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기엔 佛 心 이 가득합니다 ⊙
남해 금산(701m) 등산지도
위치 : 경남 남해군 상주면, 이동면
높이 701m의 산으로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유일한 산악공원으로
온통 기암괴석들로 뒤덮혀 절경을 이루고 있다.
신라 원효대사가 보광사라는 절을 지어 보광산이라 불려오던 것을
조선 태조 이성계가 이 산에서 100일 기도 끝에
조선왕조를 개국하게 되어 온 산을 비단으로 덮어 준다는 약속을 하였으나
조선의 개국 후 이를 실행하기 위해 중신들과 회의를 가졌으나,
중신중 한사람이 "우리나라에는 그 산 전체를 덮을 만한 비단이 없으며,
비단으로 산을 감싼 이후에도 몇년이 지나지 않아 누더기가 되므로
산이름을 "금산(비단금)"으로 하는것이 좋겠다고 하여 금산으로 불리우기 시작했다.
섬 산행중 남해 금산은 조망도 좋고 산 자체가 가진 멋도 뛰어난 대표적인 산이 바로 남해 금산이다.
제주도, 거제도, 완도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 네번째로 큰 섬인 남해는
'가는곳 마다 관광지'라 할 만큼 한려수도 해상 공원과 금산을 비롯,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전적지 및 유적지 등 둘러볼 곳이 많다.
이곳 금산에는 비둘기를 닮은 봉우리, 개바위, 날일(日)과 달월(月)자를 닮았다는 일월암,
자라처럼 생긴 흔들바위, 닭바위 등 갖가지 다른 모양을 하고 있는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가득하다.
대장봉, 사자암, 향로봉, 흔들바위, 쌍홍문, 음성굴 등이
울창한 숲과 함께 눈 앞에 보이는 남해바다와 조화를 이루어 금산 38경을 자아 내고 있으며
산 정상에는 우리나라 3대 기도처의 하나인 보리암이 소재하고 있어
목탁소리는 이곳 산행의 마음를 달래주고 있다.
등산코스
1코스 : 상주면 매표소- 쌍홍문- 보리암- 정상- 보리암-상주면 매표소(3시간)
2코스 : 복곡 제2주차장- 쌍홍문- 보리암- 정상- 보리암-보리암셔틀버스 정류장- 복곡저수지-주차장(2시간30분)
반대편 금산 주차장으로 이동(15분정도 소요)한다. 도로변에 위치한 주차장에서 본 길 건너 들머리 표정이 정겹다. 바라보는 능선의 화강암 바위들은 아침햇살을 받아 더 멋지게 앞으로 다가온다. 기 사진으로 보아오던 자연의 조각품들을 어떻게 감상하여야 할지 기대가 된다. 등산로 입구에는 국립공원임을 자랑하는 금산표시석이 서 있다.
쌍홍문의 외부모습
나무 계단을 오르니 능선이 나타나며 서서히 조망이 가능해 진다. 한쪽으로는 궁금해 하던 바위들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한다. 신라 초기 원효대사가 두 굴이 쌍무지개 같다고 하여 부르게 된 금산 제15경인 쌍홍문(雙虹門)이 관문답게 제일 먼저 선을 보인다. 쌍홍문 앞에는 검을 짚고 장군암(일명: 수문장)이 지키고 있다. 바위를 휘감고 있는 송악으로 인해 장군암이 더 늠름해 보인다고 한다.
제석봉에서 올라 보리암을 보다
상시암
금산산장
좌선대(坐禪臺)
한 사내가 이웃여인에게 반하여 상사병으로 사경을 헤매자, 이를 알게 된 여인이 이곳에서 그 사내의 마음을 받아 들였다는 제27경인 상사암이 건너편으로 보인다. 산장 안을 통과하다 보니, 음식과 숙박이 가능해 보인다. 앞에 조그마한 마루가 있는 일자형 옛날식 방이다. 신라의 원효대사, 의상대사, 윤필거사가 수도 좌선했다는 제20경인 좌선대를 바라본다. 앉았던 자리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상사암 오르는데크
상사암 위 조망 안내판(사진을 클릭하면 선명함)>
지나가는 바위 위 나뭇가지에 앉은 까마귀가 우리 일행을 반겨준다. 아직까지 우리는 까마귀를 흉조로 보지만, 산에서는 길조라고 하니 남은 산행이 기대된다. 상사암을 다녀와 단군성정으로 가라는 이정표이다. 데크 계단을 오르니, 위험표시와 함께 암봉들의 조망 안내판이 궁금증을 해결해 준다. 건너편 정상 아래 보이는 보리암도 손에 잡힐 듯하다. 단체사진도 찍으면서 아름다운 절경들을 추억에 담는다.
당군성전
흔 들 바 위 >
금산의 어느 곳이든지 지름길로 갈수 있는 여섯 갈림길이다. 우선 우리 겨레의 시조인 단군 할아버지를 모신 성역인 단군성전으로 간다. 1995년에 건립된 성전 분위기 자체가 엄숙하여 모두가 숙연해진다. 다시 갈림길로 나와 내려가면 제33경인 흔들바위를 찾는다. 몇몇 산우들이 밀어 보지만, 거북이 모양을 한 바위는 지면과 맞닿은 면적이 넓어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다시 올라와 정상(망대)으로 간다.
정상 (망대)
유명 선생의 글 >
높은 지점에 있어 사실상의 정상인 제1경 망대(望臺, 701m)에 오른다. 사방의 조망과 장엄한 일출이 절경이며 아름다운 남해바다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최남단에 위치한 이곳에서 나라의 병난이나 경축 시 불을 피거나 연기로 알렸다. 옆에는 큰 바위가 있는데, 한쪽 면에 ‘由虹門 上錦山’(쌍홍문을 통하여 금산에 올랐다)은 유명선생의 글로 전해져 온다. 바위 뒤 그늘에서 휴식과 남은 행동식을 한다.
보리암 3층 석탑 >
망대 아래에 정상 표시석(681m)을 두어, 여러 사람들이 함께 기념사진 찍도록 배려한 듯하다. 보리암으로 내려오다 보니 매점, 차도, 소형차 주차장이 있다. 아침식사 하던 곳(복곡)에서 올라오는 도로이다. 한동안 도로를 따라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 반대편의 방향의 보리암으로 간다. 신라 신문왕 3년(683)에 기도처로 창건된 보리암(菩提庵)은 3대 기도처 중(낙산사의 홍련암, 석모도의 보문사) 하나이다.
해수 관음보살상
법당
천년지장도량 용문사
경남 남해 호구산에 자리 잡은 용문사는
신라 문무왕 3년(서기663)에 원효대사께서
보광산(금산)에 건립한 보광사(일명 봉암사)를 그 전신으로 하고 있다.
원효대사께서 그 곳에 첨성각을 건립하고 선교의 문을 열어 그 명성을 떨치었으나 이후 보광사의 사운(寺運)이 기울자 조선 현종 원년(1660)에 백월대사께서 용소리 호구산에 터를 정하고 사찰을 옮기게 되었다.
이후 신운화상이 첨성각 근처에 탐진당을 세우고 상법화상이 적묵당을 건립하는 등 중창을 거듭하여 오다 현종 7년(1666)에 백월대사께서 대웅전을 건립하고 절 이름을 용문사라 하였다.
이어 숙종 35년(1709)에는 염불암이 중창되었고 절의 맞은편에는 백련암 영조27년(1751)이 건립되었다.
조선 숙종때에는 수국사로 지정되어 왕실에서 경내에 원당을 건립하고 위패를 모시는 등 왕실의 보호를 받는 사찰이 되기도 했다. 그 당시 왕실로부터 하사받은 연옥등, 촛대와 번 그리고 수국사금패 등이 유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어 숙종 35년(1709)에는 염불암이 중창되었고 절의 맞은편에는 백련암 영조27년(1751)이 건립되었다.
조선 숙종때에는 수국사로 지정되어 왕실에서 경내에 원당을 건립하고 위패를 모시는 등 왕실의 보호를 받는 사찰이 되기도 했다. 그 당시 왕실로부터 하사받은 연옥등, 촛대와 번 그리고 수국사금패 등이 유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또한 용문사는 호국사찰로서 임진왜란 때 사명당의 뜻을 받들어 왜구로부터 나라를 구해냈으며 그때 사용했던 삼혈포와 목조 구사통이 지금까지 보관되어있다.
지금의 사찰은 본사중흥 대공덕주로 모셔지고 있는 호은당께서 서기 1900년에 복원 중흥한 것이다.
소장 문화재로는 보물 1446호 괘불탱화와 보물 1849 대웅전 유형문화재 7전 지방문화재 2점 문화재자료 7점을 보관하고 있는 전통사찰이다.
1996년부터 템플스테이 사찰로 지정, 운영되고 있는 용문사는 전법도량이자 불교계를 대표하는 천년지장도량으로 지금도 성불과 중생구제의 서원을 간직한 스님들의 정진이 끊이지 않는 청정수행 도량이다.
살아있는 사람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하면 잘 들어주는 우리나라 삼대 관음도량이 있습니다 ㆍ
남해 보리암, 낙산사 홍련암, 강화도 보문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ㆍ
돌아가신 분을 극락에 가게 해 달라고 하면 잘 들어주는 우리나라 삼대지장도량도 있습니다ㆍ
남해 용문사, 철원에 심원사, 고창 선운사 도솔암이 있습니다 ㆍ
여기서 보면 우리나라 삼대관음도량도 남해에 있고 우리나라 삼대지장도량도 우리남해에 있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남해지역의 특수성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세 곳에 용문사가 있습니다.
남해 용문사, 예천 용문사, 양평 용문사가 있구요
용문이라는 것은 용화세상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ㆍ
세월이지나 보광사가 없어지고 1660년 백월당그님이
보광사대웅전등의 건물을 이곳으로 옳기고 사찰이름도 "용문사"라고 고쳐불렀다 한다
그리고 1661년에 탐진당과 적묵당을지었다,1666년에 일향스님이 대웅전을 창건했고
지혜스님이 다듬고 윤색하게 했다. 지금의 건물들은 임진왜란 때 불에탄것을 다시지었다
설선당)
대웅전봉서루를 들어서서 마주하게 되는 대웅전은 숙종 29년(1703년)에 성화 스님이
낡은 대웅전을 고쳐 새롭게 지은 전각으로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법당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대웅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의 화려한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겹처마의 덧서까래가 길어저 전체적으로 지붕이 위로 휘어져 들려 보이며, 네 귀퉁이에 추녀를 받치는 기둥인 활주가 있다. 건물 처마 아래는 여의주를 입에 문 용의 머리가 장식되어 있으며 법당 안으로 들어서면 목조 아미타삼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모셔져 있다.
뒤로 걸린영산회상탱화는 건양(建陽) 2년(1897년)에 조성된 것으로, 그림 중앙에 있는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전방 좌·우측에 협시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그리고 사천왕이 배치되어 있다.
그 상단에는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 관음보살, 지장보살이 각각 배치되어 있으며, 가장 상단에는 제자상, 금강상, 사천왕상 등의 권속들을 꽉 차게 배치하고 있다.
남해용문사는
경남 남해군 이동면 용소리에 호랑이가 누워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남해군립공원 호구산(虎丘山 해발 650m)의 중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雙磎寺)의 말사입니다ㆍ
남해에서는 가장 크고 오래된 절로 알려져 있다.
용문사는 802년 (신라(新羅) 애장왕(哀莊王) 3년)에 창건되었고, 조선 중기의 승려 신운(信雲)이 탐진당(探眞堂)을 짓고 상운(尙雲)이 적묵당(寂默堂)을 세웠으며 선조(宣祖) 25년(1592)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이 절 승려들이 승병으로 참여하여 왜군과 싸우다가 불에 타 없어진것을 현종(顯宗) 2년(1661) 백월당 학진(百月堂 學進)이 길지(吉地)를 찾아 용연(龍淵) 위쪽에 터를 잡고 인근 금산(錦山)의 보광사(普光寺) 건물(建物)을 옮겨와 중창(重創)하면서 ‘용문사(龍門寺)’라고 이름붙였다고 합니다ㆍ
보광사(普光寺)는 원효(元曉) 대사(大師)가 세운사찰이었으나 이곳으로 옮길 당시에는 폐사 직전의 상태였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는 사명당의 뜻을 받들어 승려들이 용감하게 싸운 호국사찰이다. 훗날 이런 호국의 불심에 감동한 숙종 임금은 용문사를 수국사(守國寺)로 지정하고 왕실의 축원당을 세웠다고 합니다 ㆍ 수국사란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나라를 지키는 사찰’의 의미로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호국사찰의 증거물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용문사에 보관 중인 총신 및 총구가 세 개 달린 개인용 화기인 삼혈총통(三穴銃筒) 삼혈포가 그리고 숙종이 호국사찰임을 표시하기 위해 내린 수국사금패(守國寺禁牌)와 봉산수호패(封山守護牌)가 그것입니다.
금패(禁牌)란 지방의 관청이나 관리가 사찰을 함부로 하는 것을 금하는 표지이며 봉산수호패에서 말하는 봉산(封山)이란 왕과 왕비의 능묘를 보호하거나 기타 특수한 목적을 위해 벌목하는 행위를 금하기 위한 표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봉산수호패(封山守護牌)란 용문사가 자리한 호구산을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표지인 것입니다.
봉산수호패에는 앞면에 ‘남해용문사(南海龍門寺) 향탄봉산수호총섭(香炭封山守護總攝)’을, 뒷면에는 이 패를 발급한 ‘예조(禮曺)’와 그 수결(일종의 싸인)을 새겼습니다.
숙종은 임진왜란이 끝난지 77년이 지난 1674년에 즉위했습니다. 종전 후 100년이 다 되어서도 용문사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숙종은 이것으로도 감사의 마음을 다 나타내지 못했다고 보았는지 연꽃 모양의 옥등 2개와 촉대 1개를 하사했었으나,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빼앗아 갔다고 합니다.
탐진당 - 승당으로 학승들의 수행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신운스님이 건립한후 여러차례 중수 하였고 2003년 중암스님이 다시 중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