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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답사자료
2018년 9월 15일
1. 달성 토성
2천 년 동안 변함없는 대구의 랜드마크. 대구시민이라면 대부분 달성공원과 인연이 있다. 공원 앞 노점, 큰 유리병에서 노랗게 솟아오르는 냉차를 마셔봤을 것이고 약장수의 화려한 화술이 재미있어 어른들 틈에서 뱀 구경도 해봤을 것이다. 야바위꾼에게 돈을 잃어본 어른들도 있었고, 사주팔자나 궁합을 본다고 길에 앉아서 복채를 꺼내본 기억도 있을 것이다. 시민들은 콜라를 마시는 젊은 세대처럼 바카스를 음료수처럼 노점에서 사 먹어보기도 했었다. 자녀들을 데리고 난생 처음 코끼리도 봤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달성공원의 명물은 2m가 훨씬 넘는 키를 자랑하던 수문장 키다리아저씨일 것이다. 99년 투병 생활 끝에 작고하신 달성공원의 마스코트 고 류문수씨는 경기도 여주사람이었다. 대구백화점에 스카웃되어 71년 달성공원 개원에 맞추어 수문장 노릇을 한 것이다. 지금도 달성공원 정문 앞에 우뚝 서 있을 것 같은 환상이 든다. 지금 달성공원은 주로 노인들이 와서 휴식하고 즐기는 공원으로 인식되지만 불과 30년 동안 대구 서민의 최대 휴식공간이었다. 소풍의 단골 장소이기도 했다. 달성의 아름다움은 겨울에 있다. 함박눈이 내린 토성을 아침 나락에 돌아보면 마치 가벼운 아이스크림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이다. 1.3Km 남짓한 토성정상부를 돌고 나면 토성 북쪽의 마을이 왜 날뫼(비산동)라고 불렸는지 알 수 있다. 대구에 귀화한 두사충이 불렀던 말이라고 한다. 토성 주변의 회화나무와 이팝나무 몇 그루를 제외하고 봄에 피는 꽃은 1906년 일본신사가 설치되었을 때의 나무들이다. 아직도 일본산 향나무들이 50여 그루 정문 왼쪽에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것 외에 나무들은 대개 근대 이후에 심어진 수목이라 인공적인 냄새가 많이 나지만 그러나 겨울은 많이 다르다. 겨울이 되면 토성은 나무색과 어울리는 밝은 흙색으로 변하고 드문드문 토성정상부와 하늘이 만나는 비경도 연출된다. 비산동의 비경을 볼 수 있는 장소는 당산고개를 정상부다. 해방 후 비탈에 판자집을 지은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달성 토성 연혁
서기 261년: 달벌성(達伐城): 신라첨해왕(沾解王) 15년 3월 달벌성을 쌓고 나마극종(奈麻克宗)을 성주로 삼았다.’ <삼국사기> 서기 261년은 아직 전설적인 기록이므로 역사적 사실로 볼 수 없고 당시 달구벌이 신라의 영토가 된 일이 없다.
신라∼고려 시대: 관아(官衙): 신라에서 조선 초기까지 달성은 관아로 이용되었다.
1035∼1046년: 정종(靖宗: 사전(官衙)봉군제에 따라 달성을 달성서씨들에게 사전으로 내려졌다. 사전이란 당시 국가에 공을 세운 관리들에게 준 토지를 말하는데 한 세대에 한하는 것과 세습의 두 종류가 있었다. 따라서 달성은 세습토지였던 것 같으며 이후 달성 徐氏들의 世居地로서 사유화되었다.
1390년: 고려 공양왕 2년: 토성에 石築: 고려 공양왕 2년에 石築했으며, 達城은 大丘府 서쪽으로 2리에 있고 성의 둘레가 451步, 높이가 6尺이며, 軍倉이 있고 우물이 4개는 사철 마르지 않았다. <慶尙道續撰地理誌(1469년)>
1418∼1450: 조선 世宗 조정에서 달성의 양도를 요구⇒양도 조건으로 蓮信池(靈仙못, 현재의 영선시장 자리) 일대에서 물을 공급받는 토지에 대한 세금 징수권과 남산역토(南山驛土, 계산오거리 구 남산병원 일대)의 땅, 또한, 대대로 높은 관직과 녹을 주겠다는 등 3가지를 제시. 이에 달성서씨 종손이던 龜溪 서침은 나라에서 필요한 땅이라 조건 없이 내어주자 세종은 서침이 제안한 소원을 들어주었다. 조정은 대구지방 일대에 봄에 빌려준 곡식을 가을에 되갚는 환곡을 쌀 5되씩 감해 주었다.
1596년: 달성에 경상감영 개설⇒선조 29년 임진왜란 중 좌우도를 겸하여 다스리면서 대구의 요새 달성에 감영 개설.
1597년: 선조 30년 달성 감영 소실⇒정유재란에 대구로 쳐들어온 왜군이 達城 監營을 완전히 불태워 버렸다. 1601년: 선조 34년 감영 재설치⇒다른 지역으로 옮겨갔던 경상도 감영이 대구 달성에 옮겨옴.
1665년: 서침을 기리는 龜岩書院을 연귀산(현 제일여중) 정상에 건립
1894년: 일본군 헌병대 진지⇒청일전쟁으로 東學의 난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일본군이 달성을 진지로 사용.
1904년: 대구 거류 일본인 유지모임에서 대구부 내 달성산에 일․한인 공동의 공원지로 만들고 달성 내의 勝地를 택해서 皇祖遙拜殿 건립에 대한 논의 시작.
1906년: 일본인거류민회에서 달성공원 기성회조직 복권당첨 문화행사 개최.
1906년 4월 12일: 달성공원에서 5천여명이 운집을 했다고 한다. 이날 1등 당첨자는 남문 안 기생이었던 오경옥이었다.
1906년: 일본신사 皇大神宮 遙拜殿 설치⇒11월 3일 당시 일본 천황의 생일을 맞아 대구에 거주하던 일본인 1,500명이 달성공원기성회를 조직, 기부금 7천여 원을 얻어 부채를 갚은 뒤 공원도로를 수축하고 소위 皇大神宮 遙拜殿을 달성에 건립하였다.
1906년: 관풍루, 망경로 옮겨옴. 대구읍성 철거시 경상감영(현 경상감영공원)정문에 1601년 세워진 觀風樓, 望京樓 등을 옮겼다. 관풍루는 헌병대 뒷마당에 옮겨오고 망경루는 입구 왼쪽. 두 건물이 낡아 1970년에 해체. 관풍루만 73년 복원.
1909년: 순종 경상감영과 달성 시찰 방문
1914년: 대구신사 건물 건립.
1914∼1934년: 달성공원 46,485평 가운데 1,536평을 神社境內地로 무료점거.
1922년: 달성공원 내에 대구운동협회 발족.
1928년: 대구신사 입구의 기둥문인 도리와 화강석 담을 설치.
1945년: 해방되고 미군 부대가 들어섬.
1946년: 해방 1주년 신사내부 철거⇒해방 1주년 기념 준비위원회가 발족되어 8월 8일 일제강점기 유물인 鳥居와 신사 내부를 철거. 신사 건물은 철거되지 남아있었다.
1948년: 음력 정월 이상화 시인을 기리는 전국최초의 시비 건립.
1950∼1953년: 한국통신부대(공원 가운데 마당에 천막 막사로 주둔) 육군영헌부대가 코끼리 우리 근처에 유골봉안소 마련.
1958년 5월: 한국 최초의 어린이 헌장비 공원 입구에 건립
1962년 10월: 3일 왕산 허위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허위 선생 순국기념비 세움.
1963년 5월: 구국기념사업회에서 독립운동가 이상용 선생 구국기념비 건립.
1963. 1월∼1966. 8월: 대구시립중앙도서관 달성공원 분관(현 향토 역사관)
1963년: 10월 18일 사적 제62호로 공원 조성을 시작.
1964년: 3월 11일 최제우순교 100주년 기념 동상건립위원회에 의해 최제우 동상 건립.
1965년: 정부로부터 공원관리권을 대구시가 인수.
1966년: 신사에 건물철거 단군숭봉회에서 신사 내부를 천진전으로 46년부터 20년간 사용하다가 66년 강제로 철거.
1969년: 8월 1일 달성공원 개원(영친왕의 아들 ‘이구’가 동물원 설계)
1970년: 5월 2일 동물원 개원, 박정희 대통령 꽃사슴 5마리 기증.
1970년: 어린이 헌장비 허물어져 공원 가운데 다시 세움(김수학 시장)
1971년: 키다리아저씨 류기성씨 수문장 시작.
1971년: 3월 22일 달성서시 대종회에서 달성서씨 유허비 건립.
1973년: 10월 5일∼1973년 12월 27일 관풍루 복원.
1975년: 6월 1일 달성공원관리사무소로 기구 개편.
1980년: 5월 12일∼7월 14일 관풍루 단청.
1983년: 6월 22일 석재 서병오선생 예술비 건립.
1988년: 5월 5월 바뀐 어린이헌장문에 맞춰 9개 항에서 11개 항으로 개정.
1983년: 6월 죽농 서동균 선생 문화비 건립.
1995년: 대구향토역사관 개설.
2000년: 4월 1일부터 무료개방.
북곽만디 날아온 산, 날뫼 飛山
산이 날아왔다는 말은 산이 날아왔다는 말은 ‘성(城)’이 날아왔다는 말이고 고대국가를 형성한 지배세력이 왔다는 말이다. 대구는 가야와 신라의 접경지대로 와룡산을 중심으로 오랜 전투가 지속된 곳이다. 와룡산에 거점을 둔 세력이 정치교체기를 거쳐 대구 시내에 달성을 쌓았다고 본다.
대구는 고인돌이 많았던 도시였다. 고인돌은 남방계 농경문화에서 생겨난 장례방식이었다. 대구의 고분군을 출토해 보면 남방 농경인들을 북방에서 내려온 유목민이 지배하면서 성립한 고을임을 할 수 있다. 대구의 달성이 있던 비산동에서 출토된 국보 137호인 호형대구, 투검창, 청동검의 원류는 북방 스키타이 민족에게서 찾는다. 스키타이 민족은 중앙아시아 페르시아에 밀려 동쪽으로 이동한 기마민족이었다. 평리동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말과 관련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기원전 1세기부터 달성에 막강한 정치세력이 자리 잡은 것으로 보여진다. 달성에 얽힌 전설 가운데 화원동산에 있던 사람들이 달성으로 이주해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화원은 옛날에 성이 있었다고 해서 성산으로 불렀다. 비산동은 우리말로 ‘날뫼’라고 부른다. 이 명칭에 대한 전설이 있다. 한 아낙네가 달서천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그윽한 소리와 함께 서쪽에서 큰 산이 날아오는 것을 봐서 ‘산이 날아 온다.’고 큰소리를 쳤더니 날아오던 산이 달서천을 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내려앉았다는 이야기다. 이 전설을 통해 볼 때 서쪽에서 날아온 산은 화원동산에서 건너온 정치집단이 달성(날뫼)에 정착했음을 표현하는 상징적인 전설이 아닌가 하는 설이 있다. 유목민의 이주를 말하는 것이며 경주 계림을 이두식으로 표현하면 ‘달불’이라고도 불리는 것도 달구벌과 비슷하다 하여 대구에 정착한 유목민의 일부가 다시 경주로 이동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달구벌의 기마민족이 경주까지 내려간 게 아니냐는 학설이다. 대구 비산동 고분에서 출토된 금관과 경주 서봉총 금관이 모양이 똑같다. 날출 ‘出’자 모양과 순록 뿔 모양의 금관 가지가 이 학설을 증명한다. 그만큼 대구 달성은 유목민이 정착한 비밀을 담고 있는 역사적으로 유의미한 공간이다.
향토 역사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토성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토성이다. 달성 주변의 고분군 배치도를 보면 청동기시대 이래로 토성은 이 지방의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던 집단들의 생활근거지에 쌓은 성곽이었던 것으로 추정되지. 성벽의 아래층에는 조개무지, 木柵, 석축, 토기 자락 등의 흔적도 있어 우리나라 성곽 발달 사상 가장 이른 시기에 나타난 형식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대구에서 축성된 최초의 성은 달성으로 경주의 月城과 유사하게 자연적인 구릉을 이용하여 쌓은 토성이었다. 이 성은 삼한 이래로 대구지방의 중심세력을 이루었던 집단들이 종래부터의 생활근거지에 축조한 자연 발생적인 성곽이었다. 달성 주변의 고분군 배치도를 보면 달성은 청동기시대 이래로 이 지방의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던 집단들이 생활근거지에 쌓은 성곽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의 아래층에는 조개무지, 木柵, 석축, 토기 자락 등의 흔적도 있다. 우리나라 성곽 발달사 상 가장 이른 시기에 나타난 형식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신라에 합병된 뒤에는 군사요지로 중시되었으며 고려 공양왕 2년(1390) 토성에 석축을 더했다고 한다. 성벽 자락에 남아 있는 돌의 종류는 봉산동의 거북바위, 대구읍성 성곽 돌과 동일한 퇴적암 계통의 안산암이었다. 성벽은 주로 흙으로 축조되었고 주위 길이는 약1,300m 높이는 4m 안팎이다. 토성 기슭을 답사해보면 아직도 석축한 돌들이 굴러다닌다. 최근에 백제유물이 발굴된 서울의 풍남토성처럼 유구한 세월을 지닌 거대한 역사적 유물이라 할 수 있다. 대구신택리지 조사팀이 최근에 달성공원 담장 안쪽 기슭을 따라 2km 여러 번 답사를 갔었는데 옛날 토기가 부서진 흔적들과 돌도끼 몇 점도 쉽게 발견 할 수 있었다. 조선 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달성에 대해 ‘대구부의 서쪽 4里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9백 44尺, 높이 4尺이고, 안에 우물 셋과 연못 둘이 있고 軍倉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시대의 대구읍성에 관한 기록인 대구부읍지에는 석성이 처음 축조된 1736년 이전 대구에는 토성이 있었다고 하며 이 토성이 달성이거나 현재의 고성동 일대에 자리 잡은 토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토성은 1590년(선조 23년)에 산산, 군위, 인동 등 3개 읍민을 징발하여 대구부민과 협력하에 이듬 해 1591에 완성하였다. 유성룡의 懲毖錄에 의하면 이때의 축성은 비단 대구뿐만 아니라 영천, 청도, 삼가, 성주, 부산, 동래, 안동, 좌우 병영 등 경상도 일원에 거친 大役事로 왜의 침입을 막기 위해 건립된 것이다. 1592년 4월 21일 이 토성은 왜군 가운데 제일 먼저 대구에 입성한 小西行長의 군대에 의해 파괴되어 구체적인 규모를 알 수 없다.
달성서씨유허비 고려말부터 서씨일문(徐氏一門)의 근거지
죽농 서동균의 글씨로 쓰여진 ‘달성서씨유허비’ 1971년 3월 22일 우리 집안 대종회에서 이 비를 달성공원 안에 건립했다. 이유인즉슨 고려 중엽 정종(靖宗, 재위 1034~1046) 때 봉군제에 따라 지방 호족인 우리 집안의 세거지로 되었다가 조선 世宗(1418~1450) 때 다시금 군사시설로 조정에 양도하게 되었지 이 비석은 이러한 정황과 족적을 기념하고자 세운 것이다
달성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달성서씨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고려말 달구벌의 주요 지배세력은 달성서씨였다. 그들의 주요 거점은 달성, 동산, 남산, 계산동 일대였다. 대구 10경을 노래 부른 서거정선생을 비롯해 서침선생과 함께 위패를 모시게 된 곳이 동산 남쪽 자락에 있었던 구 귀암서원이었다. 구 귀암서원 오른편에 불가천 위패를 모시는 곳이 있는데 바로 徐沈선생을 기리는 사당이다. 서침의 위패는 불가천으로 불리는데 국불천이라고 국가에서 내린 시호를 받은 사람의 후손들이 영원토록 위패를 옮기지 않고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나라에서 허용하는 것을 말한다. 귀암서원 관리인의 말에 따르면 전국에 국불천은 3곳이 있는데 그중 한 곳이 서침선생의 제향소라고 했다. 그래서 경북도청 뒷쪽 산으로 귀암서원을 옮겼지만 서침선생 위패만 옮기지 않았다고 한다. 龜岩書院의 龜도 서침의 호 龜溪에서 나온 말이다. 서침선생과 달성은 깊은 인연이 있다. 고려말에서 조선초의 변혁기에 향리에서 은거하며 학문연구에 주력해 오다가 세종대에 서씨일문의 근거지였던 달성이 대구관아 부지로 책정이 되자 쾌히 협조를 하였다고 한다. 세종대왕은 서씨들에게 포상을 내려준다고 했으나 구계선생은 포상 대신 모든 대구부민의 환곡(봄 춘궁기에 관아에서 빌려준 양식)의 이자를 5되씩 감하여줄 것을 건의하여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인근 주민의 존경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나라로부터 남산의 옛 역 터(驛, 전 남산병원 일대)와 蓮信池와 新池 등을 하사받았고 관료로도 발탁되었다고 한다. 이후 임진왜란 중이던 1596년 경상감영이 달성에 설치되면서 다시 석축을 했지만, 정유재란 때 쳐들어온 왜군이 달성감영을 완전히 불태워 버린 후 폐허가 되어버린다. 그 뒤로 방치되었다. 그 후 경상감영은 달성을 떠나 달서천과 신천의 범람을 피할 수 있는 지금 현재의 중구 포정동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보호수 서침나무
달성서씨 徐沈
이 나무도 수령이 300년이 넘은 것으로 어린이헌장 바로 옆에 있다. 이 주변에 관아시설을 짓고서 그 마당에 심은 나무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봄직도 하다.
주변에 우물이 있었던 흔적이 있고 강점기 신사가 들어왔을 때도 살아남은 뜻 깊은 나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이 나무에 ‘서침나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서침은 출생기록이 정확지 않지만, 조선 초기의 문신이었으며 본관은 대구 달성, 자는 聖默, 호는 龜溪. 부친은 政堂文學 均衡이며, 어머니는 承同正 李永儒의 딸이었다. 정몽주를 따라 학문을 배웠고, 고려말 조선 초의 변혁기에 향리에서 은거하여 학문연구에 노력하였다. 세종대에 서씨들의 근거지였던 달성이 경상도 지역의 요새가 되므로 다른 땅과 바꾸게 하자, 이에 협조하여 포상을 받게 되었으나, 그는 포상 대신에 춘궁기에 나라에서 빌려준 곡식을 가을에 되돌려주는 還穀을 감해 줄 것을 건의하여 허락받았다 한다. 이로 인해 인근 주민의 추앙을 받았고 국가로부터 남산의 옛 역 터와 蓮信池와 新池 등을 하사받았고, 관료로도 발탁되었다. 부민들과 유림들의 건의로 1665년 그를 기리는 구암서원이 연귀산(현 제일중학교)에 건립되었다. 대구의 아름다운 풍경을 시로 쓴 ‘대구십영’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온다. 서침을 기리는 회화나무와 토성의 고목들 수령이 300년 정도된 이 회화나무는 서침을 기리기 위해 2003년경, 시에서 ‘서침나무’라 지정하였다. 서침나무 이외에 달성공원에는 13그루의 굵은 회화나무가 있다. 그 중 어린이 헌장비 옆의 2그루는 넓은 잔디밭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매우 아름답다. 어린이 헌장비 바로 옆에 있는 것이 가장 굵은 나무이다. 나무 높이 16m, 가슴둘레 2.9m, 추정 수령 250년이고, 이 나무 북서편에 있는 1그루는 나무 높이 약 10m, 가슴둘레 높이 2.1m, 추정 수령 200년. 또 늑대사 앞(남쪽)에 있는 것은 수령 250년으로 추정되고 나무 높이 16m, 가슴둘레 높이 2.8m로서 어린이 헌장비 옆의 나무에 버금가는 굵기를 자랑한다. 이외에 조류방사 연못 북편에서 북각에 이르는 순환도로를 따라 길 북편에 드문드문 서 있는 나무들은 모두 추정 수령 200년을 넘는 노거수들로서 터널을 이루고 있다.
신사 터 大邱神社 조성과정
달성은 1894∼5년 청일전쟁 시기 일본 병사의 野陣地로 쓰이고 있었어. 1904년 4월 일본의 수비대와 한국 진위대가 바로 충돌할 기미를 보이자 수비대장의 명령 아래 대구의 일본인이 이 달성에 농성하며 생사를 건 준비하기도 했었다.
관찰사 이용익씨는 대구의 우리 집안 사람 달성서씨들에게 명하여 달성산 내의 개간을 착수하게 하였으나 결국 일본인들의 신사터로 결정되고 말았다.
달성은 을사조약 다음 해인 1906년 11월 3일 이곳에 일본인들은 ‘황대신관 요배전’을 건립하려고 하자 달성을 부민들을 위한 뽕밭이나 미나리꽝 재배지로 조성해야 한다는 경상감영의 입장과 대구역을 건립하면서 건축과 토목에 대한 주도권을 쥔 일본거류민회와의 정치적 싸움에서 경상 관찰사가 손을 들었다고 한다. 거류민단은 달성공원기성회를 조직해 복권사업을 벌어들인 돈과 조선인과 일본인 유지들이 낸 헌금으로 신사의 기초 공사를 마치고 1만 원을 들여 심은 가이즈카 왜향나무, 단풍나무, 앵두나무, 소나무 등 관상수 6만 그루 정도를 심었다. 박중양은 대구읍성을 허물고 망경루와 관풍루를 이곳에 옮겨 세웠다. 1910년 합병 직후 일본인거류민단은 다시 요배전의 개축에 착수하여, 1914년 4월 3일 神武天皇祭日을 기해 대구신사의 낙성식을 거행했다. 이에 대구의 일본인들은 1916년: 신대구 신사 창립원을 조선총독부에 제출하여, 인가를 받았다.
1906년: 11월 일본 거류민단 ‘황대신궁’ 요배전 설치
1914년: 4월 대구신사 조성(1,536평 규모)
1916년: 조선총독부 대구신사 창립허가
1921년 3월: 대구신사 확대 개축(5,658평 규모) ‘天照皇大神’ 제사, 금동으로 만든 御太刀 외 4점의 보물을 소장
1928년 대구 甲辰會 신사 입구 기둥 문 도리와 화강석 담장 설치
1946년 8월 신사 입구 도리 2개 철거
1966년 8월 신사 주요건물 철거
순종황제 식수나무 순종황제가 방문한 토성
순종황제는 남방 순시 귀경길인 12일 오전 11시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대구에 다시 왔다네. 정성은 앞서보다 더 컸고 시내의 장식도 저번보다 한층 더 화려했다네. 당일 달성공원에 나오셔서 폐하(순종) 손수 식수와 이토의 기념 식수가 있었어. 달성공원으로 오르면 정면에 휴게소가 설치되어 있고 폐하 옥좌 앞에서는 일본인 생도의 유희, 기생의 무용 등 폐하를 위로하였다.
1909년 1월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은 대구에 역사적인 방문을 하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경부선을 타고 남조선을 시찰한다는 명분이었다. 순종이 지나가는 길에는 한일 양 국기를 꽂고 흰 모래를 60만 말이나 깔았다고 한다. 달성공원과 대구역에는 환영 아치가 세워졌고 대구신문사(현재의 KT대구지사)와 행재소(현 경상감영공원) 앞 길에는 소나무로 환영하는 송영문을 만들었다. 1909년 1월 7일 오후 3시 25분 순종은 임시 궁정열차로 대구역에 내렸고 대구역에서 환영식을 하고 황제는 일본수비대의 경호와 관찰사 박중양 안내로 무개교여(無蓋轎輿, 지붕 없는 가마)로 시가 순시를 했다. 1월 8일 행재소(경상감영)에서 대안동, 수창학교 앞으로 해서 달성에 방문했다. 달성에 모인 군중들에게 순종과 이토히로부미가 연설을 했다. 마산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12일 대구를 방문하면서 달성에 들러 ‘학생체조대회’와 기생들의 무용을 관람했으며 경상감영 선화당 앞마당과 달성공원 앞에 한 그루씩의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일제의 잔재, 카이즈카 향나무 군락
순종황제는 1909년 9일 마산으로 가기 전에 대구에 하루 머물렀고 다음 날 부산, 마산을 순시하고 1월 12일 11시, 다시 대구로 오셨다,
이때의 환영인파와 장식은 첫날보다 더 화려하고 수려했다.
이날 황제는 달성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가이즈카 향나무를 심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남방 순시를 마치고 이후 황제는 서북 순시를 떠나시게 되었다.
달성공원 정원에는 상당히 많은 수의 일본계통의 소나무 가이즈카 향나무가 심겨져 있다. 일본에서 들여온 원예종인 왜향나무[Juniperus chinesis var. Kaizuka Hort. (일)カイズカイブキ)이며 일본어로 카이즈카(貝塚) 이부끼(伊吹)라고도 하며 향나무의 변종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자생하지 않고 ‘카이즈카’의 오사카의 지역 이름 貝塚과 같아 지역명에 기원한 듯하다. 정원수로는 향나무 중에는 가장 많이 심는 품종이다. 일제강점기 조경사업으로 근대 식민지 개척시대를 상징하는 나무다. 달성공원 향나무의 대다수가 카이즈카향나무다. 나무의 수간은 곧게 자라나 곁가지가 나선상으로 구부러져 수관이 울퉁불퉁하고 뭉실하게 자리는 특수한 수형이다. 카이즈카향나무는 한국의 향나무와 거의 같으나 침엽이 없고 주로 비늘잎(인엽)을 가지는 것이 차이점이다. 어릴 때는 침엽이 나오기도 하지만 자라면서 비늘잎으로 된다. 향나무는 흔히 짧고 날카로운 침엽이 발달하여 조경수로 심기를 꺼려하고 한다. 그래서 향나무 중 비늘잎을 가진 개체를 선발하여 품종 고정한 것이 카이즈카향나무이다. 전정을 하여 여러 가지 인위적인 모양을 만든다. 자연스러운 뻗음보다 사람의 손길이 너무 가버려서 오히려 운치를 떨어트린다. 가지가 나선상으로 뒤틀려 있어서 螺絲柏이라고도 한다. 그 외 작은 가지가 예각으로 달리는 것이 특징이다. 건조에 강하고 햇빛이 잘 드는 곳을 좋아한다. 어디에서나 너무 흔히 만나며 일본인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일본 나무’임에는 틀림없다. 적어도 克日을 상징하는 우리의 문화유적에서는 심기를 고려해야 하며 친일잔재 청산에 나무도 들어갈 수 있다. 1909년 1월 12일 이토 히로부미와 순종황제가 기념 식수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공원 입구 광장 뒤편에 심겨져 있는 2그루의 나무로 추정되고 있다.
경상감영의 정문 관풍루
선조 34년(1601년) 대구에 세워진 경상감영의 정문으로 선화당의 정 남쪽에 포정문을 세우고 그 위에 문루를 만들어 관풍루라 했다. ‘閉門樓’라고도 했는데, 매일 문을 여닫는 시각인 새벽 5시와 밤 10시에 큰 북, 종, 피리, 나팔 등으로 풍악을 울렸었지. 관풍루라는 이름은 ‘감사가 누상에서 세속을 살핀다(관풍세속)’는 말에서 나왔고 1906년 대구읍성이 허물고 종로를 신작로로 만들 때 옮겨오게 된 것이다.
관풍루는 1601년 선조 34년 대구부로 옮겨온 경상감영의 정문이었다. 대구에 감영이 설치되면서 선화당의 정 남쪽에 포정문을 세우고 그 위에 문루를 만들어 관풍루라고 불렀다. 관풍루에는 큰 북, 종, 피리, 나팔 등 풍악 기구를 준비해 놓고 매일 밤 10시에 문 닫고 새벽 5시에 문을 여는 풍악을 올렸다고 한다. 이 풍악 소리에 맞춰 동서남북 4개 성문을 열고 닫는 의식절차를 엄숙히 행하였다고 한다. 관풍루의 편액은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다. 이 표현은 감영 건물에서 관찰사가 업무를 처리하던 곳의 정문에는 ‘영남포정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관풍루라는 이름은 ‘감사가 루상에서 세속을 살핀다(관풍세속)’는 말에 기원하고 관풍루의 남쪽 30보쯤에 ‘절도사이하계하마비’가 있어 감사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이면 말에서 내려 감영 안으로 걸어오도록 했다. 그 후 1906년 대구읍성이 헐리면서 감영의 내삼문 앞으로 새로 길을 만들게 되면서 포정문 일대가 헌병대본부로 되어 이 건물로 철거될 위기에 있었다. 그래서 망경루와 함께 달성공원 안으로 옮겼으나 건물이 낡아 1970년에 해체하여 73년에 복원하였지만,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지 못했다. 근대 사진 자료에 나오는 관풍루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정면에서 볼 때 3칸 중에 오른쪽 칸 뒤에 있지만, 현재의 계단은 가운데 칸에 대각선 방향으로 설치되어 있다. 옮겨질 당시에는 일본헌병대 뒤뜰에 있었고 현재 달성공원의 최제우 동상 뒤편 34단의 돌계단을 둔 높은 언덕 위에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 누각으로 화강석 외벌대 기단을 조성한 후 바닥은 전을 깔았다.
신사 석재 사용 터 해방 후 20년이 지나서야 철거된 대구신사
“줄을 걸어 미군용 트럭이 한번 움직이자 순식간에 도리이의 거구는 가면을 벗어버린 듯 넘어져 버렸다. 이때 어느 사람의 신호도 없었건만 수많은 군중은 조선독립 만세를 높이 불렀다. 계속하여 석등·석사자 등을 파괴하였는데, 이로써 일제가 멸망한 지 1년 만에 그들 신사의 잔해를 깨끗하게 소탕하였다” <영남일보 1946. 8. 9.>
해방 다음 해 46년 8월 15일 해방 1주년 기념 준비위원회가 발족되어 8월 8일에는 대구 달성공원 입구에 위치했던 일제강점기의 유물인 도리(鳥居)와 공원 경내의 신사 내부를 철거, 기념행사에 대비한 첫 작업을 마무리했다. 당시 도리로 사용하던 기둥 일부가 테니스장 평탄화 작업을 하는 롤러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신사 건물은 남아 있었고 해방 후 혼란한 시기 단군숭봉회에서 대구신사에 단군을 모시게 된다. 1965년 정부로부터 공원관리권을 인수받은 대구시가 시민공원으로 새 단장 계획을 세우면서 신사철거계획을 세우면서 단군숭봉회와 마찰을 빚게 된 것이다. 당시 신사 건물과 부지는 달성공원 46,485평 부지 가운데 5천여 평을 차지했다. 1966년 8.15 광복절 21돌을 기념해 8월 12일 오후 합의 철거를 하기로 했으나 단군숭봉회 측이 최종 절충과정에서 숭봉회 건물과 부속 건물을 담장을 만들어 달성공원 안에 지어달라는 주장을 꺾지 않아 교섭은 결렬되고 말았다. 당시 太鍾鶴 대구시장은 12일 밤부터 바리케이트를 치고 전경을 배치해 단군숭봉회 임상조회장과 대한노인회 회원들과 밤새도록 대치 국면을 벌였다고 한다. 대구시는 66년 8월 13일 새벽 기습적으로 신사를 점거하여 이날 정오 天眞殿 안의 단군성조를 모신 제단 및 제물 등 일체의 도구가 철거, 건물은 밧줄로 묶어 당겨서 무너뜨렸다고 한다. 1914년 일본인들이 천황숭배의 상징처로 대구신사를 짓고 꼭 52년째 되던 해였다.
조선 영친왕의 아들이 설계한 동물원
신사가 철거되고 이곳에 안타깝게 동물원이 들어왔다. 이곳은 우리 서씨 선조들의 땅이자 전쟁 때 경상감영이 들어왔던 유서 깊은 곳이라 동물들이 살기엔 맞지 않아 보인다.
이조의 마지막 왕위 계승권자였던 영친왕 이은의 아들 李玖가 70년 개장한 달성공원 동물원을 설계했다. 그는 한미합작설계용역회사 회장으로 동물원 건축물 설계를 맡았고 공원에 대한 기본조성계획은 경북대 조경학과 임순무교수가 설립했다. 달성의 전체적인 조경은 가운데 평탄화된 둥근 광장과 주변 기슭 안쪽으로 동물 우리를 배치한 것 말고는 일제강점기 모습 그대로였으며 일본 사람들이 이곳에 심었던 6만 그루도 크게 변함없이 이어졌다. 그래서 달성공원을 중앙의 원형광장을 보면 동경의 우에노공원과 거의 흡사하다. 일제강점기 공원에 심은 6만 그루의 나무들과 정원수들은 일본의 어느 한 공원을 와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옛날 정원 테두리를 장식했던 회양목들도 대표적인 일제 치하 정원수였다. 우리가 다녔던 대부분 초등학교는 일본식 배치였으며 향나무와 회양목들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종로초등학교는 대표적인 일본인 학교로 입구에 왜향나무인 ‘가이즈카’를 심고 학교건물 앞에는 향나무와 회양목을 둘러놓았다. 더구나 입구에서 경내로 들어가면 좌우에 펼쳐져 하늘을 치솟은 향나무는 일본이 자생지인 가이즈까(왜향나무)다. 우편에 수십 그루의 가이즈카나무가 커서 빽빽해지자 왼편에 30그루 정도 옮겨심었다고 한다.
달성공원의 수문장, 류기성 키다리아저씨
달성공원 입구를 지키던 류기성씨는 키가 무려 225cm로 1971년부터 27여 년간 달성공원 수문장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달성공원 마스코트, 거인 수문장, 키다리 아저씨 등 숱한 애칭이 남아 있을 만큼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달성공원의 마스코트, 거인 수문장, 키다리아저씨 등 숱한 애칭을 갖고 달성공원 동물원 개장부터 30여 년 가까이 시민들을 맞았던 전 달성공원 수문장은 류기성씨였다. 5개월여의 투병생활 끝에 99년 2월 20일 향년 74세로 대구시민 곁을 떠났다. 경기도 여주가 고향인 류씨는 대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68년 대구백화점 개업 즈음에 큰 키(2m 25cm) 덕분에 백화점 홍보자로 스카웃되었고 3년 뒤인 71년 달성공원 개원과 동시에 당시 김수학 대구시장의 배려로 달성공원으로 자리를 옮겨 수문장 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지난 81년 정년퇴직했으나 그 이후에도 '상용직'으로 일하면서 수문장 직을 떠나지 않았다. 한국전쟁 때 육군하사로 참전해 전쟁 당시 다친 왼쪽 무릎 때문에 특수제작 목발을 사용하며 평생을 불편하게 보냈지만, 항상 웃는 얼굴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98년 9월 수문장 직을 떠난 이후 찾아온 당뇨 등으로 고생해왔다고 한다. 아들 3형제 중 셋째 병구(29)씨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달성공원에서 사육사로 일했던 적도 있었다.
이상화 시비 한국 최초의 문학비, 이상화 시비
상화시비 제막 장면, 김윤수
이상화 시비는 전국최초의 문학비로 알려져 있으며 1948년 음력 정월 김소운, 백기만, 이윤수 등의 제안으로 세워졌다. 시비에는 상화의 처녀작 ‘마리아여 나의 침실로’가 3째 아들 태희의 글씨로 적혀있고 시비 뒤에 적힌 소 개글은 최초로 시비 건립을 제안했던 수필가 김소운이 지었다. 尙火詩碑라는 제목은 죽농 서동균이 적었다. 비석에 글씨를 적은 사람은 위창 吳世昌으로 민족 운동가 33인 중 1인이었다고 한다. 상화 시비를 제안하고 속 글을 적은 사람은 金素雲(1907∼1981)인데 그는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시단에서 주로 활동했고 52년 도쿄에서 이승만 정권을 비방한 것이 말썽이 되어 65년이 넘어서야 한국에 귀국할 수 있었다. 그는 2002년 광복절을 맞아 최근 대표적인 친일문인으로 등재되었다. 대표적인 민족시인 이상화의 시비를 친일문인 김소운이 제안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지금 동산파출소 건너편 모서리에 있던 이윤수 시인이 운영하던 ‘명금당’이라는 시계점이 있었다. 이곳에서 1947년 9월 비 오는 날 명금포를 찾아온 김소운이 처음으로 상화 시비 건립을 제안했다고 한다.
이상화 시비 내용
시인 李相和는 서기 1901년 신축 4월 5일 又甫 李時雨의 차남으로 태어나 서기 1943년 癸末 3월 2일 43세로 세상을 떠나니 대구는 그 출생지요, 終焉地다. 그의 詩歷은 白潮 동인 시대에 시작되었으니 향기롭고 분방한 그 시풍은 초기의 조선 시단에 있어서 청신한 매력이었다. 대표작으로는 <나의 침실>을 비롯하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역천>, <이별> 등이 있으니 비에 새긴 시구는 <나의 침실> 중의 한 구절이다.
흘러간 물의 자취를 굳이 찾을 것 아니로되 시인 조찰한 생애를 추념하는 뜻과 아울러 뒤에 남은 자의 허술하고 아쉬운 마음을 스스로 달래자는 생각으로 작은 돌을 새겨 여기 세우기로 한다.
2. 대구읍성
일본인의 대구읍성 파괴
일본이 대구에 발을 들인 것은 1894년 청일전쟁으로 병참부대가 달성공원에 잠시 주둔했을 때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그 전 1893년 남문정에서 의약 및 잡화상점을 운영한 오까야마 출신 하자쓰기(膝付), 무로(朴井)라는 두 사람이 처음으로 정착했다. 청일전쟁이 끝났지만, 일본은 철수하지 않고 헌병과 통신수비대를 잔류시켰다. 그리고 하자쓰기와 무로의 두 상점과 병참부 調達店과 음식점 하나만 남게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중대병력으로 다시 강화되어 주둔하게 된다. 같은 해 1904년 8월 일본인들은 대일본거류민회(大日本居留民會)를 설립해 자치행정의 길을 연다. 당시 대구의 일본인은 약 1000명으로 인두세를 거두어 민단을 운영했다. 민단의 설립은 경부선 공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1904년 8월 1일 대구역이 설치되고 거류민단은 시가지 쪽으로 있는 철도용지 6800여평을 차용하여 거류민에게 임대. 2000여원 재원을 확보하면서 역전도로가 상점가를 중심으로 상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구에 정착한 일본인들은 군인들과 철도공사 인부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관찰사 이용익은 일본인들에게 땅을 팔거나 친일행위를 하면 옥에 가두었다고 한다. 1905년 진동문(현재 동성로 제일 은행) 앞에서 일본인들이 친일한 대구 사람 20명의 석방을 요구하며 항의성 시위를 했다고 한다. 대구판관 박중양과 일본수비대장 육군 히다까가 사태를 중재해 수습했다고 하며 29일 한국인
전원을 석방하면서 종료했다. 1905년만 하더라도 일본인들은 역 앞을 중심으로 상권을 형성하지만 1906년에 들어오면서 대구읍성 외곽의 토지를 절반 이상 소유하게 된다. 대구읍성 안은 국유지였기 때문에 소유하긴 힘들었고 읍성이 있어 상업활동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일본 민단은 그들은 성벽이 성 내외를 격리시켜 교통이 불편할 뿐만 아니라 도시의 성장에도 커다란 장애가 된다고 주장했다. 1906년(광무 10년) 대구에 설치된 理事廳의 당시 부이사관 오까모도(岡本)와 가게야마(影山) 거류민 단장은 당시 관찰사 직무대행을 하며 대구 군수로 있었던 박중양에게 성벽의 철거를 주장하게 된다.
대구성벽 철거 진행 개요
1903년: 고종 40년 경부선 공사로 일본인과 한국인의 부동산 투기 성행
1904년: 고종 41년 4월 이용익 관찰사 일인에게 토지가옥매도 금지령, 9월 대구 일인 거류민회 설립
1905년: 고종 42년 일본인의 대구 시가지 측량, 6월 경부선 대구공사 인부 약1,000명
1906년: 고종 43년 2월 식민지통치기구 통감부 설치, 7월 박중양 대구군수 겸 경상북도관찰사 서리로 취임, 9월 일본인 대구 이사청 개관식, 10월 박중양, 중앙정부에 철거허가를 요청, 일본인 성벽철거를 강행, 11월 성벽철거 불허훈시 및 박중양 해임 통지, 이등박문의 로비로 무산 일본대구거류민회 도로위원회 결성해 성곽과 4대문을 철거하기로 함
1907년: 순조 1년 2월 일본 대구 거류민회에 성벽지 도로를 건설을 위해 5,000엔 투입, 4월 대구 전동민을 동원하여 성벽철거를 완료,
6월 박중양 평안남도 관찰사로 전출,
8월 한국 진위대 해산
1908년: 순조 2년 6월 30일 박중양 경상북도 관찰사로 다시 취임, 12월 박중양 관민懇親會를 열다.
1909년: 순조 3년 1월 7일 순조 남행 대구 도착 전 일부 도로 개통, 가을 십자로 개통
1910년: 순조 4년 5월 십자로 확장공사 시작, 8월 일본의 한국강점
1912년: 5월 십자로 확장공사 준공
절도사이하개하마비 경상감사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은 감영 입구인 관풍루 밖 하마비에서 말에서 내려서 입장한다
관풍루: 관풍루는 1601년 선조 34년 대구부로 옮겨온 경상감영의 정문이었다. 포정문 일대가 헌병대본부로 되어 이 건물로 철거될 위기에 있었다. 1916년경 망경루와 함께 달성공원 안으로 옮겼으나 건물이 낡아 1970년에 해체하여 73년에 복원하였지만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지 못했다.
선화당: 경상감사의 집무소로 선조 34년(1601년)에 창건되었다. 1910년 감영제도가 철폐되면서 경북도청의 ‘산림과’ 등 여러 번 다른 용도로 사용되다가 1970년 초 중앙공원(현 경상감영공원)으로 조성되면서 대구시 유형문화재 1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징청각: 징청각은 대구시 중구 포정동 21번지 경상감영공원 안에 있으며 현재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어있다. 징청각은 선조 34년 1601년 경상감영이 대구로 옮겨 올 때 선화당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 건물은 관찰사의 처소로 선화당과 같이 세 차례의 화재를 입었으며 지금의 건물은 1807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선정비: 경상감영공원 징청각 뒤쪽 잔디에는 경상 관찰사와 대구판관의 선정을 기리는 비석 등이 27기 세워져 있다. 원래 곳곳에 세워져 있던 것을 대구향교와 상덕사에 통합해서 보존하다가 대구향교에 있는 27기를 1999년 1월 23일 경상감영공원 개장과 함께 옮겼다.
종로: 읍성문을 받는 시간을 알리던 종각이 있던 종로
중영: 중영은 포도청으로 감영의 동쪽인 현재의 대보, 무궁화백화점에 있었다. 제승당은 제승당은 중영에서 최고위 관직인 중군의 집무소이다.
영남제일관: 남성로 약전골목과 종로가 만나는 지점에 감영의 남문 기능을 했던 영남제일관이 있었다. ‘영남제일관’이라는 扁額을 걸었고 4성문 중 규모가 제일 컸다.
진동문: 정문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의 문루로 지었으며 진동문은 대구향교가 있었던 교동 쪽을 향해 열려 있었던 문이다.
망경루: 망경루의 뜻은 북쪽 임금을 경외하며 바라봄을 의미한다. 망경루만 관풍루와 함께 원형대로 현재의 달성공원 안으로 옮겨졌다. 1969년 철거
성벽해체: 조정의 허락도 받지 않고 일본인들과 대구성벽 해체를 주도한 사람이 박중양.
3. 일본인들의 신작로, 북성로
중양타령: 春不春 重陽佳節 말 말아라. 痛哭일세 통곡일세. 屢百年을 尊崇하던 大邱客舍 어데 갔노. 哀邱 大邱 흥…. 重陽賈節 말 말아라. 前無後無 肥己手段. 大邱城郭 舊公垓를, 壹時間에 팔아먹네. 哀邱 大邱 흥…. <대한매일신보, 1909. 1. 16> 重陽打令, 大邱童謠
북성로는 대구읍성의 북쪽 성을 허물고 난 신작로를 말하며 동성로, 남성로, 서성로와 함께 4성로로 불린다. 북성로 북쪽에 경부선 철로가 나면서 가장 먼저 일본인들이 토지를 매입하기 시작한 땅이었다. 북성로는 4성로 중에 가장 먼저 허물어졌다. 북쪽 성곽 밖의 토지소유자가 일본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에 부응해 대구판관 박중양이 조정의 허락을 받기 전 1906년 여름 경 부산에서 한국․일본인 인부를 60명 동원해서 허물었다. 북성로를 허물고 난 다음 서성로, 남성로, 동성로 순으로 허물었다. 허물어지고 난 뒤 북성로는 모도마찌(元町:원정)라 불리며 혼마찌(서문로)가 정치, 경제의 중심지라면 북성로는 상업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나무 조경회사였던 스기하라(杉原)합자회사, 스기하라 製林所, 목재회사 쿠로가와(黑川) 材木店, 목욕탕이었던 朝日湯, 대구 최고의 백화점이었던 미나까이(三中井)오복점(일본 전통복)과 유마ユマャ, 사토(佐藤), 죠혼(助坂), 미키(三木)양복점, 포도주를 팔았던 오오미야(近江屋), 코마모노こまもの와 이시이(石井) 장신구점, 대구곡물회사, 와카마츠(若松) 미곡부, 마츠노(松野)석유, 볼트판매소, 철물점 등 요즘으로 말하면 거리에 늘어선 백화점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북성로는 식당, 요리집, 영화관, 여관 등으로 가득 차 있었던 무라카미초(村上町, 향촌동)과 맞닿아 있어 대구 최고의 번화가를 이루었고 해방 이후에도 1960년대 도청이 이전되기 전까지 상업,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던 것이다. 북성로는 주변의 대안동과 수창동, 태평로 등과 비슷한 상권을 형성하다가 해방 이후 각종 공구 및 산업 물품들이 들어선 상점 거리가 되었으며 대안동은 인테리어 관련 업종, 수창동은 기계 공구, 태평로는 창고 등을 활용해 중소 부품산업 업종들이 들어서게 된다.
4. 근대 골목
동산 선교사주택: 동산 선교사주택과 미션스쿨의 건물들이 대구의 외곽을 바라보게 된 건, 당시 선교사들이 대구에서 어느 만큼 입지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상징한다. 대구근대의 풍경은 단지 아름다운 건물만 볼 게 아니라 당시의 사회,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바라보는 관점을 가지자
90계단(주변): 3.1운동의 만세행렬 집결지가 동산이 되었다는 것은 당시 만세운동의 숨은 리더들이 계성학교와 신명학교를 주축으로 형성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계산성당: 계산성당은 영남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인이 세운 근대건축이다. 그 연도 만큼이나 영남지역에서 차지하는 대구교구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이상화 고택: 계산동은 이상화 고택뿐만 아니라 서상돈, 최해청, 박기돈 등 민족 운동가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근대의 엘리트들이 많이 살았던 동네였다.
서상돈 고택: 서상돈은 국채보상운동의 주창자였을 뿐만 아니라 계산성당 부지, 남산동 교구 부지 등 많은 땅을 희사했던 대구 최고의 부자였다고 할 수 있다.
교남 YMCA: 대구에 온 개신교는 비단 전도에만 신경을 썼을 뿐만 아니라 지식전파, 서양문화보급, 문화 예술활동, 물산장려 활동 등 다방면에서 수 많은 시민들의 활동을 촉발시켰던 운동이었다.
구 제일교회: 대구에 개신교 선교거점이 만들어진 가장 큰 이유는 서문시장, 약령시 등 사람이 많이 모였던 도시였다는 것이다. 당시 배위량 선교사의 보고서를 보면 ‘시장도시로서의 대구’가 중요해 보인다.
청도한약방: 이육사는 시인으로 많이 기억되는데 대구약령시와의 흔적을 살펴보면 독립운동가로서의 숨은 면모를 많이 살펴볼 수 있으며 대구약령시가 이육사를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구 종로호텔 앞: 경상감영이 해체되면서 많은 관기들이 시내로 나오게 되었고 대구가 기생도시가 된 중요한 배경이 된다. 대구의 기생들은 샘밖골목에서 거주하며 종로, 동산, 향촌동 등지의 요리점에 출입하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남겼다.
진골목: 1943년에 서거한 상화는 말년에 계산동의 고택에서 다수 시를 남겼으며, 계산동 고택에서 쓴 그의 시에서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무력감을 엿볼 수 있다.
5. 향촌동
만경관: 경북지대는 향토의 문인 이윤수·이효상·김사엽 등의 주도로 만경관 2층에서 발족 된 것이다. 종군문인들의 주요 역할은 진중 문예활동과 선무공작이었다.
향촌문화관: 향촌문화관은 침체 된 도심을 되살리고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일제강점기 선남은행 자리이며, 옛 한국상업은행 대구지점을 개보수하여 2014년 10월 30일 개관하였다. 1950년대 향촌동의 시대상을 전시했다.
녹향음악다방: 1945년 문을 연 한국 최초 고전음악 감상실. 화전동에서 경영난에 부딪히면서 2014년 현재 향촌문화관 지하에 자리 잡았다.
구 르네상스음악다방: ‘폐허에서 바흐의 음악을’ 워딩을 만들어낸 곳이며 문인들을 비롯 많은 외국인들과 교류하였던 곳
화월여관: 제시대 이곳은 아카시요정(明石)이었으며, 이후 화월여관이 되었다. 구상과 마해송이 자주 묵던 여관이다. 현재 성인텍으로 운영 중
모나미다방: 모나미 다방은 백조, 호수, 백록, 청포도 등과 함께 50~60년대 문인들이 즐겨가던 다방이었다. 현재 자취는 사라졌으며 당시 2층이었고 이효상이 ‘바다’출판기념회를 가졌던 공간
백조다방: 그랜드피아노가 있었던 성악가 권태호의 단골집이었으며 대구의 1세대 음악가로 금잔디 작곡자 김진균, 보리밭 작곡가 윤용하 등의 연습공간으로 애용
꽃자리다방: 일제강점기 유명한 양품점이었으며 찻집으로 사용된 적도 있었다. 구상 ‘시인의 초토의 시’ 출판기념회가 열린 곳
백록다방: 1950년대 초 음악은 ‘르네상스’에서 차와 대화는 ‘백록’에서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르네상스는 유명했다. 이중섭이 구석에서 늘 은지화를 그렸다고 한다.
6. 서문시장
달서문: 서문시장의 명칭기원이 된 대구읍성의 4정문 중 하나가 ‘달서문’이다. 원래의 이름은 대구장이었으며 북문 일대에 열렸으나 서문 쪽으로 이동하였으며 대구읍성의 축조 이후 자연스레 서문시장으로 그 이름이 정착되었다.
서다리 목걸: 서문시장의 입구에 달서천이 관통하고 있었으며 서문시장 입구에 달서천을 건너는 작은 다리의 이름이 달서교였다.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서쪽의 다리=서다리+목걸(입구거리)의 뜻으로 불렀다. 이곳에서 3.1만세운동을 위해 대구시민들은 집결했다.
북후정: 국채보상운동 취지서가 낭독되었던 곳으로 서문시장을 관리하는 행정용 정자로 추정된다. 구한말 사진에서 북후정이 보이며, 1900년대 후반에 철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토바이골목: 구 서문시장은 대시, 마시장, 우시장, 닭전 등이 있었으며 마시장의 현재 장소는 오토바이 골목이다.
대신동 서문시장 입구: 구 서문시장 옮겨오면서 ‘서부시장’으로 명칭이 일본인들에 의해 잠시 변경되었지만, 시민들은 예로부터 계속 ‘서문시장’으로 불러왔다.
포목점 거리: 구 시장터의 대시 품목 중에 하나로 쌀, 주단, 포목 등 나라에서 관장하는 주요품목이 거래되었던 시장구역이다. 서문시장이 옮겨져서도 명맥을 유지하여 현재 1지구에 상점이 형성되어 있다.
건어물 거리: 1922년 옮겨와서 현재까지 품목의 변화 없는 거리다. 수산물, 건어물, 생선류 등이 거래되었다. 서문시장에서 가장 오래된 풍경을 지닌 곳이다.
서문시장 2지구: 가장 최근 2004년 불이 나 전소된 2지구
먹거리 좌판: 납작 만두, 돼지 암뽕, 잔치국수 등 시장 음식의 메카.
야시장: 2016년 개설된 야시장 풍경
7. 대구의 근대음식
국일따로국밥: 서문시장, 약령시가 만들어낸 대표 시장 음식.
뭉티기 고기: ‘육회’를 대구에서는 ‘뭉티기’로 부르며 레시피가 독특.
납작 만두: 한국전쟁 시기 피난민들이 고안해낸 독특한 만두.
우동 불고기: 노동자들이 많은 북성로의 연탄으로 굽는 돼지 불고기.
매운 떡볶이: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대구 사람 입맛에 맞는 떡볶이.
대구 치맥: 치맥의 본향, 대구에서 즐기는 다양한 치킨 레시피.
야끼 우동: 대구 화교들이 고안해낸 맵게 비벼 먹는 접시 우동.
곱창·막창: 저렴하고 피부미용에 좋다는 막창, 곱창, 대창.
닭똥집: 유일하게 닭똥집으로 먹자골목을 이룬 독특함.
무침회:명절, 관혼상제 잔치 음식이 일상화되어 상업화됨.
8. 국립대구박물관
국립대구박물관은 대구와 경상북도의 문화유산을 보존·연구·전시·교육하는 문화시설로 1994년 12월 7일에 문을 열었다. 2006년 10월 19일에 박물관 건물의 남쪽에 수장고를 추가하고, 북쪽에 사회교육관인 해솔관과 특별전시실을 증축하였다.
이후에 지방 국립박물관 전시의 특성화와 안정적인 전시 환경을 확보하고자 상설전시실 재개편공사를 시행하여 2010년 7월 19일에 고대 문화실, 중세문화실, 섬유 복식실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고대 문화실과 중세문화실은 구석기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통 시대적인 문화상을 전시하고 있다.
이 땅에서 인류가 처음으로 남긴 후기 구석기문화를 살펴볼 수 있으며, 삼국시대 신라와 가야의 문화를 한 자리에서 비교할 수도 있고, 신라의 불교 문화유산이 많은 지역의 특성과 유교를 바탕으로 성장한 조선 시대의 정신문화도 관찰할 수 있다.
민속실을 대신하여 새로 문을 연 섬유 복식실은 대구가 섬유 복식 산업을 바탕으로 근대도시로 성장하였기 때문에 만들어졌다. 우리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옷의 역사가 국내외의 자료를 바탕으로 교체 전시됩니다.
야외에는 청동기시대 고인돌과 집터, 삼국시대 토기 가마,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 곳곳에 있어 산책을 하며 둘러볼 수 있다. 기획전시실과 특별전시실에서는 연중 다양하고 흥미로운 전시를 만나보실 수 있다. 아울러 국립대구박물관은 박물관교육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해솔관에 여러 시설을 마련하였으며, 세대별, 계층별로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연중 운영하고 있다.
고대 문화실
대구 · 경북 지역에서 출토된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고고, 역사 관련 유물을 소개하고자 마련한 전시실입니다. 대구·경북 지역에서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당시의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도록 전시하고 있다.
중세문화실
대구 · 경북 지역의 불교 문화와 유교 문화를 소개하고자 마련한 전시실입니다. 대구 · 경북 지역에서 출토되거나 관련이 있는 문화재와 자료를 중심으로 대구 · 경북 지역의 불교 문화와 유교 문화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복식 문화실
실, 직조, 색채, 옷이라는 4개의 주제를 통해 과거부터 현재까지 우리 옷의 기원에 대해 전반적으로 소개하는 전시실입니다.
우리 옷의 전통적인 아름다움과 아시아의 전통복식을 함께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기획 전시실
다양한 주제를 가진 특별전시를 위하여 마련된 공간입니다.
우리문화 체험실
박물관을 방문하는 관람객들이 문화재를 눈으로 직접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공간입니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우리 문화를 즐기고, 발굴, 탁본, 토기 제작 등 다양한 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역사 탐방실
다양한 유물 모형을 전시하여 관람객이 눈으로 보고 직접 만져볼 수 있는 체험교육공간이다. 자유롭게 이용 가능하며, 유아와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프로그램도 운영되고 있다.
해솔관
일반인들을 위한 역사 탐방실, 어린이들을 위한 꿈마루와 우리문화 체험실, 박물관 교육 및 문화행사 공간인 강당과 강의실 등 다양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유적공원
돌방무덤: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설화리 청동기시대 유적지에서 옮겨온 돌방무덤을 전시하고 있다.
집터: 청동기시대의 중국동북지역과의 교류를 연구하는 중요자료인 상동 집터 유적을 이전 ·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다.
고인돌: 청동기시대의 대구 칠곡 복성리 고인돌과 이천동 돌널(石棺) 3기를 이전·복원하여 전시하고 있다.
토기가마전시장
대구시 수성구 욱수동 유적에서 토기 가마를 이전 ·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다.
시문학동산
대구 경북지역 출신 시인들의 명시를 감상할 수 있도록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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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선생님께, 늦었지만 퇴임 축하드립니다. 좋은 답사정리자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광엽선생님! 경산딸내집에 머무는관계로퇴임 저녁초대에 참여치못해 대단히죄송하오며 퇴임 을 진심으로축하합니다 그리고 귀중한 답사자료감사합니다
주요답사 지역 주소 확인했으면 합니다. 김진동 위원께서 답사 지역 선정하시기 바랍니다.
주차장도 고려해주셔야 할 것입니다. 답사 자료 잘 봤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김광엽선생님 늦게나마 정년퇴임울 축하드립니다.제2의 인생도 즐겁게 꾸려가시길 빕니다.답사는 함께 못해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