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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여름수련회 특강
율법과 복음
- 율법도 복음이다 -
들어가는 말
‘율법과 복음’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교인들이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한 문제로 생각한다.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복음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가 형성된 것은 세대주의적 성경 해석의 영향이 이유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세대주의는 하나님의 세계 통치에는 현저하게 다른 세대가 있다는 신념에 근거한 일종의 성경 해석 체계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영국에서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1800-1882)에 의해 시작되고 스코필드 주석 성경이 널리 보급되면서 일반화되어 미국과 우리나라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이른바 구약 시대의 4천 년, 신약 시대의 2천 년, 천국 왕국을 더하여 7천 년으로 하여 하나님의 섭리가 완성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무죄 세대(에덴에서 타락 이전까지), 양심 세대(타락에서 홍수까지), 인간 정부 세대(노아에서 바벨탑까지), 약속 세대(아브라함에서 애굽까지), 율법 세대(모세에서 세례 요한까지), 은혜 세대(교회 시대), 왕국 세대(천년왕국)의 7세대로 구분한다.
여기에 근거해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하시는 방법(경륜)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구원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 세대주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을 지키면 구원받을 수 있었고, 노아는 방주를 짓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었고, 모세에게 율법이 주어진 이후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오순절부터 휴거 때까지의 교회 시대는 그리스도의 피의 속죄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휴거부터 재림까지의 7년 대환난 기간에는 믿고 끝까지 견디는 자들이 구원받으며, 천년왕국 세대에서는 산상설교의 내용을 그대로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 이처럼 ‘세대’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에 있어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방식이 달라지는 시기라고 설명한다.
세대주의의 본질과 특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한다. 성경의 역사적 내용을 문자적으로만 취급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덧붙여 예언 해석에 있어서 미래적 해석 방법을 취하다 보니 성경에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언이 있고 그것을 다양하게 변하는 국제정세에 적용하여 현실적으로 끼워 맞추려고 시도하면서 시한부적인 종말론을 양산하기도 한다. 여기서 야기되는 문제는 성화를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 때문에 자연스럽게 복음을 윤리, 도덕적 차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간의 율법관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성장이라는 조급증 때문에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을 많이 모으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교회이고 복음이 왕성하게 전해졌다는 당위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복음을 윤리 도적적 덕목으로 변개하였고, 기적을 바라고 이루는 것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신비의 책이 성경이라고 강조함으로 복음을 버렸다. 아니 애초에 복음이라는 것을 몰랐기에 윤리 도덕적인 우리의 행위가 믿음의 삶이라 단정지었고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열광하며 그것으로 물질적인 부를 쌓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렇게 한국교회는 기업이 되었다.
사실 이 모든 것이 죄의 권세 아래 매여 있는 상태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인간이 종교를 가진다는 것은 자기 구원에만 관심을 가진 결과이다. 인간의 탐욕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라는 명제를 만들었다. 하나님께 정성을 바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규칙과 명령을 지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것이 종교성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종교는 자기 행위로 의를 나타내서 하나님께 상달되고자 한다. 이런 점에서 모든 종교의 출발은 인간, 곧 자기 자신이고 목표는 하나님이다.
이런 죄인이기에 교회를 찾아도 그 심성은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교회에 나와서 자기 듣고 싶은 말을 해 주기 원한다. 거기에 발맞춘 교회들이 나를 위한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라고 규정해 버렸다. 그러면서 교회가 줄 수 있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무엇을 ‘하라!’ 혹은 ‘하지 말라!’라는 식으로 규범을 주면 되기 때문이다. 규칙 준수의 명분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지만 결국은 자기 사랑이다. 성경을 보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를 하고 헌금을 하여도 모든 것이 자기 사랑을 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스스로 자기 율법을 가지고 행동하는 존재이기에 죄인이라고 한다.
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2-15)
영생을 얻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든지 아니면 율법을 완전하게 이루신 것을 나의 것으로 만들어 주시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완전하게 지킬 수 없는 죄의 권세 아래 있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교회를 다니는 많은 사람이 우리가 다 지킬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십계명이라고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전한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 2:10)
율법은 여러 조항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의 말씀으로 주셨다. 그러기에 하나를 범하면 모두를 범한 것이 된다. 우리를 죄인으로 규정하는 율법이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이 바울 사도의 선언이다.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
결국 인간이 자기 행위로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죄악이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행위가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8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9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10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11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13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막 7:8-13)
구약에서 ‘토라’(헬, ‘노모스’)는 우리 성경에서 주로 ‘율법, 법’이라고 번역되고 ‘훅카’(헬, ‘디카이오마’)는 ‘율례, 규례’로, ‘미츠와’(헬 ‘엔톨레’)는 ‘계명’으로 번역되나 이 모든 것을 ‘다바르’, 즉 ‘말씀’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이런 용어들에 대한 정의는 하지 않겠다. 다만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하고 정리하고자 한다.
율법의 목적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5-6)
우리 성경에는 “잘 듣고”라고 번역하였는데 히브리어로 ‘샤마 샤마’로 강조한 표현인데 ‘듣다, 경청하다, 순종하다’라는 뜻이다. 즉 듣는 것이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특별히 행위로 무엇을 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건져내셨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으로 순종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것을 율법으로 확인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확인한다는 것인가? 출애굽은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들이 확인해야 하는 것은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이다.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은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으로 언약을 성취하심으로 새 언약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14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1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7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1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9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14-20)
결국 율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복음과 대립되거나 차이나는 다른 이론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십자가에 죽음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에서 약속으로 주신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선언한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1-4)
율법은 복음이다. 즉 구약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율법을 주셔서 행위로 지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이라는 것을 통해 복음을 나타내신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전한 것이 복음이었다고 말씀한다.
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히 4:1-2)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갈 3:8)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전하였는데 결국 율법도 하나님께서 그대로 지키지 않으면 무조건 심판하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언약으로 어떻게 이끌고 계시는가를 보여 주신 은혜이다.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0-21)
율법의 기능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갈 3:16-18)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율법의 기능은 죄를 폭로하고 깨달아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갈 3:21-22)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19-2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3-29)
율법이 우리를 죄 아래 가두었다는 것은 도무지 지켜 행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하셨다는 뜻이다. 죄의 권세에 갇혀 있기에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 주심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율법을 통해 죄를 알면 그 완전한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율법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도 인도하는 초등교사라고 한다.
이때 “초등교사”란 말의 헬라어 ‘파이다고고스’는 ‘파이’(어린아이)와 ‘아고’(인도하다)에서 유래한 단어로 ‘아이를 책임진 사람, 관리자, 가정교사’라는 뜻으로 주로 어린아이가 학교에 오고 갈 때 인도하며 행동 일체를 살펴 반드시 그 일을 수행하는 노예를 지칭하였다. 그러므로 율법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기능을 한다. 율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율법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율법의 완성
예수님은 산상강론에서 하나님 왕국의 복에 대해 선포하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여기서 “폐하러”라는 말의 ‘카탈뤼오’는 ‘파괴하다, 부수다, 폐지하다’라는 뜻이고, “완전하게”라는 말의 ‘플레로오’는 ‘채우다, 충만하다, 충족시키다, 완성하다, 이행하다, 성취하다’라는 뜻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을 파괴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진리로 충만하게 하시고 온전히 성취하기 위해 오셨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고(창 1:28-29, 네 강의 기원으로 보여 주셨던 창조 언약대로(창 2:10-14) 진리로 충만하게 이루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선언하셨다. 온전히 다 성취하신 것이 십자가 죽음이고 십자가 죽음은 율법의 완성이고 율법의 완성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가 죄인의 상태에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라고 선언하였던 것이다(롬 5:8).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성경에서 “이웃”은 언제나 단수로 이 땅에 자비(헬라어 ‘엘레오스’는 ‘불쌍히 여김, 자비, 사랑, 은혜’라는 뜻으로 주로 구약의 ‘헤세드’의 역어로 쓰인 단어이다)를 베풀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눅 10:30-37). 이런 점에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8-10)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다 보니 구약의 율법은 완성되었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 계명을 행위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많다. 죄인들의 심성이 이러하다. 새 계명이라고 하시니 그것을 또 율법으로 붙잡는 것이다. 요한 사도는 후에 요한일서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밝힌다.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요일 2:7-8)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애초에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기에 사랑을 행할 능력조차도 없었다. 사랑이 없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로 찾아오셨고 십자가 죽음을 이루셨는데 성경을 그것을 사랑이라고 한다.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41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 5:39-42)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것은 결국 의를 이루는 마침이시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9)
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1-4)
신약에서는 구약의 ‘샤마’를 주로 ‘테레오’로 사용하였다. ‘테레오’는 ‘지키다, 안으로 간직하다, 마음에 품고 새기다’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계명들을 지키라”(마 19:17)라고 하셨지만 부자 청년은 “이 모든 것을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마 19:20)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테레오’였고 부자 청년이 말한 것은 ‘퓔랏소’였다. ‘퓔랏소’는 ‘피오’(꺼내어 놓다, 만들어 내다, 밖으로 보여 주다)에서 온 말인데 부자 청년이 ‘지켰다’라고 한 것은 행위로 꺼내서 밖으로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었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아니 믿어졌다는 것은 십자가 사랑이 주어진 것을 두고 말씀한 것이다. 십자가 사랑이 주어졌다는 것은 이제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랑은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함께 날마다 십자가에 죽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죽음이 이루어지고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입은 자는 율법을 완성하신 사랑 안에 거하는 자이다.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표로 십자가 죽음에 순종하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입히심으로 우리가 율법을 완전히 다 지킨 존재가 된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함께 십자가에 죽음으로 율법의 완성 안에 함께 죽고 사는 것으로 생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의 성령에 의해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마음에 품고 새겨진 상태가 된 것이다. 그를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라고 한다.
문답 형식의 정리
1. 왜 율법 시대와 은혜 시대로 나누어서 보면 안 되는가?
율법과 은혜는 나누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언약으로 말씀하셨다. 그래서 선악의 지식 나무를 통해 ‘하라와 하지 말라’라는 것으로 율법을 이미 주셨었다(이것 때문에 개혁주의 교회 내에서도 ‘행위 언약’으로 규정하나 하나님의 모든 언약은 ‘은혜 언약’이다). 하나님은 그것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가는 언약을 보여 주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은 모두 은혜 언약이다. 언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셨기에 언약 곧 율법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율법 시대, 은혜 시대로 구분되어야 이유가 없고 또한 하나님은 다르게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일관되게 은혜로 일하셨다. 창조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었고(골 1:15-1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기 때문이다(히 13:8)
2. 구원을 얻는 것은 믿음이지만 믿음 생활할 때 즉 성화의 과정에서는 율법이 필요한 것 아닌가?
성화의 과정에서 율법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믿음으로 구원 얻었다는 자가 방종할 수 있는 우려 때문에 율법으로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론에 불과하다. 성도가 구원을 얻는 믿음은 나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다(롬 3:21, 갈 2:16, 2:20, 3:22, 빌 3:9). 믿음의 출처와 소유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또한 성경이 말씀하는 성화는 단번에 거룩함이다(고전 1:2, 6:11, 딤후 1:9, 히 10:10-14, 12:10).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있는 것이 거룩이다. 구원에는 단계가 없다. 믿음 생활을 한다는 것은 성화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상태가 곧 거룩의 상태이다. 성도에게는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찾아오셔서 말씀으로 이끌어 십자가의 길로 가게 만드시는 은혜만 있다.
3. 율법은 의식법, 시민법, 도덕법으로 나누어 본다고 하는데 이런 측면에서 도덕법이라고 분류되는 십계명은 오늘날도 여전히 지켜야 할 법이 아닌가?
복음 안에는 윤리, 도덕이라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나올만한 선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율법을 의식법(제사법), 시민법(사회법), 도덕법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성경적이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 완성은 어떤 부분은 성취되었고 어떤 부분은 성취되지 않았으므로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구분을 성경 어디에서도 하고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완전한 말씀으로 주신 것이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십계명’인데 번역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말이지 ‘십계명’이라는 말 자체가 성경에 없다. 십계명이 아닌 ‘열 말씀’, 즉 열이라는 완전한 말씀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출 34:27-28). 계명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것이 됨으로 우리가 행위로 율법을 지키려고 한다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원수가 된다(빌 3:18).
4.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서의 말씀대로 보자면 율법이 여전히 필요함으로 산상수훈 같은 말씀은 지금도 실천해야 할 덕목 아닌가?
야고보서에서 말씀하는 행함은 윤리, 도덕이 아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었다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행함은 믿음과 같은 것이고 믿음은 우리의 믿음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다. 그러므로 야고보서의 행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행하시는 믿음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라고 선언하였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이다. 이런 점에서 산상수훈(산상강론)은 예수님께서 산에서 율법의 본질을 밝혀주시고 산에서 내려와 십자가를 향하셨다. 즉 십자가 죽음으로 산상강론의 모든 말씀을 온전히 성취하신다는 것을 나타내신 것이다. 결국 산상강론은 우리가 실천해야 할 덕목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이루신다는 것이 핵심이다.
5. 구약의 율법은 완성되었지만 신약의 명령, 예컨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무시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날도 여전히 지켜야 하는 것 아닌가?
성경의 명령법들은 우리가 직접 ‘하라’ 혹은 ‘하지 말라’는 명령으로 주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죄인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할 수 없는 자에게 하라는 명령은 잔인한 것이고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죽음과 같은 것이다. 율법을 행하여 보니 도무지 완벽하게 행할 수는 죽은 존재라는 것이 죄인의 고백이어야 한다. 율법 아래 죽은 자가 되어 율법을 온전히 성취할 분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명령은 하나님께서 행하신다는 약속이다. 그것을 십자가로 이루신 것이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한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새 계명이라는 ‘사랑’은 우리에게 없는 것으로(요 5:4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요일 4:10).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라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죽음에 넘겨준 은혜로 우리에게 사랑이 주어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6. 성도는 믿는 자로서 세상에서 믿지 않는 자와 구별되고 차이가 나야 한다는 측면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바른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바르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죄성이다. 이 죄성으로 인하여 인간은 스스로 율법이란는 규범을 만들어 그 안에 자신을 가두어 목표를 이루려고 하는 것이다. 남들보다 더 나은 인간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목표점에 도달함으로 성실한 인간이고 대단한 존재임을 나타내고 싶은 것이 죄인의 욕망이다. 그래서 자신의 성공을 위해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이며 물질주의적인 삶을 세상에서 바르게 사는 것으로 규정짓고 싶어 한다. 거기에 종교적으로 주일성수하고 십일조하고 열심히 봉사하는 것을 더하면 수준 높은 삶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의 문제점은 신앙생활을 죄인의 생각으로 고정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 사람들과의 구별의 양태를 우리 스스로 정해 놓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자기 원칙을 정해 놓았는데 그것은 윤리 도덕적인 것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문제이다. 세상에서 구별된 존재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구별된 정체성을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말씀으로 이끌고 계시는 것으로 확인해야 하는데 그것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는 것으로 확인되는 것이다(마 16;24, 눅 9;23).
7. 율법이 완성되고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면 율법은 폐기해야 되고 구약은 더 이상 볼 필요가 없는 것인가?
흔히 아파트를 분양받기 위해 모델하우스를 보고 계약하는데 집이 다 지어지면 모델하우스는 파괴해 버린다는 예를 들면서 구약은 모델하우스와 같고 신약은 실제의 집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구약은 거의 필요 없는 책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율법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고 설명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율법을 주셔서 인간은 행위로 다 이룰 수 없는 죄인임을 철저히 폭로하신 것이다. 따라서 율법이 주어진 상태에 있는 존재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허락하시면 율법 안에서 보여 주시는 메시아를 기대하고 언약의 실체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러기 때문에 율법도 복음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구약은 지금도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말씀으로 이해하게 된다(요 5:39, 롬 1:1-4). 구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그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으로 풍성하다.
8. 교회의 권위와 질서 유지, 체계를 위한 법이 필요한 것인데 그런 것이 없다면 자유라는 명목으로 방종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법으로 강제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 아닌가?
성경에서 말씀하는 교회의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이다(엡 1:22-23, 골 1:18). 교회가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함께 죽고 살아난 자이다. 예수님께서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건물에 교회라는 간판을 걸고 사람이 모였다고 해서 교회라고 할 수 없다.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함께 죽고 살아난 자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을 율법으로 가르치고 통제하여 목사의 말을 잘 들으면 믿음이 있는 것이라고 우리는 착각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믿음 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착하게 사는 것으로 교회인척하는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많이 모였다고 할지라도 십자가와 상관없는 자들이 모였다면 그 모임은 교회라고 할 수 없다. 교회는 날마다 선포되는 말씀 속에서 날마다 죽고 새롭게 살아난 자들이기에 법으로 통제하고 강제하여야 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날마다 자기 부인과 십자가 죽음이 이루어지는 자에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만 확인하게 된다.
9.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면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율법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은혜’라는 말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한 결과이다. ‘은혜’란 자격 없는 자에게 거저 주신 생명이다. 그렇다면 은혜를 보답하려는 마음 자체가 우리의 죄악임을 알아야 한다.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 17:24-25).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7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4-8).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20240824-25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