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부의 말에 대답하고 반대편에 앉아 조금 전부터 계속 마차 밖을 바
라보고 있는 후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후크. 밖에 뭐 좋은 거라도 있어?"
"시꺼. 카멜. 나는 너와는 달리 너무나 감수성이 예민하다고. 제발 우울해
져 있는 나를 건드리지 말아 줘."
"우울해져 있는 사람치고는 상당히 말이 많은데?"
나는 고개를 절래 절래 저으며 반대쪽의 거리를 내다보았다.
"날씨는 정말 우라 지게 좋군. 원래 이렇게 기분이 우울한 날엔 비라도 쫙
쫙 내려야하는 게 아닌가? 구름이여, 너희가 지금 감히 쟈스칼 상단의 차기
주인이 될 이 후크 님의 의지에 반하겠다는 거냐? 태양 님께 뇌물을 바쳐
서 그냥 확 뒤집어 버릴까보다!"
날더러 우울하니까 조용히 하라고 말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후크가 또
다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상태로 미루어 보아 후크의 입이 다물어
질 일은 영원히 없을 것 같구나.
"그냥 날씨에 맞춰서 멋진 기분을 내는 게 어때? 날씨더러 네 기분에 맞추
라고 억지를 부리지 말고."
"제발 나의 감상을 깨지 말아다오. 카멜. 내가 생각하기로 넌 감수성이 병
아리 눈물만큼도 없을 듯 싶다. 아니, 병아리 눈물도 너무 많아!"
"상인더러 감상적으로 되라는 것은 그날로 망하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라는
거 몰라?"
"......훗, 그런가? 며칠 못 보던 사이 꽤나 레벨 업 했구나, 카멜. 그러나
나의 말발을 따라오려면 한참 멀었다. 멀었어."
"그러냐?"
나는 그냥 후크를 무시하기로 하고 팔을 고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멀리서
어렴풋이 거대한 리아 후작의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말발의 원조를 꼽으라면 역시 카류겠지. 카류의 말발은 너도 못 따라가는
거 아니냐? 후크."
"...그래, 그래서 지금 나의 사부 님을 만나러 가는 게 아니겠어."
후크는 피식 웃었다. 그러나 카류의 이름을 들먹여서 그런지 후크는 약간
얼굴이 상기되었다. 동굴 사건이 있은 후로 그를 만나는 것은 거의 3년 만
이다. 3년이 지났건만 우리들은 아직도 그때의 뒷모습을 잊지 못하고 있다.
몇 번이나 죽을 뻔하고 피투성이가 되어가면서도 우리들을 삶으로 이끌어
주었던 작은 꼬마의 뒷모습을 말이다.
"카멜 도련님. 후크 도련님."
문득 들려오는 소리에 마차가 멈춰 섰다는 것을 겨우 깨닫고 마차에서 내렸
다. 리아 후작의 저택은 저번에 한번 왔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살벌한 호위
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지금도 우리들의 마차와 마차를 호위하는 병사들을
보고 완전히 경계태세에 들어가 있었다.
"리아 후작 님께 여쭈어라. 힐튼 상단의 카멜과 쟈스칼 상단의 후크가 왔다
고 하면 알아들을 것이다."
나의 말에 가장 지위가 높아 보이는 병사가 다가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카멜 님. 후크 님. 안으로 드시지요."
"조치가 빠른데?"
"그만큼 우리들을 기다렸다는 뜻이겠지."
나는 후크의 말을 가볍게 받아주며 그 병사의 뒤를 따라 저택의 안으로 들
어갔다. 병사들은 우리들은 커다란 응접실로 안내했다. 과연 리아 후작 가
의 저택답게 그곳은 굉장히 아름답고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곳곳에 우
리 상단을 통해 들여온 물건들도 눈에 띠여 나는 슬쩍 웃었다.
"뭐가 우스워?"
"그냥, 여기저기 우리 상단에서 나온 물건들이 있잖아."
"음... 과연.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런 것을 따지다니, 굉장한 상인정신이군
. 이러다가 내 대에 이르러 힐튼 상단에게 우리 상단의 자리를 뺏기는 거
아냐?"
후크는 칭찬하는 건지 비아냥거리는 건지 알 수 없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아마 짐작컨대 둘 다 일 것이리라.
"자...잠시만요!!"
콰당!!
밖에서 누군가의 곤란한 목소리가 들리나 했더니 곧 큰 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그러고 보니 응접실 문짝에 옅게 여러 개의 발자국이 나있는 것처럼 보이는
군. 나의 착각인가? 리아 후작 가에서 감히 문을 발로 차고 들어오는 인간
이 그렇게 많을 리가 없잖아.
"후크! 카멜!!"
나는 익숙한 목소리의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짧게 자른 녹색머리카락의
남자가 약간 고개를 들고 우리들을 보라보고 있었다.
"...에르가!? 어째서 네가..."
후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에르가를 보고 외쳤다.
"후... 에스문드 백작이라고 불러라. 이 건방진 녀석아."
"에스문드 백작? 설마... 에스문드 백작 가가 제6왕자 군에 가담하기로 한
거야?"
에르가는 천천히 우리 쪽으로 걸어와 자리에 털썩 앉으면서 불만이냐는 표
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불만이냐?"
"풋, 다른 건 모르겠지만 그 말투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나는 에르가를 보고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3년 전의 일이 있은 후 카류
에 의해 가장 크게 변한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에르가이다. 그런 에르
가가 모든 위험을 감수하면서 카류의 편을 들었다는 것이 그렇게 의외의 일
도 아니었다. 비록 험한 말투나 솔직하지 못한 성격은 조금도 바뀌지 않은
듯하지만 말이다.
"왔구나."
"와, 정말 반갑다! 너희들!!"
금빛의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기른 아름다운 여성과 연갈색의 짧은 머리칼을
지닌 남자가 함께 응접실 안으로 들어오면서 소리쳤다.
"히노 양. 그리고 딜티?"
"딜티? 넌 어떻게..."
오랜만에 만난 아름다운 히노 양의 모습을 더 감상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
았지만 뒤이어 나타난 의외의 인물에 이번에는 나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제껏 들은 정보에 의하면 카류를 반역자로 만든 데는 트로이 후작 가와
후르부크 백작 가가 가장 큰 공헌을 했다고 들었는데, 딜트라엘은 트로이
후작 가의 장남이니 말이다.
"...아, 뭐. 그렇게 놀랄 것도 없어. 전에 카류가 나의 생명을 구해주었으
니 나 역시 은혜를 갚아야지.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
라고."
딜티의 말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설마 카류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
을 버리고 홀로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얘기인가?
"...라는 건 솔직히 전부 뻥이다. 푸훗."
"뭐라는 거야? 딜티! 너 이 자식!"
에르가가 신경질을 부리자 딜티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의자를 하나 골라잡
아 털썩 앉았다.
"동굴 사건 있지? 그거 우리 아버님이 일으킨 거였대. 아버님은 카류와 카
류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전부 생매장을 시켜버리려 했던 거야. 물론 친아들
인 나도 함께 말이지. 뭐, 그것 까진 어떻게든 참아보려 했는데 카류가 처
형식에서 도망치자마자 나를 죽이겠다지 뭐냐. 그 일을 우연히 듣게 된 난
신경질이 나서 가출한 거고 생각 없이 가출하고 나니까 갈 곳이 없잖아. 그
래서 카류에게 온 거야."
딜티는 심각한 내용의 말을 별일 아닌 것처럼 가볍게 쏟아냈다. 그러나 곧
표정을 바꾸고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카류라면 나를 받아줄 줄 알았거든. 자신을 이런 절망에 빠뜨린 원흉의 아
들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카류는 나를 받아들였지. 거기에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해줬다."
나는 갑작스레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뭐, 그냥 그렇다는 거지."
딜티는 다시 가볍게 웃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응접실 안으로 약간 살벌한
공기가 감돌았다.
"후크, 카멜. 너희들이 카류를 찾아온 이유가 기쁜 이유였으면 좋겠구나."
히노 양은 마치 명 조각가의 최후의 걸작품인 듯한 얼굴에 아름다운 미소를
만들어 내며 우리들을 향해 말했다. 동굴 사건 후 제대로 말을 할 수 있게
되긴 했지만 여전히 카류를 제외한 우리들에게 먼저 말을 건다 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었던 조용한 히노 양이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는 그녀의 목소리는 정말 분명하면서도 단호했다. 그만큼 그녀에게 카류
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였던 것이다.
"모두들 정말 오랜만이구나."
입구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응접실 내의 일동은 빠르게 소리가 나
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리아 후작 님과 다른 많은 사람들을 뒤에 두고
한 소년이 앞으로 걸어나오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카류..."
후크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정말 반가워. 후크. 카멜. 거의 3년 만이구나."
결국 후크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카류에게로 뛰어나갔다. 언제나 잘난 척
말은 혼자 다하면서도 의외로 후크는 상당히 감정적이다.
카류는 마치 상냥한 아버지같이 후크를 안아주었다. 어떻게 보면 정말 이상
한 장면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끼리 포옹을 하는 일이 있긴 하지만
이건 그런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고 할까.
"카멜은 안 와? 이제 다 컸다고 내가 싫어진 거야?"
후크의 등을 토닥거려 주면서 카류는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싫어진 게 아니고 네게 안기는 게 싫어진 거야. 다 컸는데 그러면 정
말 쪽 팔리잖아."
"정말? 이거 아쉽네. 하지만 지금 안아주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고집
부리지 말고 이리 와. 응?"
"......"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카류는 피식 웃으며 후크를 떼어놓고 약간
흥분해 보이는 그를 달래 듯 붉은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음, 정말 오랜만에 보는구나. 자기보다 키도 큰데다가 나이도 많은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는 이상한 버릇을 가진 꼬맹이를 말이다. 아, 이제는 꼬맹이
까지는 아니군.
"아, 너는 영원히 크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키가 조금 컸구나. 카류."
"카멜... 아주 저주를 걸어라, 저주를. 나도 이제 곧 너희들만큼 클 거야.
지금도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고 있는 중이거든."
카류는 겨우 진정한 듯 보이는 후크의 손을 이끌어 원래 자리에 앉히고 자
신도 중앙에 비치된 의자에 앉았다.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각자 자리를 잡
고 앉았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야겠군. 카멜, 후크. 나를 찾은 이유가 있을 테지?"
"아, 물론 있지."
"간단하게 말하자. 앞으로 쟈스칼 상단과 힐튼 상단은 어떻게 할 예정이지?
"
카류는 우리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카류는 조금 전 우리들 대하면서
웃던 때와는 사뭇 달라진 느낌이었다. 왠지 모르게 날카롭고 차가워진 느
낌.
"우리는 상인이다. 뼛속까지 말이야."
나의 대답에 리아 후작이 몸을 약간 앞으로 내밀면서 진지하게 물어왔다.
"힐튼 상단과 쟈스칼 상단에서 원하는 것이 뭐지?"
"아직 구체적인 이해타산을 따져볼 시기는 아닌 듯 합니다. 리아 후작 님.
일단 현재의 전체적인 상황을 보건 데..."
그러나 내가 전부 답하기도 전에 카류는 팔짱을 낀 채로 입을 열었다.
"궁극적으로 손해를 볼 것이 뻔한 사업엔 투자할 수 없다는 뜻이로군."
"카류 님...!"
리아 후작은 카류를 보며 약간 인상을 썼다. 어떻게든 자신의 편으로 끌어
들여야 할 우리들을 어떻게든 회유하려 하지 않고 그냥 직설적으로 말하는
카류의 행동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우리 사인데 뭐 어떤가요? 그리고 저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내 말이 틀린
것 같지도 않은데."
"...카류 말이 옳습니다. 리아 영지가 넓으니 여러 가지로 이득을 챙길 수
도 있는 일이지만 그랬다가 나중에 리아 영지가 망하면 뒤에서 도움을 주었
던 우리 상단은 좀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겠지요. 뭐, 그런 것입니다. 저
희들은 저희 상단을 망하게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쾅!
"그렇다면 대체 여기엔 뭣 하러 온 거야!?"
역시 다혈질인 에르가가 제일 먼저 흥분하여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소
리질렀다.
"...뭐, 작은 도움이나 줄까 싶어서..."
"도움?"
"밖에... 마차에 돈이 실려 있을 거다. 친한 친우이자 생명의 은인인 네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다."
"마차에 실린 돈 정도로 전쟁에 도움이 될까?"
카류는 입술을 비틀었다. 나의 곁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눈동자만을 굴리던
후크가 처음 보는 카류의 모습에 그대로 몸을 경직시켰다.
"...개인...적인 감정에 휩쓸려 나의 가족과 상단의 모든 사람들을 곤란에
빠뜨리게 할 수는 없어."
"그런 것이군. 뭐, 나보다 가족과 상단이 더 소중하다는 말이었군. 그런 이
야기라면 편지로 했어도 충분했을 텐데 그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일부러 찾
아오다니, 정말 수고가 크구나."
카류의 목소리는 한기가 묻어날 정도로 차가웠다. 그 말을 들은 후크는 이
제 몸을 약간 떨기까지 했다. 평소 하는 짓과는 달리 후크는 의외로 정말
마음이 여린 놈이다. 생명의 은인이 가장 궁지에 몰렸을 때 그것을 무시하
는 결정을 내리면서 후크는 끊임없이 죄책감에 시달렸고 나는 그것을 달래
느라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사내녀석 주제에 후크는 이 일로 인해 몇 번
이나 눈물을 터뜨렸는지 모른다.
"뭐, 도와주는 척하다가 배신하는 쪽 보단 이 편이 훨씬 낫겠지. 너희들을
원망하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만 말이다."
카류는 큭큭 웃었다.
"그러게 조금 전에 안아보자고 하지 않았니, 카멜. 이젠 다시는 너희를 안
아줄 일은 없겠구나. 잘 가라. 나의 귀여운 친구들."
카류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며 후크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네...네가 제1왕자 파에게 조금이라도 맞설 가능성이 보인다면 그때 꼭 너
를 도와주겠어!"
"...음, 뭐랄까. 그 말을 다시 해석하면 지금은 맞설 가능성이 조금도 안
보인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말이야. 그렇다면 내가 도움을 받아야하는 시기
는 바로 지금이 아니던가? 내가 죽기 직전의 고비에 처했을 때는 눈뜨고 지
켜보기만 하다가 내가 맞설 만 할 때 도와주는 게 무슨 큰 자랑이라고 그렇
게 소리치는 거야?"
후크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카류의 말이 너무나
잔혹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리라.
"물론 자랑이라고 하는 말은 아니야. 하지만 그 때나마 도움을 줌으로서 다
시 너의 친구로 돌아갈 수 있겠지. 그러면 다시 너에게 안길 수도 있을 테
고 말이다. 오늘 너에게 안기는 걸 거부했던 건 그 언젠가를 위해서야."
그 특이한 포옹을 뺀다면 카류의 친한 친구라고는 할 수 없으리라. 카류가
우리들을 껴안겠다고 다가올 때마다 징그럽다고 난리를 치긴 했지만 사실
대부분의 친구들은 그에게 안기는 것이 그렇게 어색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특히 동굴에서 있었던 그 일 이후로는 카류의 껴안기는 더욱
익숙해지고 있었다. 외모 상으로 치자면 우리들 중 카류는 그 누구보다도
자그마한 꼬맹이에 불과했지만 그 녀석의 품은 이상하게도 마치 우리들을
보살펴주는 부모님이나 큰형의 품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엔 의외로 재미있는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이 참 많구나. 가
장 중요한 시기에 내게서 등을 돌렸다가 겨우 설만할 때 손을 좀 내밀었다
고 내가 너희들을 다시 사랑하는 친구로 맞아줄 것이라고 생각해? 내가 그
렇게 착해 보이나? 그렇게 자비로워 보였어?"
"그래. 너는 그런 녀석이지."
나는 아직 동굴에서 보았던 너의 뒷모습을 잊지 않고 있으니까. 몇 번이나
죽음에 기로에 서면서 너의 진정한 모습을 보았으니까.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뻔뻔하게 나올 수 있는 것인지도 모
르겠다.
그러나 카류는 나의 말에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고개를 갸웃했
다. 그러다가 이내 빙긋 웃는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아, 그거 말이구나. 나는 더 이상 남을 위해 쉽게 목숨을 바쳐주지 않아.
나는 나를 가장 소중하게 여겨주는 자를 위해 살아남기로 했거든. 나는 그
들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할거야. 따라서 나를 가장 소중하게 여겨주지 않는
너희들에게 그다지 자비롭지 않을 거다."
카류는 의자에서 일어나 완전히 몸을 돌렸다.
"카...카류...!"
후크가 앞으로 나가려 하는 것을 나는 겨우 붙잡을 수 있었다.
후크, 이 바보녀석. 여기서 카류를 따라 뛰쳐나가면 그게 무슨 꼴불견이냐.
우리가 당장 카류를 도와줄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내게 목덜미를 잡힌 후크는 나를 바라보다가 카류를 바라보았다가 하면서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그 자리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카류가 완전히 밖으로 나가버리자 딜트라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들을 바
라보며 말했다.
"최악의 재회가 됐구나. 나는 내 가족보다 카류가 더 소중해서 따라 나가봐
야겠다."
히노 양도 카류가 나간 문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슬픈 표정으로 우리들
에게 말했다.
"안타깝구나. 기쁜 일이 있기를 바랬는데. ...그래도 언젠가 만날 날이 있
다면 좋겠구나."
"....히노..."
"저도 나가볼게요. 아버님."
리아 후작은 너무 급작스러운 전개에 조금 당황했는지 우리와 문 쪽을 번갈
아 보았다. 아마 이렇게 중요한 일에서 교섭의 여지도 없이 바로 나가버린
카류에게 약간 황당했나 보다. 하지만 이 상태에서는 우리가 교섭을 할 생
각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니 카류의 행동이 그렇게 황당한 일도 아니다.
"...언젠가 너희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겠다. 그 동안 너희들이 카류에게
검을 들이대지 않는다면 말이야."
의외로 그 말을 한 것은 에르가였다. 바로 우리들에게 주먹이라도 한방 날
릴 것 같던 녀석이 이런 말을 한 것이다.
"그때 진짜 제대로 된 재회를 하자."
"그래...."
나는 에르가의 말에 답했다. 왠지 목소리가 약간 잠겨오는 듯 해서 나는 의
아함을 느꼈다.
"카멜..."
내 목소리를 이상하게 변하게 만든 원흉은 내 뺨에 흐르는 눈물이었나 보다
. 나는 신경질 적으로 눈을 훔치며 말했다.
"빌어먹을...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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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몇 일만에 올리는 걸까~~요. 퍽! 켁~!!(그렇게 큰 짱돌을 던지시다뉘...)
어제 판타지 월드에 올라온 잡담을 보고 위기의식(?)을 느껴서
수정이 덜 끝났지만 11월의 마지막날 기념으로 괜시리 한편 올려봅니다. -_
-;;;
그럼 굿 바이.
Q. 다음 편은 언제?
A. 기약 없음.
돌아올 날짜를 알려달라는 분이 계시는데요.
수정이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어서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잉. 짜증짜증... (-ㅍ- )( -ㅍ-)
저도 그냥 본 편이나 쓰고 싶네요. T-T;;;
# 94 - 상인 1
나는 후크와 카멜에게 한껏 짜증을 부려준 다음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 딜티와 히노 선배가 나의 방으로 뒤따라 들어왔다. 그들은 후크와 카멜
을 만나고 내가 상심했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빙빙 돌려가며 나를 위로하려
했다. 사실 후크와 카멜에게 심한 소리를 한 것은 다름 아닌 나였는데 이런
식으로 나를 위로하려 하는 그들을 보자니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그만큼
이들이 나를 착한 인간으로 보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이렇게 두 사람의 위로의 말에 간간이 대답을 해주며 앉아 있는데 갑자기
방으로 리아 후작 님이 들이닥쳤다.
"카류 님! 그들은 앞으로 우리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중요한 손님
들입니다. 그런 식으로 대하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리아 후작 님은 몹시 못마땅해하는 표정으로 다가와 언성을 높혀가며 나를
질책했다.
"죄송합니다. 리아 후작 님. 하지만 어차피 저의 편으로 들어오지 않을 이
들인데 친절하게 대해줄 필요는 없잖아요?"
"그들을 회유하는 최소한의 말도 하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저는 후크와 카멜을 누구보다 잘 아는 걸요. 여기가지 와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다는 이야기예요. 제가 아무리 회유의
말을 해도 듣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 시간 낭비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한 짓이니 용서해 주십시오."
"곤란합니다. 이렇게 큰 일에서 그런 식의 어림짐작은 말입니다!!"
"저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었기에 그런 것뿐입니다. 다른 자들을 대함에 있
어 그런 짓을 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프리란트 님은 어지간히도 화가 났던지 계속 쏘아 붙여 왔지만 계속 내가
담담하게 말을 받아내자 겨우 질책하기를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동안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다가 평소에 사용하던 톤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솔직히 신기한 상황이더군요. 손을 벌려야 할 쪽은 우리들인
데 오히려 카류 님께서 화를 내고 저 쪽에서 곤란해하는 모습이라니, 역시
카류 님은 인덕 하나는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제 인덕도 참 대단하죠? 그런데 결정적인 곳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니 이걸 어쩌면 좋죠?"
나는 피식 웃으면서 프리란트 님의 말에 응수했다. 프리란트 님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쟈스칼 상단과 힐튼 상단의 일은 차후로 미루어지게 되는군요. 그
들이 완전히 돌아 선 것은 아니니 일단은 넘어가기로 하겠습니다. 다른 상
단과의 일도 있으니 언제가지나 거기에 연연할 수만은 없겠지요."
"다른 상단이라 함은..."
"저는 3년 전부터 카류 님의 의견을 받아들여 상업의 부흥을 꾀해보고자 리
아 영지의 관세를 줄이고 정기시장을 만들도록 지원함으로서 상인들에게 많
은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빌미로 일단 리아 영지를 주무대로
삼고 있는 상인들을 회유해볼 생각입니다."
"하지만 쉽게 넘어오지는 않을 거라 생각되는군요. 후크와 카멜에게 은혜를
베푼 건 저도 다르지 않거든요. 그런데도 저를 외면했지 않습니까."
나는 약간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나는 그렇게 큰 은혜를
베풀었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어지
고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닌 셈이다. 프리란트 님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머리
를 짚으며 말했다.
"그렇겠지만 일단 이야기는 해봐야지요. 이번에 만날 상인들에겐 절대 친구
분들에게 한 것과 같은 태도를 취하셔서는 안됩니다."
"물론입니다. 저도 그렇게 분별이 없지는 않으니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
실 필요는 없습니다."
"후우, 알겠습니다. 카류 님. 내일 리아 영지의 상인들 중 가장 세력이 큰
자의 집으로 찾아갈 예정입니다. 다른 상인들도 모이도록 조치해 두었으니
준비해 두십시오. 굉장히 중요한 자리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프리란트 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프리란트 님을 마중했다. 문득 곁에서 약간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히노 선배와 딜티가 눈에 들어왔다.
"왜 그래요. 걱정하지 말고 이제 그만 모두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요."
"...힘내, 카류."
"물론 힘내서 상인들을 회유해 봐야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히노 선배."
나는 히노 선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면서도 말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히
노 선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 일이라면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그럼 우리들은 그만 돌아갈게."
"그래, 딜티. 쉬어."
나는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들이 복도 끝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
을 보며 나는 방의 중앙에 마련된 의자로 걸어가 털썩 앉았다. 그리고 탁자
에 팔을 고고 그 사이에 얼굴을 깊게 묻었다. 왠지 모르게 머리가 무거워져
왔기 때문이다.
"...디트 경."
원래 그림자 같은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정말 그림자가 되어버린 듯한 그의
이름을 아주 작게 읊조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귀도 좋군. 밖에 나가 있어 주겠어? 혼자 쉬고 싶거든."
"위험하므로 그 명령에는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해."
"죄송합니다. 혹시라도 있을 위험 때문..."
"귀찮아! 나가!!"
나는 몸을 일으켜 그를 향해 소리질렀다. 그러나 디트 경은 꿈쩍도 하지 않
고 나를 바라보고 말했다.
"불복하겠습니다."
"......"
나는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 디트 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의 노려봄은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듯 디트 경은 얼굴 색 하나 바뀌지 않
았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겉옷을 벗어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침대
에 몸을 누였다. 그리고 침대 옆의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은 통해 보는
바깥 세상은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파란 하늘뿐이었다. 나는 괜히 창 쪽을
향해 길게 팔을 뻗었다.
"멍청한 놈."
누구를 향해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양팔을 접어 얼굴을 가리
고 눈을 감았다.
다음날, 나는 엄중한 호위를 받아가며 리아 영지에서 가장 세력이 크다는
상인의 집을 방문했다. 그 저택은 과연 리아 영지에서 가장 부강한 상단의
본가답게 여느 귀족들의 저택 못지 않은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저
택의 주인은 헤이료우라는, 왠지 아르윈 왕국에서 쓰는 단어와는 다른 이국
적인 느낌의 이름을 간판으로 내세운 상단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멀미를 하는 관계로 마차가 저택 앞으로 서자마자 뭐에 쫓기기
라도 하듯 부리나케 마차에서 내렸다. 남은 아파 죽겠는데 프리란트 님은
그런 나를 보고 재미있다는 듯한 눈빛을 하기까지 했다.
"리아 후작 님! 아, 혹시 카류리드 전하십니까?"
나의 앞으로 갑작스레 웬 중년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거는 것을 보고 나는 최
대한 얼굴 표정을 가다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머리색을 보니 카류리드 전하가 분명한 듯 하군요. 반갑습니다. 저의 저택
까지 일부러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그래."
나는 인상 좋게 생긴 검은색 머리카락의 중년을 보고 약간 얼떨떨하게 대답
했다.
"크레베르. 상인들은 모두 모였는가."
"물론입니다. 벌써 다들 홀에 모여있는 중이지요. 준비를 해두었으니 드시
기만 하면 됩니다."
"알겠네. 카류 님. 가시지요."
"그러죠. 프리란트 님."
프리란트 님이 크레베르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우리들을 안내하고 있는 그
가 아마도 이 헤이료우 상단의 주인인 듯 했다. 그는 일부러 저택 밖으로
나와 우리들을 마중하면서 생각 이상으로 우리들에게 호의적인 움직임을 보
이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속마음이라는 건 알 수 없는 것이니 안심하기
는 이르다. 특히 이런 쪽으로 성공한 상인들은 더더욱 그럴 것이다.
"여러분, 리아 후작 님과 카류리드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크레베르는 커다란 홀로 들어서며 우리들을 소개했다. 많은 상인들이 우리
들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이렇게 그대들을 만나게 되어 반갑네. 일단은 연회를 즐기도록 하게."
프리란트 님은 천천히 말을 하려는 듯 일단 단도 직입적으로 용건에 꺼내지
는 않았다. 그리고 나와 함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상인들에게 나를 소개를
하고 리아 영지의 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상인들과의 대화
에서 내가 아는 한 최대한 유식하게 보이는 단어를 써가며 그들에게 상업에
대해 많은 것을 아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애썼다.
"정말 의외로군요. 왕족인 카류리드 전하께서 이렇게나 상업에 대해 자세하
게 아실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나는 상업을 무시하는 이런 상태로는 아르윈 왕국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네. 그래서 상업에 대한 여러 가지 책을 읽었고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프리란트 님과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기에
약간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뿐이지."
"그렇지 않습니다. 보통 귀족들은 상업을 천한 직업이라 생각하며 업신여기
기만 할뿐이죠. 왕족인 카류리드 전하께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 상업계의 큰 행운입니다."
상인들은 상당히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만면에 웃음꽃을 피우며 앞으로의
경제 정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를 원했다. 나는 예전에 프리란트 님과 대
화에서 생각해 두었던 이야기를 꺼내가며 나의 편을 들었을 때 자신들에게
얼마나 큰 이익이 갈 것인 지를 은근히 강조해 주었다.
솔직히 이것이 거짓은 아니다. 나만큼 상업의 진정한 중요성을 알고, 관심
이 많은 귀족도 드물 테니 내가 이기게 된다면 누구보다도 그들에게 가장
큰 이득이 돌아갈 것이다. 솔직히 이런 일이 없더라도 내가 정책 결정을 할
수 있는 입장이 된다면 그 무엇보다도 상업을 중흥시킬 생각이었으니 말이
다.
# 95 - 상인 2
나는 한동안 홀에 가득 모인 상인들을 차례로 돌아가며 대화를 나누었다.
거의 대부분의 상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생각했을 때 크레베르가 못 보
던 젊은 남자와 함께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그는 조금 전처럼 같은 사람 좋
은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연회는 즐거우신 지 모르겠군요."
"덕분에 즐겁게 지내고 있지. 여기 저기 사소한 부분까지 꽤나 신경을 쓴
모양이더군. 이번 일에서 그대의 수고를 잊지 않을 것이네."
"그런데 그대의 곁에 그 청년은 누군가?"
프리란트 님의 물음에 크레베르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네, 실은 이 아이를 소개시켜드리고 싶었습니다. 켈레인이라 하는데 제 아
들자식이죠. 부족하나마 헤이료우 상단의 다음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공부
를 시키려고 이곳에 데리고 나온 것이랍니다."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카류리드 전하. 리아 후작 님."
우리들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그는 크레베르만큼이나 인상이 좋아
보이는 상당히 잘생긴 남자였다.
"다른 분들의 말을 들어보니 카류리드 전하께서는 상업에 대한 지식이 굉장
히 풍부하시더군요. 사실 리아 후작 님의 덕분에 이곳 리아 영지의 상인들
은 모두 크게 성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카류리드 전하께서 왕이
되신다면 이곳 리아 영지뿐만이 아니라 아르윈 왕국 전 국토에서 그런 이득
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켈레인이라는 이름의 남자는 상당히 직접적으로 말을 해왔다. 나는 그 말의
의도가 진정 호의인지 파악하기 위해 그의 맑은 남색 눈동자를 똑바로 바
라보았다.
"물론이네. 사실 내가 3년 전부터 이런 식으로 상업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도 카류 님과의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서였지. 그대들도 대화해봐
서 알겠지만 카류 님은 아직 나이가 어리심에도 그런 쪽으로 굉장히 뛰어나
시다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생각됩니다. 솔직히 그다지 큰 기대는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절실히 느끼는군요."
켈레인은 나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것을 좋은 의도로 받아들여도 되겠는가."
나는 조용히 그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켈레인은 자신의 아버지인 크레베르
를 잠시 돌아본 다음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사실 조금 어렵군요. 사실 저희는 결코 카류리드 전하와 리아 후작 님
을 잃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상태는 너무 어렵군요."
"그대들의 도움이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르네. 상인이라면 한번쯤 자신의 재
산을 크게 부풀리기 위한 도박을 해야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렇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승산이 0%인 도박에 손을 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요."
나는 한숨을 쉰 다음 켈레인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쉽게 넘어오지 않을 것
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큰 실망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대로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후, 0%라는 말이 나오다니 정말 재미있군. 이 세상 어디에도 표준화된 승
률을 표로 짜놓은 곳은 없다. 그런데 그 승산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불은 손을 대어보지 않고도 뜨겁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자신의 판단은 과신하는군. 그대들에게 있어서 상업은 자연현상과 같이 당
연하고 쉬운 일이었나? 호오, 그래서 그대의 상단이 이렇게 대성을 한 것인
가 보지? 그대들은 별 노력을 하지 않아도 불이 뜨겁다는 것을 알듯이 투자
할만한 자리를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을 테니까."
켈레인은 잠시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곁에 서 있던 크레베르
가 입을 열었다.
"틀립니다. 상업이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요. 저희 헤이료우 상단도 조상
대대로 시장의 물가와 소비자들의 수요, 다른 상인들의 움직임 등 수많은
요소들을 분석하여 지금의 모습을 이루어 낼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 동안
수많은 실패도 겪어야 했지요. 결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감히 0%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 있는가? 어디서든지 의외의 변수가
있을 수 있는데 말이네."
"그렇군요. 조금 전의 저의 말을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실언을 했습니다.
이렇게 가르침을 받게 되어 기쁘군요. 카류리드 전하."
켈레인이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하는 것을 보고 곁의 프리란트 님이 상당히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일단은 그들이 어느 정도 더 호의가 깊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약간 안심을 하게 되었다.
"그러니 저희들에게 조금 더 정확한 승률을 타진해 볼 수 있는 정보를 제공
받을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카류리드 전하. 정확한 투자를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고 켈레인은 뒤에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기간이라. 대체 어느 정도의 기간을 말하는 것인가. 도박을 하기 전에
정보를 얻는답시고 어물거리다가 돈을 걸 타이밍을 놓쳐버린다면 아무런 의
미가 없는 것이 아닌가?"
"물론 저희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앞으로 두어 번
정도의 전쟁을 통해 카류리드 전하께서 리아 영지를 사수할 수 있다면 저
희들도 전하의 능력을 믿고 전하의 편에 서겠습니다."
크레베르가 켈레인의 뒷말을 이어 자신들의 입장을 보충해주었다.
"사실 리아 영지는 부강합니다. 장기적으로 볼 때는 많은 돈이 필요하겠지
만 아직까지 자금이 부족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그 기간동안은 저
희들이 돈을 걸 상대를 타진해 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투자를 결심하는 시기가 빠르면 빠를수록 배당도 크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좋을 걸세."
그 이후로도 계속 헤이료우 상단의 부자와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숙련된 상인이라 그런지 나의 몰아붙이는 말에도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서 이리저리 교묘히 빠져나가 당장 우리들의 편을 들겠다
는 대답을 받아낼 수가 없었다.
연회는 정오쯤부터 시작되어 어두운 밤이 될 때까지 계속 되었다.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된 대화로 나는 왠지 머리가 지끈거려 옴을 느꼈다. 그래서
프리란트 님에게 잠시 바람을 쐬고 싶다는 말을 하여 양해를 구하고는 디트
경을 데리고 슬그머니 연회장을 빠져 나왔다.
나는 밖으로 빠져 나오자마자 크게 숨을 들이켰다. 여름이 다가와 밤임에도
바깥 공기는 전혀 쌀쌀하지 않고 약간 후덥지근하기까지 했다. 나는 몇 번
숨을 들이켜 준 다음 주위의 정원을 한번 쭉 둘러보았다.
이 저택의 정원은 토이렌 식으로 말하자면 동양적인 분위기가 나는 듯한 느
낌이 들어 상당히 새로운 기분을 느끼게 했다. 보통의 정원은 중앙에 분수
가 있고, 통로에 의한 기하학적 화단과 회랑, 그리고 그에 둘러싸인 장방형
의 공간이 조성되어 있었지만, 이곳은 분수대 대신 작은 연못이 만들어 주
위에 나무와 풀 등을 심어놓고 그 사이에 편편한 돌을 박아 길을 만들어 두
고 있었다.
나는 후덥지근한 공기를 약간이나마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바람의 결을 따라
연못 가까이 걸어갔다. 파랗고 투명할거라 생각했던 연못은 하늘의 색을
받아 기분 나쁜 검푸른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그곳에 우두커니
서서 말없이 검푸른 색 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참방.
나는 고개를 번쩍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연회가 한창 진행 중인 이 저
택의 이 정원에는 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갑작스레 들린 물소리에
놀랐던 것이다. 그러나 금세 조금 떨어진 연못가의 조그마한 그림자가 있는
곳에서 물소리가 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의아한 마음에
그쪽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참방.
내가 본 그 그림자의 정체는 자그마한 몸집의 소년이었다. 몹시 부드러워
보이는 아름다운 쪽빛의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아이가 연못가에 쪼그리고 앉
아 손을 넣었다 뺏다하며 물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누구지?"
내가 그 소년에게로 다가가려 하자 디트 경이 나의 어깨를 붙잡아 그 행동
을 방해했다. 잠시 짜증이 나서 그냥 확 뿌리쳐버릴까 했지만 혹시나 모를
일이므로 일단은 그 자리에 서서 그 소년의 행동을 주시했다. 그러나 그 아
이는 우리가 다가온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 말도 없이 쪼그려 앉은
자세 그대로 손으로 연못에 계속 파문을 그려놓고 있었다.
"뭘 하는 거야?"
다시 한번 말을 걸어보았지만 아이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나는 그때서야
디트 경의 손을 뿌리치고 아이에게로 다가갔다. 디트 경은 더 이상 나를 방
해하기보다는 바싹 나의 뒤를 따랐다.
"뭘 하니?"
나는 그 소년의 곁에 쪼그리고 앉아서 다시 한번 말을 걸었다. 그러나 역시
나 반응이 없었다. 단지 멍한 표정으로 손을 물 속에 넣어 참방거릴 뿐이었
다. 나는 그 소년이 보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
를 들었다.
그 시선의 끝엔 그저 조금 전에 내가 바라보고 있던 연못만이 있을 뿐이었
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저 불길한 검푸른 색의 연못이 아닌 아름답게 빛나
는 달과 무수한 별이 잔뜩 박힌 연못이 놓여있었다. 나의 곁에 쪼그리고 앉
은 아이는 마치 그 별을 잡기라도 할 듯이 손을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별을 가지고 싶니?"
나는 그렇게 말하며 소년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소년은 멈칫
움직임을 멈추더니 그제야 내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애를 써서 아
이를 움직이게 만들었으니 그 기쁨에 아이를 향해 미소를 지어 줄만도 하건
만 나는 그렇게 하는 대신 멍한 얼굴로 약간 입을 벌렸다.
그 소년은 커다란 쪽빛의 눈동자를 들어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얼굴이 너무나 귀엽고 예쁘장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은은
하게 비치는 달빛과 아무렇게나 길러 얼굴을 약간 가리는 머리카락 때문에
소녀인가 하는 의문이 잠시잠깐 스칠 정도로 그 아이는 정말 귀여웠다.
내가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고 있자 아이는 그 자그마한 입을 살짝 벌렸다.
"손 치워."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의외의 말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 소년은 굉장히 신경
질을 내며 나의 손을 자신의 머리에서 쳐냈다. 그리고 다시 연못 속에 손을
참방거리기 시작했다.
잠시동안 정신적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던 나는 겨우 정신을 가다
듬고 다시 아이를 향해 다시금 말을 걸었다.
"너는 누구지?"
"......"
"어떻게 이런 곳에 있는 거지?"
"......"
"이름이 뭐야?"
일단 어떻게든 아이의 반응을 끌어보고자 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말을 걸
어보았다. 아이는 완전히 내 말을 무시하고 한동안 연못에 손을 첨벙거리다
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그 소년을 올려
다보았다.
"죽어."
그러나 아이는 또 한번 예기치 못한 행동을 했다. 그 귀여운 입으로 살벌한
말을 내뱉으며 쭈그리고 앉아 있는 나를 발로 확 차버린 것이다. 덕분에
나는 균형을 잡지 못하고 그만 연못에 빠져버렸다.
첨벙!
"헛?! 이 놈!"
약간 당황한 내가 연못가로 올라왔을 때 그 소년은 디트 경에 의해 완전히
제압된 상태였다. 팔을 뒤로 꺾여서 인상을 일그러뜨린 채였지만 제대로 된
반항도 못하는 걸 보니 암살 자로서 그런 짓을 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됐어. 그 아이를 놔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시끄러워! 풀어 주라고 했잖아!! 또 한번 내 말을 무시하면 가만두지 않겠
어!"
나의 고함소리에 디트 경은 겨우 그 소년을 제압하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
도 이 소년이 그저 홧김에 한 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
말에 따른 것이리라. 아니었다면 이번 말도 무시했을 것이 뻔하다.
아이는 바닥에 주저앉아서 자신의 팔을 주무르더니 곧 자리에서 일어나 저
택 쪽으로 걸어가려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말을
걸었다.
"너도 내가 싫으니?"
이번에는 내 말을 무시하지 않고 몸을 비스듬히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
소년의 쪽 빛 눈동자는 어린아이의 그것답지 않게 굉장히 깊게 느껴졌다.
잠시동안의 정적이 정원을 감돌았다. 그러나 무언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줄 줄 알았던 그 소년은 아무 말도 않고 그냥 몸을 돌려 저택 쪽으로 걸어
갔다. 아이가 완전히 나무들 사이에 가려져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보며 나
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완전히 젖어버린 옷을 대충 툭툭 털어 저택 안
으로 향했다.
물에 한껏 젖어서 들어온 나를 보고 프리란트 님과 상인들이 놀라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발을 헛디뎌 연못에 떨어져 버렸다고 거짓말을 해서 얼버무
린 다음, 켈레인의 옷 중 하나를 얻어서 입었다. 그리고 조금 더 연회장에
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리아 후작 저택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휴우, 애를 썼지만 그렇게 큰 성과는 없군요."
"상인들이니까요. 가장 계산이 치밀한 자들이 그들이지요. 으음... 일단은
눈앞에 닥친 전쟁에서 이길 생각만 해보도록 해요. 그들의 말처럼 당장에
큰돈이 필요한 것은 아니니 어느 정도 능력을 보여준다면 그들도 합세해주
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알겠습니다. 카류 님. 레이포드 경과 이야기를 나눠봐야겠군요. 아르디
예프 님과 류스밀리온 님께서 어서 빨리 돌아오셔야 할텐데 말입니다. 그래
서 자세한 이야기까지 해볼 수 있을 테니까요."
"네... 그렇겠지요..."
"...멀미가 심하신 모양입니다. 쉬도록 하십시오."
나는 울렁거리는 속을 참으며 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갑자기 얼굴에 자
조적인 웃음이 떠올랐다. 밤하늘에 빽빽하게 들어찬 별들을 보노라니 나를
발로 차버린 그 소년의 얼굴이 생각났던 것이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
을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