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에 발췌된 인용문은 《불교평론》 제6호에 발표된 황호덕의 〈주살(誅殺)된 달마 ㅡ 엽기(獵奇) 문화의 한 읽기〉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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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달마(達磨)와 캐롤(Lewis Carrol): 박상륭과 백민석 사이의 심연들
1) 박상륭의 탁발승
헤겔주의와 선불교적 모티브 엽기성의 중심은 어찌 됐든 신체에 대한 훼손과 변형에 있다. 그렇다고 할 때, 이 엽기성의 문제는 인류의 기원만큼이나 오래된 클래식한 범주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고딕과 판타지라는 개념을 통해 타자화된 근대 서사의 한 종류로 엽기성의 문제를 해명하려는 시도들조차 때때로 더 많은 기갈을 낳는다.
원시사회의 카니발리즘, 디오니소스적 축제, 구약성서 속의 카인과 아벨, 예수의 못박음과 같은 서구의 희생제의적 서사들과 신체 일부의 절단과 공양(供養), 수도의 방편으로서의 남근에 대한 학대를 보여주는 아시아 불교 문화의 수많은 선불교(禪佛敎)적 일화들은 그러한 심증의 구체적 증거들이다. 아즈텍 문명의 피비린내 나는 제의와 일본의 할복의식을 포함하여 문명은 흔히 야만적 풍경을 지렛대 삼아 형이상학의 심연에 도달하곤 했던 것이다.
루이 브뉘엘의 《안달루시아의 개》 도입부에 내장된 면도칼로 안구를 자르는 장면이나, 살바도르 달리 혹은 프란시스 베이컨의 뭉개지고 일그러진 신체 형상들은 가히 엽기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의 파괴성을 보여준다. 《장화홍련전》을 거쳐 《구마검》에 이르는 섬뜩한 괴담과 복수들, 6.25전쟁을 다룬 손창섭이나 장용학의 구더기 들끓는 소설은 이 충격의 상상력이 얼마나 집요한 충동인지를 알게 한다.
김동리의 〈등신불〉에 등장하는 만적이라는 인물의 소신공양(燒身供養)은 또 어떤가. 최루탄 냄새 매캐한 1970년대 대학가의 시위현장을 다소 탐미적으로 채색했던“자유의 나무는 피를 먹고 산다.”라는 데카당트한 구호, 흔히 압사(壓死)와 분신(焚身)이 되지피곤 했던 1980년대의 열기는 피의 수사와 혁명이 맺는 관계, 그 관계를 설득의 수사로 삼는 수많은 시와 소설을 낳았고 그것들은 다시 혁명의 열기로 재점화되었다. 박노해와 백무산이 들려준 〈손무덤〉의 이야기들만큼 강력한 구호가 달리 있었던가.
하지만 그 모두를 통해 우리가‘괴이쩍은 것에 흥미가 끌려 쫓아다니는 일’따위를 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엽기의 현재와 그것의 표면적 영속성 사이에는 나락과 같은 단절이 있다. 단적으로 말해, 육체에 대한 훼손들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지렛대이거나 구도였으며 업(業)이거나 의미로 가는 제의(祭儀)를 의미하곤 했다. 박상륭의 이름난 이야기들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예수와 자신의 동료를 배신한 유다의 죽음의 과정을 다룬 〈아겔다마〉(1963/1997년 문학과지성사 재출간)는 그의 등단작이다. 이 작품의 겉면은 일종의 위반과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듯하지만, 실제의 그 구원의 과정은 선불교적인 모티브에 의존해 있다. 유다는 예수의 못박힘을 보고, 그가 그토록 탐했던 막달라 마리아의“팽팽하고 물큰해 보이는 두 가랑이가 창끝에 의해 들쳐나 보이는”장면을 목도한다.
그리고 그 번민 속에서 자신을 보살피던 노파의 옷을 찢고 능욕하고 피흘리게 한다. 그는 “광포한 짐승”,“짐승의 한계에서도 더 아래쪽 길을 처벅처벅 걸어댔다”. 문제는 유다가 그런 일을 설명하는 태도이다. 그는 그 모든 엽기적 행각의 변명처럼 이렇게 말한다.“아까는 확실히 신경이 이상했었어. 신경(神經)과 나〔我〕와의 사이엔 상당한 거리가 있었는지도 몰라”.
박상륭의 이 진술은 주체의 의지를 육체에 전하는 신경과 육체 아닌 어떤 것으로 환원되는 ‘나’ 사이에는 분명한 단절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흥미로운 것은 유다가 죽은 노파의 눈에서 심연을 본다는 점이다. “그땐 유다의 눈도 서서히 변해가던 중이었다. 의미가 하나씩 바래버렸던 것이다.
유다는 불현듯 생각난 듯 기력을 다해 노파의 몸뚱이를 살펴보았다. 피가 그녀의 옷과 살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다음 순간 유다는 약간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에게서 아까 보았던 것과 흡사한 두 눈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몇 올의 머리칼이 눈자위로 늘어져 있었다.
그 눈은 아무 의미도 기력도 없는 죽음의 강 건너편 저쪽 마을 사람의 눈 ― 그것은 투명하긴 했지만, 끝간 데 모를 심연을 가진 눈”. 물질적 대상으로서 난자되었던 노파의 눈은 완전히 끝장난 육체의 끝에서 “끝간데 모를 심연”을 보여준다. 바로 이 순간 하나의 초월이 발생한다. 아까 보았다는 그 눈은 예수(無念)의 눈이고 “그 눈 속엔 무(無)가 있었고, 휴지(休止)가 있었고, 그리고 그것은 불멸 그 자체이기도 했다”. 난자된 표면을 통해 심연으로 이르는 건너뜀. ‘피밭’이라는 뜻의 〈아겔다마〉가 보여주는 엽기적이기 짝이 없는 장면들은 육체의 훼손이 극단화되는 순간 비로소 육체 이면으로 넘어가는 구도와 해탈의 과정을 보여준다.
예수 주변의 이 모든 살해적 이미지들은 사실상 불교적 구도 혹은 수행법에 전적으로 힘입고 있으며, 일종의 선불교에 기운 통종교성(通宗敎性)을 보여준다. 상해(傷害)의 고통은 (구원보다는) 자기 완성에게 답한다. ‘아함경법문’을 기반으로 한 〈장끼전〉을 비롯하여, 불교 설화의 삽화들을 인유하며 박상륭이 끈질기게 붙들고 있는 주제가 바로 이 육체의 벌건 물질성이 노골화된 순간의 초월적 국면이다.
부처와 스승과 말을 죽여가는 과정으로서의 구도, 근친상간을 비롯한 모든 금기를 초월하는 과정으로서의 해탈을 보여주는 유리라는 인물의 일탈적 행각들 ― 《죽음의 한 연구》(1975/1986년 문학과지성사 재출간) ― 의 가장 위쪽의 표면은 쉽게 말해 신(身), 구(口), 의(意)의 삼업(三業), 특별히 몸의 업보에 대한 극한적 부정을 통해 도달하는 깨달음의 심연을 겨냥하고 있다.
유리는 수많은 신체적 고행과 살육을 거친 후, 오조(五祖) 촌장을 죽이고 육조 촌장이 되는데, 이러한 모티브는 오조 홍인(弘忍)과 육조 혜능(慧能)에 얽힌 선지식을 극단화시킨 것이다. “안팎으로 만나는 자를 모두 죽여라.” 유리는 ‘구도적 살인’을 해나가고 그 자신 역시 칠조가 될 촛불승에 의해 주살된다. 박상륭에게 예술은 어떤 종류의 동물이 축생도와 업을 극복한 그 총계이다.(《칠조어론》) 이 《임제록》의 현대적 판본들이 보여주는 모든 훼손들은 최종적인 국면에서 어떤 심연으로의 입구가 된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육체, 그것은 극복의 대상이면서 원초적 조건이다. 이 세계와 중생들은 병들어 아프다. 따라서 정신 역시 고통받을 수밖에 없으며, 그 고뇌가 외화된 현상이 육체의 아픔들이다. 한 바리의 곡기는 탁발승의 육신이 원초적 조건임을 알려준다. 탁발과 고행이란 정신의 도정(道程)이고 주살(誅殺)이란 멸집(滅執)의 구도이다. 여기서 욕망은 차라리 길잡이다.(“충동이 언제나 그의 길잡이였던 것이다.” 《죽음의 한 연구》) 그것은 업이 무엇인지, 멸(滅)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준다.
사실상 육체의 훼손 과정은 정신의 변증, 특별히 부정의 변증이 실현된 결과이고 그 표현일 뿐인 것이다. 육체의 파열은 정신이 이 세계 안에 있음을 알려준다. 육체라는 대상의 현존이 아니라, 그에 대한 변형과 부정을 통해 대상 안에 도달하고, 그것의 심연을 통과해 초월에 육박하는 정신현상학이 여기에 있다. 표면의 파동은 ‘깊이’의 입구라는 의미에서(만) 중요해진다. 헤겔의 육체론의 한 대목은 육체의 표면에서 심연으로 잠행해 들어가는 정신의 변증을 가장 근대적인 형태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인간 육체의 외관에 대해서, 그것의 모든 표면은 동물 세계의 표면과는 달리 마음의 존재와 파동을 드러내준다고 말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술의 임무가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예술의 표면의 모든 부위에서 현상과 외관이 눈이 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다시 말해 영혼의 중심이 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그 결과 영혼은 감지 가능해진다.”(헤겔) 육체의 훼손과 그에 대한 끔찍한 묘법들이 실은 영혼을 감지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활동이고 그것은 권장할 만한 무엇이다.
근대 미학을 통해 감각이 한번도 자기 자신이었던 적이 없었듯이 육체(의 변형과 훼손) 역시 정신의 도상(圖像)일 뿐이다. 몸이라는 소여(所與), 그것도 신경에 의해 조정 가능한 이 몸이라는 표면은 정신을 통해 육체(Körper/flesh)가 지워진 신체(Leib)가 되었고, 세계와 정신 사이의 매개가 되었다. 육체(Körper/flesh)가 생물학적인 질료성을 강조하는 것이라면 신체(Leib/body)는 주체의 의지를 실현하는 연장이자 매개·표현을 의미한다. 그릇(器)으로서의 그것은 끊임없이 무언가에 대한 ‘의미’일 것을 강요받는다.
끔찍함은 공포가 되었고, 흔히 절대적인 극한으로 밀어 붙여진 끔찍함, 크기, 변형은 숭고 미학이라는 전율의 체험을 통해, 정신의 어떤 초월성을 상기시키는 기제가 되어야 했다. 고전주의나 사실주의의 반대편에 그것들의 도플갱어인 고딕과 숭고 미학이 있다. 미셸 푸코의 말처럼 이러한 고딕적 모티프와 서사구조들은 계몽주의적 기도의 실패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심리적, 영적(靈的)으로 어두운 영역을 그것이 더 잘 지배될 수 있도록 정밀하게 표시해두는 것과 같다.
이 지배술은 타자(육체)를 자신의 외화(外化)된 현신으로 삼고, 도구로 삼는다. 이 얼마나 완전한 동일화이며, 이 얼마나 절대적인 매개인가. 그런 의미에서 재래적 의미의 엽기성 심급의 제 효과들은 형상을 무너뜨림에 있어서조차, 거의 전적으로 근대적 반성 미학, 정체성의 재구축, ‘의미’의 논리에 의존하고 있다. 자연과 자유 사이의 어떤 것, 형식 충동과 유희 충동 사이의 어떤 것, 정신의 연장으로 정의되는 예술과 육체에 대한 매개적 이해들은 이토록 수미일관하다.
이것은 거의 어김없이 반영 미학, 반성 미학에 의존해 있고, 헤겔주의의 그림자를 강하게 드리우고 있다. 육체는 무의미한 것이 됨으로써만, 정신의 표현이 된다. 상처 입은 육체의 고통은 이 세계의 환부(患部)를 알려주고 함께 고통받게 한다는 의미에서 대승(大乘)적 길잡이가 된다. 정신은 신경을 움직이고, 명령은 표면에 가서 의미가 된다. 깊이와 의미의 시학. 그렇다면 우리의 현재와 관련하여 그로부터의 전이와 탈주들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그 수많은 엽기적 이미지들 위로의 미끄러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