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
낙동강 하류지역은 289년에 편찬된 삼국지에 변한이란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韓)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삼고 남쪽은 왜(倭)와 접해 있다. 세 종족이 있는데 마한, 진한 그리고 변한(弁韓)이 그것이다. 진한과 변한은 모두 24국인데 已柢國·不斯國·弁辰彌離彌凍國·弁辰接塗國·勤耆國·難彌離彌凍國·弁辰古資彌凍國·弁辰古淳是國·冉奚國·弁辰半路國·弁[辰]樂奴國·軍彌國(弁軍彌國)·弁辰彌烏邪馬國·如湛國·弁辰甘路國·戶路國·州鮮國(馬延國)·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弁辰走漕馬國·弁辰安邪國(馬延國)·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사로국(斯盧國)·優由國이 그것이다. 이 중 열 두 나라는 진왕에게 소속되어 있다. 진왕은 항상 마한사람을 앉혀 대대로 세습하게 하였으며 스스로 자립하여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 변한의 독로국은 왜(倭)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변한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한(韓), 예(濊) 그리고 왜(倭)의 사람들이 모두 와서 사 가며 낙랑과 대방에도 공급하였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로 이루어져 마치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다. 대방에서 왜(倭)에 가려면 해안을 따라 한국을 지나 남쪽으로 간 다음 다시 동쪽으로 가면 북쪽 해안에 있는 구야한국(狗邪韓國)에 이르는데 거기에서 바다를 건너 천여 리를 가면 대마국(對馬國)에 도착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韓)은 낙랑과 대방의 통제를 받았고 왜(倭)도 대방에 복속되었었다. 그러나 이후 낙랑과 대방은 약화되어 313년과 314년에 각각 고려에 병합되고 만다. 그리고 한(韓)은 마한과 진한 지역이 각각 백제와 신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변한지역은 미처 고대왕국으로 발전하기 전에 왜(倭)의 지배를 받게 된다.
391 광개토왕릉비(414)
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고려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391년에 건너와 백제를 격파하고 ▨▨ 신라 …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391-03(<-249) 일본서기 신공황후 49년
황전별과 녹아별을 장군으로 삼아 구저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건너가 탁순국(卓淳國)에 이르러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 때 어떤 사람이 “군대가 적어서 신라를 깨뜨릴 수 없으니, 다시 사백·개로를 보내어 군사를 늘려 주도록 요청하십시오.”라 하였다. 곧 목라근자와 사사노궤에게 정병을 이끌고 사백·개로와 함께 가도록 명하였다.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벌‧남가라‧녹국‧안라‧다라‧탁순‧가라(比自㶱·南加羅·㖨國·安羅·多羅·卓淳·加羅)의 7국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古奚津)에 이르러 남쪽의 오랑캐 침미다례(忱彌多禮)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초고와 왕자 귀수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 때 비리‧벽중‧포미지‧반고(比利·辟中·布彌支·半古)의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400 광개토왕릉비(414)
10년 경자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安羅人) 수병 … 신라성 ▨성 …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이때쯤에는 변한지역이 임나(任那)로 불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임나는 광개토왕릉비(414) 뿐만 아니라 송서(488), 남제서(537), 양서(636), 남사(659), 일본서기(720), 봉림사진경대사비(924), 삼국사기(1145) 등 광범위한 기록에 등장한다. 이에 비해 가야(加耶)는 삼국사기 이전의 기록에서 사용된 예를 아직 보지 못했다. 여기서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의 모형을 따르기로 한다.
‘통틀어 말하면 임나이고, 개별적으로 말하면 가라국(加羅國), 안라국(安羅國), 사이기국(斯二岐國), 다라국(多羅國), 졸마국(卒麻國), 고차국(古嵯國), 자타국(子他國), 산반하국(散半下國), 걸찬국(乞湌國), 염례국(稔禮國) 등 모두 열 나라이다.’
(이것은 562년의 기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임나를 구성하는 작은 나라는 391년 이후 계속 변해왔을 것이다.)
삼국사기는 신라, 백제 그리고 고려 이 세 왕조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니 임나나 낙랑의 역사는 단편적인 이야기만 담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 일본서기는 임나가 천황 중심의 세계관을 강조하는데 있어서 좋은 소재가 되었기 때문에 임나에 대해서 비교적 풍부한 이야기를 담았다. 여기서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사건들을 중심으로 임나에 관한 역사를 정리해 본다.
여기서 잠깐 임나의 영역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임나가 영남지역의 낙동강 중하류 서쪽이었다고만 알아 왔다. 그런데 최근 호남지역에서 5~6세기경의 임나계 유적과 유물이 잇따라 발견되고 있다. 그것도 일부 지역이 아니라 전남 신안, 영암 그리고 전북 남원, 장수 등 전라도 전 지역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호남지역도 임나의 영역이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것은 사서의 기록과도 잘 어울린다.
<습진언의 고립>
403(<-283) 일본서기 응신천황 14년
궁월군이 백제로부터 와서 귀화하였다. 그리고 아뢰기를, “신은 우리나라 120현의 인부를 이끌고 귀화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라인이 방해하여 모두 가라국에 머물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갈성 습진언을 파견하여 궁월의 인부를 가라에서 데리고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습진언은 돌아오지 않았다.
405-08(<-285) 일본서기 응신천황 16년
평군 목토숙니와 적호전숙니를 가라에 보냈다. 그리고 날랜 군사를 주면서 조를 내려, “습진언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 틀림없이 신라가 막고 있기 때문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빨리 가서 신라를 공격하여 그 길을 열라.”고 하였다. 이에 목토숙니 등이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여 신라의 국경에 다다르자, 신라왕은 두려워하며 그 죄를 자복하였다. 그래서 궁월의 인부를 거느리고 습진언과 함께 돌아왔다.
이 사건은 일본열도에서 바다 건너 한반도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잘 보여준다. 왜인이 상주하며 한반도 남부의 여러 나라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일에 참견할 수 있는 기구를 한반도에 설치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국사(任那國司)나 일본부(日本府)는 그러한 필요에서 나온 결과일 것이다.
<전협신과 제군의 반란>
463 일본서기 웅략천황 07년, 천황이 귀를 기울여 멀리서 듣고 마음속으로 기뻐하였다. 곧 자기가 치원을 얻어 시중드는 여자로 삼고자 하여 전협을 임나국사(任那國司)로 삼았다. 얼마 지난 후 천황이 치원과 동침하였다. ... 전협은 이미 임지에 가 있었는데, 천황이 그의 아내와 사통하였다는 말을 듣고 도움을 얻고자 신라에 들어갈 생각을 하였다. 이 때 신라는 중국(倭)을 섬기지 않고 있었다. 천황이 전협신의 아들 제군과 길비 해부직적미에게 명하여 “너희들은 마땅히 가서 신라를 징벌하라.”고 하였다. 이 때 서한 재기 환인지리가 옆에 있다가 나아가 “저희들보다 뛰어난 자가 한국에 많이 있으니 불러서 부릴만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천황이 여러 신하들에게 “그러면 마땅히 환인지리를 제군 등에게 딸려 보내 백제 길을 취하고 아울러 칙서를 내려 재주가 뛰어난 자를 바치게 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제군은 명을 받들어 무리를 이끌고 백제에 도착하였다. 그 나라(신라)에 들어가는데 나라의 신이 늙은 여자로 변하여 홀연히 길에서 맞이하였다. 제군이 나라의 멀고 가까움을 묻자 늙은 여자가 “다시 하루를 더 간 다음에야 다다를 수 있다.”라고 대답하였다. 제군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길이 멀다고 여겨 정벌하지 않고 돌아왔다. 백제에서 바친 재주좋은 사람들을 큰 섬 안에 모아놓고 바람을 기다린다는 핑계로 몇 달 동안 머물러 있었다. 임나국사 전협신은 제군이 (신라를) 치지 않고 되돌아간 것을 기뻐하며 몰래 백제에 사람을 보내어 제군에게 경계하여 “너의 목이 얼마나 단단하기에 다른 사람을 치는가. 전하는 말을 듣건대 천황이 나의 아내와 사통하여 자식까지 있다고 한다. 이제 화가 나에게까지 미치기는 발을 들고 서서 기다리는 것만큼이나 순식간일 것이다. 내 아들인 너는 백제를 차지하고 앉아 일본에 통하지 않도록 하라. 나는 임나를 차지하고서 역시 일본에 통하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제군의 아내 장원은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고 군신의 의를 중히 여기며, 충성스러운 마음은 밝은 해보다 더하고 절의는 푸른 소나무보다 뛰어났다. 그래서 그 모반을 미워하여 몰래 남편을 죽여 집안에 숨겨 묻어두고 해부직적미와 함께 백제에서 바친 손재주 좋은 기술자를 거느리고 큰 섬에 있었다.
이 사건은 한반도 남부를 통제할 목적으로 설치한 기구가 오히려 왜(倭)왕조에 대한 반란의 근거지로 이용된 사례다.
<신라구원>
464-02 일본서기 웅략천황 08년, 천황이 즉위한 때부터 이 해에 이르기까지 신라국은 천황의 명을 듣지 않고 마음대로 하며 공물을 보내지 않았는데, 지금 8년째가 된다. 그리고는 중국(倭)의 마음을 몹시 두려워하여 고려와 우호를 맺었다. 이로 말미암아 고려왕이 날랜 병사 100명을 보내어 신라를 지켜 주었다. 얼마 되지 않아 고려 군사 한 사람이 말미를 얻어 자기 나라에 돌아갈 때 신라 사람을 말몰이로 삼았는데, 돌아보면서 “너희 나라는 우리나라에게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하였다. 말몰이가 그 말을 듣고 거짓으로 배가 아프다고 하여 뒤에 처져 있다가 마침내 도망하여 자기 나라에 돌아와 그가 말한 것을 설명하였다. 이에 신라왕은 고려가 거짓으로 지켜주는 것을 알고는 사자를 급히 보내어 나라 사람들에게 “사람들이여, 집안에서 기르는 수탉을 죽여라.”라고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그 뜻을 알고는 나라 안에 있는 고려인들을 모두 죽였다. 그런데 살아남은 고려인 1명이 틈을 타서 빠져나가 도망하여 자기 나라에 들어가 모든 것을 이야기하였다. 고려왕이 곧 군사를 일으켜 축족류성에 모여 진을 치고서 드디어 노래하고 춤추며 음악을 연주하였다. 신라왕은 밤에 고려군이 사방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소리를 듣고 적군이 모두 신라 땅에 들어왔음을 알았다. 이에 사람을 시켜 임나왕에게 “고려왕이 우리나라를 정벌합니다. 지금의 시기는 깃대에 묶어놓은 술과 같고 나라의 위태로움은 계란을 쌓아놓은 것보다 더하여 나라 운명의 길고 짧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일본부 행군원수(日本府 行軍元帥)에게 구원을 청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임나왕이 선신반구, 길비신소리, 난파길사적목자에게 권하여 가서 신라를 구해주도록 했다. 선신 등이 아직 군영에 이르지 않고 머물러 있었다. 고려의 여러 장수들은 선신 등과 싸우기도 전에 모두 두려워하였다. 선신 등은 힘써 군사를 위로하고 군중에 령을 내려 속히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게 하고 급히 나아가 공격하였다. 고려군과 서로 10여 일을 대치하다가 밤에 지세가 험한 곳을 파서 지도로 삼고는 군대의 짐을 모두 옮기고 기습할 군사를 그 곳에 배치하였다. 날이 밝을 무렵에 고려는 선신 등이 도망한 것으로 여기고 모든 군사로 뒤쫓아 왔다. 이에 기습군사를 풀어놓아 보병과 기병이 협공하여 그들을 크게 깨뜨렸다. 신라와 고려 두 나라의 원한은 이로부터 생겼다.
이 기록에 나오는 이야기는 모두 당시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다.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왕릉비에는 399년 신라가 고려에 구원을 요청하자 이듬해 고려가 구원병을 보내어 왜(倭)를 격퇴시켜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사건과는 고려와 왜(倭)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이다.
또 신라 내에 고려군이 주둔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별로 어색한 일이 아니다. 건립연대가 449년 또는 495년으로 추정되는 중원고구려비에는 ‘新羅土內幢主(신라 내에 있는 군대의 지휘관)’란 구절이 있는데, 이것은 고려의 군대가 신라에 주둔했었다고 해석이 되기 때문이다.
일본부 행군원수(日本府 行軍元帥)는 당시 임나에 왜(倭)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라에 고려군이 주둔하고 있었듯이 임나에 왜군이 주둔하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임나에 왜군이 주둔했던 사실은 고고학적 증거로도 뒷받침이 되고 있다.
영산강 유역에는 1990년대부터 전방후원분이 발견되고 있는데 현재까지 14기가 발견되었다. 이 전방후원분은 전형적인 왜(倭)의 무덤양식으로 이곳에서는 왜(倭)의 무기류도 출토되고 있다. 왜인 무장이 묻혔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들 전방후원분이 축조된 시기는 500년을 전후한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기로 추정된다.
이 전방후원분을 두고 두 가지의 설명이 나올 수 있다.
하나는 475년 백제가 고려의 침략을 받아 왕이 살해되고 한강유역을 상실한 사건과 연결한 설명으로 왜(倭)가 백제왕조의 부흥을 지원하기 위해 병력을 주둔시켰고 전방후원분은 그 흔적이라는 설명이다. 백제왕조가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한 538년경부터 이들 전방후원분이 사라진 점도 이런 설명을 더욱 그럴듯하게 해주고 있다. 또 다른 설명은 훗날의 신라 청해진과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원양항해가 어려웠던 당시에는 한반도의 서남쪽 모퉁이가 왜(倭)와 대륙을 연결하는 해로에서 빠질 수 없었고 왜(倭)는 이 해로를 보호하기 위해 병력을 주둔시켰다는 것이다.
한편, 앞서 391년 왜(倭)가 한반도에 진출할 때 협력의 대가로 침미다례를 백제에게 주었다는 기록을 살펴보았는데, 이후에도 왜(倭)가 백제에게 땅을 떼어주며 힘을 실어주는 기록은 여러 차례 나온다. 그러나 자신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하여 주었던 땅을 도로 빼앗았다는 기록도 있다.
397-03(<-277) 일본서기 응신천황 08년
백제인이 내조하였다. 백제기에는, “아화왕이 왕위에 있으면서 귀국에 예의를 갖추지 않았으므로 우리의 침미다례(枕彌多禮) 및 현남·지침·곡나·동한(峴南·支侵·谷那·東韓)의 땅을 빼앗았다. 이에 왕자 직지를 천조에 보내어 선왕의 우호를 닦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405(<-285) 일본서기 응신천황 16년
백제의 아화왕이 죽었다. 천황은 직지왕을 불러, “그대는 본국으로 돌아가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동한(東韓)의 땅을 주어 보냈다. 동한은 감라성·고난성·이림성(甘羅城·高難城·爾林城)이다.
477-03 일본서기 웅략천황 21년
천황이 백제가 고려에게 패했음을 듣고 구마나리(久麻那利)를 문주왕에게 주어 그 나라를 구원해 일으키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백제국은 비록 거의 망해 창하에 모여 근심하고 있으나, 실로 천황에게 의지하여 다시 그 나라를 만들게 되었다.”고 하였다. 문주왕은 개로왕의 동생이다. 구마나리는 임나국 하치호리현의 별읍이다.
왜(倭)는 임나를 둘러싼 영토분쟁이 있을 경우 나서서 이를 정리해 주었다.
<4현 분쟁>
512-12 일본서기 계체천황 06년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조를 바쳤다. 따로 표를 올려 임나국의 상치리·하다리·사타·모루(上哆唎·下多唎·娑陀·牟婁)의 4현을 청했다. 치리국수 수적신압산이 “이 4현은 백제와 인접해 있고 일본과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백제와는) 아침저녁으로 통하기 쉽고 (어느 나라의) 닭과 개인지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이니 지금 백제에게 주어 합쳐서 같은 나라로 만들면 굳게 지키는 계책이 이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비록 주어서 나라를 합치더라도 후세에는 오히려 위태로울 것인데, 하물며 다른 곳이 된다면 몇 년이나 지킬 수 있겠습니까?”라 아뢰었다. 대반대련 금촌이 이 말을 다 듣고 같은 계책을 아뢰었다. 이에 물부대련 추록화를 칙을 선포하는 사신으로 삼았다. 물부대련이 난파관을 향해 출발하여 백제객에게 칙을 선포하고자 하였다. 그의 처가 진실로 간하기를 “주길대신이 처음에 바다 밖의 금은의 나라 고려·백제·신라·임나 등을 태중의 예전천황에게 주겠다고 예언하였습니다. 그래서 대후 식장족희존과 대신 무내숙니가 나라마다 처음으로 관가를 두어 바다 밖의 번병으로 삼았는데 그 유래가 오래되었고 또한 까닭이 있습니다. 만약 떼어서 다른 곳에 주면 본래의 구역을 어기게 되니 길이 이어질 비난이 어찌 입에서 떠나겠습니까?”라 하였다. 대련이 응답하기를 “가르쳐 준 것이 이치에 맞으나 천칙을 거스를까 두렵다.”라 하였다. 그 처가 간절하게 “병이라고 핑계대고 선포하지 마십시오.”라 하자 대련이 이를 따랐다. 이로 말미암아 사신을 바꾸어 칙을 선포하고 내리는 물건과 제지를 붙여서 표에 따라 임나의 4현을 주었다. 대형황자가 전에 다른 일이 있어서 나라를 내려주는 데 관여하지 않았는데 뒤늦게 칙을 선포한 것을 알고 놀라서 뉘우치며 고치고자 하였다. 령을 내려 “태중의 천황 때부터 관가를 두었던 나라를 경솔하게 번국의 요청에 따라 갑자기 줄 수 있느냐?”라 하였다. 이에 일응길사를 보내어 백제객에게 칙을 바꾸어 선포했다. 사자가 답하여 아뢰기를 “아버지 천황이 편의를 도모하여 칙으로써 주는 것을 이미 마쳤습니다. 아들인 황자가 어찌 천황의 칙을 어기고 함부로 고쳐서 명령할 수 있습니까. 반드시 이는 가짜일 것입니다. 비록 이것이 진짜일지라도 큰 막대기를 가지고 때리는 것과 작은 막대기를 가지고 때리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아프겠습니까?”라 하고 드디어 파기했다. 이 때 혹 떠도는 말로 “대반대련과 치리국수 수적신압산이 백제의 뇌물을 받았다.”라고 하였다.
이 4현 분쟁은 신라가 왜(倭)에 불만을 품는 계기가 되었다. 540년 천황이 “어느 정도의 군사가 있으면 신라를 칠 수 있겠는가?”라고 묻자, 신하들이 이 4현 분쟁을 거론하며 신라의 불만이 커서 적은 군사로는 힘들 것이라는 견해를 내 놓았다.
<기문 분쟁>
513년 백제는 사신을 왜(倭)에 보내 오경박사를 바치며 반파국(伴跛國)이 기문(己汶)의 땅을 빼앗아갔다고 호소하였다. 몇 달 후에는 반파국도 왜(倭)에 진기한 보물을 바치며 기문의 땅을 요구했다. 그러나 왜(倭)는 이를 들어주지 않고 백제, 신라, 안라 그리고 반파의 신하들을 불러놓고 은칙을 선포하여 기문과 체사(滯沙)을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크게 반발한 반파는 이듬해 성을 쌓고 봉수와 군창을 설치하며 왜(倭)와의 일전을 준비했다. 그리고 신라를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하였다. 515년 물부련은 500명의 수병을 이끌고 대사강(帶沙江)으로 나아갔으며 백제의 문귀장군도 신라로부터 갔다. 그러나 반파의 군사들에게 크게 패해 섬으로 겨우 도망가서 머물렀다. 516년 백제가 목협불마갑배를 보내 기문에서 물부련을 맞이하고 백제로 데리고 와서 극진히 대접하였다. 물부련이 귀국할 때에는 주리즉차 장군을 딸려 보내 기문의 땅을 내려준 데 대해 사례하고 오경박사도 교체해 주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짐작해 볼 수 있는 점은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왜(倭)는 백제를 좋아했다는 점이다.
일본서기는 반파국이 백제로부터 기문을 빼앗았다고 적고 있지만 반파국이 나라의 생존을 걸고 저항하는 것으로 보아 억울한 점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또 이후의 영토분쟁을 살펴보아도 왜(倭)는 일관되게 백제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려주는 것을 보게 된다. 이렇게 왜(倭)가 백제 편을 드는 이유는 왜(倭)가 간절히 필요로 하는 대륙의 문화를 백제가 전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왜(倭)는 진기한 보물보다 오경박사를 더 원했던 건지도 모른다.
둘째, 임나에 대한 왜(倭)의 지배력이 약화되었다는 점이다.
이 사건 이전에는 왜(倭)에 대해 임나의 어떤 나라도 반기를 들었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로는 왜(倭)에 대해 반발하는 나라가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렇게 된 이유는 왜(倭)의 국력이 이전에 비해 약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고 4현 분쟁에서 볼 수 있듯이 공정성을 상실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신라는 527년 이전 어느 때인가 임나의 남가라(南加羅)와 탁기탄(㖨己呑)을 멸망시켰다. 541년 백제의 성왕은 이 사건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탁기탄은 가라와 신라의 경계에 있어 해마다 공격을 받아 패배하였는데, 임나도 구원할 수가 없었고, 이로 말미암아 망하게 되었다. 남가라는 땅이 협소하여 불의의 습격에 방비할 수 없었고 의지할 바도 알지 못하여, 이로 인하여 망하였다.’
이 사건 이후 ‘임나재건’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으로 보아 단순히 작은 나라 두 개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임나의 핵심적인 구성요소가 붕괴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왜(倭)는 임나재건을 위하여 지속적인 노력을 펼친다.
<반정의 반란>
527-06 일본서기 계체천황 21년, 근강모야신이 군사 6만을 이끌고 임나에 가서 신라에게 멸망당한 남가라·탁기탄(南加羅·㖨己呑)을 다시 세워 임나에 합치고자 하였다. 이 때 축자국조(筑紫國造) 반정이 몰래 반역을 도모하였는데 꾸물거리다가 해를 넘겼다. 일을 이루기 어려울까 염려하며 늘 틈을 엿보았다. 신라가 이를 알고 몰래 반정의 거소에 뇌물을 보내어 모야신의 군대를 막아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반정이 화(火)와 풍(豐) 두 나라에 세력을 뻗쳐 직무를 행하지 못하게 했다. 밖으로는 해로를 끊어 고려·백제·신라·임나 등의 나라에서 해마다 조공을 바치는 배를 꾀어서 이르게 하고, 안으로는 임나에 파견되는 모야신의 군대를 막고 무례하게 말하기를, “지금 사자가 된 사람은 전에 나의 동료로서 어깨를 맞대고 팔꿈치를 부딪치며 같은 그릇에 함께 밥 먹던 자이다. 어찌 별안간 사신이 되어 나로 하여금 자기 앞에 스스로 엎드리게 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드디어 싸우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교만하게 스스로 뽐내었다. 이 때문에 모야신은 길이 막혀서 중도에서 지체했다. 천황은 대반대련 금촌과 물부대련 추록화 그리고 허세대신 남인 등에게 “축자의 반정이 반란을 일으켜 서쪽 오랑캐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지금 누가 장수가 될 만한가?”라고 조를 내렸다.
축자는 지금의 큐슈 북부에 있었는데 대마도를 중심에 두고 부산과 대칭되는 위치에 있다. 고대 왜(倭)의 관문이었다.
임나재건을 위해 시도되었던 이 신라정벌의 무산으로 인해 왜(倭)는 권위에 큰 손상을 입었을 것이다.
<모야신의 실패>
529년 왜(倭)는 신라에게 멸망당한 남가라와 탁기탄을 복원하기 위해 근강 모야신을 안라에 파견하였다. 또 임나왕 기능말다간기가 와서 신라의 침략을 호소하자 그를 돌려보내는 길에 임나에 있던 모야신에게 분쟁의 해결을 재차 촉구하였다. 이에 모야신은 칙을 내리기 위해 신라와 백제의 왕들을 불렀으나 둘 다 오지 않고 신하만 보내왔다. 모야신이 그들을 돌려보내며 다시 왕들을 부르자 이번에는 신라가 상신 이질부례지간기를 보내며 3천 명의 군사를 딸려 보냈다. 그러자 모야신은 칙을 내리지 않고 기질기리성으로 들어가 버렸다. 신라군이 석 달을 기다려도 모야신이 칙을 내리지 않고 오히려 모야신의 종자가 신라군을 공격하는 일이 발생하자 다다라(多多羅) 등 4개 촌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530년 임나의 사신이 왜(倭)에 와서 모야신의 폭정을 폭로하였다. 왜인과 임나인 사이에 자식문제로 다툼이 많은데 모야신은 전혀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며, 끓는 물로 진실과 거짓을 가려낸다며 사람들을 데어 죽게 만드는 일도 많다는 것이다. 또 왜인이 임나의 여자와 결혼해서 낳은 나다리과 사포리를 죽이는 등 인민들을 괴롭히는 일만 할 뿐 화해시키는 일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천황이 모야신을 불러들였으나 모야신은 부여받은 임무를 완수하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다며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아리사등은 신라와 백제에 각기 사람을 보내어 군사를 청했다. 신라군과 백제군은 모야신이 있는 성을 한 달 동안 포위하였으나 함락되지 않자 돌아갔다. 그러면서 길목에 있던 등리지모라·포나모라·모자지모라·아부라·구지파다지(騰利枳牟羅·布那牟羅·牟雌枳牟羅·阿夫羅·久知波多枳)의 다섯 성을 쳐부수었다.
얼마 뒤, 임나에서 돌아온 조길사가 다시 모야신의 폭정을 알리자 왜(倭)는 목협자를 보내어 모야신을 불렀다. 그러나 모야신은 오는 도중에 대마도에서 병이 들어 죽었다.
여기서 임나에 대한 왜(倭)의 개입이 어떤 양상이었는지 대략적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임나에는 여러 왕들이 있고 그들이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영토보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보아 임나의 여러 나라들은 기본적으로 여느 왕국과 다름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왜(倭)가 우월적 지위를 가지고 임나의 여러 나라들과 주변 왕국들 사이의 질서를 주도하였는데 이 점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임나와 왜(倭)는 바다로 갈라져 있어 불편한 점이 많았기 때문에 임나 지역에 왜인이 상주하는 기관을 둘 수밖에 없었고 때로는 왜군을 주둔시키기도 했다.
임나재건을 위해 파견된 모야신은 큰 착각을 했던 듯하다. 왜왕의 칙령을 듣기 위해 왕이 직접 임나로 달려올 만큼 신라와 백제가 왜(倭)에 종속된 나라가 아니었던 것이다. 또 임나에 거주하는 왜인과 임나인과의 분쟁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등 매우 무능했던 사람으로 보인다. 급기야 왜(倭)에 신라의 침략을 호소했던 임나가 이번에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 모야신의 폭정을 호소하고 그래도 해결이 안 되자 도리어 신라에게 구원병을 요청하게 되었다.
모야신의 실패는 왜(倭)가 임나를 통치하기 위해 설치했던 기구에 대해 회의를 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한편, 왜의 편향적인 태도는 임나의 일부가 왜(倭)에서 이탈하여 신라에 접근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사진 분쟁>
522-03 삼국사기 법흥왕 09년
가야국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였으므로, 왕이 이찬 비조부의 누이를 그에게 보냈다.
524-09 삼국사기 법흥왕 11년
왕이 남쪽 변방의 새로 넓힌 지역을 두루 돌아보았는데, 이때 가야국 왕이 찾아왔으므로 만났다.
529-03 일본서기 계체천황 23년
백제왕이 하치리국수 수적압산신에게 이르기를 “무릇 조공하는 사자는 늘 바다 가운데의 굽은 섬을 피하느라 매번 풍파에 고통을 겪습니다. 이 때문에 가지고 가는 물건이 젖어서 모두 상하여 보기 흉합니다. 가라의 다사진(多沙津)을 신들이 조공하는 나루터로 삼기를 청합니다.”라 하였다. 이에 압산신이 듣고 아뢰었다. 이 달 물부이세연 부근과 길사로 등을 보내어 진(津)을 백제왕에게 내려 주었다. 이에 가라왕이 칙사에게 이르기를 “이 진은 관가를 둔 이래로 신이 조공하는 나루터였습니다. 어찌 갑자기 바꾸어서 이웃나라에 줄 수 있으며 처음에 봉해 주었던 것을 어길 수 있습니까?”라 하였다. 칙사 부근 등이 이 때문에 바로 줄 수 없어서 대도로 되돌아 왔다가 따로 녹사를 보내어 결국 부여(백제)에게 내려 주었다. 그러자 가라가 신라와 한 편이 되어 일본을 원망하였다. 가라왕은 신라 왕녀를 아내로 맞아 드디어 자식을 두었다. 신라가 처음에 왕녀를 보낼 때에 100人을 함께 보내어 왕녀의 종자로 삼았다. 받아서 여러 현에 나누어 두고 신라 의관을 착용하게 했다. 아리사등이 복장을 바꾼 것에 화를 내며 사신을 보내어 되돌아가게 했다. 신라가 매우 부끄럽게 여기고 생각을 바꾸어 왕녀를 되돌아오도록 하려고 “전에는 너희들의 요청을 받아 우리가 문득 혼인을 허락하였으나, 지금 이와 같으니 왕녀를 돌려보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가라의 기부리지가가 “부부가 되었는데 어찌 다시 떨어질 수 있겠습니까? 또한 자식이 있으니 버리고 어찌 가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 (신라는) 마침내 길목의 도가·고파·포나모라(刀伽·古跛·布那牟羅)의 3성을 쳐부수고 또 북쪽 경계의 5성을 쳐부수었다.
532 삼국사기 법흥왕 19년
금관국(金官國)의 왕인 김구해가 왕비와 세 명의 아들 즉 큰아들인 노종, 둘째 아들인 무덕, 막내 아들인 무력을 데리고 나라의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예로써 대접하고 상등의 벼슬을 주었으며,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인 무력은 벼슬이 각간에 이르렀다.
일본서기(720)의 가라(加羅)는 삼국지(289)의 구야(狗邪), 삼국사기(1145)의 가야(加耶) 및 가량(加良)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와 삼국사기의 기록에 차이가 좀 있긴 하지만 이야기의 줄거리가 비슷해서 이렇게 한번 묶어 보았다.
‘가라에는 왜(倭)로 건너가기에 좋은 다사진이라는 나루터가 있었다. 백제가 이 진을 탐내자 왜(倭)가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반발한 가라는 신라와 가까워졌고 마침내 가라왕은 신라의 왕녀와 혼인까지 하였다. 신라는 이것을 기회로 가라의 일부 영토를 차지하였다.’
537년에 편찬된 남제서에는 479년 가라가 제(齊)나라에 조공을 해 오자 가라왕 하지(荷知)에게 ’보국장군 본국왕‘의 벼슬을 내려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가라는 이전부터 이미 왜(倭)의 영향권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독자적인 외교활동을 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사진 분쟁에서도 가라는 백제와 왜(倭)의 공조에 맞서 신라의 힘을 이용하여 균형을 맞추려 하였다. 이렇게 임나에서 왜(倭)의 영향력이 약해지는 틈을 비집고 신라는 이 지역을 조금씩 잠식해 들어갔는데 이때 확보한 영토 덕분에 신라는 좁은 영토의 한계를 극복하고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한편, 임나에 설치한 기구를 통해 이루어지던 왜(倭)의 간섭은 이후 백제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렇게 된 이유로는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모야신의 실패로 임나에 설치한 통치기구에 대해 회의가 들었으며 둘째, 백제편향으로 인해 임나의 왜(倭)에 대한 거부감이 커져갔으며 셋째, 백제가 다사진을 확보하여 사신교환의 용이한 통로가 확보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541-04 일본서기 흠명천황 02년
안라의 차한기 이탄해, 대불손, 구취유리 등과 가라의 상수위 고전해, 졸마의 한기, 산반해의 한기의 아들, 다라의 하한기 이타, 사이기의 한기의 아들, 자타의 한기 등이 임나 일본부의 길비신과 더불어 백제에 가서 함께 조칙을 들었다. 백제의 성왕이 임나의 한기들에게, “일본의 천황이 명령한 바는 오로지 임나를 재건하라는 것이다. 지금 어떤 계책으로 임나를 다시 일으키겠는가. 어찌 각기 충성을 다하여 천황의 마음을 받들어 펼치지 않겠는가. ... 지금 과인이 그대들과 더불어 힘을 다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천황에게 의지하면 임나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물건을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기뻐하며 돌아갔다.
541-07 일본서기 흠명천황 02년
백제는 안라의 일본부가 신라와 더불어 계책을 공모한다는 말을 듣고, 전부 나솔 비리막고, 나솔 선문, 중부 나솔 목리미순, 기신 나솔 미마사 등을 보내, 안라에 가서 신라에 온 임나의 집사를 불러 임나를 세울 것을 도모하게 하였다. 따로 안라 일본부의 하내직이 신라와 공모한 것을 심하게 꾸짖었다. 그리고 왕은 임나에게, “옛적에 우리 선조 초고왕, 귀수왕이 옛날의 한기 등과 처음으로 화친을 맺고서 형제가 되었다. ... 경(卿) 등이 번번이 감언을 믿고 경솔하게 거짓말에 속아서 임나국을 멸하고 천황을 욕되게 할까 두렵다. 경들은 그것을 경계하고 남에게 속지 말라.”라고 말하였다.
541-07 일본서기 흠명천황 02년
백제가 기신 나솔 미마사, 중부 나솔 기련을 보내어 하한(下韓)과 임나의 정사를 아뢰고, 아울러 표를 올렸다.
543-11 일본서기 흠명천황 04년
진수련을 보내어 백제에 명령하기를, “임나의 하한에 있는 백제의 군령과 성주는 일본부에 귀속시켜야 한다.”라고 하였다. 아울러 조서를 가지고 가서 선포하여, “그대가 여러 번 표를 올려 꼭 임나를 세우겠다고 말한 것이 10여 년이 되었다. 표에서 아뢴 바는 이와 같지만 아직도 이루지 못하였다. 대저 임나는 그대 나라의 동량이다. 만일 동량이 부러지면 어떻게 집을 짓겠는가. 짐의 걱정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대는 모름지기 빨리 세우도록 하라. 그대가 만약 빨리 임나를 세운다면, 하내직 등은 자연히 물러나게 될 것이니, 어찌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544-11 일본서기 흠명천황 05년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일본부 신하와 임나 집사를 불러, “천황에게 조알하기 위하여 보낸 나솔 득문, 허세의 나솔 기마, 물부의 나솔 기비 등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왔다. 이제 일본부 신하와 임나국 집사는 마땅히 와서 칙을 듣고 함께 임나의 문제를 논의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일본의 길비신, 안라의 하한기 대불손과 구취유리, 가라의 상수위 고전해, 졸마군, 사이기군, 산반해군의 아이, 다라의 이수위 흘건지, 자타한기, 구차한기가 이에 백제에 나아갔다. 이 때 백제의 성왕이 대략 조서를 보이며, “내가 나솔 미마좌, 나솔 기련, 나솔 용기다 등을 보내어 일본에 조공하였는데, 조를 내려 ‘조속히 임나를 건설하라’고 하였다. 또 진수련이 칙을 받들어 임나를 만드는 일을 물으므로 (사신을) 보내 (그대들을) 불렀다. 마땅히 어떻게 해야 임나를 세울 수 있겠는가. 각각 자신의 계책을 말하여 주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545-09 일본서기 흠명천황 06년
백제가 중부 호덕 보제 등을 임나에 사신으로 보내어 오(吳)나라의 재화를 일본부의 신하와 여러 한기에게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백제가 임나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해 나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후 백제는 고려 및 신라와의 전쟁에 임나를 동원하기도 하였다.
한편, 임나를 잠식하면서 크게 성장한 신라는 고려와 공조관계를 맺은 다음에는 마침내 임나를 멸망시켰다.
551 일본서기 흠명천황 12년
백제 성왕이 몸소 군사 및 신라와 임나 두 나라의 병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하여 한성의 땅을 차지하였다. 또 진군하여 평양을 토벌하였는데, 무릇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
552-05 일본서기 흠명천황 13년
백제·가라·안라가 중부 덕솔 목례금돈, 하내부 아사비다 등을 보내어 “고려가 신라와 화친하고 세력을 합쳐 신의 나라와 임나를 멸망시키려고 도모합니다. 그러므로 삼가 구원병을 청해 먼저 불시에 공격하고자 합니다. 군사의 많고 적음은 천황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조를 내려 “지금 백제왕·안라왕·가라왕이 일본부의 신하들과 함께 사신을 보내 아뢴 것을 다 들었다. 역시 임나와 마음을 함께 하고 힘을 하나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와 같이 한다면 반드시 하늘이 지켜주는 복을 받을 것이며 황공하신 천황의 령에게 도움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554-07 삼국사기 진흥왕 15년
백제 성왕이 가량(加良)과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군주인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의 군주인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하였는데, 비장인 삼년산군(郡)의 고간 도도가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리의 기세를 타고 크게 이겨서 좌평 네 명과 군사 2만 9천 6백 명의 목을 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김무력은 532년에 신라에 통합된 금관국의 왕자였다. 100여 년 후 강수는 무열왕에게 자신을 임나가량(任那加良)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562-01 일본서기 흠명천황 23년
신라가 임나관가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562-07 삼국사기 진흥왕 23년
백제가 변경의 백성을 침략하였는데, 왕이 군사를 내어 막아서 1천여 명을 죽이거나사로잡았다.
562-07 일본서기 흠명천황 23년
이 달 大將軍 紀男麻呂宿禰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哆唎에서 출동하고, 副將軍 河邊臣瓊缶는 居曾山으로부터 출동하도록 하여 신라가 임나를 공격한 상황에 대하여 문책하고자 하였다.
562-09 삼국사기 진흥왕 23년
가야(加耶)가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이사부에게 명하여 토벌케 하였는데, 사다함이 부장이 되었다. 사다함은 5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앞서 달려가 전단문에 들어가서 흰 깃발을 세우자 성안의 사람들이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571-03 일본서기 흠명천황 32년
판전이자랑군을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임나를 멸망시킨 사유를 물었다.
571-04 일본서기 흠명천황 32년
천황이 병환으로 자리에 누웠다. 황태자는 밖에 나가 없었으므로 역마로 불러들였다. 누워 있는 내전에 불려 들어가니, 그의 손을 잡고 명하기를 “내 병이 심하니 이후의 일을 너에게 맡긴다. 너는 반드시 신라를 쳐서 임나를 세워 봉하라. 다시 서로 화합하여 옛날과 같이 된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하였다.
이로써 왜(倭)는 391년부터 562년까지 170여 년 동안 운영하던 한반도 남부의 거점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첨부파일
20_1832_9006.png [
내려받기] [
보기]
20_1832_9015.jpg [
내려받기] [
보기]
607_1311694898.png [
내려받기] [
보기]
senya1491_img18.jpg [
내려받기] [
보기]
김재영 2012-05-04 19:55 / |
끝으로 전방후원분도 일방적 통치가 아니라 교류의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무령왕릉으로 대표되는 벽돌무덤도 송산리고분군 이외에 고령에서도 발견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양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보지는 않지 않습니까 백제와 왜의 관계는 양과의 관계보다 더 긴밀하였던 만큼 서로의 교류가 더욱 활발했고, 이런 교역의 교두보인 전라도 남부지역에서 왜계 무덤이 축조되었다고 보기에 무리는 없지요 |
김재영 2012-05-04 20:11 / |
제가 임나일본부설에 의구심이 드는 이유는 남아있는 증빙자료가 일본서기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록을 믿기에는 이상한 점이 존재합니다. 다른 글에서 언급한 침미다례만 보아도 힘들게 정벌해놓고 백제에게 무상으로 넘겨주었다는 것은 논리가 맞지 않지요. 더구나 그 당시 백제는 최전성기를 이룩하면서 고구려(전연에게 제대로 털렸지만 여전히 건제했습니다)를 위협할 정도의 위력을 가졌는데 아무런 방비책 없이 준다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맞기는 격이지요 - 만약 왜의 국력이 전성기 백제를 제압할 정도라면 고구려를 공격하지 않았다는 것이 의아하지요(한반도 남부를 다 통치한다해도 만주를 차지한 고구려는 언제나 눈엣가시 같은 존재 하닌가요?)
또한 이것을 다른 사례로 본다면 백제의 요서경락설이 있습니다(물론 저도 이게 허구인 것은 알고 있습니다). 요서경락설은 단순 듣보잡 야사 한두권이 아니라 중국 정사 인정하는 송서, 남제서, 양서, 심지어는 삼국사기(동성왕 10년 위의 침공) 등장하는 내용이지요. 이렇게 보면 요서경락설은 일본서기에만 기록된 임나일본부설보다 더 설득력이 있지요 |
이태엽 2012-06-29 01:27 / |
양나라가 백제를 지배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왜는 임나를 지배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점이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의 임나지배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내용이지만 이를 간접적으로 뒷받침해주는 기록은 중국의 여러 사서와 삼국사기 그리고 광개토왕릉비에 나옵니다. |
김재영 2012-07-07 20:00 / |
죄송하지만 그 사서 내용을 알려주실 수 있나요? 광개토대왕릉비는 해석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고, 삼국사기도 윗 글에서 대놓고 북위와 전쟁을 벌였다고 하니 그닥... |
이태엽 2012-07-07 22:41 / |
김재영님 위의 '신라민족론 전체글'을 보시면 '왜(倭)는 처음부터 남이었나? (I)'과 '왜(倭)는 처음부터 남이었나? (II)'에 그런 내용이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북위와 충돌했다는 기록은 '백제의 요서점유설'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
김재영 2012-07-08 00:44 / |
말씀해주신 글은 읽어보았습니다.
일단 먼저 제 견해을 말씀드리자면 저도 왜가 우리와 친밀관계에 있었다는 것은 수긍합니다. 말씀해주신 글들도 종합적으로 보면 왜는 신라와 백제, 특히 백제에게 나라의 흥말을 좌우하는 대 고구려 노선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였고 이에따라 큰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임나부일본설을 수긍하기는 미흡하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고고학적 유물이 뒷받침하지 못합니다. 왜계 유물이 출토되는 지역은 나주 영산강 유역입니다. 일본서기 기록조차도 가야세력은 섬진강 하구인 기문을 놓고 백제와 혈투를 벌이는데 나주지역에서 왜계가 나왔다는 이유로 임나일본부를 인정한다는 것은 상당히 성급한 결론이지요 만약 왜의 세력이 계입되었다면 순장자가 100명이 넘는 대형봉분들이 모인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서 호우총에서 광개토왕의 시호가 적힌 그릇이 출토된 것처럼 왜계 유물이 나와야하는 것이 아닐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