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과 창경궁 일대를 그린 동궐도. 고려대학 소장본이다. 오늘날 동궐도는 고려대와 동아대본 두 본이
남아 있다.
창덕궁: 순종 황제 임종한 곳…상대적으로
훼손 덜해
5대 궁궐 중에 창덕궁은 그나마 옛 모습을 가장 많이 간직한 곳이다. 순종 황제가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훼손이 덜
했다고 한다. 창덕궁은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자, 대신 조선의 정궁으로 역할을 해온 곳이다. 창덕궁은 동쪽의 경희궁 영역과 더불어 사실상
하나의 궁궐이었으며, 서궐로 불렸다. 서궐은 면적이나, 궁궐 조성에서 조선의 궁궐 중 가장 크고 화려하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의 모습.
인정문과 인정전. 조선 중기 이후 대부분의 왕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열었다. 주인을 잃은 궁궐에 잡초만
무성하다.
창덕궁은 1917년 화재로 대조전을 비롯한 내전 대부분이 소실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 화재로 수많은 서화와 귀중품이 소실되었다.
이는 일제의 고의적인 방화사건으로 추정된다. 일제는 창덕궁 복구를 구실삼아 경복궁의 주요 전각을 철거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현재 종묘와 창덕궁을 연결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일제가 이곳에 길을 낸지 83년 만이다. 원래 이곳은 역대 임금들의 영령들이
넘나들며 후손들이 정사를 잘 보살피게 돌볼 수 있게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창덕궁 남쪽 종묘까지 궁궐의 권역에 속했지만, 1931년 일제가 도로(현 율곡로)를 만들면서 원래 하나의 권역이었던 창덕궁과 종묘
사이를 갈라 놓았다. 현재 서울시는 이 구간에 약 300m터 길이의 터널을 내어 종묘와 창경궁을 연결하는 사업을 진행 중이다.
창경궁: 동물원 들어서는 등 일제로부터 가장 치욕 겪어
창경궁은 일제로부터 가장 치욕을 겪은 궁궐이다. 원래 창경궁 동쪽의 궁장(궁궐담장)은 현재의 서울과학관을 포함, 성균관대까지
이어졌다.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의 옛모습.
현재 창덕궁 서쪽 궁장을 따라가 보면 궁궐 담장에 붙어 지은 민가들이 담을 따라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일제는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황제에서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황제로 앉혔다. 그 후 순종은 아버지와 떨어진 채
창덕궁에 기거하게 되는데, 일제는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까지 만들었다.
대한매일신보는 당시 상황에 대해 ‘동물원을 수축할 차로 동궐(창경궁) 선인문 안에 있는 전각을 몰수히 허는데 그 중에 천여 년 된 옛
전각도 또한 훼절한다더라’고 적고 있다. 일제는 궁궐에 벚꽃을 심었다. 일제는 고종과 순종이 살아 있을 때 이런 야만적인 행위를 벌인 것이다.
창경궁 맞은 편에 있던 넓은 부지는 후원인 함춘원(경모궁) 일대였다. 하지만 일제가 경성제국대학 의과대학을 세우면서 부지와 전각이 모두
훼손됐다.
자리에 영희전의 모습. 1932년 경성제대 의학부 졸업앨범에 실린 사진이다. 영희전은 태조·세조·원종·숙종·영조·순조 의 영정 을
모셨던 전각.
서울대 병원이 들어선 함춘원(경모궁) 일대. 경희궁의 후원이자, 역대 선왕의 영정을 모시던 영희전이 있던
상당한 넓이의 궁궐터다.
경복궁: 해방되자 7200칸의 광활한 궁궐 전각은 10%도 안 남아
1890년경의 경복궁. 훼손되기 전의 모습으로 웅장한 위용이 드러난다. 현재는 사리진 서십자각의 모습이 선명하다.
광화문 앞 6조 거리의 모습.
경복궁은
조선 왕조의 영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궁궐이다. 조선의 건국과 함께 세워져 정치의 중심에 서오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는 아픔을
겪었다. 흥선대원군에 의해 다시 중건되었지만, 망국과 함께 또 다시 수난을 겪는다.
왕조의 상징이었던 만큼 일제는 경복궁을 철저하게 유린했다. 이런 수모 속에서도 한 가지 위안은 있다. 다행히 경복궁은 궁궐부지가 거의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화려했던 옛 모습으로 복원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위는 1926년 개최된 일제의 조선박람회 홍보물이고 아래는 1923년의 조선부업품공진회 관광 홍보지도
모습. 일종의 관광가이드다. 궁궐을 전시회장, 공원, 놀이시설로 탈바꿈
시켰다.
경복궁 부지가 남아 있는 것은 일본이 베푼 ‘호의의 결과’가 아니었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의 발전을 홍보하기 위한 공간으로 경복궁
부지를 적극 활용했다. 그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온간 박람회와 전시회를 열었고, 그때마다 경복궁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1929년 사이토 총독의 조선박람회 폐회사. 일제는 각종 행사를 근정전에서 열고, 총독이 용상에 올라 격려사를 했다.
1929년 열린 조선박람회 때의 광화문 모습. 동쪽 건춘문 옆으로 옮겨진 광화문을 일본식으로 3층
누각형태를 만들어놓았다.
경복궁 훼손은 나라가 공식적으로 망한 1910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이때부터 일제는 많은 건물을 팔아 넘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15년 조선을 강탈한지 5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여
‘시정오젼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열었는데, 그나마 남아 있던 전각이 모조리 철거되고 전시공간으로 꾸며졌다.
1923년에는 조선부업품공진회, 1925년 조선가금공진회, 1926년 조선박람회, 1929년 조선박람회, 1935년 조선산업박람회를
개최하는 등 일제는 경복궁을 조선근대화 선전장으로 활용했다. 해방이 되자, 330동, 7200칸의 광활한 궁궐의 전각은 10%도 남지 않았다.
왕 어진 모시던 곳을 이토 히로부미 사당에 팔아 창고로 사용
조선통독부.
경복궁 훼손의 결정타는
조선총독부 건립이었다. 1916년 일제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기 위해 지진제(地鎭祭)를 지낸 후 1926년 건물을 완공했다. 1917년 창덕궁
화재를 복구한다는 구실로, 침전인 교태전과 강녕전을 헐었고, 심지어 역대 왕의 어진을 모시던 선원전을 이토 히로부미 사당인 박문사에 팔아서
창고로 사용했다.
그밖에 일제에 의해 팔린 경복궁의 전각은 절이나, 별장, 요정, 개인저택으로 활용되었으며, 동궁인 자선당은 일본인 오쿠라라는 사람이
구입, 일본으로 가져가 개인 박물관으로 사용했다. 자선당은 관동대지진 때 불타고, 기단과 주춧돌만 1995년 조국으로 귀환했다.
총독부 가로막는다는 이유로 광화문을 국립민속박물관쪽으로 옮겨
1916년 일본 오쿠라 호텔로 옮겨진
자선당.
일제는 총독부를 가로막는 광화문을 현재의 건춘문 북쪽인 국립민속박물관 정문 자리로 옮겨 버렸다. 광화문은 총독부 건물을 가린다는 이유로
헐릴 뻔 했다. 하지만 살아 남았다.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일본인 민속연구가가 ‘아! 광화문이여!’라는 시를 써서 일본 잡지에 발표한 것이다.
광화문은 야나기 무네요시의 도움으로 겨우 헐리는 신세를 면하게 됐다.
일제는 당초 총독부 건물을 조선신궁 쪽을 바라보게 지으면서 광화문의 중심축도 틀어버렸다. 조선신궁은 남산에 조성한 일왕을 모시는
곳이었다. 광화문은 이후 박람회 정문으로 요란하게 치장되는 듯 온갖 순난을 겪으면서도 묵묵히 일제시대를 겪어냈으나, 결국 6·25 전쟁 때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나라를 잃기 직 전의 근정문. 고종과 순종이 경운궁으로 옮기고 나서, 아무도 살지 않는 주인 잃은
경복궁에 잡초만 무성하다.
광복 70년이 되도록 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있는 동십자각. 서십자각은 아예 없어졌다. 동서십자각은
‘궁궐’을 칭할 때 ‘궐’에 해당하는 것으로 궁과 떨어져 존재해서는 안 되는 건물이다.
경복궁 주변이 빌딩숲으로 둘러쌓여 있다. 원래 문화재 고도제한은 예외없이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하지만, 거리 측정 지점의 편법을 동원하면
무용지물인 법이 된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