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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음악에 관한 성경적 고찰
I. 들어가는 말
1. 문제 제기
오늘날 교회 안에는 국적이 불분명하고, 무분별한 노래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와 불러지고 있다. 그런데 이 노래가 신자와 불신자와의 접촉점 역할을 할 수 있는 대안적인 찬양임을 자처하고, 교회의 한 자리를 버젓이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교회에 무차별한 방법으로 침투하여 이제는 예배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통제하고 있다. 찬양의 속도(Tempo)를 어떤 기준도 없이 가속화하는가 하면, 아무 의미와 기준 없이 몇 번이고 반복해서 부르는 행태가 보편화되어 있는 실정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시도는 주술적인 목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다분히 내포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이 아무 저항 없이 받아들여 부르고 있다. 그 결과 오늘날 예배음악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목적보다 인간들 간의 감정이입을 위한 목적과 개개인의 욕구 충족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이런 행위는 현대인들이 현실도피의 한 방법으로 즐기는 퇴폐음악이나 자극적인 음향을 바탕으로 한 음악을 추구하는 것과 별반 다름이 없어 보인다.
또 한 가지는 예배에 관한 개념의 고착화로 예배 자체를 너무 예전(Liturgy)적인 것만을 고집하여 지켜나가려는 생각 때문에 기쁨의 예배를 드리려는 목적의 요소들을 수용하지 못하는 율법주의적 찬양으로 흐르려고 하는 경향도 있음을 간과해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배음악에 관한 개념의 정립이 모호하게 되어 버렸으며, 찬양에 대한 개념마저 실종됨에 따라, 의미도 없고 감격이 없는 회중 찬송이 불려지고 있고, 교회의 예배음악을 담당하고 있는 지휘자와 오르가니스트(Organist)와 피아니스트(Pianist)와 악기 연주자와 성가대원과 그밖에 찬양 사역자의 자세와 역할이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을 뿐 아니라, 매우 위협받고 있는 현실이다. 그밖에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하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대한 예배에 대한 개념마저도 크게 혼동됨으로써, 과연 어떤 것이 예배다운 예배이며 찬양다운 찬양이 무엇인지를 판단하기가 어렵게 되고 말았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다는 정신이 실종되었으며, 예배순서가 예배정신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망각된 채로 그냥 드려지고 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의 대부분이 극히 수동적으로 되어서 예배형식에만 치우치게 되었음은 물론, 소위 '방관자 증세(spectatoritis)'가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다.
2. 연구 목적과 범위
필자는 본 논문을 통해서 예배 중 가장 비중을 많이 차지하는 예배음악을 어떻게 정립하고, 드리는 것이 바른지를 고민하고 살펴보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예배가 무엇이며, 참으로 바른 예배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살피는 것이 중요하며 또한 순서일 것이다.
그러나 예배에 관한 연구가 본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세세한 설명은 가급적 피할 것이며, 예배의 성경적 배경을 살피면서 예배음악과 관련된 흐름만을 따르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예배 가운데 예배음악이라 할 수 있는 회중 찬송과 기악 찬송과 성가대 찬양을 부를 때 가져야 하는 바른 자세와 역할을 찾아서 점검하고, 나아가 예배에의 회복이 찬양을 통해 이뤄지도록 대안과 방향을 제시하려 함을 목적으로 한다.
논문의 범위는 칼빈주의를 지향하는 개신교회당에서 예배 시에 드려지고 있는 예배음악에 관한 것들을 살펴봄으로써, 그것이 본 논문의 출발점과 과정이 될 것이며 그 흐름을 따라서 결론을 도출해 낼 것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제 I 장에서는 문제제기와 연구목적과 연구범위를 결정하고 제 II 장에서는 예배의 정의와 배경과 시대에 따라 변천해 온 예배의 흐름에 관한 부분을 살펴보려 한다. 예배에 관한 내용들은 족장 이전 시대와 족장 시대와 율법 시대를 포함한 구약시대와 바벨론 포로이후 시대 및 신약시대와 오늘날의 예배와 열린 예배 등으로 크게 분류해 살펴볼 것이다. 제 III 장에서는 “찬양에의 회복이 예배의 회복에 있다”고 단정해도 좋을 만큼 예배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예배음악에 관한 고찰을 다각도로 다루려고 한다. 즉 예배음악의 정의와 기원과 역할을 살펴볼 것이며, 예배음악 중 찬양과 성가의 호칭문제를 정리하여 거기서 오는 혼란을 종식시키고, 찬양과 관련된 제반사항까지 세세하게 언급할 것이다. 제 IV 장에서는 찬양가와 복음가의 관계성을 성경적 관점에서 정립할 것이며, 제 V 장에서는 예배음악에서의 악기 사용문제 등을 심도 있게 다루어 예배음악에 관한 바른 개념을 근간으로 하는 바른 이해와 그것의 올바른 사용을 정립하고자 한다. VI 장에서는 예배음악을 실제로 다루는 성가대와 관련된 제반 사항들을 언급하면서 그것을 아름답게 연주할 수 있는 실질적 방법론과 실용적인 문제를 다루고 마지막 VII 장에서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II. 예배의 개념
1. 정의
대체 예배란 무엇인가? 흔히 우리는 “예배드리자” 또는 “예배 보러 가자” “예배하자”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어느 표현이 맞는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예배에 대한 분명한 정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를 정의하기 이전에 “예배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명령임”을 우선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결국 예배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하는 행위(역대상 16:29, 시편 45:11 참조)라는 사실이 도출된다.
신학박사 김홍전은 자신의 저서에서 “예배란 하나님께 공경하는 마음으로 절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예배드리는 자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예배를 히브리원어로 ‘다라시‘(darash), ‘아밧'(Abaat), ‘샤하'(Shahaah)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다라시‘란 ‘seek‘로서 ‘찾는다‘, ‘구한다‘라는 뜻(스가랴 4장 2절)이고, ’아밧‘은 ‘work‘, ‘labor‘, ‘serve‘로서 ‘일한다‘, ‘노동한다‘. ‘섬긴다‘는 뜻(사무엘하 15장 8절)이며, ’샤하‘는 'prostrate', falling down', 'serve'로서 ‘납작 엎드려 숭배하다‘라는 뜻(이사야 66장 23절)을 가지고 있다.
디아스포라(Diaspora)에 있는 유대인들을 위하여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인 70인경(Septuaginta)에서 ‘아밧‘이란 개념은 ’레이투르기아‘(leitourgia)로 번역되어 ‘공중목적을 위해 부한 자가 무보수로 하는 봉사’를 뜻하고 있다. 이 용어는 신약시대에 와서도 많이 사용되어 ‘하나님께 봉사한다.‘라는 뜻의 예전(liturgy)라는 용어가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샤하’라는 히브리어는 신약시대 헬라 원어‘프로스큐네오'(Proskuneo)로 발전되었는데 이것은 ’종이 주인을 섬길 때 무릎을 꿇고 손에 입을 맞춘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용어이다.
이것은 시편 95편 6절에서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라는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당시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주지였던 팔레스타인 근동지방의 종들은 자신들의 주인에게 무릎 꿇고 발에 입 맞추거나,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섬겼던 것이다. 따라서 예배란 예배드리는 자가 하나님께 종이 주인을 섬기듯 해야 한다.
영어로는 ‘Service‘인데 이것은 ‘섬김‘을 뜻하는 것으로 우리가 가진 최고의 것으로써 최고의 예를 갖추어 섬기는 자세로 하나님께 드려야 함을 뜻하는 말이다.
앵글로색슨(Anglo-Saxon)어로서는 'Worship‘으로 ‘Weothscipe'에서 유래된 것인데 ‘worth'(가치)와 ‘ship'(신분)의 합성어이다. 이 뜻은 ‘가치가 있는 대상을 인정함으로써 그에게 가치를 돌린다‘(to ascribe worth)는 뜻으로 ‘영광과 존귀를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신분을 가지신 분께 인간이 자신의 최고의 것을 드림으로써 자신은 없어지고 받으시는 분만 드러나게 한다‘는 점에서 히브리원어와 헬라어원어와 영어와 앵글로색슨어 등 모든 언어의 의미가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예배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 앞에 경배하는 자신은 전적으로 죽어지고, 창조주로서의 영광과 존귀를 마땅히 받으셔야 하는 하나님만을 기뻐하며 그분만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최고의 것으로, 최고의 섬기는 자세로 드리는 행위’를 말한다. 바꿔 말하면 예배는 우리 마음의 생각과 행동과 믿음 그리고 나의 삶과 죽음 자체를 모두 드리는 것이다.
2. 배경
가. 성경적 배경
1)족장시대 이전의 예배
창세기 3장 21절을 인류 최초의 예배의 기원임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으나 대체적으로 성경에 역사적으로 소개된 최초의 예배의 기원은 창세기 4장 3-5절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이다. 두 번째 예배는 4장 26절에 셋의 자손의 예배이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세 번째로 언급하고 있는 예배는 창세기 8장 20-21절에 나오는 노아가 드린 제사이다. 이 제사는 홍수 심판 가운데서 노아의 가족을 구원하는 구속적인 의미와 그 구원에 대한 감사로서의 제사와 예배로 이해되고 있다.
이와 같이 각 개인들은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절을 하고 예물을 드렸는데 죄를 지은 사람은 특별히 희생제물을 드려야만 했다. 또 정결함과 부정함의 규칙을 철저히 준수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회개를 표현하였다.
2) 족장시대의 예배
족장시대라 함은 아브라함 시대부터 출애굽 이전의 시대를 말한다.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 시대와 요셉 때에 애굽에 내려가 약 400여 년 간의 시대를 말하는 것이다.
이때의 제사는 성막이나 제사장이 없었기 때문에 어디에서든 다듬지 않은 돌로써 제단을 쌓아 희생의 제물을 드렸다.
먼저 아브라함이 드린 제사는 창세기 12장 7절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네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 곳에 단을 쌓고“에 나타나 있다. 또한 창세기 24장 26-27절을 보면 아브라함의 종이 제사 드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법을 배워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창세기 26장 23-25절을 보면 그랄 지방에서 브엘세바로 올라가게 되었는데 그 밤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세우셨던 언약을 다시 약속하셨다. 그러자 이삭이 그 곳에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창세기 28장 10-19절을 보면 야곱이 형(兄) 에서의 낯을 피하여 하란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한 곳에서 돌을 취하여 잠을 잤는데 꿈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야곱에게 땅과 자손에 대한 축복을 약속 받고 잠에서 깨어나자 베개로 삼았던 돌을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부어 제단을 쌓았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족장시대의 제사에서는 예배음악이 없는 제물만을 요구하신 사실을 알 수 있다.
3) 율법시대의 예배
율법시대란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하여 광야생활을 거쳐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부터 사사시대와 왕정시대까지를 말한다.
이 때도 족장시대의 가족예배가 존속하기는 했으나 공적예배 장소인 성막이나 성전이 있었고, 제사장을 세워 집례 하도록 하셨다. 또한 규모 있는 제사와 아름다운 제사법을 모세에게 명하셨고, 이를 여호수아가 계승하였다. 민수기 10장 10절을 보면 제사장이 제사 때 나팔을 담당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는데 이것은 창세기 4장 21절의 본래 예배음악에 사용된 harp와 flute를 연주한 유발이 소개된 이후 처음으로 제사 때 예배음악의 흔적이 나타남을 가리키고 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회중 찬송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당시 예배는 가족과 공동체 중심으로 슬픔을 공유하는 속죄일(레위기 23장 27-28절)과 기쁨을 공유하는 속죄일 외의 절기에 주기적으로 드렸다. 이 때 예배를 드리는 자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였다. 말라기 1장 13절의 경우처럼 하나님을 향해 진실하게 표현되지 않으면 그 예배는 열납 되지 않는다는 신앙이 바탕 되어 있었다. 이사야 1장 11-12절에서는 자신을 나타내 보이려고 드리는 예배도 또한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예배의 형식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것을 정하여 정확하게 드릴 것을 명하셨다. 희생제물과 예물(시편 50편 8절)이 있었으며 축도(민수기 6장 24-26절)와 찬양대와 비파와 수금, 제금 등과 같은 악기들이 사용되었다.
반면에 사무엘상 2장 1-10절에 나오는 개인적 예배의 가장 아름다운 표현인 한나의 기도와 시편 23편과 51편으로 대표되는 다윗의 시와 같은 개인 찬송도 있었다.
왕정 시대의 예배는 다윗과 솔로몬이 중심이다. 다윗이 처음으로 성전에서 봉사하는 찬양대를 구성한 인물이며, 이를 계승하여 발전시킨 인물이 솔로몬이다. 다윗과 솔로몬은 대규모의 찬양대를 편성하여 제물 드리는 일과 찬양 드리는 일을 모두 뜰에서 행하였다.
이 시대의 제사는 성막이나 성전에서 제사장의 집례로 제물을 드리되 찬양과 함께 드렸다는 사실이 특징이다. 성가대의 찬양과 회중이 찬송을 부르는 장엄하고 아름다운 제사였다.
여기서 하나님의 관심은 제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찬양에 있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4) 포로 이후의 예배
솔로몬 왕 이후 남북으로 갈라진 이스라엘 12지파는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먼저 멸망한 데 이어 남 유다도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 때 예루살렘은 무너지고 성전은 파괴되었다. 백성들이 70년 동안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왔을 때 성전이 이미 파괴되었으므로 성전제사가 불가능하였고, 대신 회당(Synagogue)예배가 시작되었다. 주전 444년 느헤미야는 에스라와 더불어 제사법전과 제사의식을 새롭게 가다듬어 회당예배를 발전시켜 나갔다. 회당예배는 기도와 찬양이 수반되었다.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회복될 때까지 성전에서 행했던 예전적 예배와 더불어 공존하였다.
5) 신약시대의 예배
이때의 예배는 성전에서의 예배, 회당에서의 예배, 가정 및 다른 장소에서의 예배 등 세 가지 예배 형태가 있었는데 유대인 회당예배의 영향이 컸던 시기이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날마다 가르치셨고(마가복음 14장 49절), 회당에서도 안식일에 예배를 드렸으며, 설교를 하심으로 회당예배의 정통성을 인정하셨다.(누가복음 4장 16절) 그러나 의식적인 예배를 혁신하려는 시도보다는 예배의식에 생명력을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영적 예배를 강조하셨다.(요한복음 4장 24절) 또한 신약시대의 예배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세례식과 성만찬의식이 제정되었다.(마태복음 26:26-29 ; 28:19-20, 고린도전서 11:22-29)
성례전은 구약의 성전예배나 회당예배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의미와 내용을 지닌 예배의식이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새로 제정하신 세례와 성찬을 포함한 새로운 예배형태를 이루어 나갔던 것이다. 결국은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례전은 기독교 역사에 변함없는 예전이 되었고, 예배의 구심점으로 지금껏 지키며 내려오고 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예수님 부활 이후 오순절 성령강림을 체험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면서 성전에 모여 예배드렸다. 그리고 집집마다 돌아가며 docks(agape or love feast)라 불리는 식탁 공동체를 가졌는데 이 식사의 마지막 부분에서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만찬의 예전을 가졌으며, 예전이 끝날 무렵에는 예언이나 방언을 비롯한 특별한 은사가 나타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애찬식과 은사교환 등은 2세기 후반에 이르러 기독교 예배의 구심점 밖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는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훼파되었기 때문에 성전예배는 완전히 사라지고 회당예배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로마의 박해 속에 지하교회로 숨어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의 예배는 비록 예배의 형식은 비(非) 형식적이고 자발적이고 개방적이었지만 성령의 강력한 역사와 다양한 은사가 나타났다. 제물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예배순서는 그 시대의 실정에 맞도록 기도, 찬송(사도행전 2장 47절), 설교(사도행전 2장 14-36절), 가르침(사도행전 2장 42절), 성례(사도행전 2장 41절, 46절과 고린도전서 11장 23-26절), 축도(고린도후서 13장 13절)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 역사적 배경
1) 초대교회 예배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 갖게 된 초대교회의 예배형식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유대교 회당 참석 금지조치로 유대교와 다른 새로운 형식을 갖게 되었다.
문헌들을 종합해 보면 초대교회 예배 내용은 먼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예배하는 자들의 마음을 드렸다. 이어 말씀과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와 감사와 간구, 중보적 기도,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기도(Maranatha), 축도를 드렸고, 아멘의 응답을 활용했다. 그리고 예물 봉헌을 하고, 죄의 고백과 신앙고백을 하면서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했다. 맨 마지막에 성만찬과 세례를 베품으로써 자신들이 예수 공동체임을 다시 인식하여 성령의 역사와 함께 복음전파에 역동적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대중기도 혹은 개인기도, 성경 읽기, 찬양과 설교, 사죄와 신앙고백, 성례가 예배의 주된 내용으로 자리 잡았다.
2) 중세기 예배
로마의 콘스탄틴(Constantine) 황제가 주후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함으로써 지하의 교회들이 지상으로 등장하고, 기독교의 영역이 급팽창하는 시대가 오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확장되어버린 카톨릭 교회는 분열이 불가피했고, 예배의 형태도 장소에 따라 각각의 특수성을 인정해야 했다. 콘스탄틴 대제는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콘스탄티노플에 대 성전을 건축하였고, 성직자의 위치와 권위 역시 점차 확장되어 갔다. 이처럼 급격하게 변화된 예배의 조건들은 외적인 형식과 의식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었다.
주후 380년 기독교의 국교화 이후 예배현장에 신비적 요소와 미신적 형태가 발생되어 점점 심화되어 갔다.
예배 또한 인위적인 형식이 가미되어, 수많은 기도문과 교독과 교창을 만들었다.
주후 5세기경부터 종교개혁까지는 일정한 시간에 드리는 예배의 고정된 형태에 알맞게 맞추어서 설계된 건물을 강조하였다. 여기서부터 주님의 만찬을 행하는 한 방법인 미사의 발전이 있게 되었다.
주후 6세기경에 기독교의 다른 분파들은 자기네 고유의 예배의식을 발전시켰다. 이 시대 예배의 특징 중 하나는 하나님께 끊임없이 요구하는 화해였다. 이와 병행해서 평신도들의 참여 없이 순전히 성직자들만이 드리는 미사가 발달되었다. 미사는 라틴어로 진행되어 평신도들은 예배의 관람자격인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사제와 소수의 성가대는 성직자들만이 가능하였고, 심지어 회중 찬송까지도 성직자들만 부르게 함으로써 신명기 31장 19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고 말았다.
그리고 성경과 모든 집례를 회중이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로 진행함으로써 장엄한 분위기를 조성하여 예배의 존엄성을 고취시키려고 하였으나, 회중을 예배를 구경하는 방관자의 위치로 전락시킴으로써 평신도들의 일상적인 삶에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거리가 먼 예배형식이 되어 버렸다.
또한 이 시대 예배의식의 발전은 종교와 예술의 투쟁이었으며, 영적인 것이 예술적인 것에 예속되어 버렸다. 그래서 이 시대의 예배의식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근본정신에 배치되는 점이 두드러진 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 예배
주후 16세기 후반 로마교회를 보면서 수많은 개혁자들과 민중들은 개혁의 필요성을 공감하게 되었다. 마침내 일어난 종교개혁은 중세교회의 예배 형태에 새로운 변혁을 가져왔다. 이 시대의 예배는 설교가 중심이 되는 예배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개혁자들은 말씀이 예배의 기본적인 핵심이기 때문에 예배는 합리적이어야 하며, 이해할 수 있도록 중세교회의 라틴어 중심에서 벗어나 자국어 중심의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대체로 세 가지 형태의 예배를 취했는데 먼저 가장 보수적인 개혁은 '루터주의'의 것으로 후에 성공회가 여기서 예배의 본을 땄다. 다음은 온건한 '칼빈주의'의 것으로 나중에 장로교, 개혁교회의 예배 형태를 낳았다. 그 다음으로는 가장 급진적인 형태로 재 침례교 및 케이커(Quaker)교와 같은 청교도적 전통의 독립 교회 안에 나타났다. 이들이 침례교, 회중교(Congregationalists) 및 다른 자유교회에 영향을 주었다. 이 때 예배 개혁에 공헌한 사람은 루터(Luther), 쯔빙글리(Zwingli), 칼빈(Calvin)이다. 루터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읽도록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또한 평민들의 언어로 회중 찬송을 만들어서 예배 시에 모든 신자들이 다같이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원했다. 쯔빙글리는 예배에서의 단순성과 윤리적 실재성을 추구하였다. 그는 종교개혁자들 중에서 가장 음악적인 재능이 많은 사람이었으나 공중예배에서의 음악사용을 가장 반대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박해자의 손에서 고난을 당한 순교의 찬송이었다. 존 칼빈은 시편(Psalms)이나 송가(Canticle)만 부르도록 하였고, 창작가사 사용을 불허하였으며, 오르간 사용도 하지 못하도록 하여 무반주로 제창을 하도록 강조하였다.
4) 현대의 예배
전통적 예배제도가 쇠퇴하고 18세기 새로운 각성운동에 따라 형식적인 예배보다 영적 부흥에 주력하게 되었다. 예배서에 의한 기도보다 신자의 즉석기도가 주종을 이루었다. 예배의 갱신과 성찬식을 영국교회의 중심이 되도록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청교도의 영향으로 제도보다 정신에 주력하던 청교도들도 19세기 말엽에 와서 예배 형태를 개선하려고 했다. 또한 현대 예전운동으로 예배 구조의 변화와 방법론 개선에 노력하며 성찬예식도 새로운 궤도로 정착되어졌다. 따라서 성경적 근거와 기독교의 전통을 배경으로 하여 시대에 맞게 개선해 가는 예전운동(Liturgical Movement)이다.
5) 오늘날 예배
개개인의 건강진단서처럼 예배가 교회의 내적 생명의 가장 귀한 단서를 제공해 주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신학적 흐름과 건축, 예술, 음악의 양식이 예배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교회가 예배에서 신학과 윤리를 무시할 수 없듯이 신학과 윤리를 예배와 분리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기도와 찬양, 성경 봉독과 설교, 헌물과 성례가 있으면 완벽한 예배의 형식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예전적 요소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곤란하다. 그러나 그것만을 너무 고집한 나머지 다른 비(非) 예전적 요소가 포함되는 것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려는 행위도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예배형식에서 성례가 빠지고 있는 현상이 납득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성례에 소요되는 시간이 첨가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예배가 길어진다는 것이 현대 기독교인들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1년에 몇 차례 정도만 절기 때에 드려진다는 것은 예배의 본질을 망각한 행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경우를 고치려는 의식은 없으면서 비(非) 예전적 요소들을 첨가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마치 진리를 사수하는 양 완강히 금지하고 있는 것은 상당히 모순된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례가 빠진 상태로 지금까지 예전적 예배를 드려왔던 전통을 이해하는 태도가 우선 필요하고 또 비(非) 예전적 요소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목적이라면 과감하게 수용하는 태도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초대교회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예배형식이 새롭게 발전되면서 요즘의 열린 예배 등과 같이 아예 예전적 요소를 많이 없애버리고 대신 비(非) 예전적인 요소가 예배 내용의 주류를 이룬다면 그것 또한 진정한 의미의 예배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대신 필수적으로 포함되어져야 할 예전적 요소에 비(非) 예전적 요소를 예배의 형식에 잘 가미하여 조화시킨다면 더 아름답고 풍성한 예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드려야 한다는 바른 이해의 바탕 위에 기쁨의 감사와 진실한 회개의 자세를 얹어 예배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나아가는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다.
6) 열린 예배
열린 예배의 기원은 빌 하이빌스(Bill Hybels) 목사가 1992년 미국 일리노이 주의 남부 배링톤(South Barrington) 지역에 윌로우크릭 교회(Willow Creek Church)를 세우면서 시작한 구도자 예배(Seeker's service)를 말한다. 그러나 요즘은 부활절에 한 가정에서 출발하여 15년 만에 10,000명이 출석하는 21세기 교회의 성장 모델이 되어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들백에 위치하고 있는 새들백 교회에서 드리고 있는 예배 형태를 열린 예배의 전형으로 인식하고 있다. 열린 예배의 특징을 살펴보려 한다.
첫째, 이 교회는 교인들이 목적에 따라 예배를 선택, 참석토록 하고 있다. 예배를 통한 찬미(Magnify)와 선교(Mission)와 교제를 통한 소속감(Membership)고취와 제자훈련을 통한 성숙(Maturity)과 봉사사역(Ministry) 등 목적에 따라 예배를 나누고 있다.
둘째, 올바른 예배 형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용서의 체험과 하나님의 목적을 알게 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볼 수 있는 예배라면 어떤 형식이든 상관없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드려도 진정한 예배가 된다고 주장한다.
셋째, 오전 예배는 오직 전도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드리고 있다. 그러므로 장르에 관계없이 온갖 종류의 음악형식, 말씀, 구제, 간증, 드라마가 예배에 총동원되어 드려지고 있다.
이것은 예배의 95%가 구도자에게만 초점이 맞추어진 예배형태라고 할 수 있다.
넷째, 시편 96편 1절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는 말씀을 근거로 오르간을 MIDI(Musical Instrument Digital Interface)로 바꿔버리고 교인들의 95%가 선호한다는 이유만으로 현대적 팝(Pop), 록(Rock), 칸츄리 음악(Country Music), 서부음악(Western Music)만을 연주하여 폭발적 성장이 있었음을 내세우고 있다.
다섯째, 예배회수와 예배시간에 제한이 없이 드리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드린다.
이상의 특징에서 볼 수 있듯이 오늘날의 예배에 도입할 만한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자면 오늘날의 예배는 새 신자가 예배 자체를 이해하여 은혜와 좋은 감정을 느끼기에는 어렵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들을 위한 축제 분위기의 예배가 따로 열려야 한다는 점은 수용할 만한 부분이다. 그러나 열린 예배가 구도자를 위한 예배에만 치중하다보니까 예전적인 요소가 모두 무시되는 우를 범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형식이 제대로 갖추어져야 거기에 걸 맞는 내용이 담겨지듯이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그 어떤 것보다 형식이 우선되고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의 능력을 체험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예배 자체의 형식을 소홀히 하거나, 심지어 무시해버리려는 태도는 보다 중요한 과정을 간과한 채 결과만을 중시하는 아주 위험한 발상에서 나온 행동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들은 무분별하다는 생각이 될 정도로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지양하고, 따져 보아 과연 어떤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예배인지를 잘 살펴서 그 여부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III. 예배음악의 개념
1. 정의
예배음악을 논하기 전에 음악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음악에 관하여 사전은 그 의미를 과학적인 설명으로 그려놓고 있다. “음악은 소리로써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시간적인 예술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반면에 성경은 음악을 하나님의 창조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요한복음 1장 3절에 나오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는 말씀을 근거 삼고 있다. 인간이 사용하는 문화가 원인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물이므로 음악 또한 창조물의 범주에 속하는 것은 두말 할 나위 없다. 따라서 인간에게 만들어주신 음악은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만들어주셨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언어인 음악을 세계 공통어로 주셨다. 언어가 히브리 언어만 있었다는 것과 잘 비교된다. 그 후 언어는 창세기 11장 1-9절에 기록되어 있는 바벨탑 사건으로, 인간들을 온 지면에 흩어져 살게 하시려고, 구음도 하나이고, 언어도 하나였던 언어를 혼잡케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음악은 모든 인간들의 공용어로 남겨두셨다. 인간의 언어 모두가 통역을 해야 의사가 통할 수 있으나, 음악은 통역이 없어도 누구든지 똑 같이 느낄 수 있는 세계 공용어로 남겨두셨던 것이다. 예를 들어 러시아 사람인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교향곡이나 독일 사람들인 바하나 베토벤의 오르간 음악과 운명 교향곡이나 이탈리아 사람인 비발디의 사계를 세계 모든 사람들이 통역 없이 감상하고 있는 것이다.
음악을 크게 나누면 두 가지로 대별된다. 예배음악(Liturgical Music)과 세속음악(Secular Music)이 그것이다. 이 중 기독교인들은 세속음악보다 예배음악에 가일층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면 과연 예배음악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기독교에서만 사용되고 있는 용어이다. 그런데 유사한 것 같아서인지 모르나 다른 용어들과 혼동하여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다시 말해서 종교음악(Religious Music)과 기독교음악(Christian Music)과 교회음악(Church Music)과 성(聖) 음악(Sacred Music)을 예배음악과 동일한 의미로 혼용하고 있다.
그런데 앞서 열거한 음악이 모두 조금씩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별하여 사용하는 것이 바른 자세이다.
우선 종교음악이란 가장 비(非) 기독교적이고, 예배음악과 거리가 먼 용어이다. 물론 종교음악이라는 보편적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타종교인들의 불만을 해소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이름 붙여졌는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그 용어가 기독교만의 특징을 나타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 외의 타종교에서도 공공연히 불리어지고 있기 때문에 가장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용어이다.
그리고 기독교음악은 문자 그대로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음악을 총칭하는 용어이다. 즉, 찬양 외에 교회 안팎에서 사용되고 있는 음악뿐만 아니라 기독교 색채를 띤 연주용 클라식(Classic) 음악까지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배음악과는 엄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편 교회음악은 대체적으로 교회당이라는 장소적 개념이 포함된 것으로서 그 곳에서 불리어지고 있는 모든 장르의 음악을 통칭하는 용어란 점에서 기독교음악보다는 더 좁은 개념이다. 이 용어는 언뜻 봐서 예배음악과 매우 유사하게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다. 교회음악은 비록 기독교적 색채를 띠고 있다 하더라도 만약에 예배와는 무관한 목적으로 연주된다면 교회음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점에서 서로 구별되고 있다.
끝으로 성 음악은 필자의 견해로는 그것을 문자적으로 나타내면 영어의미처럼 하나님께 크고 깊은 존경과 경외심을 갖고 드려야 한다는 점에서 예배음악과 가장 의미가 가까운 용어라고 사료된다. 그렇지만 모차르트나 베르디, 베를리오즈, 케루비니, 포레가 작곡한 레퀴엠(Requiem)이란 작품이 성 음악의 성격과 내용을 다분히 담고 있다는 점에서 성 음악 또한 순수 예배음악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예배음악이란 무엇인가? 예배음악이란 하나님만을 대상으로 하여 하나님께만 드려야한다는 마음과 자세로 연주되어지는 음악으로 예배적, 치유적, 선교적 기능이 있다.
그것은 오르간을 중심으로 기타 다른 악기들과 드리는 기악음악과 교인들과 함께 부르며드리는 회중 찬송과 성가대나 개인이나 여럿이 불러서 드리는 찬양이 예배음악의 범주에 속한다.
여기서 기악음악은 오르간이 중심이 되어 피아노, 관악기, 현악기, 타악기 등과 같은 악기들과의 연주로 전체 예배 분위기를 이끄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에 회중찬송이란 것은 예배하는 사람들 모두가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적 표현이므로 가장 아름답고 귀중한 예배음악이라 할 수 있다. 신명기 3장 19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서 그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을 보아도 그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회중찬송의 선곡은 대단히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찬양(Praise)이라는 용어의 정의는 히브리원어로 ‘야다(Yadah)'인데 ‘손을 내 민다‘는 뜻이다. 좁게는 ‘하나님께 올리는 노래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말하며, 넓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피조물이 은총과 복을 주심에 대해 감사와 영광을 돌림으로써 경의를 표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찬양이란 가사와 곡조와 악보를 보고 연주되는 악기와 노래가 함께 어우러지는 행위로서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도록 드려지는 입술의 기도이다. 성경에는 ‘찬양하라‘는 명령이 399회 소개되고 있을 정도로 그 비중이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개역 성경에서 찬양으로 기록된 단어를 N. I. V 영어성경으로 보면 모두 찬미와 찬송이란 말과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찬미도 찬양과 찬송으로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를 하신 후 하나님께 찬미하셨는데 이 때 부르신 찬미는 유월절 식사의 마지막 부분에서 노래하는 ‘할렐(Hallel)'으로 시편의 후반부인 시편113-118편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할렐 찬송은 보통 交頌(Antiphonal Singing)으로 불리어지는데 식사를 인도하신 예수님이 선창하면 제자들이 할렐루야로 화답하는 형식으로 찬미가 이뤄졌을 것이다.
이사야 6장 2-4절을 보면 이사야가 하나님 앞에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을 때 그 영안을 열어 하늘 보좌를 보게 하셨는데 그 때 찬양 담당인 스랍(Seraphs) 천사들이 각각 여섯 날개로 화답하며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며 노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예배음악 즉, 기악음악, 회중 찬송, 찬양 모두가 그 대상이 존귀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그 하나님을 공경하며, 두려워하는 마음과 더불어 최고로 아름답고, 올바르게 불러져야 한다는 사실을 늘 상기해야 한다.
2. 기원
가. 성경에 나타난 기원
성경에 나타난 예배음악의 기원을 살펴보면 창세기 4장 21절을 꼽을 수 있다.
기악이 성악보다 음악의 기원이 앞선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그런데 유발이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기록은 성경 어디를 찾아봐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면 인류 최초의 음악이 성악이 아니고 기악이었을까? 이 물음에 대해서는 심정적으로는 긍정적이나 성경기록 면에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 성대(Vocal Chord)를 만드셨음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성경기록은 빠져있지만 창세기 3장 21절의 제사(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주신 건강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찬양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은 충분히 현실성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성경 기록상으로 볼 때 성악의 기원이 아쉽게도 예배음악이 아닌 세속음악이라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창세기 4장 23-24절의 말씀은 최초의 일부다처주의자 라멕이 한 노래이다. ‘자기 자신을 상하게 하는 자는 소년이라도 죽였다‘는 끔찍한 내용을 담은 노래이다. 아내들에게 군림하는 듯한 오만한 자세를 가지고 있는 것과 사람을 죽였음에도 그 잔인성과 포악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살기등등한 라멕의 모습을 섬뜩하게 그리고 있다. 하나님을 떠난 가인의 후예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며 노래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요즈음 헤비메탈(Heavy Metal)들이 부르고 있는 끔찍한 가사들과 흡사하다.
그러면 구약성경에 가장 먼저 예배음악(찬양)을 한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멜기세덱이다. 아브람이 붙잡혀 간 조카 롯과 소유물을 엘람 왕 그돌라오멜 등 네 왕의 손에서 구하고 돌아왔을 때 살렘 왕 멜기세덱이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이름을 찬송할지로다“며 노래하였다. 여기서의 ‘찬송‘은 찬양과 같은 개념이 아니고 복을 비는 행위이다.
그래서 본래적 의미라는 측면에서 찬양의 기원을 알 수 있는 찬송의 단어가 처음 사용된 곳은 창세기 29장 35절이라 할 수 있다.
야곱의 두 아내인 레아와 라헬 사이에는 심각한 갈등이 있었다. 아버지 라반이 야곱을 속여서 레아가 먼저 결혼은 하였으나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자 29장 31절에 여호와께서 레아의 태를 여시고 르우벤, 시므온, 레위를 낳게 하셨다. 레아가 정말로 야곱과 법적, 육체적, 영혼의 결합이 이뤄졌다고 생각한 것은 셋째 아들을 낳은 뒤였다. 그래서 그 이름을 ‘연합함‘이라는 뜻의 ‘레위‘라고 이름 지었던 것이다. 그 후에 남편 야곱과의 진실한 영혼의 관계가 이뤄진 상태에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며 그 이름을 ‘찬송함(praise)이란 뜻으로 ‘유다‘라 지어 불렀다.
그러므로 ‘찬양‘이라는 것은 그것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육체와 영혼 모두를 통한 영적인 연합임을 알 수 있다.
민수기 2장 2-3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회막을 사면으로 대하여 진을 칠 때 동방 해 돋는 편에 진칠 자로 유다 자손을 지명함으로써 항상 찬양하는 사람들인 유다 지파가 수평선 너머로 떠오르는 의로운 태양과 회막을 맨 먼저 보게 하였다.
마침내 이런 유다에게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다윗 왕이 나왔고 그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존귀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던 것이다.
나. 한국교회의 기원
우리나라에서는 한국교회 음악의 개척자이며 합창음악의 선구자였던 작곡가 고 박태준 박사가 연세대학교에 처음으로 ‘종교음악과‘라는 명칭의 기독교음악과를 창설하여 교회에서 음악을 담당하는 사람들을 많이 배출해 내었다. 그리고 교회에서 음악을 담당한 사람들을 ‘성가대원‘이라고 명명하였고 그 책임을 맡은 자를 ‘성가대 지휘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박태준 박사의 뒤를 이은 곽상수 교수는 연세대학교 종교음악과를 이끌면서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우선 ‘종교음악과‘를 ‘교회음악과‘로 고치고 ‘지휘자‘라는 말 대신에 ‘교회음악 지도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처럼 교회음악이라는 용어는 곽상수 교수가 처음으로 사용하여 한국교회에 도입하였는데 선배인 박태준 박사도 용어만 종교음악이라는 것을 사용하였지 두 사람 다 평생을 자신을 음악목회자로 생각하며 실제로 사역을 해 왔던 것으로 보아 종교음악이나 교회음악 등 용어만 달랐지 근본취지는 예배음악을 한국교회입하고 발전시킨 인물들이므로 우리나라 예배음악의 기원이 이 두 사람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 방법
가. 손을 들고 찬양한다.(시편 63:4, 119:48, 134:2, 141:2)
나. 손뼉을 치며 찬양한다.(시편 47:1, 98:8, 이사야 55:12)
다. 무릎을 꿇고 찬양한다.(역대하 6:13, 시편 95:6, 다니엘 6:10)
라. 시를 지어 찬양한다.(시편 95:2, 에베소서 5:19, 골로새서 3:16)
마. 멜로디(Melody)를 만들어 찬양한다.(이사야 23:16, 51:3, 에베소서 5:19)
바. 찬양대를 조직하여 찬양한다.(역대상 25:1-3, 6-7, 역대하 8:14)
사. 즐거움으로 찬양한다.(시편 66:1, 95:1, 100:1)
아. 큰 소리로 찬양한다.(역대하 20:19, 누가복음 19:37-38, 요한계시록 19:1)
자. 전심으로 찬양한다.(시편 86:12-13)
차. 새 노래로 찬양한다.(시편 33:3, 96:1, 98:1, 요한계시록 5:9-10)
4. 이유
가. 성경에서 밝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편 63편 전체가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해야 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나. 인간 창조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43장 21절의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는 말씀과 에베소서 1장 12절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이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며 찬양 중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욥기 36장 24절을 보면 “너는 하나님의 하신 일 찬송하기를 잊지 말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스랍(Seraphim)들의 찬양 중에 거하시고, 천군 천사의 찬양 중에 거하시며(이사야 6:1-4), 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신다.(시편 22:3)
라.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기 위함이다.
시편 69편 30-31절의 “내가 노래로 하나님 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는 말씀과 히브리서 13장 15절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찬양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드려져야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최근에 등장한 빈야드 운동(Vineyard Movement)에 나타난 경배와 찬양은 예배의 중심인 말씀이 선포되는 메시지 시간은 지나치게 짧아지고, 노래와 악기연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이런 태도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될 수 없고, 극대화 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여 결국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는 행위로 볼 수밖에 없음으로 찬양의 목적을 크게 일탈(逸脫)한 것으로 이런 목적의 찬양이 우후죽순처럼 많이 모방하여 생겨나고 있는데, 철저히 금지 시켜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마.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기 때문이다.
1) 출애굽기 19장 16-1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시기 위해 시내산 에 천사들의 나팔소리와 함께 임재하신 사건이 소개되어 있다.
2) 역대하 5장 12-14절에서는 솔로몬 성전 봉헌식에 노래하는 레위인들과 제금과 비파와 수금과 나팔 부는 제사장 120명이 여호와를 찬송할 때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하였다.
3) 누가복음 2장 10-14절에는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탄생하실 때 허다한 천군 천사들이 하늘로부터 다윗 성까지 도열하여 찬양하였다.
바.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나타내 보이기 위함이다.
1) 여호수아 6장 4-5, 9-10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고 승리를 거둔 것은 민수기 10장 9절의 “전쟁에 임할 때 나팔을 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리라”는 말씀에 따라 백성들의 함성과 함께 제사장들이 나팔소리에 성이 무너졌다. 이것을 미뤄볼 때 찬양 중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남을 알 수 있다.
2) 사사기 7장 16-23절을 보면 기드온이 미디안 군사 135,000명과 대항하여 싸워 완전한 승리를 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기드온 300명의 군사들이 나팔을 불고 빈 항아리를 깨뜨렸기 때문이다.
3) 사무엘상 16장 14-23절을 보면 다윗이 수금을 타서 사울의 악신을 몰아내고 그 병을 고친 것처럼 찬양은 상한 감정과 육신의 병마까지도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
4) 역대하 20장 1-23절을 보면 유다 왕 여호사밧이 모압과 암몬과 마온 사람의 동맹군이 유다를 포위함으로써 위기에 처했을 때 ‘야하시엘’이란 레위 사람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찬양대를 동원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성 밖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함으로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5) 사도행전 16장 19-35절을 보면 바울과 실라의 발이 착고에 채워진 채로 빌립보의 깊은 감옥에 갇혀 있는데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했을 때 큰 지진이 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모든 사람들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지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사. 찬송을 받으실 뿐만 아니라 인간을 후대하시기 때문이다.
시편 13편 6절을 보면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라고 밝히셨으며 18장 3절 상반절에서는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라고 밝히고 있다.
5. 기능
가. 예배음악 외 음악
1) 균형(Balance)유지의 역할이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심리와 생리에 적당한 진동과 진폭을 갖게 함으로써 몸과 마음의 균형을 유지토록 하는 작용을 한다.
2) 발산과 정화(Letting and Catharsis)의 역할을 한다. 즉, 음악은 말보다 훨씬 더 표현을 풍부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 음악은 박자(Beating), 속도(Tempo), 리듬(Rhythm), 선율(Melody), 음조(Tone), 음량(Volume), 화음(Harmony) 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감정을 강렬하게 발산케 함으로써 건강에 유해한 것을 심리적, 물리적으로 배출하여 정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3) 동질의 원리(Homogeneity)가 작용한다. 즉, 인간이 정신적으로 불안한 감정에 치우쳐 있을 때 감정이 반전되도록 한다.
4) 질서와 안정(Orderliness and Calming)의 역할을 한다. 음악은 그 자체로서 아름다운 면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감정을 충동적이지 않게 이끌어 주면서 기분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5) 조직화(Self-Organization)와 사회화(Socialization)에 작용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사고를 적극적으로 하게 하여 긍정적 자아를 만들어 주고,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원활하도록 작용한다.
6) 음악의 요소는 인간의 정서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강약(Dynamic)은 긴장을 강하게 하거나 이완시키고, 속도(Tempo)는 생체리듬에 영향을 주며, 조성(Key)은 밝고 어두운 마음을 갖게 하는 작용을 한다.
7) 인간의 건강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음악이 인간의 생리적 표출이나 생체반응에 대하여 미치는 효과에 현재까지 여러 종류의 실험적 관찰과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관찰의 대상인 표출이나 반응에는 호흡, 맥박, 혈압, 대사량 등외에 전기성, 피부반사, 근전도, 심전도, 뇌파 등과 같은 생체전기 현상도 포함되고 있다. 이런 연구들 중 음악에 대한 생리적 표출을 현저하게 나타냄으로써 유력한 연구라고 평가된 것은 처음 시도된 '전기성 피부반사에 의한 연구'가 있다. 그는 전기성 피부반사가 음악에 의한 감정의 흥분 상태를 나타낼 것이라 판단하고 연구한 결과 전기저항 값으로 표시되는 감정수준 을 지배하는 것은 바로 ‘선율’과 ‘리듬’이라는 것을 밝혔다. 이처럼 음악은 생체리듬에도 관계가 있다. 우리 인간의 건강은 신체를 통해서 일어나는 리듬패턴에 의해 유지된다. 우리는 몸에 가장 기본적인 리듬인 호흡과 심장박동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관련된 규칙적이거나 불규칙한 맥박률이 있다. 건강은 신체를 통해 일어나는 기본리듬 패턴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인간은 그의 몸에서 가장 기본적인 리듬인 호흡과 심장박동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연관된 규칙적이거나 혹은 불규칙한 맥박률이 있다.
이런 측면에서 텔레만(Teleman), 비발디(Vivaldi), 바흐(Bach), 헨델(Handel) 등과 같은 작곡한 바로크 음악에 굉장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이 음악은 1분 동안 144회 정도 리듬이 반복된다. 이 144란 숫자는 인체 생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태아의 심장 박동수이며, 성인의 혈압상한수치이다. 그 半인 72는 인간이 가지고 태어나는 기본리듬인 1분간의 맥박 수이고, 그 半인 36은 성인의 기본체온이며, 그 半인 18은 1분간의 호흡수이다. 따라서 스트레스로 인한 고혈압과 맥박이 빨라지는 증상에 이런 음악을 들으면 회복에 큰 도움이 된다.
반면에 아무리 찬양을 한다고 하더라도 락(Rock)음악과 다름없는 강한 비트(beat)와 템포와 소리가 수반된 굉음악은 에베소서 4장 24절의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형상이 깨져 버리는 위험이 있으므로 권면하여 못하도록 제지해야 한다.
나. 예배음악
사사기 1장 1-2절을 보면 가나안 사람과 싸울 때 선봉은 항상 유다 지파였다.
역대상 12장 23-40절에는 사울 왕의 군대와 싸우는 다윗을 돕기 위하여 창과 방패를 들고 나온 사람들 중에 유다 자손들이 첫 번째 그룹이었다.
역대하 20장 21절에 보면 노래하는 자들을 거룩한 예복을 입혀 군대 앞에 보내어 주님을 찬양하게 하였다.
신명기 33장은 모세가 죽기 전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하는 장인데 7절에서처럼 모세가 하나님께 무엇보다 먼저 유다의 음성 즉 찬양을 들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1) 하나님께서 듣고 응답하게 하신다. 7절에서 “여호와여 유다의 음성을 들으시고...“ 라는 말씀처럼 찬양하는 자의 음성을 반드시 들으신다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 지체인 성도들을 하나 되게 하신다. 7절을 보면 “. 그 백성에게로 인도하시오며....“라는 말씀처럼 성장 배경이나 생각이 다른 성도들이 함께 예배하고, 친교하며, 한 가족이 되게 끌어 모으는 자석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3) 성도들이 세상과 싸워 이기도록 큰 사명을 갖게 한다. 계속되는 7절에서 “...그 손으로 자기를 위하여 싸우게 하시고....“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위해 싸우게 하시니 이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4)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게 한다. 7절 하반절에 “주께서 도우사 그로 그 대적을 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대적을 칠 때 주께서 친히 도우신다는 것이다.
5) 성도의 영육의 병을 치료한다.
사무엘상 16:23절을 보면 기원전 1000년경에 다윗이 사울 왕에게 들린 악신을 떠나게 함으로써 그의 우울증을 수금연주로 치료한 기록이 나와 있으므로 예배음악으로 병을 치료하는 것은 성경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교회에서 가장 은혜와 영적 성장에 도움을 많이 주는 순서로는 예배음악이 1위이고, 설교가 2위, 성령운동이 3위로 나타난 것으로 보아 예배음악의 비중이 어느 때보다 매우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배음악이 영적 치유에 반응하는 정도를 알아보는 설문조사 결과에 의하면 예배 시 사용되는 음악에 크게 은혜 받은 사람은 85%, 예배 시 성가대의 찬양에 크게 은혜 받은 사람은 81%, 오르간 주악이나 찬송에 크게 은혜 받은 사람은 72%, 교회음악을 통해 영적 치유의 경험이 있는 사람은 70%, 교회음악을 통해 감정이 순화되는 경험이 있는 사람은 78%이다.
6. 호칭의 문제
예배음악 가운데 노래부분을 찬양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성가라고 칭하는 것이 맞는가? 그리고 노래부분을 섬기기 위해 선발된 사람을 찬양대원이라 불러야 하는가? 아니면 성가대원이라고 불러도 무리는 없는가? 하는 호칭문제로 상당한 논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혹자는 “성가대란 단어가 군대용어이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성가라는 용어를 타종교에서도 사용하고 있으므로 찬양이라고 불러야 옳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의외로 목회자들이 많은 까닭에 이러한 주장의 편협성과 강력성이 뒷받침되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어져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라고 주장하고 싶다. 왜냐하면 성가대원뿐만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들이 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디모데후서 2:3)이기에 군대용어라는 말은 설득력이 약하고, 그리고 오래 전부터 ‘성가대’라는 용어와 더불어 ‘찬양대’라는 용어도 같이 사용해 왔던 현실을 감안할 때, 성가대보다 찬양대라는 용어를 사용하자는 주장이 논리가 매우 약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굳이 대체해서 사용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보다 더 설득력 있는 이유는 ‘성가‘라는 영어식 번역이 ‘Divine Song‘이나 단순한 개념의 ’Holy Song‘이 아니고, ‘Sacred Song‘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성가‘를 ‘Divine Song,‘이나 ‘Holy Song‘이라고 한다면 타종교에도 붙여도 상관이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Sacred Song‘은 하나님이 아닌 이방 신을 숭상하는 타종교에서는 감히 사용할 수 없는 용어이다.
또 한 가지는 우리나라의 교회음악의 역사의 흐름에 따라 지금까지 자연스럽게 ‘성가대‘라는 용어를 사용해 왔었다. 그러므로 전례에 따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옳다는 사실을 굳이 강조할 필요성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이유나 성경적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굳이 ‘찬양대‘라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도 약하고 조금의 명분조차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지금까지 관습적으로 내려오며 불리어졌던 대로 ‘성가대의 찬양이 있겠다 ‘라는 말로 계속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7. 자격
예배음악을 담당하는 성가대가 처음으로 편성된 것은 다윗 왕 때로 볼 수 있다. 다윗은 당대 제일가는 시인이자 음악가였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 규모 있는 성가대와 관현악 파트를 편성하여 섬기도록 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에 관현악부를 두는 것은 매우 성경적이므로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의 관현악부에 상업성이 게재되어 본질이 왜곡되어 있는 현실이 다소 안타까움을 준다. 그러면 예배음악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어떤 자격이 있어야 하는가? 살펴보려 한다.
가. 신분적 측면에서 레위인(Levites)이어야 한다.
레위인의 좁은 개념은 아론과 그의 자손으로 구성된 제사장 계급을 제외한 레위 후손들만을 지칭(민수기 8장 6-26절)하였다. 그리고 넓은 개념의 레위인은 제사장과 제사장을 도와 성막(성전)에서 봉사의 일을 하는 모든 레위 후손들(민수기 8장 19절, 22절, 역대상 25장)을 가리켰는데 오늘날은 성가대원 뿐만 아니라 모든 회중이 모두 레위인 중의 레위인이라 할 수 있는 제사장이나, 구별하여 선발되었다는 그 정신은 늘 기억해야 한다.
나. 연령적 측면에서는 25-50세까지 봉사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민수기 8장 24-25절은 25-50세인데, 민수기 4장 3-49절에서는 30-50세까지로 되어 있다. 이것은 아마도 25-30세까지는 견습생으로 일하게 했던 것으로 추측이 된다.
역대상 23장 3절에도 다윗과 솔로몬이 편성한 성전 찬양대의 연령을 30세 이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다윗 시대(역대상 23장 24절)와 히스기야 시대(역대상 31장 17절)와 포로귀환 시대(에스라 3장 8절)에는 20세 이상부터 봉사의 일을 시작하게 하였다. 따라서 오늘날의 교회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20세이면 성가대원으로 임명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레위인에 관한 구약시대의 이런 기준이 성가대원의 연령에 관한 성경적 자격을 제시해 주는 잣대로 생각할 수 있으나, 구약적 성전 개념이 바뀐 오늘날의 교회에서 굳이 이 기준에 따른 연령에 관한 규정으로는 적용할 필요는 없다.
다. 봉사적 측면에서의 자격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고, 봉사하기 위한 헌신자여야 한다.
2)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3) 실력과 책임감이 있고, 잘 가르치는 자여야 한다.
4) 구별하여 섬기는 자여야 한다.
5) 전념하는 자이어야 한다.
6) 찬송하기를 배워 익숙한 자여야 한다.
따라서 반드시 성가대 연습에 참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연습하지 않고 버젓이 앉는 관행은 어서 고쳐야 한다. 또한 성가대 세미나 등과 같은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석해야 한다.
라. 기술적 측면에서의 자격도 중요하다.
1) 기본적으로 박자(Beating)와 속도(Tempo) 조절이 가능해야 한다.
2) 올바른 피치(Pitch)로 노래 부를 수 있어야 한다.
3) 다른 사람이 부르는 노래나 연주하는 악기에 자신의 목소리를 맞출 수 있어야 한다.
4) 기본적인 음악 상식과 독보력이 있어야 한다.
8. 역할과 자세
성가대의 기원은 역대상 9장 33절이다. “또 찬송하는 자가 있으니 곧 레위 족장이라 저희가 골방에 거하여 주야로 자기 직분에 골몰하므로 다른 일은 하지 아니하였더라”는 말씀이다. 이와 같이 그것은 구약시대의 성전 제사에서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로 찬양케 한 데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 최초로 성가대를 구성한 것은 다윗 왕 때이다. 다윗은 당대 제일가는, 노래와 악기를 잘 다루는 음악가이며, 시인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 성가대를 편성하도록 하셨다. 역대상 25장 1-7절을 보면 다윗 왕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성전 찬양대를 규모 있게 편성하였다. 30세 이상으로 익숙하게 훈련된 레위 사람 288명을 선발하여 노래파트와 관악파트와 현악파트 등 세 그룹으로 나누어 아삽은 찬양대장으로, 헤만은 관악대장으로, 여두둔은 현악대장으로 삼아 관현악반주로 하나님을 찬양토록 하였다.
역대상 23장 1-5절을 보면 솔로몬 왕 때는 찬양대가 무려 4000명이었고, 관현악단이 제사장 신분을 가진 120명(역대하 5:12)을 편성하여 하나님을 찬양했다. 규모가 엄청나게 컸기 때문에 솔로몬 성전 안에서는 불가능하여 성전의 제사장 뜰에서 찬양을 드려야 했다.
이처럼 예배 때의 성가대 편성이 얼마나 성경적인지 알 수 있다.
에스라 2장 41절을 보면 스룹바벨 찬양대 역시 128명으로 편성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느헤미야 7장 44절을 보면 느헤미야 성전 찬양대는 148명으로 편성하여 찬양하였다.
역대하 19장 21절을 보면 유다 왕 여호사밧 때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성가대원을 임명하여 성가대를 구성하고 거룩한 예복을 입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성가대 편성이 낮 예배에만 국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는 현실은 한번 재고해 봐야 할 일이다. 예배는 낮이든 밤이든 수요예배든 그 비중이 똑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요예배 때에도 성가대를 편성하여 예배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만약에 지원자가 없으면 안수집사 이상의 중직자가 섬기면 해결되는 문제이다. 아울러 유. 초등부와 중. 고등부 성가대를 편성하여 훈련시켜서 장기적으로 육성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가대의 역할과 자세의 중요성은 모든 지휘자와 반주자와 전 대원이 고린도전서 14장 15절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마음으로 찬미하리라“는 말씀처럼 전 교인들로 하여금 성령의 역사하심을 느끼며, 찬양을 부르게 함으로써 전 회중이 성령 안에서 연합 되도록 이끌어야 한다.
가. 지휘자
1) 사역자(Ministry)임을 명심해야 한다.
지휘자가 교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예배를 말씀과 찬양이라는 두 축으로 드려지는 것으로 해석할 때 찬양의 책임을 맡고 있는 지휘자의 책임은 가히 막중하다. 그 이유는 구약시대에 제사를 드릴 때 대제사장들이 집례를 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오늘날 예배에서 사회자의 위치는 아주 중요하다. 왜냐면 사회자는 예배를 집례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지휘자는 집례의 한 축인 찬양을 이끌어 가는 사역자이므로 찬양을 위해서 먼저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다른 사람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예배와 성결한 삶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고, 연구하고, 미리 준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반주자와 전 대원들의 예배모범이 되어야 하고, 그들의 신앙상태까지도 파악해서 중보적 기도를 해야 한다. 오늘날 낮 예배만 드리고 귀가하는 지휘자를 방관하는 교회의 모습은 시정되어야 한다.
2) 겸손해야 한다.
책임이 막중하고 온 시선이 집중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겸손하지 않으면 예배를 그르치게 된다. 역대상 6장 31-46절에는 레위인 음악가들이 망라되어 있는데 다윗이 거느린 세 악장인 헤만, 아삽, 에단은 각각 다양한 계보를 통해 조상 레위에게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긴 명문가의 혈통을 가지고 있다. 6장 33절을 보면 세 악장 중에 헤만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는 찬송하는 자로서 사무엘의 손자이다. 여기서 이스라엘 초기 왕조시대에 활동한 당시 사무엘의 위치는 절대적이었다. 이스라엘 마지막 사사이자 선지자로 첫째 왕인 사울과 둘째 왕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이렇게 막강한 집안의 출신인 헤만이 다윗 왕의 임명을 겸허히 받아들였다는 것은 주목받을만한 일이다. 더군다나 역대상 15장 19절에서 헤만, 아삽, 에단 순서로 소개되던 것이 16장 5절을 보면 아삽을 성가대의 지도자로 지목하고, 이후 7절, 37절을 보면 다윗의 관심은 아삽에게 기울어지게 된다. 반면 헤만은 역대상 16장 42절에 잠깐 언급되는 인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이후 세 음악가 중에 아삽이 가장 먼저 등장하고 헤만의 위치는 선두에서 멀어지게 된다.
역대상 25장 1절에는 아삽, 헤만, 여두둔 순이고, 역대상 6절에는 아삽, 여두둔, 헤만 순이며, 역대하 35장 15절에는 아삽, 헤만, 여두둔 순으로 소개되고 있다.
더군다나 역대상 6장 39절을 보면 지도자로 임명받아 선두에 나오는 아삽은 헤만의 우편에서, 6장 44절을 보면 에단은 헤만의 좌편에서 찬양하던 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평 없이 끝까지 위치를 지키며, 그들과 함께 찬양한 겸손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오르간이나 피아노 반주자와의 관계에서도 겸손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반주자를 독립적인 연주자로 보지 않고 지휘자를 보조하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교만 때문에 지나친 음악적 요구와 반주 방법에 대한 무리한 요구를 해서는 안 되고 진실한 마음으로 존중하는 태도와 감사하는 마음과 그들의 수고를 격려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3) 공부하고 가르쳐야 한다.
찬양에 대한 곡 준비와 그 곡에 대한 분석과 해석, 또한 음악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 등을 미리 연구해야 한다. 그리고 회중찬송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필요하다.. 템포는 어떻게 하며, 어떤 방법으로 인도하는 것이 더 은혜로운 것인지를 연구해야 한다. 또한 찬송가 중에 잘 안 불리어지는 곡을 공부하여 가르쳐야 한다. 아울러 지금까지 잘 불러오던 곡들 중에 틀리게 부르는 곡은 시간을 할애하여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음악 전문가로서 음악적 전문지식과 신학적 측면으로 예배학, 찬송가학, 음악목회, 교회음악 행정 지휘법 등을 읽으며 읽혀야 한다.
4) 통솔력과 원만한 대인 관계가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례교인 이상이어야 하고, 모든 공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석해야 하며, 모든 언행(거친 말이나 음담패설, 욕설, 술, 담배, 도박, 잡기 등)을 삼갈 것이며, 평소에 건덕(健德)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지휘자를 초빙할 때 그 선정되는 과정을 재고할 필요성이 있다. 지휘자를 초빙하면서 신앙을 검증할 수 있는 여과과정이 없는 상태에서 학력이나 경력만으로 임용되는 것이 다반사이다. 음악대학의 교수라는 이유로, 또는 유수 합창단의 지휘자나 시립교향악단의 악장 출신이라는 이유로 하나님께 드려진 성도들의 땀과 피와 같이 소중한 헌금을 사례라는 이름으로 힘에 넘치도록 부담하면서까지 영입에 열을 올리는 것은 본질이 크게 왜곡되어 있는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교회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대외 홍보적 목적 때문에 존속해 있는 실정인 것이다.
이런 현상을 두고 한국교회는 뼈를 깎는 아픔과 회개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그렇지 않으면 진리의 영, 성령께서 어떻게 역사(役事)할 수 있겠는가?
나. 오르간 반주자
흔히 오르간을 예배에 가장 중심이 되는 악기로 예배를 이끄는 악기라고 한다. 그 이유는 오르간은 피아노나 기타 다른 악기와는 달리 현악기, 목관악기, 금관악기, 타악기 등 다양한 악기 소리를 낼만큼 소리가 다양하고, 경건하며, 음폭이(pp-ff)넓고, 여러 단의 건반이 있어 각기 다른 음색을 낼 수 있기 때문에 독주 악기와 합주를 동시에 즉, 협주곡 연주를 혼자서 할 수 있다. 따라서 관현악을 편성할 때처럼 넓은 공간과 훈련된 많은 연주자가 필요 없고, 좁은 공간에서 혼자서 관현악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아주 소중한 악기이다.
이런 점에서 오르간 반주자의 중요성은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오르간 반주자의 역할이 중요한데, 주악(prelude)과 간주(interlude)와 후주(postlude)를 완벽하게 소화해야 하는 독주와 회중 찬송을 인도해야 하는 역할이 주어져 있다.
예배 시작 15분-20분 전부터 예배 시작 때까지 주악(Prelude)을 연주함으로써 예배자들의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고, 그들의 감정을 치유하여 경건하고 숭고한 예배를 드리도록 해야 한다. 예배의 순서가 바뀔 때는 간주(Interlude)를 함으로써 그 짧은 시간을 매워 경건하고 숭고한 마음을 지속시켜야 한다. 예배 후 성도들이 퇴장 할 때에는 후주(Postlude)를 장엄하고 기쁨이 넘치는 곡을 연주함으로써 예배의 효과를 더 높여줘야 한다.
그리고, 회중 찬송을 인도하는 것도 독주만큼 매우 중요하다. 전체적으로 소리가 끊어지지 않도록 레가토(legato) 연주기술을 익혀야 한다. 속도(tempo)와 음량(volume)과 음색(tone color)과 구절법(phrasing)을 유의하며 연주해야 한다.
속도는 적당한 빠르기로 기쁨을 느끼게 해야 한다. 너무 느리면 슬퍼지고, 너무 빠르면 경건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음량은 옆 사람의 찬송 소리와 다른 악기의 반주 소리가 들리도록 적당한 크기로 해야 한다. 너무 크면 성도들의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너무 작으면 예배에의 감격이 없게 된다.
음색은 두 대조되는 음색장치를 이용하여 가사에 따라 각 절이 바뀔 때마다 변화 있게 연주해야 하며, 전주와 가사 1-2절, 간주 후, 가사 3-4절을 부를 때 점점 웅장한 음색으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 성도들이 전주와 간주를 듣는 동안 가사를 음미함으로써 예배의 감격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사와 곡조의 음절을 잘 살펴서 연주해야 한다. 찬송가는 음절 표시가 우측 상단에 잘 표시되어 있으므로 그대로 하면 되고, 다른 곡들은 미리 잘 읽어서 회중들이 호흡해야 할 곳을 미리 정해 두어 여유 있게 이끌어 가야 한다.
또한 피아노 반주자와 마찬가지로 성가대 찬양을 할 때나 독창 반주를 잘 반주해야 하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상기와 같은 역할의 중요성 때문에 전문적 지식과 잘 훈련된 전문가가 오르간 연주를 담당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앙하는 간절함과 삶 가운데 향기와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모든 음악 사역자가 동일하다.
다. 피아노 반주자
전문적 지식과 훈련된 전문가가 봉사하도록 해야 하며, 무엇보다 신력을 고려하는 것은 지휘자의 선정기준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피아노 반주자는 항상 예배 시작 전에 착석하여 오르간이 없는 경우 피아노 반주자가 찬송 반주로 예배의 분위기를 경건하게 이끌어가야 한다. 혹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르페지오를 쓰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회중 찬송을 하는 중에 사용하는 아르페지오는 음정이 분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칫하면 곡과의 화성 효과를 떨어뜨리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향하고 있는 예배 분위기를 개인의 감정에 호소하는 감상적인 것으로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세속적 연주법을 예배음악에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여 연주하는 경우가 생기면 교회는 그것을 잘 타일러서 이후부터는 못하도록 제지해야 한다. 특히 ‘초신자나 청소년들의 취향에 맞춰야 한다’는 명분 하에 세속적 연주형태를 취하는 것도 결코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바탕 위에 하나님을 신앙하는 간절함과 삶 가운데 향기와 열매가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라. 관 ․ 현악 반주자
피아노와 오르간 반주자의 갖추어야 할 조건과 신앙적 자세는 동일하다.
관악기는 금관악기의 장엄함과 목관악기의 독특한 음색과 현악기의 섬세함과 아름다운 음색이 예배음악의 엄숙함과 경건함을 고취시킨다. 특별히 성가대의 찬송보다는 회중 찬송에 더 효과가 있다. 교회마다 관, 현악 반주자만큼 선정 기준이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은 경우도 없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음악에 대한 인식과 자세는 차치하고, 아르바이트 성격의 반주자가 더 많은 것이 현재의 실정이다. 제대로 연습도 하지 않고 시간의 격차를 이용하여 이 교회 저 교회로 쫓아다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교회가 임명하고 모른 채하며 묵인하고 있는 현실은 한번 되짚어 보고 시정할 필요가 있다. 이런 유(類)의 사람들은 관현악 반주자로 부적합하므로 교회가 임명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마. 독창자
파트(Part)별 독창자는 필요하다. 그 이유는 음악은 모방예술이므로 비전공 단원들의 발성지도를 하기 위함이다. 또 변화 많고, 수준 높은 곡을 연주할 때 독창을 맡을 수 있다. 또한 독보능력이 있고, 발성이 되어 있기에 파트의 리더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흠이 없어야 했듯이 최상품의 찬양을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형편과 여건에 맞춰야 하고, 나아가 교회는 이런 인재들을 지속적으로 양육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독창자는 자칫하면 자신의 소리나 음악적 기교를 나타내려는 마음을 갖기 쉬운 함정이 있다. 따라서 필요 이상으로 옥타브를 올려서 부른다든지 하는 심리를 자제하고, 최대한 자신을 낮추어 작곡한 그대로 부르는 예의와 겸손함이 필요하다.
다른 반주자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독창자는 교회 내에서 길러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많은 예산이 들어가지 않아도 양육할 수 있는 파트가 성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찬양의 본질은 망각한 채 단순히 찬양을 잘 하기 위함과 곡을 소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외부에서 영입하는 형태는 찬양의 본래 의미를 크게 훼손시키는 일이므로 지양하는 것이 마땅하다. 만약에 이미 독창자를 영입하기로 사전 약조가 되어 있다면 교회는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 우선하므로 더 중요하다. 찬양의 의미만을 고집한 나머지 찬양대 내에서 이견이 발생한다면 이는 하나님께 더 큰 죄를 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독창자로 하여금 등록을 하게하고, 예배참석의 의무를 다하도록 권면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앞서 언급한 ‘가-마‘까지의 직분자는 교회에서 관심을 갖고 재능 있는 자들을 발굴하여 장학금을 주어 양육하여 감사함으로 봉사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바. 성가대원
앞서 III. 7. ‘역할과 자세’에서 언급했듯이 성경 상 성가대의 기원은 다윗 왕 때이었다.
그런데 역대상 15장 17-24절을 보면 헤만, 아삽, 에단 등 세 악장이 등장하고, 이어서 노래를 잘 불러 가르치는 ‘그나냐’를 위시해 비파를 타는 소프라노 8명과 수금을 타는 베이스 6명과 나팔 부는 7명 도합 24명을 선발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가대원으로서의 봉사를 하게 하였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성가대원들도 각자의 은사에 따라 공동체적 교회에서 한 지체로서 봉사해야 하는 직분이다. 그러한 의미 외에 특별한 것은 없다. 다만 대표적으로 드리는 찬양은 말할 것도 없고, 특별히 회중찬송을 이끌어야 나가는 막중한 책임이 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구약시대의 레위 지파들이 가졌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세와 높은 수준의 믿음과 자긍심을 갖는 정신은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에 뽑혔던 성가대원들과 똑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성가대원들의 입술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이지만 야고보서 3장 10절의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말씀처럼 저주의 말도 하게 되는 양면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레위기 11장 44절 상반절 말씀에 나오는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와 같은 삶을 살도록 경건의 연습(디모데전서 4:8)을 부지런히 해야 한다. 즉, 우리 대원들이 찬양을 준비하며 드릴 때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나의 입술과 마음과 육체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정결케 되도록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찬양에 임하는 태도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앞서 언급한 대로 역대상 15장 22절을 보면 ‘그나냐’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그는 당시 성가대원들에게 노래를 잘 가르쳐 부르게 했던 사람이었다. 마찬가지로 성가대의 각 파트에 성악 전공자를 두어서 노래를 늘 가르치게 하는 것도 성경적인 방법이라 고 말할 수 있다.
어떤 교회는 ‘은혜로 드리면 된다’고 하지만 찬양을 바로 그리고 최고의 것으로 드리려면, 마치 신학을 공부한 전도사를 두어 교육이 바르게 되도록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파트별 전공자를 두어서 노래를 제대로 배우도록 가르치는 것이 옳은 것임은 두말 할 필요 없다.
사. 음악목사
‘예배는 말씀과 찬양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드려지는 행위’라는 말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찬양이라는 비중은 교회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민족 복음화 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면서 대형화되고, 나아가 사역의 세분화를 추구하면서 발전해 왔다. 이제는 예배음악을 담당하는 사람이 성가대 지휘를 하는 역할만으로는 부족한 시대이다. 예배음악의 모든 프로그램과 교육과 행정과 선교와 그것을 담당하는 여러 모양의 사람들을 영적 또는 음악적으로 지도해야 하는 시대적 요청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요청을 다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음악목사라 할 수 있다. 외국의 경우는 어느 교파나 음악목사 제도가 있어 담임목사와 함께 교회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교단 본부에 음악부가 있어서 개 교회를 제도적인 면에서 지원할 필요가 있다.
현재 한국교회에 음악목사를 두려면 담임목사의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팀 목회라는 개념을 단지 관념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을 뿐이지 정작 음악목사를 담임목사를 보좌하는 정도로 여기는 이상 음악목사 제도는 뿌리를 내리지 못할 것이다. 현재도 찬양에 관한 곡 선정이나 성가대 발표의 준비와 과정이나 세미나를 독점하려는 담임목사들이 많이 있다. 이런 것을 볼 때 신학교 과정에 교회음악 과목을 개설하여 필수과목으로 반드시 이수하도록 해야 한다.
아. 성가사(찬양사, 음악사)
한국교회 내에 성가사라는 직책이 점점 생겨나고 있는 실정이다.
어떤 교회는 기독교를 표방하는 대학의 교수라는 이유로 그 사람의 신앙의 정도는 무시된 채 성가사를 임명하는 경우가 있다. 성가사는 이름만 다를 뿐이지 사실상 음악목사가 해야 할 일을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성가사라는 직책이 인위적으로 만들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현재 부산에도 몇몇 교회들이 부 목사에 준하는 사례를 지급하면서 성가사를 두고 있는데 약간의 문제가 있다. 굳이 성가사를 두려면 목사 안수여부에 관계없이 신학과 음악을 겸하여 공부한 사람을 두어야 한다. 예배음악인 만큼 그것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예배음악을 지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교회가 성가사를 두되 그로 하여금 신학을 공부하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여 세우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 찬양간사
각종 선교단체에서는 볼 수 있는 간사제도를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남용하는 사례들이 있다. 심지어 전도사를 모집하지 않고 선교단체에서 훈련받은 간사를 교회 교육 파트에 투입하는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아주 슬픈 현실이다. 교육의 신앙적 질적 저하가 눈에 띄게 두드러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설 찬양단 같은 곳에서 훈련받은 사람을 찬양간사로 임명하는 것도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찬양간사 또한 신앙훈련을 받고 음악을 전공한 사람을 임명하여 사역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찬양간사를 두는 것은 옥상옥(屋上屋)으로 굳이 둘 필요성이 없다. 그 이유는 교회 내에 성가대 지휘자나 각종 악기 연주자 등 음악 전공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로 하여금 사역하도록 동기부여를 해 줄 필요성이 더 요청된다.
차. 찬양단(찬양팀)
젊은 세대를 위한 음악형태인 키보드(keyboard), 신디사이즈(synthesizer), 전자기타(electric), 베이스기타(bass guitar), 드럼 셋(drum sets-5 drum or 7 drum, cymbals)과 인도자, 율동 팀, 싱어(singer) 등으로 편성된 찬양 인도 팀을 말한다.
이 찬양단의 활동은 주일 오후(저녁) 찬양집회, 수요 예배, 금요철야 기도회 등과 군 선교, 학원선교, 교도소위문공연 등을 담당한다.
인도자나 연주자들은 너무 큰 소리를 내지 않도록 마이크 볼륨을 잘 조정해야 한다.
곡 선정(repertory)도 음악적(리듬과 선율)으로 매우 단순한 곡으로 하고, 복음 송만 하지 말고, 찬송가와 병행해서 택해야 한다. 또한 자신들의 기호에만 맞추지 말고 회중들 중심으로 선곡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그리고 싱어는 야한 소리가 나는 발성을 해서는 안 되고 경건한 발성으로 해야 하는 것이 덕스럽다. 드럼 주자는 리듬형태를 경 음악적으로 하지 말고 클래식(Classic)한 리듬으로 연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체적으로 창법이 세속적이고, 정서적이기 보다 선동적인 면이 있으나 대중적이고, 선교활동에 적합한 음악이라는 긍정적 측면도 있다.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찬양할 것인가를 정하여 기도하고 연습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찬양리더(Leader)의 욕심이 지나친 나머지 필요이상의 설교조의 긴 말을 삼가야 한다. 멘트(Comment)를 하되 성경적 바탕 위에서 찬양에 걸 맞는 말을 짧게 해야 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영적 지도자를 두어서 모일 때마다 메시지를 듣는 등 경건회를 먼저하고 연습해야 한다.
9. 찬양과 관련된 제반 문제들
가. 율동 여부
찬양과 복음송을 부르면서 율동을 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라는 문제는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임에 틀림없다. 대부분의 경우 율동이 거룩한 예배에 경건성을 훼손하는 것으로 판단하기 쉬우나 감동되어 은혜가 넘칠 때에 율동을 하는 것은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사무엘하 6장 13-15절을 보면 법궤가 오벳에돔의 집에 석 달 동안 머문 후에 다윗 성으로 돌아오는 노중에서 다윗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춤을 추었고, 출애굽기 15장 2-18절의 모세의 노래를 듣고 15장 20-21절에서 미리암이 춤을 추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시편 149편 3절을 보면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또 시편 150편 4절에서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라고 기록되었음을 볼 수 있다. 시편 149편 3절에서는 ‘주님 앞에서 춤추며 뛰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율동을 곁들인다 해서 예배의 경건성을 떨어뜨리는 행위는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할 것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춤을 추었다는 말씀처럼 춤추는 자의 마음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있지 않으면 굳이 춤을 출 필요가 없다.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여 추는 춤과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을 정도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모습의 춤은 그것이 찬양을 위한 가사와 율동이라 하여도 금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그러니까 일단 예배라는 타이틀이 붙게 되면 경건성을 유지하는 것이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예배의 대상이 존귀하신 하나님이므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록 예배를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녁예배는 저녁 찬양집회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경건성을 추구하기보다는 받은 은혜에 대한 기쁨과 즐거움과 복음 전파에 초점을 맞춘 프로그램이 계발되어, 성도들의 다양한 은사에 따라 직접 동참하는 여러 가지 형태의 집회순서를 갖는 것도 연구해 봄직하다.
그리고 축제 분위기의 추수감사절이나 성탄절에 성가발표를 할 때도 다양한 장르의 곡들을 선곡하여 율동을 곁들여서 연주하는 것도 찬양의 기쁨과 풍성함이 배가될 것이다.
요즘은 워십 댄스(Worship dance)라는 있다. 아직까지 검증이 되지 않아 예배음악의 장르에 포함시키기가 곤란하나 머지않아 예배음악의 한 장르로 자리매김하리라 예상이 된다.
예배음악의 진위여부를 떠나 시대의 흐름이 그것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사료된다.
나. 복장에 관한 입장
대원들의 복장은 예배 시든, 집회 시든, 연주회를 할 때든 한결같이 가운(Gown)이나 유니폼(Uniform)을 입어야 하며, 항상 정결해야 한다.
역대하 5장 12-13절을 보면 “노래하는 레위 사람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과 그 아들들과 형제들이 다 세마포를 입고 단 동편에 서서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고 또 나팔 부는 제사장 120명이 함께 서 있다가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가 일제히 소리를 발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구절에서 ‘노래하는 레위 사람‘이란 오늘날 성가대원으로서 세마포를 입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9장 8절에도 성도들이 입는 거룩한 옷을 세마포로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성가대원의 복장은 구별되고, 죄와 허물을 가리고, 또 선택받은 자임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평상복을 가릴 뿐만 아니라 구별하는 의미의 가운(Gown)이나 시선을 끌만큼 두드러지지 않는 단색의 유니폼(Uniform)을 입어야 한다.
특별히 주의할 것은 지휘자의 반지와 손목시계 등이나 대원들의 귀걸이를 비롯한 장신구(Accessary)의 패용을 삼가해야 한다. 찬양대가 대표로 하나님께 드리지만 실상은 모든 성도가 한 마음으로 찬양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장신구 등이 성도들의 시선을 끌어 마음을 분산시키는 것이라면 패용을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다. 사례비 문제
지휘자, 반주자, 독창자의 사례비는 지급되어야 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전제조건을 충족하는 경우에만 지급이 가능하다. 그것은 직업이 없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어야 한다. 구약시대에 레위인의 수고에 대해 사례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른 직업이 없이 성막이나 성전에서만 종사했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사례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지휘자가 직업을 갖고 있는 경우에는 사례비가 지급되지 않는 것이 성경적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지휘자가 직업이 있어도 본인이 그것으로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경우에는 지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지휘자가 자가 발전을 위해 공부 중일 때도 장학금 명목으로 지급되는 것도 좋은 일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휘자가 직업이 있다손 치더라도 사례비 문제는 철저히 자신의 신앙의 정도에 따라 결정하게 하는 것이 건덕(健德)의 차원에서 좋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사례비를 받는다고 신앙이 좋지 않다고 한다거나, 반대로 사례비를 받지 않는다고 자신의 신앙이 상대적 우월감으로 사례를 받는 사람보다 낫다고 여기는 것도 이분법적인 편협 된 사고방식이다. 어떤 경우도 판단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지휘자나 악기 반주자나 독창자가 아르바이트 개념을 갖고 이 교회 저 교회 옮겨 다니는 경우도 간혹 있다. 이러한 행위는 먼저 권면하고 듣지 않을 때는 지급해서는 안 된다. 또 한 가지는 문자 그대로 사례이기 때문에 인상운운 하는 생각을 갖는다든가 타 교회와의 비교의식으로 사례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는 태도는 비 신앙적이므로 이런 지휘자, 반주자, 독창자는 찬양 사역자로 임명해서는 곤란하다.
IV. 찬양가(Hymn)와 복음가(Gospel Hymn and Gospel Song)의 관계성
오늘날 예배음악을 연주하는 가운데 찬양가와 복음가의 관계 설정의 필요성이 크게 대두되고 있다. 두 형태의 찬양은 섞일 수 없는 것인가? 찬양가와 복음가가 예배음악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찬양가는 대상이 하나님으로서 하나님께 직접 드리는 것으로서 영광과 존귀, 감사와 기원 등을 내용으로 하는 노래이다.
에베소서 5장 19절과 골로새서 3장 16절에 나오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가 찬양의 뜻을 잘 규정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복음성가(Gospel Hymn)는 간접적으로나마 하나님을 높이는 내용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찬양가와 별 다른 구분을 할 필요가 없지만, 복음송(Gospel Song)은 본래 구도자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믿지 않는 불특정 다수의 회중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작곡된 노래들이다. 순전히 개인적 간증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아주 쉽게 접하여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으며 동시 흥미유발도 일으키는 곡들로 구성되어 있다.
1. 시
존 칼빈(John Calvin)은 자신이 집필한 주석에서 “시란 어떠한 악기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박윤선 박사 또한 그의 주석에서 “시란 악기의 반주되는 곳을 가리킨 것이지만 역시 반주 없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성가를 의미할 수도 있다”라고 정의하였다.
가. 찬트
1) 그레고리안 찬트(Gregorian chant=Plain Chant=예배용 찬트)
로마카톨릭 교회의 전통적인 예전 성가(Liturgical chant)로 중동지방과 아프리카 지방의 민속음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특히 이것은 초기 유대교 성가에 기초한 예배 음악의 초기 형태로서 히브리 사람들의 음악이었다. 7세기경부터 수집, 정리하여 10세기 경에는 완성된 형태로 법전화 하였는데 이미 로마교황이었던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y I, 590-604 재위)이 수집하여 미사에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 이름을 따서 그레고리 성가로 불려지게 되었다. 이후 주후 1300년경에 창작 연대가 끝이 났다.
그레고리 성가는 무반주 단선율(Monophonic)이고, 시편 말씀을 그대로 라틴어 가사로 해서 산문적인 리듬을 띈 낭송 풍의 소박하고 경건한 노래이다. 회중이 함께 부르기 위해 한 옥타브(octave) 내로 음역이 국한되어 있으나, 부르는 사람에 따라 음높이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었다. 그레고리 성가는 중세시대의 무반주 합창음악에 큰 영향을 주었고, 역사적으로 지금까지 유니즌(Unison)으로 부르고 있으며, 가장 이상적인 창법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레고리 성가의 연주법은 끊거나 쉬지 말고 물 흐르듯이 부드럽게 불러야 한다. 그리고 보통 이야기의 리듬이기 이전에 진정한 의미에서 말씀의 전달자 역할을 하므로 가사에 집중해서 분명하게 불러야 한다. 또한 프레이즈(Phrase) 마지막 이외의 모든 음부는 대체로 8분 음표로써 부르는 것이 좋다. 극단적인 강약이나 리듬의 대조를 피하여 연주하고,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부르되, ff나 pp는 가급적 피해야 한다.
2) 앵글리칸 찬트(Anglican chant)
영국교회가 로마교회에서 독립했을 때 영어 예배에 맞는 새로운 양식의 필요성을 느껴서 생
겨난 성가이다. 그레고리안 찬트를 기초로 하고 있으나 음절적으로 만들어져 있는것이 특징이다. 다시 말해서 영어 한 음절에 한 음표가 붙어 있는 셈이다. 이 찬트의 리듬도 그레고리안 찬트처럼 이야기 리듬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사실이 잊혀져 있다. 따라서 앵글리칸 찬트를 연주하는 경우에 그레고리안 찬트처럼 연주해야 한다.
액센트(Accent)는 가사에 따라 결정할 것이며, 부드럽게 물 흐르듯 노래해야 할 것이다.
나. 모테트(Motet)
13세기 초경부터 근대에 걸쳐 성행하던 성악곡의 중요한 분야로서 다성음악(Polyphony)에 의한 합창곡을 말한다. 플레인 찬트나 민중적인 코랄이나 찬송가와는 반대로 이때까지 있었던 선율을 기초로 하여 그 음악적 내용을 충분히 검토하고 발전시킨 예술적인 음악 작품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멜로디(Melody)나 찬트(Chant)는 정선율(Cantus Firmulus)인데 그것의 상하부분에 하나나 둘 혹은 세 개의 성부를 첨가하여 작곡된 다성 음악이다.
1) 예배용 모테트
예배용 찬트의 한 부분을 기초로 하거나 찬트풍의 테마(Theme)를 가지고 만든 모테트로서 무반주로 많이 부른다.
2) 코랄 모테트
코랄의 멜로디를 기초로 하여 만든 모테트로서 이것도 무반주로 많이 불려진다. 일반적으로 둘 다 예배 때에 성가대에 의해 불리어진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나, 각기 다른 정선율에 따라 연주법도 달라져야 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예배용 모테트의 경우는 아주 섬세하게 미묘한 뉘앙스의 만화경 같이 무한한 변화를 하여 표현에 중점을 두는 반면, 코랄 모테트는 보다 힘차게 직설적으로 연주해야 한다.
다. 교성곡(Cantata)
17세기 초경에 이탈리아의 단성음악(Monody)에서 생겨난 것으로 여러 가지 형태의 기악반주로 꾸며지는 영창(Aria), 서창(Recitativo), 중창(Ensemble), 합창(Chorus) 등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성악 작품의 하나이다. 가사를 보면 세속적인 칸타타도 있으나 여기서는 교회 칸타타를 말한다. 성탄절, 부활절, 감사절 칸타타가 있는데 바흐(J. S. Bach)의 295곡의 칸타타는 예배 찬양곡의 진수이다.
라. 수난곡(Passion)
사복음서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이야기를 다룬 성악곡이다. 대규모의 합창과 독창 및 관현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복음서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마태수난곡, 마가, 누가, 요한 수난곡과 드보아의 ‘가상칠언’, 베토벤의 ‘감람산 위의 그리스도’, 등이 있다. 이중 가장 걸작은 바흐의 ‘마태 수난곡’과 ‘요한 수난곡’이다.
그런데 개신교(Protestant)의 수난곡은 주로 성담곡(Oratorio)만 알려져 연주되고 있다.
마. 코랄(Chorale)
역사적으로 코랄은 루터교회의 나라들 특히 독일에서 종교개혁시대부터 1750년경까지 발달한 노래이다. 마르틴 루터가 로마카톨릭에서 성직자인 사제와 수녀만 부르던 찬송을 초대교회처럼 회중이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여 일반 회중들이 쉽게 부를 수 있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 이후 독일 개신교에서 회중들이 부르는 찬송가를 일컫는 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는 독일의 Protestant교회의 찬송가를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초기의 코랄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예배에 참가하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루터는 상투스(Santus)를 코랄 풍으로 개작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본래는 그레고리안 성가를 포함한 넓은 의미에서의 성가나 교회의 노래를 지칭하였다. Protestant의 Chorale은 4부 합창이 기초가 되어 고도의 예술적 작품의 기초로 사용되어 독일 바로크 음악에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교성곡, 수난곡, 코랄 모두 바하(1685-1750)가 크게 공헌하였다. 그의 교회음악은 위대한 설교자의 설교와 매우 닮아 있었다.
바. 성담곡(Oratorio)
교회 음악 형식 중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많이 애창되는 곡으로 성경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곡된 성악곡을 일컫는 말이다. 서곡(Overture) 또는 전주곡(Prelude), 서창(Recitativo : 말하듯이 노래하는 것), 영창(Aria : 주역들이 부르는 완전하고 아름다운 노래) 중창(Ensemble : 2중창, 3중창, 4중창 등), 합창(Chorus : 예술적 가치가 높은 합창곡), 관현악 형식을 취하고 음악은 시나리오에 의해 극적으로 만들어졌는데 동작이나 배경 의상은 사용하지 않는다. 오라토리오(Oratorio)는 종교적 오페라(Opera)나 교회 칸타타(Cantata)나 수난곡(Passion)과의 구별이 확실하지 않은 작곡의 형식이다. 성경을 바탕으로 작곡된 대규모의 찬양곡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곡으로 헨델의 메시야(Messiah), 하이든의 천지창조(The Creation), 멘델스존의 엘리아(Elijah), 바흐의 크리스마스(Christmas) 등이다.
사. 찬양곡(Anthem)
원래 ‘찬양’이란 뜻으로 라틴어로 ‘8도(1 octave)'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영국국교인 성공회의 예배에서 불려지는 합창곡으로 천주교의 Motet와 비슷하나, 역사적으로 보면 플레인 찬트나 코랄보다 오히려 영어 찬송가에 기초하고 있다. 그런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어느 특정 찬송가에 기초하지 않은 자유스러운 안셈이 창작되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이것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본적 양식만큼은 찬송가의 선율양식을 따르고 있다.
일반적으로 성가대의 찬양곡을 말하고, 16세기 중엽 이후 성공회의 예배에서 부르는 합창곡도 모테트와 흡사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 보통 반주가 붙어 있고, 모테트의 프레이즈보다 전형적으로 짧은 것이 특징이다. 연주방법은 코랄 모테트와 비슷하다.
아. 미사곡(Missa)
로마카톨릭의 미사에 사용되는 음악을 지칭하는 말이다. 여기에는 독창, 중창, 합창 등이 있다. Kyrie(연민의 찬가로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Gloria(영광의 찬가로서 “주께 영광 있으라”)-Credo(신앙고백으로 “우리는 주를 믿나이다”)-Sanctus(감사의 찬가로서 “거룩하신 만군의 주”)-Augnus Dei(평화의 찬가로서 “신의 어린양”)이다.
2. 찬미
존 칼빈은 자신의 주석에서 “찬미란 적절한 찬송의 노래로서 단지 입으로만 하든지 혹은 다른 방도로 하든지 다 포함되는 것”라고 정의하였다. 박윤선 박사도 그의 주석에서 “찬미란 단순히 목소리로 부르는 종교 음악이니, 신약시대에 이르러 성도들이 부르는 영감으로 지은 성가들이다”라고 규정하였다.
가. 시편가(Psalter or Psalmody)
시편가(詩篇歌)라는 것은 시편(Psalms)의 원문을 그대로 부르는 단선율 노래로서 그레고리 성가의 기본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대로 내려오면서 사용하던 찬송가이다. 시편은 모세로부터 에스라까지 10세기에 걸쳐 영감 있는 예배의 찬양이 만들어졌고 헬라어 원문 명칭에 따라 ‘수금을 치며 부르는 노래’라는 의미로써 시집의 형태로 편집되었던 것이다. 또한 시편의 그 내용이나 문학형식과 창법이 예배음악에 영향을 주었다. 대부분의 시편에는 표제가 붙어 있으며, 이들 표제 중에는 히브리인에게 친숙한 민요곡으로 생각되는 곡명이 몇 편 있는데 시편을 대중적인 민요곡조로 불렀으리라고 추측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찬양으로 국악가락으로 된 찬송의 사용도 가능할 것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시편 81편 1-16절에 나오는 아삽의 노래와 시편 48편 1-14절에 나오는 고라 자손의 노래와 시편 34편 1-22절에 나오는 다윗의 노래(사무엘하 23:1, 시편 103편 1-22)가 있다.
나. 송가(Canticle)
송가라는 것은 시편 이외에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데서 오는 기쁨이 넘쳐흐르는 예배음악으로서 신. 구약 성경에 수록되어 있는 노래를 가리키는 말이다.
연주 형식은 회중, 성가대, 회중과 성가대로 부르는 찬트 형식과 목사 또는 신부가 회중들이 교독하는 형식과 특별한 음악으로 성가대원만 노래하는 형식 등 세 가지가 있다. 연주 방법은 레치타티보(Recitativo)이다.
1) 창세기 14장 18-20절에 나오는 살렘 왕 멜기세덱의 노래
2) 창세기 24장 26-27절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의 노래
3) 출애굽기 15장 20-21절에 나오는 모세의 누이 미리암의 노래
4) 신명기 32장 1-43절에 나오는 모세의 노래
5) 사사기 5장 1-31절에 나오는 사사 드보라의 노래
6) 사무엘상 2장 1-10절에 나오는 사무엘 선지자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
7) 에스라 7장 27-28절에 나오는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의 노래
8) 이사야 12장 1-6절에 나오는 선지자 이사야의 노래
9) 다니엘 2장 19-23절에 나오는 선지자 다니엘의 노래
10) 하박국 3장 16-19절에 나오는 하박국 선지자의 노래
11) 누가복음 1장 46-55절에 나오는 마리아 노래(Magnificat)를 말하는 것으로 상기 6)의 한나의 노래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12) 누가복음 1장 67-79절에 기록된 세례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의 노래(Benedictus)는 구약의 예언서의 형식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13) 누가복음 2장 28-32절에 나오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인 시므온의 노래(Nunc Dimittis)
14) 누가복음 10장 21-24절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신 노래가 있다.
15) 사도행정 16장 25절에 사도 바울과 실라가 부른 노래가 있다.
3. 신령한 노래(Spiritual song, Sacred song)
신령한 노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존 칼빈은 다음과 정의하였다. “신령한 노래란 단순한 찬송만이 아니라 권면과 다른 주제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노래가 영적이기를 바라고 천박하고 무가치한 장난으로 하지 말라고 한다”면서 바울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박윤선 박사는 자신의 주석에서 약간 다른 방향에서 정의하기를 “신령한 노래는 위의 두 가지인 시와 찬미 중 어느 것이든지를 가리킬 수 있는 일반적 명칭이므로 이 말은 어떤 특종의 음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시와 찬미를 총괄하는 명칭이다”라고 하였다.
찬미는 찬송가(Hymn)인데 종교개혁 이후 17세기에 많은 찬송 작가가 나옴으로써 널리 보급되었다. 히브리서 2장 12절에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는 말씀에 따라 우리는 찬송하여야 한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는 1983년에 한국교회 교단이 한 마음으로 만든 통일찬송가이다.
찬송이란 말은 헬라원어로 ‘humneo‘인데 여기에서 찬송을 뜻하는 ’hymn‘이 유래하였다. 즉 찬송이란 종교적인 송시(頌詩)를 노래하거나 노래로써 하나님을 기리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찬송가는 구절법(Phrasing)에 따라 가사와 곡조의 음절을 살펴 불러야 하는데 음절 표시는 찬송가마다 우측 상단에 숫자로 잘 표기되어 있다.
예를 들어 21장 ‘다 찬양하여라‘는 14. 14. 4. 7. 8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것은 14글자, 4글자, 7글자, 8글자를 각각 한 숨에 노래하라는 의미이다.
비 예전적 찬송(Nonliturgical Hymns)은 13-14세기에 로마카톨릭 교회 밖에서 평민들 사이에 이태리어로 된 비(非) 예전 찬송인 영가(Laudi Spirituali)가 불려졌다. 평신도 형제단들은 방랑시인처럼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복음적인 이야기를 주제로 한 극적인 노래를 부르며 죄의 용서를 비는 회개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독일에서는 13세기에 벌써 로마 교황권에 대항하여 독일어로 된 찬송과 노래가 많이 나왔는데 이를 근거로 복음을 담은 개신교회의 찬송을 부를 수 있었다.
그러다가 16세기 종교개혁으로 독일에서는 개신교 루터교가 생겨났고,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지도하에 독일어 회중 찬송인 코랄(Chorale)이 탄생하게 되었다.
본래 카톨릭 교회의 예배음악은 성직자와 성가대의 전유물이었으나 루터는 라틴어 대신 평민들이 사용하는 독일어를 사용했으며, 회중 찬송을 만들어 예배음악을 회중(평신도)의 것으로 하여 예배 시에 모든 회중들이 다같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단순하고 겸허한 독일 민요의 선율을 취하였다. 그의 가장 큰 공적은 개신교 코랄을 창시한 것이다.
루터는 자신이 상당한 음악적 소양이 있는 연주가(lute)이며, 성악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으며, 또한 작곡가로서 높은 수준의 복음적인 음악을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루터는 찬양을 예배의 생명적 부분으로 승격시킨 사람이었다. 종교개혁 당시 생명을 위협 당하는 핍박 중에도 담대하게 신앙을 지키게 한 힘은 회중찬송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쯔빙글리(H. Zwingli, 1484-1531)가 개혁교회에서 카톨릭 음악을 없애버린 반면 루터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전통적인 음악적 유산을 전혀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옛 음악자료를 새롭게 번역, 수정하여 채택하였으므로 성도들이 이미 익숙한 찬송과 성가의 곡조를 알아들었다.
예를 들면 38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는 시편 46편을 근거로 만든 찬송이며, 그밖에 많은 코랄을 작곡하였다.
이처럼 루터는 회중찬송 뿐만 아니라 성가대의 세련된 다성 합창(Polyphonic) 음악까지도 계속 장려하였음을 볼 때 찬송가에 대해 칼빈과는 매우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루터는 당시 세속민요조에 새로운 가사를 넣기도 하였으며, 당시 유행하던 대중노래를 예전음악에 도입하여 회중이 쉽게 부를 수 있도록 회중찬송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래서 루터를 '복음 찬송가의 아버지‘(Father of Evangelical Hymnody)라 불려지고 있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보면 예배 시간에 복음송이 불리어지는 것에 거부반응을 나타내며 찬송가만을 부르도록 주장하는 것은 찬송가의 역사적 배경을 모르는 무리한 주장으로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현재 사용되고 있는 찬송가에는 종교개혁 당시 대중이 부르는 노래도 많이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558곡 중에 480여 편이 모두 복음가이며, 그 중에는 국가나 노동요, 운동가, 흑인영가가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부르는 자가 진실하게 참 예배하는 마음으로 어떻게 부르느냐에 있다.
가. 찬송가(Hymnody-hymn singing)
회중찬송의 기원은 율법시대의 예배 때이다. 신명기 31장 19절을 보면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서 그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시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증거하고 신앙을 후손에게 전수시키는 수단으로 회중찬송을 명령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중찬송을 부르도록 하였음은 자명한 일이다. 회중찬송은 온 회중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적 표현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이 다 함께 동참하는 가장 아름답고 귀중한 예배음악 순서이다. 회중찬송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송(adoration)하고, 구원의 은총을 고백(confession)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기원(supplication)과 감사의 제물(dedication)을 드리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찬송가의 요건은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맞아야 하고, 복음적이어야 하며, 아름답고 품위 있는 어휘를 사용해야 하고, 가락과 리듬이 남녀노소 모두 같이 부를 수 있도록 복잡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찬송가는 교회 역사상 각 시대에 만들어진 찬송가들을 부르고 있다. 시편이 유대인의 찬송가였고, 초기 운문 찬송가는 그리이스 교회의 것이었다. 그러나 찬송가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영국 찬송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 이유는 영어를 사용하는 국민들이 칼빈주의자들이 운문화한 시편가를 본받아서 영어 찬송가를 포함하여 수많은 시편가를 만들어냈다. 특히 17세기 위대한 찬송가 작가인 아이자크 왓츠(Isaac Watts)는 찬송가를 시편에만 국한하는 것을 반대하여 성경 말씀에 기초는 하였으나 인간의 창작물인 찬송가를 많이 만들기 시작하였고 지금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다. 로 많이 편집되어 있는 복음가들은 이것은 100여 년 전에 미국에서 많이 불려지던 복음가를 여과과정 없이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 많이 보급되었던 것이므로 속도가 빠르고, 당김음이 많으며, 장식음도 많아 회중이 따라 부르기에는 어려운 노래가 많다. 따라서 찬송가의 요건을 갖추되 수준도 있으면서 비교적 회중이 따라 부르기 쉬운 찬송가의 작곡이 시급한 실정이다. 우리나라의 작곡가들이 사명감을 갖고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모든 찬송가는 중간에 간주를 넣어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회중이 전주와 간주를 듣는 동안 가사를 음미하게 됨으로써 은혜를 더 느끼게 된다. 하물며 찬송가의 가사를 생략하면 되겠는가! 단순히 가사가 길다든지, 예배 시간의 단축을 위한다는 목적 하에 찬송가를 자르는 일이 흔히 발생하고 있는데 이것은 매우 잘못된 일이므로 빨리 이를 시정하여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 이유는 마치 성경말씀을 읽지 않고 생략해버리는 일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찬송을 질서 정돈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한다든지, 찬송을 시간을 땜질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등은 찬송가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또한 준비 찬송이라는 용어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찬송은 그냥 찬송일 뿐이다. 그리고 ‘예배를 돕는 성가대의 찬양‘이라는 표현과 ‘가사에 은혜 받길 바랍니다‘라는 말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찬송가를 어떻게 부르는 것이 좋은가? 이 질문에 대해서 존 웨슬리(John Wesley)가 언급한 찬송가 부르는 법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 다 함께 불러야 한다.(Sing All)
조금이라도 쳐지거나 억지로 부르지 말고 찬송을 부름으로써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회중이 다 함께 불러야 한다.
2) 열심히 불러야 한다.(Sing Lustily) : 자기 음성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힘을 다해 목청을 높여야 한다.
3) 겸손히 불러야 한다.(Sing Modestly)
찬송가 가락이 하나의 선율이 되도록 자신의 가락을 다른 사람들과 맞추어 불러야 한다.
4) 느리지 않게 불러야 한다.(Sing in Time)
반드시 첫 템포(Tempo)를 지키되, 찬송가를 너무 느리게 부르지 않아야 한다. 한 사람이 느려지면 다른 사람에게 전염이 되어 전체가 느려지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5) 영적으로 불러야 한다.(Sing Spiritually)
마디 하나하나에 가사 한 절 한 절에 자신의 심령을 담아 눈을 들어 하나님을 향하여 노래해야 한다. 가사의 뜻을 생각하며 불러야 하고, 혹시 자신의 마음이 음악 자체에 도취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께만 마음을 바쳐 노래해야 한다.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 중에 찬양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은 60여 곡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복음가(Gospel Hymn and Gospel Song)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현재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에 수록된 558곡 중에서 불과 16곡만이 한국인의 작품으로 채 3%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앞으로 한국의 작곡가들이 많은 찬양곡들을 작곡해서 불리어지도록 해야 한다. 특히 한국적 가락을 사용하여 작곡함도 필요하다. 왜냐하면 한국의 전통음악이 솔로몬 시대의 성전음악과는 유사성이 많기 때문이다.
나. 복음성가(Gospel Hymn)
대상이 사람으로서 신앙생활의 위로와 기쁨과 감격과 권면과 소망 등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노래이다. 그러니까 간접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노래이다. 그런데 1800년 이후 교회음악의 찬양이 답보 상태로 머물러 있을 때 대중성이 큰 복음성가가 환영을 받게 되었다.
예를 들면 1-8장까지의 송영과 9-55장까지의 찬양과 경배는 찬양으로 볼 수 있고, 위 보기 중에서 16장 ‘내 주는 살아 계시고‘, 23장 ‘만 입이 내게 있으면‘, , 28장 ‘복의 근원 강림하사276장 ‘하나님의 진리등대‘, 278장 ‘사랑하는 주님 앞에‘, 전형적인 복음성가이다. 그런데 27장 ‘빛나고 높은 보좌와‘처럼 찬양가와 복음성가가 혼재되어 있는 찬송도 있다. 1,2절은 찬양가이고, 3-5절은 복음성가이다.
찬송가 중에 복음성가로 분류할 수 있는 노래는 흑인영가로 136장 ‘거기 너 있었는가‘와 518장 ‘신자되기 원합니다‘이고, 미 남부지방의 민요곡조를 들여온 것으로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며, 스웨덴 민요로 40장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이며, 미국國歌도 있는데 79장 ‘피난처 있으니‘이고, 371장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나 461장 ’캄캄한 밤 사나운 물결일 때‘와 같은 노동요도 있다. 371장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과 461장으로, 그 중에 461장의 1,2,5절은 복음성가로서의 의미를 찾을 수 없어 성가와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사교적인 모임과 부흥집회를 위한 찬송가로 188장 ‘만세반석 열리니‘이다. 그리고 현재 사용되고 있는 통일찬송가는 1/3이 선교 초창기부터 사용해 왔던 번역 찬송이며, 선교 초기에 한국어로 창작된 찬송가는 현재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에 잘못 표기되어 있거나, 528장 ’주여 나의 병든 몸을‘과 같이 작자미상으로 되어 있는 곡도 있다. 따라서 찬송가의 전면적인 재검토가 이뤄져야 할 시점에 와 있다.
반면에 찬송가에는 수록이 되어 있지 않았지만 복음성가로 전혀 손색이 없는 곡들도 많다. 예를 들자면 Henry Smith 작곡의 ‘거룩하신 하나님 주께 감사 드리세’, 신명기 3장 3-4절을 가사로 작곡한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Ascribe greatness), Mavis Ford 작곡의 ‘당신은 영광의 왕’, 고린도전서 13장을 그대로 가사로 한 정두영 작곡의 ‘사랑은 언제나’, Paul Kyle 작곡의 ‘예수 우리 왕이여’, Easter K. Rusthoi 작곡의 ‘좋으신 하나님’, Linda Stassen 작곡의 ‘주님을 의지합니다’ 등입니다.
그런데 유의할 것은 아무리 찬송가에 복음성가나 복음송이 많고 복음성가나 복음송에 찬송가에 들어갈 곡들이 많다고 해서 찬송가를 부정하는 듯한 태도는 건덕의 측면에서 옳지 못하다. 그렇게 되면 찬송가를 선곡하여 편집하여 발행한 교단의 질서를 부정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찬양가와 복음가는 어떻게 조화시키는 것이 바람직한가? 그것은 말씀이 선포되기 전에는 찬양가를 부름이 합당하고, 말씀선포 후에는 찬양가나 복음성가, 복음송(Gospel Song) 중 어느 것을 불러도 상관이 없다고 볼 수 있다.
다. 복음송(Gospel Song)
기독교적 대중음악의 한 형태이다. 상당부분이 흑인 영가(Negro Spiritual)에서 형식과 느낌을 가져 온 노래이다. 1874년 휘틀 부흥회에서 Phill Bliss의 ‘Gospel Song‘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이 후 생키, 크로스비 등이 가세하여 ‘Gospel Hymn‘이 발간되었다. 이때부터 열정적인 흑인 복음송이 블루스, 재즈와 더불어 동시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복음송이란 개인적인 권면, 신앙적인 체험, 죄의 고백, 간증, 전도 집회, 친목회, 기독교의 사교적 집회 등에 사용되는 노래이다. 복음송은 또 대중들에게 호소력이 있고, 기독교인의 경험과 구원에 관해 가장 단순한 가사로 되어 있으며, 어린이들에게 말하듯이 쉬운 말로 되어 있어, 반복적인 리듬을 통해서 간단한 구절을 반복하므로 쉽게 배워 기억할 수는 있다. 이러한 대중성이 짙은 성격 때문에 한국 교회에 보급이 급격하게 된 탓도 있겠으나 더 엄밀한 이유는 한국인의 탁월한 음악성 때문이다. 그러나 지성보다는 감성에 호소하고 있는 노래이므로 대부분의 복음송은 문학성이 결여되어 있고, 기독교의 교리보다는 감상적인 빈약한 가사로 되어 있어 하나님의 은혜와는 상관없이 자아도취에 빠질 세속적인 요소가 많다. 그러므로 곡의 선택에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한다. 그러므로 복음송은 전도 목적의 예배나 대중적인 집회에서 사용하는 것이 좋으며, 목적이 있는 집회가 아닌 예배 시에는 가급적 말씀 선포 후에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다고 해서 예전부터 불러오던 예배전통을 하루아침에 깨뜨려 못 부르게 하는 것도 신앙의 유익에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음과 같은 곡들이 전형적인 복음송이라 할 수 있다. 317장 ‘어서 돌아오오‘, 376장 ‘내 평생소원 이것 뿐‘, 378장 ‘이전에 주님을 내가 몰라‘, 439장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539장 ‘이 몸의 소망 무엔가‘이다.
그런데 오늘날 찬송가를 부르는 데 있어서 상당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찬송가 중에 많은 곡들이 수많은 세월 동안 제대로 불러지지 않은 채로 사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찬송가에 수록된 558곡 중 약 250곡 정도만 현재 불러지고 있을 뿐이다. 그 중에 또 절반은 가끔 불러지고 있다. 그러므로 한 달에 두 번 정도 불러지는 곡들은 불과 150곡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 말씀 중에서 일부만을 먹고 성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심각한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들은 나머지 찬송곡들을 배워서 부를 생각은 미뤄두는 반면 새로운 복음 송은 그 때마다 익혀서 불러지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우선순위가 뒤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형평성의 문제도 있다고 봐야 한다.
라.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
1960대 초기에는 지저스 뮤직(Jesus Music)이나 지저스 록(Jesus Rock) 등으로 불리다가 1970년대 이후 등장한 기독교적 대중음악이다. 재즈(Jazz)나 팝(Pop)이나 발라드(Ballad)나 포크(Folk)와 Rock-n-roll을 혼합하여 그 시대의 문화사조를 따라 어떤 장르(genre)라도 차용하여 만든 복음적 내용을 담고 있는 기독교 음악을 일컫는 말이다. 내용 또한 삶의 전 영역에 걸쳐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취지를 살리자는 데 있으므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가정, 친구 등 매우 다양하게 구성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CCM은 기존의 찬송가나 복음성가나 복음송과 로마 카톨릭계의 생활성가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곡들이 많다. 단지 구별되어 있는 느낌에다 다소 애매한 위치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미국에서 흑인음악이나 복음가와 대비되는 팝이나 록 계열을 포함하여 현대 대중음악 스타일(Style)을 띠고 있으면 모두 CCM으로 부르고 있다. 미국에서는 빌보드라는 미국의 종합차트에 CCM이 인기순위로 오르게 되면서 상업적인 면에서도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때마침 급격한 사회 변화와 문화세대인 N세대가 등장하면서 한국에도 그 열기가 전해졌던 것이다.
CCM의 특징은 전통적 예배음악과는 달리 언제나 함께 부를 수 있을 만큼 쉬우며, 감성에 호소하여 상상력을 자극하며 음악 장르의 특성이나 가사 내용에 의해 강력한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CCM이 영화음악이나 광고(CF)음악으로 쓰여지기도 했고, 최근에는 한국에도 CCM이 광고에 방영되고 있다.
래리 노먼, 페트라, 러브송 등이 초기 그룹들이었는데 1990년대 이후 아티스트(Artist) 크라이, 루이스 등이 다양하게 발전시켰다.
그런데 CCM이 음악수준이 떨어진다거나, 예배음악으로서 메시지가 약하다거나, 교회의 정서와 맞지 않는 것이 있어 분리를 조장할 우려가 있다거나, CCM 작곡자들의 영성이나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들어 교회 내에서는 CCM을 못 부르게 하는 교회들이 있다.
그러나 CCM의 한 분야인 찬양과 경배(worship and praise)가 이미 청년들과 청소년들의 예배에서 빠져서는 안 될 요소로 확고한 자리를 잡아가고 있고, 또한 CCM이 N세대와 만나는 유일한 통로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CCM을 허용하느냐 아니 하느냐의 논란보다 그것을 어떻게 하면 더 영적으로 풍성하게 예배음악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하여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그리고 교회 밖의 청소년들에게 과소비적이고 비성경적인 음악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나 은혜, 기쁨, 감사, 축복과 비전 등을 주제로 지은 곡인 CCM을 부르도록 하는 것이 더 낫고 자연스럽다. 하지만 서울의 온누리 교회처럼 대형교회들이 소개하고 있는 CCM을 대형교회가 추천한다는 이유만으로 진리인양 여과과정 없이 수용하는 자세도 제고해야 한다. 그리고 날마다 쏟아지는 유행하는 노래들 가운데는 장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장르 구분 없이 마구 혼합하여 만든 곡이 많다. 이런 곡들은 대중가요 중에 우리들의 정서를 병들게 하는 곡들과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에 찬양을 책임진 사람들이 CCM 곡들을 잘 선별하여 부르도록 해야 한다.
※ 뉴 에이지 음악(New Age Music)
뉴 에이지는 하나의 종교로서 기독교를 포함한 여러 종교들의 혼합체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시작되어 온 어떤 음모가 뉴 에이지라는 이름을 달고 거리에 쏟아져 나온 것이다. 뉴 에이지 사상은 비인격화된 신 개념을 가르치며 종교다원주의를 통해 기독교 절대 진리를 부정하여 인간을 신격화하고 죄를 부정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하게 하며, 윤리적 혼란을 가중시킨다. 이것이 대중문화 속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영화, 소설, 체조 등과 특히 음악에 뉴 에이지 사상을 넣어 뉴 에이지 음악으로 나타나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대환영을 받고 있다. 기독교인 중에도 믿음이 약한 사람에게 들어와 성령님께서 주시는 영적 평안보다 뉴 에이지 음악이 주는 깊은 명상에 잠겨 잠재의식 속으로 어떤 메시지를 받아 거기에 빠지고 있다. 뉴 에이지 노래는 감상 중에 편안하고 안락함을 느끼기 때문에 더욱 더 신비한 선율을 찾게 헤매게 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반면 그것이 외로움과 고독감을 절감하도록 인도한다. 마침내 절대 진리의 붕괴를 초래하여 범신론, 윤회론, 밀교주의 등의 사상에 빠지도록 만든다.
따라서 뉴 에이지 음악에 복음적인 가사를 붙였다고 해도 예배음악은 말할 것도 없고, 개인적으로 감상용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이런 점들을 찬양을 책임지고 사람들이 잘 살펴서 금지시키고, 접촉하지 않도록 계속적인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존 덴버, 기타로, 반젤리스, 케니지, 유키 쿠라모토, 장 미셀라드 등이 연주가들이다.
4. 새 노래(시편 33:3, 96:1, 144:9, 이사야 42:10)
칼빈은 자신의 주석에서 새 노래를 정의하기를 “뛰어나고 아름다우며 격조 높은 노래, 즉 일상적이거나 평범한 노래가 아니라 그처럼 특출한 사례가 결코 있어 본 일이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관련하여 사람들로부터 경탄을 자아내게 하는 노래를 나타내 준다. 따라서 가장 높은 찬미로써 기념되고 찬송되어야 하는 무한한 긍휼의 바탕 위에서 하는 찬송을 말한다”고 했다. 이어서 “오직 거듭난 사람들만이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깊은 마음의 감정에 흘러나와야 하며, 따라서 우리는 적절한 방식으로 그처럼 찬양하기 위해 인도와 감화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윤선 박사도 그가 집필한 주석에서 “새 노래란 새 은혜와 새 세계의 축복을 받은 자의 마음에서 솟아나는 찬송이다. 그러므로 미래에 하나님의 간섭으로 전개될 복된 시대를 내다 보면서 거기에 합당하게 부르는 예언시와 같은 찬송”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새 노래가 예배음악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1517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에 의해 종교개혁이 시작된 후 북부 유럽은 거의 개신교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때 로마 카톨릭에서는 내부적으로 개혁의 소리가 점점 높아져 가고 있었다. 급기야 1545-1563년까지 이태리(Italy) 북부 트렌트(Trent)에서 반동 종교개혁(Count Reformation)이 열리게 되었다. 여기서 당시 예배음악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판의 소리가 있었다.
가. 예배음악이 세속화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세속음악의 작곡기법인 정선율(cantus firmus)을 이용하여 예배음악(Parody Mass)을 작곡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나. 너무 복잡한 다성적 선율(Polyphonic Texture) 때문에 가사의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팔레스트리나(G. P. Palestrina 1525-1594)는 6성부 미사인 ‘마르셀로 미사‘(Mass of Pope Marcellus)를 보내어 다성 음악도 영적이고 경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다. ‘교회 내에서의 과다한 악기 사용과 성가대원들의 불경건한 태도와 발음이 문제다’라는 것이다.
이처럼 소위 ‘팔레스트리나 양식‘이라 불리는 16세기 다성 음악은 17세기 바하의 다성 음악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했는데도 불구하고 당시 영적 지도자들은 자신의 전통과 고집스런 습관에만 젖어 있었기 때문에 새 노래라고 할 수 있는 ’팔레스트리나 양식‘이라 불리는 16세기 다성 음악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17세기의 바하(J. S. Bach 1685-1750)의 예배음악도 두말할 것도 없이 비판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너무 기악적이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뿐만 아니라 18세기의 작곡가인 신동 모차르트(W. A. Mozart 1756-1791)가 교회를 위해 작곡한 음악도 음표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영적 지도자들의 비난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이상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새 노래는 우선 수용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따라서 영적 지도자들은 교회 음악가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예배음악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영적 감각이 살아있는 교회 음악가들이 선정한 새 노래를 수용하는 태도가 바람직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교회 음악가들이 새로운 기교만을 나타내는 곡들을 새 노래라는 것을 명분 삼아 무조건 수용을 주장하는 자세도 조심해야 될 부분이다. 자칫하면 성령의 역사하심을 방해할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V. 악기 사용의 문제
1. 성경적 판단
앞서도 언급했듯이 악기 사용의 기원은 창세기 4장 22절인데 “유발은 수금(harp)과 퉁소(flute)를 연주하는 사람들의 조상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후 성막이나 성전에서 연주되어 왔던 성경상의 모든 악기는 본래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범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자신의 감정을 만족시키는 수단 내지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악용하는 수단으로 전락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후로 교회에서의 악기 사용 문제는 끊임없는 논쟁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이렇다 할 해결점이 없는 상태로 서로의 주장이 팽팽하게 대립되어 있다.
교회에서 사용이 가능한 악기는 어떤 것이 있는가? 사용이 불가능한 악기가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성경에 제시되어 있는가? 그러면 사용이 가능한 악기라 할지라도 어떤 경우에 가능한가? 아니면 아무런 제재 없이 사용해도 좋은가? 그리고 국악기 사용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가? 하는 문제가 시원스레 정리가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에 대해서 아주 밀접하게 접근하여 차근차근히 풀어보고자 한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교회 내에서 어떤 음악의 형태이든 상관없이 모든 악기 사용이 가능하다. 단지 드리는 사람의 마음이 중요하다. 얼마나 하나님께 향해 있으며, 사람을 살리는 구령에 대한 열정적 소망이 있는가? 그 바탕들 위에서 드려지지 않으면 제아무리 경건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악기라도 해도 그것이 아무런 의미를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
예배음악을 주도하며 오늘날 기악 찬송의 리더로 자리 매김하고 있는 오르간도 악한 목적에 사용된 적이 있습니다. 피아노는 18세기 말 세속음악을 위해 만들어진 악기라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따라서 당시 예배음악에 사용하는 악기가 될 수 없었다. 그런 피아노가 지금은 아무 거부감 없이 예배음악 악기로 사용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예배음악 악기인 오르간과 동등한 위치에 올라서 있다는 사실을 중시하여 각종 악기사용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3. 악기의 종류와 특성이 성경에 등장하는 악기들인데 이것을 봐서 성경적 잣대로 판단하여도 찬양할 때 모든 악기 사용이 가능하다. 특히 찬양을 할 때 우리나라 고유의 악기인 국악기를 사용하는 것도 ‘새 노래로 노래하라’는 말씀과 잘 어울리는 시도하고 할 수 있다.
시편 81:2-3 “시를 읊으며 소고를 치고 아름다운 수금에 비파를 아우를 지어다 월삭과 월망과 우리의 절일에 나팔을 불 지어다“
시편 150:1-6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 지어다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찬양할 지어다 나팔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 지어다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 지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 지어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 지어다 할렐루야“
이 외에도 찬양 시에 악기를 연주하는 것에 관한 말씀이 구약에서 적어도 16번, 신약에서 4번 정도 기록되어 있다.
역대하 7:6절을 보면 다윗 왕이 악기를 만들도록 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때에 제사장들은 직분대로 모셔 서고 레위 사람도 여호와의 악기를 가지고 섰으니 이 악기는 전에 다윗 왕이 레위 사람으로 여호와를 찬송하려고 만들어서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을 감사케 하던 것이라 제사장은 무리 앞에서 나팔을 불고 온 이스라엘은 섬겼더라“
솔로몬도 악기를 제작하였다. 열왕기상 10:12절을 보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악기가 필수적임을 알 수 있다. “왕이 백단목으로 여호와의 전과 왕궁의 난간을 만들고 또 노래하는 자를 위하여 수금과 비파를 만들었으니 이와 같은 백단목은 전에도 온 일이 없었고 오늘까지도 보지 못하였더라“
2. 목적
그것은 더욱 아름다운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한 것과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더욱 간절하게 영적으로 찬양을 부르거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도록 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악기의 소리가 너무 커서 성도들의 회중 찬송의 소리가 묻혀 버린다면 예배의 참다운 의미가 퇴색되는 위험이 있다. 성도들이 진솔하게 찬양을 드리고자 마음을 빼앗아 그 마음이 상실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찬양에 악기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요즈음 유행하는 것처럼 음악미학의 기법을 따라 소리를 내는 기악합창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찬양에 있어 악기 사용의 목적은 찬양을 부르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3. 종류와 특성
가. 관악기
1) 퉁소(히 ugab : Organ, Pipe-Horn 洞簫)
초기에는 갈대나 나무, 동물 뼈로 만들어 거친 소리를 냈으나 후기에는 은으로 만들었다. 성전에서 사용되기에는 부적합했던 것으로 세속적인 악기로 여겨졌다.(창세기 4장 21절, 시편 150편 4절, 요한계시록 18장 22절)
2) 피리(히 halil : Pipe)
피리는 고대 근동 지방의 목관 악기류에 서 가장 대중적인 것이었으며, 비탄과 기쁨을 표현하는 악기의 범주에 들었던 것으로 음색이 좋아 결혼식이나 잔치, 장례식 등에 많이 사용되었다.(욥기 30장 31절, 열왕기상 1장 40절)
3) 저(히 halil : Flute)
속이 빈 갈대나 목관에 구멍을 뚫어 소리가 나도록 만든 악기를 말한다.(사무엘상 10:5, 고린도전서 14:7) 저로 번역된 ‘할릴’(chalil)은 열왕기상 1장 40절이나, 예레미야 48장 36절이나, 욥기 21장 12절에 보면 ‘피리’로도 번역되었다. 저는 고대 근동의 목관 악기류에서 가장 대중적인 것으로 원시적인 클라리넷에 가깝고 음색이 좋아 결혼식이나 잔치 등을 열 때 반주용 악기로 사용되었다.(이사야 5:12, 30:29) 저는 기쁨과 관련된 악기였으나 마태복음 9장 23절을 보면 장례식에도 사용되었다.
4) 나팔(히 qeren, sopar, yobel : Trumpet or Horn)
제사장들의 악기로 성경에 널리 쓰여진 기록이 있는 것으로 가장 보편적인 악기 중 하나로서 금속과 동물 뼈로 만들었으며, 길이가 60cm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악기의 역할보다 신호의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양각나팔은 여호수아에만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호수아 이전에 가나안에서 주로 사용하던 악기였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출애굽기 19장 13절, 레위기 23장 24절, 사무엘상 13장 3절)
역대상 15장 24절에 나팔을 불며 섬기는 일곱 명의 이름을 소개하고 있다.
나. 현악기
1) 수금(히 kinnor or nebel : Lyre or Harp : 竪琴)
창세기 4장 21절을 보면 유발이 수금을 잡는 자들의 조상으로 소개됨으로써 성경에서 처음 음악을 언급하고 있다. 이 악기는 현악기의 일종으로 6-30개의 줄을 가진 삼각형이나 사각형 모양으로 된 악기이다. 밝은 음색이 때문에 슬플 때는 연주하지 않았다. 기쁨과 감사를 드릴 때(창세기 31장 27절, 사무엘하 6장 5절), 공중 예배를 드릴 때(시편 43장 4절, 98장 5절), 전쟁에서의 개선을 축하할 때(역대하 20장 28절)에 연주되던 악기였다. 이것은 다윗과 레위인들의 악기로 그 중에 가장 고귀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재료로는 은이나 상아로 제작되었다. 걸어가면서 연주 가능한 기타와 비슷한 악기이다.(창세기 31장 27절, 열왕기상 10장 12절)
역대상 15장 21절에는 수금을 타며 섬기는 여섯 명의 사람의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다.
2) 삼현금(Trigon : 三絃琴)
다니엘서에만 나오는 악기로서 비속한 음악가들이나 창녀들의 악기로 알려져 있었다. 이것은 배와 사다리가 함께 연결된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스라엘 악기가 아니라 바벨론의 악기였다.(다니엘서 3장 5절, 7절, 15절)
3) 경쇠(lute)
현이 세 개이고 목이 긴 지금의 기타(guitar)처럼 생긴 악기이다.(사무엘상 18장 6절)
4) 비파(히 nebel 헬 psalterion : Psaltery or Viols 琵琶)
히브리어로 ‘네벨’(nebel)인데 수피(獸皮)나 수피 주머니를 의미하고 있다. 수피가 공명상자 역할을 하며, 손으로 튕겨서 연주하는 악기이다. 현이 열 개(시편 33:2, 92:3, 144:9)인 하프 모양의 현악기이며, 일명 ‘십현금’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실제는 현이 12개라고 요세푸스는 전하고 있다. 이 악기는 주로 종교적이거나 제의적인 일에 사용되었고, 귀족의 악기였으므로 귀한 나무와 금속으로 만들어졌으며, 크기가 3.7m에 달하는 것도 있었다. 이 악기는 전형적인 남성 악기로 이집트인들이 좋아했고, 고대 근동에 많이 알려져 있었다.(사무엘상 10장 5절, 역대상 13장 8절)
칼루(kalu)라는 연주자와 같은 전문 음악가가 구 바벨론의 마리 문서, 수메르의 우룩 문서 등에 자주 언급되고 있는데 이들은 아마도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레위 가문의 음악가와 북 이스라엘의 단과 벧엘의 신전 음악가의 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역대상 15장 20절을 보면 비파를 타며 섬기는 여덟 명의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다. 타악기
1) 방울(히 mesilla : Bells : 鍾)
주로 옷에 부착되어 장신구나 호부와 같은 역할을 하였고 주로 대제사장들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몸에 부착하였으며 서로 부딪쳐 소리를 냈다.(출애굽기 28장 33절)
2) 제금(히 selselim or mesiltayim : Cymbals : 提琴)
국악기의 바라와 같은 것으로 크기는 바라보다 조금 작은데 주로 제사장들에 의하여 사용되었는데 모든 제의 중에 사용된 것으로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크고 높은 소리 나는 제금은 시편 150편에서 한 번 쓰이는데 마치 심벌즈와 같은 소리를 내었는데 음악적인 기능이 충분하였다.(에스라 3장 10절, 시편 150장 5절)
역대상 15장 19절을 보면 놋 제금을 치는 헤만, 아삽, 에단 등 세 명을 소개하고 있다.
3) 양금(sistrum : 洋琴)
이스라엘 고유 악기가 아니고 동부 지중해의 악기였다. 다니엘서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보편적인 악기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흔들어서 소리를 내는 악기로 모양은 유아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처럼 생겼으며 기쁨이나 극도의 슬픔을 표현하는 악기였다. 이상은 특수 악기로 악기 자체의 물질이 소리를 내는 악기였다.(사무엘하 6장 5절, 다니엘 3장 5절, 7절, 10절, 15절)
4) 소고(Timbrel : 小鼓)
특수 악기와는 달리 손으로 두드려서 진동하는 피막에 의해 소리를 내는 대표적 가죽악기로서 탬버린과 유사하며 속에 청동 조각이 들어 있어서 흔들면 소리가 났다. 소고는 대표적 여성용 악기로 구약성경에서 15회나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소고는 상당히 대중적인 악기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성전 제의에서는 제외되었다.(출애굽기 15장 20절, 사무엘상 10장 5절)
성경에 나오는 악기들이 이상과 같이 이렇게 다양하다. 그러므로 찬양할 때 모든 악기사용이 가능하다. 그러나 모든 악기가 가능하다 하여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이 보았을 때 납득이 되지 않아 시험에 들도록 악기가 구성이 된다면 사용을 금하는 것이 좋다. 복음송의 범위에서 밝힌 성경구절을 여기서도 적용함이 바람직하다.
예를 들면 지나치게 굉음을 울리는 악기라든지 연주기법이 Rock'n roll을 추구한다면 마땅히 사용을 못하도록 함이 바른 태도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연주기법은 자칫하면 초 신자들에게 자신들이 회심하기 전의 생활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도록 하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마음의 바탕에서 하는 연주기법은 음악(音樂)이 아니라 음악(音惡)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VI. 찬양의 실제
1. 발성의 개념과 기능
예배음악 중 사람의 목소리로 부르는 찬양은 가장 원초적이며 아름다운 음악이다. 따라서 발성에 관한 개념을 알고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발성의 원리를 알아야 하는 성악은 음악의 모든 음악장르의 기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발성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성대라는 것을 주셨다. 그 이유는 그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이 후 인간은 이 성대를 원리 삼아 많은 악기를 고안해 만들었다.
그러면 성대란 무엇이며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성대란 소리를 내는 몸의 기관이다. 사람의 성대는 좌우 근육으로 구성된 리이드(Reed)가 이를 둘러싸고 있는 부속 기관인 상후두강, 가 성대, 몰가니씨강, 후두실, 성대, 기관 등의 보조에 의해서 폐장으로부터 분출되는 공기를 받아 진동함으로써 발성 작용을 한다.
성대의 위치는 후두의 중심부이고, 좌우에 반월상의 돌기물로써 구성되어 있으며, 그 좌우의 리드가 합쳐진 곳이 발성 근에 의해서 자유롭게 개폐되어 진동을 조절하여 여러 가지 음색을 만들어 내는 성문이다. 진 성대는 양쪽이 갈라져 있어서 그 사이로 호흡이 왕래하면서 소리를 낸다. 성문이 열리고 발성할 때는 양쪽 성대가 붙어서 떨게 된다. 성대의 크기는 변성기를 지나면서 남자와 여자의 길이가 달라진다. 보통의 여자의 성대는 12-13세 이전에 급격히 성장하고, 남자의 것은 13세 이후에 변성기를 맞아 빨리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성장한 성대는 여자가 훨씬 빨리 정착하고, 남자는 보통 18세에 자리를 잡게 된다. 그래서 여자도 마찬가지이지만 남자의 성악훈련은 변성기에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을 기준으로 할 때 평균적으로 남자는 1.26센티미터이고, 여자는 0.95센티미터이다. 따라서 남자의 소리가 여자의 소리보다 한 옥타브(octave) 낮을 정도로 차이가 있다. 같은 남자나 여자라도 조금씩 길이가 차이가 있는데 성대가 긴 사람은 피치(pitch)가 낮고 짧은 사람은 높은 편이다. 이처럼 성악이란 성대라는 악기와 복식 호흡과 공명체인 우리 몸이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내는 예술의 한 분야이다.
그리고 성악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로써 말을 하며, 시도 쓰고, 노래도 하는데 결국 “말을 하는 것이 곧 성악이다”라고 얘기할 수 있다.
따라서 성대를 먼저 이해하고 다음에 말을 이해하고 마지막에 노래를 이해하는 것이 순서인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성대를 그토록 작게 만드셨을까?
그것은 성대를 무리해서 사용하지 말고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아름답게 찬양하라는 뜻에서 그렇게 창조하셨을 것이다. 성대의 크기 이토록 작기는 하지만 그 주변에 성대의 떨림을 도와주고 그 울림을 확장시켜 주는 부속 강들이 있다. 성대 바로 위에 모르가니이씨강, 인두강, 후두강 등이 있다. 사람이 목을 많이 사용하거나 감기에 걸려 후두가 부었을 때 이런 부분들이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말이나 노래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일단 노래가 시작되면 호흡이 기관지를 거쳐서 이 부분에 먼저 도착하는데 이러한 부속강들이 일차적으로 공명을 일으키고, 발성하는 방법에 따라 열리는 모양이 다르게 성대의 문이 열린다. 이 때 성대는 열고, 닫고, 긴장하고, 이완하는 작용들이 신비스러울 정도로 묘하게 움직인다. 그런데 소리가 거칠다든지, 감기로 인해 기침을 하는 상태이면 소리가 성대를 치고 올라올 때 성문이 자연스럽게 열리지 않고 반만 열리는 극도로 수동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원하는 감정이 실린 소리의 양과 호흡이 일치할 때는 성문은 적당히 열리고 떨린다. 이처럼 성대는 능동적이지 않고 호흡에 의해 수동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성대를 자연스럽게 떨게 하고 싶으면 그 노래에 대한 감정과 감각에 맞는 적당한 호흡이 있어야 자연스러운 소리가 재생된다.
2. 발성법
가. 소리는 언제나 입술 앞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하나의 음정에 한 음절을 붙여서 노래할 때 그 소리를 정확하게 내는 것을 어택(Attack)한다고 한다. 소리는 쉽게 말해서 좋은 어택의 소리를 들으면 마치 소리가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고 부드럽게 바로 그 사람 앞에서 울린다. 우리가 흔히 “소리가 참 아름답고 좋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는 우리 귀로 자연스럽게 들어와 정서적인 감흥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반면에 나쁜 어택의 소리를 들을 때에는 목이 막히고, 긴장되고, 좁아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 이유는 단지 청각적인 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사람의 근 감각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노래하면서 괜스레 헛기침을 하면 그 노래를 듣는 사람의 인후부도 편안하지 않는 경우이다. 아무튼 좋은 발성이든 나쁜 발성이든 간에 소리라는 것은 모두 성대의 작용에서 만들어지고 그 소리는 여러 공명 기관을 통해서 울려지는 것이므로 어택이라고 하는 것이 과학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가 노래할 때 반드시 한 가지만 염두에 둘 필요성이 있다. 그것은 입술 앞쪽으로 생각의 초점을 맞추어 소리를 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소리를 내면 그 소리가 강할 때 성대와 후두 인후의 공간이 넓게 유지되고 그 공명이 자유로워지면서 아름다운 소리가 나게 된다. 다시 말해서 그 생각과 소리를 창조해내려는 신체적인 반응이 함께 조화를 이룰 때 큰 성취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 소리는 아름다운 색깔이 있어야 한다.
좋은 발성은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있는 소리인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소리의 색깔(Timbre)이 뚜렷해야 한다는 것이다. 색깔이 없으면 깊은 소리가 나지 않고 아주 얇고 빈약한 소리가 나게 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소리가 나되, 뚜렷하고 강력한 색깔이 나야 음정도 좋고, 공명도 아름답게 울리며 작용하게 된다.
다. 목은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한다.
색깔이 뚜렷해야 한다고 해서 목을 눌러서 닫힌 소리는 좋은 발성이 아니다. 좋은 발성은 목의 어느 부분에서도 방해를 받지 않고 부드럽게 나오는 발성이다. 이 말은 목이 시원하게 열려 있다는 증거이다. 다시 말해서 어택의 훈련이 잘 되어 있다면 목의 느낌 역시 잘 열려서 소리가 잘 날 것이라는 결론이다.
라. 소리를 잘 유지해야 한다.
우리가 노래할 때 한 박자를 끌든 다섯 박자를 끌든 그 소리는 한결같이 같은 색깔의 소리를 유지해야 한다. 또는 한 곡을 부르든 열곡을 부르든 역시 같은 색깔의 소리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려면 노래하는 사람은 우선 자신의 소리 색깔을 알고 있어야 하고 지금 부르고 있는 노래의 색깔에 대한 인식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서 앞서 언급한 소리의 색깔을 유지하려는 생각의 에너지와 그에 따른 신체적인 반응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 보통 사람은 한 악구를 노래할 때 숨이 빠지기 시작하는 때부터 몸의 증세가 나타나는데 바로 그 곳이 바로 배꼽 아래다. 이 때 사람은 소리의 색깔을 유지하기 위해 그 곳에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는 것을 억제하고 그 증세가 나타나는 곳을 오로지 생각만 해야 한다. 그 생각이 아랫배에 들어가는 불필요한 힘을 릴랙스(Relax)시키고 자연스러운 에너지(Energy)로 전환시켜 노래의 색깔을 유지시킨다. 유명한 성악가이자 대표적인 교사인 ‘란뻬르띠(Ranperti)’는 “소리는 성대나 인후부의 근육으로 유지하면 안 되고 오직 흉부의 호흡을 통제하는 근육으로 유지하여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목에는 긴장감을 주지 않으면서 소리 자체는 입술 밖으로 빼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마. 소리를 호흡에 실어서 불러야 한다.
좋은 발성을 가진 성악가는 마치 소리가 성악가로부터 떨어져 나와 허공에서 울려지는 것처럼 부른다. 이것은 노래하는 사람의 몸, 어느 부분에서도 제약을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입술 밖으로 소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것은 너무 감각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다소 이해하기 어렵고 설명도 쉽지 않다. 그래서 쉽게 얘기한다면 발성에 있어 가장 이상적인 노래는 소리가 노래하는 사람의 몸에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소리가 노래하는 사람의 숨에 둥둥 떠서 노래하는 사람이 자리 잡고 있는 공간을 꽉 메우면서 울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 정말 아름답게 들리게 된다. 이것이 가장 깨끗하고 완벽한 소리라고 말할 수 있다.
3. 발성의 기능적 측면
서서든 앉아서든 혹은 움직이면서 노래하든 “나는 성악가이다”라는 생각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 서서 노래할 때는 상식적으로 아는 바와 같이 양쪽의 다리를 어깨넓이 만큼 벌리고 편한 쪽 다리에 무게 중심을 두고 배꼽 아래(골반) 부분이 살짝 당겨지도록 한다. 척추는 언제나 펴져 있어야 하고 턱의 위치나 상태는 자연스러운 모습이 좋다. 턱은 시선을 따라 다녀야 한다. 앉아서 노래할 때는 의자에 등을 반드시 떼고 척추를 곧게 펴고 아랫배를 받친다는 생각으로 노래하면 된다. 움직이면서 노래할 때는 걷고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 배꼽 아래에 중심을 두고 흔들림 없이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
4. 성대 사용법(Vocal-chord Method)
오랫동안 싱싱한 성대를 유지하려면 성대를 올바로 사용하는 법과 피해야 할 행동과 음식이 있다. 이것을 잘 이해하고 지키려고 노력한다면 나이를 초월하여 아름다운 목소리를 유지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 이야기를 할 때 가까운 거리와 조용한 장소에서만 이야기하고, 가능한 한 편안하고, 천천히 하되, 짧은 시간 동안 말한다.
나. 속삭이는 소리보다 다소 소리내기가 힘들어도 본래의 음성 높이로 말해야 한다.
다. 넓거나 시끄러운 곳에서는 손짓을 하거나 반드시 마이크를 사용한다.
라. 목이 차거나 건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추울 때는 머플러나 마스크를 사용하고, 생수를 하루 1.5 리터 정도(머그잔으로 8 잔 이상)의 충분한 수분을 섭취해야 한다.
마. 충분한 휴식과 잠을 취하되, 잠들기 3시간 전부터는 음식물을 먹어서는 안 된다.
바. 목에 힘을 주면서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그냥 울부짖어서도 안 되고, 흥분이나 운동을 하면서 소리를 질러서도 안 된다.
사. 혼탁한 공기가 존재하는 환경이나, 시끄러운 곳에서 말을 하거나, 평소 빠르게 말하거나, 피곤할 때 말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아. 극단적으로 높은 소리나 낮은 소리를 낸다든가 이상한 남의 목소리를 흉내 내서는 안 된다.
자. 헛기침이나 감기나 후두염에 걸렸을 때는 되도록 노래는 물론 말을 해도 안 된다.
차. 평소에 너무 긴장하거나 잦은 부부관계를 해서도 안 된다.
카. 힘을 주어서 대변하거나 무거운 물건을 나르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타. 복부를 압박하는 꽉 끼는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
파. 너무 맵거나, 짜거나, 뜨겁거나, 찬 음식을 피하고, 기름기 많은 삼겹살, 튀김류, 땅콩이나 호두와 같은 건과류, 초콜렛, 케이크, 커피, 홍차, 녹차 등 카페인이 든 음료, 거품이 발생하는 청량음료, 알코올류, 담배 등을 피한다.
하. 지방이 적은 단백질 음식을 조금씩 자주 먹는다.
5. 복식호흡법
가. 척추를 곧게 세운다.
나. 어깨를 뒤로 젖히면서 아래로 떨어뜨린다.
다. 가슴을 높이 고정하되 안정시킨다.
라. 복부는 안쪽으로 당긴다.
마. 횡경막을 최대한 팽창 시킨다.
바. 골반과 둔부와 근육은 위로 당겨서 받쳐준다.
6. 선곡(Selection of Repertoire)
목적이 있는 일반집회와 달리 예배 때의 선곡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성가대는 되도록 찬양가를 불러야 한다.
가. 소절(Phase)과 가사가 잘 배합되면서 경건하고 은혜로운 곡을 선택해야 한다.
나. 자연스럽게 진행하면서 화성적(Harmonic)이고 대위법(Counterpoint)적인 곡을 선택해야 한다.
이것은 예술성과 경건성을 높여 줄 뿐만 아니라 독보력과 발성도 더 발전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다. 다이내믹(Dynamic)을 표현할 수 있는 곡을 택해야 한다.
라. 성가대원의 음역과 수준보다 조금 높은 곡을 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연습에의 적극적인 참여와 성취감을 고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너무 어렵거나 쉬운 곡을 피하는 것이 좋다.
마. 리듬과 속도와 조성과 형식의 변화가 있는 곡을 택하는 것이 좋다.
변화성 있는 곡은 단원들을 정서적, 음악적으로 긴장과 흥미를 유발할 수 있고, 회중들로 하여금 찬양에 집중하도록 하여 영성을 고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바. 단원들의 수준보다 조금 높은 곡을 택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그래야 단원들이 연습에 더 적극적이고 성취감도 크며, 회중이 더 많은 감동을 받기 때문이다.
사. 리듬이나 선율이 정확한 곡을 선택해야 한다.
아. A capella를 선택하는 것도 필요하다.
자. Voicing이 뛰어난 곡을 선택해야 한다.
차. 시대별, 작곡가별로 잘 고려해서 선택해야 한다.
6. 성가연습 십계명
가. 곡을 연습하기 전에 반드시 발성연습을 하라.
발성은 우리 몸이 운동하기 전에 워밍업(Warming-up)이 필요한 것과 같다. 긴장완화를 위한 목적의 목, 입술, 혀, 턱 운동과 호흡을 천천히 그리고 고르게 뱉는 복식호흡운동과 모음을 잘 내어 음색을 통일시키기 위한 입 모양 연습과 공명훈련을 위해 흐밍(Humming) 연습도 곁들인다.
나. 연습시간을 효과적으로 안배하라.
기도로 시작하여 발성연습을 하고, 적어도 세 곡 정도를 지휘자의 연습계획에 따라 연습하고, 송영, 기도, 축도송, 회중 찬송 등을 연습한 후 다음 주에 할 찬양 곡을 악상을 살려 완성한다.
다. 연습하고자 하는 곡을 때때로 테이프로 들려주어라.
라. 파트연습을 효율적으로 하라.
파트연습만 하면 지루하고, 그것을 소홀히 하면 자신감이 결여된다. 따라서 전체 곡은 몇 부분으로 끊어서 연습하고, 파트연습은 두 파트를 동시에 듀엣(Duet)으로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마. 입 모양과 얼굴 표정을 곡과 가사에 일치시켜라.
이것이 잘 되면 발음이 통일되고, 음색의 통일도 기대할 수 있다.
바. 유머감각을 소유하라.
기쁨과 웃음을 선사하여 연습시간이 즐거운 시간이 되어야 한다.
사. 친교시간을 반드시 가져라.
성가대가 잘 모이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연습 시간 중에 대원들끼리 자유스럽게 대화하며, 친교할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 휴식시간을 가져라.
연습 도중에 꼭 15분 남짓한 휴식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 때 간식을 제공하는 것이 여러 가지 면에서 좋다.
자. 수준 있는 곡을 선곡하라.
특별한 절기는 교회력을 맞추고 그 외에는 대원들의 수준보다 약간 높은 곡을 택하여 연습함으로써 연습에 적극 참여하는 준비된 찬양이 가능하다.
차. 주중 연습시간을 가져라.
3-4곡을 충분히 연습을 해 두어야 하나님께 준비된 찬양을 드릴 수 있다.
7. 예행연습 방법(Rehearsal Method)
가. 정시에 시작하고 끝냄으로써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나. 리허설은 사전에 계획한다.
다. 설명은 짧게 하고 충분한 노래 연습을 한다.
라. 시작을 다양하게 한다.
마. 반복 연습할 때는 그 이유를 설명한다.
바. 예비박자(Auftackt)를 대원들이 믿도록 해야 한다.
사. 예행연습 시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아. 곡의 처음과 끝은 충분히 연습한다.
자. 성가대원들이 노래하고 싶은 욕망을 갖도록 한다.
차. 성가대원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신뢰한다.
카. 지휘자는 지휘하면서 화음을 들어야 한다.
타. 틀린 부분을 기억했다가 지적하되 한번만 한다.
파. 지휘자가 멈출 때 대원들도 같이 멈추도록 가르친다.
하. 특정인이 아닌 전 성가대원에게 지시해야 한다.
거. 예행연습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악보를 제시하고 작품에 대한 설명을 한다.
2) 초견에 합창을 해 본다.
3) 제창(Unison)을 한다.
4) 파트 연습을 하되 반복을 거듭한다.
5) 악보 읽는 연습으로 곡을 익힌다.
6) 지휘자와 호흡을 일치시키는 연습을 한다.
VII. 나가는 말
지금까지 예배음악에 관한 제반문제를 다루어 보았다. 칼빈의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들은 대부분 시대의 변천에 따라 물밀듯이 들어오는 새로운 예배음악에 대한 아무런 대책이 없는 실정이다. 보수를 자처하면서 너무 예전적인 것을 부각시켜 이러한 새 노래에 대한 무관심과 배척으로 일관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어떤 원칙도 없이 무분별하게 외국의 교회의 예배형태를 그대로 모방하는 교회들도 있다. 이런 현실 가운데 처해 있는 예배음악에 관한 사항을 정리하지 않으면 자칫하면 그것 때문에 교회의 존폐마저도 위협받는 위기가 올지도 모른다. 그것은 음악을 이용한 사탄의 교묘한 전략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예배음악에 관해서는 열려진 마음이 우선 요구된다 하겠다. 새 노래로 지칭되고 취급되고 있는 예배음악에 대해서는 과감한 수용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 새 노래들이 예배음악으로 많이 보급되고 불리어져야 한다. 그러나 의와 진리의 거룩함에 따른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지정의에 악영향을 끼치는 예배음악은 가려내어 과감히 추방해야 한다. 아무리 시대는 변천해도 예배드리는 근본적인 태도와 마음은 변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음악을 빙자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음악을 교인들의 취향에 변경시키려는 자들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재의 교회음악은 정적(선율적)인 것보다 동적(리듬적)인 것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시편 68장 32절의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지어다”와 시편 104편 1절의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말씀처럼 우리 예배음악에 임하는 사람들의 생활이 항상 하나님께 찬송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선결되어야 한다. 우선, 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배음악 사역자들은 예배음악에 관한 것은 물론 신학적인 부분을 어느 정도 공부해 둬야 한다. 그래야 음악이 찬양이 되는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배양된다. 따라서 신학교 내에 예배음악에 관한 과목이 개설되어져야 한다. 반드시 필수과목으로 지정하여 목회자들에게 예배음악에 관한 이해를 증진시켜야만 한다.
다음은 목회자들도 예배음악에 관련된 사항들을 공부하여 깊이 이해가 되도록 알아야 한다. 필히 오늘날의 목회자들은 찬양과 음악적 소양과 기술을 연구할 필요성이 있다. 목회자의 음악에 관한 몰이해는 예배음악 사역자를 함부로 다루거나 또는 지나치게 예배음악에 개입하여 그 분야까지도 총괄 감독하려는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예배음악을 충분히 이해하고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이렇게 되면 목회자 스스로 예배음악의 제반사항에 대해 지나친 간섭을 스스로 배제할 수 있으며, 예배음악 사역자들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땅위에 존재하는 회중 모두와 예배음악 사역자들은 묵묵하게 끝까지 충성하리라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예배음악을 통해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경배해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고백해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역대상 29장 14절 b)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누가복음 17장 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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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음악
[출처] 예배음악 고찰|작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종
* 좋은 글 감사합니다. dhleepa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