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게 꼬리말로 달려고 했으나 글이 좀 길어질 것 같아서..--;;
실미도는 뉴스에서까지 연이어 난리니까 사람들이 뭐대뭐대~하면서 보는거예요.
정치상황이기도 하니까..
어제는 MBC에서 실미도 보다 더 심한 XX도를 보도국팀들이 찾아 냈다고 하던대요.
XX도를 찾아 보려 기사 검생중이지만..쉽게 안나타나네요.
오늘 9시 MBC보면..그 사람들의 훈련 강도 등등 나온다더군요.(오늘 아침 MBC라디오 뉴스에서 그러더군요.)
실미도는 아마 안성기가 공군소속이죠?...공군 소속으로 넣어달라는 부탁을 했던 장면이 나왔으니까..
XX도에서 군생활 한 사람들은..더 많은 수였고..모두들 범죄자나..감옥에 있던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육군 소속이었구요.
귀동냥으로 들은 기사니까..ㅎㅎ
그래도 XX도 말은 사실임..--;
우리 동네 사는 중견의 아주머님.아저씨 들도 거의~ 본것 같던대요..실미도..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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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mbc.com들어가서 찾았네요..
또 하나의 실미도 '선갑도의 비밀'
2004.01.12 22:52
MBC 뉴스데스크는 그 동안 1급 군사비밀로 분류되어있던 대북 공작 활동의 실체를 관련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토대로 5차례에 걸쳐 연속기획 보도합니다.
그 첫 번째 순서로 '실미도'와 유사한 북파부대가 서해의 무인도 '선갑도'에도 실존했다는 사실을 최초로 공개합니다.
37년 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선갑도의 비밀을 박찬정 기자가 취재해 iMnews가 전해드립니다.
1968년 1.21 사태
'우리 31명의 임무는 박정희 모가지 뗄 임무고'
무장공비 31명의 청와대 습격사건이 북파특수부대 창설의 도화선이 됐습니다.
1971년 8월 23일 실미도 사건.
서울로 진입하던 북파특수요원 23명이 군과 대치하다 자폭했고, 살아남은 4명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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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 임무를 띄고 여러 차례 휴전선을 넘나든 육군첩보부대 중사 출신 최호구씨.
인천에서 75Km 떨어진 덕적도에서 배를 갈아탄지 30여분이 지나자 최씨의 외침과 함께 멀리 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베일속에 철저히 가려져있던 무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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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만에 선갑도를 찾은 최씨는 '아이구, 죽었구나 싶었지. 특히나 죄수들을 데리고 왔으니까, 이거 엄청난 문제다 내 직감적으로 느꼈어.'라며 지난 1968년 여름을 생생하게 기억해냅니다.
함께 내린 사람들은 안양교도소에 복역하던 12명의 장기수들이었습니다.
북파특수 임무를 마치고 살아 돌아올 경우 남은 형기를 면제받는 조건이었습니다.
안양교도소 관계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더라구요. 68년 7월 5일날 나간 사람들이..우리 기록상에선 집행 정지로 출소한 거예요.'라며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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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는 기억 저편에 있던 30여년의 세월이 바로 어제처럼 되살아난 듯 회상합니다. '제일 처음에 들어와서 이 백사장에, 이게 한 백 미터 안되겠나. 살랑 살랑 구보를 시켰어. 7월 중순이고 굉장히 더울 때 아니야. 다 주저앉더라구. 바닷물에 밀어 넣었지.'
모래 언덕 한켠에 녹슨 훈련막사 잔해가 눈에 띕니다. '들어보면 그게 창문이야.'
식수원으로 쓰던 우물터도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물 참 좋아. 말도 못하게 좋다구. 물 콸콸 나온다 아이가.'
당시 선갑도엔 4개의 막사와 무기고, 사격장과 우물터가 있었습니다.
혹독한 훈련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습니다.
'저쪽 계곡이 있죠. 소나무 두 그루 있는데, 계곡으로 내려와서 중간선을 죽 따라서 저 V자 계곡있죠. 거기 넘어 백사장까지 7번을 왔다갔다 하는 거야. 그럼 10킬로야.'
당시 대원들은 몸에는 30Kg의 모래배낭, 양쪽 다리엔 5Kg의 모래주머니를 단 채 10Km의 산악을 달려야 했습니다.
1968년 여름, 서해의 고도 선갑도에서 이후 4년 동안 군 장기수 40여명은 대규모 침투 공작을 수행하기 위해 북파특수요원들로 길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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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정 imnews@imbc.com] 2004.01.13 09:3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