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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영광이 호위하는 선교적 삶
(그리스도의 긍휼의 눈으로 중국 땅을 바라보자!)
이사야 58:6-9
사 58:6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Is not this the fast that I have chosen: to loose the bands of wickedness, to undo the heavy burdens, and to let the oppressed go free, and that ye break every yoke?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Is it not to deal thy bread to the hungry, and that thou bring the poor that are cast out to thy house?--when thou seest the naked, that thou cover him, and that thou hide not thyself from thine own flesh?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Then shall thy light break forth as the morning, and thine health shall spring forth speedily; and thy righteousness shall go before thee; the glory of Yehowah shall be thy rearward.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Then shalt thou call, and Yehowah shall answer; thou shalt cry, and He shall say, 'Here I am......,'
지난 한 해를 돌아 볼 때 먼저 부끄러움이 앞선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하고자 했고, 이루고자 했지만 정황이라는 벽에 부딪혀서 ‘어어’ 하다가 1년을 보내고 말았다. 말 그대로 밥버러지처럼 한 해를 보내는 공간적 의미를 남기는 연약한 존재임을 고백한다. 그러나 결코 헛 된 시간이 아니었다. 그래서 새로운 사명의 공간으로 인도해 오신 하나님의 은혜가 새로운 해로 인도해 감을 바라보며 날개를 다듬고 있게 하신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살게 하였고, 조금씩 희망이라는 한 줄기 빛을 비추며 점차 확대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본인은 본문의 말씀에 의존해서 “여호와의 영광이 호위하는 선교적 삶”이라는 주제로 고백하고자 한다.
중국 선교는 앞이 보이지 않고, 겹겹이 쌓여 가로막고 있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져다주는 현장이라 할 수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미로와 같다 할 수 있겠다. 게다가 인위적인 그 힘은 거대한 문화우월 주의라는 기준이 더욱 기독교 우에서 기독교를 구속하는 현장이기에 더더욱 복잡함이 주도하는 것이다. 게다가 모든 움직임이 일정한 룰에 의해서 적용되는 현장이 아니기에 오히려 선교사들의 움직임이 바로바로 읽혀 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구조이기에 이곳에서 살아가는 것조차 신비스럽게 여겨질 정도이다.
지난 13년 전 하얼빈 경험에서 이미 짐작을 하였던 바였다. 선교의 순수성을 말하라 한다면 그것은 성령이 주도하시는 선교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선교의 앞선 교회가 교회적 사명을 선교에 두고 진행하고자 할 때 그 순수성은 성령의 주 된 사역에 의존해서 진행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님이 일을 하신다는 의미가 성립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실제적으로 원리와 실천이 일치되어야 함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초대교회와 개혁자들의 신앙적 유산이 모범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기반에서는 말씀의 원리를 가지고 가감하지도 않고 그대로 실천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령의 주도적 사역의 의미가 교회 안에 주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적 원리를 강조하되 의미상의 위치에 두는 것이다. 그리고 실천은 가미되거나 감소해서 진행되는 선교적 배경이 오늘의 주 된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현실이나 정황이라는 이유아래 인간의 의지나 계획(구상)이 주도하는 선교적 사이클을 말하는 것이다. 중국 선교는 이러한 배경이 중점이 되는 현장이 되고 있다. 이러한 배경은 철저히 인본주의적 방식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 인본주의에서 비롯되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방식주의나 실적주의가 점차 중점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중국 선교 20년은 열매보다 실이 더 과하게 작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실은 유사 기독교의 성질이 더욱 강해져가고 있다. 기독교가 중국에서 역사적 전통을 이어가는 기반이 되기도 전에 오히려 유사성이 더욱 강해지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중국 기반 자체가 인본주의의 가장 강력한 국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 현대 기반은 철저히 물질을 중심으로 하는 기반이다. 그리고 그 기반의 배경이 문화우월주의인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이러한 인위적 방식으로 들어오는 것 자체가 게임이 되지 않고 오히려 이 문화우월주의에 잠식되는 선교가 되어가는 것이다. 게다가 북한이 이러한 틈새를 노리고 개입하고 있기에 더더욱 어려운 국면이 진행되는 것이다. 지난 13년 동안은 이러한 중국 선교적 현실을 바라보는 현장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우려가 앞서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본주의는 기독교 본질을 중요시하여 신앙적 배경으로 진지하게 문제들을 풀어가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방식의 문제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방식 위주의 선교적 기반은 정황에 따라 적응하고자 하는 선교적 환경이 중심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결국은 오늘의 중국 선교 현장은 남미와 같은 현상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것은 현재 신앙중심의 기반보다 프로그램이 주도되고 있는 우리 한국교회의 교회 환경과 접목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프로그램 중심은 종교적 원리를 선정이나 선동성으로 지향하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주의라는 넓은 의미의 기독교 현실을 가져왔으며, 모든 의미와 사상, 심지어 다른 종교까지도 믹서 되는 현실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결국은 오늘의 종교적 형태의 교회적 환경으로 연결 되었다 할 수 있다. 이것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중국 선교적 현장이라는 점이다.
교회는 본래 그 기반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삼위(三位)가 한 하나님으로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이 다스리심의 기반 우에서 출발하고 수종(隨從)드는 교회적 기반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적 역사성과 전통성의 의미가 형성되고 계속 지속되어가야 하는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적 근본이라 할 수 있다. 교회적 근본이란 이러한 신앙적 근본을 잘 드러내고 받들어야 하는 본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교회적 사명이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현실교회의 일반적 형태는 이러한 역사적 기반을 무시하고 자신들 중점의 새로운 기독교 운동을 전개해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교회의 근본의 기반과의 이질로 나아가는 현대의 ‘해체적 성질’이 작용되는 것이다.
다만 교회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시대에 편승하다보니 따라가는 것이다. 이것을 적극적 현실에 동화하는 낙천적 성향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파괴적 성향이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파괴적 성향은 바로 낙천적이라는 이유아래 이루어지고 진행되어져 가기에 인류가 그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는 성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의 파괴적 성질은 과거의 물리적 파괴력보다는 더욱 교활성을 갖춘 폭발력이자 대중적이고 전체적 성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에 의존해서 따르기 보다는 바로 이러한 현실적 낙천적 이유아래서 적극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인간은 행동을 잘 하느냐 못 하느냐를 통해서 그의 근본을 논한다. 왜냐하면 그의 행위를 통해서 모든 ‘사물이나 의미들’에 대한 정도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내가 말이나 행위를 잘 못하면, 어떤 가족 구성원들이 그 행실을 바르게 하지 못하면, 그만큼 자신이나 집안을 욕 되게 하는 것이다. 국민이나 정치인들이 행위가 그릇되면 그만큼 나라가 무너지도록 하는 에너지가 강하게 형성되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지극히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룰이다. 물론 오늘의 시대 자체가 이러한 순수성을 거부하는 성질이 강해져 있지만 말이다.
교회적 사명은 이 땅에서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는’일에 그 교회적 본을 두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가 서로 싸워서는 안 되는 것이다. 교회가 진리 문제에 있어서 지상 최후까지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가벼이 그 위치를 설정하면 안 되는 것이다. 가벼이 그 위치를 설정하면 안 된다는 의미는 현실이라는 이유아래 세상과 쉽게 타협하는 애매모호한 위치 설정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세속의 유행에 휩쓸려서 성경적인 용어나 교회적 환경을 가벼이 하고 공교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인가! 바로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을 충실히 받들어야 하는 기반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나라 때 경교는 바로 이러한 점을 경홀히 취급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던 것이다. 당나라는 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부강하고, 안정적이고 오랜 역사를 가질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초기 기독교가 국교로까지 되어 3세 때까지 이어졌지만 바로 용어사용에서부터 타종교와 토속적이고 무속적인 개념으로 혼합되면서 약화의 길을 걸었고, 결국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방식이나 현실에 중점을 두는 교회의 멸망의 모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방식이 중심이 되는 교회적 기반이 될 때, 교회 근본적 문제가 가벼이 취급되고, 행정의 문제가 중점이 되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그것은 바로 프로그램 되고, 기획되고, 곧 선정적이거나 선동적으로 유도되는 인위적 속성이 강해지는 교회적 환경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장 실적이나 어리석은 대중들을 속이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회적 환경은 선교 현장에서 그 지역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미명아래 교회적 근본의 기반을 버리고 ‘정황의 시종’으로 전락해버리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신앙 원리나 가르침은 그 선교 현장을 복음화로 나아가게 하는 기반 형성이 아니라 오히려 그 기반에 종속되는 형태로 진행되는 것이다. 현재 중국선교 현장이 그렇다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중국 현지의 문화가 그 방식으로 들어온 기독교 기반보다 더욱 뛰어난 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중국 선교는 처음부터 잘못 설정되어 출발한 선교 현장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중국 기반자체가 문화우월주의적 힘이 주도하는 현장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오는 중국인들의 삶이나 정치력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그 어떠한 방식도 능가하는 기반이 되며 바로바로 읽히는 수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예를 하나 들어보자! 세족식은 우리나라교회 일부에서 세계 신비주의에서 출발한 그것을 예식의 의미로 수용하기 시작한 지가 20, 30년 되었다. 주로 중고등부 수련회의 프로그램에서 채택되어 이루어지던 것이 특정한 교회들이 교회 예식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식상한 신앙으로부터 탈피하는데 대단히 신선하고 산뜻한 방식의 문제가 되었다. 더구나 기존교회 목회자들의 권위에 식상해하는 대상들이 많아지는 시점에 이 세족식은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신비적 행위에는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는 성경적 교회 전통적 기반을 파괴하는 속성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교회 기반을 받쳐주고 있는 성경적인 영적 권위를 파괴하는 사탄의 전략이 숨어 있는 것이다. 오늘 날 교회 기반이 약해져 가는 것은 교회가 내포하고 있는 신령성이나 거룩의 문제를 오히려 프로그램화해서 교회 기반을 무너지게 하는 파괴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바로 이러한 점이 선정적(煽情的)인 문제에 국한 되는 교활성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 세족식은 예수님의 존재와 관계되어지는 문제라 할 수 있다. 먼저는 예수님과 동일화 추구이다. 이것은 구교의 구조 속에서 엿 볼 수 있다. 교황은 자신이 죄를 사할 권세가 있음을 선언함으로써 예수님과 동일화를 추구했다. 겸손의 의미에다 역점을 두고자 한다는 미명아래 은근히 자신의 의를 예수님과 동격의 위치에다 올리고자 하는 일부 그릇 된 목회자들의 기만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숨기고 주님께서 그랬듯이 우리도 그래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선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경쟁이나 특정한 교단지향의 왕국을 세우고자하는 교회적 기반에서 추구되는 선정적인 환경이라 할 수 있다. 경쟁은 주변의 교회들과의 차별화의 배경이라 할 수 있다. 자기 교회는 주님과 같이 섬김의 본을 보이는 바람직한 교회라는 점을 다른 교회와 차별화 하고자 하는 의도성이다. 이것은 결국 자기를 의로운 위치로 올리는 종교적 테크닉이자 광고성이다. 교회 공동체를 훼손하는 개별교회들의 의의 대한 남용이라 할 수 있다. 결국은 교회라는 기반 자체에 불신을 가져오는 행위지만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보다 더 의인 되지 말며” 라고 성경은 미리 말해 주었던 것이다.
왕국은 천주교와 같이 자신 교단 중심의 교회 구조를 형성하고자 하는 배경에서 이러한 차별화적 프로그램이 주도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주님께서 피 뿌려 구속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세우신 교회적 근본이 역사 속에서 실현 되고 지속되는 전통성이 현실 속에서 그대로 보존되고 지속되어가야 하는데 그 당대의 교회적 책무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적 환경을 노골적으로 거부하지는 않는 형태를 하지만 은근히 방치하는 태도로 일관함으로 그 기반이 무너지도록 함이 그 배경으로 깔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새롭게 형성 된 자신들 교단을 왕국화 하는 기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현실에서 부흥과 확장이 목적이 되고, 그것은 종교적 사업과 같은 형태가 구조적으로 펼쳐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수단 방법을 동원하고, 세속의 현실과 동일화의 구조로 나아가는 것이다.
교회 신앙원리나 중요한 교리를 교묘하게 프로그램화해서 자신들을 예수님과 동일한 위치로 올려놓고자 하는 기만술인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나 능력위주의 성령론이 필요해 진 것이다. 그것이 충분히 가능하도록 해 준 것이 인류 문명의 발전적 기반은 그 무엇도 조작할 수 있는 현실적 배경이 되고도 남는다는 점이다. 세족식을 거행하는 일에 있어서 위험한 요소가 바로 이점에 있다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처음 이 문제를 교회 안에 던져 놓은 자들의 그 의도성에서 그 진정한 답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의 배경에 대한 부정적 의미부여라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교회 안에서 어떤 지도자나 특정한 대상이 이 세족식을 통해서 예수님과 동일하게 섬기는 그 좋은 모습을 보였는데 실제적으로 그렇게 살지 못하고 더구나 악을 행하는 자리로 들어간다면 주님께서 행하셨던 본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예수님의 위치와 행위를 부정하게 하는 의도가 들어 있다는 점이다. 자신이 예수님처럼 이라는 이유아래 자신을 겸손의 극치로 올리고자하는 의도와 함께 반복되는 실제적인 재현을 통해서 오히려 그릇 된 이미지로 재설정하고자 하는 악한 의도성이 숨어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세족식이 중국 선교 현장에서 그대로 실행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중국인들은 수용을 못하고 오히려 이상하게 바라보거나 중국 기존의 교회들은 이단시 하는 분위기가 강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것은 오히려 중국 문화 우월주의에 호응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들을 몇 가지로 지적해서 말 할 수 있겠다.
먼저는 이러한 프로그램화가 선교사들 개별적인 성향이나 중국 선교가 어려운 나라의 사회적 정황에 의에 맺어진 특수한 관계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선교사들은 어려운 중국 선교적 정황 안에 갇혀 있다. 이것은 중국의 독특한 상황이고, 더구나 문화우월주의는 모든 것을 중국화라는 우월주의 의식과 정치적 경향은 선교사들로 하여금 못 견디게 하는 위협 자체가 되는 정황인 것이다. 세계 그 어느 강력한 지역의 핍박보다도 더욱 강렬한 국가적 구조 안에 선교사들이 놓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알게 모르게 선교사들이 정도를 버리고 이러한 중국문화 우월주의에 예속되어 그 어려움을 비켜가고자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복음이 바르게 전해 질 수 있겠는가! 물론 이것은 주님께서 판단하시겠지만 오히려 중국 문화우월주의가 그려가는 구도아래서 변형되는 복음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러나저러나 그리스도의 복음만 전해지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할 것이다.
다음으로 이 세족식이 위험한 것은 공산주의가 표방하는 허울뿐인 ‘평등’의 의미에 이용될 뿐이라는 점이다. 예수님의 섬김의 본이 전도 될 위험성에 놓이는 것이다. 중국의 선교는 신앙의 원리나 의미들이 이와 같이 중국식 정황에 의해 교회적 신앙의 본말이 전도되는 데서부터 선교의 실패가 동시에 진행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중국 선교가 문화우월주의 아래에 예속되는 과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선교사는 많든 적든 본국의 교회로부터 보내져 오는 선교비로 살아야 한다. 그런데 중국으로부터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그것을 선교사들이 대단히 성공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들이 바로 중국 문화우월주의 아래로 들어가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세족식은 또 다른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보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 세족식이 문화적으로 우월한 자신들에게 선교사가 섬겨야 한다는 이유로 연결해서 생각할 위험성이라는 점이다. 여기에 좀 더 직설적으로 지적하자면 선교사가 자신들의 문화 우월주의 아래로 들어오는 구조를 형성하고자 하는 숨은 의도성에 이용당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행하셨던 원초적 본말이 전혀 다르게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수 있는 점이다.
우리 선교사들이 선교를 정치와 접목해서 들어가서는 안 되는 금지사항이 오히려 현장의 정치력에 이용당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점에서 우리 한국교회의 선교적 책무가 않고 있는 어려움 점 또한 내포하고 있다. 유럽이나 미국은 그 국가적이고 지역적인 권위의 선교국가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중점적으로 선교 책무를 감당할 때 약소국들의 선교대상들에게 그만큼의 권위가 주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한국 선교는 그와는 다르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더더욱 영적 권위와 가벼이 행하면 안 되는 차원에서 그 책무의 무게가 있다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선교 초기부터 이와 같은 세족식의 행위가 아무리 좋다할지라도 지향해서는 안 되는 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사악한 인간들이 인간적 행위와 관련 된 신앙의 원리를 악용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100년 전 우리 한국에 들어 온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는 감사의 이유가 되고도 남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씀을 중심하여 선교를 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말씀이 강조되는 사경회 중심의 복음 전파가 진행 된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들을 말씀으로 세우고자 한 선교사들의 신앙적 행위는 하나님의 축복이자 대단한 감사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반면에 중국 선교는 선교사들이 자신의 개인적 행위나 특정한 교단적 배경에 그 역점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서로 연합도 안 되고, 개인적 열정은 대부분이 한국에서처럼 기획되고 프로그램 중점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가령 예를 들자면 시골 방문을 통해서 찬양이나 설교 등을 한 번씩 해주고 오는 형태가 대부분이다. 물론 어떤 신실한 선교사들은 지속적으로 말씀 교육을 해가고 있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한국교회처럼 선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교회를 역사적 반석에 뿌리를 내리도록 하는 구조가 못 되고 있다.
본인이 중국 아내를 맞아 산지가 13년 넘어가고 있다. 아내는 최소한 함께 살면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지가 5-7년 전부터이다. 그 이유는 아내의 대답 속에 있다. 자신들은 어려서부터 신이 없다는 교육을 받아 왔다는 것이다. 앉을 때나 일어설 때나, 식사 때, 그리고 학교나 가정, 온통 사회 자체가 이러한 구조를 강하게 형성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죄나 구원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설교나 이야기를 들을 때 너무나 오랜 시간 부딪혔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말씀이 그대로 아내의 마음에 꽂힌다. 구원의 은혜에 대해 감격하며 죄에서 해방되었음에 감격해 한다. 다시 말해서 신앙생활에 익숙해 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나 그 부정의 힘이 너무나 오랜 시간에 걸쳐서 강화되어져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함께 살아도 시원찮을 판에 주변을 돌면서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을 조금씩 제공하면서 하는 것이 얼마나 실제적으로 이루어지겠는가! 더구나 지금은 중국 경제가 급성장을 하면서 이제는 한국 사람들이 주지 않아도 된다고 대놓고 말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아내의 입을 더 빌려보자! 그럼 왜 선교사들에게 오고 믿는다고 하는가? 바로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얻고자 함이라는 것이다. 자신들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신을 부정하는 소리를 듣고 자랐지만 물질에 중요성에 의해서 그 무엇도 행동할 수 있는 처세에 능한 민족이라는 것이다. 농촌 사람들은 도시로 나오고 싶어서, 선교사가 본국으로 돌아가면 가전제품들이나 필요한 것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수많은 현실적 이유들에 의해서 잠시 동안의 믿음의 행위라는 공간에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 아내가 고백했다. 아내도 때론 주일에 예배를 가지 않으려고 할 때가 있다. 물론 건강이 좋지 못한 현재의 상태에서주로 발생하는 경우이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본인의 마음을 강하게 하여 아내를 기어이 예배에 참석하게 하도록 하신다. 그러면 반드시 은혜를 받고 신앙은 한 단계 더 진보로 나아가는 축복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가 하는 말이 함께 살면서 옆에서 이렇게 강하게 하기 때문에 내가 그나마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을 수 있는 현실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감사해 하는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는 이러한 점을 직시하면서 중국선교를 지향하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너무나 사단의 방해는 강렬하고, 온갖 방법으로 선교사들을 약하게 하고 힘들게 하여 포기하도록 하는 구조 자체가 큰 시험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경제적인 이유로 선교라는 명분을 통해서 이익 추구로 일관하다보니 거기서오는 선교 폐단이 현지인들로부터 배척을 받거나 신뢰를 잃어버리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때에 교회적으로 파송시부터 오직 선교사로 전념하여 살도록 해서 보내는 것을 다시 고려해야 할 시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 마인드는 평신도들이 들어오면서부터 경제인으로 들어와 사업이나 장사를 한다면 문제 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교사로 들어와 장사나 사업을 위주로 삶을 추구하다보니 수많은 잘못된 폐단들이 발생하고 결국은 선교 자체를 어렵게 해놓는 중국 선교 현실이 되어 있다고 고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모두 새해를 맞아 중국선교에 다시 한 번 새로운 마음으로 기도의 장을 열었으면 해서 “그리스도의 긍휼의 눈으로 중국 땅을 바라보자!”라는 2011년의 가정적 주제를 설정해 보았습니다. 다음에 이어서 이 주제에 대해서 직접적인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을 통해서 중국 선교를 어떻게 우리 한국교회가 잘 감당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책무의식을 다시 재설정하는 해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이 일에 성령께서 특별히 개입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한국교회를 통해서 중국 땅에 가득 드리워지기를 간절히 갈망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대명교회의 2011년 우에 그리고 이 행복 충전소에 들어오시는 여러분 모두의 뒤를 호위해 가시는 축복 된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곤명에서 김종신 선교사가 새해를 맞아 고국의 교회와 중국 선교 현장을 위해 기도하면서......
많은 중보적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한국과 중국을 사랑하며 여러분들을 사랑합니다.
다음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