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 과거시험의 경우 경쟁도 치열하거니와 각종 권세가의 시험문제 무단 유출이나 시험지 바꾸기, 대리시험 치기, 컨닝페이퍼
등등 여러가지가 있었지요. 헌데 문과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들은 널리 알려져 있는 편이었지만 무과는 사실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죠, 하지만
무과도 엄연한 과거시험! 그리고 이 시험을 통과하면 국가공무원으로서 벼슬길에 나가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합격하면 양반이지요.
무과 또한 시험의 방식은 문과와 유사하게 정기시험인 식년시가 있고, 부정기 시험인
별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역시 초시, 복시, 전시의 3단계 과정을 거쳤는데 총 3단계를 다 거친 합격자는 전국에서 28명으로 문과와 비교했을
때 결코 쉬운 시험이 아니었지요. 일단 정규 시험인 식년시를 기준으로 초시는 서울에서는 병조와 훈련원 관할으로 70명을 선발하고 지방에서는
병마절도사 관할로 120명을 선발하는데 시험 과목은 '경국대전'을 기초로 목전(木箭) , 철전(鐵箭), 편전(片箭), 기사(騎射),
기창(騎槍), 격구(擊毬) 였는데 영조때 만들어진 '속대전'에서는 기사, 기창, 격구가 기추, 유엽전, 조총, 편추로
바뀝니다.
대충 보시면 활쏘는 것이 대부분으로 나무화살, 철화살, 편전, 말타고 쏘기까지 모두 활쏘기고, 마머지가 말타고 창질하고 격구가 포함되니 조선시대 무과에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영조때 변화된 시험에는 말타고 표적을 번갈아 쏘는 기추 이외에 말타는 과목이 사라지고 유엽전과 조총 편추 시험이 추가됩니다. 영조 이후 조선의 무과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는지 짐작해 볼 수 있지요.
초시에 합격한 190명은 다음해 서울로 올라와 복시를 치게 됩니다. 1차 합격 이후에 2차는 1년 정도 뒤에 치게 되는데 복시의 경우 시험 과목은 초시와 동일하나 격구가 빠지고 그 자리에 병서를 외우고 알고 있는지 테스트 하는 강서로 과목이 바꾸어 집니다, 이 시험은 병조와 훈련원에서 주관하며 여기서 최종 28명을 선발하게 되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시에서는 보격구와 기격구만으로 시험을 치는데 마지막 시험은 격구라는 시합의 특성을 살필 때 체력 테스트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당시 격구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현대에 복원되고 연구된 격구만을 두고 봤을 때는 말이지요. -기격구는 그나마 무예라고 볼 수 있는데, 도대체 보격구는 골프 시험과 비슷한데 왜 이걸? 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보격구에 대한 제 글은 여기로 - 그리고 이 시험을 통해 28명의 순위를 정합니다. 이렇게 선발된 28명은 문과 보다는 진급에서 차별 대우가 있기야 했지만 나라를 지키는 장수로서 신분 상승을 노릴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시험이었던 것입니다.
헌데 여기까지는 정상적인 무과시험의 경우고 문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환란을 겪은 이후입니다. 광해군 12년 변경방어를 위한다는 목적으로 무과를 무차별로 뽑았는데 오죽 심했으면 만 명을 뽑는다고 해서 만과(萬科) 라고 불렸다고 할 정도입니다. 28명을 뽑는 무과 시험에 만 명을 단순히 많다라는 의미로 봤다 하더라도 수백 수천명은 뽑았다는 의미가 되는거고 그 많은 인원이 복무할 자리나 있었겠습니까? 당연히 국가 예산은 또 어떻고요.
이러니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시험장에 가지도 않았는데 어느날 보니 자기의 이름이 합격자 명단에 올라가 있지를 않나, 과거에 합격하면 무과 또한 어사화를 끼우고 합격증인 홍패지를 받았는데 이 어사화와 홍패지를 자기 돈으로 마련하라고 하지를 않나, 대리시험이나 컨닝으로 합격한 것이 들켰을 경우 처발받아야 함에도 무명 100필에 면죄를 받지를 않나... 한마디로 국가 시험 자체가 붕괴하고 있는 것이었고 군대가 괴멸되고 있다는 의미나 다름 없는 것이었습니다.
숙종 1년 10월19일의 실록에 따르면 무과가 이렇다 보니 환관이 무과 시험에 응시한 것을 계기로 모의장이나 공장 등 기술직 양인도 무과 응시를 요구합니다. 숫종 2년에는 윤휴의 건의로 만과를 배풀었는데 워낙에 응시자가 많다보니 서울에서 치지 못하고 신하를 각도에 출장을 보내 선발하게 했는데 그 수가 2만명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이 많은 인원이 받을 벼슬자리가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어떻게든 줄을 대어 자리 하나 받아보려고 서울에 죄다들 몰리다 보니 서울의 인구가 폭증해 서울의 쌀값이 폭등했고, 관리로 시험을 봤는데 너무 많아서 졸병으로 배치를 하니 당연히 불만이 폭발하고 민심이 흉흉해 졌습니다. - 생각해 보세요, ROTC로 장교 입대하려 했는데 군대 가니 이병부터 시작하랍니다. 어떤 기분이겠어요? -
그리고 역시 숙종대 남구만은 "...무과는 화살 한두방이면 합격하여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이가 전후로 이어져 끝을 모를 정도다." 라고 비판합니다. 사실 무과의 시험이 거의 활쏘기에 편중되어 있는 만큼 사람들은 다른 기술보다 활쏘기에만 집착하게 되지요, 거기다 대리시험을 들켜도 벌금만 내면 그만이니 책도 볼 필요없었던 겁니다. 북벌의 주요 장군인 이완 대장은 당시 만과에 대한 비판을 했는데 "우리나라는 조총이 장기인데, 만일 만과를 배풀면 사람들이 모두 총을 버리고 활을 택할 것이다" 라고 합니다. 출셋길이 화살에 의존하고 뽑는 사람도 많아 어지간 하면 합격이니 화살만 주구장창 쏴대면 되는데 굳이 총을 쏠 필요도 없는 것이었죠. 당연히 국방력은 몇백년전이나 그때나 똑같아 지는거고요, 아니 만과 덕분에 더 저열해 지고 말입니다.
이런 분위기가 양란 이후 조선 후기 내내 이어집니다. 조선시대 전체를 집계해 보면 무과 합격자는 문과의 10배가 되는데 관직의 수는 문과보다 훨씬 적었죠. 숙종조 재상 최석정은 무신 당상관의 자리가 300개인데 전직 당하관이 1000명에 가깝고, 무과에 합격하고도 벼슬을 받지 못해 백수인 사람이 수천명이나 되니 심각하다고 말합니다. - 이 사람들은 서울서 한량이 되거나 불량배가 되거나... - 이는 정조때도 마찬가지라 1784년에 세자 책봉 축하 시험을 치뤘는데 합격자가 2676명이나 되었습니다. 정조는 이들을 차별없이 골라 선전관으로 쓰라고 했는데 선전관의 TO는 정식은 20명, 겸직은 50명이니 나머지는 죄다 그냥 합격증만 받고 마는거죠.
그리고 이런 구조적인 문제와 함께 특정 가문이 벼슬을 독점하는 현상도 있었는데 문과가 서울 사는 경화세족으로 안동김씨나 풍양조씨가 있다면 무과는 능성구씨, 인동장씨, 덕수이씨가 그런 가문이었습니다. 이런 가문들은 당연하게도 자식에 대한 교육이 남다를 것이고 투자도 장난 아닙니다, 거기다 권력에 가깝고 시험관이 이들이 될 가능성도 높았으니 미리 시험문제를 알고 시험치러 들어가는 것과 비슷한 상황도 연출되는거죠.
이렇다 보니 조선후기 국방은 혼탁해 졌고... 그리고 아시는대로 구한말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죠. 그나마 문과는 자정의 노력이라도 끊임없이 있었습니다만 무과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시 되었으니 자정에 대한 노력도 문과에 비할바가 아니었습니다. 뭐 비록 지금 대한민국의 국방은 세계에 내어 놔도 부끄럽지 않을 수준입니다만 몇몇 들려오는 소식을 보면 순식간에 조선 후기의 망가진 국방이 될 수도 있음을 위정자들이 알아 줬으면 좋겠군요.

대충 보시면 활쏘는 것이 대부분으로 나무화살, 철화살, 편전, 말타고 쏘기까지 모두 활쏘기고, 마머지가 말타고 창질하고 격구가 포함되니 조선시대 무과에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영조때 변화된 시험에는 말타고 표적을 번갈아 쏘는 기추 이외에 말타는 과목이 사라지고 유엽전과 조총 편추 시험이 추가됩니다. 영조 이후 조선의 무과가 어떤 방향으로 나가는지 짐작해 볼 수 있지요.

<활쏘기를 너무 좋아해서... 남자도... 여자도... 아이도... 백수도...
죄다 활>
초시에 합격한 190명은 다음해 서울로 올라와 복시를 치게 됩니다. 1차 합격 이후에 2차는 1년 정도 뒤에 치게 되는데 복시의 경우 시험 과목은 초시와 동일하나 격구가 빠지고 그 자리에 병서를 외우고 알고 있는지 테스트 하는 강서로 과목이 바꾸어 집니다, 이 시험은 병조와 훈련원에서 주관하며 여기서 최종 28명을 선발하게 되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시에서는 보격구와 기격구만으로 시험을 치는데 마지막 시험은 격구라는 시합의 특성을 살필 때 체력 테스트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당시 격구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현대에 복원되고 연구된 격구만을 두고 봤을 때는 말이지요. -기격구는 그나마 무예라고 볼 수 있는데, 도대체 보격구는 골프 시험과 비슷한데 왜 이걸? 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보격구에 대한 제 글은 여기로 - 그리고 이 시험을 통해 28명의 순위를 정합니다. 이렇게 선발된 28명은 문과 보다는 진급에서 차별 대우가 있기야 했지만 나라를 지키는 장수로서 신분 상승을 노릴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시험이었던 것입니다.

<격구하는 모습>
헌데 여기까지는 정상적인 무과시험의 경우고 문제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환란을 겪은 이후입니다. 광해군 12년 변경방어를 위한다는 목적으로 무과를 무차별로 뽑았는데 오죽 심했으면 만 명을 뽑는다고 해서 만과(萬科) 라고 불렸다고 할 정도입니다. 28명을 뽑는 무과 시험에 만 명을 단순히 많다라는 의미로 봤다 하더라도 수백 수천명은 뽑았다는 의미가 되는거고 그 많은 인원이 복무할 자리나 있었겠습니까? 당연히 국가 예산은 또 어떻고요.
이러니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시험장에 가지도 않았는데 어느날 보니 자기의 이름이 합격자 명단에 올라가 있지를 않나, 과거에 합격하면 무과 또한 어사화를 끼우고 합격증인 홍패지를 받았는데 이 어사화와 홍패지를 자기 돈으로 마련하라고 하지를 않나, 대리시험이나 컨닝으로 합격한 것이 들켰을 경우 처발받아야 함에도 무명 100필에 면죄를 받지를 않나... 한마디로 국가 시험 자체가 붕괴하고 있는 것이었고 군대가 괴멸되고 있다는 의미나 다름 없는 것이었습니다.
숙종 1년 10월19일의 실록에 따르면 무과가 이렇다 보니 환관이 무과 시험에 응시한 것을 계기로 모의장이나 공장 등 기술직 양인도 무과 응시를 요구합니다. 숫종 2년에는 윤휴의 건의로 만과를 배풀었는데 워낙에 응시자가 많다보니 서울에서 치지 못하고 신하를 각도에 출장을 보내 선발하게 했는데 그 수가 2만명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이 많은 인원이 받을 벼슬자리가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어떻게든 줄을 대어 자리 하나 받아보려고 서울에 죄다들 몰리다 보니 서울의 인구가 폭증해 서울의 쌀값이 폭등했고, 관리로 시험을 봤는데 너무 많아서 졸병으로 배치를 하니 당연히 불만이 폭발하고 민심이 흉흉해 졌습니다. - 생각해 보세요, ROTC로 장교 입대하려 했는데 군대 가니 이병부터 시작하랍니다. 어떤 기분이겠어요? -

<영조때 추가된 기추장면. 양쪽에 놓인 표적을 말을 달려 쏘아
맞춥니다>
그리고 역시 숙종대 남구만은 "...무과는 화살 한두방이면 합격하여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이가 전후로 이어져 끝을 모를 정도다." 라고 비판합니다. 사실 무과의 시험이 거의 활쏘기에 편중되어 있는 만큼 사람들은 다른 기술보다 활쏘기에만 집착하게 되지요, 거기다 대리시험을 들켜도 벌금만 내면 그만이니 책도 볼 필요없었던 겁니다. 북벌의 주요 장군인 이완 대장은 당시 만과에 대한 비판을 했는데 "우리나라는 조총이 장기인데, 만일 만과를 배풀면 사람들이 모두 총을 버리고 활을 택할 것이다" 라고 합니다. 출셋길이 화살에 의존하고 뽑는 사람도 많아 어지간 하면 합격이니 화살만 주구장창 쏴대면 되는데 굳이 총을 쏠 필요도 없는 것이었죠. 당연히 국방력은 몇백년전이나 그때나 똑같아 지는거고요, 아니 만과 덕분에 더 저열해 지고 말입니다.
이런 분위기가 양란 이후 조선 후기 내내 이어집니다. 조선시대 전체를 집계해 보면 무과 합격자는 문과의 10배가 되는데 관직의 수는 문과보다 훨씬 적었죠. 숙종조 재상 최석정은 무신 당상관의 자리가 300개인데 전직 당하관이 1000명에 가깝고, 무과에 합격하고도 벼슬을 받지 못해 백수인 사람이 수천명이나 되니 심각하다고 말합니다. - 이 사람들은 서울서 한량이 되거나 불량배가 되거나... - 이는 정조때도 마찬가지라 1784년에 세자 책봉 축하 시험을 치뤘는데 합격자가 2676명이나 되었습니다. 정조는 이들을 차별없이 골라 선전관으로 쓰라고 했는데 선전관의 TO는 정식은 20명, 겸직은 50명이니 나머지는 죄다 그냥 합격증만 받고 마는거죠.

<급제자에게 내리는 교지... 붉은색의 홍패... 진사나 생원 같은 쪼리는
백색임...>
그리고 이런 구조적인 문제와 함께 특정 가문이 벼슬을 독점하는 현상도 있었는데 문과가 서울 사는 경화세족으로 안동김씨나 풍양조씨가 있다면 무과는 능성구씨, 인동장씨, 덕수이씨가 그런 가문이었습니다. 이런 가문들은 당연하게도 자식에 대한 교육이 남다를 것이고 투자도 장난 아닙니다, 거기다 권력에 가깝고 시험관이 이들이 될 가능성도 높았으니 미리 시험문제를 알고 시험치러 들어가는 것과 비슷한 상황도 연출되는거죠.
이렇다 보니 조선후기 국방은 혼탁해 졌고... 그리고 아시는대로 구한말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죠. 그나마 문과는 자정의 노력이라도 끊임없이 있었습니다만 무과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시 되었으니 자정에 대한 노력도 문과에 비할바가 아니었습니다. 뭐 비록 지금 대한민국의 국방은 세계에 내어 놔도 부끄럽지 않을 수준입니다만 몇몇 들려오는 소식을 보면 순식간에 조선 후기의 망가진 국방이 될 수도 있음을 위정자들이 알아 줬으면 좋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