도 자수를 안 하는데 내가 왜 자수를 해.
[주몽] 내가 악당이라고요? 흥, 난 사람을 해친 적이 없어요. 사람을 모함한 적도 없고. 싫
은 소리 한번 안 했어요.
[사나이] 그럼 사람을 도와준 적이 있어? 자진해서 말이야?
[주몽] --- 그건---
[사나이] 그것 봐 나쁜 짓도 못하고 좋은 일도 못하고--- 너 같은 놈은 악당보다도 더 나쁜
놈이야. 살 자격이 없어. 거기 앉아. (주몽이 앉는다.) 잠옷을 입고 TV나 보게 해 줄까?
(사나이는 깡통 맥주를 마신다. 밖에서 메가폰을 통한 경찰의 경고가 들린다.)
[소리] 「이주몽 이주몽! 잘 들어라」 (이주몽이 놀란다.) 이주몽 잘 들어라. 너는 완전히
포위됐다. 무기를 버리고 나와. 육분 내에 나오지 않으면 공격을 개시한다.
[사나이] 것 봐! 네가 범인이야, 일어나. (이주몽이 일어난다.)
[사나이] 창가로 가. (주몽이 창가로 간다.) 아까처럼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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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로 소릴 질러. 너희들이 공격을 하면 자살한다고 해.
[주몽] 여보!
[사나이] 시끄러워, 어서!
[주몽] (창 밖으로) 너희들이 공격을 하면 난 자살한다.
[사나이] 됐어! 의자에 앉아.
(주몽이 의자에 앉는다. 사나이가 유유히 맥주를 마신다.)
(암전)
[아나운서의 소리] 범인 이주몽은 아직도 경찰과 대치중에 있습니다. 세시간 동안에 걸친
끈질긴 설득에도 불구하고 범인 이주몽은 아직도 완강히 버티고 있습니다.
(거실이 밝아진다. 주몽과 사나이가 TV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소리] 「그런데 범인 이주몽은 오늘 오전 여덟시 반, 범인의 집 근처에 있는 맹수복씨 집
에 개머리판 없는 카아빈 총을 들고 침입, 마침 잠을 자고 있던 맹씨의 부인 이연자 여인을
위협, 금품을 요구하다 실패 주민들의 신고로 급거 출동한 경찰의 추격을 받아 자기집으로
피해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범인 이주몽은 현재 동서보험회사의 조사과장으로 있
으며 평소 말이 없고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 무좀 가려움증에는 태서양 제약
회사의 「코롱코」 당신의 무좀에는 코롱코. 시원하고 후련한 코롱코. (사나이가 TV의 볼륨
을 낮춘다.)
[사나이] 어때? 네가 범인이야.
[주몽] 흠 사실이 밝혀지겠지. 이름이나 압시다. 이름이 뭐요?
[사나이] 그거 이상하다. 네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다 물으니. 다른 사람에게 흥미가 있을
리 없는데, 내 이름은 사나이야. 성은 사, 너의 아내의 성도 사가지 이름은 나이.
[주몽] 그런걸 물은 내가 바보지!
[사나이] 그렇지 본래 다른 사람한테는 관심이 없었던 주제에.
[주몽] (혼자말처럼) 하필 내가 걸려들었을까?
[사나이] 세상은 그런 거야 (방을 돌아보며) 왜 여기에 집을 지었지? 여기가 옛날 형장이
야.
[주몽] 형장?
[사나이] 숫한 사람이 이 언덕에서 죽었지. 죄수들을 여기서 처형했어 네가 옛날 형장에 집
을 진 것도 따져보면 우연은 아닐꺼야 너도 죄수니까, 여편네는 어디 갔어?
[주몽] 여보 참는데도 한계가 있어요.
[사나이] 호! 너도 화를 내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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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 도대체 당신은---
[사나이] 시끄러워, 임마. 전쟁터에서 잡힌 포로는 하라는 대로 하면 돼. 너는 지금 내 포
로다.
[주몽] 나, 참!
[사나이] 말 많은 포로는 죽기 마련이야.
[주몽] 그래, 일요일 아침에, 죄 없는 사람의 집에 들어와, 이렇게 괴롭혀야 합니까?
[사나이] 죄 없는 사람?
[주몽] 아까도 얘기했지만 저는 죄가 없는 사람입니다.
[사나이] 공부도 했다는 녀석이 뭐 이래?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말해봐. 죄가
있어, 없어?
[주몽] --- 없어요--- .
[사나이] 잘 생각해봐.
[주몽] 없다니까요. 난 당신처럼 저런 총을 들고 사람을 협박한 일도 없고---
[사나이] 임마! 총을 든 사람만 사람을 협박 하냐? 만년필을 가진 사람은 어때? 수표를 움
켜쥐고 있는 사람은? 큼직한 도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책을 들고 있는 사람은? 방송국에
서 마이크를 잡고 있는 사람은 어때? 말해봐! 네 죄가 있어, 없어?
호! TV중계차가 왔군. 사람들이 많은데. 자넨 지금 매스콤을 탔어. 내 덕분에! (사나이가
TV의 볼륨을 높인다.)
[주몽] --- 저런--- 충돌이도 있군.
[사나이] 자네 친구가? (무대 한쪽에 TV의 화면을 상징하는 네모진 판이 밀려나온다. 후레
임이 있을 뿐, 그 안은 뚫려있다. 충돌이 마이크를 들고 후레임 뒤에 서서 관객을 향한다.)
[충돌] (마이크를 입에 대고) 네, 이주몽씨는 저의 대학 선배이고 같은 회사의 직원입니다.
지금, 방송이 나가고 있습니까? 네? 그렇죠. 조사과장으로 있습니다. 글쎄요. 암만해도 믿
어지지 않습니다. 평소 말이 없고요--- 남한테 싫은 말은 절대 안 하는 사람이죠. 동기요?
글쎄--- 동기라면은--- 글쎄--- 역시 장래에 관한 문제랄까요? 과장이 된지 벌써 칠년이거
던요. 밑에 있던 후배들이 자꾸 출세를 하고--- 하기야 저도 벌써 과장이니까요--- 승진할
가망이 당장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데 대한 자포자기적인 생각이 동기가 된 것 같군요.
뿐인가요--- 이제 한달 쯤 있으면 부인의 한달 수입이 더 많아질 위험성도 있지요. 부인이
남편보다 더 많은 돈을 벌 때--- 그 창피함! 안타까움! 부끄러움! 뭐 이런 것들이 뒤죽박죽
이 돼서 그런 행동으로 나가는 것이 아닐까요? 제가 들어가 설득을 해요? 왜 그런 생각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분의 범행동기는 저의 빠른 출세 때문이기도 하니--- 제가 들어가면
오히려 역효과를 낼 겁니다.
[주몽] 나 참! 저게 미쳤나?
[충돌] 저를 시기하고 있을 겁니다. 네? 글쎄--- 역시 회사의 인사정책이 문제겠죠. 승진의
기회를 많이 줘야겠죠. 희망을 갖고 일할 수 있도록--- 아--- 박교수님.
(박교수가 나와 마이크를 잡는다.)
[박교수] 네--- 제가 박교수입니다. 저의 제자죠--- 글쎄--- 평소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관
찰해온 제자입니다. 좀 이상하다 했습니다. 어제 내 환갑잔치에도 안나왔습니다. 안나올 사
람이 아니거든요. 수업료도 내주었고 재정보증인도 되어주었고 결혼식 때는--- 주례도 해줬
는데 안나올 리가 없거든요. 저는--- 범죄 심리학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청소년의 범
죄가 있을 때마다 저는 TV에도 자주 나가고 신문에 글도 쓰지만--- 이번 경우도 마찬가지입
니다. 욕구불만이 범행의 원인이겠죠.
[사나이] --- 저 늙은이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TV에 나오는 사람이 아냐?
[주몽] 그게 취미지. 주책이 없으니까.
[박교수] 네, 관심을 가진 건--- 이주몽군이--- 야심적이었으니까요. 퍽 파괴적인 성격이
있었죠. 우리집에 놀러와서도 성냥개비를 때깍때깍 꺾는다던가,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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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하게 손가락을 움직인다던가. 나를 부를 때는--- 박교수님이니, 박박사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박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존경심이 없고--- 도전적이었죠. 그래서 유심히 관심을 가
졌는데--- 마침내 이런 끔찍한 사건을 저질렀군요.
[주몽] 저런걸 선생이라고---
[박교수] 불행한 일입니다. 한가지 경찰당국에 바라고 싶은 것은 생포를 해달라는 말입니
다. 힘이 들고 시간이 걸려도--- 생포를 해야 합니다. 네? 슬픈 일입니다.
[노인] (마이크를 쥐고) --- 네--- 전 요 앞에서 구멍가게를 하고 있습니다. 구멍가게요.
가끔--- 범인이 들려서 맥주를 한 두병 사가지고 갔죠. 안주는 호콩을 좋아합니다. 오징어
포를 사라면 흠! 하고 비웃더군요. 호콩 좋아하는 사람치고 건강한 사람은 없죠. 근데 범인
은 꼭 호콩을 사거든요.
[사나이] 왜 호콩만 샀냐?
[주몽] 호콩을 산것도 죄가 되나?
[노인] 성미가 괴팍하죠. 맥주를 사면 잔돈이 있어도 꼭 오백원 짜리만 내거던요. 이건 사
람을 괴롭히자는 심보죠. 맥주는 꼭 옆구리에 차들고 가죠. 이렇게요. 그게 바로 개머리판
없는 카아빈 총을 옆구리에 차고 다니던 버릇 때문이었군요. 내 이상하다 했죠. 외상은 없
습니다. 자주 들리면 외상으로 물건을 가져 갈 만도 한데--- 그건 믿음이 없고 정도 없다는
증거죠.
[주몽] (어이가 없다는 듯) 나 참!
[경자] 네, 저의 주인입니다. 시골에 갈랴고 버스 정거장에 나갔다가 방송을 듣고 돌아왔습
니다. 믿어지지 않습니다. 네? 무슨 불만이죠? 우린 남 못지 않게 행복하게 살아 왔습니다.
아뇨.
(이때 말숙이 나온다. 말숙이 빼앗듯이 마이크를 쥔다.)
[말숙] 네 제가 김말숙이예요. 만났어요. 한 손에 총을 쥐고요--- 반갑다고 하더군요. 두
손 모아 빌었죠. 희망을 갖고 살라고요. 네? 그분을 잘 알아요. 제 말이라면 믿는 사람이니
까요. 네 좀 더 시간적 여유를 달라고 하더군요. 동기요?--- 그건--- 네? 설득을 다시 해
요?--- 그거야--- 제가 또 들어가요?--- 부끄러워요. 제가 무슨 영웅입니까? 그저 시민으로
서--- 개인적으로 친숙할 뿐이어서--- 네--- 그렇게 하죠--- 또 들어가 설득을 하겠습니다.
그러죠.
(말숙이 딱하다는 듯 마이크를 내린다. 그쪽을 비치던 조명이 어두워진다.)
[소리] 대풍물산의 제공이었습니다. 조미료는 꿀맛! 산뜻한 맛! 쓰고 싶은 맘, 치고 싶은
마음. 조미료는 대풍물산의 꿀맛. 아빠도 엄마도 조미료는 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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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맛을 풍기는 꿀맛. 꿀맛은 식탁의 왕자!
(사나이가 TV의 볼륨을 낮춘다.)
[사나이] 너 다음엔 국회의원을 입후보해도 좋겠다.
[주몽] 듣기 싫어요! 흠--- 사람들! 그런 것들을 사람이라고. 살맛 없어!
[사나이] 넌 완전한 진범이야. 알았지? 사람이란 남의 말에 좌우되는 거야. 자기의 생각이
나 의견은 필요 없어. 남이 저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너의 모든 것이 결정돼.
[주몽] 그래 나를 이 꼴로 만든건 누구요?
[사나이] 이제 나왔던 사람들. 그리구 네 자신이지. 네가 기름을 부니까 저 사람들이 불을
질렀지. 그건 그렇고--- 연구소 개소식이 내일인가?
(주몽이 머리를 끄덕인다.)
[주몽] 아니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아오? 우리집 사람의 도자기연구소의 개소식을 알다니?
[사나이] 나 모르는 것이 있나?
[주몽] 그래, 내일 그 개소식이 어떻단 말요?
[사나이] 개소식장을 수라장으로 만들 생각이요.
[주몽] 뭐요?
[사나이] 도자기라는 도자기는 다 깨버리고. 이것 봐 내 이런 일을 혼자서 하는 줄 알아?
내 친구들이 저 밖에 구경꾼들 틈에 있어.
[주몽] 다른 것은 몰라도 우리 처의 그 도자기 연구소는 안돼.
[사나이] 왜?
[주몽] 그 연구소를--- 우리 처가 어떻게 만든 건데 왜 그 연구소를--- ?
[사나이] 네가 그연구소 만드는 일에 무슨 도움을 줬니? 십년 동안 애써 도자기를 공부하고
연구한 것은 너의 처야. 그동안 넌 뭣했니? 남편의 무관심속에 생긴 연구소는 필요 없어.
그러니 수라장을 만들어도 괜찮아. 의의가 없단 말야. 뿐인가 우리의 도자기도 안 팔릴 것
같고.
[주몽] --- 우리 부부를 한꺼번에 멸망의 구덩이 속으로 떨어뜨리는군, 그럴 필요가 있어
요?
[사나이] 부부는 일심 동체라면서?
[주몽] 농담을 할 때가 아닙니다.
[사나이] 하기야 그렇지. 부부간의 사랑이 있다면 한쪽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를 희생도 할
수 있지.
[주몽] 당신은 그럴 기회도 안주고 있소.
[사나이] 상대방이 원해야 그런 기회를 줄 수 있지.
[주몽] 원하다니?
[사나이] 이를테면 너의 여편네가 너를 위해 생명을 던져? 이미 이 세상에선 죽은 거나 다
름없는 남편을 위해 생명을 버려?
[주몽] --- 그럼 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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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이] 네가?
[주몽] 내가 처를 위해서---
[사나이] 그런 말을 믿을 바에야 차라리 정치가의 말을 믿겠다. 너같이 무관심한 것이 어떻
게 그럴 수가 있어?
[주몽] 내 처의 그 연구소는 그녀에게는 생명 이상으로 소중한 거요. 그러나 보장이 있어야
해.
[사나이] 남의 인격이나 사업을 보장해 본적이 없는 주제에, 오히려 의심을 하다니! 참! 어
차피 진범으로 체포되면 우선 그 카빈총의 출처에 대해 심문을 받을 거야. 잘 생각해서---
하기야 일이 좀 복잡하군. 우리 둘이면 몰라도--- 잘되면 우리들 사이의 약속은 비밀로 넘
어갈 수 있거든. 근데 저 여자는 어떻하지? 증인격이란 말야. 이것이 단독범이어야 하는데
이미 이 몸도 들어 났으니. 여자의 입은 변솟간 휴지처럼 가벼울 것이고--- 모든게 너한테
달렸지.
[말숙] (밖에서) 선생님! 선생님, 말숙이가 왔어요.
[주몽] 저게---
(사나이가 문을 연다. 말숙이 들어온다. 주몽이 말숙의 뺨을 갈긴다.)
[말숙] --- 폭력을 쓰기요? 좋아요 생명을 걸고 왔어요.
[사나이] 여자를 때리면 되나! 그래도 약속을 지켰는데.
[말숙] 자수해요 선생님 자수를 하면 죄는 가벼워질 거에요. 혹시 형무소에 들어가도 제가
일주일에 두 번씩 꼭 면회를 가겠어요.
[사나이] 겨우 두 번?
[말숙] 세 번도 좋아요.
[주몽] 왜 뛰어들어서 야단이지? 그래 TV카메라 앞에 서니까 기분이 좋아? 뭣이 어떻다구?
내가--- 시간적 여유를 달랬다구?
[말숙] 그건--- 나도 모르게---
[사나이] 자 코피나 좀 마셔.
(말숙이 테이블에 있는 코피잔에다 코피를 따른다. 세 사람은 말없이 코피를 마신다.)
[말숙] --- 음, 밖이 왜 이렇게 조용하죠? 어떻게 하는 거예요? 선생님 말씀 좀 하세요. 저
분도요 네? 밖에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저하고 같이 나가요. 제가 경찰에 진정서를
내겠어요. --- (무거운 침묵에 겁을 먹기 시작하여) --- 그럼--- 저는 나갈래요? (일어나
며) 괜찮겠지요? 저 나가겠어요. 나가도 되죠? (말숙이 문쪽으로 간다) 저--- 나가요.
(주몽 말없이 총구를 말숙에게 겨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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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지 마요. 제가 여기 있으면 뭣해요?
[주몽] --- 여기와 앉아요.
(말숙이 떨면서 의자에 앉는다.)
[말숙] --- 저는 --- 여러분을 구할랴고 자진해서 들어왔어요. 그것이 나빠요?--- 선생님,
절 내보내줘요--- 절--- 죽이는 건 아니죠? 네?
(사나이가 쥐고 있던 코피잔을 테이블에 탁 논다. 말숙이 깜짝 놀란다. 사나이가 다시 한쪽
장갑을 벗는다. 말숙이 땅군에 걸린 뱀처럼 사나이의 행동에 붙들린다. 사나이는 칼을 꺼낸
다. 말숙이 창백해진다. 사나이는 말없이 칼로 손톱을 깎는다.)
[말숙] --- 제발--- 내보내줘요.
(사나이가 칼을 테이블에 놓고 TV의 볼륨을 올릴려고 한다. 눈치를 보던 말숙이 재빨리 단
도를 잡는다.)
[사나이] 왜 이래?
[말숙] (주몽에게) 자 칼도 뺏어요. 총을 겨눠요. 저 사람을 끌고 같이 나가요.
[사나이] 그 칼 이리 줘.
[말숙] 안돼요.
(말숙이 의자 뒤쪽으로 피한다. 사나이가 달려가 말숙을 붙잡는다. 주몽이도 말숙의 칼을
뺄랴고 달려든다. 말숙이 반항을 한다. 잠시 후 말숙이 쓰러진다.)
[사나이] 이러 참--- 죽었는데.
[주몽] 죽어?
[사나이] 그 칼 좀 빼.
(주몽이 말숙의 복부에 꽂힌 칼을 뺀다.)
[주몽] 이럴 필요야--- ?
[사나이] 난 몰라. 자네가 한일도 아니고, 자기가 그랬어.
[주몽] 쓸데없이 뛰어들더니---
[사나이] 증인이 없어졌군. 그럼--- 어떻게 하지?
(주몽이 칼을 쥔 채 곰곰이 생각한다.)
[사나이] 어떻거지?
[주몽] 결국--- 내가 이 여자를 죽인 꼴이 됐군.
[사나이] 난--- 이 손에 장갑을 끼고 있었어. 그러니 내 지문은 없지.
[주몽] 지문?
[사나이] 있는 것은 그 여자와 너의 지문 뿐이야.
[주몽] (머리를 끄덕이며) --- 좋아--- 당신을 믿을 수 있소?
(사나이가 머리를 끄덕인다.)
[주몽]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사나이] --- 심판관. 너는 피고구.
[주몽] --- 나가겠어. 그 사이에 당신은 피하도록 하시오. 결국 이놈의 세상은 사람을 혼자
조용히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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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내버려두지도 않아. 살기도 귀찮아!
(주몽이 창가로 간다.)
[주몽] (창 밖을 향해) 나간다! 모두 뒤로 비켜! 한 오십 미터 쯤 뒤로 비켜! (주몽이 문쪽
으로 간다.) --- 내 아내의 연구소에 손을 대면 용서 않는다! 약속을 지켜!
(사나이가 머리를 끄덕인다.)
[사나이] 저 여자를 데리고 나가. 총은 창밖으로 던지고--- .
(주몽이 총을 어깨에 메고 말숙을 안는다. 서서히 밖으로 나간다.)
[주몽] (밖에서) 뒤로 물러나! 뒤로!
(거실의 불이 서서히 어두워진다. 설명역인 사나이가 무대 앞으로 나온다.)
[설명역] 이 사건은 장안 사람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습니다. 이주몽은 변호사의 배정도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그는 최후 진술에서 가엾게 죽은 김말숙의 무덤에 꽃다발이나 보내달
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아내가 보는 앞에서 정부를 동정한다고 해서 시민들은 그를 통렬히
비난했습니다. 그의 은사인 박교수는 어떤 신문에 「사랑하는 제자를 사형대에 보내면서」
라는 눈물어린 글을 실었습니다. 나도 그 글을 읽고 울었습니다. 박교수는 TV에도 나와 울
면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주몽은 상고를 하라는 아내의 간청도 거절했습니다.
죽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의 아내 사경자가 경영하는 도자기 연구소는 이 사건을 계기로
급속도로 발전하여 점원이 다섯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만인의 동정이 그녀에게 쏠린 것입니
다. 자, 이제 마지막 면회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수의에 수갑을 찬 주몽이 나온다. 잠시 후
경자와 충돌이 나온다.)
[주몽] 오랜만이군. 앉아요.
[충돌] 형님--- 수고가 많죠? 앉으세요. (주몽이 앉는다.)
[주몽] (충돌에게 애써 명랑한 목소리로) 그래 과장노름이 어때?
[충돌] 그저 그렇죠 뭐. (충돌이 담배를 꺼내 불을 그어 주몽의 입에 물려준다. 주몽이 감
미나 하듯 길게 연기를 내뿜는다.)
[주몽] --- 그래 연구소는 잘 되오?
[충돌] 굉장합니다. 사람들이---
[주몽] 다행이군. (경자에게) 열심히 해요. 그리구--- 인젠 내가 없는 걸--- 아니지 나를
만난 적이 없는 걸로 생각해서--- 새로 출발하는 셈치고---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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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요. 부탁이 있어. 집에 있는 내 물건--- 그리구 내 사진등, 모든 것을 없애 줘. 불에
태우는 것이 좋겠군--- 그 집도 처분하지. 집터도 좋지 않은데.
[경자] --- 왜 이런 짓을 했어요? 마지막인데 저한테 만이라도 말씀하세요.
[주몽] --- 검찰에서 진술한 대로야. 충동적인 범죄야.
[경자] 믿어지지가 않아요.
[주몽] 사실이야 (충돌에게) 회사 사람들한테 미안하다고 전해주게.--- (경자에게) --- 별
할말도 없어. 그저 미안할 뿐이야. 그간 너무 고생만 시켰고. 자 인젠 돌아가 봐. 어서.
(경자가 일어나 한 손을 주몽의 어깨에 얹는다. 주몽이 그 손을 애써 잡는다. 경자가 울며
뛰어 나간다. 망설이던 충돌이 주몽의 손을 잡는다.)
[주몽] 울긴 왜 울어? 열심히 뛰어다니게. 그래 그--- 윤이사의 추방운동은 어떻게 됐니?
[충돌] 윤이사요? 말씀 마세요. 사건이 엉뚱하게 번져서 오히려 우리가 당하게 됐어요. 그
래 할 수 있습니까? 형님은 이렇게 됐고 해서--- 모든 일을 형님이 조작한 일이라고 했죠
뭐. 양해하세요.
[주몽] 그래?
[충돌] 그럼--- 수고 많이 하세요.
[주몽] 잘 살게.
(충돌이 머뭇거리다 나간다. 주몽이 마지막 담배를 길게 빨았다가 푸르고 긴 연기를 서서히
내뿜을 때 암전. 다섯 사람이 나와 인사를 한다. 이어 무대가 어두워지고 파란 조명이 던져
지며 이들이 등장했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서서히 옆 걸음으로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