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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름다운 60대 원문보기 글쓴이: 달빛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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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김씨 서운관정공파(書雲觀正公派) 묘역.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맨 먼저 허난설헌의 묘소와 함께 시비가 눈에 들어오고 그 옆으로 최근에 지은 듯 깔끔한 재실이 보인다. 제막식을 위해 설치한 천이 아직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지은지 얼마 되지 않았는가 보다.
본래는 오른쪽으로 500m 정도의 위치에 있었던 것을 중부고속도로 건설로 인하여 현재의 위치에 새롭게 조성한 묘역은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맨 앞에 자리한 묘소가 난설헌 허씨의 묘소이다.
8살 때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어서 신동으로 일컬어진 조선조에서 뛰어난 여류 시인 허난설헌(1563∼1589). 형제자매들이 모두 시재가 뛰어난 집안에 태어나 동생 교산 허균과 함께 조선조 삼당시인의 한 사람인 손곡 이달의 문하에서 시를 익힌 우리 역사상 걸출한 여류시인 난설헌 허씨! 본명이 전해지는 경우가 거의 없는 조선시대 여인으로 초희(楚姬)라는 이름에 경번(景樊)이라는 별호까지 전해지는 여인이지만 그의 삶은 여느 여인들과 다른 한과 애통의 연속이었다. 15세에 金誠立과 결혼하였으나 결혼생활은 원만하지 못하였다고 전해진다. 김성립에 대하여 전해지는 이야기는 많지만 안동 김씨 후손들의 입장에서는 별로 달가워 할 내용이 아니니 싣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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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난설헌의 묘비에는 정부인양천허씨지묘(貞夫人陽川許氏之墓)라고 외줄로 써져 있으니 혼자 외롭게 누워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뒤쪽 계단으로 한 번 더 올라가면 남편이었던 김성립의 묘소가 있으니, 난설헌 사후에 새로 맞이한 남양홍씨와 합장으로 모셔저 있다.
물론 원래의 묘소에서부터 이렇게 따로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살아서 남편과 살가운 정 한번 제대로 나누지 못했던 듯 한데, 죽어서도 남편 옆에 눕지 못하고 외로이 홀로 누워 있으니 그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 없다.
그 외로움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난설헌의 묘 앞에는 작은 봉분 둘이 나란히 있으니, 어린나이에 세상을 등진 어린 두 자매의 무덤이다.
딸아이를 먼저 앞세우고, 다음 해에 또 아들을 앞세웠으니 가슴을 도려낼 그 애통함은 어느 누가 짐작할 수 있으랴. 자식 잃은 어미의 마음도 마음이려니와 조카들을 잃은 외삼촌도 그 슬픔의 무게 결코 가볍지 않았을 것다.
이에 손아래 누이인 난설헌에게 직접 시를 가르쳤던 오라버니 하곡 허봉은 조카의 무덤에 넣을 묘지에 애통한 자신의 마음을 글로 남겼다.
喜胤(희윤)의 墓誌(묘지).
태어나서 이삭도 피워보지 못한 아이 희윤아!
아버지는 성립이라 하니 나의 매부이고,
할아버지는 瞻(첨)이라 하니 나의 벗이다.
눈믈을 흘리며 희윤이를 위하여 銘(명)을 짓나니
밝고 밝은 그 얼굴
맑고 맑은 그 눈
만고의 슬픔을
-한줄기 울음에 부친다.
喜胤墓誌(희윤묘지)
苗而不秀者喜胤(묘이불수자희윤)
父曰誠立余之妹壻也(부왈성립여지매서야)
祖曰瞻余之友也(조왈첨여지우야)
涕出而爲之銘曰(체출이위지명왈)
皎皎其容 晳晳其目(교교기용 석석기목)
萬古之哀 寄一哭(만고지애 기일곡)
한 해 전에 이쁜 조카 딸 떠나보내고, 이어서 조카 희윤이를 보낸 슬픔을 몇 줄 묘지에 남겼다.
눈만 감으면 떠오르는 곱디 고운 얼굴과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한줄기 울음으로도 다할 수 없었으리라. 아버지가 아닌 외삼촌의 마음도 이럴진대 어린 자식 앞세운 어머니의 비통함은 말해 무엇하랴.
난설헌은 자식 잃은 설움을 哭子(곡자:자식을 위해 울다)라는 시에 담았으니, 읽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去年喪愛女(거년상애녀)
지난 해 사랑스런 딸 잃고
今年喪愛子(금년상애자)
올해 사랑스런 아들 잃었네.
哀哀廣陵土(애애광릉토)
슬프고 슬프다. 광주 땅에는
雙墳相對起(쌍분상대기)
무덤 둘이 마주하고 있구나.
* 廣陵(광릉) : 광주의 옛 이름.
蕭蕭白楊風(소소백양풍)
쓸쓸히 백양나무에 바람 일면
鬼火明松楸(귀화명송추)
도깨비불 무덤가에 번쩍이니
紙錢招汝魂(지전초여혼)
지전 태워 너희 혼 부르고,
玄酒存汝丘(현주존여구)
너희 무덤에 맑은 물 올려둔다.
*松椒(송초) : 소나무와 가래나무라는 뜻으로 무덤을 말함.
*紙錢(지전) : 돈 모양의 종이. 혼을 위로하는 의식에서 불태운다.
*玄酒(현주) : 맑은 물을 말함.
비록 내 뱃속에 아기가 있지만
安可糞長成(안가분장성)
어찌 장성하길 바라리오.
浪吟黃臺詞(낭음황대사)
부질없이 황대사 부르며
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
피토하며 울다가 서글프게 울음 삼킨다.
화불단행이라 했던가?
난설헌은 딸을 잃은 다음 해에 또 아들을 잃는다.
또 배 속에 있던 아이조차 유산하는 불행을 당하였다.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 했거늘
어리고 어린 아이 둘을 연이어 잃었으니 뱃속의 아이까지 잃었으니
그 애통함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하랴.
夢遊廣桑山(몽유광상산)
꿈속에 광상산에 노닐다.
碧海漫瑤海(벽해만요해)
푸른바다가 요지에 잠겨들고
靑鸞倚彩鸞(청란의채란)
파란 난새는 아롱진 난새에 어울렸어요.
芙蓉三九朶(부용삼구타)
스물이라 일곱송이 부용꽃은
紅墮月霜寒(홍타월상한)
붉은 빛 다 가신 채 서리찬 달 아래에......(雨田 辛鎬烈 譯)
현실에서
남편인 김성립과의 불화, 고부 갈등, 어린 자식들의 죽음과 유산 등, 그야말로 견디기 감내하기 힘든 고통과 시련들로 가득한 자신의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을 위와 같은 시로 승화시켰다.
넓고 넓은 세상 천지에서 하필이면 조선이라는 좁은 곳에 태어나고, 조선에서도 하필이면 여인으로 태어나고, 많고 많은 남자들 중에 하필이면 김성립과 결혼하게 된 세 가지의 한을 품은 난설헌 허씨.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나 한 듯
"부용꽃 스물이라 일곱 송이
차디찬 달 빛 아래 붉은 빛 떨어뜨린다."
는 시를 남기고 스물 일곱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하직한다.
佳人薄命(가인박명)이란 옛말이 그르지 않음을 재삼 확인하며
성종태실이 있었던 태전동으로 발길을 옮겼다.
▲ 난설헌시비 앞에서 필자와 박광민 한국어문회 연구위원님.
첫댓글 허난설헌은 15세에 김성립과 결혼했다. 김성립은 안동 김씨로 그녀보다 한 살이 많았으며 명문 가문의 자제였다. 김성립은 남인계에 속한 인물이었고 사상적으로 성리학에 더 고착되어 있고 보수적이었다. 자유로운 친정에서 가부장적인 가문으로 시집 온 허난설헌은 시집살이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보수적인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시를 쓰는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달갑지 않은 존재였고 허난설헌의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이해하지 못해 갈등의 골이 깊어갔다. 남편 김성립 또한 아내를 버거워했고 그녀를 보듬어주기보다는 과거공부를 핑계 삼아 바깥으로 돌며 가정을 등한시하였다. 허난설헌은 결혼 초기에 바깥으로 도는 남편을 그리는 연문의 시를 짓기도 하였으나, 어느 순간 김성립과의 결혼에 회의를 느끼고 남성 중심 사회에 파문을 던지는 시를 짓기도 하였고, 때로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신선의 세계를 동경하며 현실의 불행을 잊으려 하였다. 그러는 사이, 허난설헌의 친정은 아버지 허엽과 따르던 오빠 허봉의 잇따른 객사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더군다나 허난설헌은 두 명의 아이를 돌림병으로 잇달아 잃고 뱃속의 아이를 유산하는 불행을 당한다
여성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 시어머니의 학대와 무능하고 통이 좁은 남편, 몰락하는 친정에 대한 안타까움, 잃어버린 아이들에 대한 슬픔 등으로 허난설헌은 건강을 잃고 점차 쇠약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시로서 자신의 죽음을 예언했다. 그리고 그 예언은 적중해 허난설헌은 27세의 나이로 목숨을 거두었다. / 복원된 허난설헌 생가 /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 안내판에는 이 공원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은 조선중기 정치적, 사회적 개혁을 지향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지은 교산 허균(1569년~1618년)의 혁신적 사상을 선양하고, 그의 누이이자 조선시대 국내는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천재성을 인정받았떤 유명 여류시인 날선헌 허초희(1563년~1589년)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곳이다. 이곳에는 허초희가 태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는 허난설헌 생가터(강원도 문화재자료 제59호)를 비롯하여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전통차 체험관, 허난설헌 동상, 허씨5문장 시비, 호서장서각터 등이 위치하고 있다.[출처]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과 허난설헌의 생애|작성자 빛과소금
경포호 가는 길 / 김 효 선
포근한 햇살이 / 실루엣처럼 감겨오는
한낮의 시간속에 / 달팽이 배밀이하듯 / 경포호를 걷는다.
물빛이 하늘 빛이고 / 하늘빛이 물빛 된
구별 없는 저 쪽빛 / 사백년 시간 거슬러 살다간 / 여인의 마음빛일까
강릉 사람 허균과 / 그 누이 허난설헌의 / 생애만큼이나 시리고 시리다
삼종지도가 숙명이던 시절 / 날개 꺾인 / 천재 여류시인은
피다만 꽃봉오리 / 경포호 푸른물이 되었구나
<허난설헌> ◉ 본명 : 허초희 ◉ 호 : 난설헌 ◉ 시대 : 조선 선조 때
조선시대 여성으로는 신사임당(1504~1551, 이율곡 모친)과 허난설헌이 유명하다 한많은 생애를 살다가 젊은 나이에 요절한 (화병인 듯) 허난설헌을 소개코코자 합니다 먼저 가족사를 설명하면, 허엽의 자녀들(1617~1680, 64세) - 허성(1548~1612, 65세) ㅡ허봉(1551~1588, 38세) ㅡ허난설헌(1563~1589, 27세) ㅡ허균(1569~1618. 50세) - 허난설헌의 집안은 명문 가문 이었지만 불운 했다.
부친인 허엽은, 토정비결의 저자인 토정 이지함(1517~1578)과 같은 해에 태어났는데 벼슬로는 오늘 날 도지사급인 관찰사를 지냈다. 배가 다른 큰 오빠인 허성은 광해군 때 오늘날 장관급인 이조판서를지냈으며, 둘째 오빠인 허봉은 창원부사 (종 3품 벼슬, 군수는 당시 종4품)를 지냈으나 선조1년 때 동인의 선봉이되어 서인의 우두머리이던 병조판서 율곡 이이를 탄핵하다가 종성에 유배됐고,이듬해 풀려 났으나 정치에 뜻을버리고 방랑생활을 하다가,선조 21년인 1588년에 38세의
젊은 나이로 금강산 인근에서 죽었다. 허균은 허난설헌의 동생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었고, 광해군 때 역모죄 혐의로 거열형을 당하고 사지가 갈갈이 찢겨져 죽었다 허균은 판서 즉 장관을지냈으나 당시 실세이던 이이첨에게 이용 당하다가 이이첨의 눈밖에나 역모죄라는 혐의를 뒤집어 쓰고 억울하게 죽은듯하다 (개인적인 생각) 허난설헌은 조선시대 때 여성으로서는 두번째 가라면 서러울정도로 시를 잘썼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는 결혼을 한후부터 큰 불행이 찾아왔다
남편인 김성립은 과거에 낙방하기 일쑤였고, 부인보다 학문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시기와 질투 끝에 난봉꾼 생활을 하다시피 했고 시어머니는 여자가 글을 써서 어디다 써먹느냐고 성화를 냈다. 또한 아들이 과거에 실패한 것도 훗날 허난설헌의 아이들이 죽었을 때에도 집안의 모든 불 행이 허난설헌 때문에 일어 났다면서 구박을 했다. 허난설헌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두 아이를 전염병으로 잃었고 뱃속에 태아 또한 유산되는 아픔을 겪었으며, 1580년에 부,1588년에는 동생인 허난설헌의 스승 역할을하며 글 공부를 가
가르쳐 주고 누구보다 헌난설헌을 이뻐했던 오빠인 허봉이 죽는 불운을 겪었다. 허난설헌이 죽은지 한참 뒷일이지만 동생인 허균 또한 역모죄로 죽었다. 허난설헌은 남편과 시어머니의 구박 때문인지 27세라는 나이에 단명했다 그녀는 죽의면서 허균에게 그녀가 쓴 시 모두를 불태우라고 부탁하자 허균은 전부 불을태웠으나 다행히 허균이 외우고있었던 시와 친정에 있었던 시들을 모아 <난설헌> 집을 냈는데 우리나라에서 보다 중국에서 유명해졌다고 한다
*초당 두부 / 오늘날 강원도 지방 특히 강릉지방은 초당 두부가 유명해서 경포대 처남집에 갈때는 꼭 초당 두부를 먹는다 초당두부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가지가 전해 내려 오는데, 첫번째는, 이 초당두부의 역사적 유래는 허난설헌과<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아버지인 허엽( 1517∼1580)이 강릉 부사로 내려왔다가 바닷물로 간을 맞추며 두부를 만들면서 시작됐다고전해진다. 허엽은 관청 뜰에 있는 우물물의 맛이 좋자 이 물을 이용해 두부를 만들게 됐고, 끓인
콩물을 응고시키기 위해 동해 바닷물을 길어다 썼다. 이후 강릉부사가 손수만든 두부가 담백하고 고소해 맛있다는 소문이 났고 강릉 사람들은 허엽의 호인 초당을붙여 초당두부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두번째는, 그러나 실제 초당두부의 기원은 6.25 전쟁 무 렵으로 보는것이 정설로,당시 강릉일대의 청년들이 치열한 전지였던 동부전선에 투입되면서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다. 이에 남편을잃고 생계가 막막해진 아내들이 두부를 만들어 장에서팔았다고 한다. 이후 1980년대 초반 초당마을에서 두부를 만들어파는 가구가 증가하기 시작했고,1986년 초당마을에서 처음으로 두부를 메뉴로한 원조 초당순두부집이 영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초당두부는 허엽과 관련된 유래로 더 알려져 있는 듯 보인다
http://heo.or.kr/note7/board.php?board=gman&command=body&no=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