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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스트셀러 작가와 대필 작가의 역학관계
- 알렉상드르 뒤마와 ‘니그로’를 중심으로 -
역사소설 분야에서 베스트셀러 작가를 들라 하면 단연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 1802~1870년)를 꼽는다. 뒤마는 1844년 «삼총사»를 시작으로 «몽테크리스토 백작», «마르고 왕비», «20년 후의 삼총사», «철가면», «붉은 집의 기사», «몽소로 부인» 등을 발표하여, 빅토르 위고가 인정했던 “세기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뒤마의 소설을 통해 역사를 배웠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그의 작품들은 주로 16~17세기 역사에서 소재를 끌어냈다.
역사소설은 과거사실에 거슬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상상력을 가미하고 가공인물을 착상해야 하는 까다로운 장르이다. 역사에 관한 충분한 지식과 고증자료들이 요구되며 소설내용에 대한 재확인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 많은 참고자료, 문헌, 기록들이 필요한 만큼 이 과정에서 저자는 자료조사원, 저서협력자 혹은 대필작가의 손길이 필요하게 된다.
역사 미스터리소설 «다빈치 코드»로 베스트셀러가 된 댄 브라운과 알렉상드르 뒤마에게서 굳이 공통점을 찾는다면, 그들 뒤에 만만치 않은 저서협력자들의 군단이 배후에 진을 치고 있다는 점이다.
«다빈치 코드»의 경우, 소설이 완성되기까지 적어도 20여명이 넘는 ‘자료조사원’ 혹은 ‘저서협력자’들의 손길과 눈길이 필요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 실례를 들자면, «다빈치 코드»의 핵심 배경인 비밀조직 시옹 수도원에 관한 착상, 그리고 2천년 동안 조직을 극비리 유지해온 각 시대의 사제장 명단은 피에르 플랑타르(Pierre Plantard 1920-2000)의 아이디어인 것으로 밝혀졌다. 피에르 플랑타르는 역사 미스터리 소설가이자, 극단적인 극우파로 허풍과 거짓을 일삼는 과대망상주의자였다고 한다. 스스로가 “프랑스의 성인(聖人) 피에르” 라고 자칭했을 정도였다. 그는 레오나르 다빈치, 이삭 뉴튼, 빅토르 위고 등으로 이어지는 시옹 수도원의 사제장 명단에 자신의 이름도 기입하여, 1981년에서 1984년까지 조직의 우두머리를 맡은 것으로 기록해 놓았다. 이뿐만 아니라 이 명단을 서류목록 ‘4° lm 249' 번호로 프랑스 국립도서관 자료실에 은밀히 끼워 넣기까지 했으며, 문서위조로 기소되어 유죄를 선고받았다. «다빈치 코드»의 자료조사원들의 손길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깊숙이 보관된 문서함까지 핥고 지나갔음을 알 수 있는 실례이다.
게다가 댄 브라운이 참조한 책자들 중에는 영국작가 루이스 퍼듀가 1983년에 발표한 «다빈치 레거시»와 2000년 1월에 출판한 «신의 딸»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 작품과 «다빈치 코드»의 소재착상이 서로 유사한지라, 댄 브라운은 표절혐의로 2006년 3월 영국의 법정에 출두하는 곤혹까지 치러야했다. 댄 브라운은 예견대로 승소를 거두기는 했지만, 어쨌든 표절시비와 저작권 논란이 분분했을 만큼 그의 자료조사원들이 치밀한 조직력을 갖고 엄청난 분량의 문헌, 기록, 관련 책자들을 섭렵했음을 알 수 있다.
유명 작가의 ‘조수’, ‘하청인’, ‘저서협력자’ 혹은 ‘대리집필자’ 들을 두고 불어에서는 ‘네그르(Négre)’라 지칭한다. ‘네그르’ 즉 ‘니그로’라는 어휘는 흑인노예들의 억눌린 삶과 애환을 담은 영화《엉클 톰》이후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에서 익명의 문학 창조자를 두고 니그로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대중문학이 번성하던 19세기 무렵부터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알렉상드르 뒤마로 인하여 대중화된 어휘이다.
뒤마의 왕성한 창작력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나이데스의 물통’과 견주어 풍자한 목판 그림. 다나오스의 딸들이 뒤마의 잉크병을 가득 채우는 장면이다.
알렉상드르 뒤마는 1829년 희곡 «앙리 3세와 그의 궁정»을 발표하여 낭만주의 극작가로서 파리무대에 입성하는데 성공했다. 1840년대 이후부터는 낭만주의 극작가라는 닉네임을 떼어버리고, 신문 연재소설의 붐을 타고 흥미위주의 역사작품들을 다량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는 1844년 3월 11일부터 7월 11일에 걸쳐 일간지에 «삼총사»를 연재하여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이어서 «몽테크리스토 백작», «마르고 왕비», «20년 후의 삼총사», «붉은 집의 기사», «몽소로 부인» 등을 2년에 걸쳐 집중적으로 발표했다.
뒤마가 극작가에서 역사소설가로 전환하였던 것은 변화하는 시대적 요구에 대한 부흥이기도 했다. 프랑스는 1830년대에 들어 신문과 잡지가 대중의 총아로 떠올랐다. 신문사마다 발행 부수를 늘이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펼쳤으며, 독자 확보를 위한 묘책으로 “다음 호에서 계속...” 이라는 문구로 흥미위주의 소설들을 앞다투어 연재하기 시작했다. 바로 문학이 대량생산과 상업성에 타협하기 시작한 무렵이다.
신문 구독자들은 연재소설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문학창조에 뜨거운 반응을 보였으며, 신문사나 잡지사 측의 기고의뢰도 인기작가들에게 쇄도했다. 가장 인기를 모았던 소설가는 바로 알렉상드르 뒤마였다.
뒤마가 거두었던 놀라운 ‘성공’ 앞에서 세간의 질투와 시기가 뒤따랐던 것은 물론이다. 뒤마와 발자크와의 관계도 순탄하지 못했다. 한 신문사가 뒤마의 소설을 선호한 나머지 발자크의 작품을 거부하고 나섰다. 발자크가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화를 발끈 내며 소리질렀다.
“흠, 감히 나와 니그로를 비교하고 나서다니!”
발자크가 뒤마를 두고 ‘니그로’ 라고 불렀던 데는 물론 그 이유가 있다. 뒤마는 흑인노예의 피를 물려받은 흑백 혼혈아이다. 뒤마의 친할아버지는 식민지령 생-도미니크의 포병 대장이었던 전통적인 노르망디 귀족 드라파이으트리 후작이지만, 친할머니가 흑인노예 출신이었다. 뒤마는 가무잡잡한 피부색깔 때문에 문인들 사이에서도 인종차별적 무시를 감내해야 했는데,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자 그만큼 질투와 시기도 뒤따랐던 것은 물론이다. 뒤마의 작품협력자 혹은 대필 작가들을 두고 ‘니그로’라 불렀던 것도 그의 피부색깔에서 연유된 것이며, 야유와 빈정거림이 가미된 어조임을 알 수 있다.
뒤마의 생존시에도 니그로의 존재여부에 대한 논란과 시비는 끊어지지 않았다. 뒤마와 니그로에 관해 내려오는 풍자적인 일화가 있다.
뒤마는 어느 때처럼 조반을 들며 조간신문을 펼쳐들었다. 그는 무심코 신문을 뒤적거리다 귀퉁이에 실린 한 단신을 발견하게 된다. 전날 한 사내가 마차에 치어죽었다는 한 단 짜리 기사였으나, 그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하얗게 질리는 것이었다. 마차에 치어죽은 장본인은 다름 아닌 그의 니그로... 뒤마는 연재소설 작가로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고있던 터라 여러 신문사나 잡지사에서 기고 의뢰가 쇄도하였고, 니그로를 고용하여 한 일간지의 연재소설을 떠맡겼던 터였다. 그런데 문제의 니그로가 마차에 치어죽지 않았는가. 그가 맡고있던 연재소설이 펑크날 것은 분명했다. 뒤마는 잠옷바람임에도 불구하고 쏜살같이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가 숨을 헐떡거리며 멈춘 곳은 노점가판대. 그는 한 조간신문을 펼쳐들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알렉상드르 뒤마’로 서명된 연재물을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뒤마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니그로가 죽은지 보름이 훌쩍 지났는데도 문제의 조간에 소설이 계속 연재되고 있던 것이다. 뒤마는 속으로 냉가슴을 앓을 수밖에 없었다.
‘죽은 자가 어떻게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뒤마는 이렇게 자문을 하다 마침내 무릎을 탁 치고 말았다. 마차에 치어죽은 니그로에게도 고용된 다른 ‘니그로’가 있었던 것이다 !
뒤마가 니그로의 존재여부로 인하여 휩쓸렸던 대표적인 스캔들을 들라하면 위제느 드 미르쿠르와의 소송분쟁을 꼽는다. 1845년 2월 20일 위제느 드 미르쿠르는 «소설생산 공장 : 알렉상드르 뒤마 상사(商社)와 고용인들»이라는 제목으로 소책자를 발행하여 다음과 같이 비난했다 :
뒤마는 두뇌를 팔아먹는 글쟁이들과 월급쟁이 작가들을 고용하고 있다. 이들 고용인들은 혼혈아의 채찍 하에 혹사를 당하는 ‘흑인노예(NEGRE)’나 다름없는 신세이다.
위제느 드 미르크루의 글로 인하여 당시 문단과 파리장안이 벌을 쑤셔놓은 듯 발칵 뒤집혔던 것은 물론이다. 뒤마와 미르쿠르의 분쟁은 법정소송으로 이어졌다. 당시 뒤마는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문단에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터였다. 소송이 벌어지자 문단도 뒤마의 편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문인들은
위제느 드 미르쿠르 소책자 «소설생산 공장 : 알렉상드르 뒤마 상사(商社)와 고용인들»은 소송 이후 어느 서점가나 경매장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희귀한 책자가 되었다. 현재 수집가들이 가장 탐내는 ‘명품’ 중에 하나라고 한다.
소송결과는 뻔했다. 위제느 드 미르크루는 14일간의 감옥형을 선고받았다. 이뿐만 아니라 신문과 잡지에도 개인 의견을 발표하지 못하도록 금지령이 떨어졌다. 문제의 소책자들도 압수되어 처분되었다.
이 소송을 계기로 ‘니그로’라는 어휘는 유명작가의 그늘에서 자료수집이나 대필을 맡은 익명의 작가를 지칭하는 야유적인 속어로 굳어지고 말았다.
뒤마는 생존시에 니그로 문제로 곱지 않은 눈길을 받았으며, 그 역시 니그로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나폴레옹, 말피의, 보카쥬, 모리스, 박크리 등이 뒤마의 니그로로 알려져 있다. 특히 서정시인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던 제랄드 드 네르발(1805-1855년)도 무명시절에 뒤마의 니그로였던 것으로 밝혀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여기에서 잠시 1980년대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현대판 알렉상드르 뒤마”라고 칭송 받기까지 했던 폴-루 쉴리제르의 경우를 살펴보고 넘어가기로 하자. 쉴리제르는 니그로 덕분에 유명 소설가가 되었으며, 텔레비전, 라디오, 잡지 등 미디어의 광고를 통한 전격적인 마케팅으로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석에 오른 케이스로 꼽힌다. 그는 1980년대 말경 일명 “쉴리제르 사건”이라 불리는, 대필 작가 고용여부로 스캔들에 휘말려 들었던 장본인이다.
쉴리제르는 1946년 생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 이전 부호실업가이다. 1964년에 프랑스에서 가장 젊은 CEO가 되었으며, 1985년부터 국제컨설팅 고문이라는 직함도 떠맡았다. 스타급 실업가였던 쉴리제르가 베스트셀러 작가로 둔갑을 한 것은 1979년, 한 출판사 사장이 금융, 재정, 비즈니스 세계를 서부극 스타일로 다룬 소설을 써달라고 제의하면서부터이다. 이어서 대필작가 채용여부도 거론되었다. 쉴리제르의 대필 작가로 기자이며 작가로 활동하던 무명의 루 뒤랑이 결정되었다. 쉴리제르 본인이 직접 경험한 금전 세계를 바탕으로 아이디어와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면, 루 뒤랑이 대리 집필하는 작업을 떠맡았다.
이렇게 해서 1980년 웨스턴 스타일로 금전 세상을 다룬 소설 «돈»이 출판되었다. 이어서 치밀한 마케팅 작전이 뒤를 이었고 이내 미디어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돈»의 주인공은 프란츠 셍발리, 그는 "현대판 몽테크리스토 혹은 그의 쌍둥이 형제”라고 지칭되기까지 했다. 당시의 문화부 장관이 쉴리제르를 두고 “현대판 알렉상드르 뒤마”라고 칭송했을 정도였다.
쉴리제르는 1981년 «현금», 1982년에는 «부자», 1983년 «녹색의 황자», 1987년 «바쁜 여자»를 발표하여 거듭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되었다. 그의 소설들이 42개 외국어로 번역되는가 하면, 영화 각색으로 한 편 당 250만 프랑의 수익금을 거두기까지 했다.
쉴리제르의 인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알렉상드르 뒤마처럼 사생활을 꾸려 나가는 스타일에서도 야심과 호화로움, 명성을 추구했던지라, 엘리자베스 테일러, 해리슨 포드 등 국제급 스타들은 물론이고, 지스카르 전대통령, 알렝 들롱, 미레이 마튀유 등 국내 유명인사들과 나란히 찍은 사진들이 미디어를 통해 자주 공개되곤 했다. 그의 세 번째 결혼식에는 당시 파리 시장으로 재직하던 자크 시라크 전대통령이 주례를 맡았으며, 결혼증인으로 국민가수 넘버원으로 간주되는 조니 할리데이가 참석했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플레이보이를 방불케 하는 외모를 이용하여 자사 TV광고는 물론 저서 광고에도 직접 출연하여 인기를 모았다.
쉴리제르는 작가활동뿐만 아니라 미심쩍은 사업까지 개입되어 법정소송은 물론 굵직한 스캔들의 중심에 놓이기 일쑤였다. 가령 미테랑 전대통령의 아들이 연루된 불법 비밀무기거래 사건에 깊이 관여되는가하면, 거듭되는 전처와의 위자료 소송사건, 근래에는 20대 젊은 폴란드 여성과의 동거 등으로 연신 연예잡지나 TV 연예프로의 가십거리에 오르는 미디어의 ‘인기 people’이 되었다.
쉴리제르의 소설들이 뉴욕 서점가의 진열장을 차지했을 때였다. 뉴욕타임스는 수 차례에 걸쳐 인기 작가에 관한 기사로 지면을 할애했다. 달러로 가득 채운 휘황찬란한 개인 수영장을 배경으로 한 손에는 코냑 잔을, 다른 손에는 고급 시가를 든 화려한 연미복 차림의 백만장자의 사진도 함께 곁들여졌다. 입심 좋은 쉴리제르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프루스트가 아니다. 시가를 피우는 건달에 불과할 뿐이다” 라고 능청스럽게 겸손을 떨기도 했다. 프랑스 문단을 겨냥한 빈정거림이었다. 그가 비록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지만, 일부 문인들은 그를 “강도처럼 문단에 침입한 자”로 취급했던 것이다.
1987년 무렵부터 쉴리제르의 뒤에 니그로가 있으며, 문제의 대필작가는 루 뒤랑 이라는 소문이 암암리에 나돌았다. 당시 TV 문학프로그램 ‘아포스트로프’의 진행을 맡았던 베르나르 피보가 루 뒤랑을 특별 출연자로 초대했고, 방송이 거의 끝나갈 무렵 그에게 “쉴리제르의 니그로”이냐고 노골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이때 당황한 루 뒤랑은 ‘no’나 ‘yes’라는 대답으로 명백한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일명 “쉴레제르 사건”으로 불리는 장면이다.
훗날 베르나르 피보는 “쉴리제르의 뒤에 니그로가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던지라 진상을 파헤치고 싶었다. «돈»과 «현금»의 저자가 작가로 평가받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은, 그가 설령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해도 작품을 직접 집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한 인터뷰를 통해 해명했다.
이에 맞서 입심 좋은 쉴리제르는 ‘마취 지(紙)’에 “나는 단 한 명의 니그로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100여명도 넘는다” 라고 맞섰다. 그는 37명에 해당되는 ‘자료 수집가’들의 명단을 밝혔으나, 이들 중에 루 뒤랑의 이름은 빠져있었다. 루 뒤랑은 쉴리제르의 니그로였다는 소문을 공식적으로 부인하지도, 시인하지도 않은 채 1995년 사망했다.
뒤마로 말할 것 같으면, 극작가에서 역사 소설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역사 지식을 충분히 갖춘 재능 있는 니그로가 필요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였는지도 모른다. 뒤마의 니그로들 중에서 오귀스트 마께가 가장 유명한데, 이들의 운명적인 만남은 1838년 11월에 이루어진다. 뒤마의 소설작품들이 프랑스 역사에 기반을 두었던 점을 볼 때 이들의 만남은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 당시 뒤마는 유명한 중진작가였으며, 젊은 오귀스트 마께는 샤를르만느 고등학교의 역사선생이었다. 두 사람의 공동작업은 1839년 초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때부터 그들은 스페인과 영국 등을 함께 여행하면서 작업구상에 들어갔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으로 말할 것 같으면, 뒤마가 이태리 여행을 하던 중에 착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40년 뒤마는 이다 페리에와 이태리 플로렌스로 신혼여행을 떠나, 제롬 보나파르 왕자의 궁정에서 1년을 체류했다. 이 기간 중에 뒤마는 왕자와 엘브 섬으로 유람여행을 떠났다. 엘브 섬을 향하던 배속에서 왕자가 몽테크리스토 섬을 손가락을 가리켜보였고, 섬의 아름다운 전경에 도취된 뒤마가 소리쳤다.
“당신과의 추억을 기리는 의미에서 다음 소설의 제목은 ‘몽테크리스토’가 될 것이오.”
바로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잉태된 시점이다. 훗날 뒤마는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서문을 통해 이렇게 밝혔다 :
이렇게 해서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집필이 시작되었다. 엘브 섬을 여행하던 도중 소설제목이 머릿속으로 떠올랐고 점차적으로 줄거리도 구상되었다. 작품은 마께와 공동으로 집필했다.
오귀스트 마께(1813-1886년)
뒤마는 연재소설의 붐을 타고 역사소설가 되었으며, 신문연재라는 새로운 문학양식은 작품을 창작하는 방법에도 변화를 초래했다. 저자들은 작품이 아닌 원고분량으로 지급 받았으며, 매일 일정한 분량의 글을 독자들에게 제공해야 했다. 해당된 원고분량에 맞추어 글을 쓰자니 문체를 형식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문체에도 변화가 뒤따랐다. 서술체보다는 대화체가 연재소설 형식에 더 적합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에도 결함이 뒤따랐다.
뒤마의 소설들은 오랫동안 문학성이 떨어진 흥미위주의 통속물로 치부되었다. 역사적인 사건에서 적당히 줄거리들을 끌어내어 흥미위주로 각색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소설들이 전반적으로 얕은 역사적 지식을 근거로 집필되었고 내용도 부정확하다는 평을 받았는데, 뒤마 본인도 이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뒤마가 역사 소설가로서 최고의 인기를 모았던 데에는 물론 그 이유가 있었다. 뒤마가 탄생시킨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초인간적인 능력을 지니며, 동시에 선과 악에 대처할 막강한 힘을 지닌 인간유형이었다. 바로 독자들이 기대했던 새로운 유형의 희로인 이었던 것이다. 온갖 위험에도 무릅쓰고 용기와 용맹을 펼치는 초인간적인 영웅의 모습에 카멜레온 적인 인간모습이 첨가되는데, 바로 뒤마의 주인공들이 지니는 매력이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를 보자면, 주인공 에드몽 당테스는 프로메테우스 신의 모습과 아라비안 나이트의 심바드를 동시에 떠오르게 한다. 그는 독자를 대신하여 초인간적 용기를 구현해 보인다. 특히 에드몽 당테스가 이프 성을 탈출하는 장면은 오늘날의 독자들에게도 카타르시스를 선사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1844년 8월 28일부터 1844년 11월 26일, 이어서 1845년 6월 20일에서 1846년 1월 15일에 걸쳐 ‘토론신문’이라는 유명 일간지에 연재되었다. 다른 문학지에서 평론을 맡던 작가 메리메는 1944년 9월 29일자 글에서 이렇게 서술했다.
몽테크리스토가 포대자루에서 빠져 나와 무사히 탈출에 성공했다니, 그 얼마나 우리의 가슴을 후련케 하는 이야기인가! 토론신문은 아침조반에 식욕을 돋우는 소식을 전해주고 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당시 풍미하던 낭만주의 사조와 깊은 호흡을 맞추고 있다. 주인공 에드몽 당테스는 18살의 낭만적인 젊은이이자 정직한 선원이다. 그는 아름다운 메르세데스와 결혼식을 올릴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며, 선장으로 승진을 앞둔 미래가 촉망된 청년이다. 그러나 에드몽 당테스가 만끽하는 삶의 기쁨과 환희는 곧 잔인한 운명에 의하여 꺾여지고 만다.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성채감옥 ‘이프(If)에 유폐되는데... 그가 손꼽아 기다려왔던 결혼식 날에 벌어지는 비극이다. 그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다. 젊은 영혼이 인간 세상에 범람하는 질투와 시기, 음모에 잔인하게 짓밟히고 만 것이다. 삶 자체가 에드몽 당테스를 배신한 셈이다.
에드몽 당테스는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이프 섬에 갇히는 순간 죽음을 맞이한 것이나 다름없다. 18살의 나이로 삶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이다. 바로 독자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드는 점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神은 정녕 죽었다고 인정할 것인가? 신이 살아있다면, 결백하고 젊은 영혼을 이프 섬이라는 무시무시한 성채감옥에 내동댕이칠 것인가? 바로 에드몽 당테스가 부르짖는 절규이다.
다음은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 에드몽 당테스와 파리아 신부가 땅굴 속의 구멍을 통해 처음으로 비밀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
- 당신 나이는 몇이오? 목소리를 듣자하니 젊은이 같구려.
- 내가 몇 살인지 나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 투옥된 이래 얼마큼 세월이 흘렀는지 세지 못했습니다. 내가 알고있는 사실이 있다면, 1815년 2월 18일 체포되었고 머지 않아 19살이 되려던 참이었습니다.
다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그렇다면 아직 26살이 안되었군. 그렇군, 모반자가 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어.
- 오! 나는 결백합니다! 다시 반복하거니와, 나는 결백합니다! (...)
- 자네가 나에게 말을 잘 걸어왔네. 정말 잘한 일일세. 자네로부터 멀어지려고 땅굴의 방향을 바꾸려던 참이었어. 자네의 나이가 나를 안심시켜놓았네. 내가 자네 쪽으로 가겠네. 기다려 주게나.
파리아 신부는 얼굴을 모르는 죄수의 나이를 알게되자 품었던 경계심을 푼다. 그는 젊은 죄수를 만나러 땅굴을 계속해서 파헤쳐 가고, 결국 두 사람은 탈출계획을 도모하기에 이르는데... 이로부터 7년 후 에드몽 당테스는 이프 섬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그는 파리아 신부가 알려준 지중해에 떠있는 몽테크리스토 섬을 찾아가 무인도에 감추어진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 등 보석을 찾아낸다. 이어서 에드몽 당테스는 몽테크리스토 백작으로 변신하는데...
몽테크리스토 이야기는 프랑스는 물론 유럽전역에 걸쳐 독자들을 열광케 했으며, 성 마른 독자들은 줄거리를 미리 앞당겨 알고싶었던지라 신문사 측이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독자들은 아침이면 «몽테크리스토 백작»를 읽으려고 성급히 잠자리에서 일어나 조간을 펼쳐들었다. 당시 영국 수상 솔즈버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국 드갈 황태자가 영국수상에게 전했다는 농담은 유명하다.
“몽테크리스토가 솔즈버리 경을 새벽 4시 30분에 침대 밖으로 끌어냈군요. 그런데 몽테크리스토가 나를 잠자리 밖으로 끌어낸 시각은 4시였다오!”
독자들은 뒤마가 제공하는 상상력 세계로 아무런 어려움 없이 빠져들었는데, 바로 가공의 세상으로 진입하는 코드를 쉽사리 얻어낼 수 있던 때문이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은 돈과 권력을 손에 거머쥔 전지전능한 신(神)이자 동시에 악마의 모습을 지닌다. 그의 복수는 금전의 힘을 빌려 펼쳐지며, 독자들도 금전과 권력이 부합된 사회에 이미 젖어있었던 것이다. 금전 자체가 왕이 부럽지 않는 권력을 낳는데, 이러한 연결고리를 뒤마의 독자들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
«삼총사»는 뒤마가 1843년 마르세이유 도서관에서 «달타냥의 회고록»을 읽고 착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뒤마의 첫 역사소설 «삼총사»도 오귀스트 마께의 아이디어가 제공되었을 가능성이 배제되지 않는다.
오늘날 프랑스에서 발표되는 시나리오, 희곡을 포함한 도서 작품의 20% 가량은 니그로에 의해 집필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57년에는 작품에 서명한 저자만이 저작권을 주장할 수 있도록 입법화했다. 작가와 니그로 사이에 저작권 문제가 발생했을 때, 두 당사자간에 사적으로 타협을 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뒤마의 생존시에도 니그로들과의 사이에 저작권 혹은 저작료를 둘러싼 잡음은 제법 많았다. 특히 1857년 뒤마와 오귀스트 마께 사이의 저작료 분쟁은 유명한 실례로 기록되어 있다. 오귀스트 마께는 1845년 위제느 드 미르크루와의 법정소송에서 증인으로 출두하여 뒤마의 입장을 변호했고, 따라서 뒤마는 승소를 거두었던 터였다. 결국 12년 후 뒤마는 수석 니그로 오귀스트 마께와 저작료 소송에 휘말리고 만다.
이 무렵 뒤마는 최악의 경제파탄을 맞이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엉뚱하게 ‘세기의 이혼소송’에도 휘말려들었는데, 부인 이다 페리에가 위자료 ‘147만 608프랑과 74상팀’ 이라는 환상적인 금액을 청구하고 나섰던 것이다. 결혼계약서에 명시된 결혼지참금 120만 프랑에 이자까지 곁들여 계산된 금액이었다. 결혼 당시, 이다 페리에는 경제능력이 없던 가난한 삼류 연극배우에 불과했었다. 뒤마는 햇병아리 연극배우와 결혼을 하면서 주변 사회명사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고 싶었던지라, 신부가 결혼지참금으로 120만 프랑을 지불했노라고 혼인계약서에 허위로 첨가시켰던 터였다. 그런데 부인이 이혼을 요구하면서 혼인계약서에 명시된 결혼지참금을 반환하라고 나섰던 것이다.
베스트셀러 작가는 이혼소송에서 패소되자 빚더미 위에 올려 앉았고, ‘수석 니그로’ 오귀스트 마께에게 당시 10만 프랑으로 추정되는 월급을 제대로 지불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그러자 오귀스트 마께는 법정소송을 걸었고 뒤마가 패소했다. 이 소송을 계기로 그들의 관계는 결렬되고 말았다.
오귀스트 마께는 뒤마와 결렬한 이후, 그 역시 다른 니그로를 고용하거나 혹은 단독으로 소설을 집필하여 대량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1980년대의 베스트셀러 작가 폴-루 쉴리제르의 대필 작가로 알려진 루 뒤랑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쉴레제르 사건” 이후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루 뒤랑의 작품들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오귀스트 마께의 경우도 1886년 사망할 때까지 성채를 소유했을 정도로 억만장자가 되었으나, 어디까지나 뒤마의 니그로로서 벌어들인 금전 덕택이었다. 오늘날 그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은 뒤마의 ‘수석 니그로’였기 때문이며, 소설가로서 그의 이름은 불문학사에서 완전히 지워진 상태이다.
여기에서 뒤마만이 지녔던 재능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오귀스트 마께가 소설의 줄거리를 구상하고 자료를 수집했다해도,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여야 보배’라는 속담이 있듯 결국 최종 집필은 뒤마의 몫이었던 것이다. 뒤마는 집필에 전념할 때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바지차림에 발꿈치까지 소매를 걷어올린 와이셔츠 차림이었으며, 아침 7시부터 내리 12시간을 커다란 하얀 목재 책상에서 떠나지 않고 글을 썼다.
뒤마가 «20년 후의 삼총사»를 집필하고 있던 어느 날이다. «춘희»의 저자로 유명한 ‘아들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 fils, 1824-1895년)가 아버지가 울고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러자 뒤마가 아들 앞에서 어린애처럼 울먹거리며 하소연했다.
“포르토스가 죽었구나.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를 희생시켜야만 했어!”
뒤마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작품을 집필했는지 그 단면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그는 소설을 집필하면서 쓰고 있는 부분이 슬프면 엉엉 소리내어 울었고, 재미있으면 큰 소리로 껄껄거리며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등장인물들의 영혼과 육체 속으로 파고 들어가 동고동락하며 흥분과 정열을 함께 나누었다고 할까. 뒤마의 작품들이 독자들을 깊이 흡인했던 묘법이 바로 여기에 있다. 작가 자신이 글을 쓰면서 등장인물들과 함께 웃고, 함께 슬퍼했던 것이다.
알렉상드르 뒤마가 “세기의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삶이 부여하는 모든 화려한 색깔들을 체험했다고 하지만 이루지 못한 꿈이 하나 있었다. 문인으로서 최고의 명예인 프랑스 아카데미회원으로 선출되는 것이었다. 뒤마가 임종을 거두기전 아들에게 토해냈다는 마지막 질문은, “빅토르 위고처럼 후세로부터 대 문호로 인정받게 될 것인가?” 였다고 한다.
이로부터 한 세기가 훌쩍 지난 후에야 후세들이 ‘에스’라고 대답하게 된다. 2002년 11월 30일 ‘빅토르 위고와 알렉상드르 뒤마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뒤마의 유골이 팡테옹에 안치된 것이다. 거장(巨匠)들의 영원한 안식처인 팡테옹 입성은 곧 볼테르,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의 대열에 합류한 것이며, 작가로서 최고의 명예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다. 뒤마의 작품들이 담고있는 풍부한 상상력과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독자들을 여전히 매혹하고 있는 까닭이다.