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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2022년 4월 17일 부활주일 설교
제목 : 내가 바라는 것은
본문 : 빌립보서 3장 10절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10절, 새번역>
할렐루야! 죽음을 이기시고 예수 우리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모두 함께 한 마음으로 부활을 축하하며, 기념하며, 감사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부활이 이제 나의 삶이 되어 모든 죽어 있는 것들을 살리는 ‘살아나서 살리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부활 주일 저희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빌립보서 3장 10절을 본문으로 하여 ‘내가 바라는 것은’ 이라는 제목의 말씀입니다. 먼저 새번역으로 준비된 본문을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10절, 새번역>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본적이 없기에 ‘부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기는 쉽지가 않을 것입니다. 그저 글로만, 설명으로만 이런 것이다 말할 수 있는 것이지 실제 경험을 통해 내린 정의는 아닙니다. 그래서 부활은 무엇인가 신비의 영역이 분명합니다. 가끔씩 천국을 다녀온 분이라던가, 지옥에 다녀온 분이 있다고 해서 그 영상을 찾아서 보았지만 너무 허무맹랑해서 오히려 반감만 생길 때가 많았습니다. 진짜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짜 죽음이 아니니 당연히 부활도 진짜 일리가 없습니다.
실제로 죽음을 경험한다는 것이 너무도 두려운 존재가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그 누가 죽음 앞에서 초연할 수 있겠습니까? 그 누가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죽음의 길이란 것을 알고도 담담하게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부활은 반드시 죽음이 있은 후에야 일어나는 일이니, 먼저 ‘죽는 것’이 너무도 중요한 선행조건이 됩니다. 그래서 부활을 생각하기 이전에 ‘죽음’에 대해서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부활이 무엇인지 죽음과 부활을 직접 경험하신 후 말씀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자신이 가야할 길이 죽음의 길이었음을 알고도 초연하게, 담대히 그 길을 가셨던 분이 계십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사람들의 환호성이 곧 자신을 향한 비난과 저주와 고함으로 돌아올 것을 다 알고 계셨기에 묵묵히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십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앞두고 근심하며 괴로워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눈물의 동산에서 아무 것도 모른 채 피곤함에 빠져 잠들어 있는 제자들을 보면서 담담하게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내려오셔서 잡히셨고, 온갖 고초와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물과 피를 쏟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울리며 두 번 큰소리를 외치시고는 숨을 거두셨습니다. 완전히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예수님은 죽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숨을 거두셨다. <마태복음 27장 50절, 새번역>
그래서 십자가 주변에 모여 있던 자들은 모두, 이제 예수님을 과거의 역사 속에 한 인물로 평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죽었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갔기 때문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은 당장 부활하지 않으셨습니다. 이틀이 지나도록 무덤에 머물러 부활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마지막까지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젠 다 포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죽고 나서 바로 부활하면 모를까 시간이 흘러도 부활의 소식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완전히 죽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첫 구절처럼, 말씀의 제목대로, ‘내가 바라는 것’ 첫 번째가 바로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이전에 독생자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시고, 공생애의 삶을 사시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원합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여기서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나의 경험으로, 모든 것 다하여서, 믿음으로, 실제로, 진짜로 ‘안다’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빌립보서 3장 10절A, 새번역>
부활 주일 아침 제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오늘 완전히 새롭게 다시금 알기를 소망합니다. 몇 십년동안 알아왔던 예수 그리스도를 오늘 더욱 넓고 깊고 새롭게 알고 싶습니다.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나를 위해 죽으신, 나를 너무도 사랑하신 그 발걸음 하나하나 다시금 초심으로 돌아가 제 마음 속에 각인하고 싶습니다.
스마트폰 하나도 새로운 것이 나오면 우리는 그 것이 어떤 성능을 가졌는지 알아가고자 무던히 노력합니다. 사실 그 전 기기와 큰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변화이지만 새 것이 더 큰 변화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새롭게 사귄 친구에 대해서 알아가는 재미는 우리의 삶을 더 활력 있게 만들어 갑니다. 사실 알아가다 보면 크게 다른 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새로운 친구를 통해 삶의 소소한 재미를 느끼곤 합니다. 이렇듯 무엇인가를 알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행복하고 윤택하게 만듭니다. 그 중에 ‘최고’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알면 알수록,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마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깊은 바다처럼 우리를 충만하고 풍부하고, 넓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찬송가 가사가 너무도 좋습니다.
“내 평생의 소원, 내 평생의 소원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그냥 알고 싶은 게 아니라 정말 간절히 알기를 소망합니다. 부활 주일 오늘부터라도 다시금 멈춰있던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고자 하는 마음에 시동을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빌립보서의 본문 이전에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귀하므로, 나는 그 밖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빌립보서 3장 7~8절, 새번역>
이틀이 지나고 3일 후, 안식일 다음 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두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줄로 알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특정 인물, 특정 장소에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활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흗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세상을 떠났지만, 대다수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6절, 새번역>
하나님에 의해 일으켜져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우리 삶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죽음을 무기력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던 벽을 허물어 버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원하는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죽음 그것으로 끝난 ‘위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메시아요, 하나님이시오, 나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어찌 우리가 외면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의 죽음이 그리고 부활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바로 그 죽음과 부활을 증명하기 위해 이 땅에 보내심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작은 예수들로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들입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이 땅에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살리고,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할 다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활 주일 아침 두 번째로 ‘내가 바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빌립보서 3장 10절B, 새번역>
그리스도를 알아 가면 갈수록 그 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다면 말로 설명할 필요 없이 제자들의 발걸음을 천천히 뒤따라 가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삶이 180도 완전히 변해버린 제자들을 통하여 복음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죽어 있는 것들이 살아나기 시작했고, 회복되기 시작했고, 꽃이 피기 시작했고, 열매 맺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는 바로 당신에게까지 전해져 무기력하고 의미 없는 삶이 ‘빛과 소금’으로 완전히 바뀌는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무의미에서 특별함이 되는 순간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을 깨달을수록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가 사랑이었고, 대신하여 죽으신 죽음이 사랑이었고, 부활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부활 이 후의 모든 삶은 ‘사랑’을 빼고서는 이야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이, 부활을 능력을 깨닫는 것이 그저 ‘앎’으로만 끝내지 않게 해주는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3장 2절, 새번역>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그리스도를 알고, 부활의 능력을 깨달았다면 우리 이제 ‘사랑’하며 살아갑시다.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으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사랑의 씨앗을 뿌리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 희생이 따를 것입니다. 아픔도 따를 것입니다. 때론 사랑하다가 실망이 찾아올 것이며, 절망의 순간도 찾아올 것입니다. 사랑하고자 했는데 미움 받을 수도 있습니다. 사랑했지만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미 이 모든 것을 체험하고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알고,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나면 이제 이런 삶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빌립보서 3장 10절C, 새번역>
자연스럽게 그 분의 고난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찌감치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그 제자의 길이 이제는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진짜 부활 주일을 믿음으로 보낸 이들이라면 지금 이 순간 이후의 모든 삶은 이제 ‘제자’로서 완전히 새롭게 세팅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누가복음 9장 23~24절, 새번역>
사실 그리스도를 아는 것까지는 최선을 다하고, 부활의 능력을 깨닫는 것까지는 이론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난에 동참하는 것부터는 실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론에 머물다가 돌아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 부활 주일 아침 ‘내가 바라는 것’은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주님 가신 길을 나도 함께 걷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그 영광의 길을 걷고자 결심하고, 실제로 걷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앎’에서 멈추지 않도록 황소걸음이라도 전진해 나가는 것입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입니다. 솔직히 두렵습니다. 살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나의 차례라고 말씀하시면 한 걸음씩 발을 떼긴 하지만 두려운 게 사실입니다. 그래도 살아가보려고 합니다. 두려워도 가보려고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해 보고자 결심하는 부활 주일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즐거운 길이 될 것입니다. 먼저 그 길을 갔던 베드로 역시 우리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시험하려고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그만큼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여러분은 또한 기뻐 뛰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13절, 새번역>
이렇게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 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결국 내가 가장 바라던 그 소원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 주일 아침 ‘내가 바라는 것’ 마지막입니다. 바울처럼 제 삶 끝에도 이 고백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10절, 새번역>
마지막 네 번째로 ‘내가 바라는 것’은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지, 왜 부활하셨는지, 마지막에 삶으로 고백하며 마무리하는 인생이 되고 싶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직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다는 그 놀라운 경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저 같은 나약한 인간이 어찌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기 위해 끊임없이 알아가고, 깨닫고, 동참할 것입니다. 나를 부르신 그 뜻대로,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고자 무던히 노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것입니다. 넘어질 때도 있고, 쓰러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아직 다 알지 못하는 그 놀라운 세계를 향해 날마다 믿음으로 걸어갈 것입니다. 그 믿음의 첫걸음으로 먼저 본받지 말아야 할 것들은 철저히 본받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아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만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아라.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 <마태복음 6장 7~8절, 새번역>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세의 자리를 이어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마태복음 23장 2~3절, 공동번역>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로마서 12장 2절, 새번역>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베드로전서 1장 14~15절, 개역개정>
사랑하는 이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십시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이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뵙지 못한 사람입니다. <요한삼서 1장 11절, 새번역>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부활 주일 제가 바라는 것은, 우리가 함께 바랬으면 하는 것은 이렇게 ‘4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이 소망이 그저 소망으로만 끝나지 않도록, 부활 그 후에 달라진 모든 것처럼, 저 역시 달라진 삶을 살기를 결심합니다. 그것이 오늘 2022년 부활 주일을 보내는 저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리라 믿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매 해 똑같은 부활주일이 아니라 이젠 새로운 결심이 있는 귀한 부활 주일이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새 생활 가운데 더욱더 새로워져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을 창조하신 그분의 모습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이 삶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이 점점 더 자라날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0절, 쉬운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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