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함박눈이 내리던 날들>/구연식
유년기 시절 어머니가 가을 멍석에 말리던 목화송이 같은 함박눈이 아스라이 내리면 눈 줄기 속에 들어가 하늘에서 수많은 요정이 내려오는 것 같아 신비로운 하늘로 올라가고픈 충동을 잊을 수가 없다. 눈 오는 날 하늘 높이 나는 비행기도 타 보았고, 오늘은 이렇게 고층 아파트에서 민들레 꽃씨처럼 흩어지는 눈꽃을 보고 있어도 어린 시절 눈 줄기를 타고 만나고 싶었던 요정들은 없다. 그래도 마냥 하늘 끝까지 오르고 싶던 꿈은 떠나지 않는다. 그렇게 눈 오는 날의 기억은 동화책의 첫 페이지의 그림처럼 지워지지 않아 마음은 어느 사이 애드벌룬을 타고 함박눈이 덮인 고향 마을에 가 있다.
밤새도록 함박눈이 내리는 밤이면, 때맞춰서 울던 닭 우는 소리도 얼어버린다. 이따금 야경꾼들의 딱따기 소리가 적막을 깰 뿐 고요함은 더해 간다. 이렇게 삼라만상은 백설 솜이불에 파묻혀 단잠에 취해 새벽을 기다린다. 아버지는 눈이 많이 내려 심란한지 자리끼 물만 마시면서 깊은 잠을 못 드시고 동창이 훤하기만 기다렸다가 이른 새벽에 고무래로 집 안팎의 통로를 내어놓는다. 어머니는 벌써 일어나서 군불을 때고 있다. 대문 밖에는 간밤에 눈 때문에 우리 집에 별고 없었는지 꼭두새벽에 와서 서성이다가 되돌아간 좌우 신발 구분 없는 여자 고무신 발자국이 나 있다. 동네 큰아버지 댁에 사시는 할머니 고무신 발자국이 선명하다. 마당 가운데 나락 퉁어리 부근에는 밤사이 생쥐들도 눈이 너무 많이 내려 왈칵 겁이 났는지 식량을 약탈해간 발자국은 산적들이 지나간 말발굽 흔적처럼 즐비했다.
음력 섣달이 가까워지면 아버지는 설날과 보름날까지 명절 연휴를 보내기 위해서 땔감 준비를 미리 한다. 뒷동산에 올라가 눈을 가득 얹고 있는 청솔 개비 곁가지를 쳐서 집 뒤 뜰에 쌓아두면 적당한 시기에 숨이 죽고 꼬들꼬들 말라서 봄까지는 연료 걱정은 없다. 나는 방한화도 없던 시절이라 양말 몇 켤레를 겹쳐 신고 새끼줄로 신발을 동여매고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솔가지도 얼러서 낯을 대기도 전에 그냥 부러진다. 큰 소나무 가지에 남아 있던 눈이 바람이 불면 그대로 내려와서 목덜미 뒤쪽에 떨어져 등골로 내려가면 정신이 번쩍 들도록 차가웠다. 내려오는 길 밭둑에는 동네 청년들이 콩알 속에 싸이나(청산가리)를 넣어 만든 미끼로 죽은 꿩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주워 다가 약 성분이 퍼지기 전에 신속히 내장을 제거하여 꿩 탕을 맛보기도 했다.
마을 앞 논에는 물을 가두어 얼려 놓은 썰매장은 눈 오는 날의 유일한 놀이터이다. 내 위에는 형도 누나도 없어 썰매는 구경만 했지 타보고 싶어 썰매를 직접 만들어 보기로 했다. 썰매 몸체를 만들 널판때기는 쉽게 구할 수 있어도 썰매 날을 만들 철사는 쉽게 구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마당의 빨랫줄 철사를 끊어서 만들고 끊어진 부분만큼은 새끼줄로 이어 놓았다. 그렇게 눈 오는 날 앞 논에서 썰매를 실컷 타고 바지가 온통 젖은 채로 집에 들어왔다. 아버지가 기다렸다는 식으로 나를 보자마자 빨랫줄 철사 네가 끊었냐고 하시면서 몹시 나무라신다. 나는 철사 줄의 역할을 새끼줄로 대신했으니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의 생각은 그것이 아니었다. 부엌에서 불을 때고 있는 어머니 옆에서 옷을 말리고 있으니 올라오는 김이 소여물 죽을 쑤는 김처럼 모락모락 올라온다. 다른 날 같으면 어머니도 혼낼 텐데 아버지가 크게 꾸짖어서 그냥 넘어갔다.
눈이 며칠 동안 계속 오면 산짐승들이 민가로 내려오고, 참새들도 먹이 찾기에 안달이 나서 부엌이고 마루이고 가리지 않고 날아든다. 이때 마당 한가운데 눈을 쓸고 나무 떡판 같은 널판을 비스듬히 나뭇가지로 받쳐 세운다. 그 아래 안쪽에는 나락을 참새 미끼로 깔아 놓고 받쳐 놓은 나뭇가지에 새끼줄을 묶어서 문풍지에 구멍을 뚫어 안방까지 연결한다. 이렇게 엄동설한에 참새들은 웬 떡이냐 하면서 맛있게 쪼아 먹으며 주위의 동료들까지 짹짹거리면서 불러들인다. 참새들이 떡 판 아래 적당히 모여들면 새끼줄을 안방에서 당겨 일망타진시키는 원초적인 참새 덫이었다. 이렇게 잡은 참새는 가죽을 벗겨 화롯불에 구워 먹으면 눈 오는 날 낭만과 맛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날 소년은 청년으로 훌쩍 성장하였다. 눈 오는 날이면 청년은 소년 시절의 눈꽃 속의 요정도 이제는 천사로 성장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천사가 만나보고 싶어진다. 함박눈이 폭포수처럼 퍼붓는 토요일 오후에 생면부지의 어느 천사한테 다짜고짜 익산역 대합실에서 만나자고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우연히도 그 천사가 익산역을 가는지 함박눈 속에서 내 앞을 걸어가고 있다. 걸어가다가 눈을 잔뜩 뒤집어쓴 스카프 두건을 벗으면서 얼굴을 보여준다. 갈 수 없다는 표시인지 그곳에서 기다리라는 뜻인지 예의를 갖추더니 계속 눈 속을 마냥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먼저 익산역 대합실에 도착했다. 행여나 하면서 익산역 대합실에서 눈 내리는 역 광장을 놓치지 않고 오가는 사람을 바라보면서 기다린다. 결국 천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돌아올 수 없는 숙명의 천사님은 익산역 대합실에 남겨 놓고 운명의 광주행 야간열차에 몸을 실어 쓸쓸히 내려가는데 눈보라는 나를 위로하는지 비웃는지 차창을 내리치며 따라온다. 지금도 함박눈이 내리면 스카프 두건의 천사님 얼굴이 아른거린다. (2021.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