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아카데미’를 아십니까. 한국의 대표급 영화교육기관입니다. ‘영화사관학교’로도 불리죠. 관객 1300만 명을 동원해 역대 한국영화 흥행 1위에 올라 있는 ‘괴물’의 봉준호 감독은 대학 졸업 후 이곳에서 감독의 꿈을 키웠습니다. ‘봄날은 간다’의 허진호 감독, ‘바람난 가족’의 임상수 감독, ‘가족의 탄생’의 김태용 감독, ‘타짜’의 최동훈 감독 등등 1990년대 이후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이끈 감독들 다수가 이곳 출신이죠. 올해로 개원 25주년을 맞은 한국영화아카데미가 어떤 곳인지 알아보겠습니다.
기선민 기자 일러스트=강일구 ilgoo@joongang.co.kr
봉준호·이재용·최동훈 등 438명 배출
한국영화아카데미는 1984년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 부설로 설립됐다. 영화아카데미가 어떤 곳인가를 설명할 때 종종 등장하는 모델은 동유럽의 국립영화제작학교나 미국의 아메리칸필름인스티튜트(AFI)다. 학위를 주는 정식 교육기관은 아니지만, 당장 현장에서 뛸 수 있는 제작전문가를 키우는 데 최우선 목표를 두고 있는 곳이라는 얘기다. 특정한 흐름을 주도하는 ‘문화운동’ 혹은 ‘문화혁명’의 성격이 아니라는 점에서 프랑스의 ‘누벨바그’나 독일의 ‘뉴 저먼 시네마’와는 또 다르다. 현재 24기까지 배출된 인력은 총 438명. 이 중 장편영화 감독 60여 명을 포함한 대다수가 영화와 애니메이션 제작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다.
지금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과 각 대학 영화학과가 있지만, 80년대만 해도 국내에는 영화 인력을 키우는 체계적인 교육기관이 전무했다. 일반 대학 영화학과는 제작에 필요한 기자재를 갖추지 못한 곳이 대부분이어서 단편영화 한 편 만들기도 쉽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영화아카데미에 학생들이 몰렸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도제 시스템을 고수하던 충무로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곱게 자란 ‘먹물’들이 어떻게 거친 일을 하겠느냐”는 것이었다.
1990년대 이후 한국영화 중흥 이끌어
하지만 영화아카데미 출신들은 다양한 영화를 쏟아냈다. 20개 제작사만 영화를 독점적으로 만들 수 있던 영화법이 개정되면서 충무로가 신선한 피의 공급을 원했던 환경 변화와도 맞아떨어졌다. 이들의 작품이 곧 90년대 중흥기를 맞았던 한국영화의 계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기 졸업생 9명은 ‘결혼이야기’의 김의석 감독(영화아카데미 영화연출전공 책임교수)을 비롯해, ‘영원한 제국’의 박종원(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의 고 오병철, ‘그들만의 세상’의 임종재, ‘게임의 법칙’의 장현수,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의 황규덕에 영화평론가 유지나(동국대)·김소영(영상원)·이용배(계원조형예술대) 등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의 허진호, ‘처녀들의 저녁식사’의 임상수, ‘미술관 옆 동물원’의 이정향 등이 뒤를 이었다.
2000년대 들어서도 ‘영화독학생’들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이재용, ‘살인의 추억’의 봉준호,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 ‘4인용 식탁’의 이수연, ‘싱글즈’의 권칠인,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의 김태용·민규동, ‘타짜’의 최동훈 등이 영화아카데미 졸업 후 충무로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수순을 밟았다. 일부 감독의 졸업작품은 충무로 관계자들을 놀라게 하면서 상업영화 데뷔로 이어지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지난달 제14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열린 25주년 기념 특별전에서는 기수별로 뽑은 졸업작품 25편이 상영됐다. 이 중에는 영화학도들에게 아직도 ‘전설’로 꼽히는 봉준호의 ‘지리멸렬’, 변혁·이재용의 ‘호모 비디오쿠스’, 허진호의 ‘고철을 위하여’도 포함됐다.
어떻게 가르치나 1년 등록금 200만원, 실습 위주 교육
영화아카데미에는 총 4개의 전공이 있다. 영화연출, 촬영, 애니메이션연출, 프로듀싱이다. 대학을 졸업하지 않아도, 대한민국 사람이 아니어도, 나이에 상관 없이 응시할 수 있다. 모집 인원은 해마다 다르지만 대개 전공별로 10명 안쪽이기 때문에 평균 경쟁률은 10대 1이 넘는다. 영화연출의 경우 경쟁률이 더 높다. 2007년의 경우 33대 1이었다.
교육법상 학위를 주는 정규학교는 아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지원자가 몰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철저한 실습 위주의 교육 덕에 단기간에 제작 전문가로 클 수 있다. 등록금도 저렴하다. 1년 4학기(40주)에 200만원이다. 다만 교육 목표가 ‘제작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핵심 인력을 단기간에 양성’하는 데 있기 때문에 직접 제작한 포트폴리오를 제출하게 하는 등 전형과정이 까다로운 편이다.
명성 있는 감독들에게 배울 수 있는 ‘마스터클래스’는 영화아카데미의 자랑 중 하나다. 임권택·홍상수 등 국내 감독은 물론 장률·지아장커·피터 정 등 해외 영화인을 만날 수 있다. 고 유현목 감독도 여기서 특강을 했다. 영화아카데미는 2005년 부산국제영화제, 동서대와 함께 아시아영화아카데미(AFA)도 시작했다. 지원자들은 부산영화제 기간을 중심으로 아시아 최고의 교수진에게 영화 제작을 배운다. 올해 23개국 133명이 지원, 16개국 24명이 선발됐다. AFA에서 제작된 단편 영화 2편은 영화제에서 상영된다.
정규과정을 졸업하면 2007년 신설된 1년짜리 제작연구과정에 지원할 수 있다. 전문가의 지도를 받으면서 장편 영화와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보는 과정이다. 완성작은 극장 상영과 영화제 출품에 대해 지원도 받는다. 제2회 신동헌애니메이션어워드 대상 수상작이자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인 ‘제불찰씨 이야기’(사진)는 제작연구과정 1기가 내놓은 결과물. 3억원의 저예산으로 1년 만에 완성도 높은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내 화제가 됐다.
3기 출신 박기용 원장
고급 단계인 제작연구과정 각종 영화제서 알아줍니다
박기용(48·사진) 원장은 영화아카데미 3기 출신. ‘모텔 선인장’(1997), ‘낙타들’(2002)을 연출했고 2003년부터 세 번 연속 원장을 맡고 있다. 12월이면 임기를 마치고 제작 현장으로 돌아간다.
-25주년을 맞은 소감은.
“84년 개원 당시, 전국에 대학 영화학과는 6개에 불과했다. 실습 장비나 교육 프로그램도 전무했다. 컬러 TV 보급과 할리우드 직배 압력 등으로 인해 한국영화산업 역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지금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이 있고, 영화학과를 둔 대학도 100곳이 넘는다. 실습 중심의 전문교육이 이뤄지는 영상대학원도 많다. 한국영화산업의 규모 자체도 비교할 수 없이 성장했다. 이런 발전을 가져온 데 영화아카데미의 역할이 컸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
-여전히 영화아카데미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현장에 곧바로 투입 가능한 핵심인력 양성’이라는 목표에는 변함이 없다. 영화아카데미의 기능에 대해 교육이냐 제작지원이냐 논란도 있었지만, 이곳은 어디까지나 프로 인력을 양성하는 영화학교다. 이런 고민의 산물이 2007년 신설된 고급심화과정인 ‘제작연구과정’이다. 제작연구과정은 각종 영화제에서 성과도 좋다. 올 부산국제영화제에선 소상민 감독이 ‘나는 곤경에 처했다’로 신인감독상인 뉴 커런츠 상을 받았다. 백승빈 감독의 ‘장례식의 멤버’와 이숙경 감독의 ‘어떤 개인 날’은 올 초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부문에서 상영됐다.”
-전공별로 전임교수가 1명밖에 없다는 건 자주 지적되는 사항이다.
“우리는 ‘작고 전문적인 영화학교’다. 대학이 아니기 때문에 전임교수는 1명이면 충분하다. 전임이 많으면 그때그때 현장에서 필요한 사람을 불러 가르침을 받기가 힘들다. 순발력 있고 발 빠른 교육을 위해서 불가피한 부분이다.”
-올 초부터 영진위와 영화아카데미의 위상 변화와 관련된 얘기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25년간 정권이 바뀔 때마다, 혹은 위원장이 바뀔 때마다 영화아카데미의 위상 변화와 관련된 얘기가 끊임없이 나돌았다. 안타깝다. 영화아카데미는 영진위 사업 중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힌다. 이번 부산영화제에서 열린 25주년 특별전에 온 해외 영화인들은 “대체 영화아카데미가 어떤 학교이기에 부산영화제에서 이렇게 단독으로 행사를 열어주느냐”라며 놀라워했다.”
-이곳 출신 중 2000년대 이후 가장 두각을 나타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감독은.
“‘괴물’의 봉준호 감독(11기)이다. 봉 감독은 연세대 사회학과를 다니던 시절 동아리에서 단편을 만들어본 정도의 경험을 갖고 들어와 이곳에서 꽃을 피웠다. 영화아카데미가 ‘구제’한 인재라고 할 수 있다(웃음). 봉 감독은 ‘노력형 천재’다. 재능도 있지만, 그 누구보다도 모범적이고 성실하게 공부해 선배들이 무척 아꼈다. 11기 대표를 맡아 학교 생활도 열심히 했고, 그때부터 여러 사람이 눈여겨봤다. 본인 스스로도 “영화아카데미는 나의 영화적 기반을 닦아준 곳”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