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무대 쪽에서 거대한 바람이 불어왔다. 18일 밤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 들어찬 8000여 관객은 노래의 날개 위에 올라탔다. 육중한 여객선을 끌어내린 검푸른 대서양이 내려다보이듯 아찔했다. 171㎝의 키에 깡마른 몸매. 불과 1.5㎝의 성대를 울리고 나온 소리가 장내 가득 양력(揚力)으로 불어닥치고 있었다. 옷깃이 날리는 듯했다. 영화 ‘타이타닉’에 혼을 불어넣었던 노래 ‘My Heart Will Go On’은 이미 악보에 그려진 음표 무더기가 아니었다.
18일 오후 9시부터 열린 팝 가수 셀린 디온(39)의 내한공연. 절창을 하는 앙상하게 마른 얼굴 위로 묘하게도 문득 다부진 꼬마 아이의 얼굴이 스쳤다. 찌푸린 미간과 불끈 쥔 주먹에서는 열두 살 때부터 늘 1등이어야 하고 무대 위에서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완벽해야 했던 슬픈 결의 같은 것이 느껴졌다.
1968년 캐나다 퀘벡 주 샤를마뉴에서 14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꼬마는 20년 뒤 팝의 여제가 됐다. 2004년 이미 여성 가운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상 가장 많은 앨범을 판매한 이가 됐다. 2억장 이상의 음반을 팔며 세계인이 기억하는 목소리 가운데 하나가 됐다.
▶하나뿐인 백인 디바
팝에서 디바하면 곧 흑인 여성이었다. 아레사 프랭클린, 휘트니 휴스턴, 머라이어 캐리…. 셀린 디온은 잔 기교보다는 시원시원하고 맑게 뻗어나가는 목소리로 승부하는 독보적인 백인 디바다. 디온은 ‘사상 최고의 목소리’ ‘최고의 보컬’을 묻는 각종 해외 매체의 설문조사에서 늘 10위권 이내를 유지해 왔다.
소니비엠지뮤직코리아 이세환 과장은 “디온은 그와 함께 3대 디바로 불리는 휘트니 휴스턴이나 머라이어 캐리와 달리 가장 안정적인 개인생활과 음악적 열정으로 디바가 본받아야 할 디바의 모습을 보인다”고 말했다. 디온은 약물 문제와 불안정한 결혼생활에 시달린 휘트니 휴스턴이나 갈수록 스타성과 쇼맨십에 기대 순수함을 잃었던 머라이어 캐리와 달리 늘 초심을 잃지 않았다.
흑인음악 웹진 리드머의 강일권 편집장은 “디온은 2000년대 흑인음악의 득세 속에서도 백인 보컬 스타일을 고수했으며 맑은 음색과 풍부한 성량으로 가창력 논란을 달고 다니지 않는 디바”라고 평가했다.
12세 때 가족과 함께 만든 첫 곡을 오빠가 음반 제작자인 르네 앙젤릴에게 보냈다. 앙젤릴은 디온의 음성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그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본 앙젤릴은 자신의 집을 저당 잡혀 디온의 앨범을 제작했고 후에 남편이 됐다. 당시 발표한 데뷔 앨범으로 그는 단숨에 퀘벡 주의 스타로 떠오른다.
▶퀘벡 출신 가수, 세상의 절반을 흔들다
82년 일본에서 열린 야마하 세계대중음악페스티벌에 참가한 그는 최우수 퍼포머와 최우수곡상을 거머쥐며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88년에는 유럽 대중음악의 격전장인 유로비전송콘테스트에서 수상했다. 그러나 프랑스어로 노래하던 그에게 미국 시장 성공은 먼 일이었다. 열여덟 살에 마이클 잭슨의 공연을 처음 본 그는 앙젤릴에게 잭슨 같은 스타가 되고 싶다고 속삭인다. 89년 고작 세 달 만에 완벽한 영어 습득에 성공한 그는 완벽한 미국 가수로 거듭났다.
디온은 걸출한 프로듀서 데이비드 포스터의 도움으로 90년 발표한 영어 데뷔 앨범으로 빌보드 싱글차트 100위권 내에 진입하는 수확을 거둔다. 91년에는 걸프전 참전 용사를 위한 음악 프로젝트 ‘Voices that Care’에 참여하기에 이른다.
디온이 본격적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같은 해 피보 브라이슨과 함께 부른 동명 애니메이션 주제가 ‘미녀와 야수(Beauty and the Beast)’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부터다.
디온이 ‘미국 가수’가 돼가면서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캐나다의 고정 팬들은 하나 둘 그의 곁을 떠나기 시작했다. 디온은 퀘벡 주의 음악상인 펠릭스 어워드 무대에서 ‘올해의 영어권 가수’ 부문 수상의 영예를 공개 거부하면서 오랜 팬들을 되찾는다.
스물여섯 살 연상의 매니저 앙젤릴과 사업을 넘은 연인 관계로 발전하면서 그는 다시 한번 팬들의 따가운 시선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94년 열린 둘의 결혼식을 캐나다 방송은 생중계했다. 93년 앨범에 수록된 ‘The Power of Love’의 대대적인 성공이 사랑을 따라왔다.
한편 95년 발표한 불어 앨범 ‘D’eux’는 프랑스어로 가창된 음반 가운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작품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세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불어와 영어권 모두를 아우르는 독특한 디바가 돼 있었다.
▶쇼는 계속돼야 한다
96년에는 에릭 카멘의 원곡을 뛰어나게 다시 부른 ‘All by Myself’와 발라드 곡 ‘Because You Loved Me’ 등이 잇따라 성공하며 최고의 나날을 보낸다.
영화 ‘타이타닉’ 주제가 ‘My Heart Will Go On’은 97년에 나왔다. 디바로서 정상의 자리를 밟은 그는 98년 솔의 대모 아레사 프랭클린을 비롯해 머라이어 캐리, 글로리아 에스테판, 샤니아 트웨인과 함께 VH1 디바스 라이브 공연을 펼치기도 한다. 디온은 이미 평론가로부터 보컬리스트로서의 기술적 역량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2000년 남편 앙젤릴의 후두암 발병으로 휴식기에 돌입한 디온은 그들의 결혼생활에 대한 오보를 낸 매체에 소송을 걸어 보상금을 미국 암협회에 기증하기도 했다.
2002년 화려한 재기를 하지만 주류 팝시장은 이미 힙합 리듬에 기반한 흑인음악이 접수한 상태였다. 캐리나 휴스턴에게처럼 디온에게도 설 자리는 좁아보였다.
그는 결단하고 실행했다. 라스베이거스 시저스팰리스호텔의 4000석 규모 공연장에서 ‘A New Day’쇼를 시작하기로 한 것. 1주일에 5일씩 3년간 라이브를 한다는 무모해 보이는 계획이었다. 시르크뒤솔레이유(태양의 서커스)의 ‘O’ 등을 제작한 프랑코 드라곤이 메가폰을 잡아 디온의 노래에 화려한 무대를 접목한 쇼로 2003년 3월 25일 출범한 이 쇼는 거의 매회 매진 행렬을 이어가며 엄청난 수익을 올린다.
이 덕에 디온은 한 조사에서 2005년 한 해 동안 여섯 번째로 많은 돈을 번 스타로 기록되기도. 결국 계약 연장으로 5년간의 장기 공연 끝에 지난해 12월 15일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디온은 한 인터뷰에서 “가족과 집을 떠나야 했지만 사춘기를 잃어버린 데 대해 후회하지는 않는다”며 “난 가수가 되는 꿈만으로 족했다”고 술회했다.
18일 내한공연 중반 디온은 “위대했던 록밴드 퀸, 그리고 프레디 머큐리에게 바친다”며 퀸의 ‘The Show Must Go On’을 깜짝 선사했다. 무대 옆 화면에는 프레디 머큐리의 생전 영상이 이어졌다. 20년 음악인생을 이어온 디바는 ‘쇼는 계속돼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쇼는 오랫동안 멈추지 않을 것 같다.
임희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