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교
#일송_김동삼
1878년 6월 23일 경상북도 안동군 임하면 천전동(내앞마을) 278번지에서 아버지 김계락과 어머니 영해 신씨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7년 3월 유인식 등과 협동학교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였고, 한일합방 후에는 만주로 이동해 1911년 4월 한인자치단체인 '경학사'와 '신흥강습소' 설립에 참여하였다.
1914년에는 '부민단'과 신흥학교 출신들을 모아 '백서농장'이라는 독립군을 조직하였고
1919년 부민단이 확대 개편된 '한족회'의 사무를 담당했고, 임시정부 관할 서로군정서 참모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지청천 장군과 함께 서로군정서군을 지휘하여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전개된 청산리 전투에 참여하였다.
1920년 10월~1921년 4월의 '경신참변'과 1921년 6월 28일의 '자유시 참변'으로 붕괴된 한인사회를 재조직하고,독립군을 정비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해 1922년 8월 통의부 총장,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의장을 지냈다. 1924년 11월에는 정의부에 참가했고, 1928년 혁신의회 의장, 1930년 7월 한국독립당 고문을 지내다가 1931년 만주사변 직후 일제 경찰에 하얼빈에서 피체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평양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받고 평양감옥에서 옥중생활을 하다가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어 1937년 4월 13일 순국하였다.
선생은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라고 말씀하심에, 만해 한용운 선생이 성북동 심우장에서 장례를 치루고 화장을 한 후 한강에 뿌렸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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