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우울증에 빠졌다는 지하2호를 달래주기 위해 평소 그가 좋아한다는 낚지볶음을 먹으러 면목동에 갔다. 무교동 낚지볶음 체인점이었는데 사람이 붐비어 월요일임에도 대기표를 받아 기다려야했다. 지하2호는 금연론자이므로 상관이 없었지만 나는 흡연론자이므로 흡연석 자리가 나길 기다렸다. 지하2호는 오늘도 하루종일 먹지 않았다. 그는 평소에도 먹지 않고 산다. 이틀, 삼일에 걸쳐 가끔씩 한끼로 생리적 욕구를 해결할 뿐이다. 또한 지하2호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 술도 마시질 않는다. 담배도 피지 않는다. 나로서는 제법 한심스럽고 제법 재미없는 친구다. 이 점만 빼놓는다면 지하2호는 꽤나 쓸만한 친구다. 그는 포커 게임을 나보다 더 잘하며 가끔 서울 지리에 훤해 나로선 추측불가다. 사람이란 잘 보이는듯 하면서도 어디 한군데 비밀스런 구석이 있어야 한다는 지론인가. 그것은 잘 모르겠다. 지하2호는 아주 맛있게 밥 한그릇을 뚝딱 해치우더니 그간 식욕이 없었다며 내가 내민 밥공기의 반을 덜어갔다.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술 안 마시는 사람 앞에서 혼자서 소주 한병을 비우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지하2호와 만나면 나는 아주 뼈저리게 느낀다. 지하2호는 사이다 한병과 자판기 커피 두잔을 마시고 모자라 계피 사탕을 입에 넣고 오물거린다. 그는 배불러를 연발한다. 그런 지하2호 앞에서 나는 과거 내가 겪었던 술배와 먹배가 따로 있었던 내 일년차 후배 이야기를 해주며 그 정도 가지고 배부르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한다. 한편으로 옛날 한국의 산수를 유람하겠다는 목적으로 술 마시며 속이 헐어 수전증에 걸린 과거를 마치 금란가사를 걸친 고승 마냥 주절주절댄다. 결국 전라도를 돌아 강원도에 간 이야기며 거기서 만난 땡중 중광이란 사람을 처음 봤다는 것까지. 음식점을 나와 시계를 보니 9시가 조금 넘었다. 지하2호에게 영화를 볼 테냐고 묻자 반색한다. 아마 그는 나에게 미안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토요일날 본 사이다. 설 연휴의 다음날은 썰렁하기 이를데 없다. 지하2호는 우울하다며 타키에 접속했다. 그리고는 수원에 있는 날 보고 놀아달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날 좋아했던 후배가 결혼할 남자를 소개시킨 날이었다. 둘은 동갑이었다. 잘 어울렸다. 후배의 의미심장한 눈빛을 뒤로 하고-으레 남자란 이런 각도, 시선 정도로 해석하기 마련인 법-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서울역에 삼십분만에 도착. 지하2호가 사는 휘경동에 다달았을 무렵엔 경희대는 정말 썰렁하였다. 정말. 연휴의 다음날은 썰렁한 것이다. 지하2호는 청소하다 전화기가 진동으로 되어 늦게 보았다며 미안하다는 듯이 머릴 긁적였다. 우리는 파전집으로 향했다. 굉장히 우울했었나 보다. 노래를 부르자고 했다. 나는 지하2호와 여태껏 노래방에 가본 일이 없다. 처음 30분간 노래를 불렀다. 그는 트로트를 썩 잘 불렀다. 나는 최신 유행가를 알지도 못했고 더더욱 따라부를 수도 없었다. 옛날 노래 몇 곡과 흘러간 올드 팝을 몇 곡 불렀다. 그의 기분이 고조됌에 따라 화장실에 들렸다가 한 시간을 더 연장했다. 그 뒤로 몇 십분의 서비스 시간을 다 쓰고 나서야 지하2호와 나는 노래방을 나왔다. 내 목소리는 감기로 인해 다소 침침해져 있었는데 노래를 부르고 나서는 어버버가 되어 버렸다. 새벽내에 명치께가 걸려 고통스러웠다. 여지없이 토해 버렸다. 파전이 시퍼렇게 질린 안색이 되어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횡경막이 오래도록 막혔던가 보다. 고통은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점퍼를 뒤집어쓰고 편의점을 갔다. 역시 까스활명수가 최고다. 다른 분들도 꼭 부채표를 사길 바란다. 일요일은 죽만 먹었다. 밥을 삼킬 수가 없던 탓이다. 명치께는 여전히 누르면 답답하다. 후배가 전화를 해서 잠시간 통화를 했다. 일요일은 몸을 추스리던 날이었다. 어쨌든 월요일 다시 지하2호와 함께 만나 밥을 먹을 때-나는 술만 마셨다-첫잔이 별다른 이상을 보이지 않음에 다소간 안도했다. 지하2호와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상봉 시네마에 갔다. 그는 나보다 위치를 더 잘 알고 있었다. 가보니 마지막 상영 시간이 지나 있었다. 변두리 상영관은 그런 법이라고 지하2호는 중얼거렸다. 강변에 가면 볼 수 있는데. 내가 물었다. 그렇게 늦게까지 상영하느냐고. 새벽에도 해. 지하2호의 말이었다. 그럼 보자고 했다. 그는 나에게 시간이 늦어서 어쩌지 하면서 미안해했지만 이러나저러나 죽기는 마찬가지지라고 대꾸해주었다. 그는 버스를 탈 것을 주장했으나 나는 택시를 탈 것을 주장했다. 가위바위보에서 내가 이겼다. 평상시에 백수이고 가끔 한달 생활비를 위해 알바 정도를 뛰는 지하2호는 땅을 파서 석유가 나오냐고 핀잔이다. 나는 전철을 타고 청량리로 가서 강변역으로 가느니 차라리 상봉역에서 택시를 타고 강변으로 가는 길을 택하겠노라고 단호히 말했다. 그는 내가 과용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는지도 모른다. 강변역에 갔을 때 영화는 피터팬, 실미도, 반지의 제왕, 내사랑 싸가지, 페이첵, 라스트 사무라이, 말죽거리 잔혹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실미도를 봤다고 했다. 그런데 또 보자고 했다. 나는 둘중 한 사람이 본 것은 피하자고 했다. 그는 반지의 제왕을 보자고 했다. 속으로 윽 했다. 이건 3시간이 넘는다. 새벽 2시 조금 넘어 영화가 끝난다. 가위바위보를 했다. 나는 지하2호가 보자기를 낼 줄로 알았다. 내가 졌다. 남아일언은 중천금이라고 했다. 남자 안한다고 우겼다가 포기하였다. 팝콘을 사고 했을 때 영화 시작 5분 전에 지하2호가 문득 이 영활 봤다고 했다. 이런 진작 이야길 했어야지! 나는 강력하게, 둘중 하나가 본 영화는 안된다고 했다. 지하2호와 영화를 같이 본 적은 없지만 어쩐지 스포일틱한 내음이 풍겼다. 위험하다. 결국은 말죽거리 잔혹사를 봤다. 지하2호는 피하고 싶은 영화였으며 나에게는 강력하게 보고 싶은 영화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신문매체들이 우호적이었으므로. 시계가 11시 즈음이었을 때 이소룡의 영화 장면을 시작으로 말죽거리 잔혹사는 그 막을 올렸다. 지하철이나 새마을 열차나 극장에서나 한국에서는 뭐든지 정시에 하는 법이 없다. 이른바 코리아 타임인 것이다. 영화는, 글쎄, 지금으로 보자면 40대의 이야기다. 보성에서 말죽거리로 이른바 땅투기를 목적으로 전학 온 권상우가 있고 그 반에는 짱이 있다. 영화 본지 열시간도 안 되었는데 권상우 이름이 김현수고 여주인공 한가인이 강은주였다는 사실 외에는 기억나는게 없다. 아, 맞다. 동갑내기 과외하기에서 나왔던 감초 역할의 조연 뚱보, 그 왜 노래방에서 실수로 취소를 눌렀던 학생이 여기에서도 나온다. 햄버거라는 별명인데 도색잡지를 구해 학급에 유통시킨다. 이 학급짱이 선도부짱과 번번히 부대낀다. 권상우가 이 학급짱과 친해지게 된 동기는 농구 경기와 고고장에서의 인연 때문. 음악은 원 웨이 티켓을 틀어주고 원 서머 나잇을 흘린다. 샌드 페블즈도 소개된다. 올리비아 핫세를 닮은 여학생에게 반한 권상우지만 학급짱의 남자다움에 반해 인연은 닿질 않고 선도부짱과의 싸움에게 패한 학급짱은 가출해버린다. 절권도의 길이란 책을 읽으며 권상우는 마음 속의 목표를 정하게 되고 드디어 디데이의 날은 밝아왔다. 선도부짱을 깨기 위해 나만의 길을 가련다. 휘리리릭...사실 내용은 이게 전부다. 선도부짱에게 항상 당하는 전형적인 타켓이 미필적 고의로 우유를 이층엔가 삼층에선가 던졌을 때 권상우는 이때다 했을 거다. 선도부짱이 똘마니와 같이 올라와서 공포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을 때 햄버거는 자신의 체면을 봐달라며 우리반에 그런 놈 없다고 회유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그동안 귀여워해줬더니 기어오르냐며 날아오는 주먹뿐. 절정에 달했을 때 권상우가 의자를 집어 던진다. 뭐라고 소리치더니 "늬가 그렇게 싸움을 잘해? 옥상으로 올라와.", "똘마니는 빠져 새꺄" 등등의 어휘를 내뱉은 다음 "쪽팔리니까 간단하게 끝내자."는 선도부짱의 비웃음을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즈음에서 쌍절곤으로 뒤통수를 후려갈긴다. 이 장면은 정말 의외였다. 아마 다들 그렇게 생각했을 테다. 그러나 포커 게임의 방제처럼 냉정한 승부의 세계. 그리고 이야기의 복선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영화의 첫 장면 이소룡이 절권도를 창시했을 때 많은 무도가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는 사실. 이유는? 무도가 아니라 이기기위한 무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므로 쌍절곤으로 뒤통수를 뒤에서 후려친 권상우의 방법은 병법에서는 필승론이요 도덕적으로 비난의 여지가 있지만 뒤에서 덤벼드는 선도부원들을 보자면 도덕적 명분은 쉽사리 회복된다. 이 장면에서 김하늘이 사면초가에 대해 물었을 때 권상우가 한 대답, 다구리칠 때 사방이 적이라는 거지,란 대목이 떠오른 이유는 아마도 설날 내내 영화만 바라본 탓이었을 거다. 적들을 쓰러뜨리고 계단을 내려와 복도를 걸으며 뭐라 하는 선생들에게 복도 유리창 몇 장을 쌍절곤으로 깨버리는 신위를 보이며 "대한민국 학교 좆까라고 그래!"하며 소리치는 것은 자의식이 지나치게 과잉된 것이었다. 이야기의 흐름을 보자면 모범생 김현수가 선도부짱을 깨뜨리는 것은 데미안의 아프락서스의 관점에서 알을 깨고 나오는데 수반되는 파괴의 행위에 지나지 않음인데 대한민국 수식어는 그닥 탐탁치 않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의 권상우 연기는 영화 모든 장면에서 가장 자연스럽다. 재밌게도.;-) 한가지 난처한 점은 마지막 대목이었다. 시대는 변해 이소룡의 인기는 저물고 성룡의 인기가 극장을 달구고 있었다. 일년 만엔가 우연찮게 햄버거와 재회한 권상우는 그를 따라 국제 극장 앞에 서있다. 성룡의 취권이 한창이다. 햄버거는 영화를 봤지만 너(권상우)를 만난 기념이니까 다시 봐도 상관없다고 하지만 권상우는 사양한다. "그래도 이소룡이지." "이소룡은....걘 이제 한물 갔다니까. 이 영화가 얼마나 재밌는데....." 아, 나도 그냥 지하2호를 따라 반지의 제왕이나 실미도를 볼 걸 그랬나. 아. 아. 아. 돌아오는 길에 원 서머 나잇의 가사와 영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하2호는 보지 못했노라고 했다. 아, 안보길 잘했어, 그거 봤으면 후회했을 거야. 여자 주인공이 어디서 죽는 줄 알아? 한국 설악산이야.-_-; 거기서 여자가 죽는다고. 내가 엠비씨에서 해줬을 때 눈 비벼가며 봤는데 아아아. 상상은 상상대로 환상은 환상대로 남는게 나았어. 지하2호와 나는 그렇게 헤어졌다.
첫댓글 허~ 감탄. 안녕하시지요?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쌍절권으로 뒤통수를 날린다? ㅋㅋ tv에서 광고하던거랑은 또 틀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