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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호(鄭澔)
[본관] 연일(迎日)
[문과] 숙종(肅宗) 10년(1684) 갑자(甲子) 정시(庭試) 병과(丙科) 11위(15/20)
[진사] 숙종(肅宗) 8년(1682) 임술(壬戌) 증광시(增廣試) (進士) 3등(三等) 34위(64/100)
[생졸년] 1648년(인조 26)~1736년(영조 12) / 壽 86歲
[거주지] 충주(忠州)
송강 정철의 4대손으로, 본관은 연일. 자는 중순, 호는 장암. 정철의 4대손으로 아버지는 감찰 경연이다. 노론의 수장인 송시열의 제자로, 일생동안 노론의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영조때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1684년(숙종 10) 관직에 오른 뒤, 계속되는 당파싸움 과정 속에서 일관되게 노론의 입장을 대변했다. 그 때문에 소론과 남인 등 다른 당파와의 갈등이 유발되어 여러번 귀양을 갔고, 파직되기도 했다.
1717년(숙종 43) 소론의 반대를 물리치고 세자, 훗날 경종의 대리청정을 시행하게 했다. 그 후 사화를 당해 다시 유배를 갔다가 노론이 재집권 하면서 돌아와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시와 문장, 글씨에도 능했으며, 문경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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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암 이재(李縡) 撰
영의정 장암 정공 행장(領議政丈巖鄭公行狀)
본관 경상도(慶尙道) 영일현(迎日縣), 증조 증 병조판서 행 통정대부 강릉대도호부사 휘 종명(宗溟), 증조모 증 정부인 남양 홍씨(南陽洪氏). 조부 성균 생원 증 좌찬성 휘 직(溭), 조모 증 정경부인 비안 박씨(比安朴氏). 부친 증 영의정 행 통훈대부 사헌부감찰 휘 경연(慶演),
모친 증 정경부인 덕수 이씨(德水李氏), 모친 증 정경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이다.
공의 휘는 호(澔), 자는 중순(仲淳)이며 영일 사람이다. 영일 정씨는 고려 평장사 균지(均之)로부터 문정공(文貞公) 사도(思道), 공간공(恭簡公) 홍(洪)을 거쳐 문청공(文淸公) 휘 철(澈)에 이르렀다. 이분은 소경왕[昭敬王, 선조(宣祖)] 때 청렴하고 충성스러우며 강직한 도리로 시대의 명신이 되어 사적이 역사에 실려 있다.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강릉공(江陵公, 정종명)은 일찍 과거에 장원하여 정승이 되리라는 기대를 듬뿍 받았는데, 광해군 때 곤액을 당하였다가 만년에 태평성대를 만나 비로소 청요직에 올랐으나 다 쓰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생원공(生員公, 정직)은 젊어서 중망이 있었으며, 계곡(谿谷) 장공[張公,장유(張維)]과 막역지교(莫逆之交)였으나 불행히 약관을 넘겨 세상을 떠났다. 장공이 글을 지어 조문하여 애통해하는 뜻을 다하였으니 그의 문집에 실려 있다.
감찰공(監察公,정경인)은 젊어서 성균관에 들어갔다. 비록 어버이를 위해 벼슬하였으나 지조가 고결하고 진취에 뜻이 없었다. 덕이 순수하고 행실이 뛰어나 집안을 잘 계승하였다. 노봉(老峰) 민정중(閔鼎重) 공,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 공이 행장과 묘지를 지어 몹시 칭찬하였다.민부인은 부인의 덕이 순수하고 완비되었으며 예법을 따라 흠이 없었다. 숭정 무자년(戊子年, 1648, 인조 26) 10월 10일 인시(寅時)에 공을 낳았다.
감찰공이 아명을 태교(胎敎)라고 지었으니,《소학》첫편의 말을 취한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자질이 있어 단정하고 엄숙하였다. 놀기를 좋아하지 않고 스스로 배우기를 좋아할 줄 알아 번거롭게 가르칠 필요가 없었다. 조금 장성하자 효성이 지극하였다. 감찰공이 노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예법을 넘어설 정도로 상을 치르다가 몸을 상하여 병이 들었다.
공은 좌우에서 부축하고 밤낮으로 걱정하며 3년을 하루같이 보냈다. 상을 마치자마자 병이 마침내 위독해졌는데, 공은 더욱 애태우며 분주하게 치료하며 눈을 붙이지도 않고 띠를 풀지도 않았다. 하늘에 호소하여 대신 죽기를 기원하였으며, 손가락을 베어 피를 올렸다.
상을 당하자 통곡하고 발을 구르다가 혼절하였으며, 손가락의 상처도 심해져 거의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정도였기에 보는 사람들은 코가 시큰해졌다. 그래도 장례 지내는 큰 일에 힘을 다하여 형들을 도왔다. 시신에 입히고 관에 넣는 물건은 반드시 정성과 신의를 다하여 유감이 없게 하였다.
장사 지낸 뒤에는 그대로 묘소 옆에서 여막살이하니, 형들이 어린 나이에 몸을 상할까 걱정하여 온갖 방법으로 멈추도록 달랬으나 멈추지 못하였다. 상을 마치자 비로소 집으로 돌아와 민 부인을 섬겼다. 집안이 평소 곤궁하여 살 길이 없었으나 봉양하는 물품과 맛있는 음식은 몸소 마련하여 부족한 적이 없었다.
공은 일찍 문예를 성취하였으나 조모상을 마칠 때까지 3년 동안 과거에 응시하지 않다가 이어서 부친상을 당하였다. 상을 마치고 민 부인이 입신양명을 간절히 바라자 공은 모친의 뜻에 따라 과문(科文)에 제법 힘을 쏟았다. 중간에 우암(尤菴) 송 문정공(宋文正公송시열) 선생의 문하를 오가며 학문을 질의하니, 선생이 대단히 기대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화가 일어나자 선생이 가장 먼저 유배되고, 공은 마침내 과거공부를 그만두었다. 어버이를 봉양하는 여가에 날마다염락(濂洛)의 성리서(性理書)를 가져다 전념하여 공부하니, 잠심하여 실제로 체득하는 데 요점을 두고 예전에 익힌 글짓기는 더 이상 마음에 두지 않았다.
무오년(戊午年, 1678, 숙종 4) 봄, 민 부인의 상을 당하여 한결같이 이전의 상처럼 엄하게 예법을 지켰다. 혼자서 어린 조카 둘과 함께 여막에서 살며 아침저녁으로 묘소에 올라가 성묘하고 슬피 통곡하니 눈물이 흘러 땅을 적셨다. 항상 거적으로 자리를 삼고 흙덩이를 베개로 삼으며 진자리 마른자리를 가리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죽을 먹었는데 종에게 맡기지 않고 몸소 불을 때었다. 묘소가 집에서 20여 리 떨어져 있었는데 초하루와 보름이면 반드시 가서 전(奠)을 올렸다. 가난하여 조랑말도 없었기에 항상 도보로 갔는데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추우나 더우나 한번도 그만둔 적이 없었다.
공은 앞서 부친상을 당했을 때 혈기가 아직 건장하지 않아 지나치게 몸을 상하였는데, 이때 더욱 기운이 없어져 보는 사람들이 상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 모두 걱정하였다. 모친상을 마친 뒤, 생전에 벼슬하여 봉양하지 못한 것을 더욱 한스럽게 여겨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실질적인 공부에 전념하려 하였다.
그러나 형제들이 모두 집안을 위해 과거공부를 그치지 않고 권하였기에 공도 감히 제뜻을 이룰 수 없었다. 경신년(庚申年, 1680, 숙종 6)에 비로소 별과(別科)에 응시하여 초시(初試)에 1등으로 합격하였다. 임술년(壬戌年, 1682, 숙종 8) 성균관에 오르고, 갑자년(甲子年,1684, 숙종 10) 문과에 합격하니 명성이 널리 퍼졌다.
을축년(乙丑年, 1685, 숙종 11) 승문원에 선발되어 들어갔다. 병인년(丙寅年, 1686, 숙종 12) 천거를 받고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었다. 정묘년(1687) 가을, 대교로 승진하였다. 얼마 후가주서로 있을 때의 사건으로 인해 고양(高陽)으로 유배되었다.
무진년(戊辰年, 1688, 숙종 13) 1월, 사면받고 돌아와 봉교로 승진하고 규례대로 성균관 전적으로 옮겼다가 곧 예조 좌랑으로 옮겼다. 2월, 병조 좌랑으로 옮겼다. 이보다 앞서 윤증(尹拯)이 우암의 문인으로서 자기 부친의 묘갈명이 기대에 걸맞지 않다고 미워하여 스승을 배반하고 당파를 나누었다.조정의 논의가 분열되어 당론을 표방하는 경우가 점점 일어나니, 근심스러운 일이 많아졌기에 공은 이미 뜻을 접기로 마음먹었다.
하루는 대궐에서 연일 숙직하다가 보니, 병조에서 궐문에 난입하는 자를 금지하는 것을 담당하는데 날마다 금령을 어기는 자는 대부분 금표(禁標)를 지니고 출입하는 여염의 여인들이었다. 공은 대궐이 엄하지 못한 모습을 보고서 자기도 모르게 놀라 당일로 가족을 데리고 시골로 내려가니, 친구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5월,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자 사직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차라리 조정의 잘잘못을 극론하여 성상께서 한 번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여 자의 상소를 썼다. 우암 선생이 당시 화양(華陽)에 있다가 이 이야기를 듣고 만류하며 심지어 회옹(晦翁, 주자)이 상소를 불태운 일을 인용하여 타이르니, 마침내 상소를 올리지 못했다.
마침내 도성에 들어가 숙배하고, 즉시 오도일(吳道一)을 삭거사판(削去仕版)하라는 논의를 꺼냈다. 동료들은 각자 인피하고, 어떤 이는 오도일을 위해 앞장서서 신구(伸救)하는 자도 있었다. 공 또한 오도일의 몸가짐이 패악하며 관원들을 모욕하고 논의를 제멋대로 주도하며 오로지 속이고 숨기기를 일삼는 실상을 자세히 논하였다.
이때 소인들이 스스로 청론(淸論)을 가탁하며 덕 있는 선배들을 훈척(勳戚)의 당파로 배격하여 훗날 이익을 얻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오도일을 오랫동안 전형하는 자리에 두고 붕당을 심어 마음껏 행동하게 하니, 온 세상 사람들이 휩쓸려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공이 보잘것없는 신진으로서 혼자 이 논의를 제기하자 시배(時輩소론)가 몹시 놀랐다.
오도일 역시 제 수법이 남김없이 드러났기에 증오하여 자기 당파에 속한 김홍복(金弘福), 박태순(朴泰淳) 등을 사주하여 떼지어 일어나 거꾸로 헐뜯게 하여 공을 논죄하여 파직시켰다. 이해 겨울, 외직으로 나가 석성 현감(石城縣監)에 보임되었으니, 그들의 계책에 빠진 것이었다. 교대하는 데 친혐(親嫌)이 있다는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다.
기사년(己巳年, 1689, 숙종 15) 봄,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얼마 후 우암이 외딴 바닷가에 위리안치되고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사가(私家)로 물러났다. 흉인들이 권력을 잡자 오도일의 당파가 마침내 협력하여 공을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내보냈다.
공은 우암이 정읍(井邑)에서 사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복(弔服) 차림에가마(加麻)하여 애도하고, 사람을 보내 제문을 가지고 가서 제사 지내게 하였다. 부임한 뒤로는 좌천된 사람으로 자처하지 않고 그곳 백성을 비루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먼저 임진년(壬辰年, 1592, 선조 25) 의병을 일으킨 이들의 사적을 찾아보고 제문을 지어 몸소 창의사(彰義祠)에 제사 지내고 그곳에 남아 있는 자손들의 세금을 면제해 주었으며,효자 강민인(姜敏仁)의 집을 표창하였다.새로《격몽요결(擊蒙要訣)》과《상례비요(喪禮備要)》 등의 책을 간행하고 시골의 우수한 이들을 모아 양식을 주고 공부하게 하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감화되어 습속이 크게 변하였다.
이때 흉년이 들어 관청의 저축이 고갈되었는데, 공이 마음을 다해 구휼하여 백성이 굶어죽는 것을 면하였다. 어사 이만원(李萬元)이 몰래 경내로 들어갔다가 사적으로 평사 이현조(李玄祚)를 만났는데, 이현조는 시배(時輩)에 속하였으나 공과는 예문관에 함께 있었던 동료로서 교분이 제법 깊었다.
그는 평소 공이 오래 전부터 중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오래 변방에 머무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다가 이때에 이르러 어사에게 부탁하여 아뢰어 파직시키게 하였다. 어사가 말하기를,
“내가 드나들며 염찰하여 이미 자세히 보았고, 수령의 잘잘못도 다 알고 있다. 비록 청렴하여 자신을 아끼는 자도 북방의 말 한 마리를 기르지 않는 자가 없는데, 경성 판관만은 이런 일이 없으니 내가 실로 감복한다. 장차 무슨 말로 아뢰어 파직시키겠는가.”
하였다.
경오년(庚午年, 1690, 숙종 16) 겨울, 대간의 탄핵을 받고 체직되어 돌아왔다.탄핵하는 글이 지극히 참혹하였으나 끝내 터럭만큼도 관청의 일로 연루시키지 못하였으니, 공론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은 평소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였는데, 이때부터 세상에 뜻이 없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갈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연풍(延豐) 골짜기 장암(丈巖) 근처에 으슥한 땅 한 곳을 얻어 몇칸 초가집을 짓고 반계정(攀桂亭)이라고 하였으니, 회암의〈초은사(招隱詞)〉에 나오는 “계수나무 가지를 잡고 오랫동안 머문다.[攀援桂枝聊淹留]”라는 뜻을 취한 것이었다. 소문을 듣고 배우러 오는 이웃 학생들이 많아 날마다 경전과 사서를 토론하였다.
비록 거친 밥도 잇지 못했으나 근심으로 여기지 않고 이렇게 살다가 죽을 뜻이 확고하였다. 갑술년(甲戌年, 1694, 숙종 20), 성상이 크게 깨닫고 중전을 복위하여 먼저 우암 이하 여러 현인들을 신원하고, 기사년(己巳年, 1689, 숙종 15) 이후 흉역을 저지른 당파를 쫓아내었다.
사람들은 모두 낯빛을 바꾸고 경하하며 태평성대를 기약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공만은 그렇지 않다고 여겼는데, 누군가 그 이유를 묻자, “예전의 이름난 신하들은 거의 다 죽고 오직 남 상국(南相國남구만) 한 명만 남았는데 이 사람이 반드시 정승을 맡을 것이니, 하늘의 뜻과 사람의 일을 분명 알 수 있다.”
하였다.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공이 공의 출처를 묻자,
“저는 벼슬하지 않기로 정한 지 이미 오래입니다. 더구나 시배(時輩)가 하는 짓은 대부분 바르지 않으니, 지금이 어찌 사군자가 조정에 발을 들일 때이겠습니까.”
하였다.
4월,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당시 조정이 어수선하고 국옥(鞫獄)이 한창이었는데, 시배가 흉역을 비호하며 몰래 훗날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려 하였다. 공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조사기(趙嗣基)는 명성왕후(明聖王后,현종 비)를 무함하여 성상께서 이미 죽이라고 명하셨는데도 공초(供招)를 받아 법을 적용하라는 내용으로 복주(覆奏)한 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중전이 복위하여 인륜이 다시 바르게 되었는데도 상소하여 쟁집하고 관청에서 의견을 모은 자가 있었습니다. 그 죄는 모두 죽일 만한 데도 조정 신하들은 우물쭈물하며 분명히 말하여 바로잡으려 하지 않습니다.
서문중(徐文重)은 역적의 옥사를 비호하고 사적으로 감옥의 죄수에게 문안하고는 자기 마음대로 그 원정 공사(原情供辭)를 고치고 몰래 낭관을 사주하여 엄하게 형신하여 그를 지레 죽게 하여 옥사의 실정을 어지럽히려 하였는데,전하께서는 갑자기 관대히 용서하고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김시걸(金時傑)이 상소하여 논박하고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전하께서는 도리어 그가 모함한다고 꾸짖으시고 특별히 견책을 시행하며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은 전폐(殿陛) 사이와 조정 위에 아랫사람을 막고 윗사람을 가리는 간신이 있더라도 장차 알 방법이 없게 될까 두려우니, 이는 국가의 복이 아닙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죄인 이현일(李玄逸)은 예전에 중궁을 모함하여 ‘스스로 하늘과 단절하였다. [自絶于天]’라고 하였는데, 그 원사에서 하늘 천(天) 자를 ‘하늘로 삼는 바 [所天]’의 하늘이라고 풀이하였으니, 그 정상이 더욱 패악합니다.구원하려는 자가 있는데도 전하는 깨닫지 못하시니, 한결같이 국법으로 처단하소서.”
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가을, 홍문관 수찬, 지제교에 임명되었다. 사정을 아뢰어 힘껏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부득이 조정에 나아가 동료와 차자를 올려 사치를 혁파하고 검약을 숭상하며 정성을 다하고 실제에 힘쓰는 방도를 아뢰었다. 얼마 못 가서 휴가를 청하여 돌아와서는 오랫동안 조정에 돌아가지 않고 상소하여 인책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정국이 바뀐 초기에 조처가 정당하여 풍채가 즉시 변하였으나 일을 맡은 신하가 도리어 왜곡되고 구차한 논의를 두고 원대하고 심원한 생각이라 하여 전하로 하여금 의리와 이익의 구분을 바로잡고 정사와 형벌의 권한을 분명히 하지 못하게 하여 사람들이 아래에서 답답해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사정(邪正)을 분별하고 시비를 밝혀 사악한 붕당을 깨뜨리고 난리의 싹을 막는 요점으로 삼으소서.”
하였다.
이때 정승 남구만(南九萬)이 장희재(張希載)를 구원하며 스스로는 세자를 위한 심원한 생각이라 하였다. 온 세상이 그의 간사함을 알았으나 훗날의 화복에 관계되어 그 잘못을 말하는 자가 없었다. 공이 예전에 말하기를,
“‘심원한 계책 [深長慮]’이라는 세 글자는 비단 사류에게 해독을 끼칠 뿐만 아니라 필시 국가에 화를 끼칠 것이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말한 것이다.
성상의 비답에,
“대신을 침척하여 소란을 야기하려 하며, 앞뒤의 말뜻도 제법 은미하니, 몹시 불쾌하다.”
하였다. 또 대신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정호의 상소는 바르지도 않고 명백하지도 않다.’라는 말씀이 있었다.
이듬해 봄, 부교리로 승진하였다. 공은 연달아 엄한 비답을 받았기에 감히 집에 있으면서 사직할 수 없어 근기 지방으로 나아가 지난 일로 인책하고 견책을 청하였다. 성상이 온화한 비답을 내리며 허락하지 않자 마침내 도성에 들어가 숙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체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가을에 잇따라 정언, 수찬에 임명되어 사직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겨울에 조정으로 돌아왔다.이전에 성균관 유생들이 송 문정공(宋文正公송시열)을 도봉서원(道峰書院)에 나란히 제향하도록 청하여유사에게 명을 내렸는데, 유사가 잘못하여 배향(配享)하겠다고 복주(覆奏)하였다. 공이 즉시 들어가 그 일을 말하자 고쳐서 처음의 명령을 따랐다. 그러자 흉도들이 상소하여 문정공을 무함하여 제향을 저지하였다.
또 이사상(李師尙)이라는 자가 예전 상소의 어구를 뒤늦게 제기하였으니, 공을 침척하려는 의도였다.이사상은 기사년(1689) 중전이 대궐에서 쫓겨나던 날 외람되게 전시(殿試)에 응시하여 높은 성적으로 급제하였다. 동방(同榜)의 여러 사람들이 상소하여 스스로 탄핵하려 하자, 이사상이 계책을 써서 저지하였다.
그 뒤 유명천(柳命天)과 심단(沈檀)의 문하를 출입하면서 외람되게 홍문관에 선발되었다. 정국이 바뀐 초기에 정사하는 자리에 금고를 당하였으나 시배가 곧 다시 대간의 자리로 끌어들였다. 공이 예전에 개탄하며 논의를 꺼낸 적이 있었는데, 이사상은 자신이 청론에 용납받지 못할 줄 알고, 마침내 일을 계기로 공을 비난하였다.
공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저 이사상은 출사한 초기에 인륜에 죄를 짓고 흉인들에게 붙었기에 사람들이 모두 침을 뱉고 사류에게 버림받은 지 오래입니다. 지금 그의 상소 내용이 지극히 패악하니, 실로 조정의 수치입니다. 어찌 신에게만 모욕일 뿐이겠습니까.”
하고, 마침내 스스로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갔다.
이듬해 외직으로 나가 의성 현령(義城縣令)에 보임되었다. 영남의 풍속은 평소 다스리기 어렵기로 알려졌는데, 1년 동안 고을에 있으면서 맑고 깨끗하게 다스리니, 관청이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조용하였다. 정축년(丁丑年, 1697, 숙종 23) 가을, 벼슬을 그만두고 곧장 돌아갔으므로해유(解由)가 나오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저절로 공격(公格)에 걸렸다.
무인년(戊寅年, 1698, 숙종 24) 봄, 연석의 신하가 성상에게 아뢰어 특명으로 해유를 없애주어 다시 경연에 들어갔다. 수찬에 임명되고 곧 다시 시강원 필선으로 승진하였다. 당시 논의하는 사람들이 공을 이조의 낭관으로 추천하였는데, 오도일이 이조 참판으로 있으면서 이유 없이 올려서 의망하였다. 고사에 따르면 이름난 관원의 품계를 올리는 것은 낭관으로서 정사에 참여한 경우가 아니면 으레 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이조의 아전이 전례를 아뢰자 오도일이 소리를 지르며,
“나부터 전례를 만들면 된다. 어찌 전례를 따를 필요가 있겠는가.”
하니, 들은 사람들이 놀라고 분개하였다.
얼마 후 사헌부 집의로 옮겨 임명되자 연달아 사직하였으나 체직되지 않았다. 4월, 배를 타고 북경에 가다가 즉시 염문 어사(廉問御史)에 임명되었다. 이때 연달아 기근이 들어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이 오랑캐의 쌀을 사오려고 오랑캐 사신을 빈접하다가 그에게 오만한 글을 받아 성상에게 치욕을 끼쳤다.
이유(李濡) 공이 호조 판서로 그 일을 받들어 시행하는데, 공이 장차 떠나려 하면서 소매에서 차자를 꺼내 올려 청대하고 성상께 아뢰기를,
“우리나라는 오랑캐에게 만대가 지나도 반드시 갚아야 하는 원한이 있습니다. 비록 나라가 없어지더라도 의리상 구걸하여 먹여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지금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백성을 도탄에서 구하지 못하고, 또 씨만 남은 백성을 몰아서 금수와 오랑캐의 지경으로 몰아넣으면서도 꺼리지 않으니, 참으로 통곡하고 눈물을 흘릴 일입니다.”
하니,
성상이 온화한 낯빛으로 대답하기를,
“오늘날 이러한 의논은 끝내 없을 수 없다.”
하였다.
마침 그날 빈청에서 인견하는 날이었는데, 대신 이하로 공이 올린 차자를 읽은 자들이 모두 귀 기울여 듣고 물러나 서로 이야기하기를,
“이는 우리들을 곧바로 오랑캐와 짐승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하였다고 한다. 당시 3도에서 임명을 받았는데, 공은 영동과 영서를 맡았다.
공은 평소 임증(淋症)과 산증(疝症)이 있어 먼 길을 가는 데 방해가 되었기에 이때에 이르러 사람들이 모두 걱정하였다. 그러나 공은 스스로 돌볼 겨를이 없이 없었다. 마침 장마철을 만나 영해 수천 리를 출입하면서 깊은 산과 외딴 골짜기라도 가지 않는 곳 없이 백성의 질고를 묻고 어려움을 꺼리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순무(巡撫)하기 위해 여러 고을을 두루 다니면서 적체된 옥사를 해결하면서 모두 공정하게 처리하도록 힘써 백성이 만족하였다. 근세에 안렴하는 자들은 대부분 가혹하게 잘못을 집어내는 것을 현명하다고 여기고 창고를 봉하여 쫓아내는 것을 위엄 있다고 여기는데, 공은 그것이 사대부를 예우하는 방도가 아니라고 문제로 여겼다.
이때 와서는 한번도 창고를 봉하지 않고 단지 서계를 올려 논죄하였으며 자잘한 일은 생략하니, 논하는 자들이 모두 사신의 체모를 얻었다고 하였다. 복명(復命)한 뒤 양사(兩司)와 함께 최석정(崔錫鼎)과 이광좌(李光佐) 두 신하의 죄를 논하였다. 이공은 공의 오랜 벗이었기에 많은 친구들이 그를 위해 회유하며 “용서할 방도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공이 말하기를,
“내가 언제 아무 대감이 일부러 일을 망쳤다고 하였는가. 최 정승조차도 그 본뜻을 따져보면 필시 좋은 방책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모두 백성을 병들게 하고 나라를 욕되게 하는 결과를 면하지 못하였다. 대각이 일을 논하면서 어찌 취사선택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얼마 후 수찬으로 옮기고 시강원 보덕에 임명되어 상소하여 동궁을 보도할 방도를 논하였다.“천하에서 제일 가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라는 황상(黃裳)의 말을 인용하여 공경과 예의를 다해 진선 권상하(權尙夏)를 불러들여 훈도의 책임을 맡길 것을 요구하였다. 얼마 후 사간원 사간으로 옮겼다.
당시영소전(永昭殿)을 옮겨 봉안하는 일이 있었는데, 두세 대신이 이유 없이 참석하지 않았다. 공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전하께서 영소전에 대하여 비록 예절의 등급을 낮추었으나 신하가 존숭하고 받드는 의리에 있어서는 어찌 감히 억지로 차등을 두어 위의와 체모 사이에 이처럼 흠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얼마 후 휴가를 청해 고향으로 돌아가 상소를 올려 시비를 바로잡고 호오를 밝혀 붕당을 타파하는 요점으로 삼도록 논하였는데 거의 수천 자였다. 이에 앞서 성균관 유생들이 좨주 윤증을 부르도록 청하고자 하였으나 대사성 송상기(宋相琦) 공을 꺼려서 마침내 쫓아내려는 계책을 세웠다.
공은 선비의 기습이 바르지 않다고 통탄하며 상소 말미에 근본을 찾아서 말하기를,
“오늘날 유생들이 존숭하는 자는 지난날 스승을 배반한 사람입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백성은 세 가지 존재 덕택에 살아가니, 한결같이 섬겨야 한다. 그들이 있는 곳에는 목숨을 바쳐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스승의 의리는 중요하기가 실로 임금, 아버지와 차이가 없습니다.
지금 윤증은 젊어서 선정신 송시열의 문하에서 40여 년 수학하였으니, 그 계발하고 이끌어준 은혜가 부자 관계와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사사로운 유감 때문에 무함하고 능멸하여 못하는 짓이 없으니, 참으로 천고에 한 번 있는 큰 변고입니다.
그러므로정승 김수항(金壽恒), 민정중(閔鼎重)은 백성의 인륜이 막히고 세도가 어지러워질까 몹시 두려워하여 더 이상 유현(儒賢)으로 대우하지 말라는 뜻을 탑전에서 아뢰었습니다.성상께서 특별히 윤허를 내리신 덕택에 사문이 실추되지 않고 선비가 나아갈 길도 거의 바르게 되었습니다.
그 뒤 윤증이 기사년(己巳年, 1689, 숙종 15) 흉인들에게 추대를 받아 다시 청현직에 나와서 오늘날까지 인순하며 그대로 있습니다. 그 무리가 존숭하고 따르면서 못하는 짓이 없고, 전하께서 대우하는 예의도 몹시 융숭하였기에 점차 국시(國是)가 뒤집히고 선비들의 기습이 어그러져 그 폐단이 대사성을 쫓아내는 데 이르렀으니, 참으로‘스승이 걸으면 나도 걷고 스승이 말하면 나도 말한다.’라는 것입니다.
유생들만 유벌(儒罰)을 받는다면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근원을 맑게 하지 않고서 지류를 깨끗이 하려 한다면, 신은 날마다 백 명을 벌하더라도 끝내 선비의 풍습을 바로잡고 나라의 체모를 높일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성상께서 “대의는 참으로 좋으니 내가 가상히 여긴다.”라는 비답을 내리고,
또 이르기를,
“상소 말미의 일은 무슨 말인가.예전에 좨주가 당한 일은 시비가 어떠한지를 막론하고 관청의 문서가 아니었는데,당시 대신이 확대하여 조정에 알린 것은 큰 실착이다. 그런데 내가 깊이 생각하지 못하여 경솔히 윤허한 결과 고요한 평지에 큰 파란이 일어났으니 내가 지금까지도 후회한다. 이처럼 고집하지만 지금 갑자기 바꾼다면 이것은 마음속에 주관이 없어서 안정되지 못하고 흔들리는 것이니, 나는 이렇게 하지 않겠다.”
하였다.
옥당 김진규(金鎭圭) 공이 상소하여 승정원이복역(覆逆)하지 못한 잘못을 논하니, 승지 송창(宋昌), 김우항(金宇杭), 이세재(李世載) 등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복역할 겨를이 없었으니 큰 실착이고, 유신(김진규)이 상소로 지척한 것이 바로 여론이라고 하였다.
집의 이정겸(李廷謙)의 이름이 장리(贓吏)의 공초(供招)에 올라 감히 공무를 행하지 못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염치를 무릅쓰고 나와 공을 탄핵하며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도록 하였다. 성상이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지평 정유점(鄭維漸)은 이정겸이 염치를 돌아보지 않고 하위직이 행해야 하는성상소(城上所)를 갑자기 대신 행하여 대각의 체모를 손상하였다며 인피하였다.
장령 김덕기(金德基)가 말을 만들어 처치(處置)하여 정유점을 출사하게 하고, 이어서 이전의 계사를 정지하였다. 처치 계사에 대한 비답에“부자와 사제 중에 어느 것이 무겁고 어느 것이 가벼운가.”라는 하교가 있었기에 지평 이언경(李彥經)이 성상의 뜻에 영합하여 이정겸의 뒤를 이어 나와서는 다시 공을 논죄하였는데 말뜻이 거짓되고 패악하기가 이전의 계사보다 갑절이나 심했다. 성상이 즉시 윤허하였다.
이때부터 시배가 ‘부자와 사제 중에 어느 것이 무겁고 어느 것이 가벼운가.’라는 성상의 하교를 빌미로 국시를 확정하였다. 공은 이것이 비단 한때의 시비를 밝히지 못할 뿐 아니라 장차 세도에 끝없는 화를 끼칠 것이라 여겨 마침내 경전에 근거하고 의리를 참작하여〈사생설(師生說)〉을 지어 후학을 깨우쳤으니, 문집에 보인다.
이듬해 봄, 비국에서 천거하여 동래 부사(東萊府使)에 임명되고 통정대부의 품계를 더하였다. 공은 작년 이후로 더욱 세상에 뜻이 없었는데, 단지 변방 수령의 체모상 감히 병을 말할 수 없어 억지로 부임하였다. 몸가짐이 청렴하고 엄격하여 역관들이 숨을 죽이고 왜인이 복종하였다.
경진년(庚辰年, 1700, 숙종 26), 체직되어 돌아왔다. 이듬해 봄, 또 천거받아 광주 부윤(廣州府尹)에 임명되었다가 오래지 않아 파직되어 돌아왔다. 겨울에 예조 참의가 되었다가 승정원 동부승지로 옮겼다. 이보다 앞서 남구만(南九萬), 유상운(柳尙運) 등이 나라의 역적을 옹호하여 대궐의 변란을 양성하였다.
그러다가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세상을 떠나자 성상이 직접 무고(巫蠱)의 옥사를 캐내어 장희재(張希載)를 주살하고 남구만과 유상운의 당파를 쫓아냈다. 그리하여 이세백(李世白) 공이 정승 자리에 있으면서 공과 함께 국정을 담당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공에게 확고한 뜻이 있다는 것을 알고 수암(遂菴권상하)에게 편지를 보내 조정에 나오도록 권하게 하였다.
수암이 누차 말하기를,
“이 정승이 성심으로 인정하고 시세가 큰 일을 할 기회입니다. 시대를 위해 한 번 나와 평소 품은 뜻을 펴되, 만약 안 된다면 다시 은거하는 것이 진퇴의 의리에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공은 수암의 말에 감동하고 또 한결같이 버티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여겨 마침내 명을 받들고 도성에 들어갔다.
이공은 공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기뻐하여 매사를 반드시 상의하였다. 공이 김진규 공 등 두세 명류(名流)와 함께 청론을 주장하고 세도를 유지하니, 선비들이 크게 의지하였다.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이조 참의로 옮겨 임명되었다. 청탁을 단절하고 적체된 이들을 선발하였으며, 집에는 잡스러운 손님이 없어 참새 잡는 그물을 칠 만하였다.
하루는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공이 도보로 찾아왔다. 공이 말하기를,
“공은 어찌하여 몸을 굽혀 이곳으로 왔습니까?”
하니,
김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마침 지나가는 길에 공의 집을 보니 물과 같아 현달한 사람의 집 같지가 않으므로 왔습니다.”
하였다.
그러고는 조용히 한참 동안 이야기하다 떠났다. 겨울에 정사하는 일로 인하여 대신의 뜻을 거슬러 파직되었다. 계미년(癸未年, 1703, 숙종 29) 2월, 다시 이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수찬 오명준(吳命峻)이 상소하여 이조를 공격하여 분을 풀려고 하였는데, 비난이 공에게도 미쳤다.
오명준은 오도일의 종손(從孫)으로 오도일이 권세를 잃는 모습을 보고는 한두 이름난 선비에게 아첨하고 빌붙으며 행장을 꾸려 왕래하며 오도일의 잘못과 악행을 드러내면서 못하는 짓이 없었다. 여러 공들이 그에게 속아 장차 이조 좌랑에 천거하려 하였으나 공만은 말하기를,
“오도일은 참으로 배척해야 하지만 오명준이 그래서는 안 된다.”
하였다.
하루는 한포(寒圃) 이공(李公이건명(李健命))이 공을 만나러 와서 오명준의 자를 부르며,
“오보경(吳保卿)을 이조에 천거하기로 여러 사람의 논의가 이미 정해졌는데, 공은 어째서 그리 고집하는가?”
하니,
공이 말하기를,
“그의 심사를 따져보면 분명 불길한 사람이니, 공은 훗날 보게 될 것이오.”
하였다.며칠이 지나지 않아 과연 그의 상소가 나왔다.공이 이공에게 말하기를,
“공의 보경이 과연 어떠한가?”
하고, 함께 큰 소리로 웃었다.
당시 이 정승(이세백)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공은 함께 나랏일을 할 사람이 없다고 염려하여 휴가를 내어 체직되고는 새벽에 즉시 강가로 나갔다. 이날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자 그대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 동쪽으로 돌아가 상소를 올려 새로운 명령을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재차 사양하고 이어서 우암이 받은 무고를 변론하였다.
이에 앞서 박세당(朴世堂)이라는 자가 조금 문예는 있었으나 행실을 멸시하였다. 아내가 죽어 장사 지낸 뒤 즉시 혼인하니, 우암이 듣고서 그르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젊어서 이조 낭청에 천거되는 길이 막히자 몹시 유감과 분노를 품고 마침내 벼슬하지 않고 교외로 물러나 살았다.
명목은 독서한다지만 주자의 학문을 헐뜯고 사서(四書)의 주석을 고쳐《사변록(思辨錄)》이라 하였다. 후생을 속여 유혹하고 오로지 그의 저술 및《장자(莊子)》,《열자(列子)》 따위의 책을 사사로이 가르쳤다. 또정승 이경석(李景奭)의 묘도문에서 우암을 모욕하여 소정묘(少正卯)에 비유하였으니지극히 거짓되고 패악하였다.
이는우암이 예전에 손적(孫覿)이 어떤 글을 지은 일을 가지고 이 정승의 〈삼전도비(三田島碑)〉를 비난한 적이 있으므로 이를 기회로 삼아 원망하는 글을 쓴 것이었다. 사론이 일제히 분개하여 성균관 유생이 상소하여 변론하고, 또 경전을 훼손하고 성인을 모욕한 죄를 제기하니, 성상께서 그 사람을 유배보내고 그 책을 불태우라고 명하였다.
이 정승(이경석)의 자손이 조부의 신원을 핑계로 우암을 무함하고 박세당을 편들었다. 공은 이 일이 사문의 중대한 시비에 관계되니 논사(論思)하는 직임에 있으면서 말이 없을 수 없다고 하며 마침내 사실에 근거하여 조목별로 분명히 변론하였다.
또 선조조에정개청(鄭介淸)의 배절의론(排節義論)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중외의 학교에 반포하여 보인 고사를 인용하여, 경학에 뛰어난 글짓는 신하에게 명하여 박세당이 고친 주석의 괴벽한 말을 일일이 논박하게 하여 사람들이 분명히 깨닫게 하고 선비의 풍습을 바로잡게 하였다. 연달아 이조 참의에 임명되고 홍문관 부제학으로 옮겼다.
갑신년(甲申年, 1704, 숙종 30) 봄, 가선대부 함경도 관찰사로 발탁되었다. 떠나기 앞서 입대하여 성상께 아뢰기를,
“신은 번방(藩邦)에 임명되어 자주 청을 올릴 수 없으니, 소회를 다 아뢰고 가겠습니다.”
하고, 명나라 두 황제의 사당을 세우는 것이 마땅하다고 극진히 아뢰며 성상의 뜻을 결정하도록 도왔다.
이해에 숙종이 명나라가 멸망한 것을 애통해하고 옛 갑자가 다시 돌아온 것에 감격하여 신종(神宗)과 의종(毅宗) 두 황제를 높이고 보답할 방도를 다하도록 논의하였으니, 한편으로는 임진년(壬辰年, 1592, 선조 25)의 잊기 어려운 은혜를 갚기 위해서이고, 한편으로는《춘추》의 존주(尊周) 의리를 밝히기 위해서였다. 대신 이하가 대부분 두려워하고 꺼려서 막았기에 조정의 논의가 아직 귀일되지 않았는데, 공이 예전부터 개탄하였으므로 언급한 것이었다.
함경도에 거듭 기근이 들어 굶어죽은 시체가 가득하고, 새로 부임한 뒤라 창고가 고갈되었다. 이에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하고 진휼할 밑천을 긁어모았다. 또 조정에 청하여 영동(嶺東) 연해 여러 고을의 곡식을 옮기도록 하였다. 정성을 다해 구휼하니 온 도의 백성이 이에 힘입어 죽음을 면하였다.
공은 예전에 경성 판관을 지냈기에 함경도의 방비가 허술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 관찰사는 한 도의 주인인데 수하에 군사가 없으니 만약 급한 일이 생기면 방어하기 어렵다는 점은 과거 신면(申㴐)의 일로 알 수 있었다. 마침내 조목별로 형편을 진술하여 장계로 아뢰고 허락을 받아 함흥에 독자적인 진을 새로 설치하고, 각종 군기는 모두 스스로 마련하였다.
가을에 대규모 훈련을 시행하고 살펴보니, 앉고 일어나고 나아가고 물러남에 거의 방법을 알았다. 또 양사청(養士廳)을 설치하여 조약을 세우고 스승을 가려뽑아 양식을 주어 어리석은 선비를 가르쳤다. 간혹 향음주례와 향사례를 시행하니 북방 사람들이 고무되었다.
탐욕스럽고 잔인한 관리를 법으로 다스려 출척(黜陟)의 법을 엄격히 하였다. 이로 인해 비방하는 논의가 간혹 나왔는데, 어떤 이는 정사가 너무 엄격하여 사람들이 불안해 한다고 하였다. 서울에 있는 친구들 중에는 편지를 보내 경계한 사람도 있었다. 마침 불법을 저지른 어떤 무관 수령을 조사하였더니, 간사하게 훔친 정상이 낭자하였다.
그 사람은 평소 윗사람을 잘 섬겨 출세하였다. 죄를 심리하는 자리에 있는 자가 몰래 그 사람을 위해 어사를 따로 보내 그 일을 조사하도록 청하였다. 이른바 어사라는 자는 바로 이정제(李廷濟)였다. 이정제는 이보다 앞서 함흥 판관(咸興判官)에 임명되었는데, 공은 그의 아버지가 당시 도내의 수령을 맡고 있으므로 체례상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장계로 논하여 체직시켰다.
이정제는 몹시 원한을 품고 있다가 이때에 와서 조사한 안건을 전부 뒤집고 장리(贓吏)의 죄를 벗겨주었다. 공은 조정이 이렇게 관찰사를 믿지 않으니 의리상 하루도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고 여겼다. 이때 또 본가에서 부인의 상을 당하자 연달아 상소하여 힘껏 사직한 결과, 체직되어 동지중추부사 겸 동지의금부사에 임명되었다. 돌아와 도성 밖에 이르러서 편비(褊裨)를 시켜 밀부(密符)를 대신 바치게 하고, 곧장 고향으로 돌아갔다.
3월, 도승지에 임명되었다가 부제학으로 옮겼다. 연달아 사직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했다. 이해 겨울 성상이 오랫동안 편찮았는데 홀연 선위(禪位)하겠다는 명을 내렸다. 백관이 놀라고 당황하여 호소하여 중지하도록 청하였다. 공은 감히 물러나 있지 못하고 다급히 상경하였는데, 길에서 예전의 전지를 도로 거두어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도성에 들어가 상소하여 병을 다스리고 마음을 다스리는 방도와 노기를 잊고 남을 대하는 방도를 극진히 아뢰었다.
얼마 후매복(枚卜)하는 일이 박두하자 성상이 정승을 책망하며 공정하지 않다고 지목하였다. 승정원이 복역(覆逆)하자 또 아첨한다며 배척하였다. 공은 근심과 탄식을 견디지 못하고 즉시 동료와 함께 차자를 올려 구원하였는데, 말이 몹시 간절하였다. 성상이 비답을 내려 구원한다고 배척하니, 마침내 상소를 올려 견책을 청하고 체직되어 돌아갔다. 겨울에 한성부 우윤에 임명되었다.
병술년(丙戌年, 1706, 숙종 32) 봄,어사 유술(柳述)의 서계(書啓)로 인하여 심문을 받았다. 갑신년(甲申年, 1704, 현종 15) 가을 부인의 상을 당했을 때 연원역(連原驛) 관사(館舍) 뒷산 기슭에 산소를 정하였는데,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으며 관청과는 매우 멀고 또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예전부터 사대부들이 왕래하며 표식을 해 둔 자가 많았기에 집에 있던 자제들이 본 주인에게 얻어서 썼던 것이다. 공은 수천 리 떨어진 함경 감영에 있어 관여하지 않았다. 유술은 권세를 믿고 빼앗아 점유하였다고 무고하였는데 말이 지극히 허망하였다.
자제들이 사실대로 격쟁(擊錚)하여 하소연하려 하자 공이 통렬히 금지하며,
“집안 일은 가장이 맡는 법이다. 더구나 시배들이 반드시 내게 해를 끼치려 하는데, 어찌 모른다고 해명하여 구차히 모면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조정에서 재차 한성부 낭관을 보내 형세를 그려 오게 하였다. 그 낭관이 시배의 사주를 받고 이전의 낭관이 한 말과 완전히 반대로 보고하니, 헌사(讞司의금부)에서 억지로 끌어다 법을 적용하여 도년(徒年)으로 청풍(淸風)에 유배하였다. 그해 가을, 사면을 받고 장암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몇 년 동안 서용하는 명이 내리지 않아 날마다 유생들과 강학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러나 정사의 잘잘못과 세도의 성쇠에 대해 걱정하고 사랑하며 감동하고 분개하는 마음은 나아가나 물러가나 차이가 없었다. 최석정이 자기가 편찬한《예기유편(禮記類編)》을 바치며 경연에서 강하도록 청하였다.
공이 듣고서 탄식하며,
“이 화는 역적 윤휴에게서 시작되어 박세당과 최석정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윤휴가 고친 것은 단지《중용장구》의 주석 뿐이었지만 박세당은 사서의 주석을 전부 고쳤고, 박세당이 바꾸고 어지럽힌 것은 집주에 그쳤으나 최석정은 경문(經文)까지 무너뜨렸으니, 세도와 사문의 화가 장차 어디서 그칠지 모르겠다.
누가 능히 말하여 물리쳐 도를 지킨 맹자의 공로를 계승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수암에게 편지를 보내 상소를 올려 명백히 분변하고 통렬히 배척하여 위로는 성상의 의혹을 풀고 아래로는 방향을 잃은 선비들을 인도하도록 권하였다.
수암은 당시 겸양으로 자처하였기에 갑자기 세도의 책임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또 몸은 나가지 않으면서 말을 한다면 말하고 침묵하는 도리가 아니라며 어려워하였다. 공이 또 말하기를,
“안자(顔子)가 나오지 않은 것은 공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안자는 결코 꼼짝 않고 누추한 골목에서 지조를 지켰을 리가 없습니다.”
하였다.
또난신적자는 누구나 토벌할 수 있으니 반드시 사사(士師)라야 주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거론하며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바로잡도록 청하였다. 경인년(庚寅年, 1710, 숙종 36) 봄, 성상이 병간호를 신중히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최석정의 죄를 성토하고 대사간으로 공을 불렀다. 공은이천(伊川)이 서감(西監)으로 나아간 전례에 따라 명을 듣자마자 가서 상소하여 최석정의 일을 논하였다.
“그의 죄상은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우나 우선 한두 가지 큰 것을 말하자면, 역적의 자식을 풀어주도록 하여 훗날 이익을 도모할 바탕으로 삼고, 임부(林溥)의 옥사를 어지럽게 만들어 사류를 일망타진하려는 계책을 세운 것이니, 그의 마음은 길 가는 사람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온 조정의 관원들이 우물쭈물하며 감히 전하를 위해 분명히 말하는 자가 없습니다. 그 권위가 아래로 옮겨갔으니, 아, 두렵습니다.
약원의 일 한 가지는 원래 성상의 하교가 나오게 된 발단과 합계하여 조목별로 나열한 것으로 말하자면 실로 인지상정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며 사람의 이치로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전하의 신하 된 자가 그 죄를 성토하는 것은 몹시 분명한 이치인데, 공(公)을 저버리고 당파를 위해 죽으려는 무리가 번갈아 나와 구원하고 앞장 서서 상소하여 마치 절개를 세우는 것처럼 하니, 이것은 무슨 이치입니까. 이른바《예기유편》이라는 것도 근원을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육경과 사서, 주석의 글은 모두 요, 순, 공자 이래 정자, 주자가 서로 전수한 뜻으로 변치 않는 법이니, 이를 벗어나 말을 하면 오랑캐의 가르침이요 이단의 사설일 뿐입니다. 불행히 근년 이래로 사도(斯道)가 액운을 만나 정자와 주자를 공격하는 논의가 잇달아 나왔습니다.
역적 윤휴와 박세당이 앞에서 창도하고, 최석정이 뒤에서 호응하였습니다. 지금 그가 편찬한 책은 경문을 바꾸어 놓고 장구를 고치고서 감히 중외에 간행하여 배포하며 방자하게 아뢰었습니다. 윤휴의 학문은 흘러서 흉패와 반역으로 귀결되었으니, 이는 임금을 무시하는 무리입니다.
박세당의 학문은 흘러서 예의를 등지고 제사를 폐하는 행위가 되었으니, 이는 아버지를 무시하는 가르침입니다. 이는 모두 성인을 업신여기고 경전을 훼손하는 데서 시작하여 방자하게 날뛰어 결국 인륜을 없애는 지경에 빠졌으니, 최석정이 군주의 병을 가볍게 보고 불충, 불효의 죄를 저지른 것은 모두 성인을 모욕하고 경전을 훼손하는 버릇이 뿌리가 된 데서 말미암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일이 정사의 득실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는 듯하나, 세교에 해를 끼치고 나라에 흉하기가 이처럼 매서우니, 어찌 몹시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또 율곡 이 선생이 선조의 체후가 회복된 뒤 경계를 아뢴 상소의 말을 인용하여 성학(聖學)에 힘쓰고 정치의 근본을 바르게 하는 요점으로 삼으니, 성상이 모두 융숭하게 답하였다. 또 3년 동안 상식(上食)을 폐한 박세당의 자제와 문생의 죄를 다스려 풍속을 바로잡도록 청하였다.
사헌부 대사헌으로 옮겨 임명되고 비변사 당상을 겸하였다. 부제학으로 옮기고 동지성균관사를 겸하였다. 처음 최석정이 《예기유편》을 편찬할 적에 윤증도 함께 참여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영남과 호서의 유생 홍주형(洪胄亨), 곽경두(郭景斗) 등 수백 명이 상소하여 함께 경전을 훼손한 죄를 극언하였다.
성상이 갑자기 엄하게 배척하고, 또 이르기를,
“조정 신하들이 의론을 좋아하니 나는 몹시 취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공을 가리킨 것이었다.
옥당이 차자를 올려 구원하였으나 들어주지 않고 또 하교하기를,
“정호의 강직한 점은 취할 만하지만 의론을 좋아하는 점은 내가 취하지 않는다. 승지는 나가서 정호에게 말하여 의론을 너무 좋아하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그러자 시배가 이태우(李泰宇)를 사주하여 상소를 올려 비방하게 하였는데, 그중에 “정 아무개는 자기 아들을 보내어 곽경두를 불러와 사주하여 유생들의 상소를 짓게 하였습니다.”라는 말이 있었다. 당시 공의 두 아들이 모두 시골에 있었다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사실이니, 그밖에 날조한 것들은 이를 미루어 알 수 있다.
성상이 몹시 성내어 하교하기를,
“정호는 크고 작은 의론을 모두 앞장서서 담당하고 그간 유생의 상소를 모두 사주하였다. 성균관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속셈을 자행하였으니, 이는 실로 오랑캐 땅으로 쫓아내어 중국에 함께 살지 못하게 해야 하는 자이다.”
하고, 극변에 원찬(遠竄)하라고 명하였다.
다시 바꾼 유배지가 가깝다는 이유로 금부 당상을 파직하고, 특교로 함경도 갑산(甲山)에 유배하며 즉시 출발하라고 하였다. 이날 큰 비바람이 불고 도성에 물이 넘쳐 교량이 부서지고 가옥이 떠내려갔기에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공은 감히 장마를 이유로 지체하지 않고 급히 유배지로 달려갔다.
회양(淮陽)에 이르자 산골 물이 갑자기 쏟아져 건너지 못할 뻔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철령(鐵嶺)을 넘자 함경도 백성이 공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모여서 바라보며,
“이분은 우리의 옛 안찰사이다. 갑신년(甲申年, 1704, 숙종 30)에 우리 공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미 굶어죽은 귀신이 되었을 것이다.”
하였다. 선비들이 곳곳에서 맞이하고, 차마 떠나지 못해 따라가는 자도 많았다.
유배지에 도착하자 풍토와 풍속이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었으나 공은 운명처럼 편안히 여기고 독서를 멈추지 않으며,
“예전 송강(松江정철) 선조께서 강계(江界)에 위리안치 되었을 때 울타리의 나무를 깎아 《대학》의 의심나는 뜻을 써서 공부하였으니,나는 감히 잊을 수 없다.”
하였다.
함흥 이북, 단천(端川) 이남 여러 고을의 선비들 중에 양식을 싸들고 와서 수업을 받는 자가 항상 수십 명이었다. 공은 그때마다 부자의 인륜과 군신의 의리를 알려주고,〈오전잠(五典箴)〉,〈구용잠(九容箴)〉,〈구사잠(九思箴)〉등을 지어 인도하였다. 또 사광(師曠)의 말을 뽑아〈노학잠(老學箴)〉을 지어 스스로 경계하고 성찰하니, 시간을 부족하게 여기는 뜻이 있었고 구속된 괴로움을 거의 잊었다.
대간 어유귀(魚有龜), 남도규(南道揆)가 잇달아 상소하여 공의 원통함을 하소연하였으나 모두 대답하지 않았다.
신묘년(辛卯年, 1711, 숙종 37) 5월, 영의정 서종태(徐宗泰) 공이 성상께 아뢰기를,
“정 아무개가 벌을 받은 지 지금 이미 한 해가 지났습니다.
또 유생들이 올린 상소에 나오는 ‘아들을 보내 사람을 사주하여 상소하게 하였다.’라는 이야기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고 합니다. 경연의 우두머리에게 당초 중도를 지나친 벌을 내렸고, 오랫동안 외딴 변방에 있다가 행여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면 어찌 태평성대의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우의정 조상우(趙相愚) 공도 영의정처럼 말하였다.
성상이 이르기를,
“지금 들으니 아들을 보내어 불러왔다는 이야기는 이미 사실과 다르다고 하고, 벌을 시행한 지도 이미 한 해가 지났으니 그대로 둘 수 없다. 풀어주라.”
하니, 대간과 성균관 유생들이 무리지어 일어나 막았다.
8월, 강원도 평창현(平昌縣)으로 이배하고, 임진년(1712) 1월, 완전히 풀어주라는 명이 내렸다. 대신(臺臣) 이정억(李禎億)이 상소하여 공이 무함을 받은 실상을 아뢰니, 성상의 비답에,
“나는 본디 정호를 영원히 버리려는 뜻이 없었으나 갑자기 복직하는 것은 안 된다.”
하였다.
계사년(癸巳年, 1713, 숙종 39) 2월, 영의정 이유(李濡) 공이 연석에서 아뢰기를,
“정호의 일은 지난번 대간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영원히 버리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교하셨습니다. 성상께서 포용해 주시는 도량을 누군들 우러러 공경하지 않겠습니까.
또 그가 죄를 입을 때의 사실에 실상이 아닌 것이 있습니다. 아무개의 강직함은 성상께서 통촉하시는 바이며, 문학과 견식도 남보다 뛰어납니다. 지금 때맞추어 서용하신다면 실로 성상의 덕이 빛날 것입니다.”
하고, 병조 판서 조태채(趙泰采), 이조 참판 이만성(李晩成)이 입을 모아 그의 청렴결백한 절개를 칭송하였다.
이만성은 또 말하기를,
“정호는 지난번에 시골 유생에게 무함을 받아 결국 유배되기까지 하였습니다. 신이 들으니 그는 유배지에 있을 때 강학을 그만두지 않았고, 오로지 학자를 가르치는 것을 임무로 삼았기에 함경도 사람들이 보고 감동하는 효과가 없지 않았습니다. 그가 마음을 다해서 곤궁에 처하는 의리를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옥당 이택(李澤), 헌납 김보택(金普澤) 등도 잇달아 아뢰었는데, “이해를 돌아보지 않고 성심으로 나라를 제몸처럼 여겼습니다.”라고도 하고, “비단 절개가 훌륭할 뿐만 아니라 늙어서도 책을 읽으니 지금 조정 관원 중에 그보다 경학을 잘 하는 자가 없습니다.”라고도 하였다. 성상이 즉시 서용하라 명하고 대사성에 임명하였다.
상소로 대략 아뢰기를,
“신이 받은 죄명은 지금 대략 모두 밝혀졌으나 그중에 ‘크고 작은 논의를 모두 담당한다.’라는 성상의 하교는 신이 실로 해명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이겠습니까. 몇해 전 스승을 배신한 죄로 사람을 배척한 것도 신이고, 그 뒤에 3년 동안 제사를 지내지 않은 죄를 논한 것도 신이며, 경전을 훼손하고 성인을 모욕한 죄를 다스리도록 청한 것도 신입니다.
이는 모두 비상한 관계가 있는 일로 세상 사람들이 말하지 않은 것인데 신은 번번이 함부로 논하기를 그치지 않아 끝내 큰 벌을 받았습니다. 지금 여러 신하들이 아뢰고 성상께서 관대히 용서하신 것은 신이 징계를 받았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의 편협함은 더욱 고질이 되어 잘못인 줄 모르겠으니, 스스로 새로워져 군주가 성취시켜 주려는 뜻과 죄를 씻어주는 은혜에 부응하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비록 이 때문에 또 큰 벌을 받더라도 신은 사양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성상이 지극한 말로 하유하고 곧 병조 참판, 부제학에 임명하였다.
존호를 올리는 논의를 계기로 상소하여 효종의 뜻과 사업을 아뢰어 계승하는 의리를 돕고, 송 문정공을 종묘에 배향하도록 청하였다. 묘당에 명을 내리자 여러 사람이 ‘전례에 따르면 반드시 그 임금 당시에 죽은 신하라야 할 수 있다.’라고 하며 난색을 표하였다.
조보(趙普)는 송 태조(宋太祖)의 묘정에 배향되고, 우리나라의 홍언필(洪彥弼)은 인종(仁宗)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니모두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는데, 논의가 마침내 시행되지 못하자 식자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봄부터 여름까지 제수하는 전지가 자주 내렸으나 누차 상소하여 간절히 사직하고, 소명이 내릴 때마다 부득이 도성에 들어가 사은하였다.
한번은 연석에 들어가자 성상께서 조용히 대면하고 간곡히 타이르다가 마침내 문청공(文淸公정철)의 일을 언급하며,
“송강(松江정철)의 문집은 어찌 그리 소략한가?”
하니, 공이 감격하고 황공하여 절하고 사례하고서 대답하였다.
이날 이 광경을 본 신하들은 모두 영예롭게 여겼다. 오래지 않아 휴가를 청하여 돌아가자 옥당에서 글을 올려 붙잡도록 청하였으나 대답이 없었다. 겨울, 성상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필마로 출발하여 문안하는 반열에 참석하였다.
갑오년(甲午年, 1714, 숙종 40) 봄,정언 정수기(鄭壽期)에게 비난을 받았다.정수기는 공의 동종(同宗)이었으나 윤증의 문도 나양좌(羅良佐)의 사위였기에 항상 윤증을 위해 유감을 풀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언관에 임명되자 홀로 계사를 올리기에 급급하였다.
처음에는 지적하여 말할 것이 없자 단지 추악하고 패만한 말로 제멋대로 모욕하고 장황하게 내뿜었는데 거의 수천 자였다. 사람들은 탄핵하는 글이 생긴 이래로 못 보던 것이라 하였으며, 그의 동류들조차 모두 놀라고 비웃었다. 공은 상소하여 스스로 변론하지는 않고 단지 정자(程子)가 이른바‘지극히 어리석은 친족 자제는 책망하기 부족하다.’라는 뜻으로 처신하였다.
조정에서는 공이 처지상 편안히 있기 어렵다고 논의하여 경기 감사에 임명하였다. 누차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여 억지로 부임하였다. 오래지 않아 대사헌 윤덕준(尹德駿)이 이태우(李泰宇)의 상소에 나오는 말을 다시 답습하여 헐뜯기를 그치지 않았다. 공이 상소하여 사면을 청하자 성상의 비답에 ‘대사헌의 말을 깊이 혐의로 삼을 필요는 없다.’라는 하교가 있었으나 공은 연달아 상소하여 체직되었다.
8월, 한성부 좌윤에 임명되었다가 곧 형조 참판으로 옳겼다. 교대한 뒤 밀부(密符)를 대신 바치게 하고 도성 밖에서 배를 세내어 돌아왔다. 겨울, 삼척 부사(三陟府使)에 임명되고 이듬해 봄에 부임하였다. 여름, 부제학으로 소명을 받자 곧장누암(樓巖)의 강가 거처로 돌아갔다.
시배들이 또 내직으로 옮긴 것을 그르다고 하자 공은 연달아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마침《가례원류(家禮源流)》발문에 관한 일 때문에 엄한 비지가 거듭 내렸는데, 대각이 계사를 올려 유배를 청하였으나 삭출하라고만 명하였다. 시남(市南) 유계(兪棨) 공이 금산(錦山)으로 물러나 살면서《가례원류》를 편찬할 때, 윤선거(尹宣擧)는 강화도의 변란을 겪은 지 얼마 안 되어 비방하는 논의가 세상에 가득하였다.
유공은 평소 그와 친하였기에 의지할 데 없는 그를 불쌍히 여겨 이웃에 불러다 놓고《가례원류》의 일을 돕게 하였다. 유공이 훗날 지우를 입어 명을 받고 조정으로 돌아가자, 마침내《가례원류》의 초본(草本)을 윤증에게 맡기고 교감하여 책을 만들게 하였다. 윤증은 어릴 적부터 그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았기에 정분이 부자 관계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뒤 시남이 임종을 앞두고 편지를 보내 윤선거에게 영결을 고하고, 말미에,
“인경(仁卿)에게는 기운이 짧아 두루 편지를 보낼 수 없으니, 부탁한 일은 죽은 뒤라도 반드시 알려달라.”
하였다.
인경은 윤증의 처음 자(字)이니, 그의 마음은《가례원류》에 연연했던 것이다. 윤선거가 시남의 행장을 지으면서도 “공의 저술에 《가례원류》가 있다.”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수십 년 이래로 시남의 아들들은 모두 일찍 죽고, 손자 유상기(兪相基)가 윤증의 집을 오가며 계속 옛 우의를 다졌다. 그런데 《가례원류》를 언급할 때마다 “아직 교정을 다하지 못했으니 다 마치면 즉시 돌려주겠다.”라고 하였다. 유상기는 이후 서울의 두세 집안에《가례원류》의 사본이 있는데 이를 두고 윤씨 집안의 책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유상기는 그 말이 잘못된 것을 괴이하게 여겼으나 교감이 이미 끝났을 것이라고 짐작하였다. 그리하여《가례원류》의 본말을 정승 이이명(李頤命)에게 모두 말하니, 그가 연석에서 아뢰어 전라 감사에게 간행하게 하라고 청하였다. 유상기가 마침 전라도의 수령으로 임명되어 지나는 길에 윤증을 만나보고《가례원류》를 간행하여 배포하라는 명을 전하고 교감한 본을 달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즉시 내 주었으나 곧 다시 요구하여 되찾아가 다시 내 주지 않으면서,
“이 책은 대대로 전해 오며 우리 집안의 책이 된 지 오래이다. 대신이 아뢴 말은 실상과 전혀 다르니, 갑자기 간행하여 배포할 수 없다.”
하였다.
유상기는 비로소 종전의 ‘미처 마치지 못했다.’라는 말과 베껴서 남의 집에 전한 일이 오로지 현혹시켜 빼앗으려는 계책에서 나온 줄 알았다. 마침내 자기 집에 보관된 최초의 본을 가져다 교감하여 목판에 새기고, 수암과 공에게 서문과 발문을 청하였다.
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한번 우옹을 배반한 것도 이미 세상의 변고인데, 지금 또 시남을 배반하는가?”
하고, 발문에 곡절을 대략 서술하였다.
이때 와서 유상기가 간행하여 바치자, 성상께서 서문과 발문을 보고 몹시 화를 내며 책에서 발문을 제거하라고 명하고 특별히 공을 파직하였다. 승정원에서 복역(覆逆)하고 옥당에서 차자를 올려 구원하였으며, 대사간 이관명(李觀命)은 파직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어들이도록 계청하였으나 모두 온당치 않다는 하교를 내렸다.
소인들이 날뛰며 장차 기회를 틈타 모함하려고 하였으니, 그들의 계책은 본디 유배 정도에 그치지 않았으나 숙종의 현명함에 힘입어 끝내 계책을 이루지 못했다. 병신년(丙申年, 1716, 숙종 42) 봄, 정언 조상건(趙尙健)이 상소하여 윤증이 스승을 배반한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논하며 극렬히 말하고, 이어서 공이 견책을 받은 일을 언급하였다.
적신(賊臣) 이진유(李眞儒)가 입대하여 제멋대로 거짓을 말하고 마침내《가례원류》를 오로지 윤씨 집안의 책으로 삼아 수암과 공을 모함하며 못하는 말이 없었다. 성상께서 가납하고 즉시 조상건을 영해로 유배하였다. 옥당 유봉휘(柳鳳輝) 등이 또 차자를 올려 수암을 파직하고 아울러 서문을 제거하라고 논하였다.
성균관 유생 및 서울과 지방의 유생들이 잇따라 상소하여 논하고, 대사성 민진원(閔鎭遠) 공 역시 상소하여 변론하였으나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시배는 윤증이 스승을 배반한 죄가 또 나와서 끝내 감추고 비호하기 어려우니, 만약 우암을 형편없는 소인으로 몰아넣으면 윤증은 저절로 군자가 될 것이라 여겼다.
그 무리 최석문(崔錫文) 등이 상소하여 윤증을 변호하며 먼저 송 아무개가 묘갈명에서 윤증의 부친을 배척하였으니 윤증의 처신은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윤증이 신유년에 우암에게 보내려던 편지[신유의서(辛酉擬書)]를 꺼내었는데, 모욕한 내용이 추악하고 참혹하여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정승 이여(李畬)가 상소하여 윤증이 우암에게 보내려던 편지를 논하며 “혹독한 관리의 조작보다 심하다.”라고 하였으니, 실상에 맞는 말이었다. 성상의 비답에 비록 “조용히 개진하고 의리가 명백하다.”라는 하교가 있었으나 끝내 받아들일 뜻이 없었다. 이때부터 세상에 감히 더 이상 윤증의 일을 말하는 자가 없었다.
그해 가을, 성상이 갑자기 승정원에 명하여 윤선거의 묘갈명과 윤증이 우암에게 보내려던 편지를 찾아 들이게 하고, 속히 비망기를 내려 후회한다는 뜻을 자세히 개진하고 옳고 그름을 확실하게 정하였다. 특명으로 공을 서용하고 사관을 보내 수암을 위로하였으며 서문과 발문을 도로 남겨두게 하였다.
이달 예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성상은 늘 윤증의 부친이 이미 묘갈명에서 모욕을 받았으니, 윤증이 스승을 배반한 것은 부득이하였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윤증을 배척하는 공의 논의에 대해 번번이 너무 심하다고 의심하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묘갈명과 윤증이 우암에게 보내려던 편지를 한 번 어람하고는 묘갈명에는 모욕하는 말이 없고, 보내려던 편지에는 실로 참혹한 모함이 있었기에 마침내 오늘날의 광명한 처분을 내린 것이었다.
얼마 후 대사헌으로 공을 부르니 가다가 이천(利川)에 이르러 상소하여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고는 윤선거의 죄를 덧붙여 아뢰기를,
“윤선거는 강화도에서 절개를 잃은 사람으로서 함부로 성조(聖祖효종)를 끌어다 환난을 함께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조의 뜻과 사업을 비난하며구천(句踐)은 속임수를 썼고 연광(延廣)은 미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복수설치(復讎雪恥)의 논의를 두고서 한갓 말만 번거롭게 할 뿐 실제로는 마음껏 놀고 태만하게 지내는 결과를 면하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자신을두거(杜擧)의 경계에 견주었습니다. 또 윤휴의 무리와 함께 몰래 논의하여 글을 짓고 상자에 깊이 감추어 먼 훗날을 기다렸다가 비로소 방자하게 세상에 간행하여 자기 잘못을 감출 바탕으로 삼았으니 몹시 무엄합니다. 뒤늦게라도 견책을 시행하여 국시를 정해야 합니다.”
하였다.
성상이 융숭하게 답하고 오래지 않아 윤선거 부자의 관작을 추탈하였다. 옥당 김재로(金在魯)가 이미 백골이 된 사람을 뒤늦게 벌주는 것은 헤아려 용서하는 방도가 아니라고 하였다.
공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성조에 대해서는 능침의 소나무와 잣나무가 제법 굵어진 뒤에 잘못하여 무함을 받았는데도 미워할 줄 모르고, 윤선거 부자에 대해서는 각기 자기가 저지른 죄 때문에 이미 백골이 된 뒤 삭탈관직의 벌을 받았다고 하여 구하기에 급급하니, 도대체 무슨 의리입니까.”
하였다.
겨울, 이조 참판으로 옮겨 임명되었다. 이듬해 봄, 성상이 온천에 행차하였다. 공은 마침내 직산(稷山)에서 어가를 맞이하여 행궁까지 배종(陪從)하고 사은한 뒤 이어서 문안하는 반열에 참석하였다. 어가가 돌아갈 때 병들었다고 아뢰고 수원(水原)에서 뒤에 남았다.
가을, 병들었다고 아뢴 장계를 도로 보내라는 하교가 있어 마침내 수로로 출발하였다가 여주(驪州)에 이르러 병이 위독해져 체직을 청하였다. 성상의 비답에 ‘반드시 경을 불러오고자 한다.’라는 하교가 있었으나 묵은 병이 더욱 심해져 명을 받들지 못하고 물러나 돌아갔다.
얼마 후 동궁이 대리청정하였는데, 공은 병으로 조정에 나아가지 못하여 글을 올려 대죄하며 학문에 힘쓰는 방도를 아뢰고, 이어서 효종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는 중대한 근본으로 삼고, 세도를 부지하며 기강을 세우도록 청하였다.
연달아 상소하여 전조(銓曹)의 직임에서 체직해달라고 청하였으나 동궁의 회유에,
“경의 사직하는 글이 누차 올라왔으나 시종일관 허락하지 않고 반드시 올라오게 하려는 이유가 따로 있으니, 더 이상 병으로 사양하지 말고 즉시 길에 오르라.”
하였다.
12월, 특지로 자헌대부 예조 판서로 승진하였다. 주자의 ‘사양하고 받고 나가고 물러나는 것은 비단 한 몸의 일이 아니라 풍속의 성쇠에 관계됩니다. 그런데 근래 사대부들은 빙자하고 기만하여 높고 중요한 관직을 조용히 사양하면서 편안히 앉아 반드시 오게 합니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연달아 상소하여 고사하였다.
마침 빈궁의 상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가서 곡하기 위해 출발하여 도성에 들어가 사은하였다. 얼마 후 휴가를 청해 돌아가려는데 홀연수유 단자(受由單子)를 돌려주라고 명하고,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 휴가를 청하라는 영지(令旨)가 내렸다. 지의금부사를 겸하였다.
2월, 이조 판서로 옮겨 임명되었다. 당시 동궁이 새로 대리청정하였기에 조정에서는 장차 공에게 의지하여 안정시키려고 논의하였다. 공은 처음 왔을 때는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그대로 떠나지 않으면 영화와 총애를 탐내는 것이니 진퇴의 의리가 아니라고 여겨, 마침내 글을 남기고 지레 돌아갔다.
공이 과거 예조에 있었을 때 성균관 유생들이 상소하여 윤선거의 사당을 철거하도록 청하자 공이 복주하여 그대로 시행하였다. 그 뒤 대신이 너무 심하다고 배척하며, 사액(賜額)과 관향(官享)만 철거하고 그 사당은 남겨두도록 청하였다. 이때 와서 오명준(吳命峻), 이명의(李明誼) 등이 상소하여 공을 공격하였다.
공이 상소하여 변론하기를,
“만약 윤선거에게 죄가 있다면 사액과 관향만 철거하고 그 사당을 그대로 남겨두는 것은 몹시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저들은 의지할 곳을 얻어 저절로 일망타진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옛사람이 이른바‘은혜가 내게 돌아오기를 바란다면 원망은 누가 감당하게 하겠는가.’라는 말은 참으로 귀신도 울릴 만하다.
얼마 후 체직되어 예조 판서에 임명되고 예문관 제학을 겸하였다. 동궁이 홍진을 앓는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의 경계까지 나아가 안부를 듣기 편하게 하였다. 대사헌에 옮겨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기해년(己亥年, 1719, 숙종 45) 1월, 다시 치사(致仕)를 청하고, 또 정자(程子)의‘1년이면 반드시 1년치 공부가 있어야 한다.’라는 말을 인용하여 날마다 덕업을 새롭게 하는 방도를 권면하고 마음을 비우고 겸손하며 반복하여 논란하도록 청하였다.
신료들이 질문하기 부족하다고 여기지 말고, 홀로 터득하였다고 스스로 만족하지 말라고 하였다. 당시 동궁이 서연에 나와 강연을 들을 때 오로지 침묵하였으므로 공이 듣고서 걱정하여 새해의 경계를 올린 것이었다. 한성부 판윤으로 옮겼다. 공이 먼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기로소에 들어가고, 당시 성상이 태조조의 고사를 따라 친히 기로소에 들어갔다. 공은 세상에 보기 드문 경사라 여겨 병든 몸을 억지로 일으켜 진하하는 반열에 참석하였다. 얼마 후 공조 판서로 옮겼다.
4월, 또 친림하여 기로소의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예를 마친 뒤 성상이 공에게 더 이상 나이를 핑계대지 말고 안심하고 도성에 머물라고 하였다. 공은 몹시 노쇠한 실상을 아뢰며 사양하고 사례하고서 물러났다. 겨울, 대사헌으로 옮겨 임명되고 대제학 권점에 참여하였다. 곧 특지로 숭정대부 판의금부사에 발탁되었다. 의정부 좌참찬에 임명되자 새로운 명을 힘껏 사양하였다.
경자년(庚子年, 1720, 숙종 46) 봄, 성상의 환후가 위중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도성에 들어가 명을 받들고, 연달아 문안하는 반열에 참석하였다. 성상의 환후가 날마다 위독해지자 대궐 아래로 거처를 옮겼는데 걱정이 외면에 드러났다. 동궁의 명을 받들어 산천에 기도하는 제문을 지어 올렸다.
성상이 승하하자 애통히 사모하고 통곡하니 마치 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겨우 성복(成服)을 마치자 즉시 빈전 도감 제조(殯殿都監提調), 찬집청 당상(撰集廳堂上)에 차임되어 그대로 궐내에 숙직하였다. 공은 평소 고질병이 있었는데 한 달 넘게 애태우고 다급해 한 뒤에 이어서 대상(大喪)을 당하여 근력이 소진되어 보는 사람들이 근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병세가 갑자기 심해져 궐 안에서 들것에 실려 처소로 돌아왔다. 연달아 빈전도감과 찬집청의 일로 날마다 소명이 내렸으나 모두 명을 받들지 못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가만히 있으면서 명을 어긴 죄를 쌓느니 차라리 지레 돌아가는 죄를 저지르겠다.”
하고, 마침내 퇴계 선생의 고사를 인용하여 상소를 남겨 돌아가겠다고 고하며,
“옛적 선정신 이황(李滉)이 명종(明宗)께서 빈전(殯殿)에 계실 때 고하지 않고 지레 돌아갔는데 당시에도 의심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이황은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 늙고 병들어 머물기 어렵다는 뜻을 스스로 드러내었으니, 옛사람은 몹시 부득이한 상황에서 부득이하게 행동한 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형편없는 신이 감히 스스로를 선현의 출처에 비기는 것은 아니지만, 늙고 병들어 부득이한 실상은 옛사람보다 갑절이나 심합니다.
더구나 이황의 덕망에는 국가의 안위가 달려 있으니, 그의 거취는 절로 가볍게 할 수 없는 것이 마땅한데도 오히려 이렇게 하였습니다. 더구나 신은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 일개 노쇠한 사람이니, 어찌 떠나지 않는 것을 의리로 삼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시대는 이황의 시대보다 더욱 멉니다. 이황이 이미 당시에 의심을 받았는데, 신이 오늘날 감히 면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가을, 애책문 제술관(哀冊文製述官)으로 도성에 들어가 글을 지어 올렸다. 겨울, 인산(因山)에 나아갔는데, 먼저 능 아래에 가서대여(大轝)를 맞이하고, 졸곡(卒哭)이 지난 뒤 즉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대신이 연석에서 조정 관원들이 너도나도 고향으로 내려간 잘못을 논하고, 또 휴가를 청하지 않고 지레 돌아갔다고 말하였으니, 공을 지적한 것이었다.
그러고는 불러 들이기를 청하니, 공이 상소하여 견책을 청하였다. 얼마 후 빈전 당상을 맡고 애책문을 제술하였다는 이유로 말을 하사하고 품계를 올려주라는 명이 내렸다. 상소하여 외람된 상전을 거두어 달라고 청하고, 겸하여 예문관 및 여러 관사의 제조 직임을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이듬해 6월, 국상(國祥)에 나아갔다가 돌아왔다. 당시 조정에서 별유(別諭)로 시골에 있는 신하들을 부르니, 공은 상소하여 늙고 병들어 억지로 나가기 어려운 실상을 아뢰고 거듭 치사를 청하였다. 가을, 지금 성상이 동궁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 나라의 근본이 비로소 정해져 사람들의 마음이 의지할 곳이 생겼다.
그러나 적신 유봉휘 등은 그 논의가 자기에게서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감히 기뻐하지 않는 뜻을 품고, 환관 및 궁녀와 결탁하여 번갈아 어지러이 참소하니, 삼전(三殿)의 사이가 멀어졌다. 그리하여 세제가 합문을 나와 자리에서 물러나려 하고, 대비는 글을 내려 애통하다는 뜻을 보였다.
정승 조태구 등은 감추고 발설하지 않다가 그제서야 환관과 궁녀를 국문하도록 청하고, 지레 먼저 처형하여 입을 막을 계획을 세웠다. 공이 속히 상소 수백 자를 써서 흉당이 번갈아 무함한 죄를 극언하였다.
대략 이르기를,
“신은 병들어 죽어가는 와중에 삼가 들으니, 전하께서 새로 중대한 처분을 내려 선조(숙종)께서 예우하던 대신을 전부 쫓아내고, 아래로 일을 말한 신하와 성균관 유생들은 모두 형벌을 받거나 감옥에 갇혔다고 합니다. 신이 시골에 있어 본디 무슨 일 때문에 무슨 죄악을 저질렀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실로 문헌에서 보지 못한 일입니다.
어찌 진심을 다하여 바로잡는 정성을 조금이나마 바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신 또한 선조의 옛사람이니 생사와 영욕을 의리상 혼자만 달리할 수 없습니다. 위축되어 엎드린 채 벌벌 떨면서 삼가 주벌을 기다립니다. 지금 또 삼가 들으니, 나라의 근본이 동요될 조짐이 있어 자성께서 애통해하는 하교를 내리셨다고 합니다. 신(臣)은 참으로 마음이 무너지고 아픔이 뼈에 사무쳐 차라리 살지 않고자 합니다.
아, 우리 성상의 춘추가 한창이신데 후손이 번성하는 경사가 아직도 늦어지고 있으니, 온 나라의 민심이 의지할 사람이 동궁이 아니면 누구이겠습니까. 그런데 한 종류의 무엄한 무리가 감히 불리하게 하려는 마음을 품고서 번갈아 나와서 흔들며 반드시 동요시키고야 말려고 합니다.
지금 한두 명의 환관과 궁녀가 갑자기 번갈아 무함하려는 계책을 내었으니 그 요사하고 사악한 죄는 형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어찌 보잘것없고 무식한 자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더욱 놀라운 것은 지난날 자성께서 손수 쓰신 하교의 뜻이 과연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대신 된 자가 중간에서 가로막아 봉환하기에 급급하여 자성의 애통하고 박절한 뜻이 감추어져 드러나지 않게 하였습니다.
또 어전에 나왔을 때도 엄하게 국문하기를 청하지 않고 지레 처형하도록 청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의도이며 이것이 무슨 옥사의 체모입니까. 친애하는 마음을 더욱 독실히 하고 참소를 미워하는 현명함을 더욱 넓혀 자전의 뜻을 받들고 동궁의 지위를 편안히 하소서.”
하였다.
흉도들이 보고서 몹시 으르렁거렸으며, 들은 이들은 혀를 내두르며 모두 곧 큰 화를 당할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상소가 들어간 지 몇 달이 지나도록 답이 없었다. 공은 한창 대명하던 중에 정승 김창집(金昌集)이 멀리 외딴 바닷가에 유배되었다는 말을 듣고 달천(達川)의 길가로 나가 기다렸다.
김공이 말에서 내려 다가가 땅에 자리를 깔고 앉아서는 술잔을 들고 작별하였다. 한참 동안 담소하는데 두 사람 모두 한탄하거나 위로하는 말이 없었다. 공이 돌아가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김공은 기상이 몹시 좋으니 장차 살아 돌아올 것이다.”
하였다.
그해 여름, 김공은 끝내 화를 면하지 못하였다. 이때 흉당의 기세가 더욱 치성하여 사람들이 제몸도 보전하지 못하였기에 상여가 지나가는 곳에서는 평소의 친구조차 감히 문안하는 자가 없었다. 공만 홀로 술과 안주를 가지고 뱃머리에서 곡하며 제사를 지내니, 사람들은 화를 보탤 것이라 두려워하였으나 공은 돌아보지 않았다.
6월에 이르자 상소에 대한 비답은 마침내 내리지 않고, 옥당의 계사가 비로소 나와 멀리 이산(理山)에 유배되었는데 명을 들은 즉시 떠났다. 유배지에 도착한 지 겨우 몇 달 만에 또 추가로 형벌을 내리라는 논의가 있어 강진(康津)의 신지도(薪智島)로 이배되고 위리안치를 더하였다.
처음 발계(發啓)한 자는 박세당의 사위 김홍석(金弘錫)이고, 추가로 형벌을 내린 자는 윤증의 문도 이세덕(李世德)이었다. 그들이 만들어낸 죄는 몇 년 전의 일 때문에 유감을 푼 것에 불과하였다. 이세덕의 계사에서는 또 김공에게 제사를 지낸 일을 거론하며, 애도하는 글에 ‘하늘이여, 사람이여, 시운인가, 운명인가.’ 따위의 말이 있다고 하며 탄핵하는 글에 올려 죄안 하나를 보탰다.
그러나 당초 애도하는 글에는 단지 ‘오호 슬프구나. 흠향하소서.〔嗚呼哀哉尙饗〕’ 여섯 글자 뿐 더 이상 한마디도 없었으니, 나머지 무함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공이 유배지로 갈 적에는 모두 날씨가 몹시 덥거나 추웠는데 서쪽에서 남쪽으로 4, 5천 리 길을 걸어가며 어려움과 위험을 두루 겪었다.
비록유 충정(劉忠定)이 광동(廣東)과 광서(廣西)로 갔을 때도 필시 이처럼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만나는 상황에 따라 편안히 여기고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루도 병에 걸린 적이 없었다. 섬으로 들어간 뒤에는 가시 울타리가 높고 커서 해가 보이지 않았지만 작은 집에 조용히 앉아 오직 경전과 사서로 시간을 보냈다.
원근의 사우들이 바다를 건너와서 어울렸기에 집에 신이 항상 가득하였다. 이웃 고을에 유배된 친구들이 손님을 사절하여 해를 멀리하라고 충고하기도 했지만 공은 그때마다 웃으며,
“주자께서‘이백기(李伯紀)와 호방형(胡邦衡)이 바닷가에 있으면서 날마다 문인 및 친구들과 수창하며 오갔으나 진회(秦檜)가 체포하여 다 죽이지 못했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만일 화가 닥친다면 이 또한 하늘의 뜻이다. 어찌 문을 닫고 구멍을 막는다고 피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옥오재(玉吾齋) 송공(宋公송상기)이 강진(康津)의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자 공은 애통해하며 속히 사람을 시켜 제문을 가지고 가서 전을 올리게 하였다. 하루는 큰 바람이 홀연 불더니 가시 울타리를 남김없이 전부 뽑았다. 사람들은 가시울타리가 비바람에 무너지더라도 원래 수리하는 법이 없다고 하였으나 고을 수령은 당시 여론을 두려워하여 몸소 와서 수리를 감독하여 이전보다 더욱 엄중해졌다.
섬 백성이 모두 말하기를,
“하늘이 이미 철거하였는데 사람이 도리어 수리하는가.”
하였다.
갑진년(甲辰年 , 1724, 경종 4) 가을, 경종(景宗)이 승하하였다는 부고가 이르자 가시울타리 안에서 곡위를 만들고 아침저녁으로 임곡(臨哭)하였다. 죄인이라는 이유로 감히 최복을 받지 못하고 단지 생포(生布)로 옷과 삿갓을 만들어 백성과 함께 성복하였다.
겨울, 또 큰형 동추공의 상을 당했다. 공은 형제가 여덟 명인데, 큰형만 아흔이 넘은 나이로 살아 있었다.
이때 부고를 받자 몹시 슬퍼하고 상심하여 남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곳에 있으면서 다른 생각은 전혀 없고, 바라는 것은 요행을 만나 집으로 돌아가 늙은 형과 의지하며 여생을 마치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끝났다.”
하며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을사년(乙巳年, 1725, 영조 1) 봄, 은혜를 입어 북쪽으로 돌아왔다. 달려와 전송하는 온 도의 선비들이 길에 이어졌다. 광주(光州)에 이르자 모인 사람이 수백 명이었고, 사람과 말이 모두 꽉 차서 촌가에 들어가기 어려웠다. 마침내 길가의 절로 가서 하루 묵고 헤어졌다.
보는 사람들이 감탄하며,
“우암이 제주로 갔을 때도 이와 같았는데 이제 다시 보는구나.”
하였다.
가다가 장성(長城)에 이르러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연로의 각 고을에서는 모두 관청의 비용으로 대접하려 하였으나 공은 모조리 사양하였다. 공산(公山) 경계에 이르자 정승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은 비로소이천(伊川)이 소성(紹聖) 연간에 했던 전례를 따르고자 곧장 도성으로 가서 사은하고 즉시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이렇게 되자 마침내 이전의 계책을 변경하여 다시 고향 가는 길로 가서 선영과 동추공의 새 묘소를 차례로 성묘하였다.
2월, 집으로 돌아왔다. 승지와 사관이 잇따라 와서 재촉하여 부르는 전지를 선포하자 현(縣)과 도(道)를 통해 상소를 올려 새로 임명된 정승직을 힘껏 사직하였으나 성상이 허락하지 않고 비답과 하유가 융숭하였다. 당시 정승 자리가 거의 비고 모든 일이 소략하여 크고 작은 정사는 모두 대신이 올라오기를 기다리라고 명하였다.
마침내 억지로 조정으로 나아가 도성 밖에 이르러 또 새로운 명을 사직하였다. 성상이 즉시 승지를 보내 재촉하여 들어오게 하니, 공이 명을 받고 나가 숙배하고 이어서 사대(賜對)하였다.
성상이 이르기를,
“경은 선조(先朝숙종) 때 이미 정승 후보가 되었고 유림에서도 중망을 받고 있다. 오늘날 정승으로 임명한 것은 아무 이유 없이 한 것이 아니다. 경이 들어오는 것을 보니 기쁘고 다행스러운 마음을 견디지 못하겠다.”
하였다.
공이 절하고 사례하며 늙고 병들어 정승직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극진히 아뢰고, 어질고 덕 있는 이를 다시 임명하며, 또 학문에 힘쓰고 정사를 부지런히 하라는 뜻으로 간곡히 아뢰었다. 성상이 또 선조의 실록 편찬이 지연되는 것을 걱정하여 면대하고 총재의 직임을 맡겼다. 공은 힘껏 사양하고 물러나 며칠 뒤 차자를 올려 면직을 청하고, 이어서 성상 앞에서 다 말하지 못한 소회를 아뢰었다.
“군주는 하루 사이에도 천만 가지 일을 해야 하는데, 은미한 마음에 근본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음에 가려진 것이 있으면 일이 반드시 두서가 없어지고 정사가 반드시 어지러워집니다. 전하의 학문은 날마다 진보하고 있으나, 다만 인(仁)을 좋아하여 덮어주는 것이 너무 지나쳐 악인의 우두머리가 법망을 벗어났다는 탄식이 있고, 혐의를 피하려는 뜻이 너무 우세하여 명령에 거대한 체재가 없습니다.
이 병통을 제거하지 않으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말하는 사람들은 걸핏하면 성상의 무고를 변론하고 나라의 역적을 토벌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리라고 하는데, 그 말이 참으로 옳기는 합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앞서 논한 일에 대해 하나라도 완전히 석연치 않은 것이 있으면 성상의 무고는 끝내 변론할 수 없고 나라의 역적은 끝내 토벌할 수 없습니다.”
얼마 후 정승 후보를 추천하라는 명을 받고 민진원(閔鎭遠), 이의현(李宜顯), 신임(申銋)을 추천하였다. 민공은 우의정이 되고, 공은 좌의정으로 승진하여 세자부를 겸하였다.
상소하여 사직하며 새 정승을 나오라고 권면하고 늙은 신하는 물러나도록 허락하기를 간곡히 청하였다. 성상이 머물기를 권면하며 허락하지 않자, 또 사대신(四大臣) 및 원통하게 죽은 신하들의 일을 극론하며 속히 신원하기를 청하니, 성상이 허락하였다.
과거 흉당이 경종에게 병이 있는 틈을 타서 거짓으로 큰 옥사를 일으키고 살육을 자행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주살될까 몹시 두려워하여 당시의 일을 전부 경종의 책임으로 돌려 스스로 빠져나가려는 계책으로 삼고, 선왕의 병은 신하가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였다.
성상은 그 말에 넘어가 누차 엄한 비지를 내리고 말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공이 마침내 선왕에게 불행히 병이 있어 소인들에게 속았으니 이러한 내용으로 종묘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하여 선왕의 덕을 드러내고 후세 사람의 의혹을 풀어야지, 소인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고 극언하였다. 성상이 처음에는 옳다고 여기지 않았으나 한참 뒤에 비로소 허락하였다.
당시 동궁의 책례가 이미 정해지고 공은 도감의 제조였다. 마침 막내아들 순하(舜河)가 따라왔다가 갑자기 천연두에 걸렸다. 공은 자기 몸이 이미 전염되었으므로 대궐을 출입할 수 없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사면을 청하였으나 성상이 위로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내 아들의 상을 당하자 성상이 연석에서 측은해 하는 말씀을 하셨다. 공은 본디 한 번 사은하고 곧장 돌아가려 하였고 또 아들의 상을 당하였기에 더욱 잠시도 머물 생각이 없었다. 대신이 차자를 올려 만류하기를 청하니 성상이 마침내 별유를 내렸다.
공이 말하기를,
“군주와 정승의 뜻은 이와 같으나 사사로운 의리상 끝내 오래 지체할 수 없습니다. 다만 동궁의 책례가 이미 거행되었고, 또 사부의 반열에 올랐으니, 한번 서연(書筵)에 올라 동궁을 뵙고 돌아가는 것은 실로 인정과 예의상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하고, 마침내 대궐로 나아갔다.
상견례(相見禮)를 행하려 하는데 정석삼(鄭錫三)과 송인명(宋寅明) 등의 상소가 갑자기 나와 오로지‘병이 있었다.〔有疾〕’라는 두 글자로 성상을 위협하고 흔들며 공이 가리키는 뜻을 헤아릴 수 없다고 배척하였다. 공이 대궐에서 곧장 강 너머로 나가자 성상이 사신을 보내 위로하고 정석삼을 유배하라고 명하였으며, 이어서 내국 제조에 임명하였다.
공은 가다가 여주(驪州)에 이르러 상소하여 본직과 겸직을 모두 사직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뒤 성상이 영의정으로 승진시켜 임명한다는 명을 내리고 손수 쓴 어찰(御札)을 내렸는데 타이르는 뜻이 지극히 간절하였다. 상소하여 사직하고 사례하며 말단에 또 인책하기를,
“전하께서 처음에 ‘병이 있었다.[有疾]’라는 두 글자를 교서(敎書)에 보태 넣도록 허락하셨다가 끝내는 명을 거두어들이셨습니다.
이와 같다면 성상께서는 정석삼의 말을 옳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정석삼의 말이 옳다면 신의 죄가 큽니다. 전하께서는 정석삼의 말을 따르면서 그의 몸은 버리고, 신의 말은 벌하면서 신의 몸은 총애하시니, 신은 감히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선왕께서 불행히 병이 있어 흉인들에게 속았으니, 내리신 처분은 선왕의 본뜻이 아닌 것이 많다.’라고 말하는 것이 성대한 덕과 지극한 인에 무슨 손해가 되겠습니까. 신하가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기필코 병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한 무리가 일으킨 사화가 모두 선왕의 결단에서 나온 것이라 하면서 무고하고 해친 죄를 슬쩍 면하려 하는데, 이것은 유독 차마 들을 수 있고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성상이 온화한 비답을 내리고 또 다섯 관사의 제조 및 호위대장으로 임명하였다. 연달아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가을, 국상(國喪)의 연제(練祭) 때문에 서울로 가다가 이천(利川)에 이르러 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관아의 뜰에서 곡하는 반열에 참석하였다.
변제례(變除禮)를 행하고 봉한 상소를 올려 대죄하다가 돌아왔다. 당시 대신이 무고를 변론하고 죄인을 성토하라며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하였으나 성상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또 이삼(李森)의 이름이 역적의 공초에서 나와 감옥에 가두었는데, 성상이 행차를 계기로 갑자기 의금부에 가서 국청의 죄수를 모두 풀어주었다. 대신과 삼사가 간쟁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공이 상소하여 극언하기를,
“흉인들이 성상을 위태롭게 하려고 모의하고 선한 이들을 해친 죄는 이루 다 주벌할 수 없으니, 자기와 관련된 일이라는 이유로 혐의로 삼아 법을 적용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사흉(四凶)은 순(舜)이 자기 윗자리에 있는 것을 싫어하여 심복하지 않아 죄악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순이 부득이 주살하였으니, 순이 피혐하는 바가 있어 주벌을 그만둔 적이 있었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저 흉당이 성상을 위태롭게 하려고 모의하고 사류를 해친 죄는 분명히 드러나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으니, 비단 심복하지 않은 사흉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추방하는 법을 시행하지 않고 삭출하는 벌로 감률(勘律)하고자 하시며, 대궐 뜰에 가득한 신하들의 논의를 억지로 거스르고 곡학아세하는 선비의 피혐해야 한다는 논의를 따르시며 위대한 순의 지극히 공정한 도리를 잊으시니, 이것이 신이 감히 알지 못하는 바입니다.
이삼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신이 멀리 있어 본말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다만 이미 죄수의 공초에서 이름이 나오고 제법 중요하게 끌어들여 단서가 드러나게 되었으니, 이는 통렬히 심문하여 실정을 캐내도록 힘써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친림하여 지레 국청의 일을 파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행동인지 모르겠습니다.
문왕(文王)은 여러 송사와 여러 금계(禁戒)를 도맡아 처리하지 않았는데,지금 전하께서는 옥리의 일을 행하고 계시니, 신은 삼가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였다.
겨울, 장릉(長陵)에 재해가 일어나 상소하여 위로 드리고 이어서 책임을 지고 사면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병오년(丙午年, 1726, 영조 2) 봄,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여 정석삼이 남긴 논의를 주워모아 간사한 짓으로 화를 옮기는 계획을 시행하려 하였다. 또권부(權扶)라는 자가 임징하(任徵夏)의 상소에 나오는 ‘한번 어지러워졌다.
[一亂]’라는 말을 두고 선왕을 무함하는 것이라 하며 무리지어 일어나 글을 올리니,실로 조현명과 표리 관계였다. 공은 더욱 편안히 있을 수 없어 상소하여 견책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
“임징하의 상소는 과연 무슨 죄입니까. 이른바 ‘어지럽다’라는 말은 바로 그 당시 신하들이 형편없어 오로지 속이고 감추기만 일삼아 성상의 다스림에 누를 끼쳤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선왕의 성대한 덕에 터럭만큼이라도 손해가 되겠습니까.
옛날 우리 선조대왕께서 승하하신 초기에 고 판서 신 정경세(鄭經世)가 전지(傳旨)에 응하여 상소하였는데,‘십여 년 이래로 요행의 문이 활짝 열려 대궐이 시장처럼 되고 각기 뇌물을 받아 조정이 더럽고 어지럽기가 극에 달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정경세는 선조(先朝)를 비방하였다는 이유로 장차 처형되려 하였는데, 고 문충공(文忠公) 신 이항복(李恒福)이 누차 아뢰어 신구(申救)하니, 벌이 파직에 그쳤습니다. 정경세의 말은 곧장 아뢰고 통렬히 배척하며 꺼리거나 피하지 않았으니, 임징하와 비교하면 더 지나칩니다. 그런데 당시 토죄해야 한다는 논의가 없었고, 대신이 체모를 얻었다는 칭찬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모든 사람이 군신의 의리를 몰라서이겠습니까.
가령 임징하가 말을 가리지 않고 뜻이 완곡하지 않아 지난 일을 허물하는 성상의 지극한 마음에 저촉된 것이 없지 않다면, 광망(狂妄)하다고 꾸짖고 특별히 체직하더라도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하의 도리에 있어서는 언로가 막힐 것을 염려하고 성상의 포용하는 덕을 권면하기를 마치 이항복이 정경세에게 했던 것처럼 해야 마땅합니다.
저 문자를 집어내어 기화(奇貨)로 삼고 반드시 한 판 승부에서 이기려 하는 자는 그 마음이 있는 곳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당초에 일을 말한 신하와 함께 뒤섞어 견책을 시행하는 벌을 내려 선악이 하나가 되고 시비가 밝혀지지 않아 승정원이 복역하고 대간이 논계하는데도 한결같이 물리쳐 끝내 지나친 행동이 되었습니다. 어찌 청명한 세상에 이러한 행동이 있을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하였다.
당시 좌의정과 우의정 이관명(李觀命) 공은 모두 대의(大義)를 펴지 못했다는 이유로 체직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공은 이때부터 연달아 상소하여 사정을 아뢰고 두 신하와 거취를 함께하겠다고 청하였다. 그러나 성상이 그때마다 온화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이해 겨울, 성상이 비로소 상을 마치고 상참(常參)에 나오기 시작하였다. 대신 홍치중(洪致中)과 조도빈(趙道彬)이 입대하였다가 대간이 역적을 토벌하라는 청을 올리려는 것을 보고는 두려워하며 듣지 않으려고 이유 없이 지레 물러났다.
공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며칠 전의 상참은 전하께서 처음으로 정사를 의논하는 기회였는데 대신이 일을 피하여 지레 물러났으니 신은 몹시 통탄스럽습니다. 이는 성상께서 평소 혼자만 지혜롭다고 생각하며 세상을 다스리려는 뜻이 있어 도를 논하는 삼공의 직임을 홀시한 까닭입니다.
사람을 등용할 때는 두려워할 만한 사람을 뽑지 않고 아끼는 사람을 뽑으며, 신하에게 잘못을 바로잡으라고 요구하지 않고 단지 인원수만 채우니, 세도와 인심이 날마다 추락하는 것이 이상할 것 없습니다.”
하니, 성상이 기뻐하지 않으며 ‘일 만들기를 좋아한다.’라고 하였다.
공이 또 상소하여 견책을 청하며,
“지금 조정에 있는 신하들은 위로 종묘사직의 원수를 잊고 아래로 부형의 원한을 버렸습니다. 오직 녹봉을 받고 자리를 지키는 것만 도모하여 풍속이 무너지고 인륜이 끊어졌으니, 나라의 우환이 이미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또 ‘일 만들기를 좋아한다.[喜事]’라는 두 글자로 온 세상 사람들을 금지하여 입을 열지 못하게 하시니, 이는 진정 앞으로 군주를 버리고 어버이를 뒷전으로 삼는 논의를 조정에서 방자하게 제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누가 전하를 위해 분명히 말하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몹시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성상이 비답을 내려 ‘여전히 이전의 뜻을 고집한다.’라고 책망하고, 홍치중과 조도빈은 얼마 후 모두 관직을 버렸다. 공은 처지가 더욱 위태로워져 연달아 십여 차례 상소하여 더욱 간절히 급한 사정을 청하였다. 정미년(丁未年, 1727, 영조 3) 5월, 비로소 체직을 허락받고 판중추부사로 옮겼다.
또 치사를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가을, 성상이 홀연 반대편 당파를 등용하고 특별히 공을 파직하였는데,전지(傳旨)에 당론(黨論)을 죄안으로 삼았다.이어서‘한쪽 사람들이 태산북두처럼 우러러본다.’라고 하교하자 양사에서 합계하여 유배하라고 청하였으나 오랫동안 윤허하지 않았다.
무신년(戊申年, 1728, 영조 4) 1월, 비로소 영천(榮川)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5월에 풀려나 편의대로 거주하게 하였다. 경술년(1730) 봄, 서용되어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성상이 여주(驪州)에 능을 살피러 갔는데, 병으로 어가를 맞이하지 못하여 상소하고 대죄하니, 사관을 보내어 위로하는 말씀을 베풀고 이어서 음식을 하사하였는데 예우가 몹시 두터웠다.
한번은 연석에서 민진원 공에게 하교하기를,
“정 판부사 또한 서덕수(徐德修)를 신구(伸救)하였으니, 무신년 역적의 변란은 이유가 없지 않다.”
하였다.
공은 원래 이런 일이 없었는데, 성상이 우연히 잘못 살핀 것이었다. 공은 황공하여 감히 말을 허비하며 스스로 변호할 수 없어 단지 오래된 일이라 기억하지 못한다고 상소에서 대략 언급하였다. 성상이 이에 《승정원일기》를 살펴보고 비답을 내려 위로하며 혐의를 풀어주는 뜻을 통쾌히 보였다.
신해년(辛亥年, 1731, 영조 7), 경연의 신하가 조용히 물러나고 청렴결백한 공의 절조를 말하며 각별히 대우하는 방도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성상이 즉시 관찰사에게 주급(周急)하라고 명하고, 또 이조에 명하여 공의 아들을 가까운 고을의 수령에 특별히 임명하여 편히 봉양하게 하였다. 그 뒤 또 달마다 쌀과 콩을 보내주었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옛적 우암은 이러한 은혜가 있을 때마다 반드시 힘껏 사양하다가 부득이한 뒤에 비로소 감히 받았고, 간혹 끝내 받지 않은 때도 있었다. 오늘날의 의리도 이와 같아야 한다.”
하였다.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노선생께서는 본디 사양하고 받는 절차에 엄격하였으나, 성상께서 도와주신 것을 끝내 사양한 적이 언제 있었는가. 간혹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원래 그 사이에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찌 후세 사람이 한결같이 준칙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내가 받은 남다른 은혜는 참으로 감당할 수 없는 점이 있지만, 은혜롭게 보살피신 은전은 반드시 사양해야 할 의리가 없고, 이미 베푼 은혜도 갑자기 거두기 쉽지 않다.
이와 같다는 것을 알고도 여전히 번거롭게 아뢰어 사양하기를 청한다면, 이것이 어찌 거짓없고 성실한 도리이겠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사양하여 본래 이익은 잃지 않으면서 아름다운 이름까지 얻는다.’라고 하였는데, 나는 실로 부끄럽다. 단지 한 번 상소하여 사양하여 예의를 갖추고 그만둘 뿐이다.”
하였다.
복직한 뒤로 즉시 치사를 청하고 기어이 허락을 받으려 하였는데, 이때 봉조하 중에 적임자가 아닌 사람이 있었고, 성상이 사람을 물러나게 할 적에도 예의로 하지 않았다.
공이 한숨 쉬며 탄식하기를,
“나이가 되면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예법의 중대한 규정이지만, 근래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이 의리에 처할 적에 모두 마땅한 경우를 보지 못했다. 영예가 아니라 단지 치욕이니, 이러한 때 함께 더러워질 수 있겠는가.”
하고, 이때부터 다시는 청하지 않았다.
의심하여 묻는 사람이 있으면 그때마다 웃으며 대답하기를,
“나 같은 사람이 어찌 맑은 조정의 성대한 법을 욕되게 하겠는가.”
하고, 그 본뜻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5, 6년 이래로 스스로 늙고 병들어 물러난 사람이라고 하며 나라에 크게 경하하고 위로할 일이 있지 않으면 절대 상소하지 않으며,
“일에 보탬이 되지도 않으면서 그저 은혜만 바라는 것은 감히 할 수 없다.”
하였다.
그러나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은 늙을수록 더욱 독실해지고 간곡한 말은 자다가도 나올 정도였다. 간사한 자가 정권을 잡아 겉으로는 탕평의 명분을 빌리고 안으로는 영합하려는 계책을 이루었다. 성상이 그의 말에 넘어가 조정 신하 중에 다른 논의를 하는 자는 모두 죄를 얻었다.
기쁨과 노여움이 너무 갑작스럽고 잘못된 행동이 많았으며, 옥체도 편치 않은 때가 많았다. 공이 마음속으로 깊이 걱정하였는데, 마침 이때 영중추부사로 승진하여 임명되었다.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서 경계를 아뢰었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삼가 들으니 성상께서 편찮으신 가운데 처분이 중도를 지나친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는 비단 원기(元氣)를 보존하고 성명(性命)을 기르는 방도에 크게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다스림의 근원을 맑게 하고 사무에 응하는 사이에도 해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고명하신 성상의 학문으로 이를 모르시겠습니까. 참으로 신하들 사이에 화합하는 풍도가 이루어지지 않고, 조정에서는 탕평의 효과를 기약할 수 없어 성상을 격노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는 신하들의 죄이니 본디 이루 벌할 수 없을 정도지만, 밝으신 성상께서 위에서 표준을 세우신 것도 지극하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서로 다른 논의를 합하여 한때의 국시(國是)를 굳게 정한다면, 보합하는 정사에는 도움이 되지 않고 표준을 세우는 의리에 해가 될 뿐입니다. 오직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피차의 서로 다른 이야기를 가슴 속에 두지 말고 한 마음을 맑게 하도록 힘쓰고 이치의 옳고 그름을 보아 취사를 정하신다면 사람들이 저절로 심복하고 기강이 저절로 펼쳐져 비로소 탕평을 논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후 성상이 겨울 우레 때문에 사관을 보내 재이(災異)를 누그러뜨릴 방책을 하문하니, 공이 이전 상소의 내용을 다시 아뢰고,송(宋)나라 건중(建中) 연간의 지난 자취를 인용하여 경계로 삼았다. 또 아뢰기를,
“우레와 천둥은 호령의 형상이니, 그간의 지나친 거조를 모두 거두어들이고, 쫓아내어 보임한 유신(儒臣)을 돌아오게 하여 수신하고 반성할 방도로 삼으소서.”
하였으나 성상이 기뻐하지 않았다.
을묘년(乙卯年, 1735, 영조 11) 봄, 왕자가 태어났다. 공은 듣고서 몹시 기뻐하며 상소하여 하례하고, 백성을 만날 때마다 행여 모를까 먼저 이야기하였다. 기뻐하는 모습이 손에 잡힐 듯하여 보는 사람들이 나라를 제몸처럼 여기는 깊은 정성에 감탄하였다.
병진년(丙辰年, 1736, 고종 12) 10월 10일 무렵 일찍 일어나 갑자기 모시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오늘 선친께서 명을 내리셨으니 나는 세상에 오래 있지 않을 듯하다.” 하고, 이때부터 약간 피곤한 모습을 보이더니 며칠이 지나자 증세가 갑자기 위독해져 마침내 13일 인시(寅時)에 누암 강가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89세였다.
고을에서 미처 부고를 올리기 전에 대신이 듣고서 연석에서 아뢰니, 성상이 몹시 애도하며 치계(馳啓)를 느슨히 했다는 이유로 특별히 관찰사를 추고하고, 이어서 뒤늦게 애도하는 윤음을 내렸다. 예장과 녹봉 등의 일은 한결같이 전례대로 하고, 승지를 보내어 조문하게 하며, 또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여 죽은 이를 높이는 의리를 갖추었다.
이듬해 1월 8일, 고을 남쪽 지장리(知藏里) 화영산(花英山) 선영 아래 자좌오향(子坐午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으니, 부인 강릉 최씨(江陵崔氏)가 묻힌 곳으로, 그 광(壙)을 열고 합장하였다. 원근에서 모여 장사 지낸 자가 수백 명이었다. 공은 외모가 맑고 수척하며 타고난 자질이 강하고 굳세었다.
사람들이 바라보면 처음에는 엄격하여 사귈 수 없을 듯하지만 다가가면 낯빛과 웃음이 친근하였다. 간격을 두지 않고 마음을 열어 성의를 보이니 끝내 감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지조가 근엄하고 논의가 엄준하였으며, 집에서는 효성과 우애가 지극히 독실하여 남들이 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매번 부모가 살아있을 때 봉양하지 못한 것을 지극히 통탄스러워하였다. 앞에 놓인 반찬이 조금이라도 풍성할 때마다 즐거워하지 않고 근심하며,
“예전에는 늘 부족하였는데 지금은 남는구나.”
하고, 반드시범 문정(范文正)의 말을 거론하여 자손을 경계하고 오열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외직에 부임할 적에는 형님에게 청하여 임시로 가묘를 모시고 가서는 날마다 관복을 입고 새벽에 알현하였는데 심한 병이 아니면 하루도 그만둔 적이 없었다. 제사에는 정성과 예의를 다하여 미리 재계하고 경계하며 깨끗이 목욕하였다가 닭이 울면 일어나 직접 도구를 살피고, 제사를 지낼 적에는 혼령이 옆에 있는 것처럼 엄숙하였다.
집에 있을 적에는 반드시 부모가 평소 좋아하던 것을 구하여 제수에 보탰다. 감찰공이 병중에 청어(靑魚)를 먹고 싶어하였으나 마침 때가 일러 바치지 못하였기에 평생 입에 대지 않았다. 기일에는 저녁 내내 슬퍼하였으며, 간혹 꿈에 어버이의 얼굴을 뵈면 슬퍼하는 기색이 오랫동안 겉으로 드러났다. 집안사람들은 그 안색을 볼 때마다 꿈에 나타난 줄 알았는데, 말년에 이르기까지도 그렇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을미년(乙未年, 1715, 숙종 41), 감찰공의 묘소를 옮길 적에 묘소를 열 때부터 다시 봉할 때까지 거의 십여 일 동안 아침저녁으로 곡하고 상식을 올리는 절차를 자제들이 대신하게 하지 않고 몸소 수행하며 처음 상을 당한 날처럼 슬퍼하였는데, 당시 나이 68세였다.
형제 여덟 사람 중에 순서가 중간이었는데 위로는 형들을 받들고 아래로는 아우들을 거느리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루종일 어울렸다. 넷째 아우가 불행히 일찍 죽자 몹시 슬퍼하며 자기 일과 다름없이 그의 집안을 다스렸다. 또 고아가 된 딸을 데려다 시집보내고 자기 자식처럼 조카들을 돌보았다.
가르치는 방도는 엄격하면서도 자애로워 고식적인 방법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조카들도 가르침을 받들고 복종하여 자기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도 거의 모를 정도였다. 집안을 다스림에 법도가 있어 조정을 다스리는 것처럼 질서정연하였다. 안팎의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숨을 죽이고, 아래로 노비에 이르기까지 감히 앞에서 함부로 말하지 못했다.
조정에 있을 적에는 관직에 있으면 직분을 다하고 군주를 도에 맞게 인도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이해와 화복으로 마음이 흔들린 적은 한번도 없었으며,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은 것이 없고, 말하면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어진 이를 등용하고 사악한 이를 내쫓는 때와 세도가 오르내리는 기미에는 더욱 뜻을 다하여 반드시 군주의 은미한 마음에 근본을 두고 말하였으니, 비록 군주에게 죄를 짓고 권신에게 미움을 받더라도 돌아보지 않았다.
윤증이 스승을 배반한 일은 실로 고금의 큰 변고이니, 우리 당에 속한 사람이라면 누군들 분개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가 권세를 떨쳐 화복이 즉시 뒤따랐기에 사람들이 모두 분노하면서도 감히 말하지 못한 지 오래였다. 오직 공만은 자취가 외롭고 위태로우면서도 거센 기세를 맞닥뜨려 두려워하거나 기죽지 않고 누차 일어났다가 누차 쓰러졌다.
한유(韓愈)가 이른바‘만약 이 도가 나로 말미암아 조금이나마 전해진다면 비록 죽어 없어지더라도 전혀 한이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 바로 공의 뜻이리라. 공이 앞장 서서 한마디 하지 않았다면 시비가 장차 어두워져 기사년(1689, 숙종15) 윤증이 다시 유현으로 대우받은 뒤로 그는 필시 태연히 유현으로 자처하며 죽을 때까지 영화를 누렸을 것이다. 이는 하늘이 윤증 한 사람을 낳아 인륜을 무너뜨리게 하고는 또 공을 낳아 바로잡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 어찌 우연이겠는가.
세상을 걱정하고 도를 지키려는 공의 마음은 한결같이 지극히 공정한 데서 나왔으니, 애당초 자기의 사사로운 이해와는 관계가 없었다. 그러므로 위로는 성상을 깨우치고 아래로는 선비들의 방향을 인도하였다. 세속의 논의하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의심하였으나 끝내는 믿었고, 국시는 조금 굽혀졌다가 크게 펴졌다.
이는 비록 우리 선왕의 성대한 덕과 지극한 선에 힘입은 덕택이지만, 공이 계발하고 드러낸 효과는 끝내 거짓이 될 수 없다. 훗날 박태보와 최석정이 경전을 훼손하고 성인을 모욕한 죄를 변론하여 배척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미워하여 편당으로 지목하거나 아끼면서도 너무 심하다고 의심한 자들이 어찌 공이 보존한 것을 엿볼 수 있겠는가.
평생의 거취로 말하자면 나아가기는 어렵게 여기고 물러나기는 쉽게 여겨서 과거에 급제한 뒤 50여 년 동안 조정에서 벼슬한 기간은 10년을 채우지 못하였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불안하면 당일로 과감히 물러나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녹봉과 지위 버리기를 마치 여관 떠나는 것처럼 하여 끝내는 몹시 용감하게 곧장 돌아갔다.
그 절개는 바위와 같아 끝내 돌릴 수 없었으니, 출처의 중대한 절개는 옛사람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하겠다. 청렴결백으로 말하자면 본디 공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평생 몸에 좋은 옷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입으로는 거친 음식을 싫어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였으나 편안하게 처하였다.
칠순이 넘은 뒤 집안사람이 비로소 비단옷과 가죽옷을 바치며‘비단옷이 아니면 따뜻하지 않다.’라는 뜻을 아뢰자 비로소 허락하였다. 그러나 바지는 끝내 무명으로 짠 것을 그대로 입었다. 누차 관찰사를 역임하고 지위가 정승에 이르렀으나 집에 선물이 저절로 끊기고 관청에 뇌물이 오지 않았다.
토지와 노비는 끝내 한 뙈기, 한 사람도 늘어나지 않았으며, 거주하는 낡은 집은 거의 비바람도 막지 못할 정도였다. 성상께서 예전에 인조조 이원익(李元翼)의 전례에 따라 정사(精舍)를 지어주고 아울러 노비를 하사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역시 사양하고 감히 받지 않았다.
상을 당하자 승지가 왕명을 받고 와서 조문하였는데, 그 사람은 바로 정미년(1727, 영조3) 합계한 대간이었다. 그가 돌아와 친한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재상집을 많이 보았는데 이처럼 청렴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
하며, 감탄하여 마지않았으니‘원망하는 적이라도 무고하기 어렵다.’라고 하겠다. 그러나 분수를 따르고 진실에 맡겨 명예를 추구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만하고 고고한 행동과 과격하고 구차한 일로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현혹시키는 행위는 마음으로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하더라도 몹시 미워하고 통렬히 배척하였다.
한 번은 말하기를,
“명예를 위하는 것과 이익을 위하는 것이 맑고 깨끗함은 다르지만 탐하는 마음은 마찬가지이니, 사군자는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였다. 시골에서 지낸 5, 60년 동안 때로는 강가에 머물고 때로는 산속에 살았는데 손님을 사절하고 지조를 지키며 남에게 관여하지 않아 시골 백성은 이웃에 재상이 있는 줄도 몰랐다.
누차 유배를 겪어 7도(道)를 두루 다녔는데 인정과 물태가 가는 곳마다 각기 달랐으나 원망하고 허물하는 말은 터럭만큼도 하지 않았다. 비록 당시 여론이 위태롭고 험악하였으나 귀양살이를 잘 하였다고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공은 사우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분이 몹시 도타웠다.
우암을 존숭하고 믿기를 남달리 하였으며, 언행과 출처를 모두 본떠 자신의 법도로 삼았다. 매번 벼슬길에 잘못 나와서 전념하여 배우지 못한 것을 지극한 한으로 여겼다. 예전에 수암 권공, 직재(直齋) 이기홍(李箕洪) 공과 도의(道義)의 교분을 맺고 마음과 힘을 합쳐 사우들의 앞장을 서서 사문에서 널리 알리고 논저하려 하는데 미처 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모두 함께 경영하였다.
예컨대 화양(華陽)의 만동사(萬東祠)를 처음 영건할 때 세속의 논의가 산처럼 많았고 비난도 받았다. 그러나 공과 수암이 시종일관 담당하여 산속을 드나들면서 빈번함을 꺼리지 않아 마침내 세상을 떠난 스승의 뜻을 이루었다.《문의통고(問義通攷)》로 말하자면 우암이 제주에 있을 때 처음 시작하여 수암에게 편찬을 맡긴 것이었다.
수암은 문집과《차의(箚疑)》의 일 때문에 겨를이 없었기에 공에게 교정하여 책을 만들라고 하였다. 공은 아직 없어지지 않은 선생의 수택(手澤)에 감동하고 후학에게 은혜를 베푸는 일에 관계된다는 점을 유념하여 편찬하고 교정하며 정력을 다하였으니, 지금 간행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스승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늙을수록 더욱 독실하여 한번이라도 무고가 퍼져 연원에 미치면 개탄하고 근심하며 나서서 분명히 변론하여 반드시 올바르게 하고야 말았다. 동문의 여러 공들이 많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널리 알리고 모욕을 막는 일은 공에게 맡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근세의 명공을 논할 적에는 문곡(文谷 김수항)과 노봉(老峰 민정중)을 높이며 본받을 만하다고 하였고, 두 공 역시 공을 후배로 여기지 않았다. 노봉과는 젊어서부터 어울렸기에 교분이 얕지 않았다. 한번은 공이 일 때문에 서울에 들어갔는데, 당시 민공은 정승의 자리에 있었다.
공은 예전에 사우 관계에 있었으므로 혐의로 여기지 않고 특별히 찾아갔다. 문지기가 전갈을 받고 들어가 곧장 소리높여 성명을 아뢰었으니, 정승 집안의 전례가 그러하였기 때문이었다. 공은 듣자마자 개탄하며 발길을 돌려 민공의 생질이 된 재종제를 찾아가,
“내가 오늘 민공을 만나러 간 것은 속된 재상이 되지 않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어찌 일단 정승 자리에 오르자 마침내 선비를 예우하는 절차를 바꿀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라고 이유를 말하고는 마침내 떠났다.
그때 민공은 공이 왔다는 말을 듣고 속히 들여보내라고 하였으나 끝내 만나지 못했다. 민공은 처음에 몹시 의아해 하였으나 얼마 후 그 곡절을 다 듣고는 망연자실하여 몸소 찾아가 사죄하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공은 이미 고향으로 돌아갔다.
민공이 자제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선비의 몸가짐은 이와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 너희들은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하였다.
공은 평소 학문으로 자처한 적이 없었다. 한번은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어려서 형제들의 말에 쫓겨 잘못하여 집안을 위한 계책을 세우느라 한번 세상의 그물에 빠져 마음대로 하지 못하였다.
나아가서는 시행한 것이 없고 물러나서는 터득한 것이 없이 어느덧 노년에 이르렀다. 그저 늙어도 어지럽기만 하다는 탄식이 간절하니, 후회해도 소용 없다. 너희들은 경계할 줄 알아야 한다. 집안을 위한 계책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공이 겸손하게 남을 가르친 말일 뿐이다. 젊어서 독서할 때부터 이미 마음 쓸 곳이 있는 줄 알았으니, 과거 응시에 쓰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인년(甲寅年, 1734, 영조 10) 사화가 일어난 뒤 외물을 사모하는 생각을 끊고 향상공부(向上工夫)에 전념하여 깊이 연구하느라 먹고 자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과거에 급제하자 우암 선생이 편지를 보내 권면하기를,
“지금 사람들은 한 번 급제하면 할 일을 다 했다고 여겨 마침내 서책과 멀어진다. 나는 그대가 반드시 그렇지 않을 줄 안다.”
하였다. 공은 이 편지를 받은 뒤로 더욱 가다듬어 비록 벼슬하는 기간에 공무가 바빠도 책 보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장암에 거처를 정한 뒤로는 방 하나를 깨끗이 청소하고 좌우에 도서를 두었다.
한번은 말하기를,
“나는 이미 늙었으니 더 이상 독서하는 시절이 아니다. 만약 대충 보고 널리 찾는다면 정력만 낭비하고 심신에 무익하다.‘유격 기마병이 너무 멀리 가면 돌아올 수 없다.’라는 옛사람의 비유를 경계삼을 만하다.”
하고, 마침내 사서(四書),《근사록(近思錄)》을 되풀이하여 보고 이해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또 배우는 이들에게 말하기를,
“이치를 궁구하는 공부를 그만둘 수는 없으나, 알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였다.
그러므로 항상 힘써서 반드시 실천 한 쪽을 중시하였다. 우선 언행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확인해 보면, 의관은 반드시 정돈하고, 음식은 반드시 절제하고, 용모는 반드시 엄숙하고, 걸음은 반드시 편안하였다. 게으른 기색을 몸에 나타내지 않고, 비속한 말을 입에서 내지 않았으며, 서책 따위와 사소한 기물에 이르기까지 위치가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반드시 정돈한 뒤에야 마음에 흡족하게 여겼다.
마음의 은미한 사이를 보존하고 다스리는 공부가 엄격하고 정밀하여 항상 말하기를,
“직(直) 한 글자는 성현이 서로 전수한 심법(心法)이니, 공자가 이른바‘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는 정직함이다.’라는 말과 맹자가 이른바‘곧게 길러야 한다.’라는 말이 모두 이것이다. 주자(朱子)에 이르러 비로소 드러내어 ‘천지가 만물을 낳고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방법은 직 자 하나뿐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뜻이 크다고 하겠다.
노선생이 평생 받아 쓴 것도 오로지 여기에 있다.초산(楚山정읍)에서 임종할 때 문인에게 당부한 비결도 이를 벗어나지 않는다.이것이 선현을 계승하고 후학을 인도하여 우리나라의 고정(考亭주자)이 된 이유이다. 후세의 학자들이 잃지 않고 지킨다면 길이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 때문에 자신을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나 애당초 이 직 자를 한 글자를 부적으로 삼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병풍에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보며 반성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드러난 행적이 명백하고 강직하여 마치 물이 만 장 절벽을 만나 내려갈 곳에서는 곧바로 내려가며 굽이돌지 않는 것과 같았으니, 여기에서 터득하였으리라.
공은 문장을 지을 적에 수식을 일삼지 않고 오직 뜻을 전달하는 것을 위주로 삼았다. 시 또한 예스럽고 기세와 풍격이 있어 볼 만하였다. 문집 약간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예전에 독서하고 강학한 끝에 손 가는대로 뽑아 기록하였는데 은미한 말과 오묘한 뜻을 드러내어 밝힌 것이 많았으나 재차 수정하지 못하였다.
또 한번은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은 중국의 사적에 대해서는 마치 직접 경험하고 목도한 것처럼 모두 분명히 알지만, 우리나라의 고사에 대해서는 허술하기가 막심하니, 참으로‘몸이 이 산 속에 있어 진면목을 보지 못한다.’라는 말과 같다.”
하고, 마침내우리나라 역사책을 가져다 위로는 단군(檀君)부터 아래로는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치란과 흥망에 가장 관계가 밀접한 약간 조목을 뽑고, 증씨(曾氏)의《사략(史略)》을 바탕으로 그 시기를 살펴 역대(歷代) 연도의 아래에 덧붙였다.편집하고 간행하여 어린이들이 배우기 편하게 하였다.
부인 최씨(崔氏)는 목사 응천(應天)의 딸이다. 훌륭한 행실과 아름다운 덕이 있었으나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공이 직접 묘지명을 지었다.장남 희하(羲河)는 현감을 지냈고, 차남 순하(舜河)는 일찍 죽었다. 두 딸은 권돈(權墪), 진사 유탁기(兪度基)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매(梅), 건(楗), 실(宲), 채(寀)이다. 실은 문과에 급제하여 응교를 지냈으며간언하다가 제주로 유배되었는데한해 남짓 있다가 비로소 육지로 옮겼으니, 공의 가법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을 장사 지낸 뒤 아들 현감공이 가전(家傳)을 주고서 그 행적을 모아 행장을 짓게 하였다.
나는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중요한 의론과 행실을 서술하여 당세의 입언군자(立言君子)를 기다린다.
을축년(乙丑年, 1745, 영조 21) 5월 모일, 아무 관직에 있는 이재(李縡) 가 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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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그의 …… 있다:
《계곡집》권9에 실려 있는〈제정군평문(祭鄭君平文)〉을 말한다.
[주02] 노봉(老峰) …… 칭찬하였다:
민정중의《노봉집(老峯集)》권9에 실려 있는〈사헌부 감찰 정공 행장(司憲府監察鄭公行狀)〉과 박세채의《남계집(南溪集)》
외집(外集) 권40에 실려 있는〈사헌부 감찰 정공 묘지명(司憲府監察鄭公墓誌銘)〉을 말한다.
[주03] 감찰공이 …… 것이었다:
《소학》〈입교(立敎)〉의 “《열녀전》에 이르기를 ‘옛날에 부인이 임신하면 잠잘 때는 옆으로 눕지 않고, 앉을 때는 모로 앉지 않으
며, 설 때는 한쪽 발로 서지 않았다. 맛이 이상한 것은 먹지 않고, 반듯하게 썰지 않으면 먹지 않고,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고,
눈으로 부정한 색을 보지 않고, 귀로는 부정한 소리를 듣지 않고, 밤이면 맹인에게 시를 외우고 바른 일을 말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하고 아이를 낳으면 용모가 단정하며 재주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날 것이다.”라는 내용을 말한다.
[주04] 염락(濂洛):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호(程顥), 정이(程頤) 등 송나라 성리학자들을 말한다.
[주05] 가주서로 …… 사건:
《승정원일기》를 대신 쓰게 한 일을 말한다.《承政院日記 肅宗 12年 11月 3日》
[주06] 윤증(尹拯)이 …… 나누었다:
윤증이 부친 윤선거(尹宣擧)의 묘갈명을 송시열에게 부탁하였는데, 송시열은 박세채(朴世采)의 행장에 따라 간략히 기술하고 병자
호란 때의 처신을 비판하였다. 이로 인해 윤증과 송시열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서인(西人)은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열하였
다.
[주07] 회옹(晦翁)이 …… 일:
주희가 조여우(趙汝愚)를 변호하고 한탁주(韓侘冑)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려 하였으나 문인 채원정(蔡元定)의 권유로 점을 쳐 보
니 불길하여 상소를 불태웠다.《朱子大全 附錄 卷6 年譜》
[주08] 오도일(吳道一)을 …… 논의:
정호는 오도일이 신계화(申啓華)를 비롯한 조정 선비들을 모욕하였다는 이유로 삭거사판을 청하였다.《肅宗實錄 14年 7月 8日》
[주09] 교대하는 …… 않았다:
전 석성 현감 이집성(李集成)은 정호의 사촌형이다.《承政院日記 肅宗 14年 11月 11日》
[주10] 가마(加麻):
스승의 상(喪)에 심상(心喪)을 입는 표시로 겉옷에 삼베 조각을 붙이는 것이다.
[주11] 효자 …… 표창하였다:
강민인의 행적은《장암집(丈巖集)》권24에 실려 있는〈경성 효자 강민인 정려기(鏡城孝子姜敏仁旌閭記)〉에 보인다.
[주12] 경오년 …… 돌아왔다:
당시 사헌부에서 정호가 공무를 방기하고 역적 김환(金煥)을 옹호하였다는 이유로 삭거사판을 청하였다.《肅宗實錄 16年 6月 29
日》
[주13] 조사기(趙嗣基)는 …… 있었습니다:
1694년(숙종 20) 5월 5일 장령 김홍정(金弘禎)이 조사기를 더 이상 심문하지 말고 처형하도록 청하자 숙종이 윤허하였다. 그러나
5월 11일 의금부에서 조사기가 아직 자백하지 않았는데 먼저 처형한다면 앞뒤가 바뀐다고 아뢴 일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숙종은
더 이상 심문하지 않고 조사기를 처형하고 가산을 몰수하였다.《肅宗實錄 20年 5月 5日, 11日》
[주14] 중전이 …… 있었습니다:
인현왕후가 복위한 날, 승정원에서 대신(大臣), 재신(宰臣) 및 삼사(三司)의 신하들에게 조당(朝堂)에 모여 의논하게 하라고 청한
일을 말한다.《肅宗實錄 20年 4月 13日》
[주15] 서문중(徐文重)은 …… 하였는데:
이 무렵 조정에서 기사환국을 일으킨 남인들을 심문하기 위해 국청을 설치하였는데, 김시걸(金時傑)이 상소하여 서문중이 지의금부
사로 국청에 참여하여 죄인들의 진술을 조작하였다고 폭로하였다. 서문중은 이때 연루된 민암(閔黯)의 인척이었다.《肅宗實錄 20
年 4月 28日》
[주16] 죄인 …… 패악합니다:
이현일이 1689년(숙종 15) 9월 상소하여 인현왕후를 두고 “스스로 하늘과 단절하였다.[自絶于天]”라고 하였는데, 1694년 장령
안세징(安世徵)이 이를 문제삼아 이현일을 국문하도록 하였다. 이현일은 이때의 공초에서 “성상은 중궁 전하가 하늘로 삼는 바[所
天]이므로 완곡하게 말한 것입니다.”라고 진술하였다.《葛庵集 己甲辛癸錄》
[주17] 심원한 계책 [深長慮] :
남구만이 장희재의 극형에 반대하며 “나라를 위한 깊은 생각과 지나친 염려에서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爲國家深思過慮, 不得
不出於此矣]”라고 한 말을 가리킨다.《肅宗實錄 20年 閏5月 2日》
[주18] 이전에 …… 청하여:
1694년(숙종 20) 성균관 유생 이기익(李箕翊) 등이 상소하여 송시열을 도봉서원에 제향하도록 청하였다.《肅宗實錄 20年 8月
22日》
[주19] 또 …… 의도였다:
이사상(李師尙, 1656~1725)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망(聖望)이다. 1694년 정호가 서문중(徐文重)을 탄핵하자 정재희(鄭
載禧)가 변호하였는데, 정호는 상소하여 정재희를 비판하며 “속임수를 쓰고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다.[詐不以實]”라고 하였다.
정재희는 이 일로 인해 시골에 물러나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이사상이 정호의 상소 내용을 문제 삼아 공격하였다.《肅宗實錄 20年
閏5月 11日, 22年 1月 11日》
[주20] 해유(解由):
관직을 그만두면서 후임자에게 인수인계하는 절차를 이상없이 마치는 것을 말한다.
[주21] 공격(公格):
관원이나 공직 등에 관한 격식을 말한다.
[주22] 이때 …… 끼쳤다:
최석정이 중강(中江)에서 청나라의 쌀을 사 오면서 청나라 이부 시랑(吏部侍郞) 도대(陶岱)가 국왕에게 보내는 편지를 가져왔는데,
자신을 ‘권제(眷弟)’라고 칭하였다. 양사(兩司)에서는 최석정이 이 글을 물리치지 못하고 받아와 국가에 치욕을 끼쳤다는 이유로 파
직을 청하였다.《肅宗實錄 24年 5月 1日ㆍ28日》
[주23] 천하에서 …… 한다:
송(宋)나라 황상(黃裳)이 광종(光宗)에게 훗날 영종(寧宗)이 되는 가왕(嘉王)의 스승으로 주자를 추천하며 한 말이다.《資治通鑑
後編 卷129》
[주24] 영소전(永昭殿):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金氏)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이다.
[주25] 백성은 …… 한다:
《국어(國語)》〈진어(晉語)〉에 나오는 말이다.
[주26] 정승 …… 아뢰었습니다:
1684년(숙종 10) 5월 13일, 송시열과 윤증의 갈등이 불거지자 김수항과 민정중이 윤증을 이전과 달리 대우해야 한다고 말한 일을
가리킨다.《肅宗實錄 10年 5月 13日》
[주27] 스승이 …… 말한다:
스승을 흉내낸다는 말이다. 안회(顔回)가 공자에게 “스승님께서 걸으면 저도 걷고, 스승님께서 빨리 걸으면 저도 빨리 걷고, 스승님
께서 달리면 저도 달립니다.”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莊子 田子方》
[주28] 예전에 …… 아니었는데:
신유의서(辛酉擬書)를 말한다.
[주29] 복역(覆逆):
승정원에서 국왕의 명령을 잘못이라고 판단하여 돌려보내는 것이다.
[주30] 성상소(城上所):
사간원과 사헌부의 관원이 공사(公事)를 출납하는 행위를 말한다.
[주31] 부자와 …… 가벼운가:
1698년(숙종 24) 11월 1일, 사헌부의 계사에 대한 숙종의 비답에 보인다.《肅宗實錄 24年 11月 1日》
[주32] 사생설(師生說):
《장암집》권26에 실려 있는〈사생설문답(師生說問答)〉을 말한다.
[주33] 며칠이 …… 나왔다:
오명준이 이조 정랑에 천거되지 못하자 이조 판서 김구(金構)와 참의 정호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肅宗實錄 29年 4月 21日》
[주34] 정승 …… 비유하였으니:
박세당이 이경석의 신도비를 지으면서 이경석을 비난한 송시열을 노(魯)나라 정사를 어지럽힌 소정묘에 비유하였다.《肅宗實錄
29年 4月 17日》
[주35] 우암이 …… 것이었다:
송나라 손적이 금나라에 항복하는 글을 짓자 주자가 ‘오래 살고 건강할 것이다.[壽而康之]’라고 비꼬았다. 송시열은 이경석의 궤장
연(几杖宴) 서문에 이 말을 인용하였다.
[주36] 정개청(鄭介淸)의 배절의론(排節義論):
정개청은 영의정 박순(朴淳)의 문인이었으나 그가 파직되자 동인(東人) 정여립(鄭汝立) 등과 친교를 맺었다. 이로 인해 스승을 배
반하였다는 비난을 받자〈절의청담변(節義淸談辨)〉을 지어 자신을 변호하였는데, 서인들은 이를 두고 절의를 배격한 논의라 하여
‘배절의론’이라고 하였다.
[주37] 신면(申㴐)의 일:
신면은 신숙주(申叔舟)의 아들로 1467년(세조13) 함길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이해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반란군에게 죽
음을 당하였다.
[주38] 매복(枚卜):
정승 후보를 추천하는 일을 말한다.
[주39] 어사 …… 받았다:
유술은 충청좌도 어사(忠淸左道御史)로 정호가 국법을 무시하고 민가를 훼철하며 투장(偸葬)하였다고 탄핵하였다.《肅宗實錄 32
年 4月 3日》
[주40] 난신적자는 …… 말:
《맹자집주》〈등문공 하〉의 “《춘추》의 법도에 따른다면 난신적자는 사람마다 토벌할 수 있으니, 반드시 사사라야 하는 것은 아니
다.[如春秋之法, 亂臣賊子, 人人得而討之, 不必士師也.]”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주41] 이천(伊川)이 …… 전례:
서감은 서경 국자감(西京國子監)이다. 정이(程頤)가 부주(涪州)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서경 국자감에 제수되자 곧바로 황제를 알
현한 뒤 한 달 동안 녹봉을 받고 물러났다.《二程全書 卷50 伊川年譜》
[주42] 예전 …… 공부하였으니:
정철은 강계(江界)에 위리안치되었을 때 둘러친 울타리의 장목(長木)을 하얗게 깎아《대학》을 써놓고 아침저녁으로 사색하였다.
《宋子大全 卷155 松江鄭公神道碑銘》
[주43] 조보(趙普)는 …… 배향되었으니:
조보는 송 태조가 붕어한 17년 뒤인 995년에 세상을 떠났으나 진종(眞宗)의 명으로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홍언필은 인종이 승
하한 4년 뒤인 1549년에 세상을 떠났으나 1554년 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明宗實錄 9年 9月 15日》
[주44] 정언 …… 받았다:
정수기는 정호가 윤증을 비난한다는 이유로 삭탈관작하고 문외출송하도록 청하였다.《肅宗實錄 40年 2月 19日》
[주45] 지극히 …… 부족하다:
정이(程頤)가 조카 정공손(程公孫)과 친구 형서(邢恕) 때문에 배주(涪州)로 유배되었는데, “친족 자제는 지극히 어리석으니 책망
하기 부족하고, 정이 두터운 친구는 감히 의심할 수 없다.[族子至愚不足責, 故人情厚不敢疑.]”라고 하였다.《宋元學案 卷30》
[주46] 누암(樓巖):
충주에 있다.
[주47] 구천(句踐)은 …… 하였습니다:
이 말은 윤선거의《노서유고(魯西遺稿)》 별집에 실려 있는〈의답송영보(擬答宋英甫)〉에 보인다. 구천은 월(越)나라 왕으로 오
(吳)나라에 항복한 뒤 복수를 도모했고, 연광은 후진(後晉)의 경연광(景延廣)으로 거란에게 도발하였다가 생포되어 자결하였다.
《史記 卷41 越王句踐世家》.《新五代史 卷29 景延廣列傳》
[주48] 두거(杜擧)의 경계:
임금의 잘못을 일깨웠다는 말이다. 춘추 시대 진(晉)나라 대부 지도자(知悼子)가 죽었는데 평공(平公)이 술을 마시고 풍악을 울리
자 두궤(杜蕢)가 술잔을 들어 잘못을 지적하였다.《禮記 檀弓下》
[주49] 병들었다고 …… 하교:
충청도 관찰사 윤헌주(尹憲柱)가 정호의 병이 위중하여 올라갈 수 없다는 장계를 올리자 숙종이 도로 보내라고 하였다.《承政院日
記 肅宗 43年 6月 13日》
[주50] 수유 단자(受由單子):
휴가를 요청하기 위해 올리는 단자이다.
[주51] 은혜가 …… 하겠는가:
송나라 왕증(王曾)이 관원의 진퇴(進退)를 결정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하였는데, 범중엄(范仲淹)이 “사류를 분명히 등용하는 것은
재상의 직임이다.”라고 충고하자 왕증이 한 말이다.《宋史 卷310 王曾列傳》
[주52] 1년이면 …… 한다:
《근사록》권9〈치법(治法)〉에 나오는 말이다.
[주53] 대여(大轝):
국상(國喪)에 사용하는 상여이다.
[주54] 유 충정(劉忠定)이 …… 때:
유 충정은 송(宋)나라의 유안세(劉安世)이다. 장돈(章惇)과 채변(蔡卞)에게 미움을 받고 유배되어 광동과 광서를 일곱 차례나 전전
하였다.《宋史 卷345 劉安世列傳》
[주55] 이백기(李伯紀)와 …… 못했다:
이백기와 호방형은 송(宋)나라의 이강(李綱)과 호전(胡銓)이다. 이강은 금나라와의 화친을 반대하다가 유배되고, 호전은 진회의
처형을 주장하다가 유배되었다.
[주56] 이천(伊川)이 …… 전례:
서감은 서경 국자감(西京國子監)이다. 정이(程頤)가 부주(涪州)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서경 국자감에 제수되자 곧바로 황제를 알
현한 뒤 한 달 동안 녹봉을 받고 물러났다.《二程全書 卷50 伊川年譜》
[주57] 병이 있었다. [有疾]:
1725년(영조 1) 정호가 올린 차자에 나오는 “선왕께서 병환이 있었으니, 대리청정을 거행한 데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先王
旣有疾患則代理之擧, 豈有他意.]”라는 말에서 ‘유질(有疾)’ 두 글자를 지적한 것이다.《英祖實錄 1年 3月 1日》
[주58] 변제례(變除禮):
상복을 바꾸어 입고 상을 마치는 절차이다.
[주59] 문왕(文王)은 …… 않았는데:
《서경》.〈입정(立政)〉의 “문왕은 호령과 송사와 금계를 도맡아 처리하지 않았다.[文王罔攸兼于庶言庶獄庶愼]”라는 말을 인용
한 것이다.
[주60] 권부(權扶)라는 …… 올리니:
권부가 상소하여 임징하의 상소에 나오는 ‘한번 어지러워졌다.’라는 말이 숙종의 시대를 가리킨 것이라고 하였다.《英祖實錄 2年 2
月 18日》
[주61] 십여 …… 달하였습니다:
정경세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올린 상소에 나오는 말이다.《光海君日記 卽位年 5月 2日》
[주62] 전지(傳旨)에 …… 삼았다:
1727년(영조 3) 7월 1일 영조가 정호를 파직하라며 비망기에 “백발의 노년에 당습을 일삼았다.[白首殘年, 齗齗黨習.]”라고 한 말
을 가리킨다.《承政院日記 英祖 3年 7月 1日》
[주63] 한쪽 …… 우러러본다:
1727년(영조 3) 7월 4일 영조가 내린 비망기에 “그간 여러 사람이 반드시 정호를 태산북두처럼 우러러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정
호의 평소 논의가 각박하기에 힘썼기 때문이다.”라고 한 말을 가리킨다.《承政院日記 英祖 3年 7月 4日》
[주64] 사양하여 …… 얻는다:
송나라 유창(劉敞)이 상소하여 겉으로 사양하는 풍조를 비판하며 “사양해도 처음의 이익은 잃지 않고 더욱 높은 명성을 얻는다.[讓
不失始利而得名益高]”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資治通鑑長編 卷190》
[주65] 송(宋)나라 …… 자취:
건중은 송 휘종(徽宗)의 연호 건중정국(建中靖國)이다. 이때 신법당과 구법당을 조정하려 하였으나 끝내 실패했다.
[주66] 범 문정(范文正)의 말:
범 문정은 송나라 재상 범중엄(范仲淹)이다. 그가 자손들에게 경계하기를 “내가 젊었을 적 네 어머니와 함께 몸소 밥을 지었으나 어
버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올린 적이 없다. 지금은 후한 녹봉을 받아 어버이를 봉양하고 싶지만 어버이가 계시지 않고 네 어머니도 세
상을 떠났으니, 내가 가장 한스러워하는 점이다. 차마 너희들에게 부귀의 즐거움을 누리게 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宋名臣言行
錄 前集 卷7》
[주67] 만약 …… 것이다:
《창려집(昌黎集)》권18〈여맹상서서(與孟尙書書)〉에 보인다.
[주68] 비단옷이 …… 않다:
《맹자집주》〈양혜왕 상〉의 “50에 비로소 쇠하여 비단옷이 아니면 따뜻하지 않으니 50이 되지 않은 자는 입을 수 없다.[五十始衰,
非帛不煖, 未五十者, 不得衣也.]”라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주69] 원망하는 …… 어렵다:
진사도(陳師道)의 〈왕평보문집후서(王平甫文集後序)〉에 나오는 “원망하는 적이라도 감히 논의할 수 없었다.[雖其怨敵, 不敢
議也.]”라는 말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주70] 문의통고(問義通攷):
송시열의 저술로《논어》,《맹자》의《혹문(或問)》에《논맹정의(論孟精義)》를 조목별로 덧붙여 엮은 책이다.
[주71] 유격 …… 없다:
정자의 “유격 기마병이 너무 멀리 가면 돌아올 수 없다.[若遊騎太遠, 則却歸不得.]”라는 말을 인용한 것으로, 박학에 힘쓰다가 근
본을 놓치는 것을 말한다.《二程遺書 卷7》
[주72] 사람이 …… 정직함이다:
《논어》〈옹야(雍也)〉의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는 정직함이니, 정직하지 않으면서 사는 것은 요행히 죽음을 면한 것이다.[人之生
也直, 罔之生也, 幸而免.]”라고 한 말을 가리킨다.
[주73] 곧게 길러야 한다:
《맹자》〈공손추 상(公孫丑上)〉의 “호연지기는 지극히 크고 강하니, 곧게 길러 해치지 않으면 천지 사이에 가득 찬다.[其爲氣也,
至大至剛. 以直養而無害, 則塞于天地之間.]”라고 한 말을 가리킨다.
[주74] 초산(楚山)에서 …… 않는다:
《송자대전(宋子大全)》〈부록〉 권11 연보(年譜)에 보인다. 같은 책 권134에〈시제자손질손등(示諸子孫姪孫等)〉이라는 제목
으로 실려 있다.
[주75] 몸이 …… 못한다:
우리나라 사람이 오히려 우리나라 고사를 알기 어렵다는 뜻이다. 소식(蘇軾)의〈제서림벽시(題西林壁詩)〉에 나오는 “여산의 진
면목을 알 수 없으니, 단지 몸이 이 산 속에 있기 때문이다.[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주76] 우리나라 …… 덧붙였다:
정호가 편찬한《사략보요(史略補要)》를 말한다.《丈巖集 卷23 史略補要序》
[주77] 공이 …… 지었다:
《장암집》권14에 실려 있는〈망실 정부인 강릉 최씨 묘지명(亡室貞夫人江陵崔氏墓誌銘)〉을 말한다.
[주78] 간언하다가 제주로 유배되었는데:
정실은 1743년(영조 19) 민창수(閔昌洙)의 억울함을 상소하였다가 제주에 유배되었다.《英祖實錄 19年 4月 26日》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