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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와 백합
 
 
 
카페 게시글
시와 저자와 만남 스크랩 허난설헌의생애
은하수 추천 0 조회 72 21.02.24 11:29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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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1.02.24 11:38

    첫댓글 허난설헌은 15세에 김성립과 결혼했다. 김성립은 안동 김씨로 그녀보다 한 살이 많았으며 명문 가문의 자제였다. 김성립은 남인계에 속한 인물이었고 사상적으로 성리학에 더 고착되어 있고 보수적이었다. 자유로운 친정에서 가부장적인 가문으로 시집 온 허난설헌은 시집살이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보수적인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시를 쓰는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달갑지 않은 존재였고 허난설헌의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이해하지 못해 갈등의 골이 깊어갔다. 남편 김성립 또한 아내를 버거워했고 그녀를 보듬어주기보다는 과거공부를 핑계 삼아 바깥으로 돌며 가정을 등한시하였다. 허난설헌은 결혼 초기에 바깥으로 도는 남편을 그리는 연문의 시를 짓기도 하였으나, 어느 순간 김성립과의 결혼에 회의를 느끼고 남성 중심 사회에 파문을 던지는 시를 짓기도 하였고, 때로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신선의 세계를 동경하며 현실의 불행을 잊으려 하였다. 그러는 사이, 허난설헌의 친정은 아버지 허엽과 따르던 오빠 허봉의 잇따른 객사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더군다나 허난설헌은 두 명의 아이를 돌림병으로 잇달아 잃고 뱃속의 아이를 유산하는 불행을 당한다

  • 작성자 21.02.24 11:40


    여성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 시어머니의 학대와 무능하고 통이 좁은 남편, 몰락하는 친정에 대한 안타까움, 잃어버린 아이들에 대한 슬픔 등으로 허난설헌은 건강을 잃고 점차 쇠약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시로서 자신의 죽음을 예언했다. 그리고 그 예언은 적중해 허난설헌은 27세의 나이로 목숨을 거두었다. / 복원된 허난설헌 생가 /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 안내판에는 이 공원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은 조선중기 정치적, 사회적 개혁을 지향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지은 교산 허균(1569년~1618년)의 혁신적 사상을 선양하고, 그의 누이이자 조선시대 국내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천재성을 인정받았떤 유명 여류시인 날선헌 허초희(1563년~1589년)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곳이다. 이곳에는 허초희가 태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는 허난설헌 생가터(강원도 문화재자료 제59호)를 비롯하여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전통차 체험관, 허난설헌 동상, 허씨5문장 시비, 호서장서각터 등이 위치하고 있다.[출처]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과 허난설헌의 생애|작성자 빛과소금




  • 작성자 21.02.24 15:15

    경포호 가는 길 / 김 효 선

    포근한 햇살이 / 실루엣처럼 감겨오는
    한낮의 시간속에 / 달팽이 배밀이하듯 / 경포호를 걷는다.

    물빛이 하늘 빛이고 / 하늘빛이 물빛 된
    구별 없는 저 쪽빛 / 사백년 시간 거슬러 살다간 / 여인의 마음빛일까
    강릉 사람 허균과 / 그 누이 허난설헌의 / 생애만큼이나 시리고 시리다

    삼종지도가 숙명이던 시절 / 날개 꺾인 / 천재 여류시인은
    피다만 꽃봉오리 / 경포호 푸른물이 되었구나

  • 작성자 21.02.24 15:23

    <허난설헌> ◉ 본명 : 허초희 ◉ 호 : 난설헌 ◉ 시대 : 조선 선조 때
    조선시대 여성으로는 신사임당(1504~1551, 이율곡 모친)과 허난설헌이 유명하다 한많은 생애를 살다가 젊은 나이에 요절한 (화병인 듯) 허난설헌을 소개코코자 합니다 먼저 가족사를 설명하면, 허엽의 자녀들(1617~1680, 64세) - 허성(1548~1612, 65세) ㅡ허봉(1551~1588, 38세) ㅡ허난설헌(1563~1589, 27세) ㅡ허균(1569~1618. 50세) - 허난설헌의 집안은 명문 가문 이었지만 불운 했다.

    부친인 허엽은, 토정비결의 저자인 토정 이지함(1517~1578)과 같은 해에 태어났는데 벼슬로는 오늘 날 도지사급인 관찰사를 지냈다. 배가 다른 큰 오빠인 허성은 광해군 때 오늘날 장관급인 이조판서를지냈으며, 둘째 오빠인 허봉은 창원부사 (종 3품 벼슬, 군수는 당시 종4품)를 지냈으나 선조1년 때 동인의 선봉이되어 서인의 우두머리이던 병조판서 율곡 이이를 탄핵하다가 종성에 유배됐고,이듬해 풀려 났으나 정치에 뜻을버리고 방랑생활을 하다가,선조 21년인 1588년에 38세의

  • 작성자 21.02.24 15:29

    젊은 나이로 금강산 인근에서 죽었다. 허균은 허난설헌의 동생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었고, 광해군 때 역모죄 혐의로 거열형을 당하고 사지가 갈갈이 찢겨져 죽었다 허균은 판서 즉 장관을지냈으나 당시 실세이던 이이첨에게 이용 당하다가 이이첨의 눈밖에나 역모죄라는 혐의를 뒤집어 쓰고 억울하게 죽은듯하다 (개인적인 생각) 허난설헌은 조선시대 때 여성으로서는 두번째 가라면 서러울정도로 시를 잘썼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는 결혼을 한후부터 큰 불행이 찾아왔다

    남편인 김성립은 과거에 낙방하기 일쑤였고, 부인보다 학문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시기와 질투 끝에 난봉꾼 생활을 하다시피 했고 시어머니는 여자가 글을 써서 어디다 써먹느냐고 성화를 냈다. 또한 아들이 과거에 실패한 것도 훗날 허난설헌의 아이들이 죽었을 때에도 집안의 모든 불 행이 허난설헌 때문에 일어 났다면서 구박을 했다. 허난설헌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두 아이를 전염병으로 잃었고 뱃속에 태아 또한 유산되는 아픔을 겪었으며, 1580년에 부,1588년에는 동생인 허난설헌의 스승 역할을하며 글 공부를 가

  • 작성자 21.02.24 15:43

    가르쳐 주고 누구보다 헌난설헌을 이뻐했던 오빠인 허봉이 죽는 불운을 겪었다. 허난설헌이 죽은지 한참 뒷일이지만 동생인 허균 또한 역모죄로 죽었다. 허난설헌은 남편과 시어머니의 구박 때문인지 27세라는 나이에 단명했다 그녀는 죽의면서 허균에게 그녀가 쓴 시 모두를 불태우라고 부탁하자 허균은 전부 불을태웠으나 다행히 허균이 외우고있었던 시와 친정에 있었던 시들을 모아 <난설헌> 집을 냈는데 우리나라에서 보다 중국에서 유명해졌다고 한다
    *초당 두부 / 오늘날 강원도 지방 특히 강릉지방은 초당 두부가 유명해서 경포대 처남집에 갈때는 꼭 초당 두부를 먹는다 초당두부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가지가 전해 내려 오는데, 첫번째는, 이 초당두부의 역사적 유래는 허난설헌과<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아버지인 허엽( 1517∼1580)이 강릉 부사로 내려왔다가 바닷물로 간을 맞추며 두부를 만들면서 시작됐다고전해진다. 허엽은 관청 뜰에 있는 우물물의 맛이 좋자 이 물을 이용해 두부를 만들게 됐고, 끓인

  • 작성자 21.02.24 15:46

    콩물을 응고시키기 위해 동해 바닷물을 길어다 썼다. 이후 강릉부사가 손수만든 두부가 담백하고 고소해 맛있다는 소문이 났고 강릉 사람들은 허엽의 호인 초당을붙여 초당두부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두번째는, 그러나 실제 초당두부의 기원은 6.25 전쟁 무 렵으로 보는것이 정설로,당시 강릉일대의 청년들이 치열한 전지였던 동부전선에 투입되면서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다. 이에 남편을잃고 생계가 막막해진 아내들이 두부를 만들어 장에서팔았다고 한다. 이후 1980년대 초반 초당마을에서 두부를 만들어파는 가구가 증가하기 시작했고,1986년 초당마을에서 처음으로 두부를 메뉴로한 원조 초당순두부집이 영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초당두부는 허엽과 관련된 유래로 더 알려져 있는 듯 보인다

  • 작성자 21.02.24 15:48

    http://heo.or.kr/note7/board.php?board=gman&command=body&no=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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