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박대통령이 사업을 추진할 때는 정해진 단계가 있다. ①원리의 도출 ②원칙의 수립 ③시행계획 작성 ④집행 단계이다. 그리고 朴대통령은 ⑤정기적인 회의에도 참석해야 하고 ⑥연초에는 각 부처나 지방관서 순시도 해야한다. ⑦인사 행정조직도 갖추어야 한다. ⑧국가 원수로서 중대한 결단도 내려야 한다. 이런 순서로 설명을 한다.
박정희 대통령 때는 「브리핑 행정시대」 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그 중요성이 컸다. 브리핑 제도를 이해 못하고는, 朴대통령 시대의 행정을 이해할 수 가 없다. 그래서 브리핑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한다. 일반적으로 브리핑할 때에는 「브리핑을 하게 된 목적과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내용」이 있기 마련인데, 이것이 브리핑의 골자를 이룬다. 통칭 “시나리오”라고 했는데, 내용이 좋으냐, 나쁘냐에 따라 브리핑의 성패가 결정된다. 나머지 문제는 「이 “시나리오”를 어떻게 잘 설명하느냐」 인데, 이것은 브리핑 담당자의 몫이다. 그러나 브리핑에 어떤 양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복잡한 내용을 설명할 때는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이럴 때 필자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워 놓고, 브리핑 원고를 작성했다. ○ 「출발점」부터 「결론」까지 모두 포함되어야 하는데, 그 줄거리는 일로 매진하는 식으로 나가야지, 흔들려서는 안 된다. ○ 구분을 해 주어야 이해하기 쉽다. 구분에는 큰 구분과 작은 구분이 있다. 그리고 메시지 전달을 돕기 위해 도표를 많이 사용한다. 필요하다면 한 메시지를 한 박스로 만들어서 전달한다. 박스 형태를 사용하면 브리핑을 받은 사람에게 주의를 환기 시킬 수도 있다.(이렇게 돼서 본 논문에서는 100개에 가까운 구분이 있는데, 이 만큼의 크고 작은 메시지를 전달코자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 브리핑 설명은 순식간에 납득이 가능하도록 간단명료해야하는데, 그러자면 이해하기 쉬운 말을 써야하고, 거부감이나 혼선이 생겨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난해한 이론은 금물이다. ○ 강조해야 할 사항은, 되풀이 설명한다. 되풀이 설명하면 여러 사람이 머리에 남게된다. 학술논문 발표와는 다르다는 뜻이기도 하다. ○ 결론은 명확해야 한다. 이론 정연하고 실시 가능한 방안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만 청취자 전부가 동감을 하게 되고, 대통령은 결단을 내릴 수 있다.
① 첫번째, 원리(原理)의 도출:
원리라는 것은 발견되는 것이지 생각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원리는 불변이다. 일단 정해지면 바꾸어서는 안된다. 행정면에서는 “국시(國是: 나라의 기본이 되는 방침) 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정해지면 모든 행정의 판단 기준이 된다. 이 점은 경제면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의의(意義)를 내포한다. 「경제원리」 라는 것은 국가경제 발전이 목적이다. 따라서 이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수립된 정책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해 변동이 생긴다 해도, 국가경제 발전에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바꾸어지게 된다. 예를 든다면 「국민의 민생고 해결과 경제자립」은 우리나라 60년대 초기의 「경제개발 원리」였다. 박대통령은 이 원리를 달성 하기 위해, 「경제개발 5개년계획」 이라는 정책을 수립해서 추진했으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그래서 「수출제일주의 정책」으로 전환을 했는데, 이러한 정책변경도 똑같은 「경제원리」를 달성하기 위해 수립된 정책이기 때문에, 서로 상치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더구나 수출을 하다 보니 「수출이야말로 국가 기본전략」 이라는 점을 발견하게된 박대통령은, 「수출제일주의」를 우리나라의 국시(國是) 즉, 「경제발전 원리」로 승격시켰다. 「국민생활향상」 「고용증대」 「수출제일주의」 「공업입국」 「전산업의 수출화」 「국민의 과학화」 「남북한 경쟁에서의 승리」 「고도산업국가 건설과 선진국 진입」 등이 「경제원리」에 속하는 사항이다. 국가원수인 박대통령이 직접 담당해야 할 과제인데, 청와대 비서진이 보좌하게 된다. 박대통령은 임기 18년 동안, 도출된 원리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그래서 국민도 믿고 따라간 것이다. 원리가 통하는 세대였다는 뜻이다.
원리(原理)나 국시(國是)라는 것은 잘못 사용하다 보면, 정치 구호화(口號化)되기 쉽다. 어떤 정치가가 「우리나라가 잘 살기 위해서는 수출을 해야 한다」고 떠들어 보았자, 이것은 정치구호의 역할밖에 못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피하려면 비전(Vision) 형태로 제시해야 하는데, 비전이 좋으냐, 나쁘냐에 다라 성패가 좌우된다. 그래서 비전을 효과적으로 제시하는 것이야 말로, 국가원수의 중요한 책임사항이 되는 것이다. 朴대통령은 수치화(數値化)하는 방식을 썼다. 수치로 표시하면, 국민들은 알아듣기 쉽다. 목표가 달성되었을 때의 수준을, 현재와 비교할 수 있고, 진행 과정도 수량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朴대통령은 「수출 제1주의시대(1964~1970년)」에는 10억$의 수출목표를 제시하면서, 년간 40%의 수출증가율을 요구했다. 이 목표가 달성되면 보리밥을 먹을지언정 국민의 생활고(生活苦)는 해결된다고 했다. 경제자립의 기초가 마련된다고 했다. 「전 산업의 수출화시대(1973~1980)」에는 100억$의 수출목표와, 년간 40%의 수출증가율을 지시했다. 이 목표달성으로 국민1인당 GNP는 1,000달러가 돼서 국민의 의식주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고, 우리나라는 중화학공업국가가 된다고 했다. 북한과의 경제전에서는 완승(完勝)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하면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며 정부를 독려하고, 국민을 격려했다. 이것이 朴대통령의 국가경제건설 전략이었다. 그 결과 연간수출증가율은 1964~1970에는 41.9%, 1971~1979에는 39.8%를 달성했다. 16년간 평균 40%의 성장이라면, 기적과도 같은 성과이다. 朴대통령의 성품 즉, 신념, 집념 그리고 고집을 잘 나타내는 결과이다. 수출이 증대하다 보니, 그 효과는 전 산업에 파급되고 고용도 급격히 늘어났다. 국민의 생계도 좋아졌다. 우리나라의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또한 정신면에서는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용기와 자신을 심어주기 위한, 산 교육장 역할도 했는데, 이 정신은 지금까지도 살아 남아서, 한국인의 정신적 지주(支柱)가 되고 있다.
② 두번째, 「원리」가 정해지면, 다음단계는 원칙(原則)의 작성이다.
행정면에서는 정책수립단계라고 할 수 있다. 국가전략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안이 있겠으나, 우리나라 현실로서, 가장 합리적이고 실행 가능한 방안을 수립하는 단계이다. 석유화학, 종합제철 건설 계획, 자동차공업육성방안, 전자공업육성방안, 장기수출계획, 농어촌 전기공급 방안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각 담당부처에서 작성되는데 국가원수인 박대통령의 재가를 얻어야 확정된다. 이때, ‘브리핑’하는 방식이 활용됐다. 이 자리에는 국무총리 이하 각부장관, 관계기관장 등이 배석하는데, ‘브리핑’은 해당과제에 대해서, 가장 지식이 많은 공무원이 담당한다. 보통은 국장급이 했지만, 과장급도 국가대사에 대해 정책을 수립해서, 대통령 이하 정부 최고간부 앞에서 설명하고, 질문에 대해서 답변한다는 뜻이다. 실무에 밝은 박정희 대통령은 브리핑을 받는 자리에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질 때가 있는데, 이때 장차관이 답변을 못하는 경우가 나오기 때문에 생겨난 제도이다. 국장이든 과장이든 간에, 내용을 가장 잘 아는 실무공무원 즉, 테크노크라트가 우대되던 시대였던 것이다. 두 부처에 관계되는 사항에 대해, 두 부처간에 의견이 다를 때에는, 같은 장소에서 두 부처가 제각기 브리핑을 할 때도 있다. 이렇게 되면 브리핑을 담당하는 두 부처의 공무원간에, 격론이 벌어질 때가 있는, 박대통령은 모든 의견을 다 듣고 최종결단을 내렸다. 이럴 때는 어느 쪽도 불평할 수가 없었다. 양 부처 장관은 사전에 합의를 끌어내지 못한 책임이 있어, 대통령에게 송구하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예는 장관이 최종결정을 못한 채 브리핑할 때가 있다. 즉 결론에서 A안과 B안을 내놓고, 서로간의 장단점만 설명할 때이다. 이럴 때 박 대통령은 「장관! 당신은 A안을 택하겠다는 것이요, B안을 택하겠다는 것이요」 하고 호통을 친다. 장관은 책임행정을 하라는 뜻이다. 각 해당부처에서 작성하는 경제개발 계획은, 장관 이하 전 공무원이 머리를 맞대고 합심해서 수립하는 것이지, 대통령의 눈치나 보고 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질책이기도 하다.
각 부처에서 정책을 수립하고, 대통령 재가를 받기 위해 브리핑할 때에는, 마지막 페이지에 꼭 건의사항이 나온다. 보통은 「자금요구」 사항이 된다. 1969년 6월 상공부에서는 전자공업육성에 대한 브리핑을 했다. 골자는 「1976년에 4억$의 수출을 해내겠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2000만$정도를 수출하던 당시 입장에서, 이런 약속을 들은 박대통령은 만족을 했다. 그래서 옆자리에 배석하고 있던 김학렬 부총리에게 “부총리, 낼 수 있소.” 했다. 김부총리는 “예, 상공부 안재로 조치하겠습니다.”라고 명쾌한 답을 했다. 朴대통령은 “그럼, 상공부 안대로 추진하시오”라고 결정을 내렸다. 전자공업육성방안은(1969년부터 1976년까지) 8년간에 걸치는 장기계획인데, 여기에 소요되는 8년 간의 사업추진자금(140억원 약 5,000만$)이 일시에 확보된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국고 사정은 미약해서, 예산 얻기란 아주 힘들었다. 그것도 매해 사업별로 1년도분씩 배정받게 된다. 그래서 각 부처에서는 갖가지 노력을 다하게 되는데, 실패할 경우 새로운 사업을 착수할 수가 없다. 진행되던 사업도 중단되기 쉽상이다. 그러나 대통령 재가만 얻으면, 사업이 완성될 때까지의 예산이 확보되는 것이다(註: 이런 자금을 ‘목돈’이라고 했고, 이런 자금을 확보하는 계획을 「목돈작전」 이라고 칭했다). 요약 정리하면, 정책사업은 ① 각 부처의 국장이나 과장급에서 성안을 하고 ② 장관의 결제를 얻은 후 ③ 관계장관이 배석한 자리에서 대통령에게 브리핑하게 된다. ④ 이 회의에서 검토를 거친 후 사업이 확정되는데, ⑤ 소요예산도 이때 확보된다. 이런 절차에 따라 결정된 사업을 「대통령 관심사업」 이라 칭했다. 「대통령 관심사업」 이라는 말은, 국민이나 사업가에게는, 대통령이 적극 지원해주는 사업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이후 전자공업은 급신장하고 수출은 늘어만 갔다(註: 한 예로 삼성전자(주)는 이 회의 1주일 후인 1969년 6월26일, 이병철 회장 명의로 「전자공업의 오늘과 내일」 이라는 글을 일간지에 게재했고, 9월22일 합작투자신청서를 제출하여,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은 후, 1970년 1월20일에 회사를 설립한다). 1968년도의 전자제품 수출액은 1944만 $였는데, 8년 후의 목표년도인 1976년에는 10억 3,600만 $를 수출했다. 8년만에 53배의 증가율이며, 목표량(4억 $)대비는 250%의 성과였다(註: 필자 저 한국형경제건설 3권 p327참조).
③ 세번째, 원칙이 정해진 후, 세부계획 작성에 들어가는 단계이다. 세부 계획은 각 부처에서 수립하는데, 중요한 안건은 서류로 작성해서 대통령의 결제를 받기도 하지만, 장관 책임하에 확정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결정된 계획은 장관책임하에 집행하게 되는데, 성공하면 그 부처의 공이 되고, 실패하면 책임을 지게 된다. 전적으로 각 부처의 책임행정사항에 속한다. 원리와 원칙이 제대로 확정되었다면, 세부계획 단계에서의 작업은 수월해진다. 또한 자유재량의 폭이 적어져서, 비리의 발생 소지가 줄어든다. 세부계획 작성 단계에서는 공장 설립과 관계가 많다. 전자공업에서 예를 들기도 한다. 전항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전자공업육성정책은 대통령의 관심사업이 됐고, 소요자금도 확보됐으니, 육성정책에 따라 육성업종을 공고하고, 기준에 따라 업체를 확정하면 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공장을 건설하자면 내자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기계설비를 도입해야 하기 때문에 「외자도입」이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 외자도입을 하자면, 정부에서 지불보증을 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국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결국 외자도입은 국회에서 결정권을 갖고 있다는 뜻이 된다. 국회는 정치하는 곳이다. 그런데도 여당과 야당과 부총리간에, 공장건설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사업을 직접 담당하는 상공부 직원은 반대 의견을 갖고 있는 국회의원(주로 야당의원)을 찾아가서, 필요한 자료를 제시하면서 설득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반대하던 국회의원도 합의하게 된다. 당시는 국가 경제발전에 대해서는, 국민 모두가 협력하던 시대였다. 이렇게 어렵게 건설된 공장인데도, 부실 기업체가 발생했다. 이자나 분활 상환금을 못 물어-정부를 대신해서 지불 보증을 해준 은행이- 대신 갚아주어야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회사측에서는 자금이 바닥났으니, 부실 공장의 운영도 은행에서 할 수 밖에 없게 됐다. 그런데 항간에서는 부실 회사의 기업주는 고급차량을 타고 호화생활을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드디어 朴대통령은 철퇴를 내렸다. 청와대내에 임시로 「부실 기업 정리기구」를 설치하고, 무려 30여 개 업체를 정리했는데, 이때 기업도 빼앗기고, 재산도 날린 업주가 많았다. 이후 「기업은 망해도, 기업주는 산다」라는 풍조는 자취를 감추었다. 국민들의 평도 좋았다. 「신상필벌(信賞必罰)의 기풍」이 서 있을 때이다.
「시행계획 작성」 단계에서의 한 특별한 예를 든다. 국군 현대화 사업(율곡사업)의 사업추진 과정이다. 朴대통령은 이 사업의 추진과정에서, 무기의 선정은 무관(武官)에게 담당시키되, 이에 대한 검토는 문관(文官)에게 맡겼다. 미국의 군사원조가 무상원조(MAP)에서 유상원조(FMS)로 바뀌어지자 朴대통령은 외무부 직원(최광수국장(후에 청와대 수석 비서관, 외무부 장관 역임)을 국방부 군수차관보로 임명했다. 현역군인이 아닌 문관(文官)출신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그리고 1974. 3.15 「율곡사업」을 발족시켰다(초기 재원은 방위성금, 1975. 7.16(이후는 방위세). 이 사업의 의결기구로 「국방부 5인 위원회」를 구성했는데 국방차관(위원장) 합동참모본부장, 군수차관보, 국방과학연구소(ADD) 소장,경제 제2수석이 그 위원이다(註: 5명중 3명 즉, 군수차관보, ADD소장, 경제 제2수석은 문관(文官)행정가이다). 또한 朴대통령은 「방위성금은 국민의 성금이니, 절대로 부정이 개입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라」고 했다. 그 후 방위세가 신설되자, 「국방부에서 올라오는 율곡사업을 안건마다 다시 한번 심의하기 위해 청와대에 위원회를 구성하라」고 지시했다. 국회의 심의과정을 대신하는 제도를 만들라는 뜻이었다. 이렇게 돼서 「청와대 5인 위원회」가 생겨났다(註: 안보담당특보는 퇴역장군, 경제담당특보, 정무, 경제1, 경제2수석비서관은 문관출신). 이 회의 때 국방부에서는 각군 차장이 배석하지만 심의권은 없다. 여기에서 통과된 안건의 뒤처리는, 경제2수석이 담당하게 되는데, 수백 건이 되는 안건을 안건마다 서류로 작성해서, 대통령의 결재를 받아야 하는 고역이다. 방위세가 공표된 것은 1975년 7월16일인데 바로 2일 후인 7월18일 「국방부 5인 위원회」 위원으로 경제기획원 차관을 추가토록 지시했다(이후 5인 위원회는 국방부 6인 위원회가 됐다). 즉, 예산당국인 경제기획원에서, 무기선정 때부터 검토하라는 뜻이다(註: 방위세는 부가세(附價稅) 개념으로 징수되어 예산심의 없이 국방부에 배정되기 때문에 생겨난 일이다). 더욱이 76년 5월14일 朴대통령은 국방부에 율곡사업에 대한 특명검열단을 신설해서, 율곡사업에 대한 감사를 실시토록 했다. 朴대통령의 의도는 명확했다. 율곡사업과 같은 국가 기밀사업일지라도, 일반예산과 똑같이 ① 경제기획원의 예산당국에서 검토를 해야 하고, ② 국회의 심의과정 같은 절차를 받아야 하고, ③ 청와대 비서실에서 검토 후 대통령 재가를 받아서 집행해야 하고, ④ 감사원과 같은 기구에서 감사를 받아야 한다는 기본원칙을 고수하겠다는 朴대통령의 강한 의지의 표출이라고 보여진다. 아울러 대통령이 안건마다 결재하는 것은, 비리발생에 대한 사전 방지대책이었다(註: 1975년~1980년까지 거출된 방위세액은 51억 4,800만$, GNP에 대한 국방비의 비중은 약 6%이다).
④ 네번째, 사업추진 과정이다.
朴대통령은 큰 사업에 착수 할 때에는, 꼭 기공식에 참석해서 축사를 통해 격려를 했다. 공사 중에도 현지 방문을 자주함으로써 작업진도를 확인했는데, 주로 공장장이나 현장책임자로부터 기술적인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준공식에도 꼭 참석해서 노고를 치하하고 훈장을 수여했는데, 주로 기술자의 몫이었다. 朴대통령은 행사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갈 때에는 차량을 이용할 때가 많았다. 지방에 산재해있는 수출품 제조 공장이나, 새마을 농촌 등 관심사업 몇 군데를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때로는 통고 없이 갈 때도 있으니, 아무런 사전준비도 못한 상황이 되거나, 사장이 부재중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어떤 작은 공장이나, 시골의 새마을 농촌에서도, 브리핑 차트는 준비되어 있었고, 웬만한 간부는 브리핑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이 당시의 유행이었다. 朴대통령은 현장을 둘러보면서, 현장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설명을 듣는다. 그리고 떠나기에 앞서 “애로사항은 없느냐”고 물어본다. 새마을 농촌에서는 “숙원사업은 없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이러한 ‘애로사항’이나 ‘숙원사업’에 대해서는 그 자리에서 비서실장에게 지시해서 문제를 해결토록 했다. 이런 일들은 큰 뉴스거리가 되기 때문에 「일하는 대통령」의 이미지를 국민에게 심어주게 된다.
한반도의 남단 「여천」에는 중화학공업건설(6개업종)의 하나인 화학공업 Complex가 위치해 있다. 朴대통령은 이 공업지구를 건설함으로써, 북한의 공업을 완전히 압도하려고 했다. 현재 여기에서 대규모의 정유공장이 가동하고 있다. 화학공업에 필요한 에너지와 원료를 공급한다. LG정유인데, 하루 70만 배럴(Bbl)의 처리능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수십개의 각종 석유화학공장이 있는데, 총 규모는 에틸렌(etylene) 기준으로 약 300만톤이다. 세계 최대 규모 수준의 석유화학 Complex이다. 「남해화학」 이라는 거대한 비료공장도 있다. 이 비료공장에서는 비료의 3대요소인 질소, 인산, 가리를 모두 생산한다. 총생산량은 남북한이 쓰고도 남는 양이며, 이에 따라 수출도 하고 북한에 원조 해주기도 한다. 북한의 비료생산 시설은 1930년대의 아주 구식공장이다. 우선 전기소모량이 많은 공법(工法)을 쓰고 있으므로, 전기가 부족하게 되면 생산을 중단한다. 생산되는 비료는 질소질 비료가 대부분인데, 그것도 ‘유산암모늄’이라는 단일품목이다. 오래 사용하면 토질이 ‘산성화’되어서, 곡식의 수획이 급감(急減)한다. 북한에서는 석유화학은 존재할 수 없다. 외화가 없으니 원유수입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朴대통령은 ‘여천 Complex를 수 차례 방문했다. 여천 Complex에는 물동량이 많은데, 수송비를 싸게 하기 위해서 대형선박을 사용한다. 그래서 20만톤급의 선박도 상하역(上下役)할 수 있도록 대형부두를 건설했다. 부두가 완성되자, 朴대통령은 이곳을 시찰했다. 그리고는 항만 관리소를 찾아가서, “여기는 외국선박이 자주 드나드니, 외국선원들도 많이 찾아올 것이다. 부두가 더러우면 한국에 대해 나쁜 인상을 주게 될 것이다. 미화(美化)작업도 하고, 늘 깨끗이 하시오.”라고 했다. 그 후 朴대통령은 또 한번 찾아갔다. 아마도 미화작업 확인차 들렀을 것이다. 부두는 깨끗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전국의 각 공단에서는, 미화작업에 힘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화작업 우수업체 콘테스트」를 열고 표창도 했다. 朴대통령은 조경, 미화작업, 정리정돈 등에 관심이 컸다. 朴대통령은 청와대(경제수석실)에 조경담당 비서관을 두었다. 전 국토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 그의 책임이었고, 그는 조경에 관해서 본대로 느낀대로 수시로 보고를 했다. 조경담당 특별 보좌관 역할을 할 것이다. (후일담: 필자는 대통령 서거 후 10여 년 만에, 여천 Complex에 갈 기회가 있었다. 이때 옛날 생각이 나서 부둣가를 거닐었는데, 거기에는 온갖 쓰레기가 산더미 같았다. 경비원이 있기에 연유를 물어보았다. “높은 사람이라곤 10여년간 한 사람도 찾아온 적이 없어요. 그러니 누가 관심이나 갖겠소.”라고 했다. 미화작업 분야에서 朴대통령이 가장 힘썼던 과제는 「전국의 녹화사업(綠化事業))이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산림은 현재 나무들로 울창하다. 앞으로 50년, 100년 후, 이들 나무는 거목이 되고, 산림은 원시림이 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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