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8. 8. 11. 16:46
25世 이석종(李碩宗)/판전공파
생졸년 : 1574년(선조 7)~1644년(인조 22) 1월 7일
선무공신 수문장 이공 묘갈명 병서(宣武功臣守門將李公墓碣銘 幷序)
진성 이만도 찬(眞城 李晩燾 撰)
찬인 생졸년 : 1842(헌종 8)∼1910./경북 안동 출신
공의 휘는 석종(碩宗), 자는 국형(國馨)이다. 이씨(李氏)의 보계는 경주(慶州)에서 나왔다.
신라 좌명공신(佐命功臣) 알평(謁平)이 그 시조이고, 고려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강(康+羽)이 중조(中祖)이다.
7세를 전하여 조선에서 참봉(參奉-從九品)을 지낸 만수(萬壽)가 경주에서 울산(蔚山)으로 이주하였으니, 공의 고조이다.
증조 휘 효문(孝文)은 문장과 덕행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조부의 휘는 한림(漢林)이다.
부친의 휘는 맹천(孟天)이다. 모친 김해 김씨(金海金氏)는 소(昭)의 따님인데, 만력(萬曆) 갑술년(1574, 선조7)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걸출하고 호방하여 몸을 떨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의지가 있었다.
임진년(1592 선조25) 난리 때 울산이 왜적 선봉(先鋒)의 공격을 받자 병사(兵使) 이각(李珏)과 군수(郡守) 이언함(李彦諴)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 버렸다. 공은 약관의 나이로 같은 고을 의사(義士) 박봉수(朴鳳壽) 등 165인과 함께 빈 성을 지키며 적을 막아 내기로 맹세하였다.
공은 남다른 근력과 타고난 무예(武藝)로 반드시 남보다 앞서 내달렸고, 또 서인충(徐仁忠), 서몽호(徐夢虎), 박홍춘(朴弘春), 김응충(金應忠), 이응춘(李應春), 박진남(朴震男) 등과 합세하여 적을 막아 내니, 적은 물러나 양산(梁山)과 동래(東萊)의 접경에 진을 쳤다.
9월 순찰사(巡察使) 김수(金晬)와 병사 박진(朴晉)이 김태허(金太虛)를 울산군 가수(假守=임시 군수)로 삼아 흩어져 달아났던 병사를 불러 모으고 의병봉기를 독려하니, 공이 가장 먼저 그 부름에 응하였다.
10월 적선(賊船) 6척이 기장(機長)에서 곧장 울산군으로 향해 오자 공은 가수를 따라 힘껏 싸워 적선 2척을 빼앗고 수많은 적의 목을 베었다. 이에 순찰사와 병사가 함께 치계(馳啓)하여 가수를 실제 군수로 삼아 주었다.
계사년(1593, 선조26) 4월 적병이 다시 대대적으로 진격해 오자 마침내 경주의 이견대(利見臺)와 봉길리(鳳吉里), 장기(長鬐)의 소봉도(小峯島) 등으로 군진(軍陣)을 옮겨 가며 교전하여 연달아 승리하였다.
갑오년(1594 선조27) 1월 이경연(李景淵), 이한남(李瀚南), 윤홍명(尹弘鳴), 장희춘(蔣希春), 유정(柳汀) 등과 함께 병사를 이끌고 경주의 문천(汶川)에서 회맹(會盟) 하였다. 당시 적들이 양천(楊川)을 차지하고 마을을 노략질하였는데, 공이 숲속에 몸을 숨기고 활을 쏠 때마다 틀림없이 적중시키니 적들이 감히 밖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공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저들은 비축한 군량이 없어 오직 노략질로 마련하고 있으니, 기회를 노려 급습한다면 분명히 전멸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한밤중인 삼경(三更)에 복병(伏兵)을 설치하여 번갈아 공격하며 크게 괴롭히니, 적군은 다급해진 나머지 자기들끼리 짓밟으며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부지기수였고, 목이 잘리거나 사로잡힌 자도 많았기에 보루(堡壘)를 버리고 달아나 버렸다.
정유년(1597 선조30) 왜적이 다시 미쳐 날뛰며 쳐들어와 서사포(西舍浦)에 주둔하였다.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가 본 고을에 와서 진무(鎭撫)하고 있었으므로 공이 박봉수 등 여러 의사들과 마귀의 휘하에 나아가 본영(本營)의 병사들과 힘을 합쳐 싸워 숙마성(熟麻城)을 함락시켰다.
또 임랑포(林浪浦)의 작곡(鵲谷)에 있던 잔적(殘賊)들을 추격하여 상처를 동여매고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수십 차례의 혈전(血戰)을 벌이자 적장이 모두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기해년(1599, 선조32) 10월 여러 의사들과 마 제독(麻提督)의 창표당(蒼表堂)에서 주연(酒宴)을 벌였고 마 제독이 그 일을 기록하였다. 12월 안무사(按撫使) 이상신(李尙信)이 도착하여, 당시 병사로서 군(郡)을 다스리는 임무를 겸하고 있던 곽 공 재우(郭公 再祐)와 나란히 이들의 공적을 계품(啓稟)하였다.
임금이 가상히 여겨 필선(弼善) 윤휘동(尹暉同), 관찰사 한준겸(韓浚謙)을 파견하여, 경주와 울산의 여러 장군과 병사들을 모아 선유(宣諭)하고 음식을 내려주며, 차등 있게 상을 하사토록 하였다.
을사년(1605 선조38) 선무공신(宣武功臣)을 책록 할 때 공은 소자(小字)인 석숭(石崇)으로 3등을 차지하였으니, 그 관직이 바로 수문장(守門將)이다. 갑신년(1644, 인조 22) 1월 7일 세상을 떠났고, 문수산(文殊山) 도동(桃洞) 해좌(亥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부인 연안김씨(延安金氏)는 의(義)의 따님인데 공과 합장하였다.
아들 셋을 두었으니, 숭복(崇福), 숭헌(崇獻), 헌수(獻守)이며, 숭복과 숭헌은 공음(功蔭)으로 부장(部將-從六品)을 지냈다.
숭복의 아들은 사인(士仁), 사익(士益), 사성(士誠)인데 모두 공음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다. 숭헌의 아들은 응신(應信)이다. 헌수의 아들은 영립(永立), 영백(永伯)이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의 묘소에 예전부터 비석은 있었지만 비문(碑文)은 없었기에, 여러 후손들이 공의 위대한 업적이 혹시라도 인멸될까 걱정하여 비석을 바꾸어 세우려고 하였다. 정효(庭孝) 씨가 팔순(八旬)의 고령(高齡)으로 공의 유사(遺事)를 기록하고 아들 유면(裕冕)을 보내 나에게 묘갈명을 부탁하였다.
내 자신을 돌아보면 깊은 산속에서 병들어 칩거하고 있으니 감히 감당하지 못할 일이다. 그러나 의리상 또한 감히 사양할 수도 없으니, 삼가 유사의 내용을 모아 서문을 짓고 명을 잇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건국 이래 외란은 현익이 가장 심했는데 / 有國外訌最玄黓
저 영토 받은 장군 중에 직분 지켜 죽은 자 없었네 / 彼封疆者不死職
필부로서 의리 떨쳤고 나이 또한 약관이었으니 / 匹夫奮義年又弱
왕께서 “내 가상히 여겨 공신에 책록하노라” 하셨네 / 王曰予嘉策勳錄
세상 모든 관리들아, 이 비석 살펴보시라 / 凡百有位視此刻
[주해]
[주01]서사포(西舍浦) : 현재의 울주군(蔚州郡) 서생포(西生浦)의 옛 지명이다.
[주02]창표당(蒼表堂) : 서생포의 왜성(倭城) 안에 울산 지역 의병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사당이다. 명나라 장수 마귀(麻貴)가 만
들었다고 전해진다.
[주03]소자(小字)인 …… 차지하였으니 : 소자는 어릴 때의 이름을 말한다. 공신록에 어릴 때의 이름인 석숭(石崇)으로 기재되었다는 말이
다.
[주04]건국(建國)…… 심했는데 : 조선 건국 이후 발생한 외란(外亂) 중 임진왜란의 피해가 가장 심각했다는 말이다.
현익(玄黓)은 고갑자(古甲子)에서 ‘임(壬)’이 들어간 해를 말한다.
자료 : 향산집 제15권/묘갈명(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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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선무공신 수문장 이공 묘갈명 병서
(宣武功臣守門將李公墓碣銘 幷序)
公諱磌宗、字國馨、李氏。系出慶州 新羅佐命功臣。謁平其 始祖也。高麗 判典客寺事 、其中祖也。七傳至我朝參 奉、萬壽自慶移蔚山、其高祖也。留祖諱孝文、以文行著名。 祖諱漢林。考諱孟天。妣金海金氏昭之女。以萬曆甲戌生 公。自幼特特豪邁、有奮身殉國之志。及壬辰亂、蔚當初鋒 兵使 李珏、郡守 李彦諴棄城逃、公以弱冠與同鄕義士 朴鳳壽等一百六十五人、誓守空城以禦賊。公膂力絶人、武 藝天得、所向必先人。又與徐仁忠、徐夢虎、朴弘春、金應忠、 李應春、朴震男等、合勢拒賊、賊退、屯梁萊之境。九月巡察 使 金晬 兵、使 朴晉以金太虛爲本郡假守、招集散亡、奬厲 義男、公首先應之。十月賊船六隻自機張直向本郡。公從 假守力戰、獲船二隻、多斬馘。巡兵使竝馳、啓以假守爲實。 癸巳四月、賊又大進、遂移陣慶州利見臺及鳳吉里。及長 鬐小峯島交戰、連勝之。甲午正月同李景淵、李瀚南、尹弘 鳴、蔣希春 柳汀等、率兵曾盟于慶州 汶川、時賊據楊川、鈔 掠村里、公從林藪中藏身、飛矢射必中、賊不敢出。公言于 諸將曰、彼無見粮、惟以鹵掠爲資、若乘時急擊、勦滅必矣。 夜三鼓設伏、迭攻大蹙之、賊窘迫、自相蹂躙、入水死者、甚 衆、所斬獲亦冬、棄壘奔潰。丁酉賊再猘屯西舍浦、天將麻 貴來鎭本邑、公同朴鳳壽諸義士詣天將麾下、與本營將 士戮力合戰、捘熟麻城、又追林浪鵲谷零賊、裏創血戰數 十合、勢如破竹、賊酋盡散去。己亥十月、與諸義士宴飮于 麻提督蒼表堂、提督序其事。十二月按撫使 李尙信來到 時、郭公再祐以兵使兼治郡務、竝啓其勞勩。上嘉之、遣 弼善、尹暉、同 觀察使 韓浚謙合慶蔚諸將士、宣諭犒饗賞 賜有差。乙巳策宣武勳、公以小字右崇居三等、其官卽 守門將也。甲申正月七日卒、葬于文殊山 桃洞亥坐原。配延 安金氏義之女。祔。有三子、崇福、崇獻、竝功蔭部將 獻守。崇 福男、士仁、士益、士誠、竝功蔭通政。崇獻男、應信。獻守男、永 立、永伯。曾玄以下不盡錄。公墓舊有碣而無文、諸孫懼偉 蹟之或泯、將改竪。庭孝氏以八耋頹齡、錄其遺事。遣男裕 冕責銘於余、自顧窮山病蟄不敢當、而義亦不敢辭、謹撮 而序之、系以銘。銘曰、 有國外訌、最玄黓。彼封疆者、不死職、匹夫奮義、年又弱。 王曰予嘉、策動錄、凡百有位視此刻。<끝>
향산집(響山集) 제15권 墓碣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