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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집 제13권 / 신도비(神道碑)
당 고 봉상정경 평양군 개국공 식읍 2천호 신라국 상장군 김공의 신도비명 서문을 아우르다 (唐故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食邑二千戶新羅國上將軍金公神道碑銘 幷序)
경원(景源)이 경주 부윤(慶州府尹)이 된 이듬해(1752) 3월 그곳의 장로 유의건(柳宜健) 등이 와서 고하기를, “유당 봉상정경 평양군 개국공 식읍 2천호 신라국 상장군(有唐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食邑二千戶新羅國上將軍) 김공(金公)의 무덤이 서악(西嶽) 언덕에 있는데, 예전에는 함형(咸亨) 중에 묘도에 세운 큰 비(碑)가 있었으나 돌에 글을 새긴 것이 해가 오래되니 떨어져 나가고 망가져서 그 공덕을 지금은 상고할 수가 없습니다.
사민(士民)들이 각기 그 재물을 내어 다시 돌을 갖추어서 지금의 문장가를 얻어 그 명(銘)을 지으려고 합니다. 지금 부자(夫子)께서 주(州)의 부윤(府尹)으로 오셨으니 저희들이 감히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삼가 고찰하건대 다음과 같다.
김공의 휘는 유신(庾信)이요, 기계(杞谿) 사람이다. 증조 구해(仇亥)는 금관국(金官國)의 왕이었으며, 조부 무력(武力)은 신주 총관(新州總管)으로 백제의 왕과 그 장수들을 잡고, 만여 급을 참수하였다. 아버지 서현(舒玄)은 양주 도독 안무양주제군사(梁州都督安撫梁州諸軍事)를 지냈다. 공은 17세에, 백제와 고구려가 영토를 침공하는 것을 보고 개연히 두 나라를 토평할 뜻을 품었다.
무덕(武德) 연간에 도독(都督 김서현)이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낭비성(娘臂城)을 쳤는데, 군대가 크게 패하여 전사자가 매우 많았다. 공이 말을 채찍질하여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고 깊은 구덩이를 뛰어넘어 고구려 군대를 격파하고, 장군을 참수하여 그 머리를 들고 돌아왔다. 도독이 그것을 보고 마침내 승세를 타서 5000급을 베고 1000명을 생포하니 성안에서 두려워하여 모두 나와 항복하였다.
공이 이 때문에 이름이 삼국(三國)에 알려졌다. 앞서 백제 군사가 양주(梁州)에 침입하였을 때, 공자 춘추(春秋)의 사랑하는 딸과 그 지아비 품석(品釋)이 죽었다. 공자가 평양의 군대를 청하여 백제에 보복하고자 하여 공에게 말하기를, “내가 고구려를 빙문(聘問)하였다가 만약 죽음을 당하게 된다면 그대가 와서 구해 주겠는가?”하니 공이 분발하여 말하기를, “공자께서 돌아오지 않으면 제가 정예병을 거느리고 거문(車門)으로 들어가 고씨(高氏)의 대궐 뜰을 짓밟겠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공자를 다시 보겠습니까.”하였다.
춘추가 매우 기뻐하여 즉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공과 맹세하고 고구려에 들어갔는데, 60일 동안 옥에 갇혀 돌아오지 못하였다. 공이 용사 3000명을 모집하여 강개(慷慨)하여 말하기를, “공자께서 고구려에 들어갔다가 옥에 갇혔으니 너희 3000명이 피 흘려 싸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니 무리가 모두 말하기를,“어찌 감히 장군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하여 마침내 고구려를 칠 것을 건의하였다.
마침 첩자인 승려 덕창(德昌)이 고구려에 고하기를 “유신이 건의하여 장차 군대를 내어 공자를 구원할 것이다.” 하니, 고구려가 공자를 후하게 예우하여 돌려보냈다. 정관(貞觀) 18년(644, 선덕여왕 13)에 공이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백제를 정벌하여 그 7개의 성을 쳐서 빼앗았다.
4달 후에, 백제의 성병(盛兵)이 국경에 진을 치고 왕성을 침범하기를 꾀하자 왕이 매우 두려워하여 공에게 명하여 급히 가도록 하였다. 공이 군대를 정돈하여 그날로 서쪽으로 정벌하러 갔는데, 그 처자가 모두 문밖에 나와 그를 기다렸으나 공은 말을 몰아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국경에 이르자 백제 사람들이 공의 병위(兵威)를 보고는 감히 범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공자가 고구려에서 돌아와 당나라에 들어가 군대를 청하니 태종(太宗)황제가 말하기를, “그대 나라에 유신이라는 자가 있다고 들었는데 사람됨이 어떠한가?”하였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유신이 비록 재주와 지혜가 조금 있기는 하나, 저희 나라가 천자의 위력을 빌리지 않는다면 백제를 어찌 쉽게 없애겠습니까.”하였다.
태종이 “신라는 충순(忠順)하니 참으로 군자의 나라이다.”하였다. 이에 장군 소정방(蘇定方)에게 조서를 내려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가서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다. 이때 공이 양주(梁州)의 군대에 있으면서 술을 마시고 풍악을 즐기며 마치 전쟁에는 뜻이 없는 듯이 하였다.
주(州)의 사람들이 그를 비방하여 말하기를, “삼군(三軍)이 편안히 지낸 지 날이 오래 되어 기병(騎兵)은 남은 용기가 있고 보병(步兵)은 남은 예봉(銳鋒)이 있으니 한바탕의 전쟁을 치를 수 있는데도 장군은 항상 술에 취해 있으니 어찌하겠는가.”하였다.
공이 듣고서 백성들이 쓸 만함을 알고, 백제를 정벌하여 양주의 패전을 보복하기를 청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공이 마침내 병사들을 선발하여 백제로 쳐들어가니 백제는 병졸을 보내어 항거하였다. 공이 거짓으로 패한 척하여 옥문곡(玉門谷)에 이르자, 복병이 나와서 백제군의 앞뒤를 쳐서 크게 무찔러 백제 장군 8명을 잡고 1000급을 베었다.
이에 사자를 보내어 백제에 고하기를, “충신 품석과 그 처 열녀 김씨가 너희 나라에서 죽어 옥중에 뼈를 묻은 지 7년이 되었다. 지금 너희 나라 장군 8명이 우리에게 사로잡혀 엎드려 명을 청하였으나 나 유신이 이웃나라의 의리로 차마 죽이지 못하였다. 지금 너희 나라에서 사자를 보내어 죽은 두 사람의 유골을 보내어 살아있는 8명과 바꾸는 것이 어떠한가?”하였다.
백제의 중상(仲常)이 왕에게 말하기를, “해골을 남겨 두는 것은 이득이 없으니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하였다. 이에 품석 부처의 유골을 함에 넣어 돌려보내니, 공이 즉시 장군 8명을 백제로 돌려보냈다. 이튿날 승세를 타고 백제의 12개 성을 쳐서 빼앗고 2만 급을 베고 9000명을 사로잡았다.
얼마 안 되어 또 백제의 경계에 들어가 그 성 9개를 뿌리 뽑고 9000급을 베고 600명을 사로잡으니, 전공을 논하여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總管)에 임명하였다. 공자 춘추가 당나라에서 돌아오면서 소정방의 군대 20만을 거느리고 와서 백제를 공격할 때 공에게 말하기를,
“내가 살아서 우리나라에 돌아와 다시 공과 여기서 서로 만나보게 된 것이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제가 국가의 위령(威靈)에 의지하여 백제와 칼날을 부딪치며 싸워서 그 성 21개를 쳐서 빼앗고 3만 9600명을 베고 사로잡았으며, 품석 부처의 유골을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였으니 이것은 천명이지 제가 무슨 힘으로 했겠습니까.”하니, 공자가 평생 동안 그 의리에 감격하였다.
22년(648)에 백제 군사가 석토성(石吐城)에 들어왔다. 공이 군대를 다섯 길〔五道〕로 나누어서 백제군을 방어하였다. 이때 물새가 공의 병영을 날아 지나가자 여러 장사(將士)들이 불길하게 여겼다. 공이 무리에게 말하기를, “오늘 밤에 반드시 백제인 첩자가 올 것이니 성벽을 굳게 지켜 움직이지 말라. 내일 구원병이 크게 이른 후에 싸울 것이다.” 하였다.
첩자가 그 말을 듣고 백제에 고하니, 백제 장군 은상(殷相) 등이 구원병이 올 것으로 의심하여 감히 공격하지 못하였다. 이에 공이 도살성(道薩城)으로부터 군대를 내어 싸움터로 치달리자 5도의 군사들이 앞뒤에서 합동으로 공격하여 장군 은상 등 10명을 죽이고 장군 정중(正仲) 등 100명을 사로잡았으며, 군졸 8980명을 베고 말 1만 필을 획득했다. 장군 정복(正福)이 그 군사 1000명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니 모두 놓아주었다.
영휘(永徽) 5년(654)에 왕(선덕여왕)이 돌아가셨으나 후사가 없었다. 공이 조정에서 말하기를, “공자 춘추가 마땅히 왕이 되어야 합니다.”하니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장군이 아니면 누가 큰 계책을 세우겠습니까?”하였다.
이에 춘추를 맞이하여 들어와 즉위케 하니, 삼국이 일제히 현명한 왕이라고 칭송하였다. 이듬해 가을에 공이 백제를 쳤는데, 왕에게 고하기를 “백제가 무도하여 그 포학함이 걸주(桀紂)보다도 심하니, 이는 왕자(王者)가 주벌해야 할 때입니다.” 하니, 왕이 그렇게 여겼다.
현경(顯慶) 5년(660)에 크게 군대를 일으켜 장차 백제를 치려고 하는데, 마침 천자가 대장군 소정방에게 조서를 내려 누선군(樓船軍) 13만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 머물게 하고, 사자 문천(文泉)을 보내어 와서 고하게 하였다.
왕이 이에 세자 법민(法敏)과 함께 남천(南川)으로 나가, 공과 진주(眞珠)ㆍ천존(天存)을 장군으로 삼아 배 100척을 갖추어 병사들을 싣고 덕물도에서 소정방의 군대와 만나게 하였다. 소정방이 세자에게 이르기를, “세자께서는 육지로 가시어 7월 10일에 백제성(百濟城)에서 만납시다.” 하였다.
세자가 와서 고하니 왕이 장사들을 거느리고 사라(沙羅)에 이르렀다. 정방의 군대가 기벌포(伎伐浦)로 들어갈 때 해안이 진창이라 갈 수가 없었다. 이에 버들 자리를 깔아서 군대를 나가게 하여 백제성을 포위하였다.
공이 비밀리에 군대를 움직여 부소산(扶蘇山)을 탈취하였다. 백제가 망한 데는 공의 공로가 컸으므로 천자가 조서를 내려 기리며 칭찬하였다. 소정방이 공에게 이르기를, “내가 백제 땅을 나누어 공의 식읍(食邑)으로 삼으려 하는데 어떻습니까?”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대장군께서는 천자의 군대로써 백제를 멸하여 하국(下國)의 원수를 갚아주시어 우리 임금의 마음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우리 임금과 온 나라의 군민이 기뻐 춤출 겨를도 없이 제가 식읍을 받아 제 이익을 취하는 것은 신하의 의리가 아닙니다.”하고서 마침내 받지 않으니 정방이 이로써 그의 충정을 알았다. 용삭(龍朔) 원년(661, 문무왕1)에 정방이 군대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할 때, 공이 전투에 참여하여 남천(南川)에 이르렀는데 백제왕의 조카 복신(福信)이 옹성(甕城)에 웅거하여 막고 있어 삼군(三軍)이 곧바로 전진할 수 없었다.
공이 병사들을 진격시켜 성 아래에 육박하여 마침내 포위하니 얼마 안 되어 성이 함락되었다. 공이 이에 병사들을 이끌고 나아갔다. 왕이 사신을 보내어 평양에서 소정방을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소정방이 이르기를, “제가 명을 받아 대해를 건너 고구려에 들어가 해문(海門)에 배를 댄 지 달을 넘겼는데, 군대는 이르지 않고 양식도 끊어졌으니 제가 어찌 돌아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근심하니 공이 눈물을 흘리며 이르기를, “국가에 일이 있으면 신이 비록 죽더라도 의리상 피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평양에 들어가 당나라 군대를 좇아 한번 싸워 죽고자 합니다.”하니 왕이 매우 기뻐하여 공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이르기를, “공과 같이 어진 신하를 얻었으니 과인은 걱정할 게 없도다.”하였다.
공이 명을 받고 나자 즉시 방문을 닫아걸고 향을 피워 재계한 후에 길을 떠나니 사졸들이 감동하였다. 이듬해(662) 정월에 평양에 들어가던 중 칠중하(七重河)에 이르니 장수들이 두려워하여 선봉을 서지 않으려 했다. 공이 창을 휘두르며 먼저 스스로 배에 올라 마침내 강을 건넜으니, 군사들의 위세가 매우 왕성했고 보급로도 끊어지지 않았다.
산양(䔉壤)에 이르러 여러 장수들과 맹서하여 말하기를, “내가 이미 백제를 멸하였고 또 천 리 길에 군대를 진출시켜 강을 건넌 것은 천자의 힘에 의지하여 고구려를 멸하기 위해서이다. 바라건대 여러 장수들은 마음과 힘을 합하여 평양을 무찔러 공을 아뢰도록 하라.”하였다.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감히 장군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하였다. 장새(獐塞)에 이르니 마침 날씨가 몹시 추웠으나 공이 어깨를 드러낸 채 말을 채찍질하여 앞서 달려 나가자, 병사들이 힘을 다해 적진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 자가 없었으니 모두들 땀을 흘리며 추운 줄도 몰랐다. 마침내 요해지를 넘어 양오(楊隩)에 이르러, 공이 먼저 서자(庶子) 군승(軍勝)을 시켜 소정방의 군영으로 들어가 군량을 보내니 소정방이 매우 기뻐하였다.
고구려가 몰래 정예병을 보내어 표하(瓢河)에 매복시키고 공이 강을 건너는 것을 엿보게 하였다. 공은 군사가 적어 땔감을 쌓아 밤에 불태워서 연기와 불이 백 리에 이어지도록 하고, 북채와 북을 소꼬리에 매달아 흔들어서 소가 놀라 달아나 북채와 북이 함께 울리게 하니, 고구려가 마침내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공이 강을 건너고 나서 군사들을 나누어 고구려를 쳐서 크게 무찔러 만여 급을 베고 장군 1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8년 후에 공의 아우 흠순(欽純)이 평양에 들어가기 위해 길을 떠나려 할 때 공으로부터 방략(方略)을 받아 고구려를 멸하였다. 왕(문무왕(文武王))이 하교하기를, “유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두 나라를 평정했으니 공적이 뛰어나도다.” 하고 그에게 식읍 500호를 주고 수레와 지팡이를 하사하였으며 전(殿)에 오를 때 추창(趨蹌)하지 않게 하였다. 천자가 사신을 보내어 평양군 개국공(平壤郡開國公)에 책봉하였으며 공에게 조서를 내리고 입조하게 했으나 결국 가지 않았다.
백제가 망하자 그 대부(大夫) 흑치상지(黑齒常之)와 지수신(遲受信)이 임존산(任存山)을 지키며 백제 200여 성을 되찾았다. 공이 군대를 정돈하여 응연히 움직이지 않고 기발한 계책을 내어 유인원(劉仁願)에게 주어서 평정하였다. 9년 후에 공이 병으로 앓아눕자 왕이 문병을 와서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이르기를, “경의 병을 피할 수 없다면 사직을 어찌하겠는가?”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신은 어리석고 불초하나 전하께서 저를 써주시고 의심치 않으신 덕분으로 작은 공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지금 삼국이 이미 한집이 되었으니 다소 편안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자고로 보위를 이어받은 임금은 끝을 잘 마무리한 경우가 드무니, 전하께서는 소인을 멀리하고 군자를 가까이 하시어 왕업을 무궁토록 전하게 하신다면, 신은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하였다.
함형(咸亨) 4년(673, 문무왕 13) 7월 1일에 정침(正寢)에서 돌아가시니 누린 햇수가 79년이었다. 왕이 부음을 듣고 애도하며 유사에게 명하여 비단 1000필과 벼 2000석을 내려 그 집의 장례를 돕게 하였다. 초상하는 날에는 특별히 악사 100인을 보내어 군악(軍樂)을 갖추게 하였다. 또 민호(民戶)를 내려 그 묘를 지키게 하였다.후에 왕의 작위를 추증하고 시호를 흥무(興武)라고 하였다.
공의 기지와 총명은 마을을 나가지 않고도 능히 이웃나라의 일을 알았다. 일찍이 밤에 천천히 걸어서 문밖으로 나갔는데 어떤 남자가 서쪽으로부터 오고 있었다. 공은 마음속으로 평양의 첩자임을 알아차리고 그 앞으로 가서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 무슨 일이 있느냐?”라고 하니 첩자가 두려워서 대답하지 못하였다.
공이 정색을 하며 이르기를, “우리 왕께서는 어질고 성스러우시어 위로는 하늘의 명을 어기지 않고, 아래로는 백성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는다. 너는 가서 너희 나라 군신(君臣)에게 고하여 첩자를 보내어 염탐하는 수고를 하지 않도록 하라.”하니 첩자가 달아났다. 고구려에서 듣고 크게 놀라 이르기를, “유신은 신령스럽게 총명하니 경시할 수 없다.” 하였다.
공은 장수가 되어 24년 동안 병사들에게 자신을 낮추어 그들이 죽을힘을 다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고구려를 포위한 지 7개월이 되어 군중의 식량이 다 떨어져서 군대를 돌이키려 하였다. 공이 근심하여 보기감(步騎監) 열기(裂起)에게 말하기를, “내가 식량을 싣고 갈 터이니 네가 먼저 정방의 군중에 고하여 군대를 돌리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열기가 마침내 구근(仇近) 등 15명과 함께 평양에 이르러 유신이 군량을 싣고 온다고 말하니 소정방이 기뻐하여 마침내 군대를 돌리지 않았다. 금관국의 태조는 수로(首露)이니 한(漢) 건무(建武) 18년(42)부터 금관국의 왕이 되었는데, 구해(仇亥)에 이르러 신라에 투항하였다. 그 후의 자손이 3대를 이어 명장(名將)의 가문이 되었다.
공의 부인은 신라 김씨로 무열왕(武烈王)의 셋째 공주이다. 아들 5명을 낳았으니 장남은 삼광(三光)으로 천자가 불러서 중랑장(中郞將)을 삼았다. 차남은 원술(元述)이며 그 다음은 원정(元貞), 그 다음은 장이(長耳), 그 다음은 원망(元望)이다. 서자 1명이 바로 군승(軍勝)이다.
석문(石門)의 전투에서 장군 의문(義文)은 힘껏 싸우다 죽었는데 원술은 도망쳐서 죽지 않았다. 공이 참수해야 한다고 말하니 원술이 부끄러워 감히 뵙기를 청하지 못하였다. 공이 돌아가시자 그 어머니 김 부인을 뵙기를 청하니 김 부인이 노하여 말하기를, “네가 이미 너의 아버지를 볼 수 없었는데 내가 어찌 너의 어미가 될 수 있겠느냐.”라고 하며 끝내 그를 만나주지 않으니, 종족들이 모두 그 엄격함에 탄복하였다.
공은 삼국이 서로 다투던 시기에, 상장군(上將軍)으로서 백제와 고구려를 병합하면서 백여 차례 전투를 치러 위세가 천하를 진동하였다. 그러나 영명한 무열왕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유언비어가 끝내 반드시 사이를 멀어지게 했을 것이니, 공이 어찌 그 공업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고려 때 문하시중(門下侍中) 김부식(金富軾)이 공의 열전을 썼으나 억지로 갖다 붙인 것이 많아서 진실을 고찰하기에 부족하다. 이제 경원이 공의 비석에 명(銘)을 쓰나니, 오직 공이 임금을 잘 만난 것과 무열왕이 공을 신임한 것만을 써서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굳세고 용감하신 김공은 / 曁曁金公
도독의 아들이시요 / 都督之子
총수의 손자시니 / 總帥之孫
그 용맹이 무소와도 같도다 / 其猛如兕
하늘이 세 나라를 세우시매 / 天立三社
전쟁이 그치지 않아 / 兵張不弛
아버지와 아들이 전장에 나가니 / 父征子戍
천 리 땅이 소란하였도다 / 繹騷千里
공이 이 백성들 불쌍히 여기시어 / 公哀斯民
통일국가 이루기를 맹세하시고 / 矢一土疆
성년이 되어 적군을 격파하여 / 結髮取旗
무용을 사방에 떨쳤도다 / 武震四方
공자께서 서쪽으로 빙문을 가셨다가 / 公子西聘
감옥에 갇히시니 / 幽于圜墻
공이 청하여 군대를 이동시켜 / 公請移師
패수 북쪽으로 가셨도다 / 于浿之陽
공자가 이에 돌아와서 / 公子乃還
당나라에 들어가 천자를 뵈니 / 入覲天邑
황제는 그 충성에 감동하여 / 帝感其忠
덕음으로 위로해 주셨도다 / 德音撫輯
공이 이에 계책을 세워 / 公乃定策
공자를 왕으로 세우고 / 公子是立
빛나는 부월을 지니고서 / 有赫玄鉞
하늘의 주벌을 신속히 하였도다 / 天誅斯急
높고 험한 부소산을 / 扶蘇嶪嶪
왕의 군대가 와서 밟으니 / 王旅來蹂
성대한 전차에다 / 鞹鞃孔奭
새매 무늬 창을 들었도다 / 鳥章叴矛
갑옷 투구에 활과 화살로 / 介冑弓矢
왕의 원수를 갚고서도 / 克復王讐
식읍을 받지 않으시니 / 不受食邑
그 의리가 중국에 알려졌도다 / 義聞皇州
저 산양에 진을 치고 / 敦彼䔉壤
천자의 군대에 맹서하였으니 / 誓我六師
날씨가 추워 어깨는 얼었으나 / 天寒肩瘃
큰길에서 땀을 흘렸도다 / 流汗中逵
북소리가 쇠꼬리에서 나자 / 鼓聲在尾
만 마리 소들이 놀라 내달렸고 / 萬牛驚馳
결국 왕험성을 손에 넣었으니 / 終取王險
공이 뛰어난 계책을 냈기 때문이로다 / 由公出奇
두 나라가 평정된 것은 / 二邦旣定
공의 공적이시니 / 維公之功
황제께서 고명을 내리시어 / 帝降誥命
상공에 책봉하셨도다 / 冊玆上公
서악에 묘가 있어 / 西嶽有墓
그 비석이 웅장도 하니 / 其碑維豐
부윤이 명을 지어 / 守臣銘之
대장군의 큰 공을 권면하는도다 / 用勸元戎
<끝>
[註解]
[주01] 당 …… 김공 : 김유신(金庾信, 595~673)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 명장이다. 신라에 귀순한 가야의 후손으로
가락국 김수로왕의 12대손이다. 아버지는 김서현이며 어머니 만명(萬明)은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손녀로 진흥왕(眞興王)
의 사촌인 숙흘종(肅訖宗)의 딸이다.
[주02] 경주 부윤(慶州府尹) : 황경원이 1751년(영조27), 43세 때 경주 부윤이 되었다.
[주03] 함형(咸亨) : 당나라 제3대 황제인 고종(高宗) 때 연호들 중의 하나로, 기간은 670~674년이다.
[주04] 기계(杞谿) : 지금의 경상북도 영일군에 해당되는 곳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경상도 경주(慶州)의 속현으로서 부(府)의 북쪽 50
리에 있었고, 본래는 신라의 모혜현(芼兮縣), 화계현(化鷄縣)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주05] 금관국(金官國) : 삼국 시대 6가야(伽倻)의 하나로서 가야연맹체의 주요국이며 금관가야, 본가야(本伽倻), 가락국(駕洛國)이라고
도 부른다. 6가야는 신라와 백제 사이의 남부 지역에 있었던 소국들로 신라에 병합되었는데 금관국은 기원 전후부터 532년까지 경
상남도 김해 일대에서 존속했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에 의하면, 532년(법흥왕19)에 마지막 왕인 구해(仇亥)가 신라에 나라를 바친 뒤 높은 벼슬을 받고 본
국을 식읍으로 받았다고 한다. 그 아들 무력(武力)은 신라와 백제와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뒤에 신주도 행군총관(新州道行
軍摠管)이 되었고 이 공로로 각간(角干)의 자리에 올랐다고 하였다.
[주06] 신주 총관(新州總管) : 신주(新州)는 지금의 경기도 광주(廣州)에 해당된다. 진흥왕 14년(553) 가을 7월에 신라가 백제의 동북쪽
변방을 취하여 신주(新州)를 두고 아찬(阿飡) 김무력(金武力)을 군주(軍主)로 삼았다. 《三國史記 卷4 新羅本紀》
[주07] 서현(舒玄) : 김서현(金舒玄)으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그가 길에서 만명(萬明)을 보고 서로 마음으로 기뻐하여 중매도 없이 야
합하였는데 만노군(萬弩郡) 태수로 부임하게 되어 만명과 함께 떠나려 하였다. 이에 만명의 아버지 숙흘종이 만명을 가두고 지키게
하였으나 벼락이 떨어져서 만명이 도망쳐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갔다고 한다. 김유신은 만노에서 출생하였다. 만노군은 충북 진
천의 옛 이름이다. 《三國史記 卷41 金庾信列傳》
[주08] 무덕(武德) : 당나라 초대 황제인 고조(高祖)의 연호로 기간은 618~626년이다. 낭비성 전투는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에는
진평왕 51년(629)의 일로, 권41 〈김유신열전〉에는 건복(建福) 46년(629)으로 나와 있다. 건복은 진평왕 6년(584)에 개원한 연
호이다. 이는 당 태종의 정관(貞觀) 3년에 해당된다.
[주09] 낭비성(娘臂城) : 위치에 대해 일치된 의견이 없다. 대개 지금의 충청도 청주(淸州)로 추정되고 있으나, 혹은 충주 경기도 파주 등
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주10] 양주(梁州) : 대량주(大梁州)를 말한다. 지금의 경남 합천 지방이다.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선덕왕11년 기사와 권41 〈김유
신열전〉 등에 의하면 품석이 죽은 곳은 대량주의 대야성(大耶城)이다.
[주11] 춘추(春秋) : 김춘추(金春秋, 604~661)로, 신라 제29대 태종 무열왕이다.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합병하였으며 아들 문무왕대
에 이룩한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졌다. 25대 진지왕의 손자이며 이찬 용춘(龍春)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天明
夫人)이다. 화백회의에서 추대되어 신라 최초의 진골 출신 왕이 되었다. 재위 기간은 654~661년이다.
[주12] 품석(品釋) : 김품석(金品釋, ?~642)으로, 김춘추의 딸 고타소의 남편이다. 벼슬이 이찬(伊飡)에 올라 대야성(大耶城) 도독이 되
었는데 백제군의 공격을 받아 사망하였다. 그의 사망에 관하여는 《삼국사기》 내에서도 일치되지 않는다.
〈신라본기〉에서는 전사했다고 하고, 〈백제본기〉에서는 항복하여 죽음을 당하고 그 머리를 베어 사비성으로 보냈다고 한다.
〈죽죽(竹竹)열전〉에서는 자결했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품석이 부하인 사지(舍知) 검일(黔日)의 아내를
빼앗았다.
642년(선덕여왕11) 백제군이 대야성을 공격해오자 검일이 적군과 내응하여 성이 함락될 지경이 되었다. 보좌관 죽죽(竹竹)이 만류
하였으나 투항하면 살려준다는 백제 장군 윤충(允忠)의 말을 믿고 군사들을 성 밖으로 내보냈으나 전멸되자, 성내에서 처자를 죽이
고 자결하였다. 죽죽은 끝까지 싸우다 성이 함락되어 죽었다.
[주13] 정관(貞觀) : 당나라 태종의 연호로 기간은 627~649년이다.
[주14] 소정방(蘇定方) : 592~667. 당나라의 명장으로 이름은 열(烈), 정방(定方)은 자이다. 당 태종 때 이정(李靖)을 따라 적구(磧口)에
서 돌궐의 힐리가칸을 격파했다. 660년 나당연합군의 대총관으로 13만 군을 거느리고 와서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고 의
자왕과 태자를 잡아 당나라로 송환하였다. 이듬해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하자 철군하였다. 《舊唐書 卷83 蘇
定方列傳》
[주15] 옥문곡(玉門谷) : 여근곡(女根谷)이라고도 한다. 경주 서남쪽 변경에 있다.[주-D016] 중상(仲常) : 백제 의자왕 때에 좌평(佐平)
벼슬을 한 사람으로 충상(忠常)이라고도 한다. 660년(무열왕7) 신라가 백제를 정복했을 때 사로잡혔는데, 벼슬 일길찬(一吉湌)을
주었다.
[주17] 석토성(石吐城) : 미상.
[주18] 도살성(道薩城) : 지금의 충남 천안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주19] 영휘(永徽) : 당나라 고종의 첫 연호로 기간은 650~655년이다.
[주20] 걸주(桀紂) : 걸(桀)은 중국 하(夏)나라의 마지막 왕이며, 주(紂)는 은(殷)나라의 마지막 왕이다. 둘 다 포악하고 무도하여 나라를
망하게 하고 죽음을 당하였다.
[주21] 현경(顯慶) : 당나라 고종의 두 번째 연호로, 기간은 656~661년이다.[주-D022] 덕물도(德物島) : 서해안의 섬 덕적도(德積島)의
이칭이다. 현재 경기도 인천에 속한다.
[주23] 세자 법민(法敏) : ?~681. 태종 무열왕과 김유신의 누이 문명왕후(文明王后) 사이의 장자로서, 왕위를 이어받아 삼국통일을 완수
한 신라 30대 문무왕(文武王)이다. 재위 기간은 661~681년이다.
[주24] 남천(南川) : 경기도 이천(利川)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동사강목》 진흥왕 29년(568)조에 의하면, “신라가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南川州)를 설치하였다.”라고 하였는데, 남천주에 대해 “남천정(南川停)이니 지금의 이천부(利川府)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태종 7년(660)조에서, 신라왕이 남천정에 나가 주둔하고, 태자 법민과 김유신을 보내어 덕물도에서 당나라 군사와 만
나게 하였다. 남천정은 신라 시대 십정의 하나로서 군사요충지였다.
[주25] 백제성(百濟城) : 백제의 도읍 사비성을 말한다.
[주26] 사라(沙羅) : 《삼국사기》 권42 〈김유신열전 중〉에는 사라지정(沙羅之停)으로 되어 있고, 권5 〈신라본기〉에는 금돌성(今突城)으
로 나와 있다. 금돌성은 지금의 경북 상주(尙州) 백화산(白華山)에 있다.
[주27] 기벌포(伎伐浦) : 대체로 지금의 금강 하구인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 일대로 추정되는데, 혹은 군산 지역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백제의 수도를 지키는 중요한 관문이었다. 이곳은 또한 676년(문무왕16)에 신라와 당나라와의 전투가 벌어져 신라가 당나라 군대
를 물리치고 승리한 곳이다.
[주28] 부소산(扶蘇山) : 백제의 도읍인 충남 부여의 진산으로, 이 산을 감싸고 있는 부소산성은 도읍의 방어를 위한 시설로서 사비성(泗
沘城)ㆍ소부리성(所夫里城)이라고도 한다.
[주29] 용삭(龍朔) : 당나라 고종의 3번째 연호로 기간은 661~663년이다.
[주30] 복신(福信) : ?~663. 백제 무왕의 조카이며 의자왕의 사촌 동생이다. 백제부흥운동을 일으켜 승려 도침(道琛)과 함께 주류성(周留
城)을 거점으로 저항하면서 일본에 있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扶餘豊)을 왕으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부여풍과의 사이가 나빠져
서 부여풍에 의해 살해당하고 주류성도 함락되었다. 주류성은 지금의 충남 한산이다.
[주31] 옹성(甕城) :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 문무왕 원년에는 옹산성(甕山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유신열전〉에는 ‘甕’의 이체자
인 ‘瓮’으로 되어 있다. 위치는 지금의 충남 대전의 대덕에 있는 계족산성(鷄足山城)으로 추정된다.
[주32] 공이 …… 없었다 : 《삼국사기》 권42 〈김유신열전 중〉에 의하면, 문무왕이 유신과 김인문(金仁問) 등을 인솔하여 남천(南川)에
진을 쳤는데, 유사의 보고를 받고 유신이 군사를 몰아 옹산성으로 나아가 성을 포위하였다고 하였다.
[주33] 칠중하(七重河) : 경기도 파주 임진강의 옛 이름이다. 임진강의 흐름이 굴곡이 심한 데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주34] 산양(䔉壤) : 미상.[주-D035] 장새(獐塞) : 지금의 황해도 수안(遂安)이다.
[주36] 양오(楊隩) : 미상.
[주37] 표하(瓢河) : 임진강을 말한다. 나당연합군의 당나라 군인들이 칠중하(七重河)의 굴곡진 흐름을 보고 마치 표주박이 굴러다니는 것
같다고 해서 호로하(瓠蘆河) 또는 표하(瓢河)라고 불렀다고 한다.
[주38] 추창(趨蹌) : 예도에 맞게 허리를 굽히고 종종걸음을 치며 걷는 것을 말한다. 임금을 알현할 때나 높은 사람에게 나아갈 때 갖추는
예법이다.
[주39] 흑치상지(黑齒常之) : 백제의 장군으로 백제가 망하자 항복하였는데, 그 후 소정방의 군대가 왕을 가두고 약탈행위를 하자 반기를
들어 임존성에서 백제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소정방이 당나라로 돌아간 뒤 원병으로 온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에게 항
복하고 오히려 임존성을 함락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당나라로 들어가 당나라를 위해 토번과 돌궐을 치는 등의 전공을 세웠으나, 측
천무후 때 무고로 옥에 갇혔다가 처형되었다.
[주40] 지수신(遲受信) : 백제 멸망 후 부흥운동을 일으켜 처음에는 고구려와 왜국의 후원을 받아 세력이 강하였으나, 백제의 부흥운동을
하다가 당에 항복한 흑치상지(黑齒常之)ㆍ사타상여(沙吒相如) 등이 당의 편이 되어 임존성을 공격하자 663년 고구려로 달아나니
임존성도 함락되었다.
[주41] 임존산(任存山) :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에 있다.
[주42] 유인원(劉仁願) : 나당연합군의 당나라 장수이다.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킨 뒤 그곳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하고 유인
원을 사비성에 주둔시켰다.
[주43] 민호(民戶)를 …… 하였다 : 《삼국사기》 권43 〈김유신열전 하〉에 의하면, 왕이 장사를 지내게 하고, 유사를 시켜 비를 세워 공명
(功名)을 기록하게 하고, 민호를 정하여 묘소를 지키게 하였다고 한다.
[주44] 후에 …… 하였다 : 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이 김유신을 흥무대왕(興武大王)에 봉하였다.
[주45] 보기감(步騎監) : 신라 시대의 무관직으로, 왕도(王都)와 6정(停) 및 9서당(誓幢)의 부대에 약간 명을 배속시켰다.
[주46] 건무(建武) : 후한 제1대 광무황제의 연호로 기간은 25~56년이다.
[주47] 공의 부인 : 지소부인(智炤夫人)으로, 무열왕 김춘추와 문명왕후(文明王后)의 셋째 딸이다. 문명왕후는 김유신의 둘째 누이 문희
(文姬)이다. 지소부인은 김유신이 죽은 후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주48] 석문(石門)의 전투 : 672년에 있었다. 석문은 지금의 황해도 서흥(瑞興)이다.[주-D049] 김부식(金富軾)이 …… 썼으나 : 김부식
이 편찬한 《삼국사기》 권41~43에 수록되었다.[주-D050] 왕험성(王險城) : 평양의 옛이름으로 왕검성을 말한다.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 박재금 이은영 홍학희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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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唐故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食邑二千戶,新羅國上將軍金公神道碑銘。幷序
景源旣爲慶州尹。明年三月。其長老柳宜健等。來告曰。有唐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食邑二千戶,新羅國上將軍金公。葬在西嶽原。舊有大碑。咸亨中。立于墓隧。而石刻歲久剝缺。其功德。今不可考。諸士民各出其財。更具石。欲得當世之有文章者。爲之銘辭。今夫子來爲州尹。宜健等敢以爲請。謹按。金公諱庾信。杞谿人也。曾祖仇亥。金官國王。祖武力。新州總管。獲百濟王及其將。斬萬餘級。父舒玄。梁州都督。安撫梁州諸軍事。公年十七。見百濟與高句麗。侵軼國疆。慨然有削平二國之志。武德中。都督率師數千人。伐娘臂城。師大敗。死者甚衆。公怒馬拔所佩劒。跳深坑。擊高句麗。斬將軍。提其首而還。都督見之。遂乘勝。斬五千級。生擒千人。城中恐懼。皆出降。公由是名聞三國。初百濟兵入梁州。公子春秋所愛女。與其夫品釋死之。公子欲乞平壤兵。以報百濟。爲公言曰。春秋聘于高句麗。若見殺則子來救乎。公奮曰。公子不還。則庾信請率精兵。入車門。踐高氏之庭。不如是。則何以復見公子乎。春秋大悅。卽噬指。與公爲盟。入高句麗。六十日囚于獄中。不得還。公募勇士三千人。慷慨語曰。公子入高句麗。爲所囚。爾三千人。其可不沫血蹈難乎。衆皆曰。敢不從令。遂建議伐高句麗。會諜者浮屠德昌。告高句麗曰。庾信建議。將出師以救公子。高句麗厚禮公子而歸之。貞觀十八年。公爲上將軍。伐百濟。拔其七城。居四月。百濟盛兵屯界上。謀犯王城。王大恐。命公趣行。公繕兵卽日西征。其妻子皆出門外以遲之。公驅馬不顧而去。及至界上。百濟人望公兵衛。不敢犯。於是。乃退。公子歸自高句麗。入唐乞師。太宗皇帝曰。聞爾國有庾信者。爲人何如。公子對曰。庾信雖少有才智。然寡國不藉天威。則百濟豈易除邪。太宗曰。新羅忠順。誠君子之國也。乃詔將軍蘇定方。帥師二十萬往征百濟。是時。公在梁州軍。飮酒作樂。若無意於軍事。州人謗之曰。三軍晏居日久。騎有餘勇。步有餘銳。可以一戰。而將軍恒醉奈何。公聞之。知民可用。請伐百濟。以報梁州之役。王許之。公遂簡兵。入百濟。百濟以卒逆拒之。公佯北至玉門谷。伏兵發擊其前後。大敗之。獲百濟將軍八人。斬一千級。乃遣使者。告百濟曰。忠臣品釋及其妻烈女金氏。死於爾國。埋骨獄中者七年矣。今爾國將軍八人。爲我所獲。匍匐請命。庾信以鄰國之義。不忍殺之。今爾國發一使者送死者二人之骨。易生者八人可乎。百濟仲常言於王曰。骸骨留之無益。可以送之。乃函品釋夫妻之骨以歸之。公立遣將軍八人。還百濟。明日。乘勝拔百濟十有二城。斬二萬級。虜九千人。未幾。又入百濟境。拔其九城。斬九千級。虜六百人。論功進上州行軍大總管。公子春秋。歸自唐。以定方兵二十萬。來攻百濟。語公曰。春秋生還本朝。復與公相見於此。豈非命邪。公對曰。庾信仗國威靈。與百濟交刃而戰。拔其城二十有一。斬首虜三萬九千六百人。使品釋夫妻之骨。得反鄕里。此天也。吾何力焉。公子終身感其義。二十二年。百濟兵入石吐城。公分其軍爲五道。以禦百濟。有水鳥飛過公營。諸將士以爲不祥。公謂衆曰。今夜必有百濟人來諜者。堅壁毋動。待明日。援兵大至而後戰。䜓者聞之。告百濟。百濟將軍殷相等。疑有援兵。不敢擊。於是公自道薩城出旗趣戰。五道兵前後合攻。殺將軍殷相等十人。虜將軍正仲等百人。斬其卒八千九百八十人。獲馬萬匹。將軍正福。以其兵一千來降。皆釋之。永徽五年。王薨無嗣。公言於朝曰。公子春秋當立。羣臣皆曰。微將軍。孰建大策。乃迎春秋。入卽位。三國翕然稱賢王。明年秋。公伐百濟。告于王曰。百濟無道。其暴虐甚於桀紂。此王者伐罪之時也。王以爲然。顯慶五年。大興兵。將伐百濟。會天子詔大將軍蘇定方。率樓船軍十三萬。次德物島。遣使者文泉來告。王乃與世子法敏。出南川。以公及眞珠天存爲將軍。具船百艘。載兵士。會定方軍于德物。定方謂世子曰。世子陸行。以七月十日。會于百濟城。世子來告。王率將士至沙羅。定方軍入依伐浦。海岸泥濘。不可行。乃布柳席以出軍。圍百濟城。公潛師奪扶蘇山。百濟亡。公功居多。天子下詔褒嘉之。定方謂公曰。吾欲分百濟之地。爲公食邑。何如。公對曰。大將軍以天子兵。滅百濟。報下國之讐。慰寡君之心。寡君及一國軍民蹈舞不暇。而庾信乃受食邑以自利。非臣義也。遂不受。定方以是知其忠。龍朔元年。定方率師征高句麗。公從戰。次于南川。百濟王從子福信。據公瓦城遮。三軍不得直前。公進兵薄于城下。遂圍之。未幾城陷。公於是引兵而前。王遣使迎勞定方於平壤。定方曰。定方受命。涉大海入高句麗。艤舟海門者踰月矣。軍不至。糧食且絶。定方烏得以不歸乎。王患之。公流涕曰。國家有事。臣雖死。義不可避。請入平壤。從唐師一戰而死。王大喜。執公之手。且泣曰。得公賢弼。寡人可以無憂矣。公旣受命。卽閉戶焚香齋戒。然後行。士卒感動。明年正月。入平壤。至七重河。諸將懼莫肯先登。公揮戈先自乘船。遂渡河。兵威甚盛。糧道不絶。抵䔉壤。與諸將誓曰。庾信旣滅百濟。又進兵千里渡河者。欲藉天子之力。滅高句麗。願諸將翕心一力。破平壤。以奏成功。諸將皆曰。敢不遵將軍之命。至獐塞。會天大寒。公露肩策馬前驅。士無不努力赴敵。皆流汗不知其寒。遂踰險。次于楊隩。公先使庶子軍勝。入定方營。餽軍糧。定方大喜。高句麗陰遣精兵。伏瓢河。伺公渡岸。公軍少。乃積柴草。夜燃之。使煙火百里相屬。以桴鼓繫于牛尾而搖之。牛驚走。桴鼓俱鳴。高句麗遂不敢犯。公旣渡岸。分諸軍擊高句麗。大破之。斬萬餘級。虜將軍一人而歸。後八年。公弟欽純。入平壤。將行。從公受方略。滅高句麗。王敎曰。庾信率師平二國。功績茂焉。其予食邑五百戶。賜輿杖。上殿不趨。天子遣使冊平壤郡開國公。詔公入朝。不果行。百濟旣亡。其大夫黑齒常之遲受信。葆任存山。復百濟二百餘城。公治軍凝然不動。出奇計。授劉仁願以平之。後九年。公寢疾病。王臨問爲之泣下曰。卿疾如不可諱。於社稷何。公對曰。臣愚不肖。賴殿下用之不疑。故得成尺寸之功。今三國旣爲一家。可謂少康。然自古繼體之君。鮮能有終。願殿下疎遠小人。親近君子。使基業垂于無窮。則臣死亦無憾矣。以咸亨四年七月一日。卒于正寢。享年七十九。訃聞。震悼。命有司賜帛千匹。租二千石。賻恤其家。葬之日。特賜鼓吹一百人。以備軍樂。又賜民戶。守其墓。後贈王爵。謚曰興武。公機明不出里巷。而能知鄰國之事。嘗夜徐步出門外。有男子自西而來。公心知平壤諜者。使之前曰。爾國有某事乎。諜者震怖不能對。公正色曰。吾王仁聖。上不違皇天之命。下不逆丘民之心。爾往告爾國君臣。無勞游士行諜爲也。諜者遁去。高句麗聞之。大驚曰。庾信神明。不可輕也。公爲將二十四年。能下士。得其死力。蘇定方圍高句麗旣七月。軍中食盡。將班師。公憂之。與步騎監裂起語曰。庾信載糧以行。汝先告定方軍中。毋令班師。裂起遂從仇近等十五人。抵平壤。言庾信轉輸而來。定方悅。遂不班師。金官太祖曰首露。自漢建武十八年。王金官國。至仇亥。降于新羅。其後子孫。仍三世爲名將家。公夫人新羅金氏。武烈王第三公主也。生子五人。長曰三光。天子召爲中郞將。次曰元述。次曰元貞。次曰長耳。次曰元望。庶子一人。卽軍勝。石門之役。將軍義文力戰死。元述亡走。不能死。公言可斬。元述慙莫敢請見。及公卒。請見其母金夫人。金夫人怒曰。爾旣不得見爾父。吾焉得爲爾母乎。卒不見之。諸宗族皆服其嚴。公當三國交爭時。以上將軍兼百濟幷高句麗。百餘戰。威震天下。然不遇武烈之明。則流言終必間之。公安能成其功哉。王氏時。門下侍中金富軾。爲公列傳。多傅會。不足考信。今景源銘公之石。惟叙公之所以得君與武烈之所以任公者。詒于後世。其銘曰。
曁曁金公。都督之子。總帥之孫。其猛如兕。天立三社。兵張不弛。父征子戍。繹騷千里。公哀斯民。矢一土疆。結髮取旗。
武震四方。公子西聘。幽于圜墻。公請移師。于浿之陽。公子乃還。入覲天邑。帝感其忠。德音撫輯。公乃定策。公子是立。
有赫玄鉞。天誅斯急。扶蘇嶪嶪。王旅來蹂。鞹鞃孔奭。鳥章叴矛。介冑弓矢。克復王讐。不受食邑。義聞皇州。敦彼䔉壤。
誓我六師。天寒肩瘃。流汗中逵。鼓聲在尾。萬牛驚馳。終取王險。由公出奇。二邦旣定。維公之功。帝降誥命。冊玆上公。
西嶽有墓。其碑維豐。守臣銘之。用勸元戎。<끝>
江漢集卷之十三 / 神道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