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시헌력의 정착과 시행
서양신법역서 체계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과 연구가 시작된 것은 1700년대 초반부터였단다. 1705년 역서에서 청력과 조선력 사이에 차이가 드러나는 사건이 있었거든. 청에서 받아온 시헌력과 조선에서 제작한 시헌력 사이에 11월과 12월 중 어느 달이 큰달인지가 서로 달랐던 거야. 관상감에서 제작한 역서를 돌려받아 다시 인쇄하고 대소월을 청력에 따라 시행한다는 명령을 내려보내는 소동이 일어났어.
이 사건은 관상감원들을 엄벌하고 역관 허원(1671~1729)을 북경에 파견하는 계기가 되었어. 허원은 흠천감 관원 하군석에게서 본격적으로 역법 지식을 습득해 돌아왔단다. 하군석에게 조선 인삼을 선물로 주어 환심을 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지. 이후 두 사람은 친분을 쌓게 되었어. 그렇지만 금령이 심해서 금성과 수성의 일주 주기와 태양의 원‧근지점의 이동과 일‧월식을 계산하는 법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한 채 돌아왔단다. 그렇지만 조선에 돌아와서 하군석과 평지 왕래를 계속했지. 허원은 1705년부터 1713년까지 역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연근(年根 : 구하려는 해의 동지 다음날 자정에 하늘이 동지점으로부터 떨어진 거리) 수치를 하군석에게서 얻을 수 있었어. 1706년 허원은 다음 해인 1707년 역서를 제작하면서 서양신법역서에 기초해 칠정 계산을 할 수 있었지. 1708년 역서에서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시헌력을 본격적으로 시행할 수 있었단다.
그런데, 1708년 역서부터 칠정력의 시행이 가능했던 것은 하군석에게서 얻은 1713년까지의 연근 수치가 있었기 때문이었어. 연근 수치를 자력으로 계산할 있어야 비로소 독자적으로 역서를 제작할 수 있다고 해. 연근 수치는 시헌력의 역법 원리와 오성의 운행 행도를 추보할 수 있어야 비로소 계산할 수 있어. 그때까지도 허원은 시헌력의 근본적인 역법 원리를 모두 터득하지 못한 거야. 1708년 겨울 조선 조정에서는 허원을 다시 북경에 파견했어. 하군석으로부터 근본적인 역법 지식을 배워오게 한 것이지. 허원은 이때 비로소 역서 제작에 필요한 역일과 삭망, 윤달과 같은 기본 지식은 물론 일‧월식과 다섯 행성의 운행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단다. 1711년 허원은 세초류휘라는 책을 편찬하면서 이렇게 말해. “앞으로 200년 사이에 다시는 역일과 교식에 착오가 없을 것이며, 하늘의 운행과 조금도 차이가 없을 것이다.” 과학자로서 대단한 자부심이지?
허원이 조선 실정에 맞는 시헌력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서양신법역서에 포함된 서양 천문 역산학의 내용 전체를 습득하고 이해한 것은 아니었어.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서양신법역서에는 서양 고대에서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까지 이어진 우주론, 천체운동론, 천문 관측기구, 기하학 등에 관한 지식이 포함되어있어. 허원을 비롯한 조선의 관상감원들은 이러한 서양 천문학의 이론적인 내용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지. 그들은 순전히 역서 제작에 필요한 기술적이고 기능적인 지식을 배우고 적용하는 데 힘썼을 뿐이야. 이것은 좀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어. 근본 원리를 모르고 실무적인 지식만을 습득하는 데 그쳤기 때문이지. 계산상의 오차가 발생했을 경우, 그 오차를 자력으로 정정할 능력이 없었던 거야.
1713년 청나라 흠천감관 하국주가 한양의 위도를 측정하러 조선에 오게 되었단다. 하국주는 허원과 친교를 맺고 많은 도움을 준 하군석의 아들이었어. 허원은 하국주의 작업을 돕고 귀환길에 의주까지 동행하면서 계산법과 원리를 배웠다고 해. 이를 통해 시헌력법에 대한 지식의 폭이 증가하고 관심 영역도 넓어졌어. 1714년 허원은 다시 동지사를 따라 북경에 가서 하국주로부터 역법 이론서와 관측기구, 자명종을 얻어 왔는데, 이를 익히고 사용하여 중성 관측을 통해 시각법을 시헌력 방식으로 바꿀 수 있었어. 이를 보면 조선이 이론과 관측 모두에서 시헌력 방식을 운용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어. 조선의 역법을 시헌력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지 72년 만에 조선 실정에 맞는 시헌력, ‘우리 것’이 된 시헌력을 갖게 된 것이야.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단다. 1726년 청나라에서 서양신법역서를 개정하여 역상고성 체제로 바꿨다는 것을 기억하니? ‘탕법’이 ‘매법’으로 바뀐 것 말이야. 청나라 조정은 개정된 역법을 반포하면서 조선에 별다른 통보를 하지 않았어. 당연히 1727년과 1728년 청나라에서 내려보낸 시헌력서와 조선에서 제작한 시헌력서 사이에 차이가 나타났지. 조선 조정에서는 1727년 9월 역관 안중태를 북경에 보내 그 연유를 알아오도록 했어. 안중태는 별 소득 없이 돌아왔단다. 모두 42권이나 되는 역상고성이나 자세한 계산법을 설명한 책들을 구입하지 못했던 거야. 1728년에야 비로소 역상고성을 일부라도 입수했지만, 실제 계산에 필요한 부분은 구할 수 없었어. 그래서 1729년 역관을 다시 파견해서 역상고성을 다시 사와야 했단다. 관상감원들이 구입한 역상고성을 보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지만, 이상하게도 1734년부터는 차이가 점점 더 벌어지기 시작한 거야. 조정에서는 관상감원을 잡아들여 벌을 내릴 것을 주청했고 실제로 처벌을 받았다고 해.
그런데, 차이가 갈수록 벌어진 이유는 조선 관상감원들의 실수나 잘못이 아니었어. 청나라에서 역상고성의 역원(역서의 시작 연도)을 바꿔 버렸거든. 물론 조선에서는 변경 사실을 알 수가 없었지. 1741년까지 이런 일은 반복적으로 발생했어. 조선 관상감원들의 역상고성에 대한 지식이 좀 늘어나면, 청나라에서 계산식을 바꾼다거나 역원을 변경해 버리니 그것을 따라가기가 매우 어려웠던 거야. 그뿐 아니었어.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역상고성 자체에 있었단다. 역상고성은 흠천감정 쾨글러가 주도했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중국 전통 역법에 정통한 역산가 매각성이 실질적으로 제작한 역법이었거든. 그래서 이 역법을 “매법”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말했지? 서양의 천문학 이론과 계산식을 중국식 역법 언어로 표현하는 데서 온 혼란이 역법 자체에 불안정성을 가져왔을 거야. 그에 덧붙여 쾨글러가 역상고성의 기초로 삼은 티코 브라헤의 지구‧태양 중심 모델이 갖는 한계도 있었지. 칠정이 원운동을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각종 수치가 천상의 행도를 정확히 반영했을 리 없었을 거야.
그렇게 불완전한 천문 역산 이론서인 역상고성에 기초한 역서의 불안정성 때문에 청나라는 1742년 또다시 역법 개정을 단행했음은 앞에서 말한 대로야. 이것이 역상고성 후편임을 기억하고 있지? 케플러의 타원법을 받아들이고 카시니의 대기굴절 수치를 적용했어. 이 소식을 맨 처음 접한 조선인은 1741년 당시 북경 흠천감의 쾨글러와 서무덕에게 몰래 역법 지식을 배우고 있던 일관 안국빈이라는 분이었단다. 안국빈은 이듬해부터 일월식과 오행성의 교식에서는 역상고성 후편 방식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일월식을 계산하는 책을 구해와서 연구하기 시작했어. 상당한 노력 끝에 1743년부터는 조선에서도 역상고성 후편 방식으로 일월식 계산이 가능해졌단다.
그럼에도 1747년까지 조선의 역관들은 역상고성 후편에 따른 태양과 달의 움직임과 일월식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익히고 있었지만, 오행법에 대해서는 아직 터득하지 못했던 모양이야. 영조실록을 보면 1745년 조선력에서 청력과 다른 점이 발견되어 관상감원이 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거든. 이때까지도 관상감원들이 역상고성 후편의 역법 지식을 완전히 습득하지 못했다고 봐야지.
조선에서 중국과 비슷한 수준의 역서를 만들어내고 천문 역산학의 운용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은 1760년대부터였어. 1758년 영조는 관상감원들에게 칠정의 운동을 계산하는 법을 시험해서 만점을 받은 감원에게 상을 내렸다는 기사가 있거든. 1760년이 되면서 조선 조정은 매년 북경에 파견하던 일관을 3년에 한 번씩 파견하기로 했단다. 청나라에서 시헌력이 안정적으로 운용되고 있었고 조선에서 역상고성 후편에 대한 이해와 한반도의 위‧경도에 맞춰 적용하는 능력도 일정 수준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지. 시헌력으로 개정을 논의한 지 100년이 훨씬 지나서 이룩한 성과야. 1782년에는 천세력을 편찬해서 이후 백 년 동안 있을 절기시각을 추산하여 싣기도 했어. 이제 완벽한 우리의 역서를 독자적으로 제작하여 운용할 수 있게 된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