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막 속에서 계책을 내어 천리 밖에서 승리를 결정하는 일에서는
내가 장량만 못하다"고 술회했다. 유방이 항우와 대결할 때 역이기라는
유학자가 진(秦)나라에게 멸망한 6국의 후손을 찾아 과거 영토에 책봉하는
계책을 냈고 유방은 이를 채택했다.
장량은 식사중인 유방을 찾아가 주군의 젓가락을 빼앗아 휘두르며
그 불가함을 간언하여 이 계획을 취소시켰다.
역이기의 계책을 실행했더라면 군사들이 뿔뿔이 흩어져
유방은 무졸지장이 되었을 것이다.
주군과 책사라는 왕조시대의 예이지만 현대의 지도자에게도
사심이 없고 유능한 책사가 있다면 통치의 성공이 보장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책사의 조건은 무엇인가.
우선 머리가 좋아야 한다. 세상에 머리 좋은 사람은 많다.
하지만 책사로서 성공한 인물이 많지 않은 것은 책사에게 다른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성공한 책사가 된 것은 주군이 성공했기 때문이고,
주군이 성공한 것은 그가 통치하는 국가가 성공했기 때문이다.
주군을 성공한 통치자로 만드는 것이 성공한 국가를 만드는 것이라면
책사에게는 주군에 대한 개인적 충성만 아니라 공의(公義)에 대한 헌신이 필요하다.
책사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사심과 야심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로 유랑하던 유비의 기반을 세우게 한 제갈량의 일생은
후세의 심금을 울리는 바 있다.
제갈량은 "한실을 부흥시킨 뒤 돌아오리라"라며 남양의 밭을 떠날 때와
촉한의 승상이 되었을 때의 마음가짐에 전혀 변함이 없었다.
장량은 천하가 통일된 후 신선이 되기 위해 현세의 명리를 떠났다.
진정한 책사는 '지위 지향적'이 아니고 '과업 지향적' 인물이며 현명한 주군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펼치는 것을 생의 목표로 삼는 사람이다.
일본 메이지유신의 책사 사카모토 로마(坂本龍馬)는
"나는 일본을 다시 태어나게 하고 싶었을 뿐 다시 태어난 일본에서 영달하고 싶지 않다"고
유신의 와중에서 말한 적이 있다.
한국 현대사에도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오원철이라는 책사가 있었다.
70년대 자주국방을 위한 방위산업 육성이 난관에 부딪혔을 때
"여하한 병기도 분해하면 부품이다"라는 아이디어로 박정희 대통령을 설득하여
방위산업 육성을 중화학공업화의 일환으로 추진하게 한 인물이다.
1970년대에 중화학공업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현재 한국이 선진국 문턱에 가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원철은 박 대통령 사후 신정부에서 벼슬하지 않고 은퇴해 버렸다.
이명박 정부의 문제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이것을 정책화시킬 수 있는 책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에 인재가 부족해서 그런가. 건국 60년간 각계에 많은 인재풀이 쌓여있는 것을 보면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정권을 창출하는데 필요한 인재와 정권을 안정시키는데 필요한 인재는 다르다. 현재 한국은 사회적으로 양극화 해소, 정치적으로 통합의 정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작년의 세계적 금융위기 이후 미국 유럽에서는 경제철학과 정책이 변화하고 있다.
그런데도 현 정부의 정책기조는 금융위기 이전이나 이후나 별로 변화가 없고
이것이 사회적 정치적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보수주의자였던 독일의 재상 비스마르크는 유럽 최초로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하여
독일 사회를 안정시켰다.
이러한 제도는 비스마르크의 철학에 맞지 않았지만 반대당파에 속한
라살이라는 인물의 충고를 받아들여 이 제도를 도입했던 것이다.
이것은 지도자가 기본적인 정치체제에 대한 철학 외에는 개인적 철학에 구애받지 않는
유연성을 가져야 함을 의미한다.
현재의 한국사회는 국론분열이 너무나 심각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도 높다.
이 시기에 이명박정부에 가장 필요한 것은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사심과 야심이 없이 국가를 위해 헌신할 책사의 존재이다.
세상에 천리마는 많지만 천리마를 알아보는 백락(伯樂)은 드물다고 한다.
지도자는 주변의 익숙한 사람들에게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백락의 밝은 눈으로 천리마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