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이래 우럽 귀족사회의 최고 사교놀이였던 당구가 언제 어떤 경로를 거쳐 우리나라에 옮겨졌는가는 정확하지 않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우리 당구사의 유일한 기록은 이왕조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장례를 치르면서 펴낸 <순종국장록(純宗國葬錄)>이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대략 구한말 1909년 궁중의 어전놀이로서 시작된 것이다. 이 국장록은 채 이름이 말해 주듯이 순종임금의 장례의식을 주로 담았지만 의외로 당시 풍물을 곁들였는데, 특히 재위중의 황실 내면사를 사진과 그림으로 수록했으며 황제의 일상생활면을 가식 없이 기록, 정통 실록과는 다른 궁중풍경을 전한다.
이 책의 18페이지에 생시 그가 즐겼던 어용 당구대(2대)와 상아공, 큐대가 화려한 내실을 배경으로 하여 사진으로 소개돼 있고 장소는 창덕궁 동행각이라고 나와 있다. 더욱 86페이지에는 「운동의 필요로 옥돌(玉突)」이라는 제목 아래 순종 임금님의 옥돌 인연과 평소 즐기심이 간략하게 설명되어 있다.
내용 중 일부를 옮기면 『…창덕궁 인정전 동행각에 옥돌대 2대가 들여 있으니 간간 시신(侍臣)을 데리고 큐를 잡으셨다. 내외국의 옥돌선수가 경성에 이르기만 하면 반드시 한번씩은 인견하옵셨다.
옥돌의 적수되는 사람은 전 창덕궁 경찰서장 야노(矢野인)데 결코 이기시려는 욕심은 없으셨고 항상 어찌하면 재미있게 마치실까 하시는 고아하옵신 생각으로 옥돌판을 대하옵시는 터이나 실력은 60∼70 내외까지 이르셨다.…(後略)』
2. 순종의 당구실력 2백점
참고로 그 당시 이 점수는 현재의 1백50∼2백점대로 비교적 고점자 수준이었다고 보겠다. 사진과 원로인을 통한 내 나름의 판단은 당시 게임 방법은 정통의 4구치기였으며 당구대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중대, 공은 당연히 상아공이었고 직경이 지금의 65.5㎜보다 약간 큰 69㎜였다.
그러나 이상은 기록상의 추정이고 그것도 궁중 내이고 보니 보다 자세한 내막은 알 길이 없다.
다만 몇해 전까지만해도 이 초창기를 살았던 한 사람의 당구인이 있어 그의 기억이 얼마간 세월을 거슬러 오를 수가 있었다.
그가 바로 원로 당구인 김효근씨. 그 시대 당구인으로 옥돌을 가까이 했던 몇 안되는 한국인 중의 한분이며 후일 우리 당구 발전을 위해 많은 공헌을 했었다.
3. 황실 코치는 전상운씨
그러나 이분 역시 궁중 출입자는 아니었고 그의 스승인 전상운(全相雲)씨가 어용당구대의 시설 관리자겸 개인적 교수였던 데서 이 스승의 입을 통해 궁중옥돌장의 풍경을 전해 들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순종은 외모로 보아선 흠잡을 데 없이 훤칠한 장부였으나 선천적인 체질은 매우 심약한 편이었다고 한다. 그가 당구를 즐기게 된 것은 총독부의 배려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건강생활을 위한 실내 스포츠로서 가까이 한 것이다. 전형적인 귀골풍의 온후관대한 성격이 강한 체력운동보다 이런 류의 가벼운 실내 게임에 어울렸다고 보겠다.
기록에도 말했듯이 그의 당구 자세는 전혀 승부욕이 없어 간혹 일인 고관들과 대결할라치면 측근들이 민망해 할 때가 많았다고. 이는 너무 신사도에 철저해 그 고지식함이 당시 숨가뿐 국제정세에 비겨 약자의 연민인양 비쳐졌기 때문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반의 당구지식은 전혀 없었고 그보다는 당구를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다고 하겠다. 그러다가 최초의 일인당구장인 경성구락부가 탄생한 게 1920년대 초반이었다. 남대문시장 입구의 현 여성회관 자리가 당시 재판소 판사였는데 일인 고급관리들의 집단거주지였다. 여기에 위치한 경성구락부 당구장은 2층 목조건조의 아담한 사교장이었다. 1층은 일반관리직용, 2층은 고관들의 전용당구장으로 각각 3대와 2대, 모두 5대의 당구대가 설치되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