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김하중 장로(전 주중대사․통일원장관)
“세상사에 분주하지 말고 기도하며 살라”
이 세상 사람들은 성공을 애타게 희망하고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기를 희망하고, 높은 자리에 이르기를 꿈꿉니다. 그런데 애타게 바라던 성공을 노력을 많이 했든지, 운이 좋았든지, ‘인적 네트워크’를 잘 구성해서인지 모르지만 성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사회 각계각층에서 성공하신 분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재산이 많으신 분들, 권력을 가지신 분들, 명예를 가지신 분들을 가까이서 만나 보았는데, 그분들의 마음속의 공통된 특징을 발견했습니다. 항상 불안과 걱정과 근심이 많다는 것입니다. 또한 남에 대한 미움이 많습니다. 시기심이 많고, 질투심이 많고, 사랑이 결핍되어 있었습니다.
‘세속적 성공’은 다 헛된 것
우리가 돈을 갖든지, 명예를 갖든지, 권력을 가지면 복을 받았다는 것인데, 불안하고, 근심이 많고, 남을 미워하고, 사랑이 결핍된 삶을 볼 때, ‘과연 저것이 복 받은 인생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아마 관리하고, 지켜야 될 분야가 많고, 또한 그것을 빼앗고자 하는 대적들이 많아지니까 보통 사람들보다는 더 많은 스트레스, 즉 근심과 미움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성공이라면, 다 헛된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기 원하고, 좋은 직장에 입사하기 원하고, 좋은 차를 타고 싶어 합니다. 좋은 집을 갖기 원합니다. 명품을 많이 갖기 원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속이 불안과 걱정과, 남에 대한 미움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 성공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참 성공이 아닙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구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존재를 먼저 구하십시오. 하나님과 깊이 사귀고, 가까이 교제하는 일을 더 사모하십시오. 부귀와 장수도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와야 합니다. 내가 내 힘과 능력으로 성취한 것이라면 불안하고 초조하기 쉽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해 주시는 부귀와 장수, 이것만이 참 복입니다. 우리가 먼저 구할 것은,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자기 욕심을 따라 기도하면, 내 속에 계신 성령님을 누르고, 무시하고, 억압하게 됩니다. 성령님이 내 속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내가 모든 일을 내 욕심에 따라 처리하려고 하니까 우리가 성령님과 매일 친밀하게 교제․동행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변을 못하게 됩니다. 기도응답도 못 받습니다. 새벽기도․금식기도․철야기도를 하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 나가서 기도하면서도 좌절의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기도하다가 스스로 지치면서 영적침체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항상 올바른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항상 올바른 판단을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런 사례를 몇 가지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은 대단히 모험적인 삶입니다. ①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어디로 가야 될지 알게 됩니다. ②세상의 어떤 유혹과 시험도 이길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경고하시고, 나를 강권하시기 때문입니다. ③어떤 일이 닥칠지라도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내 곁에 서서 나를 도와주시고, 나와 동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④내공이 깊어집니다. 영적인 맷집이 단련됩니다. 아무리 세상이 나에 대해 위협하고, 비난을 하더라도 참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그렇게 나를 인도․감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순종해야 되겠죠. 그러나 순종할 수 있는 힘도 성령님이 도와주십니다.
욕심 따라 기도하면 성령님과 교제 못해
제 회심은 1994년 북경 21세기교회에 다닐 때였고, 당시46세였습니다. 1995년 외무부 아태국장으로 서울에 귀임했습니다. 1997년 외무부장관 특별보좌관으로, 1998년에는 김대중 대통령 의전비서관으로 있다가 2001년 중국을 떠난 지 6년 후에 중국대사로 부임했습니다. 그때 제가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탈북자를 이렇게 계속 내버려두어서 되겠습니까. 탈북자를 우리 대사관에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하나님, 제가 탈북자를 받으면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그렇게 몇 달을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제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탈북자를 받아주어라’ 그래서 탈북자들이 대사관에 진입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002년 5월부터 탈북자가 대사관에 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정부와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고, 중국 측과 엄청난 협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동안 중국정부는 북한과 우호적인 관계를 고려해서 탈북자 문제에 있어서 절대로 북한 정부 편을 들었습니다. 잡히면 무조건 북송시켰습니다.
주중대사관의 간부들이 제게 말했습니다. “대사님, 탈북자들을 대사관에서 받으시면 앞으로 한중관계에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아집니다.” 그래도 저는 주중대사의 직권으로 탈북자들을 받으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주중대사로 있는 동안에, 탈북자 1천 명만 받게 해 주십시오.”
대사관 전체회의 때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대한민국에서 제일 돈 많고, 제일 명예로운 사람이 탈북자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 세상에서 이 순간에 탈북자들을 구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인 사람은 나와 여러분밖에 없습니다. 나는 대사직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탈북자들을 구할 것입니다.”
2008년 3월 2일 통일부장관에 임명되어 주중대사직에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내가 주중대사로 재임하는 동안 한국으로 보낸 탈북자 수가 모두 몇 명이냐’고 담당직원에게 물어봤습니다. 탈북자들의 대사관 진입 횟수가 435회에 한국으로 보낸 사람이 1065명이라고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이 중국 측과 줄다리기를 했는지 모릅니다. 한 때 탈북자가 대사관에 170명이나 머물렀습니다. 장소도 비좁고, 그들의 뒷바라지 하랴, 중국 측과 협상하랴 거의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중국 정부가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안 보내줍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아무리 교섭해도 안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사부 문을 닫아라.’ 그래서 한국 외무부에 건의했습니다. ‘탈북자 포화상태로 영사 업무가 마비되어 영사부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본부에서는 공식적인 회신이 없었습니다. 사적 라인으로 알아보니, ‘대사가 현지 사정을 고려해서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본부에서 허락했다가는 한중관계에 마찰을 일으킬 수 있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사 직권으로 주중대사관 영사부 문을 닫았습니다.
탈북자를 한국으로 보내지 않는 중국 정부에 대한 항의조치의 일환이었습니다. 탈북자들이 한국에 못 가면, 중국인들도 비자발급 중지로 한국에 못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영사부에 탈북자들이 너무 많아서 영사업무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사도처럼 기도에 전념해야
중국 사람들도 깜짝 놀랐고, 교포들도 깜짝 놀랐습니다. 잘못하면 외교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 사안이었습니다. 그러나 15일 만에 중국 정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탈북자 몇 명을 한국에 보내주면 영사부 문을 열겠습니까?’ ‘60명만 보내주십시오.’ 그래서 탈북자 60명을 한국에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물꼬를 터서 그 후 매회 60~80명의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보낼 수 있었습니다. 누가 이런 과감한 결정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 마음속에 성령님이 계시다고 하면서 마음에 사랑이 없고, 미움이 가득하면 우리는 절대로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고, 인도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저는 대사로 있을 때, 장관으로 있을 때,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1시간 반~2시간 반 기도했습니다.
하루에 제가 중보기도하는 사람은 최소한 3백 명입니다. 어떤 사람이 제게 묻습니다. ‘어떻게 혼자서 3백 명씩이나, 그것도 매일 중보기도 할 수 있습니까. 그게 가능한가요?’ 주기도문을 외우는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15초 정도입니다. 주기도문 식으로 중보기도하면 1분에 4명도 할 수 있습니다. 1시간에 240명을 위해 중보기도 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특별히 제 ‘중국친구’들을 위해서 수십 년 기도해 오고 있습니다. 매일 2번씩 14년을 1만 번 이상 중보기도 한 셈입니다.
여러분도 한 번 해 보십시오. 그를 위해 1만 번 중보기도하면 어떤 신비한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왜 안 일어나겠습니까?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 하나님의 음성이 중보기도한 나에게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이다. 네가 가서 알려줘라!’ 이렇게 성령님이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일을 너무나 많이 경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1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저를 끊임없이 중보기도로 지키며 보호하고 있습니다. 1994년 회심 후 지금까지 지난 15년 동안 제게 무슨 중대한 일이 일어날 때는 그 10명 중 한 명이 반드시 제게 미리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로 미리 준비하게 했습니다.
저는 하루 일과가 끝나는 밤10시 즈음이면 기도실에 들어가서 오래도록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성경보고 그렇게 하다보면 밤12시가 훌쩍 지나갑니다. 다른 것에는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다 보니, 다른 시시콜콜한 일은 일절 못하게 됩니다. 공직에 재직할 때에도 세세한 의사결정은 제 주위에서 알아서 처리해 주었습니다. 마치 초대교회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에 전념한 것처럼 저는 오직 기도에만 전념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과 방향을 분변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렇게 좀 세상일에 무관심한 면이 있어야 기도에 전념하는 삶을 드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성령님과 교제하는 삶을 사시려면 생활이 아주 단조로워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 무미건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사에 분주하면 제 경험으로는 여러분이 절대 기도에 전념하실 수 없습니다.(녹취 및 정리: 이화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