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자: 스님께서 쓰신 글을 보면, 영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과, 신비적인 것이 많이 보입니다. 불교에서는 <신비주의가 아니고 현실적이다. 실존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깊이 들여다 보면 영적이고, 초월적이고, 신비적일 수밖에 없음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저도 영적이거나 초월적이거나 신비적인 것이 없다면 불교 공부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스님께서 이 세 가지 문제에 대해서 명쾌한 답변을 주신다면 제게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답변: 참으로 감사합니다. 깊이 있고 좋은 질문을 해주셔서.
제가 깊이 있고, 좋은 질문에 감사를 드린 것은, 공부라는 것은 오직 깊이 있고 좋은 질문을 통해서만이 서로의 공부가 향상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禪에서 살불살조(殺佛殺祖)를 강조하는 것은 초월적인 것이나 신비적이 것이 아닌 영적인 경계에 빠져서 자신의 공부가 진보하지 못하고 퇴보할까봐 자비심에서 쓰는 선지식들의 방편입니다.
수행자들은 선지식들이 자비로 쓰는 이방편을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수행을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영적인 것이 스스로 생겨나기를 바라면서도 겉으로는 살불살조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불교의 수행 풍토가 그러하니까요.
그리고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살불살조를 강조하는 수행자들은 누가 영적인 것을 말하면 무조건 잘못 된 것이며 사이비라고 떠들면서, 영적이지 않는 자신들은 제대로 된 공부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내가 그들 또한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그들만의 근기이기 때문입니다.
내근기로 다른 근기를 평하는 것은 서로 향상하는데 그 목적이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바람을 피우면 로맨스이고, 다른 사람이 바람을 피우면 불륜이 되는 그런 상황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정신세계 그 자체가 바로 영적입니다. 이 영적인 세계도 물론 건전한 것이 있고 건전하지 못한 것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건전하지 못한 것 때문에 건전한 것이 빛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우선 영적인 것부터 제 안목으로 풀어보겠습니다.
이 영적인 것은 수행을 하면서 일어나는 아주 좋은 현상입니다. 다시 말하면 수행을 하다 보니 몸과 정신이 변화 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적인 과정을 신비주의라고 평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영적인 것은 신비주의가 아닙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수행의 한 과정입니다.
좀 더 자세하게 풀어보겠습니다. 영적인 사람 중에는 영매도 있고 무당도 있고 또 빙의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그 영적인 것이 道인줄 알고, 그
힘을 돈을 버는데 쓰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쩔 수 없는 그 영적인 것이 전생의 業의 작용이라는 것을 알아 불교에 귀의하여 수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불교를 공부하기 전에는 아무런 능력도 없었는데 수행을 하다 보니 능력이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통 불교에서는 좋은 말로 식( 識)이 맑아졌다는 말을 씁니다.
이런 경우를 수행의 한 과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특히 주의할 것은 수행 중에 식( 識)이 맑아져 생긴 능력은 수행의 과정에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지만, 수행 중에 어떤 욕심이 생겨서 마음속으로 능력을 구하면 그 욕심에 준하는 빙의(憑依)가 몸에 들어와 그 빙의 힘을 쓰게 되는데, 그 이치를 모르는 수행자는 자신이 무슨 道를 얻은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됩니다.
참으로 주의해야 할 경우가 이런 경우입니다.
< 또, 한 가지 일러줄 것은 큰스님들은 모두 영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수행자들이 수행 중에 일어나는 그런 영적이 아니라 道가 깊어 갈수록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영적인 것 말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도력(道力)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도력이라는 것은 시절인연이 도래했을 때만 쓸 뿐, 함부로 쓰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신비주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수행과정에서 드러난 영적인 것을 함부로 남용하지 말라는 자비심에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좀 더 넓은 아량으로 이해를 해주어야 할 것은, 사람으로 태어난 그 자체가 業작용이기 때문에, 그 업이 드러나서 영적일 수밖에 없는 많은 사람들의 삶을, 수행을 감싸주어야 합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들이 영적이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그런 체질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영매적인 체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이 생은 그 영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윤회 과정에서 한 번은 거처야 할 과정이기에 이 또한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지금 영적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다음 생에는 분명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단계도 그 사람의 수행 근기에 따라 그 차별이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영적이지 않는 사람은 영적이지 않는 당신 자신을 좀 더 탐구를 해보아야 합니다.
나는 왜 영적이지 않는 거지?
또한 영적인 사람은 내 영적인 현상이 전생의 業이 수행과정에서 드러났다고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전생에 어떤 業이 있어서 나에게 이러한 영적현상이 일어나는 거지?
이러한 것들을 탐구해 가는 것 또한 수행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다음은 초월에 대해서 말을 하겠습니다.
초월이라는 것은 영적인 것이 아닙니다. 초월이란 단어는 생사초월을 했을 때만 쓸 수 있는 언어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생사초월이냐? 하면
수많은 윤회를 하면서 좋은 업이든 나쁜 업이든 그 업들이 모여 지금 당신의 모습을 만들어 놓은 것을 숙명이라고 하고, 그 숙명을 끌고 가는 것이 당신의 운명입니다. 이 숙명으로 만들어진 운명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수행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당신이 제대로 된 수행을 한 만큼 숙명이 녹아집니다. 그 숙명이 녹아진 만큼 운명이 바뀌게 됩니다. 그 숙명이 완전히 녹아 운명이 완전히 바뀌면 그 것이 바로 생사초월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업이 다 녹아 본래 면목자리가 들어 났으니, 생사초월이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스럽습니까?
불교는 신비주의가 아니라 신비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비적인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것은 부처님이라 할지라도 침범하지 못하는, 그 누구도 감히 대신해 줄 수 없는 아주 순수한 개인적인 깨달음인 것입니다.
생노병사의 고통에서, 육체적인 고행과 정신적인 수행을 통해서 수많은 영적인 현상과 수많은 마장을 다 맛보고 나서 깨달음을 얻었으니 이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적입니까?
끝으로, 어떤 영적인 현상과 어떠한 마장도 시절인연이 도래해야 그 사람의 근기에 맞게 다가옵니다. 사실은 이러한 것들이 참된 영적 도반인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무조건 내치려고만 하니, 무엇으로 수행을 할 것입니까?
그저 조용한 곳에 앉아서 자신이 들고 있는 화두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체, 어떤 주의(主義)에 빠져서 망상이 일어나지 못하게 경계만 하고 있을 것입니까?
그래가지고서야 어느 세월에 신비적인 것을 맛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영적이든 마장이든 모두 받아드려서 자신의 수행 처로 삼는다면 공부에 대단한 발전이 있을 것입니다.
道는 마장을 통해서만 깊어진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습니까?
2.초월세계에 대해서 질문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28대 달마대사님에게까지 전해 내려온 것이 정법안장입니다.
법을 바르게 보는 안목을 전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도를 닦는 것도 바로 자신의 안목을 키우기 위함입니다.
자신의 안목을 키워야 다른 사람의 법에 속지 않습니다.
여기서 다른 사람의 법에 속지 않는 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은 자신만의 안목으로 보고 듣고 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사람도 똑같은 안목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왜냐 하면 각자 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업이 바로 그 사람의 안목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참고는 할 수 있습니다.
저 또한 내 안목으로 질문자의 질문에 답을 합니다.
이렇게 긴 서두를 쓸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십시오.
문: 어떤 분들은 돌아가신 조상을 보기도 한다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저는 보이지 않고 경험해 보지 않아 궁금합니다.
답: 불교에서 보면 인간은 생사초월을 하기 전까지는 끝없는 윤회를 하게 됩니다.
그 윤회는 수 천생 수 만생의 업보들이 숙명이란 이름으로 뭉쳐서 이생의 몸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사과, 배, 감 등을 과일이란 이름을 쓰기도 하고, 사과, 배, 감 등으로 쓰기도 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듯이 숙명에 의해 인간 몸을 받았으나, 사과나 배, 감 등이 제각기 다른 맛을 가지고 있듯이, 사람들 또한 자기 자신의 주어진 길을 가기위해 서로 다른 체질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 주어진 길을 깊이 들어가면 끝이 없으니 이쯤하고>사람들의 타고난 체질을 이해하면 질문자가 이해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람 체질 중에 영매(무당)체질이 있는데, 이 체질은 본인의 의사하고는 상관없이 신들과 주파수만 맞으면 바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 신들은 몸이 없기 때문에 몸이 있는 영매에게 들어가 보통사람으로는 볼 수 없는 조상들을 보게 해 줍니다.
그러니까 신들이 영매의 눈을 통해서 보는 것입니다.
보통사람의 눈으로는 눈에 보이는 것 말고는 볼 수는 없습니다.
또 하나는, 도인들이 선정에 들어서 스스로 한 마음 내어서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함부로 남용하지 않고 중생을 구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인연에 의해서만 보게 됩니다.
조상을 보는 자와 보이지 않는 자, 경험을 하는 자와 경험을 하지 못 한자, 누가 더 옳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는 것도 업 작용이요.
보지 못하는 것도 업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이 작용들은 본인들이 도를 닦아서 생사초월을 하기 전까지는 돌고 돌기 때문입니다.
조상을 보는 사람들은 조상이 보임으로 해서 그들만의 길을 갈 것입니다.
조상들이 보이지 않는 질문자는 조상들을 보지 않아도 된 스스로의 길을 찾아가면 됩니다.
질문자가 조상을 보는 것을 부러워한다면 다음 생에는 조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생은 자신을 열심히 탐구해서 주어진 길을 가는 것이 최선책입니다.
문: 또한 죽음 후에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며, 영혼이 있다면 어디로 가는지 궁금합니다.
답: 질문자는 책방에 가서 (티벳의 사자 서)를 사서 읽어보면 본인이 원하는 것을 다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사람이 죽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고, 그 영혼이 어디로 가는지를 몇 천 년 전부터 기록한 책입니다.
제가 여기서 아무리 영혼과 사후세계를 잘 이야기 한다고 해도 <티벳의 사자 서>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완전한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영혼을 함부로 이러하다 저러하다고 말할 수 는 없습니다. 그러나 질문자가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제 안목으로 아주 조금만 쓰겠습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잘 죽기위한 종교이기도 합니다.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하거든요.
잘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동물이나 사람들에게 원결을 짓지 않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는 순간에 고통을 받는 것은, 한평생을 살아오면서 맺어놓은 바로 이 원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화장지에 기름을 묻혀서 태우면 시커먼 연기가 나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입니다.
질문자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질문자의 영혼이 인연이란 업에 의해 질문자의 몸을 잠시 빌렸는데,
질문자가 몸과 마음이 나쁜 짓에 물들었다면 그 영혼 또한 그 나뿐 짓에 물들어 그 영혼의 무게만큼 밖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곳이 어디이든...
그러나 질문자의 몸과 마음을 참으로 좋은 일에만 썼다면 그 영혼 또한 가벼워서 끝없는 창공을 날을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질문자가 뿌리는 대로 거두어 드릴 뿐입니다.
한 치 오차도 없습니다.
사후에 영혼이 어디로 가는 것을 궁금하게 여기지 말고 지금 내가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 한 번 돌아보십시오.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3.사람과 사람사이의 진실은 어디에 존재 할까요?
질문:
사람과 사람사이의 진실은 어디에 존재 할까요? 예전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기본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적은 생이나마 살면 살수록 너무 다른 가치관과 관점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요.
이제 그 절대성과 상대성 때문에 길을 잃었습니다.
답: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수행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오직 진실해 지기 위해섭니다.
우리들 마음속에는 내면이라는 중심이 있는데 그 중심이 우리가 쓰는 지금 이 마음 때문에 밖으로 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중심(中心)들어날 때 비로소 진실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평상심이 도(道)다.>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잔다. 하는 말도 성 인들이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진실이 무엇인지 드러내 보이는 하나의 자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사람들이 에덴동산을 꿈꾸는 것은 그 에덴동산에 있는 동안에만 인간이 진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예술이 어느 장르가 되었던 그 깊은 곳에는 작가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에덴동산을 그리워하는 동경이 녹아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에덴동산은 아이가 자라서 어머니 품을 벗어나 대지에 첫 발을 내디딜 때입니다. 왜냐하면 그 첫발 내디디는 그 힘은 아이의 중심(중心)에서 흘러나온, 떼 묻지 않는 순수함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 순수함 속에는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거든요. 오직 중심에서 흘러나온 에너지로 충만 되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로 돌아가지 않으면 천국에 갈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어린이가 가지고 있는 그 순수함이 에덴동산이며 그 에덴동산이 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지구가 생긴 이래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사랑타령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바로 진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윗글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무슨 말을 해도 가슴에 와 닿지 않기 때문에 윗글을 쓰게 된 것입니다.
어느 유행가 가사처럼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이면 당신이겠습니까?
그것은 지금 만난 당신과 전생의 인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겨울에 한방 눈이 천지를 덮어도 그 눈 하나하나가 그 인연 처에 떨어진다.>성 인이 아니면 누가 이런 말씀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불교에 이런 언어,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상이 아니면 그 어떤 언어로 그 질문에 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부부가 만나는 그 인연도리를 요약해서 3가지로 말해보겠습니다.
첫째는 전생에 서로 죽였거나 서로 원결을 많이 지어서 원수를 갚으려고 만난 부부입니다. 그 부부가 원수를 갚기 위해서 만났는데 그 가정이 어찌 행복하겠습니까?
부부가 만나기만 하면 싸우게 됩니다. 왜 싸우는지 부부 자신들로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전생에 원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전생에 서로 빚을 졌거나 일방적으로 빚을 졌을 경우입니다. 서로 빚을 졌다면 부부가 서로 양보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 또 속입니다. 그리고 어느 한쪽만 빚을 졌다면 한 사람은 죽으라고 돈만 벌고 한 사람은 돈을 벌지 않고 돈을 번대로 다 써버립니다.
세 번째는 천생연분이라고 하는데 수많은 윤회를 하면서 서로 참된 사랑을 했으나 한 번도 이루지 못한 그 간절한 사랑이 이생에 만나 부부가 되었으니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겠습니까? 이 부부는 사랑을 넘어 서로 존경하는 부부입니다. 그렇다고 이들 부부에게 진실이 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들 부부는 전생에 못다 한 사랑의 꽃을 피우기에 타인들이 아름답게 보일 뿐입니다.
자연에게는 질서란 것이 있습니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그 질서도리에서 벗어 날수가 없습니다.
자연은 질서란 언어를 쓰지만 사람들은 질서 대신 인연, (因緣) 인과(因果) 연기(緣起)란 언어를 씁니다.
이것을 지었으니 저것이 생기고 저것을 지었으니 이것이 생기고 그것이 끝없이 돌고 돕니다. 이것이 우리가 다시 태어나게 하고 모래알 같이 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당신이었소. 하는 것입니다. 끝이 없습니다.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많은 젊은이 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出家)를 하는 것입니다.
무서운 사자라 할지라도 새끼 때는 귀엽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녀가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다시 말하면 처음으로 남녀가 전생의 인연으로 만나게 되면 그 인연을 맺어주기 위해서 인과(因果)의 법칙에 의해서 서로 눈을 멀게 합니다. 다시 말하면 곰보를 보조개로 보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과(因果)의 만찬인 것입니다. 인과에 그 만찬이
길어질 수도 짧아 질 수도 있을 뿐, 그 인과의 만찬이 다 끝나고 나면 질문자와 같은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런 도리를 알고 이런 도리를 해결하는 방법이 바로 수행입니다. 종교를 통해서. 어떤 종교든 어른이 되면 스스로 자신에게 맞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나무아미 타불 관세음보살-()- 그런데 저기위에 글에서 처럼 절에 감 스님들께서 영이 맑아 빙의가 되기 쉬운체질 이라는데 이럴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요몇년을 시달렸는데 안해본것 없이 다 해봤습니다 그래서 천수경을 거의 매일 하루종일 접하고 있으며 관세음보살을 거의 외우고 있음니다 평생을 가야 하는거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답이 없는지요
첫댓글 글공양 잘하고 갑니다.
좋은글 감사드립니다.성불하십시요.나무대비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_()_
좋은글 감사드리며, 불자 아닌 제 주변사람들에게 읽히고 싶습니다. 그 이들도 이글을 이해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네요. 좀 어려울까요?
아주 좋은 마음공부 잘 하고 갑니다. 성불 하십시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_()()()_
좋은 글 감사 드립니다. 마음으로 담아 갑니다.._()()()_
좋은글 마음깊이 담아갑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정말좋은글잘읽고감사했습니다_()_
많이 배우고갑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나무아미 타불 관세음보살-()-
그런데 저기위에 글에서 처럼 절에 감 스님들께서 영이 맑아 빙의가 되기 쉬운체질 이라는데 이럴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요몇년을 시달렸는데 안해본것 없이 다 해봤습니다 그래서 천수경을 거의 매일 하루종일 접하고 있으며 관세음보살을 거의 외우고 있음니다 평생을 가야 하는거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답이 없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