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녀들의 읽기에는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윤교수의 강의 자료로 올라서 읽기의 방법 한 가지를 올려 보았습니다.
--이동민--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미술사에서 명작으로 꼽는 작품은 수도 없이 많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작품은 어떤 것일까. 라고 질문을 해보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쎄....”라며 선 듯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많이 알려지기로는 모나리자가 있고 미켈란젤로의 다윗상도 있지만, 가장 위대한....이라고 하면 선 듯 대답하기가 망서려진다.
1985년에 예술가와 비평가를 대상으로 위와 같은 질문을 던져 본 결과는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 1위 였다. 1950년에는 미술애호가들에게 설문조사를 하였더니 가장 사실적인 그림이라는 평도 들었다.
지구촌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라고는 없을 정도로 유명한 화가 피카소는 이 그림을 44번이나 모작을 하였다고 한다. 프랑스 인상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마네가 이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그는 화가 중의 화가이다. 그의 작품 앞에서 나는 놀라 넋을 잃었다.”라고 말했다 한다.
우리 영남수필 회원님들은 벨라스케스라는 이름을 몇 분이나 알고 있을까. 그의 그림을 읽다보면 수필쓰기에도 무엇인가 가르침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해설할 때 반드시 사용하는 말이 “사실성과 생기”라고 한다. 벨라스케스는 17세기 초(1599-1660)에 활동한 스페인의 궁정화가로서 폴투갈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귀족가문 출신답게 아주 수준이 높은 문학교육을 받았다. 이런 좋은 배경을 가진 사람이 그림그리기를 생업으로 택하는 것을 그 당시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때의 회화란 지적인 작업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캔버스에 물감이나 바르는 육체노동으로 취급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화업을 택한 벨라스케스는 진정으로 그림을 좋아하였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학문적 배경과 예술적 재능이 결합된 그의 그림이기에 미술가로서의 대성공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궁정화가로 출세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예술작품의 읽기를 할 때 ‘차이’라는 개념으로 읽는다는 것이 현대 이론이다. 벨라스케스가 유명해진 것도 바로 ‘차이’ 때문이다. 그때의 그림은 마치 조각처럼 (사실은 다빈치의 그림들도 생동감은 없다) 생기를 잃고, 엄숙함과 우아함이 넘쳐나고 있었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생기가 넘쳐나는 것이 바로 이들과의 차이이고, 미술의 흐름에 하나의 물꼬를 터준 역할을 하였다.
그의 미술의 특징을 들면서 미술사의 흐름을 설명하기에는 글의 분량이 너무 많아지므로 그것은 다음으로 미루겠다. 이제는 ‘가장 위대한 그림’이라는 평을 들은 “시녀들”의 읽기를 해보기로 하겠다.
시녀들이란 스페인왕 필리페 4세의 다섯 살난 딸 마르가리타를 시중드는 시녀들을 그렸다는 뜻이지만, 엄격히 말해서 캠버스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어린 공주가 이 그림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림은 사진기로 어느 순간을 포착하여 삿터를 누른 듯이 정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그림을 설명하는 미술학자들의 공통된 관점은 그림 속에 있는 인물들의 시선에다 초점을 맞춘다. 모두들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다, 같더라도 조금씩 차이가 난다.
이 뿐 아니고 이 그림을 읽는 방법은 수없이 많다. 심지어는 베라스케스의 사회적 성취욕을 드러냈다고 까지 말하는 미술학자도 있다.(실제로 벨라스케스는 궁중에 진출하여 출세하려는 강한 욕망을 드러냈고, 결국에는 귀족의 칭호를 얻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오늘은 ‘시선’으로 읽기를 해보기로 하자. 시선이란 관찰자의 바라보기를 의미한다. 즉 감상자의 그림 바라보기이다.
화면의 왼쪽으로는 캔버스의 뒷면이 보이고 그 앞에 화가 자신이 서있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따라가보면 그림의 전경을 비추는 거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화가는 거울을 통해서 바라본 정경을 화폭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감상자는 화가와 마주 서서 그림을 보고 있지만 사실은 감상자의 시선으로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고 벨라스케스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벨라스케스가 바라보는 것은 실제의 모습이 아니고 거울에 비친 허상을 바라보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따라서 관람자는 실체가 아닌 허상을 바라본면서도 전혀 그런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다는 것이 이 그림의 묘미라고 한다. 따라서 이 그림은 관람자를 그림 속으로 끌어들이면서도(화가의 시선과 동일시) 오히려 그림 밖으로 내쳐버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화가를 위시하여 공주나, 난장이 시녀, 그리고 왕실 경호원으로 추정되는, 저 뒤쪽의 문턱에 서있는 사람의 시선이나, 수녀와 이야기하고 있는 관리의 시선이 어느 한쪽으로 모아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조금씩 차이는 나지만..., 그 열쇠는 뒤쪽 벽에 걸려있는 거울에 비친 왕과 왕비의 상이다. 왕과 왕비가 벨라스케스가 작업을 하고 있는 이 방으로 들어서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관람자의 시선은 다시 저 뒤쪽의 거울로 이동해야 한다. 이 작품을 보면 이런 식으로 감상자의 시각이 앞으로 당겨졌다 뒤로 밀려났다 하는 현상이 끝없이 반복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작품을 파악했다고 안도의 숨을 쉬는 순간에 작품은 감상자의 손아귀를 빠져나가 버리는 것이다.
왕이 이 방으로 들어오고 있는데도 수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다른 곳을 보고 있다. 아마도 하느님을 생각하는 진지함이기보다는 무언가 자신의 감정에 파묻혀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무엇 때문일까. 감성적인 감상자는 이 수녀의 모습에서 오래 동안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을 지도 모른다. 무언가 아름다운 사랑 감정을 상상하면서. 이래서 작품은 화가의 의도를 떠나서 관람자에 의해 새롭게 완성되어 질 수도 있다.
이에 덧붙여 개를 발로 걷어차며 작난질을 하고 있는 또 다른 시녀를 감안한다면 화가는 왕과 공주로 수렴되는 통일성 속에서도 개개인의 내면까지도 그려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에서 거울에 비친 왕과 왕비는 실제의 형상일까. 아니면 화가나 공주의 눈에 비치는 상상의 모습일까. 말하자면 그림 속의 시선들을 살려내기 위해서 왕이라는 환상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그림에는 환상과 실제가 결합하여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실제라고 믿고 있는 우리의 삶이 사실은 환상과 실제의 혼합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냉정한 읽기에서 수많은 의미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그림이다. 어떤 미술 평론가가 한 말을 되씹어 보기로 하자.
“우리가 어떤 작품에 공감하는 것은 최면이고, 도취이다. 관람자의 의식이 없이 빨려들어가는 작품은 좋은 작품이 아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도취에서 깨어나야만 작품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다.”
벨라스케스는 이 그림에서 화가, 모델, 감상자의 전통적인 관계를 뒤집고, 비틀어버리므로 작품 그리기라는 과정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해준다. 수필을 쓸 때도 생각해보아야 할 말인 것 같다.
하기야, 수필을 쓴다는 것은 많은 것을 알고, 읽고, 그 느낌을 글로 옮기는 것이 아닐까요. 알고, 느끼는 소재로는 그림만한 것이 있을까요. 요즘은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그런 역할을 하고 있지만, 시간과 여러가지 번거러움이 많지요. 그림에는 역사, 문화, 생활, 사상 등등 참 많은 것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제게 미술의 자료가 참 많이 있거든요. 수필쓰는 분들이 그림 공부를 하는 모임을 만든다면 기꺼이 그림 강의를 해드릴(봉사정신으로) 용의가 있습니다. 연락주세요.
첫댓글 어제 윤규홍 교수님의 설명을 듣고 오늘 학장님의 글을 읽으니 '시녀들'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림 공부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요즘은 많이 하게 됩니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서요. 학장님의 관심과 배려에 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하기야, 수필을 쓴다는 것은 많은 것을 알고, 읽고, 그 느낌을 글로 옮기는 것이 아닐까요. 알고, 느끼는 소재로는 그림만한 것이 있을까요. 요즘은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그런 역할을 하고 있지만, 시간과 여러가지 번거러움이 많지요. 그림에는 역사, 문화, 생활, 사상 등등 참 많은 것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제게 미술의 자료가 참 많이 있거든요. 수필쓰는 분들이 그림 공부를 하는 모임을 만든다면 기꺼이 그림 강의를 해드릴(봉사정신으로) 용의가 있습니다. 연락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