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나는 아름다움
쇼팽에게서 받은 감동을 따져보면, 분명 주관적 편견과 감정이입에 개입되어 있다. 보다시피 반복에 의한 주제선율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어느 따사로운 가을 하오, 콧날이 시큰할 정도로 감동을 준 라르게토 악장은 새롭게 검토해 볼 소지가 있지 않을까? 물론 이런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낭만파 음악을, 더구나 개성으로 가득찬 쇼팽의 곡을 어떻게 현대미학의 잣대로 잴 수 있느냐고. 그러나 이런 반문도 가능할 것이다.
시대는 자꾸 달라지고 음악의 형식과 내용, 작곡자의 작곡 기법, 감상자의 수용 태도 등 온갖 것이 달라지는데, 어찌 감동의 원인과 출처인 미학은 전통미학에만 안주할 수 있을까라고. 다시 말해 쇼팽의 곡은 여전히 변치 않고 연주되지만 연주자, 감상자는 현재를 살아가는데, 어찌 이해와 감동은 전통시대에 맞춰져야 하느냐고.
물론 어떤 음악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음악 외적 · 내적 요소를 두루 염두에 두어야 하고, 특히 당대의 시대적 배경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쇼팽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선 19세기 초 낭만주의 음악을 비롯해서 작곡 배경 등을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이다. 반면에 모든 예술품은 현재적 관점으로 재해석, 재이해되어야 하고, 감동의 출처인 미학 역시 당대의 미학을 외면해선 안 될 것이다.
과거 나치시대에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스들은 바그너와 베토벤에 열광한 바 있다. 그들은 베토벤 교향곡 5번이 장대하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악명높은 홀로코스트를 감행 했다. - 프란시스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에서 미군 대령인 커츠가 바그너의 <발퀴레> 중 '발퀴레의 기행'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월맹군을 향해 기총소사를 하는 장면과 흡사하다 - 또 이들은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이 인류의 화합과 영광을 위한 곡임에도 불구하고 엉뚱하게도 독일인들의 선민의식과 영광을 위한 곡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이런 점에 분개한 쉰베르크 - '무조음악' 이전의 초기시절 -는 나치의 미학적 선입견을 불식시키고자 불협화음을 채택하게 되는데, 당연히 히틀러는 쉰베르크를 좋지 않게 받아들였고, 그는 결국 미국으로 망명하기에 이른다. 협화음의 안정성, 달콤하고 우아한 서정적인 선율, 극적 클라이맥스를 향한 반복적 개념 등이 근거한 전통미학이 붙박이 마냥 변치 않은 채 만고불변의 감동의 출처가 되어야 하는지 의구심이 든다.
어떤가. 혹시 전통미학의 고수는 현재적 삶에 안주하려는 간접적 태도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아름다움마저 변화를 거부하고 현재를 고수하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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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환 |
음악에 대한 사랑과 감정의 분석이 음악만큼이나 달콤합니다. 전통적인 음악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느끼는 감정선은 어떤 것일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어떤 음 하나의 자체의 발현으로 그것은 소리에 불과 하겠지만 두개 이상의 음의 나열은 첫음의 기억과 그 다음 음의 들림, 그리고 그 다음....
결국, 우리가 '음악'으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이러한 음과 음의 감정선인 '선율(가락)'과 연이어 들리는 선율을 한번에 표현하는 '화성' 그리고 이것들의 조합이 우리 인간 본연의 내재된 감정과 부합할 때 아름다움으로 느껴지게 되고 그것을 찾아가는 작업이 각 시대별 음악가들의 활동이었겠지요.
그 감정들을 찾을만큼 찾아 이제 신고전주의, 무조주의를 지나온 현대음악은 또 다른 감정선이 어떤 것일까를 많이 고민하고 시도하지만, 우리 인간 본연의 깊은 내면의 감정선은 시대적 음악가들에의해 거의 나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유행따라 흐르는 전자음악을 포함한 현대가요 등이 십년내지 1,2년을 버티기 어려운 것을 보면 고전주의 이전의 바로크 음악을 찾아가는 즐거움과 함께 음악가들에 대하여 경의를 표합니다. 오랜만에 참 흡족하고 맛있게 무엇을 먹은 것 같은 글을 주신 조율연 선생님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