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윤제문

[황장군467]

<비열한 거리>(06)에서 배우 윤제문의 연기는 잘 벼린 칼날 같았다. 이 과묵한 검객은 상대를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를 짓다가 단숨에 베어버리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 뒤 윤제문이 스크린 너머를 쏘아볼 때면, 관객들은 잠시 얼어붙었다. 백 마디 대사보다 강렬한 한 번의 눈빛으로 각인되는 배우 윤제문. 식인 멧돼지 소탕작전에 나선 해외 유학파 엘리트 포수 백만배를 연기한 <차우>. 관객을 압도하는 날선 눈빛은 여전하지만, 이번엔 의외의 반전을 숨기고 있다. <차우>의 반전 포인트, 윤제문을 만났다.

글 | 박혜은 (영화 칼럼니스트), 구성 | 네이버영화

백 마디 대사보다 강렬한 눈빛, <차우>의 히든 카드, 해외파 헌터 백 포수

"엉뚱하죠? 그런데 재미있죠? 저도 촬영하면서 정말 재미있고 좋았어요, 으하하하." <차우>의 촬영 현장이 떠올랐는지, 윤제문은 대뜸 웃음을 터뜨렸다. 이 꾸밈없는 웃음이 그가 <차우>에서 보여줄 의외의 반전이다. 식인 멧돼지가 등장하는 '괴수 어드벤처'로 관심을 모았지만, 실상 <차우>의 핵심은 독특한 캐릭터 코미디에 있다. 그 중에서도 윤제문이 연기한 '백 포수'는 폭소의 핵이다. 인간극장 '포수' 편의 주인공으로 선정될 만큼, 유명한 '해외파 헌터' 백만배는 명예욕과 승부욕에 불타는 인물. 목표를 위해선 주변 사람들을 위험에 몰아넣는 '덫'도 서슴지 않는 비정한 승부사다.

영화 초반 당당하게 등장해 멧돼지 소탕을 장담할 때만 해도, 백 포수가 관객의 배꼽을 빼놓을 히든카드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건 <차우>의 촬영이 시작될 때까지, 윤제문도 몰랐다. "시나리오에서 백 포수는 정말 진지한 인물이었어요.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인물과 다른 카리스마와 무게를 갖고 있어서 선택했죠. 해보고 싶었던 도전이니까. 그런데 현장에서 180도 바뀌었어요. 신정원 감독이 현장에서 막 아이디어를 내는데, 정말 재미있더라고요. 신나게 연기했죠." 그 결과 개와 대화를 나누고, 선머슴 같은 변수련(정유미)을 수줍은 소년의 눈으로 바라보고, 파격적 노출(?)을 감행하는 '의외의 백 포수'가 태어났다. 관객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기대하고 극장을 찾은 관객이라면,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다.

우연히 선 무대. 그리고 <청춘예찬>

최근 충무로를 호령하는 대부분의 실력파 배우들이 그렇듯, 윤제문도 연극 무대에서 다져진 배우다. 특이한 건 그가 처음부터 '배우'가 될 생각으로 대학로에 뛰어든 게 아니라는 점이다. 군대 시절에 친구를 따라 연극 <칠수와 만수>를 보러갔다가 연극 무대에 홀린 그는 극단 산울림에 입단했다. "특별하게 '끼'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다지 유별나게 학창 시절을 보낸 건 아닌데, 연극을 경험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연출부로 들어갔죠. 무대 진행도 돕고, 조명도 설치하고, 무대 그림도 그렸죠. 그러다 '우리극 연구소' 3기로 들어가게 되었고 무대에 섰는데, 재미있더라고요. 재미있으니까 배우로서 삶을 생각하게 된 거예요."

그는 영화 속에서 몇 번 들었던 그 말투 그대로 "재미있더라고요. 아… 재미있더라고."를 연발했다. "내가 하는 동작이나 대사에 집중하는 관객의 에너지를 느끼면서 무대에 서면, 내가 어떻게 연기했는지도 몰라요. 무아지경의 상태가 되는 거죠." 마치 지금 무대 위에서 관객의 반응을 느끼고 있는 배우처럼, 윤제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지금도 연극계의 '전설적 공연' 중 하나로 손꼽히는 <청춘예찬>(99. 연출 박근형)엔 박해일, 고수희와 함께 윤제문이 있었다. 이 시절에 대해 말을 아꼈지만, 당시는 잠시 생활고로 연극 무대를 떠났던 그가 연기에 대한 갈증을 이기지 못해 다시 무대로 돌아온 때였다. 윤제문이 연기한 '아버지'는 연극을 집어삼키는 '신 스틸러'(scene stealer) 였다. 술병을 들고 윤제문이 등장하는 순간 관객들은 자지러졌고, 그가 무대 밖으로 사라지면 아쉽다는 듯 자꾸 무대 뒤를 바라봤다.

"연기요? 그냥 하는 거죠. 정말로 나는, 그냥 해요"

2000년에 동아연기상을 수상하며 연극계에 이름을 단단히 새긴 윤제문은 단편영화 작업에 참여하면서 카메라 앞에 서는 연습을 했고, <정글쥬스>(02)의 조폭 '하마' 역으로 본격적인 충무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임필성 감독의 <남극일기>(05)에 출연한 뒤론, 굳이 오디션을 보러 다니지 않아도 시나리오들이 그를 찾아왔다. 그리고 유하 감독의 <비열한 거리>의 중간 보스 상철을 통해 그간 벼려왔던 칼날을 소리 없이 꺼냈다.

"당시엔 내 이미지가 어떤지 걱정할 때가 아니었어요. 작품이 재미있으면 무조건 했죠.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소화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그렇게 만났던 <비열한 거리> <열혈남아>(06) <우아한 세계>(07). 하지만 윤제문의 칼날 같은 눈빛이 너무 강렬했던 모양이다. "어떤 분이 제 앞에서 자연스럽게 '조폭 전문 배우'라는 표현을 썼어요. 그 순간 처음 알았어요. 내 이미지가 그렇게 굳어졌구나." 윤제문은 그 뒤 조폭 역할을 고사했다. 역할의 비중과 상관없이 다양한 캐릭터와 만나기 시작했고, <차우>의 백 포수에 이르렀다.

"연기요? 그냥 하는 거죠. 으허허허. 정말로 나는, 그냥 해요. 시나리오에 있는 대로, 감독님이 시키는 대로." 연기론에 대해 묻자, 윤제문은 뭘 그런 걸 다 묻느냐는 듯 웃었다. 그는 캐릭터를 설정하고 준비하는 '수험생' 타입이 아니다. 연극과 영화, TV 드라마의 '판'을 구별하지도 않는다. "배우에게 무대가 주어지면 연기하는 거죠. 뭘 생각할 게 있나요. 무대는 무대일 뿐이잖아요. 내가 너무 생각이 없는 건가?"(웃음) 생각이 없다기보다는, 무대에 올라 연기할 생각 말고는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차기작은 TV 드라마 <아이리스>. 국정원 요원으로 이병헌과 정준호를 지휘하는 팀장 역에 캐스팅됐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꼭 필모그래피에 담고 싶은 '꿈의 차기작'을 묻자 윤제문의 눈이 아스라이 가늘어졌다. "그 왜… <분노의 주먹> 있잖아요. 로버트 드 니로가 주연했던. 옛날 영화라서 어릴 때 본 건데, 그 비정한 느낌이 참 좋더라고요. 로버트 드 니로 좋아해요. 아주 훌륭한 배우잖아요. 그런 역할, 그런 영화… 한 번 꼭 해보고 싶어요." <분노의 주먹>의 윤제문. 상상만 해도 짜릿한 조합 아닌가. 윤제문의 바람이 곧 이루어지길, 많은 관객들도 그 못지 않게 빌게 될 듯싶다.

10편의 영화에 담긴 윤제문의 눈빛

01 <남극일기>(05)

도달 불능점을 향해 가는 6명의 남극 탐험대원 중에서 가장 인간적인 감정을 드러낸 인물은 윤제문이 연기한 김성훈이었다. 동료들의 기이한 실종과 죽음을 겪으며 점점 무너져 가는 영혼을 연기한 윤제문을 보며 임필성 감독은 "충무로 괴물의 탄생을 예감했다"고. 하지만 정작 윤제문의 소회는 단순하다. "뉴질랜드 로케이션 촬영이 고생스럽진 않았다. 비록 흥행에선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지만, 이 작품 이후로 오디션을 보러 다니지 않아도 비중 있는 배역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고마운 작품이                                                              다."

02. <비열한 거리>(06)

"이때부터 조폭 캐릭터가 심심찮게 들어왔다. 잘 할 수 있는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 뿐, 조폭 캐릭터 전문 배우라는 소리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웃음) 윤제문의 상철은 '비열한 거리'에 빌붙어 사는 가장 비열한 인간이다. 웃고 있을 때가 가장 섬뜩하고, 등을 보이는 순간 언제라도 비수를 꽂을 것 같은 인물. "실제 조폭을 캐스팅 했다"는 루머가 돌 만큼, 윤제문의 연기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03. <괴물>(06)

남일(박해일)을 구해주고, 더불어 괴물 처치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짧고 굵은 역할인 '노숙자'를 맡았다. 윤제문의 카리스마 덕에 평범한 노숙자보다는 '거지 현자'처럼 보인다. "봉준호 감독과는 이미 단편 작업을 함께 하면서 인연이 있었다. 작은 역할이지만 도와줄 수 있겠냐는 부탁을 받았는데, 예상보다 훨씬 결정적이고 임팩트가 있는 역할이라 재미있게 찍었다."


04. <열혈남아>(06)

밖에선 인정사정 봐주지 않은 냉혈한 조폭이지만, 그도 엄마 걱정에 잠 못 들고, 사사건건 투덜대는 평범한 아들일 뿐이다. 윤제문은 민재라는 캐릭터를 통해, 마치 변검술을 하듯 인간의 빛과 그림자를 오간다. 자신을 죽이러 온 재문(설경구)와 초등학교 교실에서 맞닥뜨렸을 때, 본능적으로 적을 간파하는 야수의 본성을 섬뜩하게 표현하는 윤제문. 스스로도 재문을 죽이는 마지막 액션 신이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05. <우아한 세계>(07)

"시나리오가 좋아서 선택했는데, 결과적으로 '윤제문은 조폭 전문, 악역 전문'라는 말을 듣고 배우로서 내 이미지에 대해 처음 생각하게 됐다"는 그는 이 영화 이후 깡패 캐릭터를 고사하고 있다. 하지만 윤제문이 연기한 노 상무는 스테레오 타입의 '깡패'로 분류하기엔 너무 아까운 인물이다. 윤제문은 구제불능의 악인 캐릭터에서도 연민을 이끌어낸다. 형에게 인정받기 위해 발버둥치다가 결국 제 무덤을 파는 노 상무 역시, 알고 보면 불쌍한 인간이다.

06. <어깨 너머의 연인>(07)

"처음으로 여성 감독과 함께 작업했다. 색다른 현장 분위기 속에서 재미있게 촬영했다." 남 부러울 것 없이 예쁜 아내를 두고도 어린 비서와 바람이 나는 우유부단한 부잣집 도련님 형식을 통해 윤제문은 영화에서 처음으로 코믹한 얼굴을 드러냈다. 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리며 아내의 치마 속으로 파고 들 때나, 불륜 현장을 들킨 자리에서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을 때, 그는 귀엽기까지 하다!

07.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08)

다국적 마적 집단인 삼국파의 조선인 부두목 병춘. 시종일관 보여주는, 2프로 부족한 카리스마가 묘한 웃음을 자아낸다. "로케이션 촬영이 힘들긴 했지만, 개인적으론 말 타는 재미를 느끼며 즐겁게 찍었다. 한국에서 2개월 간 승마를 배웠지만, 현장의 액션은 쉽지 않았다. 삼국파가 언덕을 달려 내려가는 장면은 시범을 딱 한 번 보고 직접 촬영했는데, 해보니 별 거 아니더라.(웃음) 그 뒤론 말 타고 자유자재로 달리며 액션 신을 찍었다. 아, 재미있었지…"

08. <그림자살인>(09)

"이건 스포일러인데….(웃음) 처음으로 1인2역을 경험했다. 특별히 준비한 건 없다. 시나리오에 쓰여진 대로, 형은 악하게 동생은 선하게 했다. 어렵지 않았다. 형은 나쁜 놈처럼, 동생은 착한 놈처럼 하면 되니까.(웃음)" 설명은 간단하지만, 공중곡예사 소녀를 사랑한 서커스단의 착한 마술사 동생과, 그 소녀들을 부자들에게 팔아 넘기는 파렴치한 형을 표현하기 위해 윤제문은 목소리 톤과 말투, 걸음걸이까지 완전히 다른 두 명의 인물을 감쪽같이 연기해야 했다.

09. <마더>(09)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불러주면 무조건 간다. 내가 그 양반을 좋아한다. 능력 있고, 영화 잘 만들고, 특히 배우들에게 애정이 많다. 너무 매력적인 사람이라서 좋아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이름 그대로 '제문'으로 출연한 <마더>에서 그는 도준(원빈)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착한 형사를 연기했다. 제문이 도준을 취조하는 장면에서 <살인의 추억>(03)의 박두만(송강호) 형사가 떠올랐다는 질문에, 그는 두 형사는 전혀 다른 성격이라고 설명했다. "두만은 용의자의 죄를 믿었다면, 제문은 도준의 무죄를                                                              믿는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10. <차우>(09)

"지금까지 작업한 모든 영화가 다 재미있었지만, <차우>는 그 중에서도 최고다. 신정원 감독의 <시실리 2Km>(04)를 정말 재미있게 봤는데, <차우>에도 유사한 웃음의 코드가 있다. 신정원 감독은 백 포수의 많은 부분을 내게 맡겼지만, 말총머리 헤어스타일만큼은 꼭 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 결과 신정원 감독의 헤어스타일과 거의 똑같은 스타일의 인물이 탄생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흠… 뭐니뭐니 해도 기저귀 장면이다. 영화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감독이 추가 촬영 현장에서 즉석으로 제안한 아이디어인데, 너무 재미있어서 신나게 찍었다. 별로 부끄럽진 않았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