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를 본 적이 있는가? 궁핍한 시절, 무지개는 삶의 지평을 순식간에 바꿔줄 수 있는 대표적인 상징이었다. 무지개는 곧 꿈과 희망의 동의어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더 이상 무지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지금 현재의 삶이, 그렇게 견딜 수 없을만큼 비참하다고 느끼지 않아서일까?
[무지개 너머]라는 뜻의 제목에는 전형적인 낭만주의적 상상력이 작용하고 있다. 낭만주의자들은 형식과 규범을 소중하게 생각했던 고전주의자들의 답답함이 지배하는 이 세계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어 했다. 그들이 입을 모아 외쳤던 말은 [지평선 밖이라면 어디라도!]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평선 밖이라면 기꺼이 어디라도 가겠다는 절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불협화음을 가장 효과적으로 노출시킨 것이었다.
무지개를 꿈이나 희망의 동의어로 생각하는 진부한만큼, [오버 더 레인보우]의 내러티브는 진부하다. 교통사고로 부분기억상실증에 걸린 기상캐스터 진수(이정재 분)가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희미한 단서들을 가지고 자신이 진정 사랑했던 여인을 찾아나선다. 주위 사람들도 진수가 몰래 짝사랑하던 그녀가 누군지 정확하게 모른다. 진수는 그녀를 무지개라고 부른다. 그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것을 적극 도와주는 사람은 대학시절 사진동아리 [메모리즈]의 회원이었던 지하철유실물 센터 직원 연희(장진영 분). 이것이 [오버 더 레인보우]의 기본 줄거리이다.
부분기억상실증이라는 희귀한 병명을 들고 나온 것도 그렇고, 진수가 찾으려는 그녀의 별명이 무지개였다는 것도 그렇고, 멜로 영화의 진부함을 떨쳐버릴 수 있는 매혹적인 코드를 이 영화에서 찾아보는 것은 정말 어렵다. 그런데도 [오버 더 레인보우]를 볼만하게 만드는 것은, 성실하게 영화를 찍어가는 안진우 감독의 정공법적 자세 때문이다.
기억을 잃어버린 남자의 직업은 오히려 미래를 예견하는 기상캐스터, 그리고 그 남자에게 기억을 찾아주려는 여자의 직업은 잃어버린 물건들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지하철 유실물센타 직원이라는 대조적 설정도 너무 작위적이다. 이런 식으로 남녀 주인공들의 직업을 생각하는 시나리오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신문사 부고 담당 기자와 병원 신생아실 간호사의 사랑을 그린 영화도 있었다.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외형상으로는 미스터리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영화는 8년전, 진수가 처음 대학의 사진동아리 [메모리즈]를 찾아갔을 때의 플래시백 씬들이 많이 등장한다.(내년도에는 중앙대 [메모리즈] 사진동아리에 신입생들이 넘쳐날 것이다) 보통 일반적으로는, 빈번한 플래시백 사용은 시간적 흐름을 끊어 놓지만, [오버 더 레인보우]에서는 오히려 관객들에게 추리적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는데 플러스 효과를 준다. 아쉬운 것은 그것이 상식적인 수준 이상의 결말로 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특히 아쉬운 것은, 비에 관한 상상력이다. 이 영화는 비로 넘쳐 흐른다. 비는 흩어진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가깝게 해주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촘촘하게 내리는 비를 보면서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한다. 비는 추억의 열쇠다. 그러나 반대로 눈은 미래지향적이다. 지상의 모든 것들을 덮어버리는 눈은, 모든 과거를 잊게 해주고 탁 트인 눈덮인 풍경만큼 미래에 대해 꿈꾸게 만든다.
비의 은밀한 상상력을 섬세하게 이미지로 다듬어갔더라면 훨씬 더 아름다운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비는 수없이 내리지만, 그것이 등장인물들의 내면에 섬세한 반향을 불러 일으키는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또 기억을 붙잡는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한 탐구도 적어 보인다. 가령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사진이 삶의 현재를 기억하는 중요한 단서로 인상지워지듯이 혹은 [봄날은 간다]에서 대나무숲 사이를 지나치는 바람이 등장인물의 내면을 뒤흔들어 사랑의 소리를 듣게 하는 것처럼.
안진우 감독은 보기 드물게 성실한 자세로 한 컷 한 컷을 공들여 찍어나갔다. 상투적인 멜로 영화로 전락할뻔한 내러티브는, 감독의 세밀한 연출력 때문에 긴장감을 갖는다. 그러나 차라리 [번지점프를 하다]같은 좋은 시나리오를 갖고 영화를 찍었더라면 훨씬 더 멋진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이 들기도 했다.
이정재는 역시 멜로 영화에 더 잘 어울린다. [흑수선]에서 형사를 맡아 거친 연기도 해보았고, [이재수의 난]에서 시대의 한 복판에서 민중과 고뇌를 함께 하는 역사극의 주인공도 해보았지만 그의 필모그래피에는 [시월애][선물][순애보][인터뷰]같은 멜로 영화가 줄줄이 기록되어 있다. 성실하게 배우로서 길을 걸어가고 있는 그가, 그의 출세작인 [태양은 없다]에서와 같은 개성있는 배역을 맡게 되기를 희망한다.
장진영은 왜 나왔는지 존재의 이유를 알 수 없었던 [반칙왕]의 평범한 연기와 [싸이렌]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뒤로 하고 [소름]을 통해 연기에 비로소 개안했다. 팜므파탈에서부터 백치미에 이르까지 다양한 캐락터를 품어 안고 있는 그녀의 복합적 모습 중에서, [오버 더 레인보우]에서는 선한 웃음으로 사랑의 실체에 접근해가는 순수함을 연기하고 있다. [소름]으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받은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의 제목이자 주제가로 사용되고 있는 [오버 더 레인보우](over the rainbow)는 1939년 개봉된 뮤지컬 [오즈의 마법사] 주제가로서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받았다. 그 이후 많은 가수들이 이 노래를 불렀지만 그중에서도 주디 갈란드, 사라 본, 로즈메리 클루니의 노래가 유명하다. 올리비아 뉴튼 존이 부른 over the rainbow는 [페이스 오프]에서, 해리 닐슨의 목소리로는 [유브 갓 메일]에서, 레이 찰스의 재즈풍 노래로는 [시애틀의 잠못 이루는 밤]에서 들을 수 있다.
*사족 : 영화를 보고난 뒤 제일 웃겼던 것은, 시사회 시작 직전 홍보담당자가 무대 위로 올라와, 마지막 부분에 이 영화의 극적인 반전이 있으니 영화 보고난 뒤 주위 사람에게 절대 이야기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는 것이다. 무엇인가 결정적인 것이 마지막에 있다! 영화를 보면서 관객들에게 가장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진수가 찾는 사랑의 상대가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상대는....영화 시작한지 5분도 지나지 않아서 짐작할 수 있었던 바로 그 여자였다. 그래도 반전이 있다고 해서 혹시나 하고 기다렸었는데, 이것을 반전이라니! 너무 어이가 없었다. 차라리 반전이 있다는 말이나 하지 말지. 나뿐만 아니라 이런 류의 영화를 조금이라도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상식선에서 결말 지워지는데. 상큼한 멜로 드라마로 홍보하는게 훨씬 더 낳을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