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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리 마을길 |
팽(폭)나무가 있는 정류장 |
초가에 맺힌 千年이슬 |
아무튼 조천석은 무슨 뜻인지... 옛 문헌에 따르면 조천석은 신의 세계와 인간세계의 경계가 되는 곳이라고 합니다. 제왕운기에 따르면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이 인간의 수명을 다 누리게 되자. 홀연히 기린마(麒麟馬)(머리에 뿔이 달리고 옆구리에 날개가 달린 말로 하늘을 날을 수 있다는 상상의 말)를 타고 조천굴에 들어가서 굴을 내달은 다음, 조천석에 이르러 하늘로 올라갔다는 記事가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조천석이란 하늘로 올라가는, 하늘과 연결된 통로란 뜻이겠습니다. 그래서 서불일행이 불로초를 구하려 조천포구에 도착하고서 조천석이라 새길 때, 그들이 찾았던 조천이 바로 이 땅을 천국으로 연결된 통로라 여겼던 겁니다.
1950년대 복원 연북정
조천이란 마을 이름은 이러한 유래로 인하여 사람들에 의해 불러지기 시작했고, 마땅히 이 땅에 살던 원주민들도 그렇게 불리길 원했으니 朝天이 되었습니다. 탐라국 시대 때부터 신촌마을이나 함덕마을은 사는 사람들이 많아 일찍부터 현청소재지가 되는 등 이미 큰 마을을 이루었습니다만, 조천은 조선조에 들어와서 비로소 크게 성장하게 됩니다. 이미 육지를 잇는 포구구실을 하던 이 조그만 바닷가 마을은 조선조에 들어와서 크게 융성하면서 조천석이 있던 자리에 연북정이 들어서고, 수전소가 생기면서 당시 해군부대가 주둔하기도 했습니다. 朝天館이 서고, 조선조 6백년 동안 수많은 일천 선비...고위인사들이 이곳을 거쳐 지나가더니, 마을은 文風으로 가득차고, 그러한 아름다운 정신은 기미독립운동이란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1971년 1차복원 연북정
戀北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정자입니다.
연북정은 원래 조천성 바깥에 있던 객사로 처음 축조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습니다. 선조 23년(1590) 이옥 절제사가 성을 동북쪽으로 돌려 쌓은 다음에 정자를 그 위에 옮겨 세워서 ‘쌍벽정’이라 했다고 합니다. ‘쌍벽’이란 말은 청산도 푸르고 녹수도 푸르러서 쌍쌍이 푸르기 때문이라는, 제주도의 유다른 풍치를 담은 것이라고 합니다.
선조 32년(1599)에는 성윤문 제주목사가 그 건물을 보수하고 ‘연북정’이라 개칭하였습니다. ‘연북’은 제주의 관문인 이곳에서 북쪽에 계신 임금에게 사모의 충정을 보낸다는 뜻입니다. 이 연북정은 여러 차례 보수되었지만, 확실한 기록은 없습니다.
건물은 높이 14척의 축대 위에 동남향으로 조천포구 옆에 자리 잡았는데 건물 북쪽으로는 타원형의 성곽을 쌓았습니다.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전후좌우 퇴와 기둥 배열 방식 등이 모두 제주도 민가와 같고, 바닥은 마루를 깔았고, 내부는 모두 개방되었다. 지붕은 물매가 낮은 합각지붕입니다.
사각형 주초에 각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에 퇴보를 놓고, 여기에 직각으로 장혀를 보내어 도리를 받쳤는데 사괘맞춤한 기둥이 도리를 감싸고 있는 점이 특이합니다. 바닥은 툇간이 토상(土床)이고, 내진에는 우물마루로 되어 사방이 정자처럼 틔어있지만, 예전에는 석축 벽을 둘러서 사용한 적이 있다. 단청도 없는 간결함과 더불어, 내진고주(內陣高柱)의 보아지와 판대공의 투박한 마무리, 지붕의 물매가 낮은 것 등이 이 건물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2690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71년 8월 26일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3호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습니다.
[참고문헌]
•『북제주군지』하 (북제주군, 2006)
연북정 옛모습
<연북정 세워지게 된 또 다른 내력담>
조천읍 조천리에 사는 김병화(남, 85세)씨가 구연한 것을 현용준교수가 채록하여 1985년에 출판한 『제주도전설지』에 실었다.
조천 바닷가에 조천석이라는 큰 바위가 있는데, 배가 드나들 때에 닻줄을 걸어 두는 데 쓰이기도 하였다. 어느 해 유명한 지관이 지나다가 이 바위를 감추지 않으면 마을에 문제를 일으키는 인물이 많이 나온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바위 주변에 흙과 돌로 성을 쌓아 바위를 감추고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 이 정자를 처음에는 쌍벽정(雙碧亭)이라 불렀다가 나중에 포구에서 한양을 바라보면서 임금을 그린다는 의미로 연북정(戀北亭)이라고 했다. 그 후 이 마을에서는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연북정」은 지맥(地脈)을 끊어서 비범한 인물이 나지 않았다는 단혈 모티프의 변형이다. 제주의 다른 지역에 비해 유독 이 마을에서만 인물이 많이 난 원인을 찾기 위해 단혈 모티프를 차용한 이야기로, 문제의 인물이 태어날 기운만을 차단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변형이다.
[참고문헌]
• 현용준, 『제주도전설지』(제주도, 1985)
조천진성
조천진은 9개 진(鎭)의 외곽을 빙 둘러서 축조한 성곽 중 하나이다. 조천(朝天)은 조선 초기부터 조천방호소와 조천포수전소가 있던 방어의 요충지였는데, 처음 축조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선조 때 개축하였다.
고서의 기록을 통해 조천은 천자의 나라에 조회하러 나간다는 의미로 왕명을 받는 곳이었음을 알 수 있고, 육지로 나가는 사람들이 풍향을 관측하는 곳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조천진은 조선 초기부터 방어의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거기에다 육지에서 온 경래관의 출입이 잦았던 포구였다. 이에 따라 절제사 이옥후는 1590년(선조 23) 전 부장 서만일을 통해 성곽 일부를 개축하도록 했다고 나와 있다.
결국 조천진성은 1590년 이전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개축하면서 동북쪽으로 확장하였고, 성 내의 건물도 축조하는 등 재정비했다. 조천진성의 규모는 둘레가 430척, 높이가 10척이다.
조천리 일주 도로에서 북쪽으로 약 300m를 가다 보면 비석거리가 나오고 다시 100m를 가면 포구와 접하여 연북정과 조천진성이 위치하고 있다. 지리적 위치는 동경 126° 38′, 북위 33° 32′에 해당된다.
이원진의 『탐라지(耽羅誌)』에 의하면 ‘교수(敎授) 곽기수(郭期壽) 중창기’에 관(館)은 탁라의 동쪽 25리의 포구에 있는데, 육지로 나가는 사람들이 풍향을 관측하는 곳이다. 조천이라는 이름도 이러한 까닭이다.
절제사 이옥후(李沃候)가 부임한 다음 해인 경인년에 막부 제공과 협의한 후, 아전과 주민에게 ‘조천에 관을 둔 것은 이곳이 실로 도적들이 왕래하는 길목을 지키는 요충지이며, 왕명을 받는 곳이기 때문인데, 이같이 성이 좁고 집은 노후할 수 있는가. 농사짓는 틈틈이 개축하여 화려하게 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모두 옳다고 하였다.
이에 휘하에 있는 전 부장 서만일(徐萬鎰)이 주관하여 애를 쓰니 10월에 착공하여 섣달에 마쳤다. 성은 동북쪽으로 물러서 쌓고 그 위에 다락을 안치하여 쌍벽이라 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밖에도 조천진성에 대한 기록은 고서에 군데군데 나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38권에는 제주목 관방에 조천관방호소의 소재에 대해 기록되어 있고, 『남사록(南槎錄)』에는 조천성 둘레와 높이 등 규모와 형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밖에 『제주순무어사서계(濟州巡撫御使書啓)』, 『탐영방영총람(耽營防營摠覽)』 등에도 조천진에 대한 기록이 있다.
조천진성은 해발 1~2m의 완만한 경사면, 남고북저(南高北低)의 지형에 위치하고 있다. 진성의 북측은 해안에 접해 있고, 진성의 둘레는 128m이다. 조천진성은 대부분이 원형으로 남아 있다. 남측 성벽 위에는 북녘의 한양을 바라보며 임금의 정을 사모한다는 연북정(戀北停)이 있다.
성문은 동문지가 있고, 성곽의 외벽 높이는 2.2~4.3m, 상부 폭이 1.6~3.1m이다. 진성의 축조 방식은 제주도 현무암을 거칠게 다듬어 허튼층쌓기로 협축하여 축조했으며, 외벽의 기울기는 거의 직성형 성벽으로 단경사를 이루고 있다.
1702년(숙종 28) 제주 목사 이형상이 조천진성을 순력할 때 그린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의 「조천조점」에는 진성 가운데 연북정·군기고 등 5개 동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연북정을 제외한 당시 건물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다.
제주도의 진성 중 조선 중기 이후에 축조된 전형적인 형태이다. 성곽의 형태가 대부분 잘 보존되어 조선 시대 제주도의 관방 시설 연구에 귀중한 학술적 가치가 있다. 특히 진성의 남측 성벽 위에는 북녘의 한양을 바라보며 임금의 정을 사모한다는 연북정이 있다.
[참고문헌]
• 박천형, 「제주순무어사서계」(『서계집록』 4,규장각)
• 한국문헌학연구소, 『제주읍지』(아세아문화사, 1983년)
• 이원조,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1989)
• 이원진, 『탐라지(耽羅誌)』(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1991)
• 김상헌, 김희동역, 『남사록』(영가문화사, 1992)
• 고창석, 『탐라국사료집』(신아문화사, 1995)
• 김봉옥·신석하, 『제주의 방어유적』(제주도, 1996)
• 남도영, 『한국마정사』(한국마사회박물관, 1996)
• 이익태, 김익수 역, 『지영록』(제주문화원, 1997)
조천연대
조천연대는 서쪽으로 별도연대(직선 거리 6.7㎞), 동쪽으로 왜포연대(직선 거리 1.8㎞)와 교신했으며, 소속 별장 6명, 봉군 12명을 배치하였다.
조천리 일주 도로에서 북쪽으로 가면 포구와 접하여 타원형으로 된 조천성과 함께 연북정이 있으며, 북동쪽으로 300m 정도를 더 가면 해안에서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조천연대가 있다. 연대 동쪽으로는 신흥리 앞 해안, 서쪽으로는 원당봉 앞 해안까지 바라다볼 수 있다.
조천연대는 1975년에 복원하였으며, 상부 6.4x5.1m, 하부 7.5x6.3m, 높이 2.5m의 사다리꼴 형태를 띠고 있다. 연대 위 난간 벽은 폭 0.7m, 높이 0.6m이고, 입구의 폭은 1.8m로 다른 연대에 비하여 매우 넓다. 계단 또한 경사가 완만할 뿐만 아니라 연대의 상부까지 돌층계가 놓여 있다. 축조 방법은 일반적인 연대와 달리 거친돌 바른층 쌓기 형태를 하고 있다.
제주도 기념물 제23-5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 『제주의 방어유적』(제주도, 1996)
비석거리
조천 포구 입구에 자리 잡은 조천 비석거리는 1976년 9월 9일 제주도 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된, 제주목사나 제주판관 등 지방 관리들의 부임, 또는 이임시 이들의 공적과 석별의 뜻을 기리는 의미에서 건립한 비 7기가 남아 있는 곳을 말한다.
모두 7기의 비석이 남아 있는데, 모두 양 기둥을 세운 채 그 안에 비의 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의 주인공은 제주목사를 지낸 채동건, 백희수, 김수익, 이의식, 이원달, 제주판관을 지낸 김응빈 등으로 그들 각각을 추모하고 선정을 기리고 있다. 이 7기의 비들은 건립된 시기는 각기 다른데,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다.
옛 관리들의 기록을 적은 비(碑)들이 모여 있다. |
가까이서 본 비석들 |
조천 비석거리에 있는 상당수의 비석이 풍화 등으로 인해 심하게 부식되어 있는데, 거리에 놓인 비석 2기는 비문을 전혀 알아볼 수 없거나 비석 표면이 크게 변형되었다. 나머지 비석들도 일부 비문이 지워지거나 비석 하단이 부서진 것이 있다.
이런 종류의 비에는 흔히 ‘불망비(不忘碑)’, ‘선정비(善政碑)’, 또는 ‘거사비(去思碑)’ 등의 이름이 붙는데, 한때 이런 비가 전국적으로 크게 유행하여 탐관에 대한 비까지 세워지기도 했다. 특히 국가에서 어떠한 통제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 말기에 더욱 성행했다.
모두 7기의 비석이 남아 있는데, 모두 양 기둥을 세운 채 그 안에 비의 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비의 주인공은 제주목사를 지낸 채동건, 백희수, 김수익, 이의식, 이원달, 제주판관을 지낸 김응빈 등으로 그들 각각을 추모하고 선정을 기리고 있다. 이 7기의 비들은 건립된 시기는 각기 다른데,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다.
[참고문헌]
• 『북제주군의 문화유적』 1(북제주군, 1998)
• 「화북·조천 비석거리 ‘신음’-비문 없어지고 표면 크게 변형」(『한라일보』, 2005. 11. 16)
조천포
조천포는 지금의 조천읍 조천리에 있는 개낭개와 그 주변을 두고 이른 말이며, 「제주삼현도」에 나와 있는 조천관리라는 마을 이름을 취한 포구의 이름이다.
『남사록』에서는 조천관포라고 하였으며, 조천방호소 소속 전선 1척과 함께 병선도 감출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제주삼현도」에서는 조천관리 앞에 관포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로부터 조천마을을 일컬어 조천진, 조천관이라고 했다. 관포라고 불려지기도 했다. 육지를 드나드는 관리들이 이곳에서 풍향을 관측했다고 해서 조천이라고 불렀다.
오랜 옛날, 조천읍 신흥리에서 포구를 축조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여자들도 등어리에 돌을 지고 나르고 있다.
조천포는 조천읍 조천리에 있는 포구라는 말이다. 이 마을은 알개와 개낭개 또는 큰물성창이라는 두 개의 포구를 거느리고 있다. 알개는 겨우 테우나 들여 매는 포구에 지나지 않는다. 규모로 볼 때 조천포는 개낭개 또는 큰물성창을 가리킨다. 이 포구는 개발머리와 대섬 사이의 후미진 곳에 있다.
지금의 가장 바깥 방파제는 똥섬과 개발머리에 의지하여 만들었으며, 그 안에는 큰물성창 또는 개낭개가 있다. 일찍이 1종 어항으로 개발되어 옛 모습을 찾아볼 수 는 없다.
[참고문헌]
• 좌승훈,『포구』(나라출판, 1996)
• 고광민,『제주도 포구연구』(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2003)
황인관 와가
조천읍 조천리 고관사 버류정류장 맞은편에 있는 서울슈퍼 오른쪽으로 100여 m를 가면 길 왼쪽 방향에 있다. 황인관 가옥은 안거리 4칸, 밖거리 3칸, 목거리 4칸의 기와집이다. 삼각형 대지의 중심에 마당을 두고 북향하여 안거리가 자리 잡고 있으며 안거리 맞은편에는 사랑채가 있다. 마당 동쪽에는 목거리가 서향하여 배치되어 있으며 이문간이 갖추어진 집이다.
대지는 도로보다 낮고 세 단을 내려서면 짧은 올레와 이문간을 지나 바로 마당으로 진입하게 되어 있다. 마당에는 집 앞을 돌아가며 사각형의 네모 공간을 이루도록 잇돌이 놓여 있다. 이문간 남쪽은 눌이 놓여 있던 자리로 정원수가 심어져 있다.
안거리 |
밖거리 |
안거리 뒤의 안뒤 공간은 안거리보다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장독대와 정원수가 있다. 안거리는 가운데 상방을 두고 왼쪽으로 앞뒤에 구들과 챗방이 있으며 챗방 옆에 정지를 증축하였다.
상방 오른쪽으로 앞뒤에 마루와 구들이 있고 그 옆에 큰 구들이 위치하여 뒤쪽에 고팡을 두었다. 일반적인 제주 초가와는 다르게 굴묵을 큰 구들과 고팡 사이의 내부에 설치하였다. 지붕은 우진각 기와지붕으로 2고주 7량 집이다.
밖거리는 가운데 상방을 두고 왼쪽으로 앞뒤에 연속하여 구들이 있다. 상방 오른쪽으로 앞뒤에 마루방과 구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난방 공간인 굴묵은 측벽에 붙여 설치하지 않고 뒷벽에 설치하였다.
지붕은 우진각 기와 지붕이며 2고주 7량집이다. 목거리는 왼쪽으로부터 앞뒤로 구들과 정지, 상방 그리고 헛간 순으로 배치된 4칸집이다. 상방 뒤쪽에는 난간이 설치되어 있으며, 헛간은 방으로 개조하였다. 지붕은 안거리, 밖거리와 같은 기와 지붕이다.
1978년 11월 14일 제주도민속자료 제4-5호로 지정되었다.
제주도의 기와집은 매우 희소한 민가 형식이다. 황인관 가옥은 전래의 민가 형식을 기본으로 하여 19세기 중반에 집중적으로 창건된 새로운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주로 제주목과 정의현, 대정현, 애월진, 화북진, 조천진 등 진 취락에서 많이 지어지고 있는 이 새로운 형식은 새로운 시대적 요구를 한정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제주 와가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보존 가치가 크다고 판단된다.
[참고문헌]
• 『제주의 문화재』(제주도, 1998)
김해김씨 삼현파 조천리 동족촌 전경이다.
김석윤 와가 |
조규천 와가 |
좀녀들이 물질이 끝난 후 불을 피고 젖은 몸을 말리던 곳입니다.
불턱
신흥리와 경계를 이루는 관콧 바닷가에 <불턱>이 있습니다.
해안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 <엉장매>를 지나 <관콧>에 다다르기 직전 도로변에 있습니다.
불을 쬐며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
오고 갔을까요? |
제주 3·1운동
제주 3·1운동은 1919년 3월 21일부터 같은 해 3월 24일까지 4일간 조천 지역을 중심으로 인근의 함덕·신흥·신촌 등지에서 일어난 항일운동이다.
1919년 3월 1일에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 시위운동의 영향을 받아 제주 지역에서도 만세 시위운동을 통해 독립 의지를 알리고자 하였다.
조천의 유림 세력들은 전국의 독립운동 시위 소식을 접하고 독립운동을 모색하던 중 당시 조천 출신이었던 김장환(金章煥)이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기고 귀향하여 서울의 시위 소식을 알린 것이 발단이 되었다.
김장환·김시범(金時範)·김시은(金時殷) 등은 3월 17일경 조천리 미밋동산에서 거사를 결행할 것을 다짐하고 3월 19일까지 고재륜(高載崙)·김형배·김연배·황진식(黃鎭式)·김용찬·백응선(白膺善)·박두규·이문천(李文千)·김희수(金熙洙)·김경희(金慶熙)·김필원(金弼遠) 등 11명의 동지를 규합하였다. 거사일은 김시우의 기일인 3월 21일로 정하고 대형 태극기 4장과 소형 태극기 300여 장을 제작하였다.
3월 21일 날이 밝자 미밋동산에 태극기를 꽂은 김시범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김장환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조천 비석거리까지 행진하였다. 시위대는 제주성 내를 향하여 행진하던 중 신촌에서 경찰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김시범·김시은·김장환 등 13명이 연행되었다.
3월 22일에는 조천장터에서 백응선·박두규·김필원의 주도하에 200여 명이 전날 연행된 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2차 만세시위를 벌였으나 주동자는 연행되고 시위대는 강제 해산되었다. 3월 23일에도 연행된 자들의 석방을 다시 요구하며 조천 오일장터에서 백응선·김연배·이문천의 주도로 3차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때 백응선·이문천 등 8명이 연행되었다.
3월 24일 조천 오일장날에도 김연배를 중심으로 조천장터에서 약 1,500여 명의 주민이 연행된 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4차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때 김연배 등 4명이 체포되고 만세운동의 핵심인물 14명이 모두 검거됨에 따라 만세 시위운동은 일단락되었다.
만세 시위운동으로 1심에서 29명이 기소되어 그중 23명이 1919년 4월 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실형을 선고 받았다. 다시 공소하여 1919년 5월 29일 대구복심법원 형사 제1부에서 김시범과 김시은은 각각 1년형, 김용찬과 고재륜은 각각 6월형을 선고 받았다. 옥고를 치르고 감옥에서 나온 14명은 1921년에 동미회(同味會)를 조직하였고, 조천에서 교직에 전념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제주 3·1운동은 이후 민족 해방운동의 일선에서 활약하던 제주 출신 인물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제주 지역에서 민족 교육운동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김동전, 「제주인의 3·1운동과 그 영향」 (『제주도사연구』창간호, 제주도사연구회, 1991)
섯동네 풍경
계낭개 풍경
신안동 풍경
그때 그 시절을 아십니까? 조천극장...
한승훈님이 담아 온
2010년 1월 13일의 풍경. 조천리
첫댓글 세억아! 유래가 깊은 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시방도 국제적인 비지니스를 하고 있으니 분명 역사에 뭔가를 남길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곧기는 그렇다만...
대정은 본명이 이승진이며 원 고향은 대구인 김달삼의 터전이었고,
조천은 이덕구이던가?
김달삼은 대정중학교 교사였고,
이덕구는 조천중학교 교사였지...
아무튼 氣가 센 동네가 맞긴 맞다!
이재수의 난을 일으킨 동네, 대정!
제주 3 1 만세운동의 주동지인 조천!
양훈아!
아마 나도 고향에서 활동하던 선배들의 기질을 쪼끔은 가진거 담따마는~~~
옳다고 생각하면 막~고집스럽게 밀어붙이고 그래서는 안된다고 우기는 x벨레기 성격 같은것들이.......
엣날 함덕사는분들은 성안에 올때 조천을 넘어가야 하는데 잘못허영 몰매나 맞을까봐 조천 지나갈땐 동새벽이나 조심
또조심 허영 다녓덴핸게..
대정현 출신인 나도 조천 갈땐 조심해사켜!!! 옛말에 아다마는 조땡이고 주먹은 대정이엔 허드라마는~~~
우리겉이 허드렁헌 출신덜은
이래착 저래착 허당 몰매 맞임직 허다! ^^
상훈아 옜날 대정사람들이 조천에 원정 (토벌?)와서 한번 깽판 치고 간거이 무슨선이고? 조사허영 고라도라
만약,옜날 만세운동 안해시민 쪽 팔릴뻔 헀지.육지아이덜한테.....이덕구의고향은 신촌이고그의모친이조천 김씨할망이여,동아일보초대주필이고 창간사를쓴 (돈빼고)실재창간의주역도 조천김명식선생이여.다인척이주.그당시독립운동의일환으로칼 막스의논리를 수단으로 삼아 많은 후유증도있고.하여튼 역사의 고장임은맞다.
이덕구의 고향이 신촌이었구나!
내가 남은 생애동안 소설을 쓴다면
이덕구의 일생을 한번 써보고 싶다!
무엇을 고민했었는지...
세억이도 시대가 바뀌어서 그렇지, 옛날에 태어났더라면 몇 놈 오라가라 허는 높은 자리에서 만세운동보다 더 대단한 일을 앞장서서 해실꺼여!!!
훌륭한 생각이여,내가 적극 지지하마,자료 야사,및 당대 지가 잘 조사 하였다는 인사들 까지 인터뷰 하게 주선하마.교육의힘을 잘 알았던 인물이었기에 마을 유지들을 움직여 학교를 세우고 훈도 하고,아무튼 이념을 빼고도 조명을 한번쯤 비추어볼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진다
글쎄... 소설을 쓸 실력이 되나모르겠지만,ㅎㅎ
암튼 기회가 생기면 부탁해야겠네.
흑이든 백이던간에
사람을 이념으로만 매도해 버리는건 너무 잔혹하다는 생각이 드네만.
조심스럽기는 시대가 바뀌었다해도 녹녹치가 않은 세상일세.
조천?나 많이도 맞았다 이중 쩜푸로 옆차기,주먹 아이고 돌패기덜 생각만 남쪄!!!!!
핸드볼은 안 허고 태권도질 했구나...ㅎㅎ
시대를 앞서가는 선현들의 고장 조천, 역사의 중심지 조천, 국제무대를 좁다하고 뛰어다니는 세억의 고향 조천, 하여튼 조천은 조찬(?)사람들이 번성하는 곳인가 브와~~.
조찬사람덜...^^
어떤 분은 거시기가 천개있는 마을이라...ㅎㅎ
나중에라도 우리들각자의 고향 에 mb식구들과 함께 올래길 산책을 갑시다,이제 지나온 세월이 훨씬 길어진 각자의 올래에서 서로 이야기합시다,시린가슴의 상처와,다못한한 꿈의 아쉬움과,어였뻤던 우리의 누이와 청운을 가졌던 교정의 느티나무를 바라보며 어덧게 잘늙어가고,무었을 할것인가를,(아마 김영철 학장은 그꿈을 가장 많이 이룬것같아서 부러울 뿐입니다)
경허자. 이녁 동네 올래길 이신 사람들이 앞장서불라. ubkim 지존께서 선도하면 더 조키여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