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남정맥 제 7 구간 ( 장전고개 ~ 발산재 )
1. 산행일시 및 장소
[1] 출발일시 : 2011 년 07 월 09 일 ( 토 ) 04 시
[2] 출발장소 : 수원 월드컵경기장 정문 옆 경기도여권민원실 앞
2. 산 행 지 :
○ 깃대봉 (520.6m), 여항산 (744m) - 경남 고성 , 마산 , 함안
3. 날 씨 : 굵은 장대비가 하루 종일 내림
4. 참 가 자 :
○ 김명자 , 박봉하 , 박상호 , 안상경 , 윤희원 , 이태인 , 이용준 , 장현옥
5. 회 비 : 120,000 원
6. 준 비 물 :
[1] 전 체 - 차량 , 안전장구 , 구급약 , 사진기 , 지도
[2] 개 인 - 비상식 , 등산화 , 배낭 , 윈드쟈켓 및 우의 , 예비옷 ( 보온 ) 과 양말 , 모자 , 장갑 , 후레쉬 , 식수 , 세면도구 , 신분증 , 다용도칼 , 휴지 , 비닐봉투 , 간식 등 개인용품
7. 산행정보 및 일정
[1] 총 산행 거리 및 시간
○ 약 17.8km, 9 시간 30 분 정도 소요 , 차량이동 360km 정도
[2] 산행 길잡이
7 구간은 전체적으로 어려운 곳 없이 순탄하다 . 고도가 높아지면서 시원시원한 조망이 펼쳐진다 . 구만면 화림리 앞 너른 들판과 그 끝으로 남해 바다도 볼 수 있다 . 담티재를 지나면서 서쪽 조망이 트이는 곳곳에서 지리산 주능선을 희미하게 볼 수 있는 것도 좋다 . 정맥길은 배치고개 , 신고개 , 새터재 , 담티재 , 남성치 , 선동고개 , 발산재 등의 크고 작은 7 개의 고개를 만나고 , 탕근재 (367m), 필두봉 (420m), 용암산 (399.5m), 벌발들 (418.5m), 깃대봉 (520.6m) 등의 봉우리를 지나게 된다 .
2 차선 포장된 1007 번 지방도가 지나는 배치고개를 출발하면 가끔 청미래 덩굴이 나타날 뿐 조그만 봉우리와 나지막한 안부들이 계속 이어지며 매봉산 옆을 지나기까지 길이 좋다 .
매봉산 (286m) 갈림길에서 신고개로 내려서는 길은 약간 가파르다 . 중간에 묵밭을 지나는데 , 잡목이 약간 섞여 자라 여름날이면 길 뚫기가 쉽진 않아 보인다 . 밭 자락 중간에서 오른쪽 숲으로 꺾인다 . 배치고개에서 1 차선 콘크리트 포장도가 지나는 신고개까지는 1 시간 걸린다 .
산불경방기간에는 등산로가 통제되는 탕근재까지는 싸리나무 , 신갈나무 , 소나무가 주종을 이룬 숲길을 35 분 오르면 된다 . 사방이 숲에 가린 탕그재는 잡목이 심하다 . 내림길도 잡목이 심하지만 가시덤불은 보이지 않는다 . 중간에 만나는 386 봉도 솔숲에 둘러싸여 조망이 트이지 않는다 . 새터재 전 마지막 희미한 봉우리를 지나면 새터재까지는 40 분이면 된다 .
395 봉을 내려서는 길 안부엔 쓰러진 소나무가 많아 걸음이 느려진다 . 새터재에서 35 분이면 닿는 필두봉 (420m) 에서는 길 찾기에 주의해야 한다 . 정맥은 왼쪽으로 내려서는데 , 전망바위로 이어지는 직진하는 길도 너무 분명하기 때문이다 . 필두봉에서 내려서는 길은 매우 가파르고 ,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뾰족해 조심해야 한다 . 중간에 산딸기나무들이 많이 자라 여름에는 고생길이다 . 1002 번 지방도가 지나는 담티재 왼쪽에 젖소를 키우는 ' 청심목장 ' 이 있어 물을 구할 수 있다 .
담티재를 출발하면 곧 등산로 왼쪽으로 젖소가 먹을 풀을 키우는 넓은 초지가 나타난다 . 초지대에 서면 서쪽 끝으로 희미하게 지리산 주능선이 보인다 . 여기서 용암산 (399.5m) 오름길이 가파르다 . 용암산 전 봉우리는 사방으로 전망이 아주 좋다 .
소삼각점이 있는 용암산 이르는 길은 약간 험한 편이다 . 억새와 잡목이 뒤섞여 자라는 용암산을 내려서면 곧 철탑을 지나고 , 여기서부터 까치골 위 고개까지 넓은 길이 이어진다 . 고개에서 15 분이면 ' 처사이종두묘 ' 지나 콘크리트 포장도 지나는 남성치에 닿는다 .
남성치에서 얼마간 너른 임도를 따라 오르다가 오른쪽 숲으로 길이 이어진다 . 약 30 분이면 안부에 닿고 , 다시 10 분이면 삼각점이 있는 벌발들에 이른다 . 벌발들에서 조금 내려서면 오른쪽 건너편으로 정상부 바위가 멋진 적석산 (498m) 이 잘 보인다 . 벌발들에서 약 15 분 다소 험한 길을 내려서면 비포장인 선동고개가 나온다 . 고개에서 약 30 분 오르면 지형도상의 528 봉이다 . 진양농협 함양산악회에서 세운 ' 깃대봉 ' 표석이 서 있다 . '520.6m' 라는 높이까지 적힌 것으로 봐서 위치를 잘못 잡은 것 같다 . 약 30m 가면 전망 좋은 바위가 나온다 .
528 봉에서 깃대봉 지나 다음 봉우리 (495 봉 ) 에 이르는 능선은 6 구간에서 최고로 전망이 좋다 . 약 30 분 능선을 이어가면 오른쪽으로 너럭바위가 나오고 , 바위를 지나 20m 가면 낡은 삼각점이 있는 지형도상의 깃대봉이다 . 그러나 정맥길은 그곳에서 다시 너럭바위까지 돌아 나와야 한다 .
깃대봉을 지나 연결된 등산로를 따르면 수발사로 내려서게 된다 . 너럭바위에서 왼쪽으로 내려서서 억새 자라는 걷기 좋은 능선 따라 10 분이면 다음 봉우리 ( 약 495m) 에 닿는다 .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풍요롭고 아름다운 낙남의 땅이다 .
495 봉에서 10 여분 임도를 따르다가 오른쪽 산으로 들어선다 . 15 분 내려서면 큰 비석 서 있는 무덤이 나오고 , 50 여 m 더 내려서면 매우 너른 터에 20 여 기의 무덤이 흩어진 장흥 고씨 선영이 나온다 . 선영 왼쪽 끝으로 나가면 발산재에서 선영까지 이어지는 콘크리트 포장도가 이어져 있다 . 2 번 국도인 발사재는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단행해 깃대봉쪽 산사면이 무자비하게 잘려 나갔다 . 그 뒤쪽 옛 발산재휴게소의 공중화장실 뒤로 정맥길이 이어진다 . 발산재휴게소는 낮에만 물을 구할 수 있다 .
< 퍼온글 >
[3] 구간 거리
장전고개 ( 장밭고개 ,1009 번도로 ) ← [1.1km] → 성지산 (392.9m) ← [2.5km] → 덕산 (278.3m) ← [0.3km] → 배치고개 (170m) ← [1.4km] 매봉산 (270m) ← [0.5km] → 신고개 ← [1.0km] → 탕근재 (369m) ← [1.5km] → 새터재 (200m) ← [1.9km] → 필두봉 (416m) ← [0.9km] → 담티재 (190m) ← [0.6km] → 용암산 ( △ 399.5m) ← [1.1km] → 남성치 (170m) ← [0.8km] → 385 봉 ← [0.7km] → 벌발들 ( △ 418.5m) ← [1.6km] → 깃대봉 (520.6m) ← [1.9km → 발산재 (2 번국도 )
[4] 산행일정
(1) 산행지 이동
① 교 통 편 : 12 승 봉고 ( 이태인 총무 차량 이동 지원 )
② 이동경로 : 수원 (04:00) ∼ 경부 , 대전통영간 ∼ 연화산 TG ∼ 영오리 (07:30/ 아침 /08:10) ∼ 1009 번도로 ∼ 장전고개 (08:40)
(2) 산행코스 및 시간
장전고개 (08:50) → 459 봉 (09:25) → 떡고개 (10:10/10:20) → 배치고개 (10:40) → 신고개 (11:30/11:40) → 탕근재 (12:15) → 새터재 (12:55/13:05) → 필두봉 (13:55/ 점심 /14:35) → 담티재 (14:55) → 남성치 (15:45/15:55) → 벌발들 (16:25) → 성동치 (16:40) → 깃대봉 (17:20/17:30) → 발산재 (18:30)
(3) 산행 후
발산재 (18:40 / 차량회수 ) ---> 마산 진동면 (19:10, 저녁 및 취침 )
8. 탈출로 및 편의사항
○ 미산령 ( 여양리 둔덕마을 ), 감재고개 ( 영학리 서북동마을 가야사 )
○ 향촌식육식당 (055-759-4340)
○ 오션모텔 (055-271-8881),
○ 그린파크호텔 (055-271-6040)
○ 마산식육식당 (055-271-0928),
○ 봉래식당 ( 장어 , 055-271-0140)
○ 신라해장국 (055-271-0673),
○ 청룡횟집 (055-271-3515)
○ 진동개인택시 (055-271-4411),
○ 진고개휴게소 (055-583-1219)
9. 산행 참고자료
[ 장전고개 ]
○ 대전 - 통영고속도로 (35 번 ) 제 3 고성터널위에 위치한 1009 번국도
○ 고성군 대가면 송계리 ( 松溪里 )
송계마을은 본래 고성군 대둔면 ( 大屯面 ) 의 지역으로서 송계 또는 신기라 하였는데 1914 년 3 월 1 일 고성군의 행정구역 통폐합시 장전을 병합하여 송계리로 하여 대가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행정리로 송계 ( 松溪 ) 와 장전 ( 場田 ) 마을이 있다 .
① 송계 ( 松溪 )
▶ 동명의 유래 ( 由來 )
송계마을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사방의 산 < 장밭고개 · 독메 ( 獨山 )· 학남산 ( 鶴南山 )· 혼돈산 ( 混沌山 )> 이 울창한 송림 ( 松林 ) 으로 되어 있고 마을 앞은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어 송계 ( 松溪 ) 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산자수려하고 삼재불입지지 ( 三災不入之地 ) 라 하고 있다 .
▶ 마을의 형성 ( 形成 )
송계 마을에 주민이 언제부터 거주하게 되었는지는 확실한 고증은 없으나 마을 주변의 동산에 고분군이 많이 있고 고분에서 금속 칼과 토기류 등이 발굴되어 감정한 결과 삼국시대의 고분군으로 추정되었으므로 (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 이를 참고하여 보면 약 1600 년 전에 이미 주민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지금 거주하고 있은 씨족으로는 함안이씨 ( 李氏 ) 가 대종을 이루고 허씨 ( 許氏 ), 최씨 ( 崔氏 ) 등 10 여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으며 1953 년까지 면소재로서 면사무소와 경찰지서가 이곳에 있었다
▶ 마을의 지세 ( 地勢 )
마을 동쪽은 장밭고개 ( 해발 약 200m) , 서쪽은 독메 ( 獨山 ), 남쪽은 학남산 ( 鶴南山 : 해발 466.5m 일명 소풀산 ) 에 둘러싸인 계곡으로 마을 앞은 송계천이 남강 ( 南江 ) 으로 흐르고 있는 산자수려한 마을로 마을 앞 농경지는 경지정리가 된 비옥한 토질로 수원도 양호하며 마을 앞을 지방도가 통과하고 있어 교통도 편리한 편이다 .
② 장전 ( 場田 )
▶ 동명의 유래 ( 由來 )
장전마을은 장밭과 괴정으로 형성된 마을로 장밭은 원래 마당만한 밭이 많다고 하여 마당장 ( 場 ) 자와 밭전 ( 田 ) 자를 붙여 장전이라 하였으며 괴정 ( 槐亭 ) 은 옛날 마을에 큰 정자나무가 있었는데 나무가 회화나무로 회화나무 괴 ( 槐 ) 자를 붙여 괴정이라 하였다 하며 , 1984 년 고성군의 리동명칭 및 행정구역확정에 따라 장전마을의 명칭으로 행정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마을의 형성 ( 形成 )
마을이 형성된 년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장밭은 1750 년대에 창원구씨 ( 昌原具氏 ) 가 맨 먼저 입촌하여 오늘날까지 살고 있으며 , 그 후 1780 년대에 경주최씨 ( 慶州崔氏 ) 가 입촌하여 번성하고 있다 . 그리고 괴정은 본래 정씨가 많이 살고 있었는데 지금은 한가구도 없으며 각성 ( 各姓 ) 이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 마을의 지세 ( 地勢 )
마을 뒤에는 학남산 ( 鶴南山 : 해발 약 450m) 이 둘러싸고 있으며 장밭고개를 경계로 학남산 북쪽의 대가면 갑문에 위치한 마을로 산록지에는 과수원이 많이 있고 저지대 농경지는 비옥한 토질로 수원도 양호한 편이며 마을 앞을 지방도 ( 고성 - 금곡 - 문산 ) 가 통과하고 있어 교통도 편리한 편이다 .
[ 성지산 ( 聖智山 ), 392m]
○ 고성군 마암면 신리와 대가면 척정리 , 송계리 경계에 있는 산
○ 성지산 농금재 : 천상의 선녀가 내려와서 가야금을 탔던 곳이라 하여 농금재라 함
○ 농금재 : 어은골 ( 양촌 남쪽에 있는 마을 ) 저수지 남쪽에 있는 고개 , 성지산 밑이 됨
< 출처 > 한국지명총람 권 8, p 199
① 고성군 마암면 신리 ( 新里 )
▶ 동명의 유래 ( 由來 )
신리마을은 본래 고성군 서마면의 지역으로서 어은동 ( 漁隱洞 ) 이라 하였는데 , 1914 년 행정구역 통 · 폐합시 마암면으로 개칭되면서 새로 마을이 이루어졌다 하여 신리 ( 新里 ) 로 명칭하였으며 , 현재 양촌과 음촌의 2 개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마을의 형성 ( 形成 )
마을의 형성 년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현재 거주하는 문중의 입촌 년대를 살펴보면 함안이씨 ( 李氏 ), 여주이씨 ( 李氏 ), 광산김씨 ( 金氏 ) 가 1500 년대에 입촌하여 살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 지금은 위 성씨외에 성산이씨 ( 李氏 ), 밀양박씨 ( 朴氏 ) 등 여러 성씨가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 마을의 지세 ( 地勢 )
신리 마을은 배둔 ∼ 문산 지방도를 따라 회화면 배둔에서 8km 떨어진 마암면의 마지막 마을로 개천면 좌연리와 경계를 하고 있으며 , 동북쪽의 매봉산 밑에 자리하여 산이 많아 밤나무 단지가 많고 마을 앞에 조성되 농경지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경지정리가 된 비옥한 토질로 농산물의 생산이 풍부한 지대이다 .
② 고성군 마암면 신지 ( 新池 )
▶ 동명의 유래 ( 由來 )
신지마을은 신리 ( 新里 ) 의 법정리에 속하여 본래 고성군 서마면의 지역으로서 , 어은동 ( 漁隱洞 ) 이라 하다가 그 뒤에 죽현동 ( 竹顯洞 ) 으로 하였으며 , 1914 년 행정구역 통 · 폐합시 마암면에 편입되어 오다가 1967 년에 신리에서 분동되면서 마을 뒤에 못 ( 池 ) 이 있다 하여 신리의 신 ( 新 ) 자와 못 ( 池 ) 자를 따서 신리 ( 新里 ) 라 이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동명의 유래 ( 由來 )
신리마을은 본래 고성군 서마면의 지역으로서 어은동 ( 漁隱洞 ) 이라 하였는데 , 1914 년 행정구역 통 · 폐합시 마암면으로 개칭되면서 새로 마을이 이루어졌다 하여 신리 ( 新里 ) 로 명칭하였으며 , 현재 양촌과 음촌의 2 개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마을의 형성 ( 形成 )
마을의 형성년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신리마을의 형성년대와 같은 시기로 추정하고 있으며 , 현재 거주민은 함안이씨 ( 李氏 ), 광산김씨 ( 金氏 ), 합천이씨 ( 李氏 ), 여주이씨 ( 李氏 ), 단양우씨 ( 禹氏 ) 등 여러 성씨가 거주하면서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 마을의 지세 ( 地勢 )
신지마을은 마암면의 최단 서쪽에 신지와 어은골로 형성된 행정마을로 어은골을 경계로 대가면과 연접하고 있으며 , 신지의 배치고개를 넘어 개천면 ( 좌연리 ) 과 경계를 하고 있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인 산골마을로 양 산골짜기에 조성되어 있는 농경지는 경지정리가 된 비옥한 토질로 농산물의 생산이 풍부한 지세이다 .
③ 마을일화
▶ 예수의 작은 마을
신지 어은골의 산수가 수려한 아늑한 곳에 1981 년도에 천주교 마산교구에서 " 예수 작은마을 " 의 사회복지시설을 설치하여 지체장애자와 결핵환자 등을 수용 보호하고 있다
▶ 「 피바위 」 에 얽힌 전설
옛날 신지마을에 노씨 성을 가진 천석부자가 살았는데 이 시절에는 매년 흉년이 들던 때라 노부자집에는 매일같이 노객이 끊이지 않아 , 이들에게 먹일 밥을 짓기 위하여 쌀을 씻은 뜨물이 흘러 20 여리 아래에 있는 원진마을 앞개울까지 흘러도 그 흰빛이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 그리하여 노부자는 이를 귀찮게 여기고 아깝게 여기던 차에 하루는 노승 ( 老僧 ) 이 노부자집에 시주를 왔기에 노부자 부인이 노승에게 말하기를
" 노객들이 집에 찾아오지 못하게 해주면 시주는 얼마든지 하겠노라 “
고 하였다 .
이 말을 들은 노승은 몹시 괴이하게 생각하여 말하기를
" 앞산에 있는 바위의 귀를 떼어버리면 노객들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 “
고 했다 .
이 말을 들은 노부자 부인은 머슴을 시켜서 앞산에 있는 바위의 귀를 떼었더니 귀를 떼 낸 바위자국에 피가 흘러내리면서 산 아래로 흘러 내렸다 . 그 후로 노부자집은 점점 가세가 기울어 망하고 찾아오는 노객이 없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 그래서 사람들은 그 바위를 「 피바위 」 라고 불렀으며 지금도 그 피바위는 마을 앞에 있는 대밭 속에 있다 .
[ 덕고개 / 떡고개 ]
○ 덕재 = 덕테 = 떡고개 : 배티고개 남쪽에 있는 고개
○ 예전에 이곳에 홍수가 나서 피난민이 떡을 가지고 피난한 곳이라 하여 떡고개라 함
[ 덕산 / 278.3m 봉 (324 봉에서 1.2km)]
○ 삼각점이 있다 .
○ 덕산 ( 德山 , 278.3m) : 고성군 개천면 좌련리 新坪 남쪽에 있는 산
○ 고성군 介川面 좌연리 ( 佐蓮里 )
좌연리는 본래 고성군 서마면 ( 西馬面 ) 의 지역인데 1914 년 행정구역 통 · 폐합시 연동 , 신평 , 좌이곡을 병합하여 좌이곡 ( 佐耳谷 ) 과 연동 ( 蓮洞 ) 의 이름을 따서 좌연리라 하여 마암면에 편입되었다가 1973 년 7 월 1 일자 대통령령 제 6542 호로 개천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행정리로 좌이 ( 佐耳 ) 와 좌연 ( 佐蓮 ) 의 2 개 마을이 있다
① 좌이 ( 佐耳 ) 마을
▶ 동명의 유래 ( 由來 )
좌이마을은 좌이산 ( 탕근봉 ) 아래에 조그만한 들판을 중심을 형성된 마을로 옛날에는 " 자라 ( 佐 )" 아홉마리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고 하여 " 좌구실 " 이라 불리어 왔으며 또한 좌이마을이 상 , 하동으로 이루어져 있어 동명을 한문화하면서 좌이산 이름을 따서 좌이곡 ( 佐耳谷 ) 으로 하여 고려시대부터 개칭하여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
▶ 마을의 형성 ( 形成 )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구전에 의하면 고려시대에는 상좌이 마을에는 어씨 ( 魚氏 ) 가 살았고 하좌이 마을에는 오씨 ( 吳氏 ) 가 살면서 마을 앞들에 큰 숲을 이루고 천석부자 ( 千石富者 ) 가 되어 백여호 대촌을 이루면서 한때 오방 ( 吳芳 ) 이라 부른 때도 있었으나 그 뒤에 길가는 스님 말을 듣고 숲을 제거한 후로는 일시에 마을이 폐망하고 남원양씨 ( 梁氏 ) 가 약 200 여년간 살았다고 한다 . 그 뒤 조선시대에 고성이씨 ( 李氏 ) 가 대성을 이루어 살았으며 현재는 최씨 ( 崔氏 ), 이씨 ( 李氏 ), 정씨 ( 丁氏 ), 허씨 ( 許氏 ), 배씨 ( 裵氏 ), 김씨 ( 金氏 ), 강씨 ( 姜氏 ), 박씨 ( 朴氏 ) 등 각 성씨가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 마을의 지세 ( 地勢 )
좌이마을은 좌이산의 주봉인 탕근봉 ( 해발 369m) 을 중심으로 구만 , 마암면과 경계를 하고 있고 동 , 남 , 북 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 두메에 자리한 마을 로 산록지에 조성된 농경지는 비옥하나 천수답이 많으며 수원은 1955 년도에 설치된 좌이소류지가 마을 윗쪽에 있어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
② 좌연 ( 佐蓮 ) 마을
▶ 동명의 유래 ( 由來 )
좌연마을은 마을 모양이 배와 같다고 한다 . 그래서 마을 내의 지명들이 짐대 , 배치고개 , 배바위등 배와 관련된 이름들이 많으며 1914 년 행정구역 통 · 폐합 시 좌이곡 ( 佐耳谷 ) 과 연동 ( 蓮洞 ) 의 이름을 따서 좌연리 ( 佐連里 ) 로 하였으며 좌연리를 행정마을로 분동 하면서 좌연 ( 佐蓮 ) 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마을의 형성 ( 形成 )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좌이 ( 佐耳 ) 마을과 같은 형성연대로 추정하고 있으며 현재 김해김씨 ( 金氏 ) 를 위시하여 안악이씨 ( 李氏 ), 광산김씨 ( 金氏 ), 밀양박씨 ( 朴氏 ) 등 여러 성씨가 입촌하여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마을의 지세 ( 地勢 )
좌연마을은 배치고개를 경계로 마암면 신리 ( 新里 ) 와 접하고 있으며 월곡과 심평 , 좌구실등 산재마을로 형성되어 있고 연화산 ( 蓮華山 ) 이 마을 서쪽으로 높이 솟아 있으며 , 좌연 저수지에서 원류하는 하천이 마을 중심을 흐르고 , 하천양쪽으로 조성되어 있는 심평들은 비교적 넓은 들판으로 토질이 양호하여 농산물의 생산이 풍부하며 , 지방도가 마을을 통과하고 있어 교통도 편리하다 .
③ 전설 : 용비천 ( 龍飛川 ) 전설
좌연리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을 용 ( 龍 ) 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해서 「 용비천 ( 龍飛川 ) 」 이라 부르고 있다 . 그래서 " 개천 ( 介川 ) 에서 용 ( 龍 ) 이 났다 " 는 속담을 연상케하는 개울 이름인데 ‥‥
옛날에 좌연마을에 김씨성을 가진 부자가 살았는데 김씨는 몹시 욕심이 많은 고리대금업자로 알려져 있었다 . 어느 해 극심한 한해가 들어 장리를 얻어 쓴 사람들이 빚을 갚을 길이 막연한 처지가 되었을 때 이 마을에 사는 이씨는 김씨로부터 얻어 쓴 장리를 못갚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김부자는 비정하게도 이씨에게 빚대신 그 아들을 자기 집 종으로 내 놓으라고 강요했다 . 빚을 쓴 이씨에게는 열댓살난 총명한 아들이 있었는데 김부자가 항상 자기집 종으로 삼을 것을 욕심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
이씨는 아무렇기로 빚대신 자식을 남의 집 종으로 줄 수는 없다며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하루 이틀 지내고 있었는데 그의 아들은 생각이 달랐다 . 자기 한 몸 팔려 가면 부모님의 딱한 사정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종으로 들어가겠다고 말하고는 김부자 집으로 갔다 . 그러나 김부자 집에는 애비와는 달리 착한 딸이 있어 종으로 들어온 이씨 총각을 은연중에 사랑하게 되었다 . 김부자는 이런 사연을 눈치 챘는지 딸을 시집보내겠다고 혼처를 구하게 되자 김부자 딸은 이씨 총각과의 깊은 사랑을 아버지에게 애원하였으나 김부자는 딸의 애원도 묵살하고 시집보낼 준비를 서두르고 있던 어느 날 이씨 총각이 뒷산 벼랑에서 개울로 떨어져 죽고 말았다 . 그러자 그렇게 못잊어 하던 김부자 딸도 그날 밤 같은 장소에서 몸을 던져 못다한 사랑의 한을 푼 것이다 . ‥‥
몇 일이 지난 뒤 이들이 떨어져 죽은 개울에서 혼연히 무지개가 일더니 두 마리 용 ( 龍 ) 이 그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나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보았다고 전하고 있으며 효석 ( 孝石 ) 과 설녀 ( 雪女 ) 란 이름으로 전하는 이들 두 사람은 용이 된 것이다 . 그래서 ' 개천에 난 용 " 들이라 말하고 있다 .
[ 배치고개 / 175m( 덕산에서 450m)]
○ 2 차선 아스팔트 길 , 1007 번 지방도가 지난다 .
○ 배치고개에서 왼쪽 [ 북서쪽 ] 은 고성군 개천면 , 오른쪽 [ 동남쪽 ] 은 마암면이다 .
○ 배치고개 : 고성군 개천면과 마암면의 경계의 재 , 1007 지방도
○ 배치고개 = 배티 = 舟 재 = 舟 티 : 고성군 개천면 佐蓮里 / 연동 동쪽에 있는 고개
○ 배치고개 : 옛날에 이곳에 홍수가 나서 배를 타고 넘어 다니던 곳이라 하여 배치고개라 하며 한자로는 주치 ( 舟峙 ) 라 한다 .
〇 전설 : 고성군 마암면 신리 「 배탄재 」
아주 오랜 옛날 천지가 개벽하여 해일이 일어나 온 세상이 물바다가 되었을 적에 이곳 산골짜기에 살고 있던 주민들이 뒷산으로 피신을 하였다 . 물이 계속 불어나서 재를 넘어 흘러가게 되었는데 해일과 함께 어디서 밀려온 나룻배 한척이 재를 유유히 건너지르고 있었다 . 이때 산위에 있던 사람들은 이 배를 타기 위해 서로 밀고 당기고 하다가 그만 대부분 물에 빠져 죽고 몇 사람만 타고 건너갔는데 그때 그 배가 지나는 것을 지켜본 사람들의 입으로 입으로 전해오는 것이 지금까지도 「 배타재 」 로 그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
〇 전설 : 개천면 좌연리 배바위
개천면 북평리에 배처럼 생긴 배바위가 있다 . 배바위 앞에는 아름드리나무가 있어서 마치 배가 정박을 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데 , 이 배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
옛날 배바위 위에 산소를 쓴 사람들이 배가 항해를 해야만 집안이 흥한다고 믿고 나무를 베려고 했다 . 그러나 나무를 베어버리고 나면 배가 떠나버리기 때문에 동네가 망한다고 동네사람들이 베지 못하게 반대를 하였다 . 그러나 끝내 그 나무를 베어버렸는데 나무를 벤 사람은 큰 화를 당하였다 . 그 후로 마을 우물에는 물이 말랐고 , 지금도 그 마을은 우물을 파면 물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
[ 매봉산 / 248m 봉 ( 배치고개에서 1.5km)]
○ 매봉산 : 고성군 마암면 성전리에 있는 산으로 산의 형세가 매와 같이 생겼다 하여 매봉산이라 함
〇 고성군 馬岩面 聖田里
성전마을은 본래 고성군 서마면의 지역인데 1914 년 행정구역 통 · 폐합 시에 성전리로 하여 마암면에 편입되었으며 , 그 후에 행정리로 성전과 발산 ( 發山 ) 으로 분동 되었다가 1982 년 읍면의 이동 행정구역 개편으로 성전리 ( 법정리 ) 로 병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① 성전 ( 聖田 )
▶ 동명의 유래 ( 由來 )
성전마을은 단일 법정리로 본래 고성군 서마면의 지역이였는데 , 1914 년 행정구역 통 · 폐합시 마암면에 편입되면서 마을에 성암사가 있었으므로 마을명을 성전이라 하였다 .
▶ 마을의 형성 ( 形成 )
마을의 형성 년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현재 거주하는 달성배씨 ( 裵氏 ) 와 창원황씨 ( 黃氏 ) 의 입촌년대를 추정하여 살펴보면 약 300 ∼ 400 여년전에 이곳에 정착하여 살면서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짐작하고 있으며 , 현재 거주민은 위 성씨 외에 전주최씨 ( 崔氏 ), 함안이씨 ( 李氏 ), 창원정씨 ( 丁氏 ) 등 여러 성씨가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 마을의 지세 ( 地勢 )
성전마을은 본 면 소재지로부터 서북쪽으로 약 2km 떨어진 곳에 발산과 성전의 2 개 자연취락으로 형성된 마을로 ,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동으로는 시루봉 ( 해발 239.2m) 이 높이 솟아 있고 , 서쪽의 매봉산 자락에 길게 늘어진 마을 앞의 농경지는 경지정리가 된 비옥한 토질로 농산물의 생산이 풍부한 지대이다 .
〇 유적 : 성전리 성터 ( 城址 )
성전리 성터는 마암면 성전리와 구만면 와룡리를 연결하는 석축성 ( 石築城 ) 으로 대부분 허물어져 멸실되고 흔적만 남아 있으며 , 주위 약 250m 성내에는 유물자리가 1 개소 남아 있다 .
〇 전설 ( 傳說 ) : 성전 칠곡암 ( 七谷庵 ) 에 얽힌 이야기
옛날 성전마을에 부자집 이도령이 살고 있었다 . 이도령은 글방에서 김도령을 친구로 사귀었는데 두사이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친형제 이상으로 정이들었다 .
김도령은 외동아들이라 일찍 장가를 들게 되었으나 장가 간지 10 년이 지나도록 부인이 애기를 갖지 못하자 김도령은 점점 난폭해지면서 부인과 싸움이 잦든 중 그만 부인이 자결하고 말았다 . 이에 상심한 김도령은 먼 길을 떠나고 말았다 . 친구를 잃은 이도령은 열심히 공부를 하여 과거에 급제 사또자리에 앉게 되었다 .
하루는 사또가 동헌에서 깜박 졸았는데 꿈속에 한 노인이 나타나 하는 말이
" 그대 친구는 애기가 없어 부인의 죽음에 상심한 나머지 세상을 방황하다 일곱 고재 너머 깊은 산골에서 바위로 변해 버렸는데 김도령이 변한 바위를 애기 없는 부인들에게 갈아 먹이면 옥동자를 갖게 되리라 “
하고는 사라졌다 .
사또는 하도 이상한 꿈이라서 노인이 말한 장소를 찾아가 보았더니 정말 김도령은 바위로 변해 있는 게 아닌가 ! 원님은 슬픔에 목이 메였지만 노인이 가르쳐준 대로 고을의 애기 없는 부인들에게 돌을 갈아 먹도록 하여 애기를 갖게 되었다 한다 .
하지만 부인들이 너도 나도 조금씩 떼어가니 바위는 순식간에 없어져 버렸다 . 그리하여 이도령 사또는 그 자리에 조그만한 암자를 지어 칠곡암 ( 七谷庵 ) 이라 하였고 사또 이도령은 스님이 되어 친구의 명복을 빌었다고 하며 그 자리에 지금도 암자 터가 남아 있다 .
〇 전설 ( 傳說 ) : 천하대장군 ( 天下大將軍 ) 과 지하여장군 ( 地下女將軍 ) 에 얽힌 이야기
옛날 성전리 발산마을에 최부자란 노인이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 가솔들을 거느리며 떵떵거리고 살고 있었다 .
이 최부자에게 현옥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어찌나 영리한지 일곱 살 때에 사서삼경을 독파하고 나이가 들게 되자 악기에도 조예가 있어 마을 처녀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
그런데 이 마을에는 한 과수댁이 있었는데 과수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 이 딸은 최도령을 남모르게 짝사랑하게 되어 밤이면 홀로 그리워 하다가 어느 날 밤 최도령이 부는 퉁소 소리에 참을 수가 없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최도령 앞에 나아가 애끓는 심정을 고백하였지만 거절당했다 . 처녀는 너무도 분한 나머지 뒷산 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을 하였는데 그날 밤부터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
최도령이 한창 글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자정이 되자 글방 앞에서 퉁소 소리가 은은히 들려오자 최도령은 갑자기 문을 열고 퉁소 소리 나는 곳으로 가는 것이었다 . 그리고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돌아오는데 몸은 파김치가 되어서 오는 것이었다 . 그렇게 하여 깨고 나면 아무것도 몰랐고 이것이 되풀이되자 최도령은 점점 몸이 쇠약해져 갔다 .
최부자가 이러한 사유를 캐기 위해 하루는 숨어서 기다렸다 . 아니나 다를까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나자 담장 밖에서 퉁소 소리가 나고 이어 아들이 문을 열고나서는 게 아닌가 ……
담장을 넘더니 숲 속길로 접어들어 멀리 떨어진 골짝기로 들어가더니 천하여장군이란 팻말 밑에 엎드려 울고 있는 것이었다 . 그러다가 새벽에 닭이 울자 돌아오는 것이었는데 몸은 지칠대로 지쳐 말이 아니었으며 깨고 나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었다 . 하도 이상히 여긴 최부자는 용한 점장이에게 물었더니 최도령을 사모하다 죽은 처녀의 혼이 천하여장군에 붙어 밤마다 최도령을 불러낸다는 것이었다 . 그래서 그 점장이가 일러주는 대로 천하여장군 앞에 크게 제사를 지내고 튼튼하게 천하대장군을 만들어 최도령의 옷을 입히고 돌아오자 그날부터 최도령의 병은 씻은 듯 나았고 , 퉁소 소리도 다시는 들려오지 않았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
[ 신고개 / 180m(248 봉에서 750m)]
○ 신고개 : 고성군 개천면과 마암면의 경계재 ( 개천면 좌련리에 있는 고개 )
○ 신고개 : 귀신이 있는 고개라 하여 신고개라 함
[ 탕근재 / 368m( 신고개에서 1km)]
○ [ 소바구 = 우암산 , 탕근재 ] 고성군 구만면 용와리에 있는 고개 , 소처럼 생긴 바위가 있음
○ 탕근재 = 소바위 ] 이 산의 정상에 큰 바위가 있으며 , 그 바위가 소의 형상이라 하여 소바위라고도 함
○ 우암산 : 돌장재 서북쪽에 있는 산 (368m)
○ 돌장재 : 용당 동남쪽에 있는 고개 , 돌이 많음
< 출처 > 한국지명총람 8 p 181
〇 고성군 개천면 좌연리 ( 佐蓮里 ) 좌이 ( 佐耳 ) 마을
좌이마을은 좌이산 ( 탕근봉 ) 아래에 조그만한 들판을 중심을 형성된 마을로 옛날에는 " 자라 ( 佐 )" 아홉마리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고 하여 " 좌구실 " 이라 불리어 왔으며 또한 좌이마을이 상 , 하동으로 이루어져 있어 동명을 한문화하면서 좌이산 이름을 따서 좌이곡 ( 佐耳谷 ) 으로 하여 고려시대부터 개칭하여 부르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
좌이마을은 좌이산의 주봉인 탕근봉 ( 해발 369m) 을 중심으로 구만 , 마암면과 경계를 하고 있고 동 , 남 , 북 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 두메에 자리한 마을 로 산록지에 조성된 농경지는 비옥하나 천수답이 많으며 수원은 1955 년도에 설치된 좌이소류지가 마을 윗쪽에 있어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
[ 봉광산 / 386m 봉 ( 탕근재에서 680m)]
〇 경남 고성군 개천면 봉치리 , 구암면 용와리 경게에 있는 산
< 출처 > 고성군의 산
http://no1stock.com.ne.kr/Mountain/Classify_City/Gyeongnam/Goseong/San_List.htm
[ 새터재 / 190m( 봉광산에서 950m)]
○ 새터재 : 고성군 개천면과 구만면의 경계의 재 , 수원백씨자묘지입구 ( 水源白氏家墓地入口 ) 라 쓰인 표지석이 있음
○ 2 차선 포장도로가 지난다 .
○ 새티 ( 마을 )= 봉티 ( 鳳峙 ) 리
〇 固城郡 介川面 鳳峙里
봉치리는 단일 법정리로 형성된 마을로 본래 진주군 개천면의 지역으로서 새티 ( 鳥峙 ) 라 하였는데 1906 년에 고성군으로 편입되고 1914 년 행정구역 통 · 폐합시 개천면의 봉치리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마을의 형성 ( 形成 )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개쳔면내의 인근 마을이 대개 임란 전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며 현재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주민은 김씨 ( 金氏 ), 한씨 ( 韓氏 ), 허씨 ( 許氏 ) 등 여러성씨가 있다 .
▶ 마을의 지세 ( 地勢 )
봉치마을은 면사무소에서 약 4 ㎞ 동쪽 오지에 위치하여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해발 약 150m 나 되는 고지대의 분지로 형성된 마을로 동으로 새티 ( 鳥峙 ) 재 를 넘어 구만면과 경계를 하고 남으로는 고사리재를 넘어 좌이마을과 접하고 , 북으로 개내곡 ( 太川谷 ) 을 넘어 청광리와 접하고 있다 . 농경지는 산 계곡에 형성되어 있어 천수답이 많으며 봉치소류지등 2 개의 소류지가 있다
○ 지명과 전설 ( 傳設 )
▶ 봉치리
봉치리를 원래 새티 ( 鳥峙里 ) 라 부리어 왔는데 호칭이 상 ( 常 ) 스럽다 하여 새조자 ( 鳥峙 ) 에다 궤 ( 궤 ) 를 씨워 새 봉자 ( 鳳 ) 자로 하여 봉치리로 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며 최초 「 새티 」 라고 하게 된 것은 아주 옛날 천지가 개벽할 때 봉치골에 물이 범람하여 새티재에 " 새 " 한 마리가 앉을 정도만 남고는 모두 물에 잠기었다고 새티라 부르게 되었다 고 전하여 오고 있다
▶ 귀목나무와 동제
봉치리 큰 땀 숯골등에 수령 약 400 년을 추정하는 천연 고목 두 그루가 있는데 옛날에 도사가 이 곳을 지나다가 잠깐 쉬어 갔는데 마침 때가 삼복의 더운 때라 오래 앉아 쉴 수가 없어 떠나면서
" 이 골은 산수가 좋아서 사람 살기가 좋은 곳이나 쉴만한 그늘진 곳이 없어 매우 유감이다 “
라고 하면서 도사가 짚고 온 지팡이 ( 귀목나무 ) 을 그 곳에 꽂아놓고 갔는데 그 지팡이가 신기하게도 자라서 지금의 노거수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여름철 동민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고 또 동제 ( 洞祭 ) 를 지내는 당산이기도 하다 .
▶ 양부자 ( 梁富者 ) 의 무덤
옛날에 본동 장고개 ( 長鼓峙 ) 위쪽 큰 번덕에 양씨 ( 梁氏 ) 부자가 살았는데 이는 성리학 ( 性里學 ) 에 능통하여 인간의 운명을 잘 점치곤 하였다 . 그런데 어느 날 자기 아들의 관상 ( 觀相 ) 을 보니 불행이도 걸인상을 지니고 있어 양부자는 후사가 걱정이 되어 아들에게 유언을 하기를 훗날 내가 죽거든 마을 뒤 개내곡 ( 犬川谷 ) 중턱 뻔덕밭에 묻어 달라고 했다 . 사유인즉 묘를 돌보지 않더라도 자연적으로 관리가 될 것으로 짐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 그리하여 양부자는 죽고 유언대로 묘를 그 자리에 썼다 . 훗날 양부자 아들은 관상대로 걸인이 되어 사방에 문전걸식을 하고 돌아다니다가 영영 소식이 없어지고 양부자 묘 자리는 과연 명당자리로 그곳이 소먹이는 목동들의 놀이터가 되고 마을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 관리하지 않아도 잡초하나 나지 않고 잔디만 무성하여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으며 집터 주변에 대밭이 있고 기와 조각 등이 발견되고 있다 .
[ 필두산 / 420m 봉 ( 새터재에서 2km)]
○ 고성군 개천면 청광리 청남마을과 구만면 저연리 연동에 있는 산
○ 고성군 구만면 저연리 ( 苧連里 )
저연리는 본래 고성군 구만면의 지역인데 1914 년 행정구역 통 · 폐합시 저동 ( 苧洞 ) 과 연동 ( 蓮洞 ) 을 병합하여 저연리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행정리로 연동 ( 蓮洞 ) 과 저동 ( 苧洞 ) 의 2 개마을이 있다 .
① 연동 ( 蓮洞 )
▶ 동명의 유래 ( 由來 )
연동마을은 마을 뒤의 우뚝 솟은 필두봉 과 용암산 ( 해발 399.5m) 산록에 천역적으로 이루어진 연소 ( 淵沼 ) 가 있었는데 옛날에 도사가 이곳에 연종 ( 連種 : 연근뿌리 씨앗 ) 을 뿌려 연이 많이 생산되었다고 " 연소 " 를 " 연지 "( 蓮池 ) 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곳에 풍치림을 조성하여 " 서무골 " 이라 칭하고 지금도 여름철이면 동민이 피서를 하는 곳으로 보존되고 있다 . 그리하여 마을명도 연지명을 따서 연동이라 이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연지는 지금 흔적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
▶ 마을의 형성 ( 形成 )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약 400 여년전에 작답이란 곳에서 주민 300 여호가 집단으로 거주하다가 연동마을로 이거하였으며 이거한지 약 200 여년 전에 최초로 함안이씨 ( 李氏 ) 가 거주하게 되었고 그 뒤에 경주김씨 ( 金氏 ) 와 김녕김씨 ( 金氏 ) 가 입촌하여 약 100 여호가 거주하였으나 지금은 함안이씨 ( 李氏 ) 의 집성촌으로 48 호가 살고 있다 .
▶ 마을의 지세 ( 地勢 )
연동마을은 북쪽은 용암산 ( 龍岩山 ) 과 서쪽은 필두봉 ( 筆頭峰 ) 을 경계로 개천면 ( 청광리 ) 과 접하고 있는 마을 로 옛날에 양 ( 兩 ) 산록에 천연적으로 형성된 연지 ( 連池 ) 주변에 조성된 마을로 마을 주변의 농경지는 비옥하나 마을 뒤에는 천수답이 많으며 곳곳에 소류지가 설치되어 있으나 수원은 좋지 못하다 .
② 저동 ( 苧洞 )
▶ 동명의 유래 ( 由來 )
저동 마을은 옛날에 마을에서 모시가 많이 생산되었다고 하여 " 모시골 " 이라 호칭 하였으며 1984 년 , 고성군의 리동명칭 및 행정구역 확정시 저연리의 저동 ( 모시저자 苧洞 ) 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마을의 형성 ( 形成 )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약 " 쪽골 " 에 약 300 여호가 거주하다가 저동마을로 이거하여 왔으며 이거하기 전 약 200 여 년 전에 최초로 함안이씨 ( 李氏 ) 가 거주하였고 그 뒤에 곡부공씨 ( 孔氏 ), 김해허씨 ( 許氏 ), 수원백씨 ( 白氏 ) 등 100 여호가 거주하였으나 지금은 38 호가 3 개의 자연취락으로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 마을의 지세 ( 地勢 )
저동마을은 필두봉 산록지대에 형성된 마을로 북쪽은 개천면 ( 청광리 · 봉치리 ) 과 경계를 하고 있으며 마을 주변에 형성된 농경지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천수답으로 이뤄져 있어 전답 규반을 활용하여 옛날부터 모시와 대추나무가 많이 있었으며 수원은 소류지가 있으나 넉넉하지 못하다 .
○ 지명과 전설 ( 傳設 )
▶ 귀목나무의 전설 마을에 있는 귀목나무를 옛날 통영 세병관 건축시 자재로 사용키 위하여 벌채한 후에 마을이 망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며 마을이 망하자 동민이 그 자리에 다시 귀목을 심은 나무가 지금 수령 250 여년을 추정하고 있다
▶ 봉치고개의 안개 봉치고개의 안개가 죽골을 덮어 계곡의 물을 먹고 사라지면 3 일 내로 비가 온다는 전설이 있으며 지금도 그런 현상이 있다 .
[ 담티재 (195m)]
○ [ 담티곡 = 장재 = 담티 = 장근재 ] 고성군 九萬面 苧蓮里 저동 ( 모시골 ) 동북쪽에 있는 고개 / 개천면 청광리에 있는 고개
○ 이곳은 「 청강달마고개 」 라고 하는 곳으로 1002 번 지방도가 지난다 .
○ 담티재 : 고성군 개천면과 구만면의 경계재 , 1002 지방도
○ 담티재 : 옛날 그 골이 길고 높은 까닭에 「 장재 」 라고 했음
○ 청심목장에서 식수를 구할 수 있다 .
○ 청남 ( 靑南 )
▶ 동명의 유래 ( 由來 )
청남마을은 뒷산이 소뿔 ( 牛角 ) 처럼 생겼다고 하여 " 소뿔담 " 이라고 불리어 오기도 하였으며 , 1984 년 고성군의 이동명칭 및 행정구역 확정시 청광리를 분동 ( 행정동 ) 하면서 청남으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취락으로 소뿔담 , 마당몰이 ( 中村 ), 웃담 ( 上村 ), 청광물 ( 靑光谷 ) 로 형성되어 있다 .
▶ 마을의 형성 ( 形成 )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대략 1600 년경 임진왜란 전후로 추정하고 있으며 현재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씨족별로는 김씨 ( 金氏 ), 박씨 ( 朴氏 ), 전씨 ( 全氏 ), 임씨 ( 林氏 ), 황씨 ( 黃氏 ), 최씨 ( 崔氏 ) 등 여러 성씨가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 마을의 지세 ( 地勢 )
청남마을은 면 소재지로부터 동북쪽으로 약 10 ㎞ 지점에 위치하여 마을 뒷산이 남향으로 평온하게 뻗어 내려 산록지대에 농경지를 형성하고 있으며 , 마을 남쪽에 위치한 필두봉 ( 筆頭峰 ) 은 해발 200m 이상의 고지대 산간지로 일조 ( 日照 ) 광선이 남북방향에 있기 때문에 음달과 양달이 현저하게 나타나는 지대이다 . 그리고 필두봉을 경계로 동쪽은 구만면과 , 장구재를 경계로 봉치리와 접하고 있다 . 농경지는 일부가 고지대 산간지에 산재해 있으며 평지의 농경지는 경지정리가 된 비옥한 토질로 수원도 양호하여 농산물의 생산이 풍부하며 마을 앞을 지방도가 통과하고 있어 오지마을로서는 교통도 편리한 편이다 .
○ 지명과 전설
▶ 처녀바위와 총각바위의 전설
청남마을에 옛날 옛적에 담을 하나 사이에 두고 처녀 , 총각이 살고 있었다 . 처녀의 집은 양반 부자집이었고 , 총각집은 가난하였으나 예의가 엄격한 집안으로 총각은 마음이 착하고 용모가 준수했다 . 어느 날 처녀가 우연히 담장너머로 옆집의 준수한 총각이 글을 읽고 있는 것을 보았다 . 때는 " 남녀칠세 부동석 " 이라는 엄격한 유교적 사상이 사회를 지배하던 때라 옆집에 저렇게 준수한 총각이 살고 있는 줄을 미쳐 모르고 지냈던 것이다 . 처녀의 나이는 한창 무르익은 나이 인지라 총각을 보는 순간 가슴이 마구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 그날밤 처녀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옆에 자고 있던 몸종을 깨워 두루 마리에 글을 지어 보냈다 .
' 내일 한나절 해가 그림자를 발아래에 오게 하거든 소당산 깊은 산골에 있는 큰 바위까지 나오라 ’
고 했다 .
다음날 아침 해가 뜨자마자 처녀는 나물 캐는 바구니를 들고 일찍 나섰다 . 그날 소당산 바위 위에서 처녀 총각은 첫 대면을 하였다 . 서로가 보는 순간 반해 버렸다 . 그후 두 남녀는 자주 만났다 .
이런 소식이 점차 동네에 퍼지기 시작했다 . 소문은 점차 불어나 처녀가 아기를 가졌다고까지 누명을 쓰게 되었고 마을의 수치니 몰매를 돌려야 한다고까지 했다 . 일이 이쯤 되자 총각은 처녀 아버지를 찾았다 . 그리고 그 동안의 이야기를 하고는 서로 결혼만 하면 해결이 된다고 생각했다 .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처녀 아버지는 가문을 욕되게 한 죄를 용서치 않는다고 하였다 . 그 후 총각은 몇 번이나 간청을 했지만 처녀 아버지의 마음은 움직이질 아니했다 . 그러던 어느 날 처녀와 총각은 소당산 큰바위 위에서 만났다 . 그리고 기막힌 자기들의 운명을 서로 이야기 하면서 저 세상에 가서 이승에서 못다한 사랑의 한을 풀어보자고 다짐하고는 바위에서 떨어졌다 . 이 순간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치면서 천지를 진동하더니 큰 바위가 반으로 뚝 갈라졌다 . 마치 처녀 총각의 애달픈 사랑을 이야기 하는 듯 지금까지도 전설로 전하고 있다 .
[ 용암산 (399.5m)]
〇 고성군 개천면 청광리 , 구만면 저연리 연동에 있는 산
○ 용암산 : 이 산에 큰 바위가 있는데 그 형상이 꼭 농과 같다 하여 농바구라 함 . 속칭 「 함박산 」 이라고 하며 , 그것을 고쳐서 복을 묶은 산이라 하여 「 함복산 」 이라고도 함 (399.5m)( 개천면 )
[ 남성치 (180m)]
○ 남성치 : 고성군 구만면 화림리 선동마을 입구
○ 남성치 : 이 부근에 남성초가 많이 있었다 하여 남성재라 함
○ 1 차선 포장도로
〇 고성군 구만면 화림리 선동 ( 仙洞 ) 마을
▶ 동명의 유래 ( 由來 )
선동마을은 마을 뒤의 " 선박골 " 의 풍경이 아름답고 자연용수가 약수로 이름나 있어 옛날에 선인 ( 仙人 ) 이 이곳에서 목욕을 하고 다녀갔다는 유래로 마을 명을 선동이라 하였으며 고려조 현종 때 ( 서기 1018 년 ) 에는 진주군 양전면 ( 良田面 ) 에 속하였으며 1895 년 ( 조선조 고종 32 년 ) 의 지방제도개정시 고성군 개천면의 나선리로 평입되었다가 , 1983 년 2 월 15 일자 대통령령 제 11027 호로 구만면 화림리 ( 선동 ) 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마을의 형성 ( 形成 )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1773 년경 ( 조선조 현종때 ) 에 전주이씨 ( 李氏 ) 가 입촌하고 그 뒤에 나주임씨 ( 林氏 ), 김해김씨 ( 金氏 ), 합천이씨 ( 李氏 ) 등 제씨가 입촌하여 마을이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지금은 전주이씨 ( 李氏 ) 의 집성촌이다 .
▶ 마을의 지세 ( 地勢 )
선동마을은 구만면의 가장 오지마을로 면소재지에서 3km 거리이나 높은 재 너머에 있는 산골 마을로 동쪽은 가남산 ( 柯南山 ), 남쪽은 필두봉 ( 筆頭峰 ), 북쪽은 마봉산 ( 磨峯山 ) 으로 둘러 싸여 있으며 동북쪽의 깃대봉 ( 旗台峰 : 해발 520.6m) 을 경계로 마산시 진전면과 경계를 하고 있고 마을 주변의 산록지에 조성된 농경지는 천수답이 많으나 수원은 좋은 편이다 .
[ 옥녀봉 (387m)]
○ 고성군 구만면 화림리에 있는 산
○ 옥녀봉 산 형상이 아름다운 여인과 같다 하여 옥녀봉이라 한다 .
○ 고성군 구만면 화림리 당산 ( 堂山 )
▶ 동명의 유래 ( 由來 )
당산마을은 조선조때에는 외원 ( 外院 ) 으로 부르다가 임란때 전주최씨 ( 崔氏 ) 가 입촌하여 살면시 마을 중간에 독메 ( 야중임야 ) 가 있어 그 독메를 " 당산 " 이라 하였으며 마을명도 당산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마을의 형성 ( 形成 )
당산마을이 형성된 것은 서기 1519 년경 ( 조선조 중종때 ) 에 나주나씨 ( 羅氏 ) 가 맨 먼저 입촌하였고 그 뒤에 1623 년경 ( 조선조 인조때 ) 안악이씨 ( 李氏 ) 가 입촌하여 살았으며 , 1712 년경 ( 임란때 ) 에 전주최씨 ( 崔氏 ) 가 입촌하여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어 전주최씨가 대성을 이루어 살고 있고 그 외 성씨로 함안이씨 ( 李氏 ), 진양하씨 ( 河氏 ) 등 제 성씨가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다 .
▶ 마을의 지세 ( 地勢 )
당산마을은 연화봉 ( 蓮華峰 ) 이 동남으로 뻗어 내려 용암산 ( 龍岩山 ) 과 작약산 ( 芍藥山 ) 을 이루고 , 옥녀봉 ( 玉女峰 ) 의 주맥이 흘러내린 산자락에 자리 잡은 아담한 마을 로 당산 주변에 형성된 농경지는 경지정리가 된 비옥한 토질이나 수원이 부족한 지대이다 .
[ 벌발들 (418.5m)]
[ 선동치 ]
[ 깃대봉 (435.2m)]
○ 깃대봉 일제시대 토지측량 기준점이 있는 곳이라 하여 유래되었다 .
○ 옛날에는 이봉산이었으나 세부측량 때 깃대를 꽂았다 하여 깃대봉이라 함 (435.2m)( 구만면 )
○ 깃대봉 ( 수리봉 ) : 보담산의 정상이다 . 세부 측량 때 기점 표시 깃대를 꽂았다고 한다 . 또 봉화를 올렸다고도 한다 .( 진주시 이반성면 대천리 )
○ 고성군 구만면 주평리 ( 酒坪里 )
▶ 동명의 유래 ( 由來 )
주평리는 본래 고성군 구만면의 지역으로서 단일 법정리로 형성된 마을로 옛날에는 원평동 ( 遠坪洞 ) 이라 하였는데 조선조 말엽에 유명한 학자인 박완천당 ( 朴浣川堂 ) 선생과 노묵재 ( 盧墨齋 ) 선생 두분이 취석정 ( 醉石亭 ): 바위 ) 에서 술잔을 취석 아래 찬샘에 띄어 놓고 대작하면서 서로 우정과 시흥을 돋우며 세상을 걱정하면서 심금의 회포를 펼친 곳으로 이 샘을 주천 ( 酒泉 ) 이라 하였으며 동명 또한 주천으로 고쳐 부르다가 1914 년 행정구역 개편시 주평리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마을의 형성 ( 形成 )
마을이 형성된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450 년경에 밀양박씨 ( 朴氏 ) 가 입촌하였고 그 뒤에 전주최씨 ( 崔氏 ) 가 1750 년경에 입촌하였으며 1762 년경에 창령조씨 ( 曺氏 ) 가 입촌하여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
▶ 마을의 지세 ( 地勢 )
주평마을은 적석산 ( 積石山 ) 준령을 경계로 회화면 ( 삼덕리 ) 과 마산시 진전면과 접하고 있으며 소태산 ( 깃대봉 : 해발 437m) 에서 뻗어내린 산줄기로 효락리와 경계를 하고 있는 마을로 산록지와 마을앞에 형성된 들판은 경지정리가 된 비옥한 토질로 농산물의 생산이 풍부한 마을이다 .
[ 발산재 ]
○ 진주시 이반성면 발산리 ( 鉢山里 )
1914 년 , 진주군 가수개면 돈두동 ( 可樹介面屯頭洞 ), 계룡동 ( 溪龍洞 ) 각 일부와 마산부 양전면 발산리 ( 良田面鉢山里 ) 로서 발산리 ( 鉢山里 ) 라 하였다 .
▶ 발산 ( 鉢山 ) : 외동 , 내동 , 시동 등으로 구분되며 주된 성씨는 상산김씨 , 진양정씨 , 양 성이 300 년 전부터 자리 잡고 살고 있으며 김씨는 우사정의 재실이 있어 조선시대 서당으로 존립하다 소실되고 그 후 맞은편에 복원하여 근방 젊은이들이 많이 배웠다고 전한다 . ▶ 발산마을
임진왜란 떄 업적을 남긴 김준민 ( 金俊民 ) 장군의 업적이 담긴 신도비각을 70 년 전 후손들이 뜻을 모아 건립 . 70 년대 초에 문공부의 지원으로 복원 , 합천군 가희면 목골에는 초혼장의 무덤이 있고 배위는 진양강씨로 의령에 있는 묘지를 70 년 초 비각중수 시 장군 옆으로 옮겨 그 내용의 비문을 비각 경내에 별도로 추가하였다 . 이 마을은 창원군과 경계 지점이고 국도가 고개를 넘는 곳으로 동명을 발산이라 하는데 전설에 의하면 전쟁이 일어나면 크게 발대를 막고 승패를 짓는 곳이라고 하여 인위적으로는 대단위 호수를 막고 살아야만 지명과 전설이 일치한다고 하였다 . 지금은 맞은 산과 산 사이를 높게 제방을 쌓아 대단위 저수지를 축조하여 농업용수 및 항구적인 한해 대책으로 인근 길성 , 가산 , 대천 , 반성 , 사봉 , 진성면에 이르기까지 큰 혜택을 보고 있다 .
2011.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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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정맥 산행기
낙남정맥 제 7 구간(장전고개~발산재) 산행 참고자료
佳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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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7.13 11:51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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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회장님만이 쓰실수 있는 글이네요.
늘 좋은 자료를 올려주셔서 마루금을 걸으며 심신의 단련을 넘어 이땅에 대한 애착을 갖게해줍니다.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