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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남미 8개국 여행
날짜는 한국 날짜임[시각은 현시각임]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16회(경비행기 1회 제외)에 걸쳐 항공기를 교체 탑승하며
형식적으로는 8개국, 실질적으로는 중남미 6개국을 여행한 셈이다.
LA는 경유지였고, 파라과이는 잠시 국경을 넘어
면세점에 들린 것으로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항기기 대신 버스를 이용하면 40여 일이 걸린다고 했다.
이 일정표가 중남미 여행을 계획하는 분들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인천공항-LA-멕시코시티-쿠바 하바나-멕시코시티-칠레 산티아고-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리레스-브라질-칠레 산티아고-페루 리마-파라과이-페루 리마-LA-인천공항
10일 20:20 인천발/ 항공기 탑승. 이후 항공기 교체 탑승만 16회(경비행기 1회 제외)
10일 13:40 LA착 한인타운 시내관광 1박
11일 07:20 LA발
12:55 멕시코행 발
12:55 멕시코 착
14:55 멕시코시티 발
16:55 칸쿤 착 1박
12일 체첸이트사로 이동 칸쿤 귀환 숙박 칸쿤 2박
13일 쿠바 하바나행
14:40 착 하바나항구 도시야경 1박
14일 쿠바 하바나 1박 - 조식후 구시가지 관광
19:26 파나마시티 착
20:52 공항 발
23:42 멕시코시티 착- 1박
15일 멕시코시티 시내 관광
21:10 멕시코시티 발
16일 08:25 칠레 수도 산티아고 착
09:30 산티아고 발
11:35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래스 착 시내관광 1박
17일 11:25 부에노스아이래스 발
13:10 이과수 도착 아르헨티나 이과수 폭포 관람, 저녁 공연 1박
18일 이타이프댐 브라질 이과수폭포 관광 1박
19일 09:30 이과주 발
11:25 리오 착 슈라로프산 등정 1박
20일 리오데자이네로 시내관광 중앙성당, 예수상 1박
21일 07:20 리오데자이네로 발
12:40 칠레 산티아고 착 산티아고 시내관광 후 산크리스토발 언덕 1박
22일 07:45 산티아고 발
09:45 페루 수도 리마 착 시내관광
23일 08:30 리마공항 발
09:45 꾸스코 착 잉카 유적지 관광 전용버스로 우루밤바 이동 1박
페루 여행지
수도 리마[22일1박][항공]> 꾸스코 >우루밤바[23일 1박] >마스픽추> 꾸스코[24일1박] >
티티카호수 >뿌노[25일 1박] >훌리야카[항공] >리마[26일 1박] >나스카[27일 1박] >
리마[항공][28일 공항, 29일 01:05출발 기내1박]> LA
24일 우루밤바에서 기차로 마추픽추로 이동
06:30-08:00 마추픽추 관광 꾸스코 귀환 14:12-16:00 1박
25일 꾸스코에서 뿌노로 이동 08:00 출발
잉카 유적지 5곳 관광하며 이동, 소요시간 11시간 30분.
유황온천은 비 때문에 포기.
26일 뿌노 08:00 출발 티티카카 호수, 우로스섬, 점심후 리마행
15:55 훌리아까 공항 발
18:45 리마 도착 1박
27일 리마 7시발 나스카로 이동. [전용버스] 4시간 소요.
바에스타섬[물개섬], 샌드카 투어 나스카 [Nazca] 1박
28일 나스까 경비행기 이용하여 라인투어
07:30 출발 나스까- 리마 [전용버스] 4시간 소요.
29일 01:05 리발 발 기내 1박 06:50 LA착 11:50 LA발-
30일 18:10 인천공항 착
중남미 8개국 여행 (8-1미국)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6개월 남겨 놓고 있을 때 뜻밖에도 사장이 선심을
베풀어 10일간의 일본 국비여행을 해외 출장 명목으로 다녀 온바가 있었다.
학창시절 수학여행 한 번도 가보지 못했었고 신혼여행도 가보지를 못했던
필자는 해외 나들이가 처음이라 자못 흥분의 연속이었다.
그 여행엔 반드시 출장 복명서를 써야 했기에 치부책이 필요 했었고
실제로 생소하게 접한 사물과 현상들을 세세하게 기록 하였었다.
그 후 정년퇴직을 하고 부터는 이런 이유 저런 이유의 해외여행 기회가 심심치 않게
찾아와 집 사람이 아프기 전까지인 2005년도 까지 9년간에 걸쳐 24개국을 다녀왔다.
마치 그동안 주어지지 않았던 여행기회를 한꺼번에 보상이라도 받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집사람의 종양 수술 회복이 더디기는 하지만 3년이 지났고 여행의 핑계꺼리
칠순의 해가 넘어가고 있기에 벼르던 중남미 여행길을 주저 없이 택하여 감행하였다.
외환위기 때보다 더 어렵다는 사회 현실을 무시 한 채 고액의 여행비를
마이너스통장에서 끄집어내어 납부하고 미국 무비자 3일째인 2008년
11월 19일 친구 신모변호사와 함께 인천공항 행의 지상버스 네 시간 반을,
그리고 미국LA행 천당 지키기 열 시간 반으로써 21일간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비행기는 어둠속을 뚫고 일본‘호까이도’옆구리를 스치나 싶더니 알라스카방향으로
태평양을 가로질러 날짜변경선을 넘었고 여명과 함께 기수가 남으로 꺾이더니
만년설을 인‘록키산맥’을 따라 시애틀, 샌프란시스코해안을 내려다보면서
목적지인 LA로 향하는 것 같았다.
하나투어에서 배부한 슬립퍼가, 그리고 아시아나의 기내식 539k칼로리의
쌈밥이 일품이었고 186kcal의 메밀국수에 따라 나온 반주, 백포도주는
쾌청의 하늘 아래 둥둥 떠도는 솜털 구름사이사이로 지상의 자연과 인간들이
벌려 놓은 장난감들을 내려다보는 재미를 한껏 부풀리는데 모자람이 없었다.
시간은 흘렀으나 현지시간이랍시고 지나가 버린 날이 다시 시작 되고 있었다.
거기다가 모두들 써머타임 어쩌고저쩌고 하며 손목시계 바늘 돌리느라 법석이다.
앞으로 8개국의 표준시가 바뀔 때마다 이 야단일 것이다 싶으니
머릿속에 내재 해 있던 “지구 통일 표준시”가 다시 고개를 든다.
일만 미터 상공을 시속 일천km로 날던 비행기의 고도와 속도가 어느새
기세가 한 풀 꺾였고 지상의 황무지 사막 가운데에 하나씩 펼쳐지던
사각형의 농장들과 벌레집들(건물들)이, 그리고 그 사이사이 바둑판(거리)의
딱정벌레(차량) 들이 줄을 지어 움직이는 것이 점점 커지고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보잉737의 거구는 활주로에서 엔진 역회전 소리로 안전 착륙을 알린다.
로데오 거리와 비버리힐스
까다롭기로 소문 난 미국 당국의 보안검사를 2시간여에 통과하고 길어지고 있는
해 그림자를 따라 비버리힐스 가는 길목 명품거리 (로데오거리)를 찾았다.
거리는 한산 하지만 깨끗이 단장된 모습이 가히 명품거리 같았다.
1998년도에 미국 왔을 때 와보지 못한 이 거리는 잊혀 지지 않을 것 같았다.
해 그림자가 사라지면서 부자동네 비버리 힐스로 달리니
황혼은 숨고 어둠의 지배에 들어가고 있었다.
동네에 들어가야 할 명분이 없어지고 만 것이다.
떠오르는 10년 전의 동네 모습으로 계속 기억하여 두는 수밖에 없었다.
헐리우드 거리
어둠을 따라 켜지고 뚜렷해지는 가로등이 거리를 장악 할 때
헐리우드 거리는 붐비기 시작이다.
차이니스 씨어터 앞, 유명 배우들의 수장문, 족장문이 새겨진
보도블록 사진 찍기에 열들을 올리고. . . . . .
무려 2km에 달하는 배우 들, 유명 작가들의 흔적들에 우리나라 사람은
오직 한 사람 고 도산 안창호 선생의 손자 안필립?이 있다는
가이드의 알림을 귓전에 흘리며 차에 올랐다.
차는 황혼에 삼키 우고 있는 다운타운의 장대 건물들을
멀찌감치 아쉬워하며 코리아타운으로 향했다.
코리아타운
LA의 코리아타운은 초라했다.
미국답지 않았다.
한글 간판이 눈에 띄기는 하나 밤거리의 코리아타운은 너무도 기대에 어긋났다.
“만리장성”(중국식당)에서의 저녁식사는 시장하였던 탓인지 꿀맛이었다.
하지만 만리타국 코리아타운에서 하는 첫 식사를 우리교포 업소가 아닌
중국 업소에서 하게 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식사가 끝나고, 생명부지의 18인 중 한 쌍이 빠진 채
각자 자기소개로 첫 대면 인사를 마쳤다.
따라서 내 자신이 호적상의 최고령자임도 확인 되었다.
숙소인 삼성급 라마다 프라자호텔에서의 짧은 하룻밤이 시작 되었고
SK 핸드폰은 자동으로 로밍 되어 한국시간과 현지시간이 함께 나타나
손목시계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깊이 간수케 하였다.
룸메이트, 친구 신변호사는 화장대 앞, 등받이 없는 의자에서
뒤로 나가 떨어져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놀램을 선사하기도 하였다.
약 삼억 인구의 대국, 미국 LA의 밤은 우리 일행의 고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일을 위한 깊은 잠속으로 깊이깊이 빠져들게 하고 있었다.@
- 學 松 -
엘에이 당부
에 해외여행 설렘으로 광주출발
일십팔명 인천모여 어둠타도 열시간반
바다건너 록키 따라 첫 기착지 미 엘에이
까다로운 공항검색 비버리힐 황혼관광
로데오길 산뜻함에 비교되는 한인 타운
헐리웃의 손바닥 문 안씨 한 분 아쉬워라
저녁식사 하는 데가 중국음식 만리장성
교포식당 외면이유 뻔하지만 안타깝다
가이드야 이후라도 애족정신 당부한다.@
중남미 8개국 여행 (8-2멕시코)
LA 공항의 하늘은 쉴 새가 없다.
뜨고 앉고 가 매분 간격인 듯 분주하다.
물 값이 기름 값보다 비싸다고 투덜댄다.
다섯 시간을 날아야 멕시코 칸쿤이다.
열대지방의 카리브만이 하늘색과 같이 푸르다.
내려다보는 경치가 좋은 날씨와 어울려 밀림지역이 한가롭다.
기내 서비스음료 한 잔의 보드카가 치통을 불러온 것 같다.
앞으로가 걱정이다.
20 여일을 치통과 싸우려면 각오가 단단해야 할 것 같다. 뱀사 자 모양의 육지가 가늘게 뻗는가 싶더니 어느새 덜커덩,
서투른 조종사의 착륙 솜씨다.
칸쿤
열대지방 치고는 견딜만한 더위다.
수많은 이 세상 인종이 다 모인 듯, 사람들의 모양새가 가지각색이다.
그 중에 우리가 확실한 이방인으로 끼어들었다.
[조한]이라는 현지 가이드의 차내 멘트다.
[칸쿤]이라는 이름은 원주민어로 뱀사(巳)자 모양을 뜻한다고 했고
도시엔 단 하나의 간선 도로가 관통하고 있어 길 잃을 염려가 없다고도 했다.
도시는 호텔지역과 다운타운지역으로 확연히 구분되어 있었고
그 길은 한 쪽에 호수(석호?)를 끼고 있어 더 없이 아름다운 듯싶었다.
우리는 지는 해를 따라 잘 가꾸어진 10여 키로의 도로를 감상 한 후에
120여개의 호텔 중 하나인 호텔[홀리데이 인]으로 가서 여장을 풀었다.
우리의 손목엔 붉은 리본의 족쇄가 채워졌고 시차적응이 제대로 안된 우리는 드문드문
내 닫는 차량들의 질주 소리에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창밖 밤하늘의 유난히도 맑게
반짝이는 별빛을 보고서야 에어컨을 잠재우고 하늘을 통한 국경 넘기 일과를 마무리 했다.
신변호사는 욕조에서 미끄러져 약간의 외상으로 어제에 이어 두 번째 시련을 맛보았다.
전기 플러그 또한 핸드폰 충전하는데 맞는 규격이라 좋았다.
화장실엔 어제와 마찬가지로 칫솔도 없고 머리빗도 없으며 무가 음용수도 없어 아쉬웠다.
멋진 카리브 해안, 호텔 식당의 뷔페식 조반, 하얀 조개껍질 규사와 해수욕장,
쪽배 한척, 맑은 하늘과 맛 닿은 푸른색의 바다,
그 위를 소리 없이 미끄러지고 있는 하얀 배 한척,
뚤룸
스케줄을 바꾸고 [벽]의 뜻을 가진 [뚤룸]마야 유적지를 갔다.
무비카메라는 별도의 추가 입장료가 필요하단다.
조그만 분지의 돌담 성벽 안에 벽만 남아 있는 낮은 석조 건물에서
겁 없는 이구아나 한 마리가 왕방울 눈치로 두리번거린다.
사진을 찍어도 “원 달라” 소리가 없다.
유일한 무료 피사체다.
푸른 잔디와 군데군데 적당히 자리 잡고 있는 주거지, 왕궁, 신전의 유적 들,
마야인 들의 체구가 작았을 것으로 추측케 하는 유적 들이다.
카리브 해안 절벽 아래의 물보라가 틀림없는 그림 같다.
제주도 용머리 해안보다 규모가 크다.
푸른 나무 몇 그루가 뙤약볕아래 관광객들의 오아시스가 되고 있다.
훼어 아유 프롬? 푸른 눈의 어여쁜 아가씨는 아일랜드에서 왔다고 대답 한다.
1km 정도의 걷기에 현지 식 점심, 또뚜리아(옥수수전병)에 내키지 않은 양고기를 싸니
멕시코의 전통음식 [딱고][뚜띠아]가 되고 튀기면 [나초]라 하던가. . . . ?
돌아오는 길, 쇼핑몰 단지에서 ‘칸쿤’이 표기된 3 불짜리 기념품 하나를 챙겼다.
1억이 넘는 멕시코 인구는 메스티족(혼혈)이 70%, 인디오가 20%,
백인이 10%정도로 구성 되어 있으며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있고,
거의가 카톨릭 신앙을 가지고 있으며 화폐는 폐소를 쓰고 있다고 한다.
60년대엔 우리보다 더 잘 사는 나라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뒤쳐져 있다고도 한다.
치첸이사
유적지[치첸이사]의 어원은 [우물]이라고 한다.
꿀꿀 깐(깃털과 뱀) 피라미드 [1년 365일(91계단×4+1)]를
그리고 전사의 신전과 희생의 샘 등을 둘러보았다.
규모에, 땀에 취해 출구를 잃고 헤맸다.
멕시코의 주식은 옥수수라 했고 선인장을 원료로한 [데낄라]가 세계적인 명주라 했다.
값을 환산 해 보니 한국에서의 양주 값이었다.
38도라던가 하는데 약간의 향이 있어 중국술을 떠 올리게 했다.
조한 군의 김밥 도시락으로 저녁을 메꾸고 큐바 아바나 행 밤비행기를 탔다.
큐바 여행기는 8-3 편 참조
큐바 아바나에서 하룻밤(큐바 여행기는 8-3 큐바 편) 하루 낮을 지나고
멕시코 시티
멕시코시티에 도착, 8,000원 짜리 명동회관의 한식 김치찌개는 수준 이하,
오징어 볶음 2만원, 불고기 2인분3만원, 육개장 1만원, 따로국밥 9천원,
우리 소주는 10불이라니 14,000원, 지하철 요금이 250원, 택시 요금은 600원,
교포 1만5천 명 정도가 사는데 대부분 장사를 한단다.
잠깐 알아 본 멕시코의 일면이었다.
시내의 도로 중심을 지하철처럼 누비고 다니는 2~3량 한 대의 MB버스가,
그리고 길가 쉼터 그늘의 구두닦이 모습이 이채로웠다.
가무잡잡한 피부와 목이 없어 보이는 짤막한 키에 떡 벌어진 남성들의 건강미도,
검은머리에 작으면서도 야무지게 내민 엉덩이의 여성들도 다 힘이 있어 보였다.
남녀 성비는 45:55이지만 대미 불법취업 탈출이 메꿔 주고 있다는
최진인 가이드의 그럴 듯한 설명에 수긍이 갔다.
과달루뻬 성당군
과달루페 성당군의 여섯 성당건물들은 로마 바티칸시티를 생각나게 하였고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미사 집전의 모습 들이 모든 이의 모자를 벗게 했다.
기울어지고 있는 성당도 관광객의 볼거리 중 하나.
그리고 2만 명의 동시 집회가 가능한 기둥 없는 원형미사실과 황금장식,
또 노인과 신부와 성모마리아에 얽힌 설화(별첨)와 교회에 보관중인 증거 그림도
들을 거리, 볼거리.
테오티와칸(해와 달의 피라미드. 사자의 거리. 케살코아즐)
떼오띠와칸의 햇빛은 강렬했다.
해의 피라미드를 오르는 돌계단은 가쁜 숨을 불렀다.
탁 트인 지평선이 열 올리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피라미드 정상에서 태양의 기를 받고 사진을 찍고. .
남들이 하는 웃기는 행동들을 따라서 해보고 . . . . . .
사자의 거리, 잡상인들의 바가지 긁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심심치 않다.
자연을 소재로 한 묵돌 작품들, 노리개들, 은 수공품들,
40달러짜리가 10달러로 팔리고 30달러짜리가 5달러로 팔린다.
달의 피라미드 돌계단의 경사는 더 심했다.
중간지점까진 단숨에 올랐으나 그 이상은 보수공사 중으로 접었다.
그러나 내려다보는 사면팔방은 땀의 대가로 충분 했다.
케살코아들 등 아즈텍 돌 문명 유적지를, 그리고 시내의 소깔로 광장 주변을
주마간산 구경하였으나 역광선 아니면 건물의 크기가 핸폰 사진에 적합지 못하여
멕시코 관광이 조금은 아쉬웠다.
칠레 행 밤 비행기 시간은 점점 가까워 오고 있고 저녁 한식은 도시락으로 바뀐 것 같다.
추기 : * 소깔로 광장의 대 성당도 기울고 있었다.
* 중남미 3 대문명 : 마야문명(과테말라.온두라스. 멕시코).
아즈택문명(멕시코).
잉카문명(칠레. 페루)@
* 세계 3대 성모 성지(멕시코의 고달로프. 포르트갈의 파티마. 프랑스의 루르드
그라시아스(뜻=감사합니다)
- 學 松 -
(별첨 : 설화 퍼옴)
세계 3대 성지 가운데 하나인 과달루페 대성당을 가다.
생음악소리를 뒤에 남겨놓고 전용버스를 타고 포르투갈의 파티마,
프랑스의 루르드와 더불어 성모가 발현한 세계 3대 기적지의 하나로 불리는,
멕시코시티 북쪽외곽에 있는 과달루페 대성당에 갔다.
1531년 12월 12일 테페약에 사는 한 무지하고 평범한 인디오,
「후안 디에고」가 천주교로 개종하였다.
세례도 받지 못한 이 예비자 인디오는 새벽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테페약 언덕에서 누군가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언덕 위에는 아름다운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찬란한 옷을 입고
무지개빛을 발하는 한 여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갈색 피부 검은 머리의 그 신비로운 여인은「후안 디에고」에게
"이곳에 성당을 세우라."고 말했다.
아스텍 인디오여성의 모습그대로인 그 여자가 성모 마리아로
발현한 것을「후안 디에고」는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언덕을 달려 내려가 「후한 데 수마라가」 주교에게 성모의 말을 전했다.
그러나 주교는 십 년 전에 자신들이 정복한 미개한 족속이고
게다가 그 족속 가운데에서도 정말 하찮은 자의 눈앞에 나타난
인디오여성이 성모라고는 결코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갈색 피부라니 그러면 성모가 인디오란 말인가?
그 보고를 깨끗하게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몹시 실망한「후안 디에고」는 집으로 돌아가다가 문제의 그 여인을 다시 만났다.
주교의 불신을 전하자 성모는
“ 확실한 증표를 너에게 줄 테니 내일 다시 이 언덕으로 오라.”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온「후안 디에고」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열병에 걸려 곧 죽을 것 같은 삼촌이었다.
다음날 아침 마음씨 착한 그는 고민하던 끝에 언덕위로 올라가
성모를 만나는 대신 삼촌의 종부성사를 청하러 신부를 찾아갔다.
그러나 신비의 여인은 길목에서 「후안 디에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인은 그에게 숙부의 병은 다 나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증표를 가지고 주교에게 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후안 디에고」의 망토를 닮은
인디오들의 전통복장인 틸마에 장미를 가득히 담아주었다.
그곳은 장미넝쿨 하나 없는 바위투성이 언덕이었고 게다가 때는 12월이었다.
후안은 신나서 장미를 가지고 다시 주교에게 달려갔다.
마침내 장미를 담은 틸마를 주교에게 건네자 주교는 깜짝 놀라며 무릎을 꿇고 절했다.
틸마에는 「후안 디에고」앞에 나타난 그 여인,
갈색 피부의 성모 모습이 사진처럼 생생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가 주교와 함께 있는 동안, 그 신비의 여인은 「후안 디에고」의 삼촌 앞에 나타나
병을 깨끗이 치유하고는 자신을 『과달루페의 성모』라 부르도록 명했다.
이 사건에 인디오들은 기이할 정도로 열광했으며,
이후 팔 년 동안 8백만 명 이상의 인디오가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단다.
이 때문에 해마다 성녀 발현일이면 예수의 고행을 따르려는 신도들이
성당 입구부터 강단까지 무릎으로 기어 열정적인 신앙심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계속해서 과달루페 대성당은「후안 디에고」가 최초로 성모를 알현한 산꼭대기에 지어진
초기 교회와 아즈텍 인디오 거처에 지어진 예배당, 4번째로 성모를 알현한 후
「후안 디에고」의 망토에 성모상이 나타난 곳에 지어진 건물, 단체 예배 자들을 위한
그룹전용 교회당, 교황청에서 지은 대중예배당, 대중예배당의 지반이 기울어지자
1973년에 새로 건축한 지금의 대 예배당 등 모두 6개의 건물로 나누어져 있다.
이곳은 멕시코 사람들에게는 정신적 지주인 성소로 1533년 건축된 이래
수세기 동안 전 세계 성직자와 신도들의 순례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 남미의 가톨릭신자들까지도 이 성지를 한번 방문하는 것이
크나큰 소원이라고 할 만큼 지금도 성지로 숭앙 받고 있는 곳이다.
성당광장 앞에 막 도착하니 온갖 장사꾼들,
관광객들로 뒤범벅이 되어 혼란스러운 가운데 얼떨떨한 기분이 된다.
그러나 곧 순례자들 틈에 끼어 진행 중인 이 거대한 대예배당의
입추의 여지없이 운집한 신도들과 더불어 은혜의 기쁨을 나누었다.
우리부부는 그 입추의 여지없이 운집한 신도들 틈바구니를
과감하게 뚫고 성물가게에 들어가 성모마리아상을 기념으로 구입했다.
이 과다루페 대성당은 가톨릭신자가 아니더라도 꼭 가볼 만한 곳으로
과다루페성모는 이 나라에서 종교적 상징을 뛰어넘어서
정치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곳이다.
과달루페 대성당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성모상이 나타난 후안 디에고의 망토」를
표구한 액자 밑을 이동보도를 타고 지나가며 아주 가까운 장소에서 감상하였다.
이 기막힌 순간의 흔적을 영원히 간직하고픈 여행객들의 숨 가쁘게 움직이는
손놀림에서 이루어지는 카메라 플래시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숙제 [멕][시][코] 삼행시
멕시코의 칸쿤뚤룸 내가와보니
시천년전 마야혼은 이구아나요
코스관광 치첸이사 데낄라더라
조한군아 카리브핸 마취색이다
부디부디 네철조국 잊지말거라
부디부디 네건강도 잊지말거라
멕키칠한 조잡품들 알고봤더니
시시각각 넘나드는 중국상품들
코밑수염 멕시칸들 아랑곳않아
멕시코의 총인구는 일억일천만
시민권리 날로날로 나아지지만
코흘리개 민주수준 아득하다네
멕시코는 중남미의 개발도상국
시작점은 미국이요 괜찮은나라
코큰국민 강인하나 부지런부족
멕시코는 아열대의 두반도나라
시집장가 여행지로 급부상하고
코리아를 앞서겠다 전력질주중
멕시칸이 제아무리 아니라해도
시원찮은 목길이로 들통이나고
코높으고 배불퉁이 두말못하지
멕시코와 코리아가 거린멀어도
시시각각 접촉성이 가까워지니
코려제품 칸쿤에서 판칠날오지
멕시코에 대한인식 별로였는데
시방와서 둘러보니 아니지않나
코리안들 이제부턴 인식바꾸자
비엔(뜻=good)
멕시코의 하나 둘
푸른하늘 푸른바다 동색이더니
뱀사자형 멕시코만 두반도인데
다운타운 호텔타운 길은하나라
내달리는 밤새소음 잠을설친다
홀리데이 호수가는 야등잠자리
케노피에 성조기와 멕시코깃발
파인애플 가로수와 한통속인데
어제낮에 씻긴은별 깨끗하도다
몰라(뜻=안녕)
- 學 松 -
남미 8개국 여행(8-3큐바)
멕시코 칸쿤 공항에서 한 시간여의 비행기 딜레이, 그리고 두 시간여의
비행시간으로 새벽 한 시 반이 되어서야 큐바 아바나 공항에 도착하였다.
입국비자 신청서에 전자여권 번호가 아닌 구 여권번호를 기재했던 탓으로
15달러의 생돈 들이기가 멕시코에서 있었기에 입국엔 별문제가 없었다.
흑인 현지가이드(김일성 대학 출신)의 서툰 한국어가 유모러스해 심심치 않았다.
센츄리호텔에서 1박을 하고 아바나 시내의 버스 투어에 나섰다.
큐바는 인구 일천일백만의 사회주의 국가요.
하바나가 수도이며 독재자 카스트로가 정치에서 물러나자
동생이 그 뒤를 이어받아 움직이는 나라다.
돈은 페소를 쓰고 국민 대다수는 카토릭을 믿고 있다.
그리고 스페인어를 쓰기 때문에 수도 하바나의
철자 H자 묵음으로 아바나라고 발음한다.
하바나 신시가지. 혁명광장
자유가 없는 나라라는 선입견 때문일까?
그들이 자랑하는 신시가지의 거리들도 휑하니 생기가 없다.
혁명의 거리 비포장 광장엔 단 세 대의 관광버스가 관광객을 내려놓고 휴식 중이다.
넓은 광장주변엔 정부기관 건물들이 지켜보고 있고 우리가 사진 찍는 사이에
전화 부스처럼 생긴 꼬꼬택시(세발 오토바이 택시)서너 대가 와서 선다.
큐바의 세계적인 특산물이며 수출 주력 상품이 씨가 라고 하던가. . ?
그런데 값이 원체 비싸서 거들 떠 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란다.
구시가지의 형편은 더 말이 아니었다.
도로변의 회색 건물들의 문짝이 덜커덩거리는 것 같았고 벗겨진
건물페인트엔 아예 손을 댈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도로엔 50~60년대의 고물 차들이 조심스럽게 운행되고 있었고
삼륜차도 자주 눈에 띄었다.
헤밍웨이 박물관
키가 큰 잡목들로 가꾸어진 조용한 숲 속에 다소곳이 자리 잡고 있는
‘바다와 소년’의 저자 헤밍웨이 집필실(박물관)을 찾았다.
외부 사진 촬영까지 금지시키고 있었으나 슬금슬금 사진 찍기에 바빴다.
마침 일요일이라서 감시가 느슨한 편이라 했다.
소설의 배경이었다는 창밖의 먼 바다경치가 좋았다.
카피톨리오
카피톨리오(의회?)건물 정면에서 모두들 사진 찍기에 바빴다.
특히 힘찬 포즈의 유명인사(장군?) 조각상이 배경으로 인기였다.
과히 붐비지 않은 광장 앞 도로에는 약간 치장을 한 우마차 형
관광차가 지나가고 낡은 택시들과 아주 오래된 승용차들이 지나다닌다.
천여 평의 광장 좌측에는 광장만큼이나 넓은 공원이 한가하다.
아르므스 광장. 성당
아르무스광장은 쉼터 인듯한데 우리나라 같으면 스텐이나 나무로
만들어졌을 구조물들이 모조리 묵직한 무쇠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만큼 큐바가 자유를 향하여 내 딛는 발걸음도 무거운 것이라 생각되었다.
중앙의 조각상이 궁금했으나 시간에 쫓겨 지나쳐 버렸다.
[아르므스 광장]은 전쟁무기 광장이라 해석하면 된다고 했다.
ARMY가 군대 임을 상기하면 될 것 같다.
아르므스 광장엔 보통 지나간 전쟁 무기류가 전시된단다.
광장의 한 쪽 모서리엔 꽤 오래된 성당이 따가운 햇볕 아래서 졸고 있다.
서둘러서 큰 길 건너 주차장에 대기 중인 버스에 올랐다.
주차장 옆 시냇물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제구실을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큐바에서는 SK도 불통이었다.
큐바에서는 식당에서도 물 값을 주어야 했다.
큐바 국민은 침략자 스페인 보다 미국을 더 미워한다고 했다.
큐바의 럼주(사탕수수가 재료)가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맛보지 못 했다.
국민성은 게으르기 보다는 단순 굴종 형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라던가?
미인의 기준은 깡마름보다 듬직한 몸매라고 하던가. ! ! ?@
중남미 8개국 여행(8-4칠레)
멕시코 공항에서 두 번째 김밥을 먹어치우고 밤새기 비행에 들어갔다.
칠레LAN 항공은 산디아고(단어의 뜻=성야고보)까지 8시간 반,
두 번째 천당을 제공한 셈이다.
이코노믹 석 좌측 뚱보는 줄 창 꿈속에서 헤매고
우측 멕시코인 뚱보는 비데오에 빠져 삼매경이다.
칠레 산디아고 도착 시 까지 꼼짝 않고 밤을 새웠다.
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9 시간 동안이나 버텨냈다.
기록을 세웠다.
요동치는 비행기는 안데스 산맥을 넘고 있다는 신호요,
기내 사방의 콜록콜록과 재채기는 기온이 그만큼 내려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칠레라는 국명의 뜻이 춥다는 뜻이라니 이해가 간다.
비행기 항로 고도는 어디서나 비슷하여 1만미 고도에 8백~일천키로 시속이다.
비행기에서 듣기론 칠레의 지상 온도는 38도라 하였는데 건조한 탓인지
버스의 에어컨 덕택인지 아니면 잘못 들은 온도 였는 지 불편스럽지가 않다.
달리고 있는 도로가 북반구 캐나다에서부터 시작된 4,300여km의 판암 고속도로라던가?
공기도 맑고 산천경개도 아름답다.
도로의 상태도 좋다.
주변엔 수많은 포도밭인 듯한 과원이 자주자주 훌쩍훌쩍 지나간다.
달리는 차에서 내다보니 낮은 언덕자락에 비스듬히 누운 아파트 단지
(사실은 산동네에 있는 가지가지 색깔의 목조건물들)가 이색적이다.
비냐델 마르
비냐델 마르(비냐델 바다와 포도밭)에 도착 했다.
좋던 날씨가 우중충이다.
누워있는 아파트 사이사이에 에스컬레이터(훈인 쿨러)가 같이 누워있다.
시원스럽지 못한 태평양의 풍경이 안타깝다.
칠레가 관광지로서 자랑할 만한 이스터 섬이 태평양에 있다고 했다.
이스터 섬엔 칠대 불가사의 모아이 석상 군이 있다고 했다.
점심은 현지 식 [아사도]라고 했다.
각종 육 고기에 일식 뷔페다.
우선 식사 전에 이스터 섬에서 가져다 놓았다는 불가사의 석상, 모아이석상을 구경했다.
계속되는 치통 때문에 먹거리가 즐겁지를 못했다.
발파라이소
유네스코 지정 유산 발파라이스(천국의 뜻 : 항구도시)로 갔다.
언덕에서 내려다 본 항구는 명성보다 개운치를 못했다,
햇볕이 강렬했다.
산트리스토발 언덕(자연공원)을 에스컬레이터로 올랐다.
안데스 산맥 능선에는 백설이 하얗고 마포초강(눈 녹은 물)은
시내를 유유히 흐르며 시내를 식혀주고 있었다.
언덕을 경계로 한 신 구시가지의 빈부 차가 어떻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750m 정상에서는 프랑스에서 왔다는 성모 마리아가
자비로운 눈으로 더위를 무릅쓰고 올라 온 중생들을 달래고 있었다.
산디아고
싼디아고(성야고보의뜻)는 분지에 조성된 칠레의 수도로서 스모그가 심하다고 한다.
칠레는 지리적으로 북쪽은 안타까마 사막이 있고 남쪽은 남극에 접해 있으며
서쪽은 태평양이 있고 동쪽엔 안데스 높은 산맥이 진을 치고 있다.
칠레의 인구는 1,600만 명으로서 스페인어를 쓰며 대부분 카토릭을 믿고 화폐는 페소이다.
국민소득은 1 만 불이라고 한다.
칠레는 노벨 수상자 2명을 보유한 나라라고 한다.
그 중 1 명이 시인 ‘파블로 메루다’이다.
칠레의 3대 관광지로 안타까마 사막, 북단 천문?, 소금 간헐천을 헤아린다고 했다.
칠레에서 잡힌 홍어는 전량 한국으로 가고 있다고 했고
기타 해산물은 신선도 가 뒤떨어져 주로 내수용으로 소비한다고 했다.
한국의 현대. 기아. 삼성. 대우의 제품들이 들어와 있고
우리 교포도 3천 명 정도가 들어와 있다고 했다.
과일은 포도, 키위, 오렌지, 레몬 등이 많이 나오며 강우량은 연간 700미리로서
포도 재배에 알맞은 량이라고 했고 칠레 뉴 월드 와인은 프랑스에 못하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음식점용으로 약간 질이 떨어지는 벌크와인이 있다고 했다.
칠레에는 노예가 없었다고 했고 국민들이 싫어하는 나라가 미국이고
다음이 캐나다이며 그 다음이 호주 그리고 멕시코라고 했다.
반면에 한국은 좋은 나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칠레의 특징으로 3W와 3F를 든다고도 한다.
즉 3 W는 ① wine. ②weather. ③wonder(모아이 석상)이고
3F는 ①Fish ② Fruit ③Funin쿨러(누운 에스카레이트)이다.
칠레는 16세기 초까지 잉카제국의 영토였으며, 1540년 스페인의 식민지가 된 후
스페인의 통치를 받다가 1810년 9월18일 독립한 나라이다.
칠레와 우리나라와의 시차는 12시간이다.
서둘러야 한다.
다음 목적지 알젠친 부에노스아이레스 행 비행기가 기다리고 있다@.
※아사도 : 소고기, 돼지고기, 양고기 등 각종 육 고기를 숯불에 구워주는데
샐러드와 중/일식이 곁드리는 일조의 뷔페식임
그라시아스
- 學 松 -
중남미 8개국 여행(8-5알젠친)
부에노스아이레스
칠레 LAN 항공 여객기는 안데스 산맥을 다시 넘어 두 시간여의
비행 끝에 부에노스아이레스(뜻=좋은 공기)에 무사히 도착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인구는 300만, 알젠친 전체인구는 23 개주에 3,600만,
그중 한국 교포가 3만이라고 한다.
대부분 투자이민자이며 자기 집을 갖고 있다고 했다.
95%가 백인으로써 스페인어를 쓰며 페소를 쓰고
역시 대부분 카토릭을 믿는다고 한다.
레콜레타 묘지
첫 번째 관광지로 6천기의 레콜레타 묘지를 갔다.
묘지는 듣던 대로 시내에 위치하여 혐오시설 취급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묘지단지의 외관은
출입이 통제되고 있어 마치 교도소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현지 가이드의 말로는 땅값이 주거지역 보다 훨씬 더 비싸다고 했다.
강렬한 햇볕아래서 묘지의 구석구석을 돌며
설명을 듣는다는 것이 썩 좋은 관광은 아니라 생각되었다.
말이 묘지이지 하나같이 석조 아니면 콘크리트 건물(구조물)이었고
지하실이 있는 구조물도 있었다.
밖에서 들여다 본 하나의 묘지에 관이 둘도 있고 셋도 있었다.
가족묘지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다.
묘지의 위치와 단장의 상태로 빈부의 차가 보였고
과거의 유명인사 묘지에는 방문객들이 줄을 이었다.
묘지거리의 질서정연한 골목들은 그늘이 없어 아쉬웠다.
지금은 이 묘지에 장사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열심히 지껄이는 가이드의 달변을 흘려들으며
정문 앞, 몇 백 년이 되었다는 노거수 그늘로 들어 땀을 훔쳤다.
보카지구(탱고의 발상지)
탱고의 발상지 보카지구 꼬까마을(서민층이 사는 마을)엘 갔다.
검은 호수(깨끗하지 못한 방죽)옆에 위치한 마을의 까미니토(짧은 길)와
거리는 2~3층의 건물 앞이나 건물 벽이나 온통 땅고(탱고=남자들끼리 추는 춤)
홍보간판 투성이었고 넓지 않은 길가엔 춤 사진 진열대가 드문드문 서있었다.
광대로 보이는 몇몇 원색 차림의 사람들은 밤을 준비 하느라
들떠 있는 것 같았고 거리를 거니는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드는 사람도 있었다.
밝은 대 낮이라 그런지 거리는 이름값을 제대로 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기다리던 탱고디너 쇼(라파인)를 보며 저녁을 즐기는 시간이 되었다.
겉으로 보기엔 조그마한 식당으로 보였으나 안으로 들어가니
무대가 있는 홀로써 극장식 식탁이 줄지어 있었다.
식전행사로서 희망자는 무대에 올라 춤 자세 사진을 연기자들과 함께
찍을 수가 있었고 일행 중 더러 동참하는 사람도 있었다.
일행 중 동갑나기도, 점잖은 친구도 어울리며 즐거워하였다.
물론 별도 팁이 주어진다.
아사도로 갈비 살이 나오고 등심구이가 나왔으나 치통 때문에
그림의 떡이요 무한정 마실 수 있다는 주류 음료수들도 그림의 떡 국물 이었다.
쇼엔 19인의 무희, 가수가 피아노, 첼로, 아코디온, 바이올린 등으로
흥을 돋우려 애를 썼지만 우리 일행 19인 외에 두서너 명 뿐의 관객들로서는
성이 차지 않을 것이 분명하였고 오히려 미안하기까지 했다.
남녀 번 가르며 보인 춤 솜씨는 가히 춤 귀신같았다.
2 인조 장고 솜씨도 대단했다.
썰렁한 분위기 속에서도 현란하게 움직여야만 하는 그들,
이것이 알젠틴의 그 유명한 탱고의 실상인가 싶었다.
아마도 미국 발 세계 불황 여파의 단면일 것이리라 짐작하며 극장을 나왔다.
대통령궁. 플로리다 거리
알젠친과 그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관광은 이튿날 심장부인 플로리다 거리를
한 시간 여에 걸쳐 둘러 본 후 5월의 광장에 위치한 대통령 궁과 인접 해 있는
국회의사당 건물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씩 찍는 것으로 일단락 짓고 브라질로
넘어왔다가 다음다음 날 다시 월경하여 이과수폭포 관람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추기 :
처음 보는 하까란다 꽃과 달리는 차에서 본 법과대학 정원의 스텐레스 꽃
(움직이는 조형물),그리고 공항 가는 길옆의 골프장 보유의 넓직한 공원들이 부러웠고
세상에서 제일 넓은 강이라는 221km의 라플라타강(뜻: 은의 강으로서
이과수와 바나나강이 합쳐진 강이라 함)을 보고 왔던 것을 잊지 않고 싶다.@.
※ 탱고 디너 :
극장식 식당에서 탱고 쇼 시작 전부터 소고기 스테이크나 연어 스테이크 또는 파스타
중에서 택일하여 주류 음료수와 함께 먹기 시작해서 진행 중인 쇼를 보며 드는 저녁 식사.
- 學 松 -
중남미 8개국 여행(8-6브라질)
알젠친 현지 가이드가 마련한 김밥으로 버스 안에서 저녁을 때우고.
칠레 LAN항공 여객기는 두 시간여의 비행 끝에 브라질 이과주 공항에 도착하였다.
비행기 좌석이 운 좋게도 비즈니스석으로 업그레이드가 되어 편했다.
비행기의 균형 잡기 상 간혹 빈자리 메우기를 한단다.
버스로 갈아탄 우리는 국경 넘기에 들어갔다.
알젠친 한 모퉁이와 브라질의 한 구석지 그리고 파라과이가
인접해 있는 탓으로 같은 생활권이 되고 있는 것 같았다.
현지 가이드 김형섭의 자기생활 소개 설명만으로도 가히 짐작이 가는 부분이다.
살기는 브라질에서, 쇼핑은 알젠친에서, 교회는 파라과이에서의 식이라니 말이다.
브라질은 1억 8천만 인구의 대국이다.
통화는 레알을 쓰고 대부분 카톨릭을 믿으며 수도는
브라질리아 이고 남미 국가 중에 유달리 포르트갈 언어를 쓴다.
우리 교포는 대략 5~8만 정도라고 했다.
교민은 대부분 투자이민 이고 거의 자기 집을 가지고 산다고 하였다.
연간 강우량은 1,000미리 이고 백인이 95%이며
부에노스아이레스엔 187개의 극장이 있다고 한다.
유명 관광지로서 우리가 둘러 볼 관광지로는 이과수(큰물)폭포와 이타이푸 댐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세계 최대의 수력 발전소)그리고 리우데자네이루(세계 3대 미항의
하나)의 여러 해안과 코르코바도 언덕의 예수상 및 삼보드로모(쌈바 로드) 등이다.
국경 넘기에 앞서 올라온 현지 처녀 코큰 가이드가
단체입국 수속을 밟는데 한 시간 이상이 소요 되었다.
지방 버스들은 약식으로 수속을 하는 듯 멈췄다가는 가고 멈췄다가는 가고이다.
삼 개국 중 알젠친이 물가는 제일 싸지만 제일 고자세이고 까다롭다고 했다.
이과수 폭포
이과수는 말 그대로 크고 대단 했다.
카나다의 나이아가라 보다 규모가 더 큰 것 같았다.
이과수와 바나나강이 합류하여 만들어 낸
폭포수가 280여 개?가 1.8km에 걸쳐 있다고 하던가?
폭포 소리와 어울려 들려서 자세하지 못하다.
브라질 쪽에서 알젠친 쪽의 폭포를 본다.
가는 곳 마다 무지개가 떠있다.
다시 이동하여 알젠친 쪽에서 브라질 쪽 폭포를 본다.
악마의 목구멍 앞, 물보라는 사진 찍기를 무척 힘들게 한다.
관광객들을 보자 동양인들, 유럽인들, 검은 유색인들이 골고루 다 보인다.
자기네들끼리 지껄이는 소리가 다 다를 것이나
폭포의 기세에 놀라 지르는 환호성 ‘와’‘와’는 다 같은 것 같다.
궤도차를 타고, 잘 만들어진 나무 가교를 건너고,
또 걸어서 오르락내리락 하여 마꾸꼬 사파리(보트 폭포투어)에 들어갔다.
우의를 뒤집어쓰고 폭포수에 닿았다.
사방에서 괴성이다.
뙤약볕의 끈적거림은 옛날이야기다.
감히 카메라는 끄집어 낼 수도 없었다.
사공은 다 좋아하는 쓰릴을 한 번 더 안겨주었다.
일행 중 누구는 오늘 투어만으로도 여행비를 다 뽑은 것 같다고 했다.
이과수는 단어 스펠이 [Z]가 있고 [SS]가 있다고 했다.
스페인어와 포르트갈어가 다르기 때문이란다.
돌아오는 궤도차에서 일본인 단체관광객과 얕은 영어로 대화를 나누어 보았다.
제일 늙은이가 64세라했다.
내 나이 69세라는 소리에 놀라는 기색이었다.
빌려 준 주름부채에 감사를 표시하며 경제사정이 어려운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을 보면 한국의 부자일 것이라고 단정 지어 말했다.
씁쓸했지만 구지 아니라고 부인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웃으며 헤어졌다.
이타이푸 댐(수력발전소)
해질 무렵 세계최대 수력발전소라는 이타이푸 관광에 나섰다.
땅거미가 들면서 10 여 분간의 홍보 영화가 상영 되었고 댐에 장식되어있는
조명이 켜지기 시작하더니 댐 전체가 한 장의 꽃 스크린으로 바뀌었다.
휘날레로 거대한 댐에 적당한 간격으로 배치되어있는 거대한 수로관로를 둘러보는
승차 관광이 있었으나 칠흑 같은 밤이라 썩 좋은 점수는 줄 수가 없었다.
세계최대의 댐을 밝은 낮에 보지 못하고 깜깜한 밤중에
짐작으로 보는 것이 아쉬웠던 것이다.
이과수의 라파인 디너쇼는 나라 별로 무대를 보고 줄지어 앉아 푸짐한
고기음식들을 90분간에 걸쳐 혼을 빼가는 쇼를 관람하며 즐기는 이벤트였다.
어제 알젠친에서의 탱고디너 쇼와는 차원이 달랐다.
진행자의 재치와 출연진의 다양성에 많은 박수가 쏟아졌다.
하지만 치통에 두통까지 겹친 나는 조심조심
시간이 빨리 가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가이드의 부앙과 믿기지 않은 언동
(백혈병에 시달리고 언제 그렇게 큰 사업을, 관광객을 상대로 실속 챙기는 숨은 행위 등)
들을 뒤로하고 예약된 골프리소트 호텔에서 잠자리에 들어
이튿날 새벽 닭 우는소리에 일어났다.
리오데자네이로
약 두 시간의 국내선 비행기 탑승은 손오공의 구름타기였다.
로링이 심했다는 이야기이다.
리우데자네이로의 하늘은 잔뜩 찌푸려져 있어 곧 비라도 쏟아 질 태세였다.
‘리우데자네이로’라는 이름은 포르트갈이 잘못 지은 이름이라 했다.
브라질은 남미대륙의 48%를 차지하고 있는 세계 다섯 번째 크기의 나라로써
남한의 85배 크기로 자원이 대단한 국가라고 했다.
멀찌감치 보이는 우리나라‘동국제강’의 화물 처리장 간판이 그걸 말해 주고 있었다.
중남미 나라마다 공항마다 삼성전자나 현대, 기아차 광고판이 반가웠었는데
거기에 동국제강 까지 가세해 주니 더더욱 반가웠다.
한국인으로서 긍지를 갖게 하는 또 하나의 이야기로 매스트리 킴이라는
교포 태권도 사범(경찰 태권도 창시자)의 잘 나가는 이야기가 있었다.
눈에 띄는 빈민촌의 버려진 건물들이 보존문화재 대상이 된 이유는 국토가 광대하기
때문에 돈을 드려서 철거하는 것 보다 신시가지를 조성하는 편이 낫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치안상태는 종종 테러가 발생하고 있지만 요사이는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도 현금소지가 많은 것으로 소문이 난 한국단체 관광객이
목표가 된다고 소지품, 특히 어깨에 멘 가방 조심을 당부하기도 했다.
슈가로프산(빵산)
좌측의 호수인지 바다인지엔 14km나 된다는 해상교가 눈길을 끌었고
현지 가이드인 미국 기러기 임마리오가 마약밀매와 테러집단인 마피아의 치외법권,
그리고 그들의 빈민구역 돌보기 의리에 열을 올리면서 안내한 코파카바나의
푸짐한 뷔페 슈라스코 또한 먹을 만했다.
케이블카로 해발 396m인 슈가로프산(일명 빵산)에 올라 세계 3대 미항의 하나인
하트모양의 리우항을 보려 했으나 궂은 날씨로 반쪽 밖에 볼 수가 없었다.
대신 기념품 가게 넘어 경사지의 대나무 산책로를 걸었다.
내 나이 값으로 케이블카 탑승권을 뒤 늦게 찾아내어 등정에 차질을 빚게 하는
실수가 있었으며 일행 중 동갑내기부부가 이탈하여 찾아다니는 소동도 있었다.
꾸무럭한 날씨에 시간 보내기, 즉석 옵션 전원 동의로 유람선을 타고
리우항 바라바라만 선상유람을 하였는데 내일 가기로 예정된 코르코바도 언덕의
그리스도께서 비구름 옷을 입었다가 벗었다가를 계속하고 있어 내일일이 예측불허였다.
연안에는 채유를 하는 건지 휴식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모습으로 떠있는 덩치선박(유조선?)이 그림이었다.
푸짐한 중국음식으로 허기를 채우고 로얄호텔에서
가장 불친절한 접객 행태를 구경하였다.
담이 물러가고 치통이 덮치더니 이젠 두통까지 왔다.
그러나 진통제는 자제해야한다.
어딜 가나 물 값이 맥주 값 보다 비싸다고 수군 수군이다.
코르코바드 언덕의 예수 상
코르코바도 언덕의 그리스도께서 어제의 의심을 떨쳐버릴 아주 좋은 날씨를 선사하였다.
줄지어 기다리다 오른 두량의 산정 행 열차는 빈자리가 없었고
철로 따라 보호 되고 있는 이름 모를 나무들이 생소했다.
특히 [자카]라는 과일은 색깔과 모습이 키위와 비슷하나 크기는 베개만큼씩 하면서
나무의 가지에 보다는 둥치에 매달려 있는 것이 눈에 많이 띄었다.
중간 역에서 기차의 두량 중 앞차에 3인 1조의 악기 든 악사가 오르고
차내 분위기는 그들의 장단에 따라 박수가 충천이다.
물론 종착역에선 악사의 모자가 팁을 부른다.
정상에 닿을 즈음 엘리베이타를 기다리기 보다는
계단을 오르는 것이 한결 느긋하여 속이 편하다.
드디어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예수상의 아래, 전면의 구름이 걷혔다.
아름다운 리오를 찍으라는 예수의 뜻인가! ! !
인터넷에서 보았던 산정상의 그리스도 상,
그림을 합성한 것으로 생각했던 예수상은 진실이었다.
해발 710m의 절벽 꼭대기에 38m높이의 예수상은
발바닥 아래에 기도실인가 미사실인 가를 두고 있었다.
진실한 신자들이 하나씩 들고 나고 하였다.
철망 출입문을 열고 한 사람이 나오면 다른 한 사람이 들어가고 문이 닫힌다.
기도실이 너무 좁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상의 머리와 양손은 프랑스에서 제작 기증하여 조립되었다고 한다.
삼보드로모
쌈바 철이 아닌 이유로 넓은 삼보드로모(쌈바로드)는 휑하니 비어있었다.
뉴스에서 보았던 현란은 기념품 판매소의 의상 구경으로 대신 만족해야 했다.
보석 박물관과 이빠네마 해안 그리고 코파카바나해안과 플라밍고 축구장
그리고 또 중앙 성당을 주마간산으로 스쳐 구경을 하고나니
다음 기착지 [쌍파울로]행 비행기 시간이 멀지 않았다.
상파울로
한 시간 여의 비행으로 남한의 2.5배나 된다는 쌍파울로시에 도착하였다.
[맞츄바라호텔]에서 일박하고 현지 가이드 하종탁의 안내로 시내 구경을 나섰다.
우리교포의 90%가 의류업계에 종사하고 있으며
거의가 중상정도의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일본세가 더 강했으나 지금은 중국 화교들이 득세를 하고 있다고 했다.
거리의 가로등을 일본 오사까 교민회에서 설치했다고 하며
전기요금까지 부담하고 있다고 하여 벌로 지나쳐 버릴 수가 없었다.
상파울로와 산토스간 고속철 설치권을 가져간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은 65세 이상의 자국국민들을 초청 관광시키는 프로젝트도 있다고 하였다.
부러운 일이었다.
5만 불 투자이민이 가능한 나라, 우리현대차 공장 건설계획 유보, 엘지 휴대폰의 인기,
등등의 가이드 화제가 [신발 입을래] [밥 잡아와]등등의 우스개소리로 바뀌고
어느 한인 기념품 가게 들름을 끝으로 상파울로 시내 보기 관광의 막이 내렸다.
느긋하던 시내 관광 시간, 쫓기기 시작 했다.
점심시간이 짧아지고 있었다.
서둘러서 한국 식당엘 갔다.
갈비구이가 일품이었다.
아마도 상파울로 [경미정]의 갈비 맛은 생전 잊히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드문드문 서있는 현대자동차와 삼성 간판을 보며 공항으로 가는 길목,
이디락뿌에 공원에서 잠간 쉬기인데 보수공사중인 조각 설치물이
예사롭지 않아 핸드폰 카메라에 담아보았다.
구지 안내판을 읽고 싶지는 않았다.
소용이 없는 눈 고생을 피하기 위해서다.@
추기 : -김영삼 대통령 후 부터 무비자
-보석(아구아마리.토파지오.에메랄드.두루말리사).
-H.STERN보석 박물관에서 보석 쌤풀 1개 3점을 방문 기념으로 받음.
-핀가=브라질의 전통주
-까시아싸(사탕수수=42도~45도)
-상파울로 인구 1,800만 중 교포 수=4,800명.
-총기사고 1위=베네주웰라. 2위=브라질.
-2시간짜리 버스비= 1불
-빨간 내복을 외출복으로 유행 시킨 이야기.
-경찰 부패의 극치 : 돈으로 모든 사건의 반을 해결 가능.
-주 5일 근무이며 대졸 임금 60만원.
-중퇴의 학력 노동당의 훌라 대통령이
배고픔을 없애겠다는 대표 정책을 내 걸어 당선.
-기대하던 기아차 공장 건설이 무산되었다고 아쉬워하는 가이드.
그라시야스
※ 라파인 디너 :
라파인 쇼를 관람하며 육 고기와 피쉬 등 뷔페로 먹고 마시는 저녁 식사.
※ 슈라스코 :
소, 돼지, 닭고기와 소세지를 부위별로 손님에게 직접 서빙해 주는
브라질 전통 바베큐 요리
- 學 松 -
중남미 8개국 여행(8-7파라과이)
파라과이는 육백만 인구의 조그마한 나라이다.
수도는 아순시온이고 스페인어를 쓰며 화폐단위는 과라니 이고 주 종교는 카토릭이다.
그리고 브라질, 알젠친과 더불어 같은 생활권이지만 제일 가나한 나라라 한다.
브라질과 알젠친은 서로 자기네가 우위라고 우긴단다.
시우다드 델 에스테
당초 중남미 관광 스케줄에는 파라과이 델 에스테를 관광, 쇼핑 하도록 되어있었다.
단 파라과이 입국이 안 될시 인디오 촌으로 대체 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번 21일간의 여행에서 스케줄이 크게 잘못되어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이과수폭포를 지나온 물인지 폭포로 가고 있는 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사실은 가이드로부터 답을 들었었으나 잊어버림)높은 다리를 통과하여
국경선을 넘으니 완만한 경사의 도로로 구성된 조그마한 시가지가 뙤약볕에
노출되어 나타났고 그곳이 바로 [시우다드 델 에스테]였다.
도착 한 시간이 네 시반 이었는데 도로변 상점들은 거의 다 문을 닫아걸고 있었다.
햇볕은 강렬했으며 몇몇 잡상인들은 시답잖은 물건들을 사달라고 야단이다.
여행업체에서 의도했던 바대로 파라과이라는 나라의 땅을 밟아보았다는 증거물이라도
장만 해 보려고 거리를 눈여겨 살펴보았으나 기념품 상점은 보이질 않았다.
필자가 가는 곳마다 사고 있는 기념품(소품)을
유일하게 구하지 못 한 곳이 될 줄은 몰랐다.
이제는 할 수 없이 가이드의 개인 뜻대로 놀아 줄 수밖에 없었다.
즉 철시가 되었으니 쇼핑은 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자신이 다니고 있는 교회(순복음교회)를 구경하라는 것이었다.
쇼핑 장소는 이튿날 자신이 믿을만한 곳을 추천할 것이라 했다.
속이 들여다보이는 소리로 치부 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는 2층의 아담한 새 건물로 깨끗했다.
젊은 목사가 반갑게 맞아 이방 저방 안내하는 것 같았으나 관심 밖의 일이었다.
가이드는 매주 자기가 월경하여 예배에 참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행사를
주도 또는 앞장을 서고 있다고 자랑하였으며 기부를 바라는 눈치였다.
석양을 따라 한적한 교회지역을 벗어나 되돌아오는 길, 국경에서
멀지 않은 시가지 입구, 거대한 입간판이 눈에 설지 않았다.
다시 국경을 통과하고 높은 다리를 건넜으니
파라과이라는 나라 관광을 다 마친 셈이 되었다.
여행사는 앞으로라도 스케줄을 파라과이 관광, 쇼핑으로 하지 말고
아예 인디오촌 방문 관광으로 바꿔 행사를 진행함으로써 관광객들에게
뭔가 서운한 감정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을 까 생각해 보았다.@
중남미 8개국 여행(8-8페루)
페루 리마
브라질 쌍파울로를 출발한 칠레 LAN 항공기는 세 시간 여의 비행 끝에
다시 알젠친 부에노스아이레스 공항에 닿았다.
공항에서 네 시간을 허비하며 도시락으로 저녁을 때운 뒤 또 다시 출국하여
두 시간여를 비행한 끝에 밤 열두 시가 되어서야 페루 리마에 내려 입국 수속을 마쳤다.
리마의 밤거리는 한산했다.
버스로 40여분을 달린 후 호텔(이름 잊음)에 닿았다.
샤워도 포기하고 골아 떨어졌다.
페루는 25개주에 2천 9백만의 인구이나 그 중
1천9백만 명이 45개구로 나누어진 수도 리마에 살고 있단다.
리마는 연중 강우량이 10~15mm로서 거의 비가 없다는 얘기이고 태평양 연안의
기류 관계로 일 년 내내 스모그가 진을 쳐서 해를 보기가 힘들단다.
언어는 스페인어와 케추바이 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고
화폐단위는 누에보솔이나 보통 거래시엔 [솔]이라고 한다.
대부분(93%)의 남미 나라들과 같이 카토릭을 믿고 있으며 11%의 국민은 문맹이란다.
토착신앙과 접합이 되어 건물의 지붕마다엔 십자가와
황소 두 마리가 올라 앉아 주민을 돌보고 있다.
나중에 자주 눈에 띄어 알아낸 이야기이지만 도로 가의 조그만 십자가 개집들은
개집이 아니고 교통사고 사망자의 넋이 머물고 있는 집들이었다.
원주민은 목이 없어 키가 작으나(남자=160,여자=150cm) 가슴이 두껍고
손과 발이 짧으며 힘이 센 것이 특징이고 순박하나 거짓말을 달고 산단다.
유명 관광지 즉 우리일행이 6박7일 동안 보게 될 주요 대상들을 간추려보면
대부분 높은 산악지역인 푸노, 쿠스코, 파라가스, 이까, 나스까에 위치해 있다.
훌리아까
리마를 출발한 LP 국내 항공기는 꾸스꼬 공항을 경유(기내 대기)하는
한 시간 반의 비행 끝에 강렬한 태양아래 노출되어 열기를
확확 내 뿜고 있는 조그마한 시골 훌리아까 공항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반바지 반소매에 팔 토시차림으로 무장한 필자는 가져간 샘플 썬 크림을 짜서
얼굴에 문지르고(생애 세 번째 썬 크림 사용) 공항을 나왔다.
공항 건물은 나지막한 흙벽돌색깔의 단층 건물로 강렬한 태양열에 기가 푹 죽어 있었다.
듣던 대로 고지대의 기압 탓인지 숨쉬기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시유스따니(잉카시대의 돌무덤 군)
대기 중인 버스는 주변 환경과는 대조적으로 훌륭했다.
한산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어수선한 훌리아까 시내를 이리 저리 흔들거리다가
장정 서너 사람이 시간 보내기로 철도 보수공사를 하고 있는 외곽지역을 빠져나와
다 죽어있는 누른 벌판(나무도 없고 푸른 풀포기 하나도 없는)을 달리기 시작했다.
낡은 포장도로는 갓도 끝도 없이 곧게 뻗어 있었다.
얼마를 갔을까 알카파 한두 마리가 보이더니 도로가에 서너 채의 마을이 나타났다.
달리는 차에서 기를 쓰고 자세히 내다보니 생 흙벽돌로 지은 집들이다.
필자가 1960년대 초, 군대생활 할 당시 많이 접했던 그 흙벽돌 기술을
이곳 페루에선 민간인들이 활용하고 있지 않은가!
또 다시 얼마를 달렸을까, 야트막한 산모퉁이를 도는가 싶더니
약간오르막 경사지에 잡상인 가게가 보인다.
우리가 찾아 온 시유스따니(잉카시대의 돌무덤 군) 라 한다.
차를 내려 언덕을 올라가는 길, 이런 낭패는 생전 처음이다.
힘이 하나도 없다.
숨이 찬다. 금 새 어주리가 되어버렸다.
건강엔 자신이 있었는데.......!,
그리고 고산 병 쯤이야 하였는데. . . . . !
가이드의 사전 주의당부가 허언이 아니었음을 실감했다.
한발 한발 조심스레 언덕에 올라 돌무덤 구경을 하였다.
다른 버스 한 대의 관광객들이 먼저 올라 사진 찍기에 열심 들이다.
또 한 무더기 관광객들이 현지 가이드의 설명에 열중하고 있다.
하늘이 어느새 잔뜩 찌프려져 있었다.
가이드가 묘지의 주인공에 대해서 그리고 구조(시신을 돌로 덮어쌓고
그 위를 거석으로 쌓아 올리되 상부를 하부보다 넓게 하여 천기를 받는다나 뭐라나)
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는데 찬바람이 엄습 해왔다.
사진 찍기도 힘들만큼 바람이 거세졌다.
혼자서라도 60~70여m 상거의 더 높은 언덕에
올라 보아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한 발 한 발 내딛었다.
또 다른 돌, 바위의 구조물이, 그리고 널따란 호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기가 막힌 경치에 빠져들어 가고 있는 참인데 바람결에 들리는 안타까운 소리. . . . .?
필자를 찾아 부르는 소리였다.
아쉬움을 안고 조심조심 내려 걸었다.
내려 걷는 발걸음은 한결 나았다.
반바지차림을 혼내주려는 듯 바람이 어느새 거세졌다.
오한이 엄습 해 왔다.
해발4,000여 미터의 본때를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쫓기 듯 차에 올랐다.
저 멀리 산봉우리에 보이던 험상궂은 구름덩어리가 비바람이 되어
몰아치는가 싶더니 버스 뒤 창유리에 뚝 뚝 뚝 겁만 주고 물러났다.
시유스따니가 위치한 자리는 좌청룡 우백호의 명당이라느니 따까우(까만 소)가
최고라느니 이곳의 주식은 옥수수와 감자라느니 알카파 상품이 어쩌느니 저쩌느니
하는 동안 해발 3,800m에 있다는 산장 호텔(TAYPICALA)에 도착했다.
호텔에서 내려다보이는 호수가 그 유명한 티티까까 호수라 했다.
입맛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으나 체력유지를 생각해서
억지로 드는 저녁 식사에 치통까지 곁드려 쩔쩔 매고 있는데
육덕의 경상도 동갑내기가 다가와 위로인지 농인지 알 수 없는 제스쳐를 한다.
자기는 잘 먹은 것 같았다.
속마음이 즐겁지가 않았다.
TV도 없는 호텔 방은 썰렁했다.
잠을 청해 보았으나 두통이 멈추질 않았다.
새벽 두 시까지 오한과 두통을 안고 버티다가
어쩔 수 없이 가이드에게서 받아 간직한 고산병 약을 먹었다.
그러나 큰 약효는 느낄 수가 없었다.
실로 맛보기 힘든 하룻밤이었다.
푸노
전날 석양 어슴프레에 관통하여 스쳐 지나 왔던 푸노 시가지는 밝은 햇볕 아래서 보니
대체로 넉넉하지 못하여 치장을 모르고 시골 냄새를 그대로 풍기는 도시였다.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은 골목마다엔 짓다 만 흙벽돌 건물이 옥상에 철근을 꽂은 채로
엉성하게 방치되어 있었고 좁은 도로 폭은 시내버스의 교행까지 지장을 주고 있었다.
형형색색의 페인팅 간판은 눈을 닦고 보아도 없었다.
불은 색 기와지붕도 더러 눈에 띄었으나 정이 가지 않았다.
한 말로 푸르름이 없는 도시의 삭막함을 그대로
대변해 주고 있는 도시가 민둥산 발찌의 [푸노]시 인 듯싶었다.
티티카카호수 와 우로스 섬
세계에서 해발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고 알려진(증기선이 운행되는)
안데스 산맥의 수심 274m의 [티티카카호수](일바적인 최고 높은 곳의 호수는
티벹에 있다고 처음 들음)물 위에 떠있는 섬 우로스 섬엘 갔다.
남자들의 하는 일은 섬의 몸체인 또또라 갈대(필자 보기엔 인초)채취이고
여자들의 하는 일은 살림하고 관광객 상대 돈 벌이
(기념품 제작 판매하는 것과, 유람 보트 운행 등)인 것 같았다.
초막 안에서 잠을 자고 밖에서 음식을 만든다는데 주방이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그런 중에도 가꾸고 있는 아주 어설픈 꽃나무 몇 그루가
너나없이 뚱뚱한 그들의 모습과 대조되었다.
아이들은 육지의 학교에 갔다고 없었으나 5~6세쯤의 한 여아는 건네주는
사탕도 먹을 줄을 모르는 듯 한사코 배를 젓고 있는 어미에게 주려고만 하였다.
5~6세대가 섬 하나 씩 만들어 살며 여자가 족장이라 했고 만약에 그들 중 한사람이
배신행위를 하면 그가 사는 초막의 연결선을 잘라 떨어져 나가게 하면 그만이라 했다.
그들의 생존 수단은 송어, 수치(수염고기) 및 까라치라는 생선 잡이와
물오리(정부보호) 알 채취 및 관광수입이라 했고 정부에서는 그들 여러 섬의
고른 혜택을 위하여 호수 입구에서 관광선 운행을 통제하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외침에 쫓겨 들어온 떠돌이들로서 국적이 없다고 했고
가이드는 그들의 선물(과자 또는 과일)챙기기를 잊지 않았다.
가이드는 그들을 가르쳐 놓은 성과품인양 우리나라 여러 가요를 부르게 했고
관광 유람선 또또라 배를 타는데 1 인당 2 불이라며 타주기를 은근히 권했다.
그리고는 섬을 벗어 나온 뒤에야 잊었었다며
돈을 걷는 것이 그의 진실성을 의심케 하였었다.
티티카카호수의 크기는 폭이60~165km나 되며 건너편은 볼리비아 영토라 했다.
10 여 시간의 자동차 여행, 도로 좌측 멀찌감치 엔 일주일에
단 세 번 밖에 다니지 않는다는 기차 철길이 끊어짐 없이 따르고 있다.
철길 넘어 간혹 나타나는 산 그림자 속의 마을들에는
새마을 사업이 벌어진 듯 새 양철로 지붕 개량이 한창이다.
아마도 비가 적고 산소가 적은 고지대여서 함석지붕이 맞는가 보다.
흙벽돌집에 새 양철지붕은 유난히도 번뜩인다.
유황온천
도중에 들른 노천 유황온천, 폭 약 60cm 정도 크기의
시멘트개거 물길을 따라 일행들 끼리 나란히 앉아 발을 담궈 보았다.
말 그대로 ‘앗 뜨거워’였다.
가이드는 15초 동안이나 발을 담그고 참아내는
관광객을 본적이 있었다고 믿기지 않은 말을 했다.
필자는 단 3초를 견뎌내지 못했다.
대 여섯 차례의 발 담그기를 마치고 햇볕에 내 놓은 발의 물기가 금 새 살아져 버렸다.
그것만으로도 고생 고생하던 발이 한결 가벼워졌다.
오후 세 시가 넘어서야 노변에 있는 어느 식당에 닿았다.
가이드의 말로는 식당경영이 잘 되어 최근 2~3년 사이에
확장을 했고 다른 먹을 만한 곳은 없다고 하였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몇 가지 안 되는 뷔페식이었지만 먹을 만 하다고 들 했다.
그러나 치통의 통증과 고산 증의 두통으로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밖으로 나왔다.
산골 시골치고는 제법 단장이 잘되어 있었고 특히 화장실 단장을 깨끗이 잘 해 놓았다.
울안 양지 한쪽에서는 잡상인 한 사람이 시답잖은 물건들을
하나라도 팔아보려고 갖은 아양을 다 떨고 있고 마당 다른 한 구석에는
하얀 털의 알카파가 목줄을 매단 채 서성이고 있었다.
락치의 잉카 유적지
오늘 밤의 잠자리 호텔이 있는 우르밤바를 향하여
다시 달리기 시작한 차는 잉카 유적지인 락치의 한적한 마을에 도착했다.
돌담 벽과 뼈대만 남아 있는 꼬야족의 유적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모세설화와 비슷한 통치자 삐라꼬차 신의 이적 설화
(주거지로 타 들어오는 불을 지팡이로 쳐서 끄는 이적으로 통치자가 됐다던가?)와
그 증거(불탄 것처럼 검게 보이는 바위 언덕)를 보고 듣는 것을 끝으로
조금 붐비는 기념품 상점들과 주차장을 돌아서 빠져나왔다.
햇볕이 따갑다고 느끼며 버스는 질주를 계속하고
폭이 좁은 하늘은 산 그림자를 길게길게 늘어뜨렸다.
삐니빰빠 와 오로페사 그리고 로미꼴까
스케줄대로 기와 굽는 마을 ‘삐니빰빠’를 가야 했으나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도로에 차를 세우고 200여 미터 어간의 기와 공장을 내려다보며 손가락질 하는 것으로
대신하였는데 생산된 기와는 단 한 모양으로 우리로 말하면 용마루 기와였다.
생산된 기와는 페루 푸노와 꾸스꼬 전 지역을 카버하고 있다고 하였다.
빵굽는 마을 ‘오로페사’역시 달리는 차에서 우측 마을이 ‘오로페사’인데
그 명성이 예전 같지 못하다는 등의 설명으로 관광을 마쳤다.
하나 남은 볼거리‘로미꼴까’(잉카의 전초기지)는 달리는 도로에서 약 40~50 미터 인데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여 어둡고 지쳤다는 이유로 지나치자는 어느 일행의 의견에
만장일치로 동의하고 어둠 속을 향하여 샷터만 찰칵찰칵 누르고 말았다.
그러나 가이드의 시간 사용계획이 잘 된 것으로 보기엔
너무 거리가 멀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보태졌다.
산아구스틴 우르밤바 호텔의 잠자리는 비록 3천 미터가 넘어
두통이 있기는 하였으나 어제 밤과 같은 고산병 고통은 아니었다.
마츄피츄와 와 와이나피츄
맑은 아침, 호텔 정원의 새소리에 눈을 떴다.
세 끼 식사 시간의 불균형을 염두에 두어 출발 직전의 시각에 뷔페식을 들었다.
바뀐 차(꾸스꼬 시내의 큰 차량 출입 제한이유의 중형교체)는 한 참을 오르락내리락
달리다가 좁은 골목길을 이리저리 꼬더니 울란타이탐보 기차역에 도착 했다.
가이드가 어제 미리 샀다는 왕복 99,400원(달러당 1,400원 환산)짜리 표로
마츄피츄 행 열차의 창가에 앉아 한 시간 반 동안의 계곡 감상에 들어갔다.
잃어버린 도시 “마츄피츄”는 산 정상에 있을 것이기에 기차가
올라 갈 것으로만 생각하였는데 철저하게 반대로 내려가기만을 계속 했다.
한 시간 반 동안을 좌측계곡의 절경(황토 물의 소용돌이와 절벽, 어쩌다가 스치는
옥수수 밭, 자주감자 꽃, 물 건너 초막과 빙하가 흘러간 자리들)에 빠져 있노라니
앞자리의 눈치 꾼 부산 아줌마가 핸드폰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창에 머리를 기대란다.
열차가 후미를 구부리자 잽싸게 스냅, 한차례, 또 다시 한 차례다.
그럴듯한 기념사진이 되었다.
열린 창문으로 기관차의 디젤연기가 확 풍긴다.
이 좋은 계곡의 관광열차를 디젤 기관차로 끌게 하여
오염을 시키고 있는 페루 정부의 한심한 정치 수준을 짐작케 했다.
오르내리는 손님도 없이 두 차례의 중간 역 정차 가 있더니 이내 종착역에 닿았다.
결국 줄 창 내리막의 철길이 끝나고 대기 중인 버스로 갈아 탔다.
이제부터 오르는 길이다.
인터넷에서 보았던 급경사 꼬불꼬불 길을, 180도 커브 열세 구비를 포함하여
수도 없는 굽이돌이를 끝낸 지점이 마츄피츄 주차장이었다.
중간 포토지점 세 군데에 잠간 잠간씩 정차하여 주는
운전기사의 배려로 지나온 계곡 내려다보는 재미는 덤이었다.
나누어 주는 유료 입장권으로 잃어버린 공중도시 마츄피츄
(뜻:늙은 사람)엘 조심조심 올랐다.
두 번째로 왔다는 동갑나기 효계는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하여
미인부인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뒤 따라 올랐다.
인터넷에서, 또 다른 사진에서 하도 많이 보아온 경관이라 특별한 감정은 생기지 않았다.
적어도 600여 년 전에 이곳까지 쫓겨 와서 바윗돌을 깨고
다듬어서 성을 쌓고 집을 짓고. 벼랑 경작지를 만들고. . . . .. . .?
얼마나 많은 목숨의 희생이 뒤따랐을까? 를 생각해보았다.
신전을 보고 유치장을 보고 맷돌을 보고 아주 작은 식수의 흐름을 보았다.
발아래의 아찔함을 맛보고 키가 큰 하얀 양과 누른 양의 한가로운 풀 뜯음을
보았는가 하면 그 것을 매개로‘원달러’돈벌이에 정신이 없는 키 작은 원주민도 보았다.
좁은 낭떠러지 커브 길들엔 여러 행색의 종족들이 사진을 찍느라
정신없이 북적이는데 북쪽 먼 산봉우리엔 하얀 구름이 장막을 친다.
인터넷에서 본 꼬불꼬불 길을 볼 수가 없다.
알고 보니 그 길을 찍을 수 있는 곳은
건너편에 솟아있는‘와이나피츄(뜻:젊은 사람)’란다.
착각은 자유라지만 그 봉우리가‘마츄피츄’인줄로 알았었다.
당장 혼자라도 오르고 싶었다.
입구엘 가보니 가이드 말 대로 따로 통제가 되고 있었다.
오르는데 만 두 시간이 걸리는 위험한 길이라며 일행 모두가 말린다.
단체행동에 지장을 가져오게 해서는 안 된다는 그들의 의견에 반 할 수가 없었다.
걸어서 사흘이 걸린다는 고갯길을 그리고‘와이나피츄’를 다시 훑어보고
아쉬움을 간직한 채 북적대는 되 돌이길 줄서기에 동참했다.
해발 3,800m에서 기차로2,000여m로 내려갔다가 2,400여m의 마츄피츄엘
버스로 올라갔었고 다시 3,800여m의‘울란타이탐보’기차역으로 올라온 셈이다.
기차에서, 버스에서 뿜어대는 디젤 냄새가 머리 띵한 증상을 계속 연장시키는 것 같았다.
꾸스꼬(잉카의 수도)
오늘의 잠자리‘꾸스꼬(잉카의 수도)’시로 향한다.
지루한 버스 달리기가 계속된다.
높고 먼 산자락엔 만년설이 그림이다.
이름도 모를 도시가 관통되고 우측 편에 나란히 한 철도가 심심찮다.
그렇게 드물게 다닌다는 열차가 기나긴 화물칸을 이끌고 있다.
광궤와 협궤가 공존(3선 철로)하는 구간이 보인다.
우리나라 철도와 시베리아 철도를 연결하는 방법에
여기와 같은 3선 철도방법이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길가 간지 대에 빨간 천을 달아 건 집이 술집이고
청색 천을 단 집은 시중드는 여자가 있는 집이이란다.
페루의 막걸리는 수수를 재료로 해서 만든‘치차’란다.
치통과 두통만 아니었으면 기어이 구해서
맛을 보았을 것이나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참았다.
황토백이 고원지대에도 옥수수 밭이 심심찮다.
이제 심은 곳이 있는가 하면 키가 크고 수확 중에 있는 곳도 있다.
백두산의 높이(2,744m)보다 훨씬 높은 고지대인데도 농작물이 많이 심어져 있다.
적도가 멀지 않은 때문이겠지 하고 짐작을 하면서
잠깐 잠깐 졸았는데 석양이 가고 어두움이 드리우고 있다.
꾸스꼬 입구의 고개 길, 버스 안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 붉은 색 건물들이 평화롭다.
하나 씩 하나씩 야간 쇼를 준비하고 있다.
중심 시내로 가는 길이 큰 차 진입을 막고 있는 꾸스꼬 당국의 처사를 설명하고 있다.
이해가 간다.
상당히 큰 시가지인데도 길 넓이 가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택시들이 모조리 우리나라 티코다.
엊그제 리마에서 들은 얘기 그대로다.
간이극장식 뷔페에 뒤늦게 참석한 출연자 세 사람의 공연에
억지 박수 서너 차례 보내다가 일어서서 나왔다.
썰렁한 분위기가 꼭 우리 탓인 듯 미안 했다.
광장의 조명들도 차게만 느껴졌다.
아니 정말로 낮에 와는 판이하게 밤바람이 차가웠다.
아담한 [마베이 호텔]의 하룻밤, 떨어질 줄 모르던 고산병 두통이 많이 완화 되었다.
모처럼 한국에 안부를 알아보았다.
자동 로밍 되어있는 핸드폰으로 통화가 된 것이다.
SK 이동통신의 능력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친구의 핸드폰은 한국 통화가 되지를 않았다.
한국에서 로밍 조치를 하여서 왔는데도 말이다.
삭사이와망(잉카의 요새)
잉카의 요새 유적지 삭사이와망엘 갔다.
성과 진지의 거석 맞춤이 그렇게 정교 할 수가 없었다.
남아있는 높이 8m, 길이 350m의 성은 적 침략 방어 전략의 일환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멀찌감치 에서 한눈으로 보니 22 개의 톱니바퀴형으로 축조되어 있었다.
원거리에서 통나무를 깔고 거석을 옮겨 왔을 것이라는 가정과 드문드문 서려있는
거석 설화, 그리고 숨은 그림 찾기의 그럴듯함에 그러려니 하며 5~6백여 미터
상거의 하얀 그리스도 상과 퓨마 형상이라는 꾸스꼬 시내의 한 귀퉁이를 내려다보다가
졸졸 따라다니며 보채는 잡상인으로부터 잉카인의 오석 석상 한 쌍을 사서 챙겼다.
켄코 와 파까파까라
켄코(풍흉년을 점치고 사람의 수술대를 갖춘 바위 굴 미로)
바위 사이 길을 고개 숙여 통과해 보고 푸른 나무숲이 있는 동산을 넘어
파까파까라(붉은 초소)고개의 툭 티인 요충지에 올라보았다.
귀족 하인들의 숙소였다느니 경비초소였다느니 등등의 짐작과
설(設)들이 있다지만 지형 상으로 보아 경비초소가 맞는 것 같았다.
탐보마차이
점점 강렬해지는 햇볕을 받으며 귀족들의 목욕탕이었다는
탐보마차이(탐보=목욕, 마차이=휴식)의 거석 시설물들과
끊임없이 좔좔거리고 있는 물줄기 앞에서 사진을 찍고 시내로 돌아 왔다.
꼬리깐차
잉카의 9대왕인 빠짜꾸 대왕의 황금 설화로 인하여
꼬리깐차(꼬리=황금. 깐차=가두다)로 불리는 산토도밍고 성당에 들어가
황금이 붙었었다는 유적 들을 둘러보고 또 정밀도를 자랑하며
벽속에 갇혀 있는 십이 각석을 확인하는 것으로 꾸스꼬 관광을 모두 마쳤다.
중식은 꾸스코에서 현지식으로 들었는데 당초 계획된‘쎄비체’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설명도 없었고 물어보지도 않았었기 때문이다.
식사 후, 넉넉한 비행기 시간을 이유로 잘 가꾸어진 광장(아르므스광장?, 마요르광장?)
의 꽃밭 그늘에서 사진 찍기에 열심 하였던 것은 보너스였다.
비행기 표를 구하지 못한 현지 가이드를 남겨둔 채
꾸스꼬를 출발한 LP 항공기가 1 시간 반여 만에 리마에 도착했다.
자리는 남아 있으나 철저한 예약제 때문에 표를 줄 수가 없다고
항공사에서 대답 하더라는 소리는 두고두고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지난 번 호텔에 마꼈던 짐을 챙겨 다른 호텔로 옮겼다.
이유는 이튿날 시 외곽으로 빠져 나가기 쉽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 또한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짐까지 맡겨 놓았었는데 그 짐을 찾아 다른 호텔로 가는 것이 어떻게 이해가 되겠는가!!
가이드의 말로는 그 호텔에서도 빈방은 없을 것이며 이해를 할 것이라고 했다.
새로 나온 현지 여자 가이드(김혜숙)는 곱상은 아니지만 설명에 능수능란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에서 간호사를 했었다고 했다.
많은 질문에 척척 이었고 궁금증을 먼저 알고 풀어주는 여자였다.
꾸스코에서 떨어져버린 토목전공 출신 박재민 가이드 보다
더 열심이었고 아는 것도 더 많은 것 같았다.
리마에 교포 수는 700여명이고 남미에는 3 개의 부 왕청(페루.콜롬비아.아르젠티나) 이
있으며 한국에 오징어포와 장어가 수출되고 있고 1963년도에 수교가 시작되었으며
오랜 세월에 걸쳐 섞여버린 피로 침략자 스페인에 대한 적개심은 거의 없다고 하였고
1821년 산마르틴에 의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이 되었으며 부정이 탄로가 나서 자기
고국 일본에 망명 했다가 다시 칠레로 가있는 중에 범인으로 인도 되어 와서 재판을
받고 있는 후지모리2세의 후임(35대) 대통령으로‘알랑가르시아’가 당선되어 통치 중에
있으나 그 또한 부정부패원인으로 망명하였다가 돌아와서 당선 된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후지모리2세의 딸‘게이꼬’가 득세 중에 있어 눈치 보느라
후지모리2세의 재판을 고의로 지연 시키고 있는 것 같다고 하였으며 실제로
길가에서‘후지모리 게이꼬’의 대형 간판 홍보물을 심심찮게 볼 수가 있었다.
여담으로 [몇 달 전, 리마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우리 이명박 대통령이 4 분이나
늦게 나타나 국제적인 망신을 산 일]이 있었는데 아마도 한국 내 언론들은 보도하지
못 했을 것이라는 사족까지 달았고 또 시내 어느 고갯길에서는 어슴프레한 어둠 속에
이명박 대통령의 사진이 들어간 삼성전자의 대형 홍보판이 공중에 매달려 있었는데
그것을 가리키며 일국의 대통령사진을 저렇게 대기업 홍보판에 이용하는 행태는 우리뿐
일 것이라 하고 저와 같은 대형 홍보 판이 리마 시내 요지 세 군데에 걸려있다고 하였다.
우중충한 리마를 벗어나 달리는 고속도로는 얼마가지 않아
온통 회색 언덕을 끼고 달리기 시작 했다.
좌측이 더 높고 우측이 낮으며 좌우측 공히 풀 한포기도 구경 할 수가 없었다.
간혹 태평양이 우측에서 선을 보이기도 했지만
분명한 것은 전 국토의 15%가 된다는 사막지역인 것이다.
순모래 사막도 있지만 거의가 자갈사막이라 했으며 실제 간혹 보이는 단애엔
자갈과 모래가 반쯤 섞여 굳어진 상태로 선을 보이고 있었다.
옛날 그들의 선조들이 죽었을 때 시신을 앉은 채로 굳혔던 장사 사진을 돌려가며 구경
하였는데 혼자 일 때와 처를 동반 할 때와 첩까지 동반 할 때를 다 볼 수가 있었다.
비가 없는 고지대의 건조지대라 부패가 일어나지 않으므로
시신이 말라 미이라 형태로 있을 수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갔다.
그러나 영아의 시신은 수장을 했다고 했다.
어느 넓은 사막 평원엔 철조망이 처져 있고 또 어느 곳엔 가건물이
듬성듬성 하였는데 그 이유는 원유가 발견되어 채유시설이 들어 설 것이기에
보상 내지는 장기 점유로 인한 소유권 취득을 목표로 하는 것들이라 하였다.
페루는 10 년인가 15 년인가만 버티면 자기 소유가
법적으로 보장이 된다(?)고 하여 이해가 되었다.
페루는 지진 다발 국이기에 도처에 짓다만 집들이 널려 있는데
그 이유는 국민성이 어서어서 가 아니어서 생애 동안 인내심을 갖고
여유가 생긴 만큼씩만 집에 투자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짓다만 집의 철근이 20년이 되어도 녹이 슬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해도 문제가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지진을 고려하여 시내의 건축은
이웃과 합벽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고 하였다.
고등학교까지 무상 교육이 실시되고 있으나 사막 또는 고산 지역엔 무적자가
많다고 하였고 국립학교 나오는 것이 신분상승의 필수 요건이 된다고도 하였다.
웃으개 소리로 가이드는 자신의 운전면허 구술시험 통과 이야기
(오답을 정답으로 우기는 질문경관에게 이미 한 답변을 정정하여 찬성하고 통과)와
페루의 10계명(하지말라 3개+하라 3개+카도릭 계명과 기타 4개) 이야기도 하였고
남녀 비가 1:2의 불균형으로 미혼모가 많아 그 대책이 문제점이라는
이야기도 하였으며 페루의 세 가지 볼거리(마츄피츄.나스까라인.꾸이?)이야기와
유명한 골프장 세 곳에서 한국인을 받지 않은 불명예 이야기도 하였다.
그 외 한국 여자들이 새벽에 집단으로 마스크를 착용하고 거리에 나와
테러단으로 오인 한 주민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하는 웃지 못 할 일까지 일어나
낭패를 본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 집을 짓는데 271단계의 조건이 따르고
준공검사 받는데 362일이 걸린다는 이야기, 한글이 배우기가 일본어보다 어렵다고 도에 바꿔버리더라는 이야기, 스페인어의 자음 LL 과 RR의 한국발음이 잘 안 된다는 이야기
등등으로 시간을 소화해 나갔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어졌던 또 다른 많은 이야기들을 열거 해 보면
‘판암 고속도로’가 통과하는 나라들(카나다.미국.멕시코.과테말라.온두라스.
코스타리카.파나마.페루.칠레.에콰돌), ‘안타까마 사막’(전체 7천 중 페루 면적이
3천 평방키로), 돼지고기가 소고기보다 비싸다, 닭고기 1kg의 값이 4불,
감자의 품종이 300여 종,옥수수 품종은 160여종,
페루의 GNP는 3천불로 세계 51위이고, 국민의 43%가 메티쉬(혼혈)이며,
중국인이 60~70만 명이고, 일본인이 20~30만이며,
(※ 전 가이드는 인디오 45%, 매스티 37%. 백인15%. 기타로 분류
그리고 GNP도 2,800불로 설명)고산지역과 밀림지역에선 후지모리를 선호,
코리안 체(있는 체, 잘난 체)로 치안상태가 안 좋은 페루에서 테러 대상이 되고 있다,
식수 난, 중남미의 공원문화
(어느 도시나 시내 중심지에 스페인의 구애 공원과 비슷한 사랑의 4 각형 대중공원)
주요 추천 선물은 원단 과 차이며, 페루 산 대형 오징어다리가 한국에서 문어다리로
둔갑 되고 있더라는 이야기, 리마에 교포가 800명, 결혼 풍속도
(남자가 여자 집에 들어가 미리 살아보고 장인의 결혼 불허가 시 퇴출),
안데스의 4,500M 이상에 쌓여 있는 눈이 만년설, 잉카 시대의 꾸꾸다
(타이어 소리 신발과 털 실 소리 신발)와 길의 군사 모적 관련 설,
꾸스꼬 주 인구1백만(전가이드 250만).
시 인구 30만. 푸노시 2만 5천(전가이드 250만).이까시 인구 2만5천,
은행은 예금 이자를 주지 않고 오히려 용지 값이라고 보관료를 받는다,
국립병원인 60~70개의 크리닉 의사들은 개인병원 파트타임 근무로
이중 벌이를 하는 것이 적법이다, 등등 이었다.
빠라까스 의 바에스타 섬(물개섬)
드디어 이까 강의 다리가 보이더니 목적지 이까주라 한다.
새로 넓힌 것처럼 보이는 500 여 미터의 도로 한편은 식당가였고
다른 한편엔 기념품 가게가 진을 치고 있었다.
18명 우리 일행은 쾌속 보트에 올라 시키는 대로 붉은색
안전조끼를 착용하고 물보라 튀김 속의 해상 질주를 즐기기 시작했다.
달리던 중간에 잠깐잠깐 보트가 서서 섬 경치를 보라한다.
다시 질주는 계속되고 뱃머리가 파도 덩어리에 방아를 찧는다.
이러다가 보트가 깨어져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생기기도 한다.
시속이 얼마인지 알 필요는 없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
아찔아찔한 곡예가 편도 40여 분간 지속 되었다.
멀리 점으로 보이던 바에스타 물개섬이 점점 커지고
기러기가, 펭귄이, 물개가 눈에 들어온다.
돌섬에 부디쳐 부서지는 파도가 깨끗해서 좋다.
보트를 흔들어 사진 찍기를 방해 하는 파랑이 있고 부리가 큰 고니 한 쌍이 비상을 한다.
외로운 세 섬 중 가장 멀리 있는 섬은 아예 갈매기 떼와 펭귄 떼로 시커멓다.
뙤약볕을 피하여 그늘 굴 앞에 모여 있는 물개 떼가 섬을 일주하며
다가서는 보트를 경계하여 내는 소리가 우렁차진다.
물개의 성비가 1 : 40이라는 가이드의 안내가 해구신을 떠 올린다.
이 섬 위엔 관리 초소가 버티고 있다.
한 쪽 섬 귀퉁이엔 줄사다리를 매단 선착 시설이 연륜을 말해주고 있다.
바다 빛깔은 한 없이 푸르다.
따가운 햇볕도 푸른 쪽빛에 젖어버린다.
아쉽지만 올라 갈 수없는 섬을 뒤로하고
다시 물보라를 가르기 40 분, 선착장에 되돌아 왔다.
더위에 지쳐 졸고 있는 보트들이 많다,
많지 않은 단체 손님들을 기다리는데 지칠 대로 지쳐 있는 것 같다.
식탁에 앉아 핸드폰에 찍힌 사진들을 검색해본다.
달리는 보트에서 옆 일행 누군가가 찍어준 얼굴 모습이, 복장이 가관이다.
때 지난 점심과 물맛이 그만이었다.
이까 와까치나 사막 과 오아시스
뙤약볕 아래 다시 달리기 두 시간 여에 닿은 곳이‘와까치나 사막’이었다.
사고도 감수하겠다는 뜻인 것 같은 문서 폼에(종이) 싸인을 하고
철주 뼈대로 외장을 한 이상야릇하게 생긴 6인승 샌드카에 올라 안전띠를 맸다.
보안경이 시야가 좁아 갑갑했으나 도리 없이 착용하였다.
코크고 키 큰 백인 운전사에게 목숨을 맡겼다.
지금까지 보아오던 자갈사막이 아니었다,
구릉으로 파고든 샌드카가 하늘로 치닫는다.
어느새 좌로 틀더니 위험천만인 옆구리 회전을 계속한다.
다시 깊은 골짜기, 또 다시 충천, 여섯 승객의 환호가 샌드카 소음도 삼켜버린다.
보안경을 벗어버렸다.
본시의 돋보기안경이 쓰릴을 제대로 만끽 할 수 있게 해 주어 좋았다.
모래 언덕 정상에 샌드카가 멎었다.
내리란다.
샌드보드 스키타기이다.
호주에서 와는 자 못 다르다.
널빤지 하나에 붙어 있는 두 손잡이 끈을 움켜쥐고 머리를 아래로 하여 배를 깔았다.
아찔한 급경사를 양발로 브레이크 걸며 내려닫기이다.
엄청난 가속이 붙는다.
쓰릴 또한 대단하다.
다음 고개에선 벌써 익혀진 솜씨가 되어 쓰릴이 배가된다.
세 고개 타기로 샌드보드 타기가 끝이 났다.
18 명 일행 중 여섯 사람만이 즐거움을 만끽했다.
다시 샌드카 기사의 솜씨자랑에 편승하여 들뜬 기분을 환호로 폭발시키다가 멈춰준
언덕에서 죽은 듯이 고요한 오아시스를 내려다보며 사진 찍기를 하고 돌아 내려왔다.
버스에 올라 살아있는 오아시스엘 갔다.
호수주변의 열대성 나무들은 싱싱하고 좋았지만
쉼터와 단장된 볼거리 시설물들이 장사 속으로 보여 기대에 어긋났다.
즐비한 기념품 가게들이 호객에 열을 올린다.
태양열은 여전하다.
버스가 천국이다.
다시 달리기 시작한 버스, 길가에 종종 보이는 십자가 개집(영혼의 집)
그리고 지붕위의 십자가와 황소 두 마리 상,
가이드의 이야기 문이 다시 열렸다.
다시 기억나는 대로 아래에 적어본다.
페루의 막걸리 [치차주]는 검은 옥수수 물에 새벽
첫 침(타액)을 발효제로 하여 만들었었고 코카 잎으로 도수를 높였었다.
자가 양조 포도주가 많아 포도주 종류가 다채롭다.
페루엔‘삐스코 샤워’라는 독특한 술이 있다.
페루의‘아카 콜라’가 코카콜라를 누른 세계 유일의 음료수이다,
나스까의 특산물은 토기, 도자기이다.
내일 볼‘나스까 라인’은 그림의 크기가 350m 이상 이고 10km 가 넘는 것도 있다.
그리고 AD 100년 이전의 그림으로그림의 바탕은 달 표면을 가장 많이 닮은 지역이라 한다.
페루는 철저하게 5 일제로 근무하며 페루 국기는 삼색기
(중앙이 백색 양측이 적색)이고 세율은 현재19%이나 21%로 올리려 하고 있다.
의료보험료는 봉급의 16%이다. 등등이다.
지루를 달래주는 가이드의 알림거리가 목적지‘나스까’를 점점 가깝게 해주고 있었다.
나스까 라인
달리는 도로의 주변 사방이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보이지 않은 완전 회색 천지가 이다.
그 뜨겁던 태양이 뉘엿뉘엿 서산에 가까워지며 열기를 낮추고 있을 즈음,
조그마한 교량이 슬쩍 지나가더니 아담한 시가지가 나타났다.
50cc 모패드 삼륜차가 등장했다.
[나스까]시인 것이다.
이어서 우측으로 꼬불꼬불 한참을 돌아 들어가 버스가 멈춘 곳,
화려하게 핀 이름 모를 꽃들을 앞세워 반기는 곳, 이곳이 [마조로 호텔]이었다.
단층으로서 전형적인 시골 별장 형 호텔이었다.
여관기분이 나면서도 중앙에 조성한 풀장이
색색의 예쁜 나무 꽃과 어우러져 아늑한 기분을 주었다.
필자가 좋아하는 아침 새 지저기는 소리에 깨어 일어났다.
창밖으로 키 작은 현지주민 아낙네가 검은 염소 한 마리의 고삐를 끌고 지나갔다.
식당엘 갔다.
일행들은 벌써 식사를 다 끝내고 있었다.
벽에 장식한 그림들이, 그리고 장식물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들은 이야기로 주인 사장이 갖은 고생 다 하다가 왕창 벌어 옛날 군대(스페인 군?)의
마구간을 사들여서 리모델링을 했으며 고가의 유물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고 했다.
건물의 생김새로 보아 맞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그리 멀지 않은 비행장에서 그리 크지 않은 비행기들이
그리 크지 않은 소리로 서둘러 오지 않고 무엇들 하고 있느냐고 독촉이다.
서둘러 도착 한 계류장엔 열대 쯤 되어 보이는 경비행기들이 순번을 기다리고 있다.
한 대씩 뜨고 앉는 것이 40 분 간격이란다.
벌써 여러 팀이 대기 중 이었고 우리 팀도 여섯 명씩 조를 짜서 기다렸다.
한 시간 여 후에 순 번이 되어 잽싸게 6 인 1 달러씩을 걷어 젊은 조종사에게 건넸다.
곧바로 조종사의 친절이 추가 된 것 같았다.
조종사와 나란히 앉아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통신 이어 캡을 썼다.
미국 그랜드캐년의 무스땅기 탑승이, 카나다 나이아가라 폭포에서의
헬리콥터 탑승이 떠올랐다.
우리가 탄 경비행기(L -19)가 길지 않은 활주로를 뒤로하고
중천으로 오르니 긴장 속에서도 기분이 따라 오른다.
10 여분을 날아가 ‘나스까 라인’을 하나하나 기울기로
보여 줄 때에는 두통 뒤에 숨어있던 현기증이 나타났다.
조종사는 친절을 베푸는 건지 재주를 과시하는 건지 연신 위 아래로
또는 좌우로 기울기를 계속하며 날개 끝 방향을 보란다.
얕은 영어 실력이라도 그 정도는 알아듣는다.
라인(그림)의 모양엔 원숭이도 나오고 아담한 나무 모양도 나오고
독수리도 나오고, 알 수없는 모양의 복잡한 선형도 나온다.
비행기는 한 모양의 그림을 한 번 보임으로 끝내질 않고 꼭 반복 날기로 친절을 베푼다.
가이드의 말에 충실 했던 필자는 눈으로 찍어 머릿속에 보관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뒤에 안 일이지만 뒷좌석의 친구는 수도 없이 카메라에 담아 왔고 그림도 선명했다.
공항 계류장에 도착하여서는 여늬 관광지와 마찬가지로
각개 기념 촬영과 비행사의 사인 증서 교부가 있었다.
주위 일행 중 몇 여자 분들이 기다림의 무료함을 쇼핑으로 메꾸고 있는가 싶었는데
차가 떠날 무렵에 보니 헐 값 쇼핑 성공 자랑으로 바뀌었고 또 견물생심이라더니
다른 여자 한 분은 떠나려는 차까지 세우고 가게로 내달았다.
리마까지 장장 여섯 시간 반의 차량운행이 시작되었다.
가이드는 지금까지의 가이드 생활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이야기라며
칠남매의 부모인 어느 노부부의 효도 여행 이야기
(내용은 감동적이어서 잘 간수하려 했는데 반쯤 잃어버려 안타까움 :
70대 노부모가 미국의 막내아들을 그리워하자 여섯 딸이 여비를 모아 미국의
남동생에게 보냈는데 얼마 가지 않아 환경에 적응을 못하고 귀국시켜 달라고 하니
남동생이 귀국을 시키겠다고 누나들에게 통보를 했다.
그러자 누나들은 여행이라도 시켜드리고 보내라 하여 보낸 것이 남미 여행이었는데
무지로 인한, 그리고 견디기 힘든 고산병 등 여러 일들이 벌어져 어려운 치다꺼리를
하였던 사례?)로 일행에게 감명을 주었고
또 제 2 탄으로 부산 자갈치 시장 아줌마 팀이 와서 웃겼던 씁쓸한 이야기
(①내 젓 터져 - 뚱보 아줌마가 가지고 온 젓갈 봉지가
비행기 안에서 터져 비행기에서 쫓겨 날 번 한 이야기.
②비대 사건 - 용도를 몰라 세수
③정로환 사건 - 배탈로 정로환을 먹었는데 특유의 냄새 때문에 겪은 일과
일어나질 못하여 단체가 움직이지 못한 사건 등)와 그 외 김치찌개,
청국장 사건(이웃에서 냄새를 문제 삼아 무마한 이야기),
페루의 전기 사정(저녁시간 지역별 시간제 송전),
리마의 물 사정 소개 등등의 이야기로 리마까지 연결시켜 황혼 무렵에 도착 하였다.
리마
잠깐 자유 시간을 얻어 쉬는 사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쇼핑 몰 앞의 공원엔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였다.
만(灣)의 건너편 등대에서도 불이 켜지더니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멀리서 대기 중이던 버스를 불러 리마의 초저녁 거리를 한참 달린 후에
한국식당에 닿았고 예약된 리마의 마지막 식사, 꽃 등심을 맛있게 먹었다.
주인아주머니는 친절 했으나 동갑내기의 조기구이 불평
(한 상에 한 마리는 너무 했다)으로 언짢은 이별이 되었다.
리마에서 출발하여 LA 공항까지는 8 시간 반이 걸린다.
천당에서 다시 1 박을 해야 한다.
장거리 버스 타는데도, 장거리 비행기 타는데도 이젠 이골이 났다.
그 뿐인가, 양식 뷔페에도 익숙해 졌다.
페루는 자국의 상징 [코르게 차베스 공항]의 운영권조차도
유지를 못하고 칠레 LAN 항공에게 맡겨버렸다.
산유국이면서도 정제시설이 없어 싸게 팔았던 기름을 비싸게 되사와
국민들에게 판다고 하니 기름 값이 한국과 같은 수준으로 비쌀 수밖에 없었다.
로스안젤레스 공항 검색대 바구니에서 손목시계를 챙기지 않고 나왔다가
뒤늦게 쫓아가 찾은 친구의 케이스는 운이 좋은 케이스이다.
전북에서 온 일행 ‘김병규’씨 부부는
핸드폰을 챙기지 않고 나왔다가 찾느라고 애를 먹었다.
승객들 모두 비행기 탑승이 끝나가는 때에야 담당직원이 나타나
해결이 되었으니 그동안 마음고생이 어떠했겠는가!!
미국으로 나갈 때는 열 시간 반이 걸렸는데 돌아오는 데는 13시간이 걸렸다.
미국으로 나갈 때의 기내식은 쌈밥이었는데 돌아올 때의 기내식은 비빔밥이었다.
인천공항에서 운이 좋아 광주 행 버스를 이내 탈 수가 있었고
그 버스는 네 시간 반 만에 도착 했다.
핸드폰에 표시되던 서울시간과 현지시간이 사라져 버렸다.
남미 페루 나스까에서 출발하여 리마까지 버스 6 시간 반,
리마에서 미국 LA까지 8 시간 반, LA에서 인천까지 13 시간,
인천에서 광주까지 4시간 반,
대기 시간 말고라도 하루 동안의 탑승시간이 도합 32시간 반이었다.
핸드폰에는 이번 여행에서 찍은 507 장의 사진이 저장되어 있다.
간추려서 인터넷에 올리고 여행기도 써야 한다.
종친회 업무가 밀려있다.
시간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그래도 스트레스 화 해서는 안 된다@
비엔(good) 몰라(안녕).
※ 쎄비체 :
날생선 및 해물 에피타이져, 해물볶음 초밥, 생선 스튜등 페루 전통 요리
- 學 松 -
첫댓글 학송구문모회장님! 중남미 8개국 여행을 다녀 오셔서 여행기를 너무나 자세하게 잘써 주셔서 마치 제가 그곳을 여행 갔다 온것처럼 착각할 정도로 잘보고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