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달라 마리아
<마르코>
향유를 붓는 ‘어떤 여자’는 누구인가? (14, 1~9)
예수님께서 베타니아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어떤 여자’가 찾아와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 그것은 예수님의 장례를 예고하는 행위였다. 상당히 중요한 이 대목에서 마르코는 그 이름을 ‘어떤 여자’라는 익명으로 기록한다. 행간에서 몸 성하신 예수님이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신 것도 너무나 대단하다. 그러나 예수님을 찾아 나병환자 시몬의 집을 찾아간 ‘어떤 여자’도 사람으로서 참으로 대단하다. ‘어떤 여자’의 이 행위는 마태오와 유사하고 루카와 요한에서는 약간의 내용을 달리하지만 네 복음서 공통으로 제시된다. 사실이고 중요한 관계에 있었다는 예증이다. 익명의 이 ‘어떤 여자’는 누구일까?
예수님 죽음의 자리(15, 40-41.47)
예수님께서 골고타 언덕에서 십자가형으로 죽임을 당하셨다. 남성 제자들은 거의 도망가 버렸다. 그러나 그 현장 멀리서 여러 여자가 지켜보고 있었다. 마르코는 그 명단을 제시하는데 마리아 막달레나가 실명으로 일 순위로 거명된다. 마태오의 부연 보도로는 그들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며 시중들던 여인들이라고 한다.(마태 27,55) 마리아 막달레나는 갈릴래아 호숫가 주변 마을 막달라에 살았다. 막달레나와 막달라는 인명이 아닌 갈릴래아 호숫가에 인접한 지역 이름이다.
부활의 첫 증인(마르 16,1-11)
안식일이 지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다른 여자들과 함께 무덤의 예수님께 향료를 발라 드리기 위해 갔다. 향료는 시신의 부패를 막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무덤은 비어 있었고, 천사가 말하길 “주님은 되살아나셨으니, 도망치고 숨은 제자들을 만나거든 갈릴래아로 다시 가라고 전한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복음 운동을 시작한 곳이다. 갈릴래아로 가라는 것은 사명을 재개하여 계속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여기에서 마르코는 마리아 막달레나가 과거 ‘일곱 마귀’가 들렸었다고 한다. 마귀 하나도 아닌 ‘일곱 마귀’란 무슨 의미일까? 엄청나게 불운한 어두운 환경에서 살아온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어둠의 세계에 살던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난 뒤 성령 충만한 여성 사도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 마르코 결론
마르코가 익명 제시한 어떤 여자는 실명 마리아 막달레나이고 그는 일곱 마귀에 들렸었으나 예수님을 만난 뒤 전연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마태오>
향유 사건(26,6-13)
마태오는 마르코의 보도를 거의 그대로 따라간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어떤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행동이었다.(26,6-13)
예수님 죽음의 자리 (27,45-56)
예수께서 십자가상 죽음을 당하시는 자리에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제베대오의 어머니가 있었다.(27,55-56)
부활의 첫 증인(28,1-10)
안식일이 지난 주간 첫날 새벽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 막달레나의 실명이 제시되고 있다. 그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란 소식을 전하러 가는 도중에 예수님의 부활 가면서 예수님을 직접 뵈었다.
※마태오의 결론
마태오의 ‘어떤 여자’는 막달라 마리아로 추정된다. 마태오도 마르코 저자의 통찰과 편집을 그대로 따라간다. 다만 ‘일곱 마귀가 들렸었다’라는 마르코 저자의 표현은 누락하고 있다
<루카 복음>
죄녀 용서(루카 7,36-50)
예수님께서 바리사이 집에 초대를 받으셨다. 그 고을에 사는 ‘죄녀’가 찾아와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은 뒤 향유를 부어 발랐다. 믿음이 전제된 극진한 회개와 큰 사랑의 행위였다.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평안하라”라고 말씀하셨다. 여인의 죄는 어떤 것일까? 아무튼 이 본문에서 죄녀는 죄인에서 구원으로의 극적 삶의 전환을 하고 있다.
여자들이 예수의 복음 활동을 돕다(8,1-3)
루카 7,36-50절에 바로 이어지는 본문이다. 예수님의 복음 운동에 열두 제자와 함께 여성들의 활동이 보도된다. 그들 중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마리아 막달레나가 언급된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직전 본문 7,36-50에 나타나는 죄녀(7,37)는 8,1-3에서 나타나는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마리아 막달레나와 동일인이 아닐까?
마리아와 마르타(10,38-40)
루카 10장은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예수님이 추가로 선임하신 일흔두 명의 제자 파견과 귀환 활동 보고 사화이다. 10장 마지막 본문은 마리아와 마르타가 장식하고 있다. 의미심장한 구성이다. 마리아는 음식 시중을 드는 마르타와 달리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한다. 이런 마리아를 두고 예수님은 “좋은 몫을 택했으며 마리아는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죄녀(7,37)와 그 뒤를 막바로 잇는 본문의 마리아 막달레나(8,2) 10장의 마지막 마리아는 같은 인물이 아닐까?
예수님 죽음의 자리(루카 23,44-49)
예수님의 죽음의 자리에 예수님의 모든 친지와 ‘갈릴래아에서부터 그분을 함께 따라온 여자들’(23,49)이 그 모든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돌아가 향료와 향유를 준비하였다.(23,55)
부활의 첫 증인(루카 24,1-12)
예수님의 죽음과 무덤을 지켜본 여인들이 주간 첫날 무덤을 찾았다. 천사로부터 주님의 부활소식을 들고 제자들에게 알렸다. 이러한 일들은 한 사람은, 마리아 막달레나와 요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다른 여자들도 있었다.
※루카의 결론
죄녀(7,37)와 그 뒤를 막바로 잇는 본문의 마리아 막달레나(8,2) 10장의 마지막 마리아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 마리아 막달레나는 동일선상의 인물로 추정된다.
<요한 복음>
요한복음을 1장부터 11장까지 영원한 생명을 주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의 다양하게 모습을 제시한다.
사마리아 여인(4장)
예수님은 유다에서 갈릴래아로 가시기 위해 사마리아를 통과했다. 이곳에서 어떤 여자가 물을 길으러 왔다가 예수님을 만났다. 그 여자는 현재 여섯 번째 남자와 동거 중이지만 형편상 남편은 아니라고 한다. 같이 사는 남자가 남편이 아닌 남자라면 그 여자의 신분이나 처지는 미루어 쉽게 짐작이 가는 상황이다. 그러나 복음을 전개하며 천재적 문학 유희를 드러내는 요한은 여인의 정체를 쉽게 노출하지 않는다. 일곱 마귀와 같은 일곱 번째 남자는 다른 본문에서 드러날 것이다.
간음녀를 구원하시다(요한 8,1-11)
요한복음을 1장부터 11장까지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믿은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사례를 다양하게 제시한다.
8장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 현장을 덮쳐 여자만을 잡아 와 성전에서 단죄하고 처벌하고자 한다. 이 사건의 핵심은 여인과 간음이 아닌 예수님을 옭아매려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판결하셨다. “죄 없는 자가 저 여인을 돌로 쳐 죽여라.” 그러자 모두 자리를 떠나갔다. 모두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다시는 죄짓지 말라” 예수님은 결정적인 가르침을 간과하지 않으셨다.
요한복음 8장의 이 본문은 ‘죄녀를 용서’(루카 7,36-50)하는 루카 복음 전개와 유사하다. 루카의 전개에 의하면 죄려는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자이고 그녀는 막달라 마리아이다.
요한복음 4장 여섯 번째 남자와 살던 사마리아 여자의 처지는, 그 당장에 중단되지 않고 더 이어졌을 것이다. 8장의 간음녀 이야기는 공관복음의 일곱 마귀 들린 여인의 정체를 비교 이해하게 한다. 요한복음 저자는 ‘일곱 마귀’라는 말은 일절 하지 않는다. 다만 비유를 흘리고 있지 않는가? 4장과 8장에서. 사실 마귀란 사탄(satan)과 같은 말로, 사람을 유혹하여 잘못과 죄 속에 살게 하는 존재다. 여인이 자청했든 남자들이 원했든 여인의 삶은 마귀가 일곱이나 들린 것처럼 피폐하고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8장의 극적인 사건 이후 일곱마귀를 떨쳐내고 다시는 죄 속에 살지 않는다.
베타니아, 삼 남매(11장)
베타니아에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삼 남매가 살고 있었다. 라자로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인데 죽을병에 걸려 있다. 요한복음은 이 대목에서 마리아를 친절하게 소개한다. 중요한 소개이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은 여인이라고 한다. 사실 요한복음 10장까지 이러한 내용이 없는데 이것은, ‘루카복음 7,37-38’을 차용하는 것이다.
삼 남매 특히 마리아는 예수님을 ‘스승님’(11,28)이라 호칭하고 있다. 아주 특별한 호칭이다. 당시 여성들이 함부로 부를 수 없는 호칭이다. ‘마리아에게 갔다가’(11,45)라는 오빠와 언니를 제치고 마리아가 앞세워져 있는 이 문구는 삼 남매의 가정에서 중요한 비중이 마리아임을 알 수 있다. 비록 환자이긴 하지만 남성 우위 시대에.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다(12,1-8)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타니아 삼 남매의 집에서 있었다. 잔치는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라자로의 소생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잔치이며, 머지않아 십자가에 돌아가실 예수님을 죽음을 앞둔 이별의 잔치이다. 이 자리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아 드렸다.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예고이다. 이 12장은 루카복음 7,36-50과 유사하다.
십자가 죽음(19,17-27)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어머니 마리아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있었다(19,25)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죽음의 자리와 부활의 자리에 있었다고 복음서는 공통으로 전하고 있다.
부활(20,1-18)
주간 첫 날 이른 새벽에 무덤을 찾은 이는 마리아 막달레나이다. 이 또한 네 복음서가 공통으로 전하고 있다. 또한 부활하신 주님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최초로 직접 당신의 부활을 보여주시며 사도들에게 사명을 전하라는 사명을 위임하신다.
※요한복음의 결론
여섯 마귀에 걸린 사마리아 여인은 일곱 번째 주님을 만나면서 극적인 삶으로 변화된다. 죄에서 구원으로 어두운 삶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삶으로 전환한 것이다.
※복음 종합
네 복음서에 제시되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종합하면 그녀는 막달라 지방 출신이다. 마르코와 마태오의 일곱 마귀 들린 모습은 루카의 죄녀 요한의 창녀 신분이다. 그러나 죄녀이고 창녀이면 어떤가?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 일곱마귀)죄를 과감하게 벗어 버리고 예수님의 복음운동에 몸과 마음과 어둡게 벌었던 막대한 재산을 다 바쳐 투신하였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현장에 성모님과 함께 자리를 지켰으며, 예수 부활의 첫 증인이 되는 영예로운 여성 사도가 되었고, 예수님의 명령으로 숨고 도망간 사도들을 찾아가 사명을 부활시켰다.
입력자의 몇 마디>
복음서는 서로 다른 저자들이 서로 다른 시기에 저술했다. 가장 먼저 기록한 마르코를 1차 자료로 하면서, 개인적 주요 관심을 저술하되 주요 주제를 공통으로 다루기도 한다. 같으며 다르기에 그 권위와 풍요로운 이해와 충만함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성서 이해와 교회 역사에서 막달라 마리아와 대한 질문은 크게 두 가지였다. 네 복음서에 제시되는 막달라 마리아가 동일인인가 서로 다른 인물인가 하는 점이다. 짧은 내 통찰로는 동일인으로 판단된다.
교회는 네 복음서에 등장하는 막달라 마리아를 동일인 즉 ‘죄녀=창녀=일곱 마귀 들린 여인’으로 해석하여, 죄녀와 창녀는 성녀로 인정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했다. 2000년 동안이나. 황당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거룩함’에 대한 성서적 이해를 신체적 물리적 차원으로만 제한시켰기 때문이다.
1969년 바오로 6세 교황은 “세 여인이 각각 다른 사람”이라고 하였다. 넌 눈치 적정 해석이고 평가이다. 이미 대학자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사도들의 사도’로 통찰하고 선포하였다. 과연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대학자의 성경적 통찰이며 제시이다. 1988년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녀의 사도 역할을 인정했다. 12사도 못지않은 여성 사도로 인정한 것이다. 2016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전례력 안에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을 축일로 격상시켰다. 21세기까지...그분의 진면목에 비해 너무 미진하다. 복음서에 드러나는 바로는 대축일급여야 하지 않을까? 그분의 명예를 발목 잡는 것 여전히 ‘일곱 마귀= 죄녀=창녀’ 불명예 프레임인 것 같다.
정작 그분은 교회를 두고도 나를 두고도 ‘얘야 아무려면 어떠니? 중요한 것은 하느님과 스승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분에 대한 마르지 않는 영원한 나의 신망애信望愛란다.” 라고 하실 것 같다.
입력: 최마리 에스텔 수녀, 2023년 7월 22일 (토) PM 20:50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에
위 내용은 순전히 개인적 소견임을 밝힙니다. 의혹시에는 교회의 입장에 따르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