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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봉 하겸진 묘갈명(晦峯河謙鎭墓碣銘)
(삼성 이병철회장의 형 이병각 선생의 장인)
회봉선생묘갈명 병서
선생의 휘는 겸진(謙鎭) 자는 숙형(叔亭) 호가 회봉(晦峯)이고 또 사재(畏齋)라 하였다.
성(姓)이 하(河)씨로 진양(晉陽) 출신 고려 충절신 증평장사(高麗節臣 贈平章事) 휘 공진(拱辰)을 시조로 한다.
조선시대에 휘 수일( 受一)이 있었는데 벼슬이 이조랑(吏曹郞)이었으며, 세상에서 송정(松亭) 선생이라 불렀고, 선생은 그 분의 11대손이다. 고조부는 휘 이태(以泰) 호가 함와(涵窩)이며 증조부는 휘 정현(正賢)이고 조부는 휘 학운(學運)이며 호가 만취(晩翠)다. 부친은 휘 재익(載翼)이며 대대로 유학(儒學)을 업(業)으로 삼았다.
모친 김해허씨(金海許氏)는 징사( 徵士) 천산재(天山齋) 허천수(許千壽) 공의 후예인 선비 허정(許湞) 공의 딸이다.
선생은 고종 7년 경오년(1870) 정월 28일 사곡리(士谷里)의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겨우 말을 하면서 글자를 알아보았고, 6세 때 조부 만취공(晩翠公) 한테서 <사락(史略)>을 배웠는데, 하루에 수십 줄을 외웠고, 거동을 스스로 단속하여 의젓하기가 어른 같았다.
박 만성(朴晩醒) 선생이 와서 보고는 두류시(頭流詩)로 시험해 보니, 곧바로 대답하여 매우 기특하고 장하게 여겼다. 박공이 크게 경탄하며 이런 자질과 재주는 하늘이 준 것이라고 여겼다. 소년이 되자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을 두루 읽고 곁들여 역사와 백가(百家)의 책에도 푹 젖어 꿰뚫지 않는 것이 없었고, 간혹 시(詩)와 문장(文章)을 지어 나타내면 정밀하고 넓고 깊어 빠르게 옛날 작자(作者)의 경지로 나아갔다.
얼마 뒤 진정한 학문은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알고, 더욱 경전(經典)의 훈고(訓詁)에 힘을 다하여, 잠자고 먹는 것을 잊은 채 곱씹으며 파고들어 오로지 도(道)를 구하였다. 나이 24세인 계사년(1893)에 덕산(德山)의 산천재(山天齋)에 가서 남명(南冥: 曺植)선생의 <학기( 學記)>를 교정(矯正)했는데, 밝게 살피고 정밀하게 다듬었다.
함께 교정한 사람으로 비록 뛰어난 재주를 갖춘 사람이라도 감히 앞서지 못했다. 그 뒤 3년 병신년(1896)에 면우(俛宇) 곽(郭)선생을 거창(居昌) 다전(茶田)에서 찾아뵈워 나라의 그릇으로 인정받았고, 그 문하의 선비로 현명한 사람이 많았으나, 아무도 감히 선생과 같이 되기를 바라지 못했다.
선생은 세상의 재미에 대해 고상(高尙)하고 담박(淡泊)했는데, 경술년(1910)에 나라가 망한 이후는 더욱 문을 닫고, 나서는 것을 줄여 성명을 보전하는 계책으로 삼았다. 기미년(1919)에 이르러 곽 면우 선생이 파리장서(巴里長書)의 일로 대구의 왜적 감옥에 구금되었고, 선생도 연좌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풀러났다.
곽 선생이 병들어 출옥하여 세상을 떠나니, 호상(好喪)하여 마지막 예를 다해 장례를 치렀고, 뒤에 곽 선생 행장(行狀)을 지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의 정의(情義)를 서술하였다. 이후로부터 도가 더욱 외로워지고 세상이 더욱 어지러워지는 것을 아파하여 중국으로 떠나 땅을 마련하여 가서 살려고 생각했으나, 늙으신 어버이 때문에 뜻대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구강산(龜岡山)에 집을 짓고 날로 저술하며 가르치는 것을 일삼으니, 원근의 사우(士友)들이 다투어 도덕이 돌아왔다고 추앙했다. 병인년(1926)에 유림단(儒林團)의 일이 다시 일어나 선생이 맨 먼저 옥살이를 하게 되었고, 앞뒤로 8~9개월 동안 밤에는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 맹자(孟子)를 외우고 낮에는 주역(周易)을 펼쳐 완상하며 일과로 삼았다.
그래서 출옥할 때 모발과 수염이 감소하지 않았으니, 평소에 편안하게 환난에 대처하는 도리를 여기서 알아볼 수가 있었다. 기사년(1929) 6월 부친상을 당했는데 나이가 60세의 노인이었고, 시기조차 극도로 더웠는데, 곡하고 우는 것과 거처와 음식을 모두 예법에 따랐으며 혹 지나친 예도 있었으나 마치지 못한 것은 없었다.
상복을 벗고, 덕곡서당(德谷書堂) 이 낙성(落成)되니 수업을 청하고 글을 구하는 사람들의 출입이 서로 이어져 날로 상대하느라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때로 이름난 산수(山水)에 나가 노닐며 가슴속의 회포(懷抱)를 펼쳤다.
거기에는 시대를 개탄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뜻이 읊조리는 사이의 곳곳에 드러났다. 을유년(1945)의 광복을 보게 되자 마음에 크게 즐거워 취가행(醉歌行)을 지어 기록해 두었다. 이듬해 병술년(1946) 여름에 우연히 목에 종기가 나서 여러 달을 낫지 않더니, 마침내 7월 11일 정침에 운명(運命)하였고, 향년 77세였다.
10월에 구강정사(龜岡精舍=정읍시 소성면에 소재하는 朴仁圭, 1909~1976선생 서실) 오른쪽 산기슭에 장례를 치르니, 원근의 인사들이 모여 곡하고 슬픔을 다하였고, 상복을 입은 제자들이 수백 명이었다. 뒤에 유택이 이롭지 못하다고 덕곡서당(德谷書堂) 뒤 모 좌의 언덕에 이장(移葬)하였고, 부인 진양정씨(晉陽鄭氏)를 합장(合葬)하였다.
부인은 은렬공 정신렬 공의 후예인 선비 정태표 공의 딸이다. 아들이 하나로 영윤이고 딸이 둘인데 장녀는 박덕종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이병각에게 시집갔다. 영윤의 아들은 원근, 심근이고, 딸사위는 이상택, 손기진, 김병국, 허봉선이고, 박덕종의 아들은 우정, 우상, 우호, 우기, 우조이고, 이병각의 아들은 동희이고 딸은 조필제이다. 원근은 아들 병동을 낳았는데 어리다.
선생은 순수한 자질과 고명(高明)한 재능으로 개연히 일찍 도를 구하는 뜻이 있어, 본성과 천명에 대해 깊이 몰두하고, 이치와 바른 도리를 풀어내고 넓고 높게 궁구하였다. 하늘이 덮고 땅에 실린 것은 정밀하게 탐구하기를 다 하지 않는 것이 없었고, 누에 실과 소의 터럭처럼 미세한 것도 분석해보지 않는 것이 없었다. 명백하게 융합, 통달하여 하나의 마음에 표준으로 모아서 성현 심학의 진정한 가르침을 터득하여 학설을 지어 밝혔으니, <심위자모설( 心爲字母說) > 다섯 편이 그것이다.
심성(心性)과 이기(理氣)에 대해 논하기를, “마음은 따로 된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본성과 감정을 뭉뚱그린 이름이다. 마음이 자모가 됨을 알면, 마음을 말하면서 리니 기니 겸리기 니 하는 것이 모두 각기 하나의 의리가 되지만 서로 방해되지는 않는다. 마음이 자모(慈母)가 됨을 모르면, 리(理)니 기(氣)니 겸리기니 하는 것이 다 같이 잘못됨이 없을 수 없고, 주기가 더욱 그러하다.”라고 하였다.
태극(太極)에 대해 논하기를, “태극은 온갖 이치를 갖추고 있는데, 온갖 이치가 곧 태극이다. 이것에 통하면 마음이 본성을 갖추고 있어서 본성 바깥에 마음이 없다는 의미가 바로 드러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허령지각(虛靈智覺)을 논하여 말하기를, “이 마음이 허령지각이라고 하면 옳지만, 허령지각이 곧 마음이라고 하면 옳지 않다. 마음에 허령지각이 있지만 허령지각이 마음 그 자체는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 모두 선생이 자득의 경지에 깊이 나아가 앞의 사람이 밝히지 못한 것을 밝힌 것이 이와 같다. 경전(經典)의 석의(釋義)를 논할 때 주요한 관건은 만나면 반드시 자기 생각으로 내면을 향하여 분석해보고 타당함을 얻고 나서야 그만두었고, 선배들이 형성해 놓은 설을 구태여 따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평생 자부하거나 높게 여기지 않았으며, 구차스럽고 가난해도 대소롭게 여기지 않았다. 겉이나 안이나 진실하기 그지 없었고, 남들과 심하게 다르지 않는 듯하였다. 평소의 생활은 마음을 맑게 가지고 지긋이 앉아 화기가 온 얼굴에 가득하여 몸에 조금도 게으른 기색이 없었다.
남을 대할 때, 처음에는 담담하여 맛이 없는 듯 하였지만, 오래 지나면 어질고 자애로움이 가득하였고, 얼굴빛이나 말하는 사이에 오직 한 덩어리의 온화한 기운이 드러낫다. 그래서 현명하거나 어리석거나 친하거나 소원함과 관계없이 심취하여 오래 머무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생도들을 맞아들여서는 은근히 그 재목을 헤아려서 우수한 자는 스스로 이르러야 할 곳에 이르도록 하고 부족한 자는 다방면으로 설명하고 이끌어 분발해 일어나도록 하여 감화시켰다. 이는 모두 선생의 심학(心學)을 미루어 살펴본 것이고, 말씀하는데 흩어져 있는 것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진실로 이를 들어서 적용하면 그것으로 나라를 다스려 태평을 이룩하기에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나라가 망극한 변을 당한 때를 맞아 산림에서 늙어 생을 마쳐, 실제로 베풀어 행한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홀로 저술에 고심하며, 유도(儒道)의 깊은 뜻을 밝혀내어 유학의 써러지는 실마리를 부지하여, 사람들에게 나라는 망하더라도 도는 추락해서는 안 되고, 세상이 어지러워져도 학문을 연마(硏磨)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을 알게 하였으니, 그 공이 어찌 나라를 다스려 태평을 이루는 일의 아래에 있겠는가?
그러나 당시에 선생의 덕망(德望)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고, 문하의 제자들 또한 이어받아 기록하는 자가 없다면 뒤에 오는 사람이 장차 무엇으로 징험하겠는가? 아! 선생이 돌아가신 다음 해에 사자(祀子) 영윤(泳允)군이 남향의 인사들과 함께 힘을 모아 선생이 남길 글 50권을 간행하고, 별저인 <어류절요(語類節要)>와 <동시화(東詩話)> 등 열 책도 차례로 간행하였다. <동유학안(東儒學案) > 수십 권은 아직 초고를 정리하고 있어 책판에 새기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영윤(泳允)군이 또 불행히도 죽고 4년이 지났다. 그의 병이 위독해졌을 때 나에게 말하기를, “부친의 묘비문을 달리 도모할 데가 없으니 뒷날 그대가 짓는 것이 옳겠다.”라고 하였다. 올봄이 되어 선생의 묘비를 세우는 일이 시작되었고, 외손 동희(東熙)가 큰 자금을 내어 도왔다. 비석이 조성되자 동문의 여러분이 거듭하여 영윤 군의 유지대로 나에게 글을 지을 것을 독촉하였다.
가만히 스스로 생각해 보니, 평소 선생의 문하에 출입한 세월이 오래지 않다고 할 수 없고, 말씀하신 뜻을 받들어 들은 것이 많지 않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오로지 이렇게 둔하기 짝이 없는 재주로 선생의 높고 깊은 도덕을 엿보고도 스스로 변화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태산과 대들보가 무너지고부터 19년여간 더욱 다시 황폐한 세상을 떠돌다가 뜻과 학업이 하나도 나아가지 못했으니, 지금 어찌 이 일을 감당하여 발휘할 것이 있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영윤 군이 죽음에 임하여 부탁한 말을 끝내 저버릴 수가 없으니, 이렇게 평소에 보고 들은 것과 논저에서 본 것을 근거 삼아 이처럼 서술하고, 이어서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오로지 깨달은 옛 성인이 전수하신 법칙이 있었어라
한결같이 중도로 나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 참된 목표였네
세상이 피폐하고 도가 흩어져, 학문의 근원은 너무 침헤체하니,
편안히 취할 수가 없는데, 누가 그 근원을 만날 수 있으랴
아! 우리 선생이시여! 이렇게 마음의 이치들을 새겨서
예전에 없었고 뒤에도 없이, 밝게 입언 하셨어라
외롭게 외치고 홀로 나아갔는데, 덕을 알아줄 사람 누군가
참담한 마음으로 잇고 열었으니, 그 공적이 훌륭하였네,
저 덕곡이 완연하고 스승의 자리 예전 같은데
그 위에 있는 무덤 봉분은, 넉 자의 흙을 돋우었네
강학처와 무덤가 나무에 남겨진 그늘 변하지 않았으니
다가올 천만 년의 세대에, 길이 뒷 선비의 모범이 되리
문인 창산 성환혁 찬하다.
(門人 昌山 成煥赫 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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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晦峯先生墓碣銘 竝序.
先生諱謙鎭 字叔亭 號晦峯 又號畏齋 河氏出晉陽 高麗節臣 贈平章事諱拱辰爲始祖 李朝有諱受一 官吏郞 世稱松亭先生先 生其十一世孫也 高祖諱以泰 號涵窩 曾祖諱 正賢 祖諱學運 號晩翠 考諱載翼 世業儒 妣金海許氏 徵士天山齋千壽之後 士人湞女 先生以高宗七年庚午正月二十八日 生于士谷里第 自幼朗睿 甫語便能識字 六歲受史略於晩翠公 日誦數十行 動止自規 儼若成人 晩醒先生朴公 來見之試賦以頭流詩 卽立就語甚奇壯 朴公大驚歎 以爲此資才 天所授也 及成童 徧讀四子六經 傍及史傳 百家之書 無不淹貫竝穿 而間出爲詩文 精粹淵博 駸駸古作者閫城矣 旣而知學之亶不止此 益致力於經訓傳詁 忘寢與食 而咀嚼鑽硏 惟道之求焉 年二十四癸巳 往德山山天齋 校勘南冥先生學記 明鑑精裁 其所與共訂者 雖皆雋才莫敢有先之 後三年丙申 拜俛字郭先生於居昌茶田 見許以國器 其門下士賢者雖多 莫敢有望之 先生雅淡於世味 自庚戌國變以來益閉門簡出以爲全性命計 至已未 郭先生以巴里長書事 被拘大邱倭獄 先生亦連坐 未幾見釋 逮郭先生得病 出獄而沒 爲護其喪 送終盡禮 後著其行狀 以敍始終之誼 自後傷其道益孤 而世益亂 思欲遊中州 而相地往寓焉 以親老不可如意 則逐築室於龜岡山中日以著述 敎授爲事 遠邇士友 爭推道德之歸 丙寅儒林事再起 先生首繫達狴 前後爲八九月 夜誦庸學論孟 晝則披玩周易以爲程科 及出髭髮無減 平昔其晏然處患之道 此可見矣 己巳六月 遭大人公憂 年六十老矣 時且極暑 而其哭泣 居處飮食 盡從禮制 有或過之而無不及者 服闋 德谷書堂成請業丐文者踵相接 應酬日不暇給 而猶時出遊名山水 以暢襟懷 其慨時憂國之意 往往見吟詠間 及見乙酉光復 心大樂 作醉歌行以識之 越明年丙戌夏 偶得項▼(疒+童) 彌留屢月 竟以七月十一日 考終于正寢 享年七十七 十月以禮葬龜岡精舍右麓 遠近人士 會哭盡哀 門人加麻者 數百人 後以其宅兆不利 移窆于德谷書堂東岡 艮坐原 祔以配孺人晉陽鄭氏 孺人殷烈公臣烈之後 士人太驃之女 一男泳允 二女長適朴德鍾 次適李秉珏 泳允男元根樳根 女壻李商澤 孫基珍 金炳國 許奉善 朴德鍾男雨禎 雨祥 雨祜 雨祺 雨祚 李秉珏男東熙 女趙弼濟 元根生子炳棟幼 先生以純粹之資 高明之才 慨然早有求道之志 沈潛性命 紬繹理義 窮博高 而天覆地載 無不究盡精微而蠶絲牛毛無不析 昭晢融通 會極於一心 而得聖賢心學之眞詮著說以明之 心爲字母五篇是已 其論心性理氣 則曰心非別爲一物 性情之總名也 知心之爲字母 則言心而曰理曰氣曰兼理氣 皆各爲一義 而不相病焉 不知心之爲字母 則曰理曰氣曰兼理氣 均不能無失而主氣其尤也 其論太極 則曰太極具萬理 而萬理卽是太極 通於此則心具乎性 而性外無心之義 便躍如矣 其論虛靈知覺 則曰謂此心虛靈知覺則可矣 而謂虛靈知覺卽是心則不可 心有虛靈知覺 虛靈知覺不是心 此皆先生深自造得 以發前人所未發者 有如是矣 至其論經釋義 遇有肯綮大關 則必以己意向裏剖剔 得當而後己 不苟循先輩成說 然而平生不矜持以爲高 不苟艱以爲大 表裏恂恂 若無甚異於人 燕居澂心凝坐 盎和滿面 少無怠倦之設於體 與人處始若淡平無味 久之而仁愛譪然 色辭間惟見一團溫氣 故無賢愚親疏莫不心醉而留連 接引生徒隱度其材 而上焉者 聽其自至至 下焉者 陳誘多方 使有興起而感化之此 皆先生心學之推 而散於云爲之際者 又有如是矣 苟能擧而措之 雖以之致治平在所不難矣 而値此國家罔極之變 終老山林 無所施設獨其苦心著書 闡明儒道之深旨 扶持斯學之殘緖 使入知國雖亡 而道不可墜 世雖亂而學不可不講 其功豈遽在治平之下哉 然而當時知德者鮮 門生諸子又未有能纘述之 來者將何考焉 嗚乎先生旣沒之明年 嗣子泳允君 與南鄕人士 募力印行其遺書五十卷 其別著語類節要 東詩話諸書 亦次第就刊矣 至東儒學案屢十卷 方在整草 而不及入梓 泳允君又不幸死四年矣 方其病革 謂煥赫曰先人墓文 無他可圖 異日子爲之可也 至今年春 先生墓碑之役興 而外孫東熙出巨貲以助 碑旣成同門諸公 申以泳允君遺志 督煥赫書之 竊自念平日出入先生門屛 歲月不爲不久 承聆音旨 不爲不多 而惟是魯鈍 旣不能窺見其道德之崇深 以自變化 自山樑之頹 十有九年之間 益復標浪荒廢 志業無一就 今何敢當是役 而有所發揮者哉 雖然泳允君垂死之託 有終不可孤負 則玆據平日所見聞 及見於論著者 敍述之如此 而系以
銘曰
維覺先聖 傳授有則 精一執中 乃其眞的 世弊道散 學多汨源 匪安而取 孰逢其原 猗我先生 契此心詮 曠前絶後 立言炳然 孤唱獨詣 知德者誰 慘憺繼開 其功則嵬 宛彼德谷 皐比如昨 有封其上 崇土四尺 講樹宰木 餘蔭不渝 來千萬世 永式後儒
門人 昌山 成煥赫 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