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역사】
제3절 한국불교
1. 삼국시대의 불교
4) 미륵신앙과 불국토 사상
미륵신앙
불교가 정착되면서 부처와 보살들에 대한 신앙도 널리 퍼졌다.
삼국시대에는 특히 미륵에 대한 신앙이 활발했다.
미륵에 대한 신앙은 죽은 후에 현재 미륵이 수행하고 있는 도솔천에 태어나
미륵의 설법을 듣기를 원하는 상생신앙과 내세불이 이 지상에 출현하여
모든 중생들을 구제해 주기를 기원하는 하생신앙이 있다.
그런데 현재 남아 있는 삼국시대의 자료에는 주로 하생신앙이 나타나며,
상생신앙은 이른 시기의 사례가 일부 보일 뿐이다.
상생신앙의 사례는 주로 고구려에서 보이고 있는데
6세기 중엽의 것으로 추정되는 「영강7년명불상광배(평양 발견)」와
「병인년명금동판(함남 신포시 발견)」 등에 죽은 사람이 도솔천에 올라가
미륵을 만나기를 기원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리고 5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만주(滿洲) 집안(輯安)지역에 있는
장천 1호분의 전실 벽화 중에 무덤의 주인공 부부가 도솔천에 왕생하여
미륵에게 예배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고구려에서 미륵 상생신앙의 사례가 발견되는 것은
고구려불교에 큰 영향을 주었던 북위에서 도솔천 왕생신앙이 성행했던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본래 천제의 자손으로 자처하던 고구려의 왕실과 귀족들은
원래 사후에 천상으로 올라가 조상들을 만난다는 내세관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즐거움이 가득한 하늘나라인 도솔천에 올라간다는 상생신앙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6세기 후반 이후에는 고구려에서도 상생신앙의 사례가 발견되지 않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만든 불상들에는 도솔천에의 왕생을 대신하여
항상 부처님을 만나서 가르침을 듣게 될 것을 기원하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는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도솔천에 왕생하여 즐거움을 누리는 것보다
부처님을 만나 가르침을 들음으로써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보다 가치가 있다고 여기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생신앙은 백제와 신라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백제의 무왕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익산의 미륵사는
미륵이 지상에 출현하여 세 차례 설법함으로써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는 것을 상징하는 3금당 3탑의 양식으로 건축되었고,
신라에서는 경주 근처의 단석산 꼭대기에 8미터 크기의 대형 미륵 3존상을 새기고
미륵이 지상에 출현하기를 기원하였다.
백제와 신라에 미륵 하생신앙이 성행한 배경에는
두 나라의 불교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중국 남조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미륵 하생신앙이 있다고 생각되지만,
그와 함께 백제와 신라에서 전륜성왕의 이념이 강조되던 것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불경에서는 미륵이 출현하여 용화 회상을 건립하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 전륜성왕이 나타나서 세상의 혼란을 극복하고
지상 낙원을 건설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여
전륜성왕과 미륵의 지상출현을 긴밀하게 연결 짓고 있기 때문에
왕실이 전륜성왕의 이념을 고취시키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미륵의 하생에 대한 기대가 커져갔을 것이다.
실제로 미륵 하생신앙과 전륜성왕의 이념에 관한 자료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신라의 경우 미륵 하생신앙은 진흥왕의 아들로서 금륜이라는 이름을 지녔던
진지왕 때에 처음 보이고 있고, 신라사회에서 미륵의 화신으로 이야기된
화랑제도 역시 진흥왕 때에 처음으로 제정되었다.
본래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대외적인 팽창정책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이용되었던
전륜성왕 이념은 불교의 틀 안에서 제시된 것이었으므로
전륜성왕의 노력이 불교적 이상세계인 미륵의 용화 회상을 건립하기 위한
준비과정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백성들을 결집시키는 데에도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백제와 신라의 미륵 하생신앙은
57억 6천만 년 이후의 먼 미래에 미륵이 출현한다고 하는
본래의 미륵 하생신앙과 달리, 현실에서 곧바로 미륵의 용화회상이 구현되기를 기대하는
실천적 성격이 강했다.
한편 삼국시대 후기에 신라에서 다수 제작된 반가사유상들은
이러한 미륵 하생신앙을 상징하는 불상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반가사유상은 도솔천에서 지상에 내려와 성불을 준비하고 있는
미륵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서 전륜성왕의 지도 아래 곧 용화회상으로 변할
신라사회의 이상을 상징한 불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 대해서는 다른 나라의 경우
미륵 이외의 다른 보살들 중에도 반가사유상으로 표현된 사례가 있고,
신라의 반가사유상들에 미륵상이라는 명문이 발견되고 있지 않으므로
그렇게 단정하기 힘들다는 반론도 있다.
반가사유상은 본래 출가하기 이전 석가의 사유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데서 비롯되어
사회와 시대에 따라서 각기 다른 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만, 신라의 경우에는 현존하는 반가사유상 중에
하생한 미륵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사례들이 있고,
또한 반가사유상이 성행한 시기가 전륜성왕의 이념과
미륵 하생신앙이 유포되던 시기와 일치하고 있으므로
반가사유상을 이 시기의 미륵 하생신앙을 상징하는 불상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불국토 사상
불교가 정착되면서 자신들이 살고 있는 현재의 국토가
오랜 과거부터 불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현재도 불교의 호법신들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다는 불국토 사상도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불국토 사상은 특히 불교의 수용과 국가체제의 정비를
동시에 이루었던 신라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이는 국가의 정통성을 불교적으로 수식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현재의 국토가 아주 오랜 옛날부터 불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유연(有緣) 국토 관념의 예로서는,
신라의 수도 경주에는 먼 옛날 과거 부처의 시대에 사찰이 있었던
일곱 곳의 가람 터가 있다는 이야기와 황룡사의 뒤쪽에 있는 큰 돌이
과거 부처인 가섭불이 앉아 있던 연좌석(宴坐石)이라는 이야기 등이 있다.
이러한 관념은 이 세계는 수많은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여 왔으며
그 때마다 부처가 출현하여 중생들을 구제하였다는 불교의 세계관에 의거하고 있는 것으로,
신라는 현생에서의 불교 수용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아주 먼 과거에 불교의 인연이 있는 불교의 중심국가라는 의식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편 신라가 불법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관념과 관련된 것으로는
신라의 국왕이 전생에 도리천 천자의 자식으로 하늘의 천중들이 보호하고 있고,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주변의 나라들이 모두 복속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이러한 관념은 중국에 유학하였던 승려들을 통하여 제시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안홍이 저술했다는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는
이와 관련된 내용들이 구체적으로 들어 있었다고 하며,
선덕여왕대에 활동한 자장 역시 비슷한 내용을 이야기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중국에서 불교 신앙을 통하여 사회의 안정을 추구하려 했던
수나라 문제의 정책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불법의 가호로 나라를 평안하게 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대형 탑들을 건축하여 숭불의 황제로 유명했는데,
그로 인해 후대에는 문제가 도리천의 보호로 남북조의 통일을
달성할 수 있었다는 인식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그 당시 신라는 삼국의 항쟁과정에서 상당한 어려움에 처해 있었으므로,
이러한 문제의 숭불정책을 본보기로 삼아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려던 과정에서
신라도 불법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인식이 생겨났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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