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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꾼 한도숙, 섶길을 가다(2)
신왕리의 비밀
"서해로 흐르는 물길이 막히면 그 물을 먹게 되는 곳에 정도령이 나타나 새로운 창업을 할 것이다."
처음 신왕리에 들어섰을 때가 97년 여름이었다. 아주 낮선 느낌은 그냥 선계에 든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같은 농촌 마을이긴 해도 여기저기 목장과 과수원인 서탄면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었다. 18년이 지난 지금은 그 모습이 많이 훼손되기는 하였으나 아직도 평택의 비경이라면 비경인 곳이다. 개발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이야 이런 곳에 집을 지어 팔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고, 실제 누군가에 의해 마을 뒷산이 허물어져 내리고 있다. 그래도 도회에 지친이들 눈에는 아직 평택에 이런 곳이 남아있다는 것에 적이 놀래는 눈치다.
평택섶길이 이런 곳을 놓칠 순 없다. 이곳은 경주에서 육로로 천안을 거쳐 둔포나 경양포를 지나 평택호 계두진이나 대진(만호리) 또는 당항포(삼계)로 나가는 길이기 때문에 비단길(실크로드)라고 이름붙인 시발점이기에 평택섶길에선 중요한 지점이다. 더구나 마을환경이 아늑하고 고즈넉해서 명상길이라는 테마길로 마을을 한 바퀴 돌도록 배려하고 있다. 노을길이 노양리 옛 경양포에서 끝나는데 여기서 나루를 건너야 신왕마을에 닿을 수 있다. 다행인지는 몰라도 신대리 미군기지 끝머리에서 광덕산 중턱으로 다리가 놓여지고 있어 자전거도로라도 연결되면 노을길과 비단길은 연결 될 수 있다.
광덕(고동)산줄기에 서너 마을이 진위군 광덕면이었던 고로 아직도 이 지역 사람들은 광덕지역으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심복사 쪽 덕우리에서 넘어오면 마을 들머리에 서낭당이 있다. 서낭당은 우리나라 모든 마을에 수호신처럼 있었다. 그곳엔 서낭신이 있어 원혼들이 해궂이를 하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주로 처녀귀신, 총각귀신, 객귀들이 서낭에 깃드는 귀신들이다. 신왕리 서낭나무는 음나무인데, 도일리 하리마을 입구 삼남대로에 있는 서낭나무도 음나무이다. 서낭나무가 음나무인 이유가 매우 궁금하다. 음나무는 귀신을 쫒는 나무다. 귀신이 깃들지 못하는 나무를 신목으로 삼는 아이러니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서낭제를 지내지 않은 것이 오래 됐다고 한다. 지금은 서낭당 앞에 무속인이 개인적으로 신목에 휘장을 두르고 제사를 올릴 뿐이라고 한다. 더 이상 신왕리 사람들은 객귀와 원혼들이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는 모양이다.
서낭당을 내려서면 동네 웃골 입구에 효열각이 수풀에 쌓여있다. 후손들이 없는 것인지 더 이상 효용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관리가 되질 않아 을씨년스럽다. "흉년이 들어 굶어죽을 지경에 처한 고부간이 구걸을 나섰다 그래" "그런데 저 경상도 어디쯤에서 그만 시어머니가 굶어 죽은거야"."그래서 며느리가 시신을 소금에 절여 밤에만 머리에 이고 올라와 이곳에 묻었다고 해." 이 마을에서 오랫동안 서당을 열었었다는 안태훈옹의 말이다. 주변 유림들이 조정에 건의해 그 뜻을 기려 정려각을 세웠다고 한다.
충신정문이나 효자열녀비는 유교이념으로 나라를 만들어 갔던 조선시대의 중요한 이념의 상징이다. 마을에 정력각 하나 없으면 그야말로 '쪽팔리'는 마을일뿐이었다. 정려각이 있어야만 유교이념에 충실히 따른 것이어서 마을의 정치적 위상은 높아지는 것이다. 효용성이 떨어졌다고는 하나 이 마을이 효마을로 지정 효공원을 설치한 이유가 이 효열비 때문 아닌가. 그렇다면 마을이 나서서라도 효열문을 관리해야 할 듯하다.
신왕마을엔 유독 샘이 많다. 대동우물은 아랫말 마을 회관 앞에 느티나무 아래에 있다. 마을의 정형을 보면 마을로 들어서는 길목에 서낭당이 있고 마을 입구에 정려각을 둔다.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우물을 두는데 이곳이 동네여자들의 사랑방과 같은 곳이다. 수도가 없던 시절 빨래도 해야 하고, 먹을 물도 퍼 날라야 하는 곳이다. 신왕리 안이장은 ''방송국'이었다고 할 만큼 여기엔 아나운서들이 많았고 늘 새로운 뉴스가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마을을 지키는 길목이기도 했다. 지나는 사람이 물 한 모금을 얻어 마셔도 어디서 와서 누구네로 가는지, 과객인지 걸인인지, 신상 파악을 하는 곳이다. 낮선 사람들이 검문검색을 당하는 곳이다.
샘은 마을을 이루기엔 필수조건이다. 수량이 풍부하면 큰 마을이 만들어 진다. 여기 신왕리는 웃말 아랫말 그리고 대동우물까지 세 곳이나 흔적이 남아있다. 그 외에도 갯골에도 샘이있고 왕골에도 샘이 있다. 샘은 생명수가 나오는 곳이다. 물이 없으면 사람이 살아갈 수가 없다. 샘은 사람들이 살아갈 터를 만들어 내는 중요한 몫을 해낸다. 마을이 거기 있는 이유가 거기 샘이 있기 때문이다. 샘물의 맛이 좋으면 마을의 인심도 좋다고 하지 않는가.
평택호 너른 물결이 마을 앞에 넘실대고 마을을 싸안고 돌아가는 고동산자락으로 바람이 흘러내리면 여름엔 청량음료를 따로 마련하지 않아도 될 터이다. 마을로 들어오는 길이 변변찮아 더욱더 고립감이 깊었을 것이란 생각이지만, 신왕마을 사람들의 마을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신왕리라는 마을 이름이 범상치 않음을 눈치 챘다면 그도 그럴 것이란 생각이 시나부로 들었을 것이다.
아산만 방조제가 막히지 않았던 74년도까지만 해도 갯골을 따라 들어오는 포구가 있어 나루터 였다. 신왕나루터는 마두라고 불리는 봉우리 아래에 있어 비교적 마을과 근접해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는 아직도 우물이 남아있는데 이 우물은 바닷물이 들어 올 땐 쓰지 못하고 썰물 때면 샘물을 쓸 수 있는 것이라 제주지역에 볼 수 있는 바닷가 우물과 흡사하다. 이 우물 옆에는 지금도 비닐 움막에 당시의 고기잡이하던 사람이 살고 있다. 포구는 어업기지이면서 나루였는데 신왕리 사람들은 강건너 노양리 경양포로 가거나 둔포장을 보러 건너가기도 했다. 호수가 되기 전까지는 둔포장이 커서 둔포장 바로 앞에까지 배로 들어갔다고 하니 둔포 비석거리 옆으로 흐르는 둔포천 둔포다리까지 배로 간 것으로 보인다. 이 나루가 중요한 길목이었는지 나루에서 마을로 올라가는 마두봉 기슭에 세집이나 되는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이 집터들은 현재 밭으로 일구고 있어 지난시절의 영화가 부질없음을 말하고 있다. 주막에는 작부들도 있어 오가는 길손을 후렸다고 하는데 마을 안에 방앗간 앞에 있던 주막이 마지막까지 있다가 없어졌다고 한다.
방앗간은 일제시대 이후에 생긴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엔 구구식 발동기와 정미기가 아직까지 보관되고 있다고 한다. 방앗간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흐릿한 글자가 윤곽만 남은 간판이 정미소임을 알리며 걸려있다. 사실 신왕리 들판은 좁디좁은 곳이다. 부자가 날래야 날 수가 없는 곳이고 정미소가 있었을만한 들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도 정미소가 있다는 것이 이상스러울 정도다. 마두마을의 고시리골과 원신왕의 원정골, 서본들을 다 합해도 스무섬지기가 안돼는데 정미소가 필요했을까.
거기엔 신왕이라는 지명으로부터 짚어 보아야 한다. 신왕리 마을 뒤편 고등산 자락을 넘어서면 덕목리가 나오는데 덕목리 아홉골이 왕터 또는 왕골이었단다. 이곳이 정감록에 나오는 왕이 나올 터란 것이다. 확인이 되진 않지만 안이장의 설명이 자못 심각한 것을 보면 정감록에 나온다는 사실이 거짓은 아니라고 믿는 듯하다. 어른들에게 전해오는 이야기지만 믿고 싶은 부분도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정감록은 워낙 십승지에 대한 이야기와 계룡산 신도안에 정진인이 나타나 삼한을 통치할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어 나 또한 궁금증이 이는 것은 마찬 가지다. 안이장은 왕골에서 새왕골로 마을이 이전을 해서 신왕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지명이 도로골이라 하는데 이는 왕골로 언젠가는 돌아간다고 다짐을 뒀던 곳이라서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왜 도로 돌아간다고 다짐을 두었는가. 그것은 안성천변에 펼처진 농지 때문이다. 드넓은 농지가 포락해 다른 곳을 찻아가지만 어찌 그 기름진 땅을 잊을 수 있을까. 정미소가 있었던 이유는 바로 안성천과 둔포천이 맞물려 만들어낸 넓은 농지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정감록 예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신왕리는 일단 주변에 여러 곳이 있다. 둔포면에 신왕리가 있다. 화성 양감면에도 신왕리가 있다. 전국적으론 몇 곳이 더 있지만 이곳과는 사뭇 다른 사연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곳 신왕리와 둔포 신왕리 양감 신왕리는 가깝게 위치하다보니 무엇인가 서로 연관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다. 정감록과 신왕리, 그러니까 정감록에서 예언하는 방식대로 유추해보면 "서해로 흐르는 물길이 막히면 그 물을 먹게 되는 곳에 정도령이 나타나 새로운 창업을 할 것이다." 뭐 그런, 그렇게 보면 안성천이 서해로 흐르다 방조제로 막힐 것이 예언됐고 거기서 나는 물로 농사를 짓게 됐으니 그물을 마시게 된 것이나 진배없다. 그런데 한곳이 아니라 세곳이 낙점이 된것이다. 둔포에도 신왕리가 둔포천을 끼고 있고 평택 신왕리는 직접 연하고 있다. 다만 양감면 신왕리는 남양천과 진위천을 끼고 있으니 물줄기 사이의 땅이다. 이세지역을 양감면신왕리- 현덕면신왕리- 둔포면신왕리로 연결하면 "ㄴ"자 모양이 되고 각각의 거리는 30리 길이다. 각가의 마을이 이곳 신왕리와 같은 마을 유래를 가졋는지 알 수 없으나 필자는 상당한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세 곳 중에서 대통령이 난 둔포면 신항리가 있다. 신왕리가 아니라 신항리다. 근런데 둔포 신왕리에는 해평윤씨네 땅이 많이 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둔포면에서 윤보선 전대통령집안의 땅을 밟지 않고선 다닐 수 없다고 했는데 안성천 농지도 이곳 신왕리 코앞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대통령이되는 경제적 뒤바침이 된 것으로 봐야한다. 그런데 그것은 안성천이 막히기 전에 대통령을 지냈으니 정감록과는 관련이 없는 듯하다. 그렇다면 평택 신왕리나 양감 신왕리, 그리고 둔포 신왕리가 왜 같은 이름의 신왕리일까.? 정감록이 지목한 땅이 각각 그곳이라고 생각해서 각각의 해석에 의해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재미로 해본 이야기다.
그런데 정감록의 이야기를 촘촘히 들여다보면 민중들의 가슴을 유유히 관통하는 사상이 있음을 본다. 바로 평등사상이다. 세상이 어지러우면 바로잡아야 하고 권력교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누구나 새로운 권력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늘의 이치를 곳곳에 숨겨두고 알 듯 모를 듯 한쪽만 살짝 드러내고 수수께끼를 하자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민중은 호기심으로 들여다보았고 그것은 바이블처럼 사람들에게 스며들었다. 믿기 어려운 예측들이지만 국가의 안녕과 사회의 안녕을 희구하는 준거로 작동하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세상을 뒤집으려는 혁명가들의 신념으로 조직되기도 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구는 사람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천부적 인권사상의 또 다른 모습이며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생각에서 기인되는 것이다. 신비적이지만 현실적이며 정치적인 준거인 것이다. 세상이 어려울수록 정감록은 종교적으로 변질 되고 그것의 모습은 정치적으로 표현됐다. 아무튼 조선시대 후기 안방의 최고 인기 있는 책은 토정비결이었고 사랑방의 베스트셀러는 정감록이었다.
신왕리가 신왕리인 것은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합할 당시 신왕리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새왕이 나오는 것은 일제에게 또 다른 부담이 되기에 이름을 아예 바꿔버린 것이다. 전국의 신왕리가 그렇게 쓴다. 그래서 마을 유래를 보면 새롭게 성 할 곳이라는 뜻으로 썼다. 여기 신왕리도 '평택의 마을' 이란 책에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는 마을 유래를 글자로 풀어놓은 것에 다름 아니다. 삶터는 이름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왕터는 지금 보아도 사람이 살기엔 편협한 곳이다. 다만 노양리로 흘러드는 안성천과 둔포에서 흘러드는 둔포천 사이에 하천농지가 발달해 범람만 없다면 농사를 짓기가 좋았을 것이다. 농민들은 거기에 재래종 '다마금"을 심고 거두었다.
지금은 호수로 변해버린 드넓은 벌이 그들의 경작지였던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호수안에 잠긴 농경지에 대한 보상이 나왔다고 할 정도로 그곳이 왕골 사람들의 삶터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제방이 없는 강하안의 농지가 홍수에 의해 포락되어 농지로 쓸 수 없게 되자 원신왕으로 옮겨간 것이 아니겠는가. 을축년(1925년)대홍수기에 농지가 안성천으로 포락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장님의 말씀에도 묻어난다.
세상이 변하여 사람들의 삶도 많이 변했다. 마을의 모습도 생활의 모습도 변했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각박하다. 그러나 신왕마을 사람들의 삶은 그리 각박해 보이지는 않았다. 외지인에 대해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낼만도 한데 주민들은 마을처럼 포근한 모습이었다. 비록 옛일이 되어버린 귀신 씻나락까먹는소리는 실없고 텔레비전에서 쏟아내는 연속극에 더 관심이 가는 삶속에, 서낭귀신을 버리고 죽음을 마지막으로 수렴하주던 마을 뒤 상여집에 쓰지 않고 버려둔 상여마져도, 지나간 시절의 모습일 뿐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과 관심은 따로 있는 듯 하다. 누구나 그렇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