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izabeth Gaskell, 1810~1865)의 소설 『남과 북North and South』. 개스켈은 작품 속 인물의 관찰에 유머와 도덕적 판단을 혼합시킨다는 점에서 한 세대 앞선 영국의 대표적 여성 작가 제인 오스틴과 자주 비교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산업화의 어두운 그늘을 조명하는 사회적 시각에서 차별성을 가진다.
『남과 북』은 19세기 영국 산업혁명 시기를 배경으로 남부의 전통적인 토지 귀족과 북부의 신흥 공장지대 사람들, 그리고 자본가와 임금노동자들 사이에서 빚어지던 정신적이고 물리적인 갈등을 다각도로 조명한다. 개스켈은 로맨스의 갈등구조를 통해 신흥 자본가와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의 대조적인 삶을 보여주고 산업화가 만들어낸 노동문제를 고발한다. 뿐만 아니라 진취적인 마거릿을 내세워 여성의 권익 문제, 사랑과 종교적 신념, 대립 구도를 초월하는 인간애 등 우리가 살아가며 피할 수 없는 삶의 모습들을 포괄적으로 보여준다.
개스켈의 많은 작품이 영국 BBC방송국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었는데, 『남과 북』은 2004년 시청자가 뽑은 최고의 영국 드라마로 선정되었으며, 국내에서도 영국 빅토리아 시대 문학에 매력을 느끼는 시청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개스켈의 섬세한 필치를 통해 그려지는 마거릿의 자의식과 인간애, 그리고 거절당한 사랑에 비통해하는 손턴의 격정적인 모습은 당시의 노사문제에 대한 사실적인 서사와 함께 시대를 초월하여 독자들을 잡아끈다.
남부 소녀, 북부의 삶 속으로 들어가다
대립을 상징하는 제목인 『남과 북』에는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북’은 산업혁명의 표상인 맨체스터가 있고 자본주의의 가치를 상징하는 북부를 가리킨다. 반면 ‘남’은 북부가 숭상하는 가치와 전혀 관계없이 잘 교육받은 사람들이 풍요로운 중류층의 삶을 영위하는 남부를 가리킨다. 하지만 남부와 북부는 그저 남과 북이라는 대립적 공간만을 의미하는 개념이 아니다. 남부와 북부는 신분이나 부의 소유에 따른 계급 질서 속에서 상류계급과 하류계급 혹은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으로 나뉘어 돌아가던 당시의 사회상을 상징한다.
남부 시골마을 출신 마거릿 헤일은 교의 변화로 목사직을 그만둔 아버지를 따라 북부의 상공업 도시 밀턴으로 이사 온다. 밀턴에서 마거릿은 아버지의 개인교습 문하생인 면화공장 소유주 존 손턴을 만나는데, 손턴은 자신을 업신여기는 듯한 마거릿의 태도에 모멸감을 맛보고, 마거릿 역시 노동자들에 대한 손턴의 매정한 시각에 분노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는 오해와 편견이 쌓여간다. 하지만 마거릿은 오빠를 보호하기 위해 위증한 자신의 잘못을 손턴이 덮어주려 애썼다는 걸 알고 나서 자신의 편협한 시각을 후회하며 그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가지기 시작한다.
『남과 북』에서 주목할 점은 평화로운 남부 출신의 마거릿이 자신이 그렇게 경멸해 마지않던 북부의 삶에 동화되어 가는 역설이다. 마거릿은 북부에서 파업 주동자인 노동자 히긴스와, 열악한 환경의 면화공장에서 일하다가 면폐증으로 죽어가는 히긴스의 딸 베시와 친구가 되면서 비루하고 절박하게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삶의 민낯을 들여다보게 되고, 하층민의 삶을 이해할 줄 아는, 한층 성숙한 여성으로 변모한다.
상반된 지리적 배경과 사회적 분위기를 적절히 대조시키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개스켈의 필치는 섬세하고 우아하다. 뿐만 아니라 시대의 기록자로서, 시대를 앞서간 페미니스트 · 휴머니스트로서 개스켈이 그린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초상은 낭만적인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뿐만 아니라,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독자들까지 만족시킨다.
산업화의 어두운 그늘을 조명하는 사회소설
-한 여성의 눈에 비친 19세기 영국의 초상
『남과 북』은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두번째 사회소설이다. 개스켈의 첫번째 사회소설은 1848년 맨체스터 노동자들의 비참한 실상을 노동자의 시선으로 조명한 장편 『메리 바턴』으로, 이 소설로 개스켈은 사회소설가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남과 북』이 발표되었던 19세기 중엽 영국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기술의 진보와 공장의 등장으로 가내 수공업이 몰락하고 공장제 기계 공업이 확립되었으며, 사회적으로는 맨체스터 같은 신흥 공업도시가 발달하면서 대량생산을 통해 부자가 된 자본가와 그 밑에서 법의 보호 없이 착취당하는 노동자라는 두 계급이 등장했다.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하듯 1854년에는 비참한 노동자의 실상을 고발하는 두 편의 소설이 찰스 디킨스가 발행하는 주간문예지 『하우스홀드 워즈』에 연재되는데, 하나는 디킨스 본인의 『어려운 시절Hard Times』이고, 다른 하나가 개스켈의 『남과 북』이다.
『남과 북』은 산업혁명이 한창 진행되던 빅토리아 시대에 어린아이까지 저임금의 노동에 시달려야 할 만큼 빈부 격차가 심하고 많은 사람들이 폐병으로 사망하는 가공의 공업도시 밀턴을 배경으로, 당시 새로운 사회문제로 대두된 신흥 산업자본가와 임금노동자들 사이의 갈등을 그려낸다. 첫번째 사회소설 『메리 바턴』과는 달리 양측의 입장을 모두 대변하려 하지만, 자본가들과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의 대조적인 삶을 그리면서 산업화가 만들어낸 노동문제의 고발에는 고삐를 늦추지 않는다.
이 소설에는 가난한 노동자들에 대한 작가의 연민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으며, 그 연민은 밀턴 노동자들의 삶에 깃든 애환을 서서히 이해해가는 여주인공 마거릿의 태도에 그대로 녹아들어 있다. 특히 공장주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고조된 적대감이 파업으로 치닫는 과정과 팽팽한 긴장 속에 양쪽이 대치하는 상황을 묘사한 부분에서는 동시대 여성 작가들에게서는 보기 힘든 사회문제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 엿보인다.
마거릿 헤일
가상의 공업도시 밀턴을 배경으로 불평등한 부의 분배에 대한 노동자들의 분노와 좌절감을 통해 당시 영국 사회 전반에 드리워진 산업화의 그늘을 보여주는 이 소설의 원래 제목은 『남과 북』이 아니었다. 개스켈이 붙인 제목은 여주인공의 이름을 딴 ‘마거릿 헤일’이었다. 하지만 『남과 북』이 “좀더 많은 걸 함축하고 소설 속에서 상충하는 사람들을 더 잘 표현하고 있다”는 편집자 디킨스의 의견을 좇아 이 소설은 결국 『남과 북』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소설의 원래 제목이 여주인공의 이름을 딴 ‘마거릿 헤일’이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개스켈이 주인공 마거릿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마거릿은 상당히 용기 있고 자주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개스켈은 빅토리아 시대 여성의 전통적인 사회적 역할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여성의 재산권 옹호와 여권의 신장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여권주의자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녀는 마거릿을 통해 결혼과 함께 남편에게 종속되는 빅토리아 시대의 전형적 여성과는 다른 주체적 여성상을 보여준다.
밀턴 사람들은 마거릿을 걱정 없는 중류층 여성의 전형으로 보지만, 사실상 마거릿의 집안을 들여다보면 가장의 기능을 상실한 아버지와 병약한 어머니, 선상 폭동의 주모자로 몰려 도피자의 신세가 된 오빠가 있다. 이런 환경에서 마거릿은 실질적인 가장의 역할을 맡으면서 판단력과 결단력을 갖춘 자주적 여성의 정체성을 확립해간다.
마거릿은 결혼관에서도 맹목적으로 관습을 추종하지 않고 자주적인 의식을 보여준다. 그녀는 외형에 치중하는 결혼식과 배우자의 선택에서도 여타 여성들과는 다른 가치관을 보인다. 전도유망한 변호사 레녹스가 청혼을 했을 때 마거릿은 그를 연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청혼을 거절한다. 결혼을 출신과 재산을 기준으로 자신의 미래를 담보 받는 제도로 받아들이던 당시의 관습에 비하면 마거릿의 이러한 결혼관은 사랑을 바탕으로 미래의 배우자를 스스로 선택하는 현대의 연애결혼관과 많이 닮아 있다. 부모를 잃은 뒤 혼자 남은 마거릿이 ‘권위에 대한 복종’과 ‘여성의 독자적인 활동 영역‘ 사이에서 자신의 태도를 고민하면서 타인의 간섭에서 자유로운 주체적 삶을 살고자 다짐하는 부분에서는 신여성적인 사고가 엿보인다. 이밖에도 마거릿의 행보에는 빅토리아 시대 여성의 사고를 뛰어넘는 부분이 많이 등장한다.
『남과 북』은 사회소설이라는 분류에 걸맞게 노동문제와 계급문제를 주로 담고 있지만, (번역원고 기준으로) 원고지 3천 매가 넘는 분량에 작가 개스켈의 개인사와 사상을 총망라한 작품인 만큼, 사랑과 종교적 신념, 여성의 권익 문제, 대립 구도를 초월하는 인간애 등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엘리자베스 개스켈
영국 런던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났으나,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너츠퍼드의 이모 집에서 성장했다. 1832년 유니테리언 목사인 윌리엄 개스켈과 결혼하여 맨체스터에 정착한 뒤 남편을 도와 빈민구제 등의 사회사업에 힘쓰고 어머니로서의 삶에 충실하다가, 삼십대 후반에 어린 아들을 잃은 뒤 극심한 슬픔을 잊기 위해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이때 탄생한 작품이 빈민의 비참한 생활과 노동자의 참상을 그린 장편『메리 바턴』(1848)이다. 이 작품은 노동자 문제에 대한 참신한 접근으로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적극적인 인도주의자였던 개스켈은 찰스 디킨스의 잡지 『하우스홀드 워즈』에 연재한『남과 북』에서 고용주와 노동자들, 기득권자와 소외된 자들이 사회적 화해를 이루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으며 사회소설가로서 입지를 확실히 했다. 또한 샬럿 브론테와 친분을 쌓고 평생지기 친구가 되었으며, 전기 『샬럿 브론테의 생애』를 쓰기도 했다.이 작품은 뛰어난 문학작품인 동시에 가치 있는 전기기록이다. 인간의 선의와 종교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으면서 19세기의 사회문제와 당대의 현실을 생생하게 그려낸 개스켈은 만년까지 『실비아의 연인들』『사촌 필리스』 등의 장편소설과 수십 편에 달하는 중·단편을 발표했다. 1865년 『아내와 딸들』 완성을 앞두고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미완성 유고는 1866년에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