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여기저기 뺑뺑이를 돈지 적어도 3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 제느는 여전
히 구겨진 얼굴로 이것저것 옷을 나에게 떠밀며 탈의실로 밀어 넣는다. 에
휴. 이게 도대체 몇번째인지 온 동네 옷 매장은 다 돈 것 같다.
"도대체 무슨 옷을 이렇게 입으라고 해? 내가 자기처럼 아무 옷이나 입어도
미모가 하늘을 찌르는 수준도 아니고, 이게 벌써 25번째인가?"
"궁시렁대지 말고. 벌써 4시야. 맘에 드는 조합 안나오면 밥 안 먹으러 간
다? 자기 사고 싶다는 그, 카메라 같은 것도 안 사줄 거야."
내가 그냥 속으로 중얼거리듯 했는데 글쎄 그걸 다 듣고 저러니 어쩌겠어.
도무지 비밀이라는 게 없다니까. 하여튼 옷은 그냥 촌스럽지 않고 어색하지
않게 입고 다니면 돼지 뭐 이렇게 까다로워? 자기 옷 입는 것도 아니고.
"이건 괜찮아?"
옷을 입고 밖으로 나오니 제느는 태평하게 벽에 기대서 눈을 감고 있었다.
정작 자기는 흰 셔츠에 청바지로 그냥 아무렇게 입은 듯한 모양새면서 저렇
게 당당하다니, 여자 맞아? 현지는 1시간동안 단장하지 않으면 절대 밖으로
나가지 않던데.
"흐음…. 그런데로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이것도 사자."
"또?"
제느가 나를 휘휘 돌려보더니 계산대로 갔다. 얼핏보니 카드를 내는데 저
카드는 도대체 어디서 얻었길래 하루에 기백만원씩 긁어대는지 모르겠다.
집에서 나와서 3시간 동안 산 것들 양손에 다 들지도 못하는데. 지금 입은
옷도 뒤에 0이 너무 많아서 눈이 팽팽 돌 지경인데 그냥 괜찮다고 사는 거
야?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응. 자기 옷 입는 센스 용서 못 하겠어. 날 반하게 만든 그 센스는 다 어
디 간거야? 싸 먹었어?"
"그러는 자기는 그냥 셔츠에 청바지면서…."
제느가 내 꿍얼거림에 야비한 웃음을 짓더니 가슴을 쭉 폈다. 젠장. 저렇게
입었어도 스타일 하나는 끝내준다. 말 안해도 인정된다는 거야?
어떻게든 공격해봤다.
"그렇다고 10월에 얇은 셔츠 한장 입는 건 센스야? 너도 유행 좀 따라봐."
"주위를 봐. 내 미모면 유행을 선도하거든? 다 됐죠?"
자기 예쁜건 아주 잘 아네. 그렇지만 분하게도 저 말이 사실이라 흘끔흘끔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는 매장 직원들의 눈길이 인기 연예인이라도 온 듯 가
슴 떨려서 풀린 눈빛이다. 사람이 좀 뜸한 층이라 그렇지 아랫층에선 쏟아
지는 카메라 세례에 도망가야했다. 그리고 무슨 생각으로 그냥 은색 머리카
락에 은색 눈으로 다니는지, 저거 이제 인터넷에 다 뜰텐데 어찌 학교 다니
냐?
"뭐 먹을까? 치킨? 피자? 햄버거? 스파게티?"
"아니 여신이 뭐 그렇게 먹을 게 중요하다고 그래. 너 지금 인터넷에 너 사
진 다 뜨고 맨날 집에 이상한 사람들 찾아오는 거 모르지?"
"어머. 그래? 난 학교에만 오는 줄 알았는데?"
전혀 몰랐다는 듯 정색을 하는 목소리. 제느가 정말 몰랐다는 듯 눈을 동그
랗게 뜬다. 이건 무슨 소리람?
"뭐야? 누가 왔었는데?"
"어, 어디어디 기자라면서 한국에 귀화신청한 이유나 앞으로 뭐 할지 묻던
데? 하긴 좀 많이 오는 것 같더라."
"귀화신청? 그런 것도 했단 말야?"
"했지. 내가 뭐 아무렇게나 다니는 줄 알아? 주민등록증도 있는 걸?"
제느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카드 한 장을 꺼냈다.
그걸 보니 왜 그렇게 내가 고생하며 다녀야 했는지 이해가 갔다. 정작 주원
인에게서 정보가 새고 있었군. 이러니 거리에서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도 무
리가 아니지. 머리랑 눈 색만 바꾸면 뭐하나 얼굴이 그대로인데.
"아. 정말 골치 아프다. 그런거 함부로 하고 다니면 어떻게 해. 점점 귀찮
은 일만 늘어난단 말야. 아까도 피해서 올라왔잖아."
"옛날에도 했는데 뭘. 괜찮아."
지금도 어디선가 숨어서 사진 찍고 잇을지 모르는데, 제느는 손사래를 치며
그런거 괜찮다고 태평하게 넘어간다. 이러다 현정누나라도 만나면 완전히
대박인데. 자기야 괜찮다 하지만 그건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
혹시 몰라서 한번 더 떠봤다. 지금도 넋을 잃는 저 시선들이 느껴지지 않는
건가?
"정말 괜찮아? 지금도 어디서 사진 찍히고 있을지 몰라."
"찍으라 그래. 옛날에 모델 잠깐 할 때는 집 앞에서부터 대놓고 찍어댔는걸
. 그보다 우리 뭐 먹을까? 응? 아르벤. 좀 말해봐."
"에구."
제느가 팔짱을 끼더니 아예 보란듯이 몸을 밀착한다. 주위의 시선을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넘기는 태도다. 지금도 주변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 게 민망해 죽겠는데, 전에는 그래도 튀지 않게 얌전히 다니더니만
무슨 생각이 들어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처음과 성격이 180도 확 바뀐
거랑 관계있나?
"저기 말야. 전에 있었던 일인데…."
"무슨 일? 이거 맛있다."
"…하여튼 전에 이상한 사람들이 싸우는 걸 봤는데 말야."
듣는 건지 마는 건지, 그렇게 따지더니 결국 온데는 맥도날드다. 얘도 여신
씩이나 되면서 입은 참 저렴한 편이네. 그리고 여신씩이나 돼서 그런지 먹
기는 또 우걱우걱 왕창 먹어댄다. 예쁜 아가씨가 앞에 햄버거나 치킨 따위
를 잔뜩 쌓아두고 저렇게 우물거리고 있는 거 보면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할
까?
"으음, 그런게 있었어?"
"자기 보러 갔다가 허탕 치고 집에 가다가 본 건데, 못 느꼈어?"
제느는 햄버거 하나를 순식간에 해치우고 콜라를 좀 빤 다음 고개를 내저으
며 치킨 조각을 들었다.
"그때 난 예르시하이나, 애랑 노느라 정신 없었어. 그래, 무슨 일인데?"
"…크험. 하여튼 웬 남자랑 여자 둘이 한강에서 싸우는데 거기 휘말려 들었
어. 물차고 날아다니면서 막 검기처럼 빛을 쏘아대고 그러는데 되게 살벌하
더라. 날 알아채니까 다짜고짜 공격해왔어. 죽일 기세였다?"
제느가 눈이 동그래지더니 손에 든 걸 내려놓고 기름 묻은 손가락으로 내
손을 잔뜩 비비고 나서 한숨을 푹 쉰다. 이거, 지금 테러한 거지?
얘는 뚱한 얼굴로 날 바라본다.
"다치진 않았네. 제발 그런데 좀 휘말리지마. 자기한테 무슨 일 나면 난 더
이상 못 견뎌. 이제는 더 찾을 힘도 없단 말야."
아, 그렇구나. 등골이 싸하니 아린게, 맞는 말이라 원망 섞인 말을 들어도
뭐라 할 수가 없다. 나 죽으면 울어줄 사람은 부모님하고 친구뿐인데, 이제
는 나 죽으면 같이 따라죽을 사람이 생긴 거구나.
감동 먹어서 그런지 코끝이 시큰하다.
제느는 그런 날 보며 투덜거린다.
"원망에 뭘 그렇게 감동하고 난리야? 자, 이것 좀 먹어 봐."
"난 새우는 싫은데…."
"맛있어.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 둬. 지금이야 그렇지만, 나중에 100년
, 만년 후에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만 년?"
되물었더니 제느가 입술을 실룩인다. 너무 까마득해서 나는 상상도 안 가는
데 어떻게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거야? 나이가 6만살은 까마득히 넘
었다는 건 알고 있어도 상상은 안 가는 나 같은 소시민한테 1만년씩이나 후
를 예상하라니, 당장 1년 앞도 깜깜하구만.
"왜 그래…?"
"아냐. 자. 어서 먹자. 싫다고 해서 안 먹으면 못 써요. 울 착한 남편은 뭐
든 잘 먹어야지."
"으엑. 하, 하여튼 그거 뭐라고 생각해?"
"몰라. 애랑 놀아주느라 정신 없었다니까. 아마 어딘가 비밀스런 녀석들이
겠지. 그런거 곧잘 있어. 신경쓰지 마. 저희들끼리 잘 사니까."
나는 심각한데 얘는 귀찮다는 듯 기름 묻은 손가락을 휘휘 내저으며 치킨
조각을 뜯는다. 여신이니까 그런거 신경 안 써도 두발 뻗고 잘 잔다는 거야
?
제느가 억지로 내밀어 손에 들린 새우버거를 내려다보았다. 이거 정말 먹어
야 되는 거야? 새우는 싫은데.
"으음…."
"입이 아주 귀밑에 걸렸네. 빨리 골라."
"아, 재촉하지마. 고르고 있잖아. 지금. 근데 자기야. 이거 다 사면 안될까
?"
"하나만 사."
"흐잉."
팔을 붙잡으며 아양을 떨어봤지만 도도한 여신님은 미동도 안 했다. 인심
좀 쓰지. 나는 30번 가까이 옷을 바꿔 입어주는 관대함을 보여줬는데 자기
는 이게 뭐야? 그래도 뭐 이런 행운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냐. 대학이나 가
서 아르바이트나 해야 살 것 같던 물건들이 앞에 놓여서 날 사달라고 졸라
대고 있는데.
앞에 놓인 여러 개의 노트북을 보고 내가 안타까운 마음을 애써 누르며 하
나를 고르는 동안 제느는 이것저것 구경하는데 주위 사람들의 눈동자가 아
주 줄줄 따라다닌다. 저런 시선이야 하도 많이 보다보니 이제 익숙해져서
열불이 나거나 하지도 않지만 가끔 가다 제느가 허리를 휙 숙이면 따라가는
눈동자들이 한심하다. 눈이 채 따라가기도 전에 일어나는게 놀리는 티가
확 나는데 말야.
"이걸로 할게요. 자기야."
"응? 골랐어? 난 이거랑 저거 줘요. 카드 돼죠?"
우와 억울해. 나보고는 하나 사라더니 자기는 흘긋 보고선 보기에도 묵직해
보이는 녀석 하나랑 조그마한 것 하나를 고른다.
에라, 이런 거 처음 겪어보냐. 여신인데 뭐. 카드 막 긁는다고 청구서에 괴
로워할 일도 없잖아. 알아서 하겠지 좋게 생각하자.
그래도 카드를 내미는 제느를 보니 심통이 난다. 여신이면서 좀 화끈하게
긁어주면 어디 덧 나나? 나 좋아 죽는다고 하면서 그 정도도 안 해주는 거
야? 내가 뭐 억지나 경제력도 안 되는데 바라는 것도 아니고 말야. 하여튼
여신님이 의외로 쪼잔 하다니까. 다 소문 낼까보다.
"뭘 그렇게 많이 사?"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제느는 이것저것 막 사댔다. 보석부터 전자제품까지,
누가 보면 막장 쇼핑 중독이라 아예 다 질러버리고 인생 쫑 낼 작정할 사
람처럼 보였다.
마지막이라면서 속옷 매장에 와서는 뭔가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이리저리
왔다갔다한 제느가 내가 한 물음에 답했을 때는 양손에 보고 있기가 민망한
것들을 가득 든 채였다.
"여기 왔다 간 기념품. 한 세계에 들르면 이렇게 괜찮은 것들을 사곤 해."
"설마, 취미야?"
"응. 남는 거야 뭐 이런 거 밖에 없지. 한 10만 번째 간 곳에서부터 모으기
시작했어. 그런데 이거 어때? 예쁘지? 잘 어울려?"
아까부터 사람들 다 자기만 쳐다보는거 싹 무시하고 노골적으로 검은색 속
옷을 가슴에 대더니 그렇게 말한다. 얼굴이 너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도저
히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저런거 입는 건 상상도 안 해봤는데 면역도 안된
사람한테 그렇게 말하다니, 그래도 차마 안 맞아 보인다고는 말 할 수가 없
었다. 저거 자기 사이즈 보고 고른 거야?
"어, 어. 괜찮…네. 응."
"정말이지? 우훗. 자기 얼굴 너무 빨개. 그렇게 부끄러워?"
"아, 아니야. 하, 하여튼 나 모니터도 사줘."
제느는 내가 버벅대니 더 좋아하면서 목소리에 은근히 유혹하는 느낌까지
섞어가며 손에 든 속옷을 흔들었다. 얼굴에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 가득
했다. 아니 여자 속옷 가게 오늘 난생 처음 들어 온 사람한테 이래도 돼는
거야? 너무 놀린다 정말.
"모니터 사서 뭐하게?"
"아니 뭐하긴, 지금 쓰는 게 3년은 된 거라 너무 구리고 화면도 이상해서
오래 쓰면 눈 아파서 말이야. 그러니까 이왕이면 큰 거 두개 정도로 해서…
."
"그런 크은거 사서 뭐 하게? 또 여자사진 보게에?"
애는 도대체 귀신 같이 그런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혹시 나 학교 간 사
이 다 뒤져본 건 아니겠지? 혹시나 정말 그런거라면….
내가 대답을 않고 눈알만 굴리니 제느가 입가를 고양이처럼 말아 올리며 더
운 척 셔츠로 부채질을 한다. 아까 전자제품 매장에서부터 풀어놓았던 앞섶
사이로 가슴 골이 훤히 다 보였다. 그걸보니 마음이 찔려서 더 말못하겠다
. 말이야 그렇지 컴퓨터에 그런거 있다고 이미 다 들켰다고 해도 어떻게 말
해?
"나도 수영복 좀 사볼까? 그러고 보니 우리 만나서 어디 제대로 놀러가 본
적이 없네. 자기야. 그렇지?"
"어? 응, 뭐 그렇네."
내 대답에 제느는 잔뜩 기대가 되는지 계속 키득키득 웃으며 내 손을 꼭 잡
았다. 여행계획 또 하나 늘었네. 좋아하기는 하는데 정말로 갈지는 모르겠
다. 한번 가면 몇 개월씩 돌아다니면서 뭘 할 여유나 있으려나? 그래도 제
느가 수영복 입은거 한번보고 싶긴 하네.
"야! 너 또 어딜 헤매고 다니는 거야! 너 수험생 맞아?! 수능이 코앞인데
정신이 있어 없어! 빨리 안 들어와?!"
"어, 엄마. 지금 예진이랑 같이 있어서 말야, 윽, 윽. 아, 예 그러니까 저
녁만이라도…."
집에 가다가 불현듯 생각이 들어서 집에 전화했더니 엄마의 노성에 속사포
처럼 정신 없이 얻어맞았다. 등뒤에서 식은땀이 마구 흐르고 머리털이 쭈뼛
쭈뼛 서는데 급히 후회가 가기 시작했다. 좀만 더 참고 오늘 만날걸. 엄마
는 한참이나 계속 말발로 공격하더니 어느 순간 툭 끊겼다.
"이참에 핸드폰도 사자. 커플 핸드폰으로."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나 못 믿어 자기?"
옆에서 그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들을 다 듣고도 제느는 태연하기 그지없어
서 팔랑팔랑 거리는 몸짓을 보노라면 미안하게도 못 믿겠다. 에휴. 이거 꼭
앞을 안보고 질러서 신용불량자된 사람 기분 같잖아. 그래도 뭐 지금 엄마
의 노성을 무마할 건 제느 밖에 없나? 여신이라는 백이 이렇게 든든한건 또
처음이네.
"나 추워 아르벤."
"이리 와. 이제 그냥 집에 가자."
"아직 7시 밖에 안됐어. 더 놀면 안 돼? 우리 엄청 오랜만에 만난건데."
"더 늦으면 너도 같이 혼나. 다 들었을 거 아냐."
허리를 끌어안으니 입을 삐죽거리며 불만스런 눈길로 나를 보던 제느가 단
념한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종아리까지 내려 뻗은 길다란 생머리가 찰랑
찰랑 흔들린다.
그래. 고3의 비애란 이런 것이지. 시험 한번에 인생이 결정나니 이거 원,
수능 다 끝난 것 같은 기분도 집에 들어감과 동시에 종말을 고하는 구나.
그래도 뭐 여자친구도 없는 다른 애들보다는 훨씬 낫지. 우리 제느도 있고
말야.
"근데 나머지 생명석은 언제 찾으러 갈거야?"
"몰라. 1년이 될지 100년이 될지 모르지. 그 전에 해야할 일이 있으니까.
사실 난 아르벤을 찾고 이렇게 얼마 되지도 않아서 우리 아기까지 찾을 수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
"그렇긴 하다."
나를 3만년이나 걸려서야 겨우 찾았는데 찾고 나니 일이 너무 수월하게 풀
리는 느낌이랄까? 제느는 그런 생각이 드는 모양이다. 싸움하다가 우연히
떨어진 곳에서 아이를 본거나 생명석을 찾은 거나, 그동안의 노력에 비하면
정말 어이없는 한숨 나올 정도로 쉽게 이어진 감이 있지. 물론 그 찾는 동
안 고생 안 한건 아니지만.
아무리 봐도 은색 머리카락을 발끝까지 치렁치렁 늘어트린 제느는 너무 눈
에 띄어서 일부러 인적 없는 골목길로 가는 와중에 슬쩍 셔츠자락 안으로
손을 넣어 매끈한 배를 만졌다.
제느가 싫지 않은지 어깨에 머리를 기대오며 몇 마디 밀어를 건넨다. 살짝
힘을 주니 뱃속에서 눈물만큼 조그만 생명석이 웅 하고 울리는게 느껴진다.
"원래는 주먹만하다며, 이것만 가지고 괜찮을 것…왜 그래?"
"으윽. 지금처럼, 그렇게 안 울리면 괜찮아."
"어, 괜찮아?"
배를 부여잡고 주저앉아 얼굴을 잔뜩 찌푸린 제느는 세상 다 산 것 같은 한
숨을 내쉬며 사람을 걱정시키더니 걷지 못하겠다고 볼멘 목소리를 내서 결
국 내 등에 업혔다.
"크훗. 정말로 나 참, 별거로 다 흥분한다. 그래, 좋았어?"
"아, 몰라. 나 당신이 이렇게 만들었으니까 책임져. 아직도 뱃속이 쿵쿵 울
리네."
엉덩이를 받치고 있는 손에 싸늘한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며 닿아온다. 밤하
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떠있는 달은 보름에 가까웠다. 제느는 내 귓가
에 대고 한동안 나에 대해서 궁시렁 거리다가 할짝 한번 귓가를 핥아서 사
람을 놀래키더니 목을 꼭 끌어안고 조용해졌다.
참 생각해보니 기분이 묘하네. 생명석이 자궁에 붙어있다고 같이 울려서 다
리에 힘이 빠지다니, 말이 되는 건가?
"제느야."
집에 가는 길엔 어쩔 수 없이 대로로 갈 수밖에 없는 길이 있는데 저녁 시
간대라 사람들이 많았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어떻게 할까 하다가 제느를 업
은 채로 뛰기는 또 그래서 그냥 길가로 나왔다. 그리곤 앞에서 오던 사람이
눈이 휘둥그레지는 걸 목도하곤 얼른 도망쳤다.
"왜 뛰어? 아프잖아."
"야, 머리카락 색 좀 다시 검은색으로 바꿔봐. 다 쳐다봐. 민망해 죽겠다."
여기저기서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말을 걸었더니 제느는
툴툴거리며 옆의 그늘로 가자고 하더니 머리를 쓱 쓸어 넘겼다. 한번의 손
짓에 반짝반짝 빛나는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검은색으로 물들고 밤의 어둠에
물들어 보이지도 않게 됐다. 그나마 다행이네.
"너 처음에 머리카락 초록색이었잖아. 용케도 혼자 학교로 찾아왔다?"
"그 때야 뭐 이렇게 다니지 않았으니까. 아까처럼 그렇게 뛰지마. 그새 젖
이 불어서 아프단 말야."
제느가 끄응하고 내 어깨에 손을 대고 몸을 일으켰다. 젖 안 나와서 걱정할
일은 없으니 다행이긴 한데, 꼭 우리 둘이 사고 친 것처럼 느껴져서 참 느
낌이 찝찝하다. 예를 들 것도 없이 우리 상황이 꼭 그러니 원. 그나마 제느
가 여신이 아니었으면 나도 아무 것도 없는 쭉정이지 정말 살기 힘들었겠다
. 연애와 결혼은 전혀 다르다는 말이 요새 들어 조금씩 공감이 간다. 그나
저나 집에 들어가면 엄마한테 무슨 말을 해야 그나마 덜 맞을까?
"아이구. 아파트 8층을 사람 업고 올라가려니 뼛골 빠지네. 내일이면 좀비
가 되겠네. 학교는 어찌 가누."
"푸훗. 오늘밤에도 뼈만 남을 만큼 사랑해줘. 다 왔다."
"벨 누르고 그만 내려와. 자꾸 업히면 다리 미워진다?"
"히잉."
제느를 내려주자마자 문이 덜커덕 열리더니 잔뜩 열이 받아 흡사 악귀가 씌
인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엄마가 나왔다.
"너어!"
"안녕하세요 어머님!"
호통부터 치시던 어머니가 옆의 제느를 보더니 갑자기 표정을 수습하곤 얼
굴에 웃음을 띄운다. 이건 좀, 예상 밖인데.
"그동안 안녕히 계셨어요? 제가 그동안 일이 있어서 오질 못했어요. 죄송해
요."
"어, 어 그래. 아니다. 어서 들어 와라."
1차는 패스. 물론 들여보내면서 엄마의 무시무시한 눈빛이 등을 쿡쿡 찌르
는데 진짜 칼로 찔리는 것처럼 식은땀이 흘렀다. 그렇게나 내가 못 미더우
실까? 내가 정말 악바리를 써서라도 제느랑 같은 대학 간다. 이렇게까지 내
가 못 믿을 놈인 줄은 몰랐는데.
맞을 때는 화끈하더니 정작 저녁을 먹고 치울 때까지는 현지나 부모님이나
조용했다. 제느는 나름대로 화제도 꺼내고 설거지도 나서는 둥 분위기 전환
을 위해 노력을 했지만 여신의 노력도 말짱 꽝이라 냉랭한 집안 분위기가
가시질 않았다.
"너희 둘. 와 봐라."
"예…."
침침한 시간이 지나고 들린 아버지의 목소리는 정말 불길했다. 현지는 이제
죽었다고 표정으로 말하더니 지 방으로 쏙 들어가 문을 닫고, 제느는 나랑
같이 한숨을 푹 내쉰 다음 몇 차례 시선을 교환하곤 침을 꿀꺽 삼킨 다음
안방으로 들어갔다.
"둘 다, 앉아라."
"예."
"예."
각자 자리를 찾아 앉고서 꿀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으려니 아버지는 꺼
질 듯 한숨을 푹 내쉬시곤 우리들을 잔뜩 긴장하게 만들었다. 내 생애 우리
아버지가 저렇게 카리스마 있는 모습은 어렸을 때 오락실 갔다 걸려서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맞은 이후 처음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제느에게 하지
않았다.
"현신아. 그러니까, 너…엄마한테 책임 질 수 있다고 말했다며?"
"아, 예. 그랬어요."
"사내 녀석이 대답이 왜 그렇게 힘없냐? 그래, 너희들 언제부터 교제한 거
냐?"
"3년…정도요."
속으로 입을 맞춘 대답에 아버지는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지으시더니 헛기침
을 몇번 했다. 정말로 3년 동안 감춘건 고등학교 들어오자마자 사귀기 시작
했다는 건데 그걸 감췄으면….
"3년이라…. 중학교 졸업하고 만난 거니?"
"아니요.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으로 전학 와서요."
"예. 그래요. 부모님 사정으로 영국에 있다가 오게 되었어요."
"영국? 아, 그렇구나."
아버지는 더 놀란 눈치다. 나는 외줄을 탄 것처럼 조마조마해서 입술이 바
짝 마르는데 제느는 참 태연하네. 장모님 처음 만났을 때처럼 긴장이 되는
데 바늘방석에 앉았다는 말이 절실히 떠올랐다.
"3년 정도 사귀었다면 허투루 사귄 것은 아닐텐데, 설마 하니 아무 것도 모
르고 한 불장난은 아닌지 모르겠구나."
"불장난이…."
"아니에요."
나보다 제느가 더 단호하게 말해서 움찔 놀랐다.
"비록 3년이란 짧은 시간 밖에 사귀지 못했지만 저는 현신이를 정말 사랑해
요. 가벼운 마음으로, 그저 즐기거나 호기심으로 사귀는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좋아서 앞 뒤 안 가리고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만
은 알아주셨으면 해요."
간단한 설명인데 워낙 확고하고 강력하게 힘을 실어 말해서 아버지 표정이
일순간 설득 당한 사람의 표정으로 변했다. 우와. 다시 봤어 우리 제느. 정
말 박수가 아니라 상으로 뭐든 해주고 싶은걸?
"흠흠. 그렇다면야…부모님은 무슨 일을 하시고 계시니?"
"어머니께서는 실을 자으시고, 아버지는 쇠를 다듬으세요."
"그, 그래?"
"아, 아버지. 그러니까 장모님은 디자이너시고 장인님은 조각가…."
"…뭐? 장모님? 너 설마 그쪽 부모님 뵈었었냐?"
'뭐야! 아니라고 둘러대! 그냥 몇 번 보기만 했다고!'
"어, 아아. 그러니까 저기 몇 번 뵙긴 했지만 그냥 놀러가서 본 거고 어차
피 둘이 결혼하기로 약속했으니까 말이죠. 그게…."
옆구리가 따끔하게 꼬집힘과 동시에 아버지의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아,
이거, 잘 못 말했구나.
"겨, 결혼? 책임이라는 말에 혹시나 했더니 너희들 설마?!"
'수습 못하면 알아서 해. 사람이 무슨 말을 그렇게 생각 없이 해?'
귀에서 들리고, 머릿속에서 들린 두 가지 말이 뇌리에서 뒤섞여 뛰어 다녔
다.
저질러 버렸잖아 이거! 책임지려고 결혼한다고 하면 이거 사고 쳐서 임신
시켜놓고 어리숙하게 결혼해서 해결하겠다는 말 밖에 안 되는 데다가 여태
까지 말도 안 해서 속인게 되버리니 뭐라 말해서 궁지에 몰린 처지를 해결
할지 생각이 안 난다.
여기서 계속 당황하고 있다간 삼류 아침 드라마 스토리가 되버린다. 이럴
때 일수록 정신 바짝 차려야 돼. 드라마야 허구니 그렇다 치고 실제로 이
중차대한 위기를 얼버무릴 수야 없지 않은가!
"뭐가 아니긴 아니야!"
"저도 왜 모르겠어요? 우리나라 교육 현실이 그렇다지만 알건 다 압니다.
맹세코 그런 짓은 한순간의 감정을 가지고 충동적으로 하지 않았다고요. 사
고 쳐서 책임지겠다는 것도 대책 없이 결혼하면 다 해결될 줄 알고 결혼하
려는 것도 아니에요. 원래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알리려고 했단 말입니
다."
"됐다. 얘야. 예진이라고 했던가? 부모님은 알고 계시냐?"
"사귀고 있는 건 알고 계세요. 하지만 함부로 임신할 만한 일은 하지 않았
어요.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지만 아직 미성년자고 혼전이니 지킬 것은
지켜야지요. 아버님께서 걱정하시는 그런 일은 없었답니다. 더구나 현신이
도 절 많이 아껴주어서 함부로 그런 일은 하지 않아요."
내가 말할 때는 금방이라도 목을 부러트릴 듯한 화를 겨우 참고 있는 것 같
던 아버지가 제느의 그 논리정연한 말에 숨을 고르시더니 금방 평정을 되찾
았다. 저렇게 급격하게 기분이 왔다갔다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제느가 흥분
을 가라앉히는 그런걸 쓴 모양이다.
제느는 속으로 이를 갈며 나를 협박했다.
'말 한 마디에 천냥 빚 갚는 댔어. 남자가 어떻게 그래? 정말로 등골의 골
수까지 다 뽑아먹어 버린다? 오늘 밤 각오해.'
'하, 한번만….'
대체 아버지는 결혼이라는 말에서 어떻게 임신으로 비약이 가능한건지, 이
세상 남녀들이 다 사고쳐서 책임지려고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말야.
"저기, 결혼하기로 최근에 약속한 거예요. 나름대로 둘이서 몇 달 동안 심
사숙고 했다고요."
"그건 그렇다치고, 너 아직 학생이야. 대학교도 가야 하는데 어린 녀석이
처자식 만들어 먹여살릴 능력이 돼? 결혼은 함부로 하는게 아니다 둘이서
맘만 맞으면 할 수도 있는 거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아. 너희가 젊은 혈기에
결혼하자고 하는 건지 정말로 고민고민해서 그러는건지 난 모르겠다만 수
능도 얼마 남지 않은 때에 둘이서 돌아다니는 게 좋게 뵈질 않는 구나. 보
자, 예진이는 어디 집이라도 갔다 왔니?"
"예에. 부모님이 한국에 들어오셔서 잠깐요."
"그래. 그런데 왜 지금까지 사귄다고 하지 않은 거냐? 3년이나 사귀었다면
서 본 것도 이제야 한 두 달이나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쪽 부모님은 알
고 계시니?"
"아, 아버지 그러니까…"
내가 끼어드니 아버지 눈이 도끼눈이 돼버렸다. 그래도 옆에 제느를 보며
참으시는 듯 보였다.
"아, 이 녀석아! 니가 말한게 기껏해야 여름방학이었을 때잖아? 너희 3년
사귀었다며? 아니, 그러고 보니 말하자마자 집안에 데려와서 앉히더만, 어
떻게 된 거냐? 정말 사고 친 거냐?"
"그건 아버님."
"넌 가만 있거라. 어디, 말 좀 해봐라. 내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어디 고등
학교도 안 졸업한 녀석들 둘이서 누가 한 방에서 자도 된다던?"
가장 강력한 우군인 제느가 침몰하고 나에게 화살이 돌아온다.
반박이 어려운게 한 방에서 잔게 사실이니까 사고를 안치느니 가볍게 생각
안 했다느니 그런 말이 다 뻘짓이 되게 생겼다. 목구멍으로 침이 마구 넘어
갔다.
"그게…그러니까."
이거 여기서 잘 못하면 정말로 검은 속이 가득한 늑대가 되 버리는 거다.
그렇지만 도대체 어떻게 변명해야할지 감이 안 잡힌다. 집이 불탔다느니,
도둑이 들었다느니 하는 뻔한건 먹히지 않을 거 아냐?
일이 이렇게 되니 고민하고 있는 내가 못 미더웠는지 제느가 허리를 꼿꼿이
폈다.
"아버님. 그건 전적으로 제 결정이었어요. 현신이에겐 잘못이 없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영국에 있다가 4년 전 한국에 온 뒤로는 전 거의 혼자 있었어요. 부모님께
선 바쁘셔서 1년에 일주일도 보기 힘들었죠. 물론 생활비나 용돈 등은 아르
바이트나 보내주시는 돈으로 해결했고 집도 번듯하긴 했지만 그것만이 다는
아니잖아요. 학교에서도 인기는 있었지만 마음을 깊이 나눌 사람이 없었어
요. 그런 와중에 현신이랑 만난거예요. 저희는 금방 가까워졌지만 전 외로
웠어요. 매일 학교 끝나고 돌아가서 집에 올 때면 아무도 없는 쓸쓸한 곳에
서 현신이 생각만 난 거예요. 처음에는 꾹 참아봤지만 사랑이란 것이 그렇
지가 않았어요. 점점 사이가 깊어질 수록 외로움을 견디기가 힘들었고, 결
국 제가 졸라서 오게 되었어요."
제느가 내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애잔하고 절절
한 시선을 보내며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분위기를 만들자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시며 제느만 바라보았다.
"그, 그렇게 된 거니? 하지만…."
"네. 저도 알아요. 함부로 내린 결정이라고 하실지 모르지만, 후회는 없어
요. 저는 정말로 너무나 지금 행복한걸요."
제느의 말은 자아내는 분위기와 함께 정말로 강력한 설득력을 지녀서 아버
지가 납득이 가는 표정을 짓게 만들었다. 둘이서 무단으로 한방에서 잤다거
나, 법적으로 아직 미성년자인건 까맣게 잊으신 것 같다.
나와 제느를 번갈아 바라보며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눈
빛을 보내던 아버지는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너희들이 정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한데, 너희 부모님께선 반대 안하
시든?"
"예. 두분 모두 외국에서 오래 생활하셔서 18살 이후엔 스스로 살란 말을
많이 들었어요. 결혼에 대해서도 마음 맞으면 하라고 흔쾌히 허락 하셨고요
."
"그러냐? 흠…. 그래 알았다. 이만 가 봐라."
"예. 아버님."
후아. 다행이 어떻게 모면은 하네. 그러나 제느는 그렇지 않은지 안방에서
나와 우리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는 순간 두 손으로 옆구리를 꼬집어 비틀
었다.
"으악!"
"이게 정말 어디서, 말 좀 제대로 하란 말야!"
"악! 조, 좀 용서해…!"
"에잉."
제느가 혀를 차며 방안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더니 옆구리를 놓고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살 찢어지는 줄 알았네.
의자에서 팔짱을 낀 제느가 입술을 비틀며 으르렁거렸다.
제느가 흉악한 표정을 짓고 검은 눈동자에 사람을 썰어버릴 듯한 예기를 담
아 노려보기에 얼른 표정관리를 하고 아부에 들어갔다.
"가끔은 그런게 절실히 필요하지. 아주 잘했어요. 우리 여신님. 자기가 최
고야. 오늘밤은 최고의 성실 봉사 해줄게."
"흐응. 그래 한번만 봐준다."
볼에 한 키스와 더불어 목덜미를 쓰다듬으니 아부가 먹히는지 제느가 만족
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눈을 흘긴다.
하여튼 고비는 넘겼지만 둘이 반지도 나눠 끼고 관계도 가진데다 이번에 멀
쩡한 다 큰 애까지 생겼으니 완전히 죄 지은 기분이다.
"근데 예나 혼자 나둬도 돼?"
침대에 앉아 기쁨의 노트북 최초 개봉식을 하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물어보
니 제느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눈을 빛냈다.
"예나? 벌써 애칭까지 정한거야? 예쁜 딸이라고 벌써부터 주책없이 빠진거
아냐 당신?"
"그, 그거야 자기이름 네 글자도 줄여서 부르는 판에 예르시하이나라고 계
속 부르기에는 어려우니까 설라무네…."
"으흐흥. 이거 완전 딸 사랑 아빠 나셨네."
딸 사랑이든 뭐든. 박스 안에서 노트북을 꺼내니 가슴이 너무 설렌다. 내
생애 노트북 가지는 날은 영원히 없을 줄 알았는데, 마누라 덕을 아주 톡톡
히 보는구나. 새삼 제느가 너무나 사랑스럽다. 역시 돈이 좋긴 하네. 아무
걱정 없이 이런걸 팍팍 지를 수 있다니, 도대체 뭘 얼마나 가진거야?
"좋아 죽어요."
제느도 사온 컴퓨터들을 꺼내 펼쳐놓더니 부산하게 이것저것 공유기 따위들
을 연결했다. 이걸 위해서 산 거구나. 이것저것 많이 산다 했더니만.
노트북 화면에 인터넷에 연결됐다고 뜨고 실험 삼아 웹브라우저를 여니 정
말 눈이 뱅글 돌아갈 정도로 빨랐다. 요즘 컴퓨터는 무선랜도 기본이네.
"이게 더 빠르네. 진짜 격세지감 느껴진다. 내 컴퓨터보다 몇 배는 빠른 것
같네."
"기술 발전은 좋은거야."
21인치…. 노트북이 21인치라니 내가 3년 전 컴퓨터 샀을 때는 상상도 못했
던건데 아니, 그런 감상은 일단 떠나서 자기 몸통 만한 물건을 제느는 한
손에 들고 이것저것 만지고 있다. 저러다 떨어트리면 어찌하나 해도 받치고
있는 손에 흔들림 하나 없어서야. 저거 적어도 7kg은 되는 건데 가는 팔로
저렇게 잡고 있는 모습을 보니 되게 신기하다.
그건 그렇고, 내 컴퓨터 켜서 이것저것 백업해둬야 하는데 아무리 제느가
뭐라 하지만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다. 예전에 컴퓨터도 몰
라서 화면을 손가락으로 찌르던 그 어리벙벙함은 순 내숭이었다는 걸 안 이
상 무슨 손을 쓰기 전에 손을 써놔야 한다. 혹시나 벌써 손이 닿은건 아니
겠지?
"자기, 이것 봐."
"응? 이게 뭐야…?"
한창 게임도 깔아보고 이것저것 하다가 제느가 건네주는 물건을 보니 인세
의 것이 아닌 비범한 물건이다. 그냥 보기에는 14인치 정도 크기 되는 유리
판일 뿐인데 놀랍게도 투명하게 뒷 배경이 비치는 그 유리에 세련된 옷을
입고 모델처럼 서 잇는 제느의 사진이 떠 있었다. 요리조리 돌려보고 뒤집
어봐도 화면에 보이는 것은 그대로였다.
갑자기 최신 노트북이 무척이나 초라해보인다.
"이건 어디 외계의 물건이야?"
"그거 말고 안에 사진을 봐. 나 이쁘지?"
"으음…."
옷 제대로 입고 이렇게 표정 짓고 있으니 마치 다른 사람 같다. 참, 전에는
이런 사진 보면 이런 모델들 남자친구는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일까
했는데 내가 그런 사람들 중 하나가 됐구나.
"이쁜데 화장이 좀 이상한 것 같아. 근데 정말 자기는 왜 얼굴에 바르는 게
없어?"
어떻게 조작하는가 싶어 화면을 손가락으로 밀어보니 사진이 따라 움직이고
뒷배경인 듯 그래픽이 드러났는데 인터페이스가 정말 충격적이다. 분명 평
면으로 보이고 있는 건데 윈도우랑은 완전히 딴판이다. 이건 도대체 어느
시대나 가야 나올만한 물건인거야?
"으응. 나야 뭐 그런거 안 발라도 피부가 워낙 좋잖아. 향기나는 매끈한 피
부에 뭘 더 바를 필요 있어? 더구나 여신이라고 여신. 나는 특히 이름난 미
모였단 말씀. 에헴. 자기는 무척이나 행복한거니까 감사하고 살아."
"…하기사 뭐 그렇다만. 나 이거 주면 안 돼?"
"안 돼. 갖고 있다 깨트려 먹을라."
치잇. 이거 정말 장난 아닌데. 근데 이거 어디 본체도 없는 건가? 본체도
없이 이 유리판 달랑 하나인데 기본이 되는 기판 같은 것도 안 보이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한 물건인가 보다. 진짜 보면 볼 수록 갖고 싶네.
"근데 말야. 사람들 따라다니면서 막 사진 찍히고 그러는 거 기분 나쁘지
않아? 왜, 왠지 막 거슬리는 거 있잖아. 귀찮은 거. 막 쳐들어와서 키스하
는 거라도 찍어갈 기세야."
"정 뭐하면 찍는 사진마다 아무것도 안 나오게 할 수는 있어. 그냥 귀찮으
니까 안 하는 거지. 누가 자기 귀찮게 구는 사람 있어?"
"…말도 마라. 현정 누나는 오기만 하면 너 못 잡아서 안달이야. 집 안에서
도 불안해."
"흐음…. 신경 쓰지 마. 막 들이 대는거 아니면 금방 적응 돼. 전에 모델
일 잠깐 해볼 때도 그랬는걸? 재미없어서 금방 그만 뒀지만. 이번엔 가수
한번 해볼까?"
"아서라. 난 너 TV에 나와서 짧은 옷 입고 허리 흔드는 거 싫어."
손에 들고 있던 컴퓨터를 책상에 올려놓고 의자에 앉아있는 제느에게로 다
가가 노트북을 뺏어 책상 위에 놓고 겨드랑이 아래로 팔을 넣어 안았다. 귓
가에 대고 살랑거리는 목소리를 내며 안겨오는 제느와 함께 침대로 가서 같
이 누웠다.
"하루종일 이렇게 있고 싶다."
"응. 나도."
이것도 정말 오랜만…눈물이 나올 정도로 좋다. 이렇게 안고 실제로 느끼고
있으면 온갖 것이 다 소용이 없고 오로지 그녀의 체온, 감촉만 소중해진다
. 정말 아까 까지는 어떻게 백업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몇 분 지나지도 않
아서 이런 생각이 드는 거 보면 정말 실제와 허구의 괴리는 엄청난 것 같다
.
부드러운 머리카락과 가냘픈 등을 쓰다듬으며 코를 맞대고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니 제느가 날 바라보는 눈길이 점점 부드러워지며 깊이를 담고 그윽해
진다. 저 깊은 눈동자 속을 들여보고 있노라면 새삼 제느가 날 얼마나 깊이
사랑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 같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한 여자
에게 이렇게 행복한 표정을 짓게 할 수 있는 걸까?
"남자는 참 대단한 것 같아. 이렇게 안겨있기만 해도 이 세상의 나쁜 것들
이 다 사라지는 것 같아."
"흥. 나라서 그런거지, 아무 남자나 그럴 것 같아?"
"푸훗."
피식 웃은 제느가 입술을 살짝 맞댔다가 혀를 밀어 넣지 않고 그냥 뗐다.
"맞아. 우리 아르벤이라 이렇게 좋은 거야. 고생하며 찾은 보람이 있어. 품
안이 이렇게 따뜻한데 말야."
"하아. 제느야."
히히히. 아 좋아라. 좋아 죽겠다.
가느다란 몸을 꼬옥 끌어안으니 두근두근 뛰는 심장의 느낌이 전해져 온다.
미안하지만 예나한테 동생은 못 만들어 주겠네. 이렇게 좋은데 또 한번 떨
어지라고 하면 그건 죽으라는 소리 밖에 안 된다.
"우리 다시 만난지 세 달 됐네. 음, 더 됐나?"
"자기는…. 나는 세 달이 3초 같이 지나간 것 같은데 자기는 어때?"
"정말이야?"
"바보. 묻지마. 어땠어?"
한참 뜸을 들여야 했다. 어떻게 말하면 제느를 감동에 몰아넣을까?
고민하다가 문득 입술에 시선이 닿았는데 방금 물에 축인 것처럼 매끈하다.
정말 매혹적인 색이라서 훔쳐버리고 싶다.
제느가 그 시선을 느끼더니 도톰한 입술을 일그러트렸다.
"대답 안하면 내 입술은 영원히 못 훔쳐."
다정한 목소리로 그렇게 귀엽게 협박하면 안 먹히지. 정말 이건 마력 같다.
아까 잔뜩 했는데 또 하고 싶네.
"음. 비밀. 나중에 가르쳐줄게."
"내 입술 영원히 못 훔친다니까?"
"흥. 허락 맞고 훔치나?"
도망가지 못하게 허리와 어깨를 꽉 끌어당겨 안고 입술은 물론이고 안팎을
한참 도둑질했다. 좀 강한 수문장이 저항을 했지만 성문이 열려버리니 수
없이 줄줄이 항복해버렸다.
"우흡. 이거…잘하네? 이제보니 수준급이야. 누구랑 연습한거야?"
"자기보다 잘 하는 여자랑."
"푸훗. 나보다 잘 하면 아마 혀 끊어질걸?"
"우웅. 그렇지도 않던데."
둘이 재밌지도 않은 말을 나누는데도 되게 재미있다.
연인의 밀어는 원래 그냥 들으면 유치하게 마련인데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달콤한 다크초콜렛맛이라 이게 진짜 사랑의 맛이 아닌가 싶다.
"너랑 안 만났으면 무슨 재미로 살았을까 싶다. 사랑해."
"말만? 행동은?"
"이렇게 안아주고 있잖아. 아니면…늘 하던 말대로 가슴 커지게 주물러 줄
까?"
허리를 안은 손을 셔츠 아래쪽으로 넣어 맨살을 스치니 제느의 얼굴에 눈에
띄게 노을이 진다.
"바보. 그런다고 안 커져."
"아니야. 마사지하면 조금씩 커진데. 그리고 운동도 하면 커지고. 남자친구
가 해주는 게 제일 효과가 좋다던데?"
"으휴. 핑계도 가지각색이야. 어쨌든 난 더 안커져. 지금도 잔뜩 부풀어서
불편한데 여기서 더 커지라고? 그리고 몸매 망쳐서 안돼."
투정을 부린 제느가 기분을 망쳤는지 휙 돌아누웠다. 애는 진짜 커진다고
해도 안 믿네. 아니면 여신이라서 진짜 안 커지는 건가?
달래볼 요량으로 허리에 팔을 감고 귓가를 가볍게 손대려고 하는데 무슨 생
각이 들었는지 제느가 다시 돌아누웠다.
"그런데 말야. 자기 취향은 역시 긴 생머리에 큰 가슴이구나?"
"어? 어, 뭐?"
"전에 한번 만져 봤는데, 자기 컴퓨터 어디에 영어로 인커밍이라고 써있는
폴더가 있더라고. 근데 용량이 크길래 보니까 죄 그런 사진들이던데, 안 그
래? 그렇게 보면 내가 딱 당신 취향이야. 어쩜 그럴 수가 있지?"
어, 이건 뭐야. 몰라 무서워. 언제 저렇게 다 뒤져본거야 대체? 으아 하나
님! 이를 어찌하면 좋나요?!
"어, 어 그러니까 그게…저기."
저런 말하면서 화내기는 커녕 두 눈을 초롱초롱 호기심으로 빛내는 얼굴이
너무나 부담스럽다. 저렇게 말하지만 분명 속으로는 심술이 났을 텐데 아니
도대체 여자애가 남자의 취향 따위 알아서 뭐 하겠다는 거야 대체? 뭐라고
대답하지?
"우, 우리 형! 형이 받아 놓은 거야!"
"흐응."
고양이 같이 무서운 웃음을 입가에 건 제느가 내 등에 팔을 감고 얼굴을 맞
댔다. 코가 맞닿고 시선과 숨결이 그대로 닿아 바스라질만한 거리였다. 거
기다 뒤는 벽이라 도망갈 곳도 없었다.
"날짜를 보니 일주일 전 거던데 말야. 공부하면서도 짬은 있었나봐?"
"으윽."
"흐응. 난 자기를 만져줘야 기분 좋은데, 남자는 그게 아닌가 보네. 하기사
속살을 드러내야 좋아하더라. 아까 낮에도 내가 부채질 하니까 가슴만 봤
지? 아우 응큼해."
대놓고 이렇게 말하는 여자는 세상에 제느 밖에 없을 거야. 사람 곤혹스럽
게 만드는 데엔 일가견이 있다니까. 그리고 옷 입고 단추를 두세 개씩 풀어
두는 건 나 보라고 그러는 거 아닌가?
"그래그래. 뭐 남자는 원래 그래. 사실 나도 처음에 자기가 그런 옷 입었을
때 쓰러질 뻔했어. 그러니까 뭐 음흉한거 맞지. 그러니까 오늘도 음흉하게
좀 만져야겠다!"
"꺄앙!"
꺄악하고 일어나 달아나는 제느를 붙잡고 문을 걸어 잠근 다음 셔츠를 걷어
올리며 입술을 맞췄다.
"으음. 아하…."
매끄러운 등 자락을 더듬다가 속옷과 함께 셔츠를 벗겨내자 제느가 부끄러
운 듯 가슴을 팔로 가리며 미묘한 표정을 짓는다. 뭐라고 해야하나, 새침한
표정? 갑자기 웬 내숭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부끄러운 거라고 생각하고
팔을 올려 손가락을 맞잡고 몸을 밀어붙여 살결을 맞댔다.
"후후후."
"덮치려는 것 같아."
"에잇! 덮쳐야지!"
"앗, 아앙!"
새하얀 목덜미를 키스해 올리자 제느가 좋아라 하면서 내 등으로 팔을 두르
고 매달렸다. 역시 우리 제느 몸매는 최고다. 볼 때는 이렇게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안으면 정말 다르다니까.
"앗? 아가!"
"어?"
막 덮치려고 하는데 제느의 얼굴 표정이 급변하더니 바닥에 떨어진 셔츠를
주워 단추를 채우곤 옷을 정리했다. 그러더니 창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는
것 아닌가. 한 가을 밤의 찬바람이 그대로 방으로 새어 들어왔다.
"어디 가?!"
"가서 젖 물려야돼! 내일 학교에서 봐!"
"어?! 야! 제느야!"
잡으려던 손이 허망하게 허공을 가르고 제느는 휙 하고 반대편 아파트 옥상
으로 뛰어 올라 가더니 곧장 반대쪽으로 날아 사라졌다.
어, 어라. 이게 아닌데. 진짜 정말로 오늘까지 놀아야 하는데 이렇게 가버
리는 거야? 이건 말도 안 돼. 애 젖 준다고 이렇게 가버리면 난 어떻게 하
라고. 애 찾았다고 이젠 나는 2순위로 밀려난 거야? 아 슬프다. 영원한 인
생의 동반자로 여겼는데 애가 급하니까 나는 바로 뒷전이구나. 이게 유부남
의 슬픔인가?
열린 창 밖으로 휭 하니 찬바람이 들어와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벌써 1월
은 된 듯한 무척이나 차가운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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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돌아갔으면 좋으련만...........
이번에도 오랜만에 올립니다. 이제부터는 조금씩이라도 붙잡고 써야
나오겠네요. 변함없이 읽어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
첫댓글 ㅜㅜ 드디어연제
하핫...끊임없이 지켜볼테니까 열심히 하세요~
ㅠㅠ 드디어 연재 ㅎ 재밋게 읽고 있습니다 작가님 화이팅
연재 감사해요 ㅠㅠ
연재다 !! 선리플 후감상 ㅇ_ㅇ
크하아! 드디어구나...
드뎌 연재시군 ㅋ
연재ㅠㅠㅠ 감동ㅋㅋㅋㅋ
우와 3년만의 복귀인데 드뎌 연재를 시작하셨구나,, 감동^^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