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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사상>, 2023년 봄호
<푸른사상>, 2023년 봄호
【김현경의 회고담 17】
김수영 시 읽기 (7)
일시 : 2022년 11월 4일. 2023년 3월 2~3일.
장소 : 경기도 용인 자택
맹문재 : 오늘 읽어볼 작품은 「하…… 그림자 없다」에요. 『새벽』 1960년 6월호에 발표했는데, 제가 좋아하는 작품이에요. 이 작품에는 “적”이 많이 나오는데, 김수영 시인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요?
김현경 : ‘여편네’도 되고, 전체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여요. 나를 통해 세상을 본 것이지요.
맹문재 : 말씀을 들으니 김수영 시인이 「만용에게」에서 속물적 태도를 보이는 ‘여편네’를 비판한 것과 같다고 여겨지네요. 이 작품에 등장하는 영화배우 “커크 더글러스”나 “리처드 위드마크”가 출연한 영화를 보신 적이 있는지요?
김현경 : 물론 보았지요. <연산군>, <길>, <25시> 등 많이 봤어요. “커크 더글러스”는 <건 힐의 결투> 등 서부극에 많이 나온 배우예요. 김 시인은 서부극을 좋아하지는 않았는데, 우리 작은아들 김우가 아주 좋아했어요. 그 아이와 함께 극장에 가기도 했어요. 아이는 극장에 가면 출연한 배우들이 어느 영화에 나오는지 다 알 정도로 똑똑했어요. “리처드 위드마크”는 서부극뿐만 아니라 애정 영화에도 출연했어요. 영화는 김 시인과 함께 종로3가에 있는 단성사를 비롯해 수도극장, 명보극장, 중앙극장 등에 가서 보았어요. 정해 놓고 가는 영화관은 없었고, 영화를 따라 극장에 갔어요. 중앙극장에서 좋은 영화를 많이 상영했어요. 영화를 보고 나와서 짜장면이라도 먹게 되면 호강하는 날이었지요. 감동적인 영화를 본 날은 집에 돌아와 김 시인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어요.
맹문재 : 어느 분이 먼저 영화를 보자고 하셨는지요?
김현경 : 당연히 내가 했지요. 나는 라디오를 매일 듣고 있었고, 신문이나 잡지 등에서도 영화 정보를 많이 챙길 수 있었지요.
맹문재 : “하…… 그림자가 없다”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민주주의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라고 했어요.
김현경 :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적과 싸우자는 것이지요. 물러서지 않고 싸워야 한다고 여긴 것이지요.
맹문재 : 다음으로 읽어볼 작품이 「기도― 4․19 순국학도위령제에 부치는 노래」에요. 이 작품은 발표 지면이 없고, 부제를 보면 행사를 위해 쓴 것으로 보이네요. 창작 날짜는 1960년 5월 18일로 적혀 있네요. 김수영 시인이 위령제에 참석해서 낭송한 작품인지요?
김현경 : 서울운동장에서 4․19 순국학도위령제가 열렸어요. 김 시인이 그에 맞추어 쓴 작품이에요. 김 시인이 위령제에 참석해서 낭송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맹문재 : 제가 ‘e영상역사관’에서 찾아보니 5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4․19 순국학도위령제가 거행되었네요. 유가족과 학도들이 참석했고, 46위 위패가 영정과 함께 안치되어 불교식으로 제사를 올렸네요. 정오에 전 국민이 묵념을 통해 순국 학도들의 명복을 빌었어요. 학생 대표의 조사를 들으며 유가족과 학생들이 애도하는 모습이 참으로 슬프네요. 공보실 중앙공보관에서 4․19 당시 학생들의 의거 상황을 찍은 사진 전시회며, 서울교향악단과 동아일보가 공동 주최한 4․19기념 연주회도 열렸네요. 4월 19일 혁명이 일어났을 때 김수영 시인은 어떤 자세를 보였는지요?
김현경 : 보통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어요. 내가 그날 둘째 아이를 업고 계란을 가지고 반찬가게에 갔다가 김 시인이 버스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어요. 지금 푸른사상사 서울사무소가 있는 한국출판콘텐츠센터 그 앞이 버스 종점이었어요. 광장이었고, 오거리였어요. 김 시인이 흥분해서 막 떠들었어요. 학생들이 일어나 이승만 정권이 끝났다 등으로 말하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어요. 버스 종점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았는데, 좋아하는 표정들이 아니었어요. 어떤 아줌마가 김 시인을 흘겨보았어요. 그래서 겁나서 여기서 떠들면 어떻게 하느냐고 내가 말렸어요. 그래도 김 시인은 대단한 일이 일어났다고, 우리나라가 달라졌다고 야단이었어요.
맹문재 : 그때의 상황이 눈에 선하네요. 그러면 4월 19일부터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발표한 날까지 김수영 시인이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네요.
김현경 : 매일 시내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왔어요. 명동에 나가 정보도 듣고 했지요. 학생들 시위에 참석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참석했을 것도 같네요. 문인들이 술집에서 만세를 불렀다고 했어요. 그때만 해도 당당하게 떠들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발표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잘못 말하면 빨갱이로 몰릴 수 있었어요. 그래서 기뻐하면서도 두려움이 있었어요.
맹문재 : 이 작품은 다음의 구절로 시작하고 또 마무리하고 있어요. 주제로도 읽히네요.
시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연인을 찾는 마음으로
잊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가 찾은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기도― 4․19 순국학도위령제에 부치는 노래」(전체 6연 중) 1, 6연
김현경 :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김 시인이 아주 흥분했어요. 아직은 몰라 하고 내가 말렸을 정도였어요. 이 무렵 시도 많이 썼어요. 물 만난 물고기 같았어요. 그만큼 혁명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었지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이 1954~1956년까지 쓰다가 그만둔 일기를 이 무렵부터 다시 쓰기 시작했어요. 1960년 6월 16일부터 1961년 5월 14일까지 썼네요. 따라서 이 무렵의 시작품들은 일기를 참고하면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어요.
6월 16일의 일기에는 “‘4월 26일’ 후의 나의 정신의 변이 혹은 발전이 있다면, 그것은 강인한 고독의 감득한 인식이다. 이 고독이 이제로부터의 나의 창조의 원동력이 되리라는 것을 나는 너무나 뚜렷하게 느낀다. 혁명도 이 위대한 고독이 없이는 되지 않는다. (중략) 졸시 「푸른 하늘을」이 약간의 비관미를 띠고 있는 것은 역시 격려의 의미에서 오는 것이리라.”라고 쓰고 있어요. 6월 17일 일기에서는 “여하튼 혁명가와 시인은 구제를 받을지 모르지만 혁명은 없다.”라고 썼어요. 4․19혁명에 대한 복잡한 심정을 읽을 수 있네요.
이와 같은 상황을 참고하면서 「만시지탄은 있지만」을 읽어보지요. 『현대문학』 1961년 1월호에 「가다오 나가다오」「중용에 대하여」와 함께 발표했어요.
김현경 : 이 무렵 「육법전서와 혁명」(『자유문학』 1961년 1월),「푸른 하늘을」(『동아일보』 1960년 7월 7일) ,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새벽』 1960년 5월), 동시 「나는 아리조나 카보이야」(1960. 7. 15) 등을 발표했어요. 4․19혁명으로 제2공화국이 탄생했지요. 민주당이 추진한 의원 내각제로 개헌해 윤보선 대통령, 장면 국무총리를 선출했어요. 민권이 존중되는 민주주의 정치를 지향하고자 했는데, 실제는 그렇지 못했어요. 제대로 행정력이 발휘되지 못했고, 부정부패가 심해 국민들이 실망했어요. 그래서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난 것이지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은 일기에서 「만시지탄은 있지만」의 발표에 대해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어요. 작품을 발표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김수영 시인의 자존심도 대단한 것을 볼 수 있어요. 일기에 따르면 「만시지탄은 있지만」의 최초 발표지는『현대문학』이 아니라 『경향신문』이네요. 일기를 소개해볼게요.
어제 창동에 나가는 길에 다방 ‘세르팡’에 들렀다가 쓰게 된 시 「만시지탄은 있지만」을, 수명이 청서해 준 것으로 오늘 ‘동방’에 들러서 『경향신문』 기자를 만나가지고 주긴 주었지만, 내어주려는지 의아. 안 내준다면 『한국일보』에 줄 작정이다.
― 1960년 7월 4일 일기
‘7월 재판’ 초일이라, 구경 겸 나가서, 『경향신문』에 들러가지고 어제 준 시를 찾아서 『세계일보』에 갖다 줄 작정을 하였는데, 들르자마자 고료를 준다. 이겼다! 내가 이긴 게 아니라 저쪽이 이겼다. 간밤에 성급하게 자포자기한 것이 미안하다.
― 1960년 7월 5일 일기
김현경 : 당시는 발표 지면이 아주 없었어요. 그래도 김 시인의 작품은 신문사나 잡지사들이 서로 받으려고 했어요. 원고료도 다른 시인보다 높게 주었어요. 그만큼 김 시인의 시를 인정해준 것이지요.
맹문재 : 「만시지탄은 있지만」에는 루소의 『민약론』, 데카르트의 『방법통설』, 베이컨의 『신논리학』이 소개되고 있어요. 읽어보신 책이 있는지요?
김현경 : 다른 책은 못 읽고 루소의 『민약론』은 읽었어요. 암파문고(岩波文庫, 이와나미문고)에서 나온 것이었어요. 김 시인이 가지고 있는 것을 틈틈이 읽었어요.
루소가 살아가던 프랑스의 시대는 왕권 정치가 행해지고 있었지요. 따라서 루소가 『민약론』에서 내세운 사상은 당시로는 상당히 혁명적인 것이었지요. 국민주권을 인정함으로써 그 후 프랑스 대혁명에 큰 영향을 주었고, 민주주의 사상의 토대가 되었지요.
맹문재 : 루소의 『민약론』은 우리나라에서 『사회계약론』으로 번역되기도 했어요. 주권은 국민에게 있어 양도할 수 없고, 국가는 법률이 정하는 범위 안에서만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정부의 통치가 범위를 벗어날 때 국민은 언제든지 국가와 맺은 계약관계를 해지할 수 있다는 것이에요. 김수영 시인은 1960년 7월 4일 일기에서 루소의 『민약론』을 적어 놓았는데, 소개해볼게요.
이러한 민주정치 혹은 인민정치의 정부만큼, 내란이나 국내의 선동에 움직여지기 쉬운 정부는 없다는 것도 함께 말해 두기로 한다. 왜냐하면 이 정체(政體)만큼, 정치의 변경에 대해서 강하고 또 부단히 응하기 쉬운 정체는 없으며 또한 이 정체만큼, 정체 유지에 열심과 용기가 필요한 정체도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런 정체 밑에서는 각 공민(公民)은 강한 실력과 확고한 정신으로 무장하고, 저 유덕(有德)한 파테에노 백작이 폴란드 의회에서 한 말, “우리들은 평온한 노래보다도 위험한 자유를 택한다”를 매일, 그의 배 밑으로부터 외우지 않으면 아니 된다. 만약에 신(神)들의 국민이 있다면, 그것은 민주적으로 다스려질 것이다. 그다지 완전한 정부는 인간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 루소, 『민약론』, 제3편 제4장 「민주정치」에서
「만시지탄은 있지만」에는 민주당 외에 “혁신당”도 언급하고 있는데 아시는 면이 있는지요?
김현경 : 민주혁신당을 말하는 것으로 보여요. 조봉암, 서상일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든 진보정당이 있었어요. 1960년 4․19혁명 이후 다양한 계열들이 통합되면서 해산되었지요.
맹문재 : 다음으로 읽어볼 작품이 「나는 아리조나 카보이야」에요. 이 작품은 동시(童詩)여서 주목되어요. 작품을 창작한 계기에 대해서는 1960년 7월 29일 일기에 상세하게 나와 있어요. 소개해보면 “일전에 『한국일보』 아동신문에서 동시의 청탁이 와서 난생처음으로 써준 작품이 내용이 과격(?)하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았는데, 앞으로는 사회상태가 동시가 읽혀질 만큼 되기까지는 동시를 쓰느니보다는 동시 무용론을 주장하고, 있는 힘을 다해서 사회개혁을 위해 혈투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어요. 이러한 사연이 있어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네요. 1960년 7월 15일 완성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네요.
김현경 : 우리 둘째가 다섯 살 때인데. 서부극 영화를 좋아했어요. 그래서 내가 데리고 단성사에 가서 영화를 보았어요. 영화관 제일 앞줄 중앙에 앉아서 보았는데, 아는 배우가 나오면 나한테 와서 저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하면서 알려주곤 했어요. 영화관에 갔다 오면 제 아버지한테 얘기했어요. 그런 얘기를 많이 들어서인지 흥미를 가지고 쓴 것이에요.
맹문재 : 이 작품의 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김현경 : 이승만 정권을 야유하고 비판한 것이지요. 동시 형식을 빌려서 쓴 것이에요. 친미를 비판한 것이기도 하지요.
맹문재 : 이 작품에서 “이성망”은 이승만을 나타낸 것인데, “홍찐구”는 누구인지요? “너 이놈 정동 재판소에서 언제 달아나왔느냐”고 호통을 친 것을 보면 죄를 지어 감옥에 갇혀 있다가 석방된 것으로 보이네요.
김현경 : 『김수영 전집』의 각주를 보니 “홍진구”라고 되어 있네요. 정확하게 누군인지 모르겠는데, 이승만의 부하에 속하는 경찰 관계 인물이 아닐까 싶네요.
맹문재 : 다음으로 읽어볼 작품은 「중용에 대하여」네요. 이 작품은 1960년 9월 9일의 일기장에 쓰여 있기도 하네요.
김현경 : 장면 정권에서 대해 비판하고 있는 작품이에요. 4.19학생혁명으로 단시일에 정부를 무너뜨렸잖아요. 이기붕 가족이 경무대로 피신했다가 모두 권총으로 자살했지요. 그런데 민주당 정부는 이전 정부보다 새로운 것이 없었어요. 사람만 바뀌었지 나아진 것이 없었어요. 참신한 정책을 기대했는데 그렇지 못해 실망했어요. 중용을 택한 것이 중용인 척하는 것에 불과했어요. 그래서 무사태평과 무기력에 국민들은 답답해했고 분노했어요.
맹문재 : 이 작품에서 “계사(鷄舍) 건너 신축 가옥에서 마치질하는/소리가 들린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어떤 상황인지요?
김현경 : 마포구 구수동 우리 집 아래로 집들이 자꾸 들어섰어요. 캐비닛 공장은 그 후에 세워진 것이에요.
맹문재 : “계사 안에서 우는 알겯는/닭 소리를 듣다가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담배를 피워 물지 않으면 아니 된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알겯는 소리가 어떤 것인지요?
김현경 : 닭들이 알 낳을 때 둥지에서 독특한 소리를 내어요. 닭들도 알을 낳을 때 배가 아픈가 봐요. 그것을 알겯는 소리라고 했어요.
맹문재 : ‘알겯다’를 국어사전에 찾아보니 “암컷이 발정해 수탉을 부르느라고 골골 소리를 내다”라고 나와 있네요. 김수영 시인이 일기를 일본어로 쓰기도 했는데, 무슨 이유에서였을까요? 한글보다 일본어로 쓰는 것이 더 편했을까요?
김현경 : 일본말이 더 편한 면도 있었지만, 일종의 반동 의식이라고 볼 수 있어요. 민주당 정부가 너무 썩어빠졌다고 비판하는 태도를 내보인 것이지요. 김 시인은 “여기에 있는 것은 중용이 아니라/답보다 죽은 평화다 나태다 무위다”라고 했고, “모두 적당히 가면을 쓰고 있다”라고 했어요. 심지어 “반동”이라고도 했어요.
맹문재 : 다음으로 읽어볼 작품이 「허튼 소리」예요. 이 작품에 대해서는 9월 25일 일기에 창작 동기와 자평을 남기고 있어요. “이 작품은 예의 ‘언론의 자유의 희생자’를 자처하고 나서려는 제스처의 시에 불과하다.”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지요. 작품은 총 8연으로 되어 있는데, “나는 대한민국에서는/제일이지만//이북에 가면야/꼬래비지요”(7~8연)라고 되어 있어요. 왜 꼴찌라고 느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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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경 : 김 시인은 자기는 공산주의자가 아닌데 남한에서는 공산주의자로 여겨져 탄압받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김 시인은 자유주의자였어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이 정부를 비판하니 기득권 세력은 김 신을 허튼소리를 한다고 본 것이네요.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고 본 것이지요. 언론의 자유를 추구했지만, 제대로 보장받지 못했지요. 북한에 가서는 이것마저 할 수 없는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네요.
김현경 : 그 당시 김 시인 외에는 시인들이 침묵하고 있었어요. 김 시인과 뜻을 같이하는 시인이 없었어요. 김 시인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민주주의 국가라고 생각했어요.
맹문재 : 다음으로 읽어볼 작품이 「김일성 만세」에요. 이 작품이 공개된 뒤에 많은 관심을 받았는데, 왜 늦게 세상에 알려졌는지요?
김현경 : 2008년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처음 공개했어요. 김 시인이 돌아가신 지 40주기를 맞아 미발표 시와 일기 등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에요. 김명인 인하대 교수가 작업했어요. 김 시인이 돌아가신 뒤 보니까 이 작품을 보관용이라고 쓴 봉투에 넣어둔 것을 발견했어요. 그 봉투에는 「죄와 벌」「성」 등도 들어 있었어요. 이 두 작품은 김 시인이 살아 계실 때는 못 보았어요. 「김일성 만세」는 김 시인이 보여주었어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이 쓴 일기를 보니 1960년 10월 6일, 10월 18일, 10월 19일, 10월 29일 「김일성 만세」를 언급하고 있네요. 그만큼 중요하게 여겼다고 보여지네요. 10월 6일 일기에는 원래 「김일성 만세」라고 쓴 작품을 「잠꼬대」라는 제목으로 고쳐 아내 김현경에게 보여주니 발표해도 되겠느냐고 우려했다고 적었네요. 단순히 언론 자유를 추구한 작품인데 세상이 오해할 뿐만 아니라 『현대문학』에서 받아줄지 의문이 든다고 했어요. 조지훈 시인도 이맛살을 찌푸린다고 했네요. 이 작품에 왜 조지훈 시인이 등장하는지요?
김현경 : 조지훈 시인은 김 시인의 「묘정의 노래」를 『예술부락』(1946)에 발표하는 데 도움을 주셨지요. 그뿐만 아니라 수명 시누이가 『현대문학』사에 공채로 입사할 때 시험관이기도 했어요. 물론 김 시인의 동생이라는 사실은 전혀 몰랐고, 50여 명이 지원했는데 당당히 합격했어요. 조지훈 시인과는 그만큼 인연이 깊은데, 「김일성 만세」를 보여주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조지훈 시인이 보수적이어서 김 시인이 좋아하지는 않았어요. 특별한 유대관계는 없었어요.
맹문재 : 그러한데도 불구하고 「묘정의 노래」를 조지훈 시인을 찾아가 보여준 이유는 무엇일까요?
김현경 : 그 당시 조지훈 시인은 시단에서 가장 무게감 있는 분이셨어요. 실력 있는 한학자인데다가 동국대학교와 고려대학교 교수였지요. 조연현 등과 친하게 지냈어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의 일기에는 10월 18일 『자유문학』에서 「잠꼬대」를 달라고 했다고 적었네요. 조건은 본문의 일부를 고치자고 하는 것이었어요. 김수영 시인은 고치기 싫어했어요. 제목을 고친 것만도 타협한 것이니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아울러 한국에 언론의 자유가 없음을 비판하고 있어요.
김현경 : 일기에 나와 있는 대로 잡지사에서 시를 수정해서 싣자고 했는데, 김 시인이 거절했어요.
맹문재 : 10월 19일 일기를 보니 「잠꼬대」를 무수정 상태로 내밀자고 다짐해요. 그만큼 이 작품을 발표하고 싶어했어요. 그런데 10월 29일에는 「잠꼬대」를 발표할 길이 없다고 포기해요. 시집에 넣을 가망성도 없다고 절망해요.
김현경 : 신문사와 잡지사들을 다니며 작품을 내밀었는데 어느 곳에서도 받아주지 않았어요. 모두 겁을 낸 것이지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발표를 포기하고 보관용이라고 쓴 봉투에 넣어둔 것이에요. 발표를 못 했다고 불만을 제기하기보다는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했어요. 원고지에 쓴 「김일성 만세」라는 제목을 줄을 쳐서 지우고 「잠꼬대」로 고친 것을 보셨지요?
맹문재 : 네. 본 적이 있어요. 김수영 시인이 「김일성 만세」를 쓴 동기가 있는지요?
김현경 : 김 시인이 4․19혁명 후에 『동아일보』에 짧은 글을 쓴 적이 있어요. 그런데 검열에 의해 김 시인의 이름만 실리고, 내용은 안 실렸어요. 백지상태로 신문이 인쇄된 것이에요. 김 시인은 그 일에 화가 나 있었어요. 그래서 이 시를 쓴 면도 있어요. 언론 자유를 촉구한 것이지요.
맹문재 : 다음으로 읽어볼 작품이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이에요. 이 작품은 1960년 10월 29일 일기에 따르면 「김일성 만세」와는 우정(일부러) 다른 작품을 쓴 것이라고 했어요. 일보 퇴보의 창작 자세로 쓴 것이어서 스스로 반동의 시라고 평가했어요. 그러면서 자기 확립이 중요하다고 했어요.
10월 31일의 일기에는 「그 방을 생각하며」를 썼는데, 두 작품을 비교하다가 전자가 에스키스(esquisse)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후자를 『현대문학』에 보냈다고 했어요.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을 완성하지 못한 밑그림 정도로 생각한 것이지요. 작품 연보를 살펴보니 어떤 연유인지 「그 방을 생각하며」는 『현대문학』이 아니라 1961년 1월호 『사상계』에 발표했네요.
김현경 : 김 시인이 의용군에 붙들려가서 죽을 고비를 넘기는 등 많이 당했잖아요. 그 바람에 취직하기가 어려웠어요. 언론 자유도 없었지요. 그 상황을 시로 나타낸 것이에요. 김 시인이 살아간 시대는 피곤한 상황이었어요.
맹문재 : 특히 정신적으로 피곤한 상황으로 읽히네요.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이란 “사랑이 추방을 당하는 시간”이라고 했는데, 슬프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네요.
■ 김현경
1927년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 태어나 경성여자보통학교(현 덕수초등학교)와 진명여고를 거쳐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수학했다. 김수영 시인과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다. 에세이집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이냐』『우리는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공저) 『먼 곳에서부터』(공저)가 있다.
■ 맹문재
대담집으로 『행복한 시인 읽기』 『순명의 시인들』, 시론 및 비평집으로 『한국 민중시 문학사』 『지식인 시의 대상애』 『시학의 변주』 『만인보의 시학』 『여성시의 대문자』『시와 정치』 『현대시의 가족애』가 있다. 현재 안양대 국문과 교수이다.
【사진 설명】
1. 김수영 시인과 김현경 여사가 함께 본 영화들
2. 「만시지탄은 있지만」 언급(1960년 7월 4~5일 일기)
3. 루소의 『민약론』 요약(1960년 7월 4일 일기)
4. 동시에 대한 의견(1960년 7월 29일 일기)
5. 「중용에 대하여」 언급(1960년 9월 9일 일기)
6. 「김일성 만세」 언급(1960년 10월 6일, 18~19일, 29일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