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 날에는 사람이 좀 청승을 떨게 되는가 보다. 그 날이 숙직하는 날이었는데,
밖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 비를 바라보다가 어김없이 술 생각이
났고, 술 생각을 하다가 웬일인지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 생각이 났다. 이야기가
좀 에돌아 가지만 나는 어렸을 적부터 술을 좋아했다. 할머니의 술심부름으로 주막에
서 막걸리 한 되를 사들고 오다가 몇 모금씩 마시던 것이 버릇이 되었고, 고등학교 때
는 하숙비와 용돈을 타러 집에 갔다가 논에서 일하시는 아버지의 새참이 나오면 낟가
리 뒤에 숨어서 술을 홀짝거렸는데, 아버지는 그런 나의 행동을 살짝 눈감아 주셨다.
나중에 들어보니 술은 어른들 앞에서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아버님께서 그러셨다는
데, 하여튼 그 버릇이 어디 가겠는가? 학교가 파하면 까까머리를 감추기 위해 함께 하
숙하는 대학생 형의 교련모자를 빌려 쓰고 선술집엘 드나들었다. 그러던 것이 몇 번
인가 술이 너무 과해서 다음날 학교에 못 나간 일이 있었고, 그때마다 걱정스런 얼굴
로 나를 찾으셨던 분이 바로 우리 담임 선생님이셨던 국어 선생님이시다.
그 선생님은 시를 가르치는 시간이면 항상 한하운에 관한 이야기를 침을 튀기면서 하
셨는데, 어찌나 열강을 하셨는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
고 이제 나도 시를 가르치는 시간이 되면, 마치 내가 한하운에 대해서 제일 잘 아는
것처럼 그 선생님의 흉내를 내며 침을 튀기면서 떠들어대곤 한다.
문둥이가 된 자신의 삶을 표현
가도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가도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어찌보면 징그러울 정도로 문둥이가 된 자신의 삶을 잘 표현해 낸 시이다.
시를 쓴 한하운은 1919년 함경남도 함주군에서 태어나서 이리농림학교를 졸업하고 25
세 때 북경대학 농학과를 마치고 북경대학원에서 몇 년간 연구를 하다가 귀국하여 함
경남도와 경기도청에서 공무원으로 근부하던 중에 천형이라 불리우는 문둥병이 나타난
다. 그 당시로서는 부러울 것이 없어 보이는 그에게 살 끝이 썩어 들어 가는 나병이라
는 선고는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만큼이나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 당시의 심정을 '만사는/무지개가 사라지듯이/아름다운 공허였다'(『무지개』),
'그래도 살고 싶은 것은/한번밖에 없는 자살을 아끼는 것'(『봄』 )이라고 표현하면서
'소록도로 가는 길'이라는 부제가 달린 위의 『전라도 길』 이라는 시를 『신천지』 에
발표하고 표류 생활을 시작한다.
간밤에 얼어서
손가락 한 마디
머리를 긁다가 땅 위에 떨어진다
이 뼈 한 마디 살 한 점
옷깃을 찢어서 아깝게 싼다
하얀 붕대로 덧싸서 주머니에 넣어 둔다
날이 따스해지면
남산의 어느 양지 터를 가려서
깊이 깊이 땅 파고 묻어야겠다
『손가락 한 마디』 라는 이 시는 소록도로 가면서 쓴 『전라도 길』못지않게 명징한
화폭으로 그 당시의 그의 모습을 잘 그려 내고 있다.
한하운은 천안을 지나 전라도의 끝인 소록도까지 가면서 장마철에 발이 푹푹 빠지는
전라도의 황톳길을 걸어가다가 신발에 흙이 고여 무거워지면서 신발을 털어 냈을 것
이다. 그런데 그 동안 또 썩어서 떨어진 발가락이 흙과 함께 털려 나온다. 그때의 심
정은 어떠했을까? 이제 남은 발가락은 두 개밖에 없다. 나머지 두 개도 소록도까지
가다 보면 또 썩어서 떨어져 갈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가는 그의 심정을 한스럽게
표현한 『비 오는 길』이라는 시를 잠깐 더 보고 가기로 하자.
주막도 비를 맞네
가는 나그네
빗길을 갈까
쉬어서 갈까
무슨 길 바삐바삐
가는 나그네
쉬어갈 줄 모르랴
한잔 술을 모르랴
소록도까지 걸어가면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본다. 비는 내리는데 주막에 가서 쉴 수
도 없다. 어렸을 적 기억을 되살려 보면, 동네 어귀에 문둥이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돌
팔매질을 해댔다. 한하운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바쁜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쉬어
가고 싶은데, 술이라도 한 잔 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묵묵히 돌아보
면서 한스러운 전라도 길을 가야만 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간절한 소망
그러한 그의 시 중에서 요즘 황지우나 박남철 정도의 시집에서나 보여야 할 엉뚱한
시가 하나 있다. 『개구리』 라는 시인데 먼저 읽어 보자.
가갸 거겨
고교 구규
그기 가
라랴 러려
로료 루류
루리 라
한번 읽고는 선뜻 이해하지 못할 이 시가 1940년대에 씌어진 것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신기하다. 그러나 그 당시의 그의 심정과 결부시켜 찬찬히 들여다보면 어렴풋이 그 해
답을 얻을 수 있다. 소록도로 가는 길에 학교가 있었을 것이고, 그 학교에서 선생님을
따라서 글을 읽는 아이들의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한하운은 문득 그 소리를 듣고 자기
가 어렸을 적,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던 시절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절로 돌
아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을 것이다. 그 시절이란 꼭 어린 시절이 아니어도 문둥병이
걸리기 이전의 건강했던 시절이다. 그는 개구리 울음소리처럼 선생님을 따라 책을 읽
던 그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이 시를 통해 나타내고 있다.
이렇듯 '옛날에 우러러보던 하늘은/아직 푸르기만 하다마는//아 꽃과 같은 삶과/꽃일
수 없는 삶과의//갈등 사잇길에 쩔룩거리며 섰(『삶』)'던 한하운은 48세쯤 되었을 때
나병을 완치하고 신안농업기술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그 후 그는 한국사회복
지협회 회장을 지내면서 나환자 구제 운동에 힘쓰다가 1975년 57세의 나이로 나병이
아닌 간장염으로 타계하였다.
'나는/나는/죽어서/파랑새 되어//푸른 하늘/푸른 들/날아다니며//푸른 노래/푸른 울
음/울어 예'고 싶어했던 한하운은 죽기 전에 이미 파랑새가 된 굳건함을 보여 주었다.
삶이 팍팍할 때 불러 보았으면
청승떨던 얘기를 하다가 침 튀기던 애기가 너무 길어진 것 같다.
다시 청승떨던 얘기로 돌아가기로 하자.
그날 나는 소주 몇 잔을 걸치고 기타를 투기면서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뽕짝거리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하면서 『전라도 길』을 노래 부르고 있었다. 몇 번 더 부르다가 더듬더듬 오선지에
베껴 두었는데, 나중에 꺼내서 불러 보아도 별로 고칠 데가 없었다. 지금도 술만 먹으
면 가끔 흥얼거리는데 그때마다 꼭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바로 '풍년두부'라는 별명을 가진,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셨던 임영춘 선생님(선
생님은 후에 『갯들』(현암사)이라는 좋은 소설을 써서 또 한 번 나를 감동시킨 적이
있다)이다.
선생님께서는 실례되는 얘기인 줄은 몰라도 나중에 한하운 시집을 사서 사진을 보니
어쩌면 두 분이 그리 닮아 보이던지......
한하운처럼 가장 처절한 상황에 부딪쳤을 때는 아니더라도 가끔 가다 삶이 팍팍할 때,
그 당시의 한하운을 생각하면서 그래도 나는 그보다는 낫다는 마음으로 잔잔하게 마
음을 가라앉히면서 불러 보았으면 좋겠다.
아무튼 나는 그 날의 청승 덕분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하나를 얻은 셈이다. 그리
고 이런 청승이라면 가끔 떨어도 괜찮을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