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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내과 박원장'이라는 드라마가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나는 웹툰 시절부터 열혈 독자였다. 현직 의사의 솔직한 개원 후일담을 보다가 문득 든 생각, 나야말로 '내과 김원장'이 아니던가.
대출을 받아 개원했고 빚을 갚느라 허덕였고 개원 초기 휴일 진료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건강 식품에도 기웃거리지 않았던가. 손기술이 부족해 시도하진 못했지만, 피부 미용에도 솔깃했고 태반주사나 비타민 주사는 여전히 사용 중이지 않은가.
처절한 필살기로 병원 경영에 성공한 박원장이 마침내 웹툰의 길로 들어섰듯, 나 역시 문학이라는 깊은 수렁에 빠져 지금까지 헤매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생업을 유지(Yuji)하면서 혹은 생업을 유지(maintenance)하기 위해 열정을 불사르는 의사들을 본다. 본래의 직업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 경우는 드물지만 진료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의사들은 주변에도 많다. 시를 쓰는 의사들 역시 또 다른 의미의 '내과 박원장'일지도 모른다.
한국의사시인회 제10집 <개화산에 가는 이유>가 출간되었다. 시집 원고는 도착순으로 게재되었다. 의사로서의 권위나 시인의 명망, 등단 연도, 의사 면허, 학번도 무시하고 오로지 시를 쓰는 의사들이 모여 의학과 문학의 만남을 도모한다. 대부분 동네 의사의 명함을 가지고 있는 그들이 함께 모여 문학기행을 하고 시 낭송을 하고 사화집을 발간하며 우의를 다진다. 풀잎 향 가득한 연둣빛 표지를 넘기니 '내과 박원장들'의 시들이 푸릇푸릇 올라온다.
주변을 보고 중심을 알아채는 오십 년 닳은 습성
예를 들면,
흐느적거리는 팔다리를 보고 몸통을 살피고,
잘피숲 은밀히 박동하는 속씨를 짐작하고,
씨방의 속셈을 짚어,
마른 나무처럼 벌린 그녀의 사지에 십자가를 그려 넣는
- 유담, 「중심성 암점」 부분
중심성 암점이란 망막의 한 가운데 염증이 자리 잡아 물체에 까만 반점이 번지는 증상을 말한다. 이런 증상에 오래 시달리다 보면 “주변을 보고 중심을 알아채는” 습성을 체득한다. “흐느적거리는 팔다리를 보고 몸통을 살피”는 것은 눈 감고도 수행할 수 있다. “마른 나무처럼 벌린 그녀의 사지에 십자가를 그려 넣는” 상상도 더는 힘든 작업이 아닐 것이다.
유형준 교수는 시뿐만 아니라 문사철 전반에 조예가 깊다. 특히 의료 인문학에 관심이 많은데, 얼마 전 의료 접경 연구소를 개설했다. 그는 시를 쓸 때만 필명을 사용한다.
성장통을 겪는 몸짓은 바이러스 때문이다 계급은 바이러스 때문이다 쉽게 흔들리는 식탁은 바이러스 때문이다 앙칼진 눈 마주침은 바이러스 때문이다 파티는 바이러스 때문이다 잘 안 되는 연락은 바이러스 때문이다 바람에 터지는 석류는 바이러스 때문이다 그늘에서 소가 쓰러지는 건 바이러스 때문이다
- 김호준, 「침습侵襲」 부분
지구가 성장통을 앓고 있다. 바이러스의 침습에 온 인류가 꼼짝달싹 못하고 갇혀있다. 인류의 범주를 넘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 바이러스의 침습에 눈물짓고 말았다. 눈에 보이지 않은 미물에 우주의 질서마저 흔들린다. 앙칼진 눈 마주침까지.
요즘 MZ 세대는 시를 읽지 않고 시를 쓰지 않는다. 특히 의사들은 시를 읽지 않는다. MZ 세대의 의사라면 어떨까. 그런 편견을 보기 좋게 깨부순 시인이 있다. ‘올해는 지키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는 시인의 말에 자꾸 마음이 간다. 몸을 잔뜩 웅크려야 한다고 말한 그가 지키고 싶은 마음은 무엇일까?
‘슬픔’을 정면으로 바라보니
겸연쩍은지 고개를 돌린다.
그 옆모습이 ‘불안’을 닮았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려하니
고개를 더 돌린다.
뒷모습은 ‘고독’을 닮았다.
-홍지헌, 「그는 누구인가?」 부분
정상에 올라 나무를 바라본다. 나무의 정면은 슬픔으로 가득하다. 그 옆 모습은 불안을 닮았다. 고개를 돌려 뒷모습을 바라보니 고독을 닮았다. 나무를 본 것인지만 실은 자신의 내면을 관찰한 것이다. 인간이라는 나무는 슬프고 불안하고 고독한 존재 아니던가.
그는 의협 신문 '청진기' 코너에 고정 칼럼을 연재했고 박달회 회원으로 수필 장르까지 넘나들며 활발한 집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개화산은 그의 진료실이 있는 강서구 개화동에 위치한 나지막한 산이다.
밤하늘의 별을 오래 바라보다가
낮은 곳으로 흘러내리는 별빛이 궁금했던 누군가
이내 눈동자에 별이 한 줌 채워지면
스스로 별이 되어버릴까 싶어
돌담 아래로 소원을 묻어두었을 것이다
-한현수, 「첨성대」 부분
숲을 관찰하듯 별을 관찰한다. 그러다가 문득 낮은 곳으로 흘러내리는 별빛을 바라본다. 눈동자에 별이 가득 차 마음이 충족되면 스스로 별이 되고자 한다. 돌담 아래 묻어둔 소원이 천년 동안 이어져 아직까지 우리의 마음을 파고든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변하지 않는 사랑이 시를 지탱하는 힘일 것이다.
첨성대처럼 꼿꼿한 자세로 시의 묵정밭을 일구어 간다. 시전문 잡지 <발견>의 편집위원이기도 한 그는 201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을 수혜한 바 있다. 숲 해설가로 자연과 가까이 지내면서 자연을 공부하고 자연을 노래한다.
푸른 지붕 근처에 마취하러 갔더니 눈 감고도 집어넣던 주사바늘 비껴나고 기관 삽관 한 번에 되지가 않더이다 부탁받고 수술한 환자 결과들이 좋지 않아 힘들어 울부짖던 선배 후배들 보았으니 의사를 선택하였으면 담담히 믿고 따르고 차라리 하늘에 빌며 부탁함이 어떠실까
-김기준, 「브이아이피 증후군」 부분
의사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보았을 일화이다. 더군다나 청와대에 파견 나갔다면 손을 벌벌 떨었을지도 모른다. 눈 감고도 집어넣던 주사바늘이 비켜나고 기관 삽관마저 한 번에 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저명한 의사가 저명한 인사를 대하는 심정도 동네 의사들과 가히 다르지 않다.
마취통증의학과 교수인 그는 스킨스쿠버 강사로도 유명하다. 얼마 전 수중 에세이 ‘그 바닷속 고래상어는 어디로 갔을까’로 신비로운 바닷속의 아름다움을 생생히 들려주기도 했다.
육신이, 믹서기로 갈은듯 미세입자가 되고 있다
정신이, 오르가슴의 신열에 기파로 증류되고 있다
살점이 드라이아이스처럼
기체로 서서히 승화되고 있다
-김세영, 「기화氣化가 되다」 부분
우주의 내밀한 섭리의 이야기를 표현한 시가 바로 우주 영성시이다.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육신도 미세먼지처럼 떠돌고 우리의 정신세계도 기파로 증류되고 있는 것이다.
미네르바 문학상과 한국문협 작가상을 수상한 바 있는 그는 문학잡지 <포에트리 슬렘>의 편집에도 관여하고 있다. 네 권의 시집 위에 디카시집 <눈과 심장>까지 간행한 시인은 요즘 우주의 신비에 푹 빠져 있는 듯하다.
출생 신고 후
첫나들이가 울음 끝으로
남은 김지호
맘의 결막이 어깨를 관통하는
바늘 자욱에 붉어진
안쓰러운 BCG
-송명숙, 「BCG」부분
BCG는 과거 불주사로 잘 알려진 예방접종이다.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가지고 있는 결핵 예방 접종의 바코드다. 접종의 상흔을 줄이기 위한 여러 가지 기술이 발달하였지만, 여전히 화농의 흔적을 남긴다. 이를 지켜보는 엄마의 안타까운 심정을 소아과 의사의 섬세한 눈으로 다시 바라본다.
시인은 신생아를 진료할 때도 섬세한 감각이 그대로 살아 있다. 그런데 신생아의 첫 나들이가 하필 예방접종이다.
가문비나무처럼 굳건하다가도
은사시 나무처럼 바르르 떨며
아무도 몰래 부르면
눈시울에 걸리는 이름,
어느 새 통유리 너머에서 슬며시 나타났다
그림자처럼 사라지는 사람이 있다
-박언휘, 「이름을 부르면」 부분
시인에게 그런 사람은 누구일까. 그녀는 누구를 그리며 시를 쓰고, 누구를 그리워하며 살아 갈까. 평소 성품이나 행동거지로 볼 때 사랑하는 환자이거나 소외된 이웃이거나 독거노인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박언휘의 사랑 방식일지도 모른다.
대구의 슈바이처로 잘 알려진 시인은 소외계층과 더불어 살아가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다. 고액기부자모임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인 그녀의 봉사활동을 열거하기엔 지면이 턱없이 부족하다. 시 전문 계간지<시인시대>의 발행인인 시인은 항일 민족시인 '이상화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아 문단에도 기여하고 있다.
창문을 통해서 자유를 본 사람이 있었고
창문을 통해 즐거운 상상을 한 사람도 있었다.
창문을 통해 흐르는 시간의 물결을 본 사람도 있었고
창문을 백지로 보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있었다.
-김경수, 「별이 있는 창문」 부분
세상의 풍경은 다양하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각양각색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창문을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창문을 통해 자유를 보고, 즐거운 상상을 하기도 하고, 흐르는 시간의 물결을 본다. 더러는 세상과의 소통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창문을 통해 바라본 그의 세상은 어떤 풍경일까.
<시와 사상> 발행인이기도 한 그는 부산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수많은 시집과 문학 서적을 저술한 그는 돋보기로 세상의 틈을 관찰하고 청진기로 환자의 마음을 살핀다. 그의 시에는 사물에 대한 세밀한 묘사와 대상에 대한 지극한 관심이 엿보인다.
온 천지에
먼지들 아우성친다
핵보다 더 무서운
4대강보다 더 심각한
전염병처럼 도시에 창궐한다
- 권주원, 「미세먼지 나라」 부분
코로나가 창궐하기 전 일기예보에서 우리들의 관심사는 단연 미세먼지였다. KF94라는 마스크도 그때 등장한 것이다. 미세먼지는 핵보다 심각하고 전염병보다 더 무서운 재앙이 될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유치원에도 못 가고 밖에서 뛰놀지도 못한다. 숨 막히는 KF94 마스크를 생각하니 더 숨 막혀 죽을 것 같다.
코로나가 한창인 2020년 시집<빨간 우체통>과 수필집<노성산 무지개>를 동시에 출간했다. <필내음>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일상의 풍경을 포착하여 편안하게 독자에게 전달한다. 그의 시에는 늘 사람 냄새가 풍긴다.
오늘 아침 식사는요 삼각김밥 참치마요
참지 마요 당기는 말 괜히 손이 가네요
어젯밤 있었던 일은 마음에 담지 마요
-최예환, 「참치마요」 부분
여행 중 아침 식사를 위해 편의점에 들렀는데 참치김밥이 참지 말라며 유혹한다. 단순한 언어유희가 아니다. 참지 말라는 말에 이끌려 참치김밥에 손이 간다. 어젯밤에 참지 못하고 화를 냈던 일이 생각나 마음에 담지 말라고 사과한다. 글이 곧 사람이다란 말은 그를 두고 한 말일지도 모른다.
제29회 신라문학대상 시조부문 대상을 받으며 혜성처럼 등장하더니 곧바로 시집 <혀>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해학과 풍자가 넘치는 시조를 맛깔나게 선사한다.
생각 하나 한참 가다 되돌아온다
생각 둘 돌아왔다 다시 간다
생각 셋 달려왔다 달려가고 또 달려가고 달려온다
유리 상자를 쾅 친다
잠깐 조용하다
-김승기, 「상념想念 혹은 불안」부분
주경야독처럼 낮에는 환자를 보고 밤에는 시를 쓴다.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그가 최근의 심정을 밝힌다. “무수히 유산되던 언어, 상념들! 끝없이 밀려오던 그것들이 지금은 다 어디가고 조용하다. 요새는 어쩌다 떠오른 시상도 시들해서 잊혀져 간다. 무엇이 그렇게 나를 얽매이게 했고, 지금의 내 이 게으른 태도는 또 무엇인가?” 어쩌면 시 쓰는 의사들의 공통된 고뇌일지도 모른다.
이미 네 권의 시집과 두 권의 산문집을 세상에 내놓고도 모자라 여전히 엄청난 창작열을 불태운다. 언젠가 그가 말한 적 있다. 시골에서 동네 이장일까지 겸하고 있다고.
사랑니 같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담장 밖으로 고개 내민 백목련이
나에게만 환하게 벙글었다
그렇구나
저 목련이
내가 개설해 놓은
차명계좌구나
-김연종, 「차명계좌」 부분
내게 필요한 건 그물침대와 시집 한 권 뿐이라고 호언하던 그가 또다시 장담한다. 비자금처럼 펑펑 터지는 봄날의 차명계좌들이 나를 이렇게 부유(浮遊)하게 만들었다고.
의사로서도 시인으로도 정착하지 못하고 여전히 세상을 부유하는 그가 호기롭게 외친다. 비단각시거미의 근사한 기둥서방이 되어 나무늘보처럼 잠들고 싶다고.
겨울은 점점 더 깊고 깊게 겨울 속으로 흘러가더라
저물 무렵에는 빈 들판에 서서 긴 그림자와 잔설(殘雪)과 그 밑에 숨죽이고 있는 풀씨들과 함께 아무 까닭도 없이 그 하루를 푸르고 깊은 그리움처럼 흐린 너의 얼굴처럼 묶어 보았다
-주영만, 「아무 까닭도 없이」부분
“오늘도 아침이면 동쪽에서 해가 떠서 서쪽으로 간다 그 하루는 아침에 집을 나서서 세상 속으로 군중 속으로 간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간다 도무지 혼자 가는 길이다” 늘 혼자 다녀선지 직접 그를 만난 적은 없다. 그가 쓴 시와 글을 통해서만 그와 만난다. 언젠가 그가 가는 길을 동행하고 싶다. 그래서 그 융숭한 속내를 들여다보고 싶다.
삼십 년 넘게 시업을 일구고 있는 그는 서정에 충실하다. 요샛말로 ‘서정이 진심인’ 시인이랄까. 그렇게 그는 오늘도 진정성 있는 발걸음으로 묵묵히 시의 계절을 건너고 있다.
스토커처럼
끈질기게 오감을 탐하고
신열에 젖은 살은 용광로처럼 뜨거워
악의 꽃, 격렬한 보들레르!
나는 먼 땅의 작가를 보았네
고통 속의 시인(詩人)을 보았네
-서화, 「첫 경험」 부분
보들레르의 시를 처음 읽는 독자들은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관능과 음탕의 문장, 절정의 언어로 기교와 본능을 다해 붉은 열꽃을 사체처럼 쏟아” 낸다는 것을. “꿈을 꾼 듯 은밀하게 녹아버린 근육들은 무고한 어둠이 되어 누워있다”는 것을. "스토커처럼 끈질기게 오감을 탐하고" 마침내 악의 꽃으로 피어난다는 사실을.
그는 환자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언젠가 코로나로 희생된 환자들에 대한 심정을 절절히 드러낸 적 있다. 서화라는 필명으로 인터넷 카페 ‘서화의 시세계’를 운영하며 소통의 폭을 넓히고 있다.
오래전 제자H가 선물한 것
그 젊은 의사는 이미 중년인데
어딘가 훌쩍 떠나 버리고
그를 기억하는 물증만 남겼다
온 병동을 뒤지며 청진기를 찾는다
-조광현, 「잃어버린 청진기」 부분
의사에게 청진기란 상징적 존재다. 심장을 다루는 흉부외과 의사라면, 더군다나 오래전 제자가 선물한 청진기라면 그 의미가 남다를 것이다. 당직 간호사가 오래된 물건이던데 새로 하나 장만하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도 아쉬움은 떠나지 않는다. 인체의 심장을 돌보던 시인이 이제 마음의 심장을 돌보고 있다.
평생 흉부외과 교수로 재직한 시인은 정년퇴직 후 더욱 활발한 집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시뿐 아니라 수필가로서도 명망이 높다. 현재 한국 의사수필가협회 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어느 산 중턱, 둥지 떨어진 작은 새 한 마리를 보고 그가 허둥거린다. 그냥 발길 적은 곳으로 밀어주면 될 터인데 분주하게 새 주위를 돌면서 입으로 호호 불다가 안쪽으로 들어가라고 손발 짓을 하다가 사람 손 냄새 베지 말라고 등산용 컵으로 밀쳐보기도 하다가
-박권수, 「함께 하는 이유」 부분
동행의 이유가 참 따뜻하다. 서정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그의 시는 언제나 포근하고 정겹다. 풀 한 포기, 둥지에서 떨어진 작은 새를 보고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언제나 낮은 곳을 배려한다. 아직 날지 못하는 아기새에게 햇살을 가려주는 것은 시인을 쏙 빼닮았다. 아리고 정겹고 따뜻하다.
‘벚꽃 지는 날, 괜찮아 저렇게 날리는 건 다 근심이야’ 라고 그가 외친다. 그의 시는 얼어붙은 마음마저 녹아내리게 하는 힘이 있다.
빈집 같은 적막을 두르고
검게 여윈 노인 한 분이
아직은 쌀쌀한 바람 속에
담요 밖으로 얼굴만 꺼내놓고
제법 땃땃한 삼월의 햇살을
옴스라니 맞고 있다
-정의홍, 「어느 봄날」 부분
따뜻한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봄을 만끽하던 그가 마음의 고향 같은 시골 마을을 방문한다. 거기서 빈 집처럼 적막한 풍경을 목격한다, 온기라고는 하나도 느낄 수 없는 기울어진 농가 툇마루에서 제법 땃땃한 삼월의 햇살을 받고 있는 노인을 본다. 그가 왜 그렇게도 봄날을 기다리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2014년 강릉으로 귀향, 안과 개원의로 봉사하고 있는 시인은 봄을 기다리듯 간절히 시를 기다린다. 얼어붙은 대지 아래에 연두빛 새싹 하나가 돋아나기를 기다리고, 말랐던 풀잎에 생명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온 산에 붉은 봄이 불타듯 번지기를 기다린다.
이번 작품집에 실린 시들은 18개의 성상과 18개의 색깔을 지니고 있다. 개화산에 오른 이유도 각양각색이다. 독립채산제처럼 다양한 개성을 지닌 시들을 동일한 사조로 분류하기는 불가능하다. 각자의 프로필에 의사 문양을 넣기도 하고 빼기도 하지만 내면 깊숙이 각인된 의사라는 이력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2012년에 발족한 한국의사시인회는 첫 사화집 <닥터 K>를 시작으로 <환자가 경전이다>< 카우치에서 길을 묻다>... <진료실에 갇힌 말들>까지 그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사화집을 발간했다. 벌써 10년이 지났다.
<개화산에 가는 이유>를 넘기다가 파토스의 새벽을 맞이한다. 시집을 덮는데 가슴 한켠에 고요한 탄성이 피어오른다. '내과 박원장'처럼 현장감과 생동감이 넘치는 시집이 환자들의 마음까지 파고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뜨거운 바람이 부는 날, 문득 개화산에 올라 고독한 내 뒷모습을 관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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