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내남면 지역 - 2004. 5. 16
장산고분군(토우총)
장산 토우총은 경주시 서악동의 장산 남동쪽 구릉 끝부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일대에는 서악동 고분군을 비롯하여 사적으로 지정된 태종 무열왕릉, 김인문 묘, 김양 묘 등 여러 고분이 있다.
이 유적은 통일신라시대의 돌방무덤으로 봉분의 지름은 10m, 높이는 7m이다.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은 항아리와 사발 등의 토기 종류가 대부분이고, 특히 널방의 바닥 네 모서리에서 나온 토우가 유명하다.
토우는 사람이나 짐승모양을 흙으로 빚어 만든 것인데, 독립적으로 만든 것도 있고, 토기등에 장식용으로 붙인 것도 적지 않다. 신라 토우는 거의가 무덤에서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사람들의 종교관, 내세관 등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돌문
시상대 위에는 동쪽에 단면 직삼각형의 1매석에 2인용의 피장자 어깨받침, 머리받침, 관받침을 나란히 새긴 석침을 놓았고 서쪽에 요철형 족좌 2개를 남북으로 놓았다.
기계 못자리
희강왕릉
이 능은 신라 제 43대 희강왕을 모신 곳이다. 얕은 구릉의 중간 부분에 있으며 바닥 면이 남북방향으로 약간 경사져 있다. 이 능은 둘레 14m, 높이 2.8m로 흙을 둥글게 쌓은 봉토 분이며, 묘표석이 있다. 일반 무덤에 비해 조금 클 뿐 별다른 특징은 없다. 희강왕은 원성왕의 손자인데, 흥덕왕이 자식 없이 죽자 조카로서 왕위다툼을 거쳐 재위하였으나, 상대등 김명이 난을 일으키자 자살하였다. 『삼국사기』에 소산에 장사지냈다 고 기록되어 있는데 소산이 어느 산인지 확실하지 않다.
조선 영조 때 경주 출신 화계 유의건은 『화계집』에서 1730년 이후에 17기의 왕릉이 추가로 지정된 것에 대하여 문제점이 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왕릉도 그 중 하나이다.
전 민애왕릉
이 능은 신라 제 44대 민애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다. 능은 높이 3.8m, 지름 12.6m 로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이다. 봉분의 하단에는 1.6m높이로 둘레 돌을 돌린 다음, 반 육각형으로 다듬은 지주석으로 받치게 하였다. 바로 앞에는 판석 2매로 만든 상석이 있다.
민애왕은 희강왕을 살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가, 재위 1년 만에 다시 김양에 의해서 피살되었다. 『삼국사기』에 반정왕으로서 피살되었지만 "군신들이 왕의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내고 시호를 민애 라고 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1984년 왕릉 수리공사 때 분구에서 원화신년명 뼈단지[골호] 토기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민애왕릉이 아니고 헌덕왕의 앞 시기 어느 왕의 능으로 추정된다.
지주석
12지신상이나 면석도 없이 5단으로 조성된 신문왕릉이 발전기의 왕릉이라면, 쾌릉이나 흥덕왕릉은 완성기의 왕릉이고, 3단으로 된 민애왕릉은 다시 쇠퇴기의 왕릉이라 할 수 있다.
보리가 익어간다.
경덕왕릉
이 능은 신라 제 35대 경덕왕을 모신 곳이다. 구릉 경사면의 흙을 편평하게 깎아 축조했으며, 흙을 둥글게 쌓아 올렸다. 맨 아래에 지대석을 놓고 면석과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으로 교대로 세우고, 탱석 두 칸 건너 하나씩 무인복을 입고 무기를 든 십이지신상을 돋을새김해 놓았다.
봉분은 둥근 모양이며, 무덤 주위에 봉분을 보호하기 위한 둘레돌을 둘렀다. 둘레돌은 목조건축물의 돌기단 같은 형태로 되어 있는데,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면석을 둘렀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배치하였다. 탱석에는 두 칸 건너 하나씩 무인 복장을 하고 무기를 든 12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면석과 탱석 위에는 덮개돌이 놓여 있다. 이 둘레돌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돌기둥 40개를 세워 난간을 둘렀다.
정오와 자정은 12간지 말을 나타내는 정남과 쥐를 나타내는 정북을 말합니다. 지구의 자오선은 북과 남을 잇는 선이 됩니다. 즉 남북의 축을 말합니다.
『삼국사기』 경덕왕조에 "모지사 서쪽에 장사지냈다" 고 전하며, 『삼국유사』 왕력에 "처음에 경지사 서쪽 봉우리에 장사지내고 돌을 다듬어 능을 만들었으나 뒤에 양장골 가운데에 이장했다."고 전한다.
경덕왕은 효성왕의 친동생으로 왕위를 계승하여 국가의 제반제도를 중국식으로 개편하고, 지방제도를 완비하였다. 굴불사와 불국사를 창건하였으며, 황룡사 대종과 성덕대왕 신종도 만들었다.<신라문화의 황금기>
무덤 앞에는 안상문를 새긴 높은 석상이 놓여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 왕릉에서 볼 수 있는 돌사자·문인석·무인석과 같은 석조물은 보이지 않는다.
무늬의 안쪽을 파낸다면 교자상 다리처럼 됩니다.
무 채종밭
광석리 지석묘
상신3리의 광석마을 북쪽 속칭 큰 들이라고 하는 평야지대의 논과 밭에 산재하고 있다. 지석묘군이 위치하고 있는 속칭 큰 들은 규모가 크기가 크지 않지만 들 앞으로 흐르고 있는 이조천 양안에는 상당한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광석리 지석묘
지석묘들은 약 70 - 80M정도에 남북으로 길게 열을 지어 분포하고 있다. 지석묘의 서쪽에는 290M의 왕산이 있으며, 이 산자락에 10여기가 있다. 이들 중4기는 1962년경에 경주박물관에 의해 조사된 바 있다.
경주 안심리 암각화
일정한 모양을 이루지 않는 현무암 바위의 동북쪽 면에 가장 많은 그림이 새겨져 있다. 2단으로 구성된 윗면 높은 단에는 여러 개의 큰 알구멍[성혈]이 있으며, 전체 40여 개의 검파형 그림으로 단순하다. 대체적으로 뒤집은 사다리꼴에 그 중간이 안으로 흰 모양이며, 내부에는 가로선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가까운 석장동 암각화의 다양한 그림에 비해 아주 단순하고, 포항 칠보리 암각화 검파형에 비하면 너무 작다는 특징이 있다.
호일 탁본
먹물 탁본은 문화재를 훼손할 수 있는데 호일과 솔로 하는 탁본은 편리하다.
경주 안심리 암각화
암각화란 바위에 새겨놓은 선사시대의 바위그림을 말하는데 주된 내용은 농사의 풍요와 주술행위 등이 표현되어 있다.
이 암각화는 이조천에 합쳐지는 작은 개울 두개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이 부근에는 10여 개의 고인돌이 있어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도 고인돌의 덮개돌로 추정된다. 1995년 신라문화동인회 회원들의 조사에 의하여 알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