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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인적자원부에서 선정한 우수권장도서
군사정권의 획일적인 역사관에 대한 '반항'
왜 책이름을 거꾸로 읽는 세계사라고 지었을까? 처음에는 매우 의아스러웠지만 책을 읽다보니 스스로를 얼치기 역사학도라고 자칭하는 저자의 말처럼 ‘사건을 보는 각도’를 달리해서 보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저자와 같은 얼치기 역사학도가 있기에 그동안 왜곡되고, 묻혀진 과거의 진실들을 많은 사람들이 다시 보게 되고 새롭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도 가질 수 있으니 말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참에 이 책을 읽고 독자 모두가 역사적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을 다시 세우보길 바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책에 게재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저자의 견해가 절대적으로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사건에는 절대적 진실이란 있을 수 없으며, 많은 것들이 다면체적인 특성을 지닌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왔고 믿어 온 역사는 그러한 다면체적 특성을 반영한 역사가 아닌 한쪽으로만 치우친 승자독식의 역사였고 기득권층의 역사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지 않은가?
그들은 그 것을 ‘정사(正史)’라고 칭하며 ‘진실’이라 말하지만 그것이 절대적 진실이고 옳은 것이라 말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우리는 이미 지나간 역사에서 그것을 확인하였고, 그러길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도 확인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고찰하고 비판하여야 하며, 이러한 활동을 방해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바로잡아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4.11총선 투표에 우리 모두 참여하여 역사를 뒤바꿀 수 있는 국민의 저력을 보여주길 부탁하며, 책 내용 중 생각나는 대로 몇 가지 간추려 본다.
『드레퓌스사건』
1894년 10월 참모본부에 근무하던 포병대위 드레퓌스가 독일대사관에 군사정보를 팔았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비공개 군법회의에서 종신형의 판결을 받는다. 파리의 독일대사관에서 몰래 빼내온 정보 서류의 필적이 드레퓌스의 필적과 비슷하다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증거가 없었으나 그가 유대인이라는 점이 혐의를 갖게 하였던 것이다. 나중에 드레퓌스가 범인이 아니라는 확증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군 수뇌부는 진상 발표를 거부하고 사건을 은폐하려 하였다. 드레퓌스의 결백을 믿어 재심(再審)을 요구해 오던 가족들은 1897년 11월 진범인 헝가리 태생의 에스테라지 소령을 고발했지만, 군부는 형식적인 신문과 재판을 거쳐 그를 무죄로 석방한다.
재판결과가 발표된 직후 소설가인 E.졸라가 공개한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의 논설로 사건은 재연되고, 졸라는 드레퓌스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군부의 의혹을 신랄하게 공박하는 논설을 1898년 1월 13일자《오롤》지에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 형식으로 발표한다. 이를 계기로 사회여론이 비등하여 프랑스 전체가 ‘정의·진실·인권옹호’를 부르짖게 되고, 마침내 이 사건은 한 개인의 석방문제라는 차원을 넘어 정치적 쟁점으로 확대되면서 제3공화정을 위기에 빠뜨린다.
1899년 9월에 열린 재심 군법회의는 드레퓌스에게 재차 유죄를 선고하였으나 대통령의 특사로 석방되어, 1906년 최고재판소로부터 무죄판결을 받고 복직 후 승진도 하였다. 자유주의적 재심파의 승리로 끝난 이 사건은 프랑스 공화정의 기반을 다지고, 좌파 세력의 결속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진보적 세계관이 늘 승리하리라는 것은 아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언제나 승리한다. 그리고 역사의 발전이란 진보적 세계관의 승리에 의거해서 이루어진다. 드레퓌스 사건은 그것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사건중의 하나인 것이다.
『사라예보사건』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부인 조세핀은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열린 오스트리아 육군대연습을 참관하고 돌아가던 중 총에 맞아 즉사한다. 범인은 세르비아 청년으로 세르비아를 지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에 항거하는 뜻으로 황태자 부부를 저격한 후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세르비아는 1389년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이래 러시아, 투르크, 오스트리아 등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1878년 투르크의 지배에 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 세르비아는 독립을 이루었지만 1908년 다시 오스트리아에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병합 당하고 만다. 1914년 7월 23일 오후 6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 내의 반 오스트리아 출판물의 금지와 반 오스트리아 단체의 해산, 반 오스트리아 운동 금지를 위한 협의회와 암살자 재판에 오스트리아 대표 참여, 오스트리아 정부가 지목하는 세르비아 관리 파면 등 세르비아의 민족감정을 건드리기에 충분한 내용의 최후통첩을 보낸다. 세르비아는 그 중 일부분만을 받아들이겠다는 회신을 보냈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1914년 7월 28일, 사건이 일어난 지 꼭 한 달 째 되는 날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자 유럽 각국은 각자의 이해관계, 동맹관계에 의해 급속하게 전쟁에 휘말려 들어갔다. 당시 유럽은 이른바 삼국동맹 세력과 삼국협상 세력이 대립하고 있었다. 삼국동맹은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를, 삼국협상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를 각기 동맹국으로 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동원령을 내린 것은 발칸을 잃고 싶지 않은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노동자들의 파업과 차르 타도를 외치는 혁명운동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으므로 그 같은 내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전쟁을 할 필요가 있었다. 독일도 이에 대항코자 8월1일 러시아에, 3일에는 그 동맹국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독일군의 움직임은 신속했다. 중립국인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단숨에 제압하고 프랑스로 향했다.
8월 2일 이번엔 일본이 영, 일 동맹에 따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고, 처음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던 영국도 중립국 벨기에를 침범했다는 명목으로 8월 4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11월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 투르크가 독일, 오스트리아 측에 가담했다. 그러자 오랫동안 투르크의 지배를 받아 온 아라비아가, 참전하면 독립시켜 주겠다는 영국의 약속을 믿고 적극 협력했다. 발칸의 여러 나라들도 각각 참전했다. 불가리아는 독일 편에, 루마니아와 그리스는 연합국측에 가담했다. 이로써 세계 제1차대전이 시작되었다. 한편 사라예보 사건의 주인공 프린체프는 재판에 회부되었고,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사형은 면했으나 1918년 봄 폐결핵으로 감옥에서 사망했다.
『대공황』
1929년 10월 24일 뉴욕 월가(街)의 ‘뉴욕주식거래소’에서 주가가 대폭락한 데서 발단된 전형적인 세계공황으로서 1933년 말까지 거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이 말려들었으며, 여파는 1939년까지 이어졌다. 이 공황은 파급범위 ·지속기간 ·격심한 점 등에서 그 때까지의 어떤 공황보다도 두드러진 것으로 ‘1929년의 대공황’ 또는 ‘1929년의 슬럼프’라고도 한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은 표면적으로는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배후에는 만성적 과잉생산과 실업자의 상존이 현재화되고 있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10월의 주가 대폭락은 경제적 연쇄를 통하여 각 부문에 급속도로 파급되어, 체화(滯貨)의 격증, 제반 물가의 폭락, 생산의 축소, 경제활동의 마비상태를 야기시켰다. 기업도산이 속출하여 실업자가 늘어나, 33년에는 그 수가 전 근로자의 약 30%에 해당하는 1,500만 명 이상에 달하였다.
이 공황은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제국으로 파급되었다. 자본주의 각국의 공업생산고는 이 공황의 과정에서 대폭 하락하고 1932년의 미국의 공업생산고는 1929년 공황발생 이전과 비교하여 44% 하락하여 대략 1908∼1909년의 수준으로 후퇴하였다. 또한 이 공황은 공업공황으로서 공업부문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농업부문에도 영향을 미쳐서 미국을 비롯하여 유럽 ·남아메리카에서 농산물 가격의 폭락, 체화의 격증을 초래하여 각 지방에서 소맥 ·커피 ·가축 등이 대량으로 파기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금융부문에서도 31년 오스트리아의 은행 도산을 계기로 유럽 제국에 금융공황이 발생하여, 영국이 1931년 9월 금본위제를 정지하자 그것이 각국에 파급되어 금본위제로부터의 잇따른 이탈을 초래, 미국도 33년 금본위제를 정지하였다.
자본주의 각국 경제의 공황으로부터의 자동적 회복력을 빼앗아감으로써 1930년대를 통하여 불황을 만성화시켰으며, 미국은 뉴딜정책 등 불황극복정책에 의존해야 하였다. 10여 년 동안의 대불황에 허덕인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경기를 회복, 대전 중에는 실질소득이 거의 2배로 증가하였다.
『베트남전쟁』
프랑스 지배하에 있던 베트남이 독립하려고 하자 프랑스와 베트남 독립동맹군 사이에서 발생한 전쟁과 공산주의 정당 '베트남독립동맹'이 북베트남을 지배하자 미군이 반대 세력을 지원하면서 양측에서 발생한 전쟁을 베트남 전쟁이라 한다. 베트남은 장기간 프랑스 지배하에 있었고 1941년 프랑스로부터 베트남의 독립을 추구하기 위한 공산주의 정당인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이 조직되었다. 1945년 '베트남독립동맹'의 지도자 호치민은 베트남이 프랑스로부터 독립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면서 프랑스군과 베트남 독립동맹군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1954년 프랑스와 '베트남독립동맹' 사이의 휴전을 위한 '제네바협정'을 체결했다. 제네바협정은 무력충돌을 막기 위해 프랑스군과 프랑스군의 지휘를 받는 베트남인들은 북위 17°선 남쪽으로 이동시키고, 베트남독립동맹군은 북위 17°선 북쪽으로 이동시킨 다음, 북위 17°선을 비무장지역(DMZ)으로 둘러싸인 군사분계선으로 정한다고 결정했다.
제네바협정으로 공산주의자를 표방하는 '베트남독립동맹'은 북베트남을 장악하고, 비공산주의자는 남베트남을 차지했다. 제네바협정은 남·북 베트남을 인민에 의해 선출된 하나의 정부 아래 통합할 목적으로 국제감시위원회의 감독 아래 1956년 베트남 전역에 걸쳐 자유선거를 실시하도록 규정했다. 하지만 미국의 지원을 얻고 남베트남이 이를 거부하자 북베트남은 군사력으로 남북베트남을 통일하기로 했다.
북베트남에서 훈련받고 무장한 베트남독립동맹 병사들(베트콩)들은 게릴라전을 확대시켰고 남베트남 내에 있는 공산주의자들과 베트콩의 세력은 점차 확대되어갔고 1960년 12월 '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을 조직해 남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을 통합하기도 했다. 이에 미국은 지원 규모를 확대했으나 전쟁은 장기화되었고 미국의 전쟁개입을 반대하는 여론이 높아지자 미국은 점차 군사력을 축소시켰다. 결국 1973년 1월 파리에서 미국·베트남·베트콩(남베트남의 공산당)·월맹 간에 휴전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 의하여 미군이 철수하였으며, 베트콩의 활동은 법적으로 보장받게 되었다.
하지만 정전협정 이후에도 크고 작은 전투행위가 지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남베트남의 세력은 축소되었고 결국 1975년 남베트남을 북베트남이 점령하게 되었고 1976년 7월 2일 베트남은 공식적으로 하노이를 수도로 하는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으로 통일되어 30년에 걸쳤던 베트남전쟁은 막을 내렸다.
『미완의 혁명 4.19』
4.19혁명은 1960년 4월 이승만과 자유당정권이 개표를 조작하여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켜 영구집권을 꾀했던 부정선거에 반발하여 선거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며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으로, 자유당정권의 12년간에 걸친 장기집권을 종식시키고 제2공화의 출범을 보게 한 역사적 사건이다.
이승만 정권은 1948년부터 1960년까지 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 불법적인 개헌을 통해 12년간 장기 집권하였다. 그리고 1960.3.15 제 4대 정․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실시된 선거에서 자유당은 반공개 투표, 야당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수 조작 발표 등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 그러자 같은 날 마산에서 시민들과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당국은 총격과 폭력으로 강제 진압에 나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무고한 학생과 시민을 공산당으로 몰면서 고문을 가했다.
이후 1960.4.11 1차 마산시위에서 실종되었던 김주열군이 눈에 최루탄 파편이 박힌 채 참혹한 시체로 발견됨으로써 이에 분노한 시민들의 제2차 시위가 다시 일어났다. 뒤이어 1960.4.18 고려대학교의 4천여 학생들이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하여 봉화를 높이들자"는 선언문을 낭독,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고 학교로 돌아가던 중 괴청년들의 습격을 받아 일부가 피를 흘리며 크게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이 10만여 명이 다음날인 1960.4.19 총 궐기하여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 "를 위한 혁명적 투쟁으로 발전하여 독재정권은 총칼을 앞세운 무력으로 탄압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1960.4.25 독재정권의 만행에 분노한 서울시내 각 대학 교수단 300여명은 선언문을 채택하고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하였고 1960.4.26 전날에 이어 시위 군중들이 아침부터 시내를 가득 메운 대규모의 시위군중은 무력에도 굽히지 않고 이승만의 사퇴를 더욱 완강하게 요구하며 투쟁하니 오전 11시경 이승만은 결국 대통령직에서 하야하였다.
4.19의 직접적 동기는 부정 선거에 있었으나, 그것은 단순한 부정선거 규탄 운동이 아니라 국민 주권주의에 입각한 민주주의 운동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4.19의 의의는 이후 발생한 박정희의 5.16군사 쿠데타에 그 빛이 바랜 감이 없진 않지만 우리 시민의 저항 정신을 여실히 보여준 귀중한 경험이라 할 수 있으며, 우리나라 시민운동의 단초(端初)라 할 수 있겠다.
※ 유시민 : 159년 7월 28일, 경상북도 경주에서 태어났다. 대구 심인고등학교,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졸업했다. 독일에서 유학한 후 귀국하여 언론인 등으로 활동했다. 서울대학교 총학생대의원회 의장, 한겨레신문 독일통신원,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 MBC 100분토론 진행자, 16~17대 국회의원, 참여정부의 보건복지부장관을 지냈다. 주요저서로 『아침으로 가는 길』『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내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야기』『유시민의 경제학카페』『거꾸로 읽는 세계사』『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대한민국 개조론』『후불제 민주주의』『청춘의 독서』『운명이다』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